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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로해체작업은 이틀만에 끝났다. 예상외로 이처럼 빨리 끝나게 된데는 지배인의 작용이 큰 은을 냈다. 지배인자신이 직접 먼지를 들쓰며 해체작업을 함으로써 발생로는 무시할수 없는 공장의 관심사로 되였다. 종업원들중 젊은 축들은 발생로 현장에 찾아와 이것저것 물어보기까지 했다. 전력을 유일한 동력으로 하여 생산체계가 이루어진 비료공장이여서 무연탄가스로 비료를 생산할수 있다는 희한하고 생소한 말에 호기심과 관심이 날을 따라 늘어났다.

력사도 있고 다양한 화학제품이 생산되는 큰 공장이여서 한대식외에 과학원이나 련관부문에서 연구사들이 수십명 내려와있으나 요즘 가스화에 대한 화제처럼 인기를 끌며 떠들어본적이 없었다. 그 화제거리는 후방부와 자재부에서도 오고갔는데 그런 연구사가 공장에 있었던가 하고 고개들을 기웃거렸다. 공장안의 크고작은 일에 제일 민감하다는 그들이지만 비료와 계통이 전혀 다른 연료연구사라 해서 손님에 손님취급을 해왔으므로 기억에 있을리 없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신세도 지지 않고 흥미있는 화제거리를 만들어낸 그 연구사의 얼굴이라도 한번 봤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러나 당자인 한대식은 주위에서 어떤 화제와 관심이 있는지 몰랐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다만 로해체작업이 예상외로 빨리 끝난것이 다행이였고 지배인의 소행을 고맙게 여겼을뿐이다.

그는 사실 다른데 신경쓸 여유가 없었다. 로해체작업이 끝나는 즉시 로실안에 있던 몇t이 넘는 주원료들을 구체적으로 분석했고 로본체설비 즉 내화제며 그를 둘러싼 원통형의 강철판의 두께, 작업구와 송입변, 배출관 등 모든 요소들을 재확인해보았다. 이 과정에 로실내 정상적인 반응에 영향을 줄수 있는 몇가지 요점을 손에 쥘수 있었는데 혼합공기의 조성비률과 송풍기로 쏴줄 때의 압력차가 실패의 기본원인이였다는것을 끝내 밝혀내고야말았다.

한대식은 실패의 요인을 찾는데만 그치지 않았다. 각이한 조건에서의 기대운전과 매 반응단계에 따르는 조작을 수십번 반복확인함으로써 가장 정확한 수치를 잡았고 이와 함께 매개 운전공, 조작공들이 해야 할 기술적임무를 하나하나 규정해나갔다. 이것은 사실 세상에 처음으로 그 이름을 가지고 나오는 무연탄발생로의 로운전과 그를 생산에 도입하는데서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로해체작업이 끝난 저녁때였다. 한대식은 작업반장 오일규에게 말하여 간접부분 성원들은 일찍 퇴근시키고 로운전작업조만 따로 모이게 했다. 2차화입을 래일 하기로 된 상황에서 간단히 협의회를 하고싶었다. 로운전작업조 성원들이래야 석근수와 재배출공 남수, 분석공 차금희와 조작공처녀 두명이 더 있을뿐이다. 그들이 퇴근차림으로 휴계실에 모이자 한대식이 앞에 나섰다.

《동무들, 제가 일을 쓰게 못해 며칠간 고생만 시켰습니다.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

《연구사선생, 새삼스레 무슨 그런 말하나. 수고하구 맘 고생한거야 선생이 몇배나 더하지. 그런 계산은 하지 말구 래일 할 일이나 토론해봅세.》

석근수가 웃음띤 말로 한마디 하자 오일규와 라석호도 그게 좋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바이, 그런게 아닙니다. 똑똑한 연구사라면 응당 중간시험로 운전단계에서 있을수 있는 모든 요소에 대한 기술적테타를 정확히 쥐고 화입해야 되겠으나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애먹던 시험로가 세워졌다는데로부터 조급증에 사로잡혔습니다. 때문에 매 운전공, 조작공들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한다는 정확한 임무를 가르켜주지 못했습니다. 이번 실패의 원인을 밝히는 과정에 이 치명적인 약점을 더 절실히 느꼈습니다.》

자신에 대한 요구성이 이를데 없이 높고 깨끗한 그가 더없이 미더웠다. 된타격에 주접이 든것이 아니라 맑고 빠른 계곡의 물에 한번 더 다듬어진 자갈돌처럼 된것이다.

한대식의 심각한 자기 반성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석근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 자신을 그렇게까지 괴롭힐 필요는 없습니다. 여기에는 선생님의 잘못이 없습니다. 왜 중간시험로라고 하겠습니까. 무연탄발생로는 그 어느 나라에서도 해본 경험이 없고 그렇기때문에 로의 운전과 조작에 대한 자료도 없습니다. 초행길이나 같지요. 대체로 예견은 할수 있겠으나 정확한 로운전방법은 시험과정을 통해서 련마되고 확정될것입니다. 우리는 첫 시험을 했을뿐입니다.》

《공정기사가 옳게 말했소. 그래서 시험로지. 래일 아침엔 계획대로 2차화입을 해야겠는데 그거나 론해봅시다. 연구사선생, 그렇게 서있지 말구 여기 앉아 한대씩 태우면서 의논하자구.》

기분이 한결 즐거워진 석근수가 맞장단을 쳤다. 한대식은 뜨거운 눈길로 석근수며 운전공들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누군가 어서 앉으라고 잡아끄는바람에 자리에 앉았다. 석근수가 개가죽담배쌈지를 꺼내 그의 앞에 펼쳐놓았다.

《자, 한대 말아보슈. 보기와는 별미라오.》

《그럼 제가 외상으로 한대 피우겠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가정적분위기에 휩싸인 한대식은 속이 훈훈해져 없는 말주변을 피워가며 써래기담배를 집어들었다. 그런데 언제한번 잎담배를 말아본적 없는 그라 손만 주무럭거릴뿐 도무지 가치모양새가 안되였다. 잔뜩 호기심을 띠고 한대식의 손만 지켜보던 처녀들속에서 키득키득 소리가 나더니 끝내 까르르 하고 웃음이 쏟아졌다. 빙긋이 따라웃던 석근수가 담배쌈지를 끌어가더니 어느결에 권연못지 않은 마라초를 그의 앞에 내밀었다. 처녀들이 자꾸만 웃자 한대식이도 벌겋게 된 얼굴에 어줍은 미소를 그렸다.

《이젠 그만들 웃어라. 무슨 일이든 처음엔 다 서툰 법이다. 너희들두 발생로를 처음 봤을 땐 장님 코끼리 만져보듯 하지 않았니. 나를 포함해서 여기 모인 성원들이 아직두 발생로앞에선 생면부지야. 그러니 하나를 해두 정신들을 버쩍 차려야겠소. 연구사선생, 이제는 래일 화입과 관련해서 몇마디 하슈.》

한대식은 석근수가 내미는 담배불에 불을 붙여 깊숙이 빨았다. 의미심장한 석근수의 말이 구수한 담배연기처럼 페장깊이 스며드는것 같았다. 이제 자기가 무슨 말을 더 하랴. 이들에게 1차화입때 나타난 실패의 원인을 밝혀주고 2차화입에서 매 운전공들이 지켜야 할 주의사항과 임무를 말해주려 했지만 그럴 필요가 없게 되였다. 그는 여느때 같으면 두모금도 넘기지 못할 독한 잎담배를 연거퍼 빨아들인 후 2차화입에선 실패하는 일이 없도록 책임성을 더욱 높이겠다는 자기 결의로 모임을 끝냈다.

협의회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다가 끝났으나 누구 하나 다르게 생각지 않았고 모두가 만족한 기분들이다.

《이런 땐 쓴 담배보다 시원한게 제격인데, 그렇지 남수?》

코밑에 솜털이 보르르한 한 청년이 자기들만 멋없이 앉아있다는듯 눈을 질끈 감아보인다.

《두말할게 있나. 말하자면 공격전투를 앞둔 병사들이 아닌가?》

석근수의 힐책에 잠시 웃음을 삼키고있던 처녀들이 기회가 생겼다는듯 입들을 놀리기 시작했다.

《정말 엉큼하구나. 뭐 공격전을 앞둔 병사? 저들이 무슨 병사람… 호호…》

《늘 기회가 없어 못마시는걸뭐.》

찧고까부는 처녀들을 잔뜩 쏘아보던 남수가 《공정기사형님, 내 말이 맞지 않습니까. 우리가 공격전을 앞둔 병사와 같다는 말이?》하고 라석호의 무릎을 잡아흔들었다.

《틀리지는 않는 말이야.》

《들었지? 동무들은 언제 가야 2차적인 사고를 하겠소. 그저 호호. 깔깔… 참새처럼 그래가지구 언제 코끼리앞에 선 장님신셀 면하겠소?》

《뭐라구요?》

《아이 억울해.》

그처럼 입 잘 돌아가던 처녀들도 억이 막힌지 낯이 발갛게 되여 두눈만 할기죽거렸다.

폭소가 터졌다.

오일규가 쩔쩔매는 처녀들한테 눈을 끔쩍해보이며 한마디했다.

《남수의 말도 비슷하지만 처녀들의 충고도 들어둬야 돼.》

《반장동지 말은 아무때 들어두 까릿까릿해서 통역없인 모르겠어요. 여! 맨숭맨숭 앉아있지 말구 우린 가자.》

시뿟해진 남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마침 저쪽에서 리숙이와 두 녀인이 무엇인가 이고 들고 오는것이 보였다.

《그러면 그렇겠지.》

무릎을 철썩 때린 남수는 어깨춤을 추면서 마주 달려갔다. 눈치빠른 처녀들이 냉큼 일어나 뒤따라갔다.

《수고들 하세요. 그런데 작업이 벌써 끝난게 아닙니까?》

머리에 이고 온 늄통을 땅에 내려놓은 리숙이가 발생로쪽을 바라보며 오일규에게 물었다.

흘러내린 귀밑머리를 쓸어올리는 그의 반듯한 이마와 상큼한 목으로 가는 땀줄기가 흘렀다.

《예, 예상외로 빨리 끝나서 보조부문 성원들은 먼저 퇴근시켰습니다.》

《그래요?!…》

리숙이 몹시 아수해했다.

《그런데 뭘 이렇게?…》

《오늘이 마감작업날 같다고 하기에… 뭐 변변찮지만, 어서들 이쪽에 둘러앉으세요.》

리숙이 밝게 웃으며 의아해서 쳐다보는 사람들을 곁으로 불렀다. 같이 온 외래자합숙 두 녀인과 처녀들이 리숙의 손을 거들어 음식들을 차려놓기 시작했다.

《지배인동지가 이렇게 내보냅디까?》

맥주잔을 받아든 오일규가 리숙에게 슬며시 물었다. 리숙은 그저 눈웃음을 지어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반장은 별걸 다 따져묻누만. 누가 보냈든 성의로 알면 되는거지. 자, 시원하게 어서들 듭시다.》

석근수가 큰소리로 말하며 먼저 맥주잔을 기울이자 군침을 넘기고있던 젊은 축들도 몸을 약간 돌리고 단숨에 쭉 들이켰다.

《이건 붕어회가 아닌가?》

접시에 담아놓은 안주에 먼저 저가락을 가져가던 석근수가 가벼운 탄성을 올렸다.

《아바이두 참. 지금이 어느때라구 그런 소릴 합니까?》

오일규가 어처구니 없다는듯 얼른 안주 한점을 맛보았다. 삼삼하면서도 고소한 맛이 혀끝에 감쳐드는 발그스레한 색갈의 회는 분명 붕어회였다.

《이거 정말 희한한데요. 봄철 붕어회라? 맥주안주감으론 아깝군.》

《아까우면 반장은 구경만 하게나.》

한대식은 그들이 주고받는 말이 재미나서 빙긋이 웃으며 맥주를 조금씩 마셨다. 한쪽에 따로 모여앉은 처녀들은 더운 김이 뭉실뭉실 피는 붕어생선국을 홀홀 불어대며 맛있게 먹고있었다. 차금희만 먹을념을 안하고 초리 긴 속눈섭을 내리깐채 무슨 생각에 잠겨있었다.

《금희동문 생선국이 입에 맞지 않나?》

리숙이가 금희의 곁으로 다가앉으며 나직이 물었다.

《아주머니, 이 생선국이 그때 그 붕어죠?》

《옳아, 그때 수고가 이렇게 빛을 낼줄은 나두 생각 못했댔어요. 후에 외삼촌을 만나면 고맙다는 인사를 전해줘요.》

그 말에 금희는 낯이 빨개지며 얼른 고개를 숙여버렸다.

일은 이렇게 되였다. 그날저녁, 밤늦게 들어온 지배인이 퇴지우에 놓인 물통의 붕어를 보더니 웬건가고 물었다. 리숙이 붕어가 생기게 된 경유를 말했더니 《자재과장이 별스레 극성이군.》하고 중얼거리더니 한마리도 다치지 말고 공장합숙에 내가라고 일렀다. 리숙은 지배인의 그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좋을지 몰라 하루이틀 미루어오다가 문득 발생로해체작업장이 떠올랐다. 거기 가져가는것이 제일 좋을것 같았다. 지배인이 지금 중시하는것도 발생로며 2차화입을 빨리 하기 위해 한대식연구사와 작업반성원들이 철야작업을 하는 곳도 발생로현장이였다. 이렇게 생각한 리숙은 그전에 함께 일하던 외래자합숙 취사원들을 부추겨 맥주며 기름에 튀긴 밀가루빵까지 곁들여가지고 나왔던것이다.

이런 사연을 알길 없는 금희의 눈앞에는 그날 밤 들떠있던 로익두의 모습이 자꾸만 떠오르며 불화로를 들쓴듯 온몸이 화끈화끈했다. 찬물에 뛰여들어 고역을 치르면서 잡아온 이 붕어는 분명 부상을 대접하자고 했는데 결국은 그 부상이 엄하게 추궁했다는 발생로 앞에 놓여있다고 생각하니 미묘한 감정에서 벗어날수가 없었다. 로익두의 집에 갔던 그날밤, 자고 가라고 붙잡는 외삼촌내외를 뿌리치고 뛰쳐나온 금희는 무서운줄도 모르고 단숨에 집으로 달려갔다.

웬일인가 하여 놀라는 어머니의 눈길을 피해 이불을 쓰고 누웠으나 두눈은 더욱 반송반송해졌고 가슴은 터질듯 답답했다. 한번 일어난 마음의 파동은 밤이 깊어질수록 더 큰 진폭을 띠며 종잡을수 없게 했다.

뜬눈으로 밝힌 그는 천근같은 걸음으로 공장에 나갔고 첫눈에 한대식연구사며 작업반원들의 얼굴부터 주의깊게 살폈다.

그러나 그들의 표정은 여전했고 연구사는 또 한밤 지새운듯 충혈진 눈으로 실험수치들을 검토해 나가느라고 인사도 제대로 못받았다. 참으로 눈물겨운 정상이였다. 자기 일에 저처럼 진지하고 헌신적인 사람을 과연 어느 놈이 헐뜯는단 말인가.

저런분의 사업에 약간이라도 의심을 가진다면 죄악으로 될것이다.

(그런데 부상이란 사람은 왜 그런 말을 했을가? 부상이 지배인까지 엄격히 추궁하고 갔다니 언제 당장 그만두라는 지령이 떨어질가. 오늘 저녁?… 래일쯤?…)

금희가 불안에 떨며 바재이는 지령은 사흘째되는 오늘까지 감감하다. 생활은 예전과 다름없었고 오히려 발생로는 공장적인 관심사로 되여 연구조수인 자기의 인끔까지 올라가는것 같았다. 그것이 더욱 송구스러웠다. 괜히 혼자서만 딴 울타리속에서 헤맨것처럼 생각된 그는 라석호를 만나 물어보리라 맘먹었다.

래일 당장 2차화입을 하겠는데 안개속같은 마음으로 퇴근할수는 없었다. 지금은 아무리 둘러봐야 구름 한점 없는 청청개인 하늘같은데 언제 우뢰소리가 울리고 소나기가 쏟아질지 뉘 알랴.

금희는 자기 눈길이 미치지 못하는 저 산너머 어디선가 포악한 우뢰와 번개를 품은 먹장구름이 서서히 떠돌고있는것 같았다. 봄우뢰는 소리만 요란했지 한치 땅도 적시기 힘들어하지만 그것이 만약 륙칠월 장마라면 무슨 결단을 내고야 마는법이다.

뜻밖에 후한 대접을 받고난 작업반원들이 리숙이한테 거듭 인사를 하고 퇴근하자 금희는 슬며시 라석호를 기다렸다. 이때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급히 나오던 라석호가 금희를 띄여보더니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아직 있었구만. 시간이 있으면 함께 퇴근합시다.》

라석호는 다행이라는듯 부탁하는 눈길로 바라보았다.

《저도 공정기사동무를 기다리던 참이예요.》

금희는 속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이럴 때 자존심을 세우느라고 고개를 튼다거나 아닌보살을 부리는 등의 변덕은 처녀라는 그 순결을 어지럽히는 허영뿐이라고 생각하는 금희였다.

그들은 공장울타리를 에돌아 강변쪽으로 뻗은 소로길을 걷기 시작했다. 둘은 묵묵히 걸음만 옮겼다. 라석호는 이 처녀가 왜 함께 퇴근하자고 기다렸을가 하고 생각해보았다. 그는 이 처녀의 신상에 그 어떤 일이 있었다고 생각했다.

일이 있어도 심각한 무엇이 있은것 같다.

그렇지 않고야 그처럼 밝고 활달하던 처녀가 이처럼 갑자기 달라질수가 없는것이다.

이삼일째 웃음이 없었고 말이 적어졌다.

전혀 다른 처녀로 된것 같았다. 그 까닭을 알고싶어 기회를 보다가 함께 퇴근하자고 부탁한 라석호였다. 처녀의 이런 변화는 절대로 그냥 스쳐보낼수 없는 일이다.

2차화입을 래일로 앞두고있는데 다른 사람도 아닌 연구사의 조수가 이런 심리적상태에 있다는것은 심상치 않은 조짐이다. 그런데 어떻게 처녀의 마음속을 들여다본단말인가.

삼십에 가까운 나이라 하지만 이때까지 처녀와 별로 상종해 볼 사이가 없은 그로서 고지를 하나 점령하는것보다 더 어렵게 생각되였다.

《산보치군 너무 빠르지 않는가요?》

옆에서 바삐 따라걷던 금희가 묵묵히 걸음만 옮기는 그를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

《아, 미안하오. 내 생각만 하느라구…》

라석호는 한걸음 늦추며 어줍어했다.

《무슨 생각을 했어요?》

《금희동무 생각.》

《그래요?》

《말해줄가?》

《아니예요. 지금은 그만두세요.》

금희는 자기 속을 빤히 들여다보는것 같은 라석호의 눈길을 피해 얼른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리고 몇걸음 더 걷다가 두손을 딱 마주치며 환성을 올렸다.

《아이, 저 개버들! 잠간 서계세요. 내 꺾어오겠어요.》

그들은 벌써 공장후문이 저 멀리에 보이는 강변뚝에 나왔던것이다.

늘씬한 다리를 상큼상큼 옮기며 뛰여가는 처녀의 탄력있는 등어깨에서 소담하게 땋아내린 쌍태머리가 보기좋게 흔들거렸다. 봄빛은 어디나 무르녹고있었다.

고삭은 락엽과 시뿌연 황갈색 잡초뿐이던 강변이 어느새 연두색으로 변해가고있었다. 양지쪽 바라지엔 냉이, 삘기, 씀바귀가 점점이 록색무늬를 놓아가는데 노란 잔디우에 다문다문 솟아난 다소곳이 고개숙인 진보라색 할미꽃이 미풍에 한들한들했다. 봄은 역시 소생과 희망의 계절이 분명하다.

훈훈한 강바람이 얼굴이며 살폭을 부드럽게 쓸어주는데 그것 또한 더없는 상쾌감을 준다.

불쑥 고향마을 강변이 떠오르며 거기서 뛰놀던 동요시절이 생각난다. 아지랑이가 진하게 아물거리고 창공에서 종다리울음소리가 여무진 날이면 까맣게 탄 쪼무래기들이 시원한 곳을 찾아 앞내가에 뛰여든다. 그럴 때면 발뒤꿈치에 묻어나온 동생 순복이가 밖으로 내던지는 메기며 모래무치를 싸리바구니에 주어담느라고 토끼뜀을 해가며 땀을 빨빨 흘린다. 그래도 순복이는 뭍에 떨어져 퍼들쩍거리는 물고기를 볼 때마다 너무 좋아 손벽을 짜락짜락치며 깔깔거린다.

깡충한 어깨치마를 입고 두눈이 샐그러져 깔깔대던 귀여운 그 모습이 봄빛 무르녹는 저기 강변 어디엔가 그대로 남아있는듯싶다.

《곱지요?》

연회색털이 포르르한 살진 개버들을 한아름 꺾어들고 온 금희가 상긋 웃으며 하는 소리였다.

생각에 잠겼던 그는 동생 순복이의 다정한 목소리를 듣는것만 같았다.

그는 상긋이 웃고있는 그 얼굴에 실망을 주고싶지 않아 개버들 한가지를 뽑아 코에 대본다.

《금희동문 개버들을 좋아하오?》

《전 눈만 녹으면 개버들을 꺾어다가 병에 꽂아놓군 해요. 그러면 아지에 파랗게 물이 오르고 복슬강아지가 옴씰옴씰 크지요. 개버들은 진달래나 철쭉처럼 란만하진 못해도 은근한 색갈로 시내물을 내려다보며 봄이 왔으니 어서 서두르라고 속삭여준답니다. 봄시내물소리가 그래서 더욱 유정한것 같아요. 제 성미가 괴짜지요?》

활달하고 개방적인 금희에게 이처럼 섬세한 감각과 정서가 있다는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우리 저기 가서 좀 앉을가?》

봄빛에 취한 처녀의 반짝이는 눈을 들여다보던 라석호가 한쪽을 가리켰다.

그들은 묵은 잔디가 폭신폭신 깔린 밋밋한 공지에 가서 앉았다. 해묵은 잔디를 헤쳐보니 노르끄레한 새싹들이 앞다투어 솟아오르고있었다.

라석호는 두툼한 잔디를 이리 저리 헤쳐보며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다.

《금희동문 왜 오늘 나와 함께 퇴근하자구 기다렸소?》

해놓고보니 너무 직선적인것 같아 주변머리없는 자신이 민망스러웠다.

《왜요. 기사동무하구 함께 퇴근하면 안되나요? 전 오늘 오래간만에 강변에 나와 봄바람도 쏘이구 개버들을 꺾게 된게 여간 기쁘지 않아요.》

금희는 손에 들고있던 개버들아지를 부드러운 코끝에 가져다대고 냄새를 맡아본다.

그것이 대답을 피하기 위한 지어낸 행동인지 아니면 봄기운에 녹아버린 연삽한 처녀의 진심인지 알수가 없었다.

《한가지 물어봐도 괜찮겠소?》

《어서 물어보세요.》

금희는 여전히 개버들에 눈을 둔채 손끝으로 복실복실한 강아지를 애무하고있었다.

《금희동무한테 요즘 무슨 일이 생기지 않았소?》

《저같은 괄량이한테 무슨 속썩일 일이 있겠어요.》

《딴전을 피우지 마오. 그 얼굴에 다 씌여있는데. 이래뵈두 난 전쟁시기 이름난 사단정찰이였소.》

《거 대단하시군요. 그럼 지금 제가 뭘 생각하고있는지 알아맞춰보세요.》

《비웃지 마오. 동문 발생로해체작업이 시작된 후 이상해졌단 말이요. 그처럼 활달하던 동무가 왜 갑자기 의기소침해서 눈치만 보오. 왜 그렇게 됐소. 솔직한걸 좋아하니 어디 솔직히 말해주. 그러나 내가 동무의 개체생활까지 캐여묻는다고 오해하진 마오. 동무의 위치가 중요하기때문에 꼭 알아야 되겠소.》

《…》

금희는 황황히 눈길을 피하며 고개를 돌려버린다. 라석호는 자기의 짐작이 틀리지 않았음을 다시한번 확인했다.

《금희동무, 어서 말해보오. 내가 알아도 될 일이면 내놓고 의논해봅시다.》

부드러운 독촉에 고개를 쳐든 금희의 눈빛은 수심에 잠겼다.

《사실 저는 기사동무한테 벌써부터 묻고싶었어요. 지금 우리가 하는 발생로는 어떻게 됩니까? 무연탄가스화가 앞으로 현실성이 있는가말입니다.》

《뭐라구요?!…》

라석호는 자기 귀를 의심했다.

무슨 곡절이 있는줄 알았지만 너무도 뜻밖의 질문을 받고보니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러나 압축됐던 공기가 뿜어져나오듯 거침없는 목소리와 간절한 기대를 담고 바라보는 금희의 두눈을 보게 되자 가슴이 섬찍해졌다.

금희는 라석호의 표정이 굳어지자 얼른 주를 달았다.

《달리 생각지 마십시오. 저도 발생로를 믿어왔습니다. 그런데 우에서 다른 말이 있다기에…》

《우에라는게 도대체 어디요? 다른 사람도 아닌 금희동무가 어떻게 그런 의문을 가질수 있소. 정말 생각밖이요. 그래 누가 그런 소릴 합디까?》

《…》

《한가지 더 물읍시다. 진심을 말해주. 금희동문 한대식선생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어떻게 생각하다니요?》

《한마디로 그를 믿는가 하는겁니다.》

《그건 너무하군요. 그분을 동무가 며칠이나 함께 지냈다구 감히 그런 말할수 있습니까?》

당장에 낯이 빨개진 금희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총알처럼 내쏘았다.

《그러면 됐지. 동무는 무엇이 또 의심스럽소?》

흥분된 라석호의 목소리도 어지간히 높아졌다.

《사람을 믿는다구 해서 그가 하는 연구사업까지 믿으라고 할순 없다고 봐요. 이건 어디까지나 별개의 과학기술문제예요.》

《아니요. 사람을 믿는다면 그가 하는 모든 일을 믿어야 하오. 그건 별개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에 대한 관점문제요. 동문 무엇인가 연구사선생에 대해 의심하고있소. 왜 그렇게 됐소. 도대체 그것이 뭐요?》

라석호의 목소리는 칼날처럼 찌르고 들었다.

두손으로 얼굴을 싸쥐고 《헉-》하고 어깨를 두세번 떨던 금희는 벌떡 일어나더니 걷잡을사이 없이 달아났다.

《금희동무-》

라석호는 붙잡을듯 손을 내뻗치며 목청껏 불렀다. 달려가던 금희는 그 소리에 반사적으로 흠칫 멈췄다가 더 빠른속도로 내달렸다.

어깨를 세차게 들먹이며 멀어지는 처녀의 뒤모습이 엉성하게 말라버린 갈대며 풀덤불에 가리워 더는 보이지 않게 되자 그는 텅빈 공허감을 느끼며 돌처럼 굳어졌다.

제발 돌아와줬으면 하고 그대로 오래동안 서있었으나 처녀가 사라진 저 멀리 눈앞에는 멋없이 설렁대는 키높은 갈대며 색바랜 잡초들만이 눈뿌리를 아프게 했다.

그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일이 이렇게 급변되리라군 생각 못했다.

금희가 친동생처럼 다정하고 가깝게 느껴지기에 내놓고 충고를 주었는데 너무 급하게 때린것 같았다. 다시는 금희가 매정하고 성미 급한 자신의 앞에 나타날것 같지 않았다. 명쾌한 웃음으로 생기와 향기를 뿌려주던 저 처녀가 없는 생활은 생각만 해도 따분하고 울적했다. 천천히 몸을 돌려 노란 잔디우에 산산히 흩어진 개버들을 바라보니 마음은 더욱 어둡고 무거워졌다. 그는 무릎을 끌어안고 훑어진 개버들아지를 하나하나 정성스레 거둬모았다.

(금희동무, 내가 지나치게 말했다면 용서해주오. 난 동무가 하나밖에 없는 동생 순복이처럼 생각되여 아픈 말을 했던거요. 그러나 이것만은 알아두오. 우리는 누가 뭐라든 무연탄가스화를 반드시 성취시켜야 하오. 이것은 우리 당의 뜻이요. 동무는 당의 뜻을 아직도 심장속에 받아안지 못했소. 그래서 마음이 흔들렸고 이제와선 연구사선생까지 의심하게 된거요.)

개버들을 한개도 남기지 않고 말끔히 거둬모은 라석호는 그것을 들고 천천히 공장합숙으로 향했다. 훈훈하고 부드럽게 안겨오던 강변바람이 제법 쌀쌀한 랭기를 풍겼다. 어둠이 깃들기 시작했던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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