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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뻑 땀을 흘린데다 목욕까지 하고나니 몸이 거뜬했다. 방하철은 채양이 좋은 탈의실의자에 앉아 몸을 말리우고있었다. 볕이 그대로 줄줄이 흘러들어 불깃불깃 달아오른 몸에서 뜬김이 몽실몽실 피여난다. 어느덧 한쪽 어깨가 약간 실그러지는것 같더니 스르시 눈가죽이 내리덮인다. 구름우에 실린듯 끝없는 안식을 느끼며 혼곤해지던 그는 흠칫 놀라며 두눈을 떴다. 누군가 지꿎게 지켜보고있는 감이 들었던것이다. 텅 빈 탈의실에는 여전히 밝은 빛이 흘러든다.

다만 벽에 걸린 목종의 시계추소리만이 규칙적으로 울렸다. 그때야 그는 자신이 목종의 시계추소리에 깨났다는것을 알았다. 대낮에 목욕탕에서 졸고있다니? 부끄러운 일이였다. 자기 몸이 이제는 의지를 배반하는것 같았다. 황망히 옷을 입고 밖으로 나오자 목욕탕관리원이 기다리고있었다는듯 얼른 다가왔다.

《지배인동지, 우에서 손님이 왔다면서 아까부터 차가 와서 기다리고있습니다.》

창밖을 내다보니 풀색 지배인승용차가 마당 한쪽에 서있었다.

방하철이 승용차에 몸을 싣고 지배인실에 들어서자 안락의자에 깊숙이 몸을 파묻고있던 보기좋게 벗어진 이마에 거방진 몸의 사나이가 지그시 건너다본다. 화학성 부상 남주혁이였다.

《부상동지, 내려오시기 수고했습니다.》

《그런데 이 불같은 대낮에 목욕탕출입까지 하니 어찌된 일이요. 정말 셈평이 좋소.》

방하철은 낯이 화끈했다. 아직 몸이 식지 않아 벌겋던 낯이 고추빛이 되고 숨결이 높아졌다. 시간을 자신처럼 아끼는 그에게 셈평좋다는 말을 듣는것처럼 모욕적인 말은 없는것이다. 부상의 추궁이라 감히 어쩌지 못하는데 그의 이마에 맺혔던 땀방울이 쭈르르 흘러내렸다.

남주혁은 자기 말이 너무 지나친 감이 들었는지 얼른 자리에서 일어서며 손을 내밀었다.

《그동안 이모저모로 수고가 많았겠소. 지배인들중에서 일욕심이 제일 많은 사람이 흥수지배인이라는것을 내 모르지 않소. 그런 사람한테 뜻밖의 일을 목격하게 되니 한마디 해본거요.》

수선을 떠는것 같은 남주혁의 말에 방하철은 솟구치던 분기가 수그러들었다.

《그런데 전화도 없이 어떻게 갑자기 내려왔습니까?》

방하철이 화제를 딴데로 돌리며 흔연한 태도를 보이였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란 말 있지 않소. 내각에서 소집한 협의회후 성 산하공장들에서 앙양이 일어나긴 하는데 시원칠 않단 말이요. 현지에서 료해도 하고 예비도 찾아보자고 떠났소. 동해지구에선 동무네 공장이 첫번째요.》

이렇게 인사를 끝낸 그들은 책상을 가운데 두고 마주앉았다. 방하철은 생산공정의 현 실태와 특히 내각협의회후 새로 포치된 사업과 공장의 앙양된 분위기를 조리있게 설명해주었다.

《주간 직장들의 실적을 놓고봐도 눈에 띄게 나타나는데 전해 하나에서 125.7%, 전해 둘은 119.2%, 질안합성에서 130.3%, 류안은 107%입니다. 보장부문들도 들고일어났는데 변류, 공무, 운수에서는 절약한 자재와 동력으로 20일분의 예비를 조성했습니다. 그리고 후방에서는…》

드문드문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듣고있는 남주혁의 부둥부둥한 얼굴에 만족한 미소가 떠올랐다. 역시 자신이 사람을 잘못보지 않았다는 회심의 미소였다.

복잡한 생산수자를 소수점아래까지 척척 엮어나가는 열정에 넘친 그 모습은 처음 만났을 때와 조금도 다를바 없었다.

3년전, 서부지구 어느 화학공장에 사업지도차로 나갔던 일이 있는데 그 공장에 류학을 갓 마치고 왔다는 예지가 번쩍이는 눈매 표표한 록록치 않은 책임기사를 보게 되였다. 젊고 건강한데다 의욕이 높고 두뇌가 비상한것으로 하여 전도가 락관적이였다. 더구나 호기심이 부쩍 당긴것은 아직 독신이라는 그의 특이한 경력이였다. 누구의 입에서 나온지는 몰라도 숱한 청혼자들이 나섰다가 코만 떼웠다는것이다. 자기처럼 학식과 지성이 높은 녀자를 물색하는데 지방에 어디 그런 대상자가 있는가, 그런데 알고보니 그런것이 아니였다. 대상자에 대한 요구성이 높은것만은 사실이나 그가 아직 독신으로 있는것은 생활에 대한 남다른 견인불발성때문이였다.

남주혁은 무릎을 쳤다. 손잡고 일 해볼만 한 믿음직한 사람이 없었는데 그처럼 지칠줄 모르고 일욕심 많은 류학생출신 화학기사라면 적임자중의 적임자였다. 화학공업을 속한 기간내에 발전된 외국의 수준에 끌어올리려고 단단히 야심을 먹고있는 남주혁이였다. 이런 그에게 방하철의 존재는 풀숲의 꿩알과 같았다. 그는 방하철을 자주 만나 담화를 하였고 곧 경제관리일군 단기재직반에 소환하여 공부를 시킨후 결원중이던 흥수비료공장 지배인으로 상정시켰던것이다.…

《공장실태를 들어보니 생각했던것보다 일을 많이 했소. 역시 그 성미는 어디 갈데가 없구만. 허허…》

방하철의 실태보고가 끝나자 그는 웃몸을 뒤로 젖히며 흡족해했다.

《아직 평가받기는 이릅니다. 지금 종업원들의 열의는 대단합니다. 도무지 만족을 모르지요. 그런데 문제는 동력에 걸렸습니다. 전기만 보장되면 한번 큰소리쳐보겠다는것이 우리 종업원들의 한결같은 심정이지요.》

《음, 여기서도 전기란 말이지…》

《이번 내려왔던 기회에 한 3만㎾만 더 풀어주고 가십시오. 다른건 요구되는게 없습니다.》

방하철은 두손바닥을 펴보이며 사정했다.

《욕심이 너무 크구만. 그러지 않아두 〈ㅈ〉강 전기는 흥수비료가 다 먹어치운다고 사방에서 아우성인데 더 달라. 그럼 다른 공장들에선 두손 들고 나앉으란 말인가?》

어림도 없다는듯 남주혁은 손을 아래로 획 내리그으며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아무리 흥수비료가 큰몫을 담당해두 당장은 줄수 없소. 앞으로 화력이 서면 그땐 소원대로 쾅쾅 주지.》

《아니 화력이라니요?》

《외국에서 원유를 한 200만t 더 받기루 계약중인데 그것만 해결되면 원유발전소를 함흥지구에 앉히자는거요. 그동안은 예비를 찾는수밖에 없소. 그 총명한 두뇌는 뒀다 어디에 쓰겠소. 머리를 한번 써보오.》

방하철은 떡심이 풀리는것 같았다. 이제야 계약중인 원유가 언제 해결되며 해결된들 화력발전소가 언제 일떠서겠는가. 하루가 급한 지금이다.

《그래 내각협의회가 있은지 벌써 보름이 넘는데 그동안 찾아낸 예비가 없소?》

《왜 없겠습니까. 잘만 되면 성에서 전력을 더 주지 않아도 큰소리쳐볼수 있는 예비가 있는줄 내가 미처 모르고있었습니다.》

방하철은 그 어떤 반발심이 솟구쳐 내뱉듯 대답했다.

《그렇소? 도대체 그 예비라는게 뭐요?》

남주혁은 두눈이 커지며 부쩍 호기심을 나타냈다.

방하철은 자기가 너무 입빠르게 내비친것 같아 잠시 머뭇거렸다. 큰 기대를 가졌던 시험발생로가 첫걸음부터 애를 먹이고있지 않는가.

《어서 말하오. 저 혼자 보따리를 깔구있지 말구. 이 부상두 예비를 찾아보자구 현지에 내려온 사람이 아니요.》

대답을 피하려는 태도가 오히려 흥미를 돋구는지 남주혁이 바싹 다과댔다.

방하철은 뚫어지게 바라보는 남주혁의 눈길을 더는 피할수 없어 무연탄가스화의 연구정형과 시험발생로가 제대로 안되여 그 해체작업장에 나갔던 일을 두서없이 몇마디 했다.

《음- 시험발생로해체작업장에 나갔댔다?… 난 그래두 대낮에 목욕탕출입까지 하기에 홀아비 10년에 늦바람이 났구나 하구 좋게 생각했는데 알고보니 뜬바람이 들었군.》

《뜬바람이라니요?!…》

《뜬바람이 아니면 그래 제정신 가지고 춤을 추고있소?》

방하철은 낯이 핼쓱해졌다. 아무리 깊은 관계로 맺어진 처지라 해도 단마디로 무시해버리니 참을수가 없었다.

《부상동지, 그건 너무합니다. 지금처럼 전력사정이 긴장한 때 무연탄을 가지고 비료를 만들면 얼마나 좋습니까. 이것은 석탄을 가지고 화학을 발전시킬데 대한 당의 요구를 관철하는 측면에서도 그렇고 그것을 맡아안고 애쓰는 연구사를 귀중히 생각해서라두 우리가 도와줘야 한다고 봅니다.》

남주혁의 입가에 미묘한 웃음이 얼핏 스치고 지나갔다.

《너무 흥분하지 마오. 글쎄 우리가 예수교에서 말하는 그 무슨 성인이라면 연구사의 한생을 귀중히 여겨 도와두 주고 그에게 박사칭호도 줄수 있지. 그러나 우린 그런 성인이 아니라 나라의 화학공업을 떠메고나갈 지휘관들이란 말이요. 때문에 우리는…》

점차 어성이 높아지던 남주혁은 자리에서 성큼 일어서더니 방안을 거닐며 계속했다.

《말이 난김에 마저 합시다. 내 지배인에게 꼭 해주고싶은 말이 있소. 언제나 자기가 지닌 시대적명분을 잊지 말아달라는거요. 지금이 어느때요. 사회주의혁명이 승리하고 공산주의를 향해 노도처럼 달리는 천리마시대요. 온갖 보수주의와 소극성을 불사르라! 이 구호속에 우리의 모든 행동과 의식이 있단 말이요. 나는 요즘처럼 분발심을 느낀적이 일찌기 없었소. 막 불안하단말이요.

물론 전쟁 3년이 페허로 만들었지만 우린 너무 뒤떨어졌단말이요. 눈을 뜨고 세상형편을 보오. 합성섬유, 합성수지, 합성고무, 합성부재… 화학이 모든것을 대신하고있소. 화학의 시대가 도래했단 말이요. 시대가 우리를 주시하고있소. 시대가 우리에게 손을 내밀고있단 말이요. 이러한 때 시대의 명분을 지닌 우리들도 지체말고 원유화학을 창설해야 하오. 원유화학만이 시대의 절박한 요구에 답변할수가 있소. 그런데 화학공업이 그중 앞섰다는 나라에서 공부한 지배인의 사고방식이 그게 뭐요. 아무리 발등의 불이 급해도 근본자세에서야 굳건해야지.》

《부상동지, 저도 여러 측면에서 생각해보고 추진시키는 가스화입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비료를 한t이라도 더 생산할수 있는 예비를 왜 묻어두겠습니까?》

고집스럽다 할 그의 주장에 낯색이 확 달라진 남주혁은 중떠보듯 이윽히 방하철을 바라보더니 찌르는듯 말했다.

《출신으로 봐선 인테리적약점이 없겠는데 언제 그렇게 오염됐소? 가스화문제가 어디 비료 한두t에 대한 문젠가. 동무처럼 전력사정이 어떻소, 나라형편이 곤난하오 하면서 한걸음 두걸음 물러서고 주저하는 그 동요성, 바로 그 소극성으로 하여 지금 우리가 비약하지 못하고있단 말이요. 내가 왜 이렇게 문제를 크게 제기하는가? 무연탄가스화가 이름없는 한 연구사의 연구쩨마에 국한되고 비료를 한두t 더 생산하는 예비안으로 끝날 일이면 이처럼 문제를 날카롭게 제기하지 않겠소. 이 문제는 비록 작은것 같지만 원칙적문제이기때문에 그러오. 지금 일부 과학계에서 무연탄을 가지고 비료를 만들수 있다는 론의들이 분분하오. 이렇게 되면 우리의 화학공업이 어디로 가겠소? 생각 좀 해보오. 지금은 전쟁때도 아니고 복구건설시기도 지나갔소. 사회주의 강력한 공업토대를 마련해야 할 아주 중요한 순간이요. 보다 높은 집을 짓자면 튼튼한 기초가 있어야 하는것처럼 우린 힘이 들더라도 반드시 원유화학토대를 꾸려야 하오. 이것이 가능한가? 우린 화학공업지구인 여기에 굴지의 원유가공공장을 건설하며 동부와 서부지구에 원유발전소들을 앉히자고 하오. 그렇게만 되면 못해결할것이 없소. 땅짚고 헤염치기지. 그땐 동무네가 전력때문에 〈ㅈ〉강을 쳐다보지 않아도 되오. 이것이 나의 구상이고 우리 성의 전망이요. 이젠 충분히 납득이 되오?》

《…》

방하철은 속이 답답해졌다. 납득이 아니라 의혹과 실망이 더 커질뿐이였다.

그것이 부상 남주혁의 혼자생각이라면 별일 아니겠으나 성의 전망이라면 문제가 간단치 않다.

방하철은 반발심이 부진부진 괴여올랐으나 꾹 참고말았다. 지금 반박해봐야 열에 뜬 부상의 신경이나 자극할것 같았다.

이때 전화종이 길게 울렸다. 남주혁이 어서 전화를 받으라고 턱짓을 했다.

전화는 후방부에서 왔는데 식사준비를 해놓고 기다린다는것이다.

《부상동지, 식사시간이 지났습니다.》

《아, 벌써 그렇게 됐던가?…》

양복안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본 남주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으로 나온 그들이 외래자합숙에 거의 갔을 때였다. 식당간판을 본 남주혁이 문뜩 걸음을 멈췄다.

《난 종업원식당으로 가겠소. 공장에 내려와서야 종업원들과 함께 먹어야 밥맛이 나지.》

방하철은 구태여 더 권고하지 않았다. 그전부터 현지에 내려오면 잠시도 가만있지 못하는 부상이다. 그것이 웃기관 일군으로서 좋은 기풍일지는 모르나 방하철은 꼭 그렇게 해야만 일자리를 더 낼수 있다고는 보지 않았다. 일군은 일군으로서 자기 몫이 따로 있는것이다. 때문에 그는 웬간해서 종업원식당이나 외래자합숙 출입이 없었고 불가피한 경우를 내놓고는 꼭꼭 자기 거처지에 가서 식사를 하군 한다.

《오후엔 현장에 나가있겠으니 나를 찾지 마오. 그동안 지배인동무는 래일 협의회에 참가할 준비나 잘해놓소. 내각협의회후 자기 초소들에 내려가서 찾아낸 예비안들을 놓고 토론하는 협의회요. 동해지구에서야 흥수비료가 기둥인데 기발한것들을 내놓소.》

내각협의회후 생산실태와 그 대책을 토론하기 위한 동해지구 지배인들의 협의회가 래일낮 화학공장에서 있게 되는데 그걸 념두에 두고 하는 말이였다.

《협의회참가준비는 이미 해놓았습니다. 부상동지, 모처럼 오셨는데 저녁엔 우리 집에 갑시다.》

《지배인한테 집이 있더라. 허허, 어디 시간을 내봅시다. 가지 않으면 집두 없는 독신이라구 업수이 여긴다고 할테니까. 어서 가정을 꾸려야 하겠소. 큰 공장 지배인이 궁상스레 홀애비가 뭐요. 내가 대상을 하나 봐뒀는데 평양에 올라오면 제꺽 마주서봅시다. 그만 혼기를 놓친 류학출신 처녀인데 지배인하구 레베루가 맞을것 같애.》

《관심을 돌려주어 감사합니다. 우리 집에 초대하는건 부상동지한테 언제한번 조용히 인사도 차리지 못해 미안해서 그러는겁니다. 시간을 꼭 내주십시오.》

이날 오후 방하철은 좀 일찍 합숙으로 들어왔다. 말이 합숙이지 이런 생활에 습관되여 더없이 아늑한 집이였다. 사람키만큼 널판자로 울타리를 둘러친 뜰안에 들어서니 열두살쯤 되여보이는 처녀애가 양지쪽퇴지에 주런히 내놓은 화분들에 물을 주고있었다.

처녀애는 방하철을 보더니 물조리를 든채 상긋 웃어보이며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무심히 인사를 받던 그는 전류에 감전된 사람처럼 흠칠 몸을 떨었다. 첫순간 자신이 왜 이럴가 하고 의심도 해봤지만 자석에 붙은 사람처럼 발자국을 뗄수 없었다. 무릇 사람들은 부지불식간 그 어떤 충격을 받을 때가 있는데 곰곰히 따져보면 필경 그 어떤 련관이 있는 법이다. 그것은 본인도 잊고있던 잠재의식이 외부적요인의 작용에 의해 반사반응을 일으켰다고 할가 방하철은 이 순간 바로 그런 심리상태에 빠졌던것이다.

귀엽게 생긴 처녀애의 그 오목할사 한 까만눈이 그의 눈길에 이상한 방전을 일으켰던것이다. 어디선가 눈에 익은것 같기도 하고 처음 보는것 같기도 한 그러나 지을수 없이 찍혀진 인상깊은 까만 오목눈이였다. 처녀애는 자기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방하철의 심각해진 눈길이 무서웠던지 물조리를 땅에 놓고 슬근슬근 피했다.

방하철은 손에 앉았던 귀여운 꾀꼬리가 날아나는것 같아 몇발자국 다가서며 다급히 불렀다.

《얘야, 이리 오너라.》

처녀애는 머리를 푹 숙이고 아림아림 다가오는데 그 어떤 꾸중이라도 들을 자세다.

방하철은 그때야 자신의 목소리가 지내 크고 무뚝뚝하다는것을 느끼고 퇴지에 걸터앉으며 다정히 불렀다.

《너하구 얘기를 좀 하자구 그런다. 그래 네 이름이 뭐지?》

《선화입니다. 리선화.》

《선화! 이름이 좋구나. 나이는 몇살이구?》

《열두살이예요.》

《열두살, 그래 넌 이 화분들중에서 어느 꽃이 제일 곱니?》

방하철은 웬일인지 기분이 상쾌해지면서 선화와 무슨 말인가 자꾸 하고싶었다.

그러자 굳어졌던 선화의 애릿한 얼굴에 호기심이 떠올랐다. 늘 엄엄하여 감히 곁에 다가설수도 없었는데 다정한 음성으로 물어주니 맘이 놓이는것 같다.

선화는 까만 오목눈을 반짝 빛내이며 제일 가녁에 놓인 작은 화분을 가리켰다.

《난 이 백리향이 제일 좋아요.》

《?!…》

빛갈도 모양새도 없는 보잘것 없는 꽃을 어린 처녀애가 좋아한다는것이 잘 믿어지지 않았다. 꽃을 좋아하는 자신조차 손이 잘 가지 않아 별로 가꿔주지 않는 백리향이였다.

《나두 선화처럼 백리향이 제일 좋더라.》

《피- 거짓말.》

《아저씬, 거짓말 모른단다.》

《난 지배인아저씨가 제일 고와하는 꽃을 다 알아요.》

《이것봐라. 여기 꼬마박사가 나타난걸. 그럼 어디 꼬마박사의 말을 들어볼가?》

《홍초예요.》

선화는 거침없이 대답했다.

《?!…》

홍초는 꽃송이가 지내 크다할 정도로 어벙지고 진홍색을 뿌려 마치 타오르는 불길처럼 보이는데 정열의 상징으로 방하철이 제일 아끼고 좋아하는 꽃이다.

《내 말이 틀렸나요?》

아무 대답없자 선화는 오목눈을 연방 깜빡거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방하철은 이슬 머금은 머루알처럼 영채가 반짝이는 기특한 오목눈의 선화를 담쑥 안아주고싶은 충동이 일어났다.

《신통히 맞았다. 네가 정말 꼬마박사가 틀림없구나. 그런데 어떻게 맞혔을가?》

《호호… 지배인아저씬 정말 재미있네. 내가 그걸 어떻게 알겠나요. 우리 엄마가 그래서 알지, 호호…》

선화는 가쯘한 이를 활짝 드러내고 깔깔 웃더니 두서없이 재깔거렸다.

《지배인아저씬 홍초화분에만 물도 제일 많이 주고 부식토도 제일 좋은것으로 깔아준대요. 그래서 이제 비가 오면 이 뜨락에 화단을 만들고 홍초만 심겠다나요. 그래서 내가 〈백리향도 심자요.〉하니까 〈그럼 못써. 홍초를 많이 심어야 지배인아저씨 기분이 좋아서 일을 더 많이 하신단다.〉 이러지 않겠어요. 그래두 난 엄마 몰래 이 백리향도 화단에 심을래요. 아저씨, 정말 이 백리향을 심으면 안되나요?》

빠른 말로 재깔거리는 철없는 선화의 말마디들이 왜 이다지도 가슴속에 따스하게 스며드는지. 아마 그것은 이미 오래전에 잊어버렸고 자기와는 딴 세계의것으로 체념해버린 그 야릇한 혈육의 향연이 부지중 추억의 갈피를 헤치고 되살아나는것이라고 방하철은 생각했다.

그는 잊어버렸던 추억을 헤쳐놓은 선화의 작고 말큰한 손을 꼭 잡아쥐고 《왜 안되겠니. 백리향도 화단에 심자꾸나. 그런데 너희 엄만 누구냐?》하고 귀속말처럼 물었다. 순간 선화의 까만눈이 올롱해졌다.

《??…》

생기와 환희로 반짝이던 선화의 오목눈이 서서히 꺼지더니 작고 말큰한 손이 방하철의 손아귀에서 스르시 빠져나갔다. 방하철은 자기가 선화에게 무엇인가 큰 실망을 안겨줬다고 생각했다.

그의 손에서 벗어난 선화는 마침 바께쯔를 들고 뜰안에 들어서는 리숙이한테 달려갔다.

《엄마, 지배인아저씨가 화단에 백리향을 심으랬어. 저 백리향은 내가 심겠어.》

《됐다, 떠들지 말구 어서 집으로 가거라.》

《저기 화분에 물 주던거 마저 주고 가겠어.》

《그건 내가 하겠으니 어서 집으로 가라는데.》

《엄만 괜히 얼씬 못하게 해. 지배인아저씬 그렇지 않는데.》

방하철은 퇴지에 그냥 앉아있을수 없어 얼른 방안으로 들어갔다. 낯이 화끈했다. 생기로 반짝이던 귀여운 그 오목눈이 숯불처럼 서서히 꺼지던 모습이 눈부리를 찔러댔다. 저 철없는 선화는 나를 뭐라고 하며 딸을 몰라본 사실을 알면 리숙이는 얼마나 어이없어 하겠는가. 그는 방문을 기웃이 열고 밖을 내다봤다. 선화는 이미 보이지 않았고 리숙이가 수도가에서 무엇인가 하고있었다.

팔소매를 둬번 걷어붙이고 머리수건을 푹 내려쓴 그의 모습은 예나 다름없이 평범하게 보이였다.

오늘 리숙은 바쁜 몸이였다. 점심때가 퍽 지나서 제일 귀한 손님 한분을 데리고 오겠다는 지배인의 전화를 받고 잠시도 서있을 사이없이 드달려다녔다.

관리일군합숙이라 하지만 넉넉한것이 없는데 그나마 두명은 장기 출장중이다. 혼자 있는 지배인의 식성이 간소하고 변동이 없어 특별한 찬거리를 미리 준비해두지 않고있었다. 이제는 지배인의 식성을 대략 파악하고있어 이럭저럭 구미에 맞게 해준다고 할수 있는데 온다는 귀한 손은 어떤 사람인지 태생은 어느 고장이며 나이와 직업과 성미는 어떠한지 이런것중의 어느 하나라도 귀틈에 알았으면 좋겠는데 전혀 모르니 소경 문고리 잡는 놀음을 해야 했다.

그는 외래자합숙식당에 있을 때도 그랬지만 이쪽 합숙을 단독으로 책임지면서 그런것에 더 자주 신경을 쓰게 되였다.

항간에 식도락이란 말이 있는데 리숙은 그 말을 전혀 허황한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인간생활에서 식사는 극히 중요한 위치에 있다. 식사로 하루생활이 시작되고 식사로 하루가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것이다. 식사는 단순히 생리적필수욕구를 충족시키고 로동과 활동에 소모된 에네르기를 보충하는데만 있는것이 아니다. 식사를 통하여 생의 복락을 음미해보고 그 복락을 누리기 위한 설계도 마련해보는 더없이 중요한 계기라고 리숙은 생각하고있었다. 때문에 식찬 하나를 만들고 음식의 종류와 색갈을 정하는데도 무던히 맘쓰게 된다.

그는 손님들을 많이 대상해보는 과정에 성격과 출신, 년령, 직업 등에 따라 식성을 짐작해보는데 그 추측이 열에 아홉은 들어맞군 했다. 이럴 때 리숙은 더없는 만족과 보람을 느끼군 했다. 배운것이 별로 없고 남들처럼 기술도 소유하지 못한 그는 손수 만든 음식을 기쁜 마음들로 맛있게 먹을 때 이것이 바로 사람들과 사회를 위해서 자신이 할수 있는 유일한 일이며 이런 보람을 위해서라면 그 무엇도 아낌없이 바치고싶어지는 리숙이였다.

이런 리숙이기에 언젠가 방하철지배인이 부탁한 커피를 제때에 끓여드리지 못한것을 생활의 오점으로 수치로 여기고있었다. 그는 그날 제정신이 아니였고 밤에는 오래도록 잠들수 없었다. 송구스럽기 그지없었다. 배운것없는 자신이 끝없이 혐오스러웠다. 제딴에는 손님들을 위해 할수 있는껏 다 한다고 하는데 아직 아득한 나락에서 헤매고있다는 허무감이 들었다. 부끄러워 지배인을 대할 면목이 없었다. 더욱 곤경에 빠지게 하는것은 지배인이 두번다시 커피 부탁하는 일이 없는것이다. 그뿐이 아니다. 차려주는 음식을 쓰다 달다 한마디 없다. 아무리 뚝한 손이래도 삼사일 넘기지 못해 한두마디 오고가는데 수십일이 지나도 말 한마디 없었다. 그런 태도에 리숙은 안절부절 못했다. 커피도 모르는 무식하고 보잘것없는 밥시중군처럼 여기는것 같기도 하고 지배인이란 큰 사업을 맡아하니 사사로이 말할 여유가 있으랴 하고 위안도 해보았다.

한가지 안심되는것은 방하철의 식성이였다. 그는 담아준 밥을 사발밑굽까지 말끔히 냈고 식찬도 이것저것 가리지 않는것이였다.

실상 여기서 더 바랄것이 없었다. 그는 점차 마음의 안정을 느끼게 되였고 방하철에 대한 일정한 견해도 서게 되였다. 그의 견해에 의하면 방하철은 지향과 의욕이 남달리 높으며 배운것만큼 언행이 진중하고 자신의 인격을 귀중히 여긴다. 그 생활방식과 성격이 좀 지나쳐 보통사람과 구별되나 그것이 흠으로 될수는 없다. 한마디로 존경할만 한 일군이고 정성을 깡그리 바치고싶은 합숙주인이다. 그래서 그는 오랜 기간 독신생활 한다는 지배인의 그 고독과 불편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기 위해 음식대접과 합숙관리는 말할것없고 어항에 금붕어도 길러보고 그가 좋아하는 화초들도 수십종이나 가져다 가꾸고있었다.

리숙은 이런 녀성이였다. 그는 오늘도 지배인과 함께 온다는 귀한 손에 대한 자기나름의 추측과 분석을 가해가며 손끝 여무진 날렵한 동작으로 색갈있는 찬을 만들어놓고 무엇인가 부족되는것만 같아 후방부 랭동고에 달려가 문어와 붉은 도미를 가져왔다. 공장에 손들이 아무리 많이 왔다갔어도 합숙에까지 데리고온 사람은 아직 없었는데 귀한 손이라고 찍어 말할 때는 평양에서 왔을것이고 평양손이라면 동해바다 해산물이 특색있을것 같은 막연한 예감이 들었던것이다.

수도가에 앉아 좔좔 나오는 물에 문어와 도미를 담가놓은 그는 짠물이 있을세라 뽀드득뽀드득 씻어낸 다음 얼른 부엌으로 들어갔다. 문어는 찬 기운이 빠지기전에 살짝 데쳐 회를 만들어야 했고 도미는 얄팍한 종이에 싸서 접철에 올려놓았다. 이미 준비했던 찬거리들은 순서대로 볶아내고 증기탕을 올리기 시작했다. 열기와 흥분으로 달아오른 살색 맑은 갸름한 볼이 발깃해졌고 산중의 호수처럼 고요가 깃들었던 두눈동자는 금가루를 뿌려놓은듯 유난히도 반짝거렸다. 자기 하는 일에 무한한 애착을 느끼는 그런 사람에게서만 볼수 있는 긍지와 자부심이 온몸에서 빛발처럼 뿜어져나오는데 이럴 때 보면 서른넷이 아니라 위불없이 신접살림에 한창 재미를 붙인 새각시의 들뜬 녀인같다.

그는 가공된 료리를 접시마다에 보기좋게 담아놓으며 자주 바깥쪽에 귀를 기울였다. 료리란 가공도 잘해야 하지만 제때에 대접해야 그 맛의 진미를 상실하지 않는것이다.

리숙의 마음은 점차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이제는 손님이 올 시간이 지난것같은데 밖은 여전히 감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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