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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로운영작업반이 조직되고 라석호가 공정기사로 임명되자 제일 기뻐한 사람은 차금희였다. 그것은 그가 잊을수 없는 벗의 오빠라는데도 있었지만 고중졸업의 밭은 지식을 가지고 연구사의 조수를 하자니 답답하고 안타깝던 일들이 떠올라서였다. 금희는 밤새워 만든 꽃송이를 보자기에 싸들고 나와서 첫 출근하는 작업반성원들의 가슴에 달아주기까지 했다. 이러한 행동은 작업반의 분위기를 대번에 달라지게 했다. 대체로 각이한 직장에서 모여온 사람들이라 서먹했는데 년간계획을 초과완수했을 때만 달아보는 꽃송이를 달고 금희의 명쾌한 축하의 인사까지 받게 되자 선출된 인원들만 모이는 특이한 작업반에 온 감이 들어 흡족해들 했다.
한대식은 석근수와 토의하여 작업반을 로운전작업조, 알탄작업조, 원료 및 설비보장조 이렇게 세개조로 갈라놓았다. 기술과 숙련을 요하는 로운전작업조에는 이미전부터 가스화연구조를 도와주고있던 성원들이 포함됐는데 로관리에 석근수, 송풍기운전 및 가스분석공으로 차금희 기타 재배출공과 증기분배기운전공은 고중을 갓 나온 애젊은 청년을 붙였다. 작업반장으로는 합성직장에 있던 오일규가 왔는데 발생로가 생소하기때문에 자기는 원료나 설비를 맡아보겠다면서 작업반을 공정기사인 라석호에게 떠맡겼다.
한대식은 이삼일간 라석호에게 발생로의 작업방법과 설비들의 기술조작을 가지고 견습을 주었는데 어찌나 빨리 파악하고 능숙하게 운영하는지 놀라울 정도였다. 이렇게 작업조까지 정연하게 조직해놓고 라석호가 단독으로 공정을 맡아보게 되니 더는 할 일이 없어진것 같았다. 만족했다. 초지의 꿈이 드디여 눈앞에 다가온것이다.
그는 전적으로 발생로에 붙어 로안의 반응상태를 관찰하며 가스의 유효성분량을 높이기 위한데 신경을 썼다. 발생로에서 나오는 혼합가스중 유효성분이 50%이상 높고 단위시간당 가스생산량이 일정한 수준에 올라야 생산에 도입할수 있는데 현재 상태에서 충분한 가능성이 있었다. 발생로의 가동상태가 예상외로 좋았던것이다. 기분이 한껏 상승된 한대식은 이날저녁 일찍 현장을 나섰다. 휴가기간이 이틀밖에 남지 않은 안해를 래일아침차로 올려보내고싶었던것이다.
공장정문을 나서려는 때였다. 정문경비실 창문이 벌컥 열리며 경비원아바이가 손을 흔들어대며 그를 찾았다. 아바이의 한손에는 송수화기가 들려있었다.
《평양에서 전화가 왔수다. 여보슈 교환, 연구사선생이 여기 있소.》
송수화기를 받아드니 과학원에서 연구사선생을 아까부터 찾고있다는 교환수처녀의 애타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벌써 발생로실태가 보고됐는가?)
한대식은 저으기 흥분되는감을 느끼며 나직이 입을 열었다.
《여보시오. 연구사 한대식이 전화받습니다.》
《한대식동무요? 안녕하시오. 내 강지창이요. 시험발생로가 가동했다는 그곳 기술부장의 전화를 받았소. 그래 발생로상태는 어떻소?》
과학원 부원장 강지창의 반기는 목소리가 수화기에서 쩌렁쩌렁 울렸다.
《부원장동지, 로상태는 아주 좋습니다. 지금 상태를 떨구지 않으면 인차 생산에 투입해도 될것 같습니다.》
《그렇소?! 그건 대단한 성과요. 연구사동무가 그동안 애를 많이 쓰더니 끝내 성공했구만. 무연탄화학에서 일대 전변이 일어났단 말이요. 연구사동무가 큰 일을 했소.》
《이제 겨우 첫 걸음을 뗐다고 봅니다.》
《무슨 일이나 시작이 중요하지. 빨리 테타를 종합해서 보고하시오. 나도 인차 내려가보겠소. 그래 연구사동문 언제 본원에 올라오겠소?》
《로상태를 봐서 인차 올라가겠습니다. 발생로작업반이 조직됐는데 공정기사동무랑 모두가 얼마나 능숙한지 제가 이젠 필요없게 됐습니다.》
《공장에서두 기뻐들 하겠지. 될수록 빨리 올라오오. 반년이 넘도록 집에 편지 한장 없었다는데 집에서 얼마나 걱정하겠소. 구체적인 실태는 후에 만나서 들읍시다. 그럼 올라오는 날까지 더 수고를 해주오.》
전화가 끝났으나 그는 송수화기를 든채 한참이나 그대로 서있었다. 경비원아바이가 무슨 일인가 하여 기웃이 넘겨다본다.
경비실에서 나온 한대식은 활개짓을 해가며 집으로 향했다. 연구성과가 과학원에까지 알려지고 부원장이 현지에 내려오겠다는 말을 들으니 마음이 자꾸만 설레였다.
《아니, 오늘은 웬일이세요. 해가 서쪽에서 뜬게 아니세요?!》
발자국소리를 언제 들었는지 뜰안에 들어서기 바쁘게 부엌문이 벌컥 열리며 하얀 앞치마를 허리에 꼭 졸라맨 안해가 물묻은 손을 문대며 의아해서 바라본다. 갸웃이 바라보는 안해의 갸름한 얼굴은 빨갛게 타는 황혼에 물들어 여간 싱싱해보이지 않았다.
《당신의 요것이 보고싶어 도중에 들어왔소.》하고 팔을 뻗쳐 안해의 발깃해진 볼을 찌르려 하자 혜련은 덴겁을 하며 얼른 한걸음 물러선다.
《정말 오늘은 뭔가 잘못됐군요. 당신이 롱을 다 하는걸 보니.》
《옳게 봤소. 오늘같은 날이 내 생전에 몇번 있겠소.》
한대식은 허세를 부리듯 두팔을 폈다 구부렸다 해보이고 방안으로 들어갔다.
그 모습을 웃는 얼굴로 바라보던 혜련이 얼른 부엌문을 열었다. 그러자 더운 김이 확 쏟아져나오며 고소하고 향긋한 냄새가 물씬 풍겼다.
《여보, 방에 좀 들어오우.》
방안에 들어선 한대식이 뒤따라서는줄 알았던 안해가 보이지 않자 밖에 대고 소리쳤다.
《잠간만 기다리세요.》
부엌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웬일인가 하여 문을 열어보니 부엌에서 뽀얀 김이 느물느물 새여나오는데 고소므레한 냄새가 풍기고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가만가만 속삭이는 녀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손님이 온것 같았다. 한대식은 엉거주춤 앉으며 무슨 말로 안해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평양으로 올려보낼가 하고 궁리해보았다. 휴가차로 왔다지만 안해의 차림새를 보면 여기 눌러앉을 잡도리였다. 얼마있지 않아 자리를 옮길것 같아 꾸리지 않고 지내던 이 반토굴집이 안해가 며칠 와있는사이 영 딴집으로 변했다. 끄슬림과 파리똥으로 새까맣던 서까래와 바람벽에는 무늬가 선명한 벽지가 붙었고 가마니짝을 펴놓았던 방바닥은 노란 장판으로 변했다.
부엌모양새도 제법 신접살림처럼 윤택이 난다. 어디 가나 가만 있지 못하는 부지런한 안해의 성미를 모르는바 아니지만 도무지 집으로 올라갈 낌새가 아니였다. 오늘은 어떡하나 안해를 납득시켜야 했다.
이런 생각으로 안해가 들어오기만 기다리고있는데 방문이 열리며 뜻밖에 음식그릇이 들어왔다. 혜련은 밥상대신으로 쓰는 앉은 책상을 방가운데 놓고 음식을 차려놓기 시작했다. 부엌쪽에서 갖가지 찬들이 연방 들어왔다.
《아니 저녁시간도 되기전인데 웬일이요?》
《우린 뭐 남들처럼 일찍 먹으면 못쓰나요.》하고 남편을 곱게 흘겨본 혜련이 나직이 속삭였다.
《오늘은 리숙동무가 당신을 위해 한턱 쓰는거예요.》
《어쩐지 차린 솜씨가 다르다 했지. 그런데 리숙동문 왜 안보이오?》
이때 부엌에 있던 리숙이가 땀에 촉촉히 젖은 귀밑머리를 쓸어올리며 방문쪽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그는 따스한 미소를 그려보이며 진정을 담아 말했다.
《선생님, 시험로가 아주 성공적이라니 저도 여간 기쁘지 않습니다.》
《리숙동무!…》
한대식은 땀에 젖은 리숙의 얼굴을 보자 눈굽이 화끈해졌다. 리숙이한테 오히려 인사까지 받고보니 뭐라고 감사의 뜻을 표해야 할지 마음만 뜨거워졌다.
실로 리숙이 아니라면 춥고 어수선한 이 반토굴집에서 반년이란 오랜 기간을 지탱해내지 못했을것이다. 자료작업을 하다가 녹초가 되여 쓰러져 잠들면 소리가 날세라 군불을 때주었고 입맛을 잃자 어떻게 구미를 알아냈는지 삼봉산골안에 들어가 언땅을 파고 도라지며 더덕 등 산뜻하고 감미로운 산채들을 캐온적도 있었다. 상대의 고충을 놀랄만큼 예민하게 포착할줄 아는 조용하고 사려깊은 리숙의 남모르는 그 성의와 념원이 있었기에 오늘의 이 좌석이 더 의의있다고 생각하는 한대식이였다.
《리숙동무, 어서 들어오십시오.》
《예. 부엌에서 하던 일을 마저 하고…》
고개를 약간 숙여보인 리숙은 다시 부엌안으로 몸을 잠갔다.
음식그릇을 상우에 챙겨나가던 혜련은 그 어떤 기미를 챘는지 자리에서 펄쩍 일어섰다. 아니나다를가 부엌에서 나온 리숙이가 소리도 없이 퇴지에 내려서고있었다. 박혜련은 맨발로 뛰여나가 그의 손목을 꼭 잡았다.
순간 생기가 빛나는 혜련의 어글어글한 눈길과 초불처럼 조용히 빛을 뿌리는 리숙의 눈길이 서로 마주쳤다. 교양과 리지가 다같이 겸비된 두 녀인이라 누가 들을새라 말없이 마주보는 눈길에서 자기들의 심정을 호소하고있었다.
한대식이 갑자기 뛰쳐나간 안해가 이상하여 문을 열었을 때는 혜련의 손에서 벗어난 리숙이가 저쯤 내려가고있었다.
한대식이 자리를 차고 일어났다.
《리숙동무, 어디 그런 법이 있습니까. 어서 오십시오.》
한대식이 찾는 소리에 주춤 걸음을 멈춘 리숙은 난처한듯 잠시 서성거렸다.
때를 놓칠세라 혜련이가 달려가 그의 손목을 이끌었다. 잠시후 그들 셋은 상앞에 오붓이 앉았다. 한대식은 리숙이와 처음으로 상을 마주하고 앉았는데 그것이 또한 류다른 의미로 안겨와 웃는 소리로 말했다.
《이젠 아마 당신보다 리숙동무가 내 식성을 더 잘 아는것 같소. 이 상을 잘 기억해두.》
《저야 뭐 말이 안해이지 려인숙집 주인만큼도 못되는걸요.》
하고 역시 롱말로 받아넘긴 혜련은 노르끼레한 인삼주를 잔이 찰찰 넘치게 부었다.
《당신이 하루빨리 나그네신세를 면하기 바라면서 이 잔을 드리겠어요.》
《저도 선생님이 연구사업에서 보다 큰 성과가 있기를 축하해서 잔을 붓겠습니다.》
두 녀인이 차례로 주는 잔을 거퍼 마신 한대식은 속이 화끈 달아올랐다. 뜻이 깊은 잔이였다. 이들의 념원이 그대로 실현된다면 얼마나 리상적일가. 간절한 기대가 담겼으나 입밖에 내여 화답할수 없는 잔이기에 묵묵히 마시기만 했다.
녀인들이 다시 한잔씩 붓자 그는 손을 들어 제지했다.
《그만합시다. 저는 충분합니다.》
《다른 식성은 잘 몰라도 당신 주량은 제가 잘 알고있어요. 오늘은 맘놓고 어서 드세요.》
기어코 잔을 들어 남편의 손에 들려주는 혜련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다.
그는 잔을 받아든채 물기에 젖어든 안해의 긴 속눈섭을 뜨겁게 바라보았다.
《선생님, 오늘은 선생님한테 제일 기쁜날인데 왜 그러십니까. 선생님이 맘껏 들어야 우리도 기쁜 마음으로 밥을 먹지 않겠습니까.》
리숙이 벌써 한대식의 심중을 꿰뚫어본듯 은근히 독촉했다.
《고맙소. 고맙소.》
한대식은 찰찰 넘치는 잔을 이윽토록 들여다보다가 쭉 들이켰다. 그러자 내장깊이까지 뜨거운것이 흘러들며 온몸을 불덩어리처럼 달구어놓았다. 역시 술이란 담과 허세를 촉발시키는 촉매제와 같은것이여서 불깃불깃해진 입에서 롱말까지 흘러나왔다.
그가 흥겨워하자 일순간 추억속에 잠겼던 분위기가 풀리여 좌석에는 흥취가 돌기 시작했다.
《이보세요. 발생로를 이제는 공정기사한테 인계해준다는게 사실이예요?》
식사가 거의 끝나갈무렵 혜련이가 지나가는 말처럼 슬쩍 물었다.
《그렇게 해야 할것 같소. 과학원에서두 좀전에 전화가 왔는데 될수록 빨리 인계하고 올라오라누만.》
《과학원에서요?!》
혜련은 들었던 숟갈을 상우에 놓으며 가볍게 탄성을 올렸다.
《강지창부원장동지가 직접 전화를 했소.》
《부원장동지가 어떻게 여기 일을 벌써 알가요?》
《그래서말이요. 내 생각엔 당신이…》
한대식은 그만 말끝을 흐리며 눈길을 돌렸다. 환희의 불꽃이 반짝이는 안해의 눈을 마주볼수 없었던것이다.
《그래서 제가 뭘했으면 좋겠어요?》
혜련이가 다그쳐 물었다. 조용한 성미나 아직 처녀시절의 불같은 기질이 드문드문 나타나군 하는 안해여서 망설이게 되였다.
《아니 왜 말씀 그만둬요?》
한대식은 괜히 주저하고있다고 자신을 탓하며 정색해서 말했다.
《내 생각엔 당신이 래일이라도 평양에 올라갔으면 하오. 여기 있을 형편이 못되는 당신이 아니요.》
《가겠어요. 가야지요. 내가 뭐 춘향이라구 해종일 독수공방에서 당신만을 기다리고있겠어요. 저도 바쁜 몸이라는걸 모르고 여기 있은게 아니랍니다. 당신이 갈걸 원하는데 제가 왜 한시간이라도 지체하겠어요. 리숙동무, 평양급행차가 밤 몇신가요?》
《??…》
한대식은 진담인지 푸념인지 몰라 그만 얼떠름해지고말았다.
《혜련동무, 진정해요. 이밤에 어떻게 간다고 그래요?》
리숙이도 혜련이답지 않은 돌변스런 태도가 리해되지 않는듯 그의 팔굽을 잡으며 나직이 타일렀다.
《리숙동무, 내가 변덕스레 군다고 생각지 마세요. 이건 나의 진심입니다. 갈길은 빨리 갈수록 좋지 않나요. 사실 난 여기로 내려올 때만 해도 철이 아버지 연구사업이 막연해보이면 아예 눌러앉을 작정이였답니다. 마침 이 토굴집도 그만했으면 쓰고살만 하더군요. 과학자의 안해가 언제 좋은 집에서 호강하며 살겠나요. 난 그저 철이 아버지곁에서 뒤바라지나 잘해주면 그 이상 바랄게 없어요. 그런데 리숙동무랑 옆에서들 적극 도와주어 연구사업을 끝내구 과학원에 올라가게 됐으니 제 마음이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어요. 이밤에 평양이 아니라 이 세상 끝까지 가래도 기꺼이 달려가고싶어요.》
《혜련동무!-》
리숙은 혜련의 어깨를 꼭 그러안으며 뜨겁게 달아오르는 그의 얼굴에 자기 볼을 비비였다. 과학자의 안해로서뿐아니라 녀성이라면 누구나 간직해야 할 남편에 대한 정성과 존경이 이처럼 뜨겁고 열렬한 혜련의 성품이 더없이 부러웠다. 영채가 반짝이는 어글어글한 눈만 아니라면 그저 아련하고 수수한 보통 녀자로밖에 보이지 않는데 어디에 그런 불덩어리를 간직하고있는지 리숙은 꼭 그러안은 혜련의 어깨를 자꾸만 쓸어만졌다.
방안에는 잠시 정적이 깃들었다. 상우에는 아직 차린 음식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리숙은 꼭 그러안고있던 혜련의 어깨를 살그시 놓아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 그만 가보겠습니다. 정말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오늘은 밤이 지새도록 앉아있고싶었는데… 어서 가보세요.》
그를 따라 일어서며 혜련이 혼자말처럼 뇌이였다. 한대식은 문설주를 잡은채 묵묵히 리숙을 바래주었다.
저쯤 마당가에서 두 녀인이 주고받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오늘 밤차로 가겠어요?》
《가야 해요.》
《그럼 떠나지 말고 내가 올 때까지 기다리고있어요. 혹시 역에 나가는 차편이 있을수 있으니.》
《이밤중에 무슨 차가 있겠어요. 제 걱정 말고 편히 쉬세요.》
《하여튼 믿구 기다려보세요. 그래두 명색이 관리일군들의 합숙관리원인데 우리 공장에 왔던 귀한 손님을 걸어서 내보내면 되겠어요. 호…》
리숙은 어딘가 끌어당기는것 같은 포근한 웃음을 남기고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한대식은 안해가 방안에 들어서자 뚝뚝한 어조로 타일렀다.
《당신 왜 그렇게 고집을 쓰오. 재밤중에 보내놓고 내 맘이 편하겠소. 래일 낮차로 가도록 합시다.》
혜련은 의아한 눈길로 남편을 쳐다보다가 그의 커다란 손을 잡아쥐며 간절히 말했다.
《이보세요. 오늘 한시간 지체되면 래일엔 1년, 10년이 늦어진다고 당신이 늘 말하지 않았나요. 저를 막지 마세요. 그리구 당신두 하루빨리 올라오도록 하세요. 평양에서 철이가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있다는걸 언제나 잊지 말구요.》
《당신 성미두 참.》
한대식은 안해 몰래 가는 숨을 후- 하고 내불었다. 연연한 풀싹인줄 알고 손에 감아쥐려는데 예리한 가시가 박혀있어 흠칫흠칫 놀라게 하던 옛 처녀시절의 그 성미가 아직 그 어딘가에 완강히 남아있다고 생각하니 웬일인지 소격해짐을 느꼈다.
혜련은 손목시계를 얼핏 보더니 음식상을 거두며 떠날 준비에 서두르기 시작했다. 빌려온 사발들은 끓는 물에 담가 기름기를 말끔히 뽑았고 늄그릇은 잔모래로 박박 밀어 광을 냈다. 이렇게 티 한점 없이 닦아낸 그릇들을 차곡차곡 올려놓고난 그는 송골송골 내돋은 이마의 땀을 문대며 방으로 들어왔다.
《이보세요, 래일부턴 궁색스레 여기 들어오지 말구 합숙에서 침식하세요. 이 집은 리숙동무한테 맡기겠어요.》
《알겠소.》
촉박한 시간으로 보아 뭐든지 안해의 일손을 도와줬으면 좋겠으나 워낙 그런 세계와 인연이 없다고 생각하고있는 한대식이 전등밑에 앉아 화학원서를 보며 건성 대답한다.
《그리구 겨울옷가지들은 제가 가지고 가겠어요.》
《맘대로 하오.》
《당장 보지 않을 책들도 이쪽에 꺼내놓으세요.》
《책은 왜 그러우?》
《아무래두 철이 아버지야 짐이 많겠는데 내가 가지고 갈려고 그래요.》
《책이 무슨 짐으로 되겠소.》
한대식은 그냥 앉아있을수 없어 겨울난 솜옷을 배낭안에 꿍져넣기 시작했다.
이때 밖에서 인기척이 났다. 나가보니 리숙이가 와있었다. 혜련은 그를 데리고 부엌안으로 들어갔다.
《제가 빌려온 저 부엌세간들을 가져다드리고 가야 하는데…》
리숙은 반짝반짝 윤기나게 닦은 그릇들이 일매지게 포개있는 당반을 바라보다가 저으기 섭섭한 안색을 지었다.
《이렇게까지 안한들… 이건 너무하군요.》
《그동안 신세진것만두 끔찍한데 어떻게 그냥 돌려주겠어요. 그리구 래일부턴 철이 아버지가 합숙에 나가계시니 이 집을 좀 맡아주세요.》
잠시후 그들은 짐을 들고 방을 나섰다. 초생달이 이미 고개를 넘어간지라 밖은 칠흑같았다.
《제 뒤를 바싹 따라서세요. 마침 비료를 싣고 역에 나가는 화물차가 있더군요.》
배낭을 어깨에 멘 리숙이 앞서걸으며 하는 말이였다.
얼마쯤 언덕을 내려가니 덕천에서 갓 생산된 《승리-58》호 화물차가 길가에 서있었다. 한대식이와 리숙이가 역에까지 따라가려 했으나 혜련은 펄쩍 뛰며 거절했다.
《화물차가 잘 모셔다드리겠습니다. 괜스레 20리길을 고생하겠습니까.》
운전수까지 이렇게 나오자 한대식은 물러서고말았다.
그러나 리숙은 석별의 정을 금할수 없는지 혜련의 손을 놓지 못한다. 짧은 나날이였으나 깊은 인상을 남긴 그가 남같지 않았고 이번에 헤여지면 다시 못볼 사람같았다. 얼마후에야 리숙은 꽉 그러잡고있던 혜련의 손을 놓아주며 가벼운 소리로 말했다.
《어서 차에 오르세요.》
혜련이도 걸음이 잘 떨어지지 않는지 천천히 운전칸에 올랐다.
차가 부르릉거리며 막 떠나려는 때였다.
《잠간만-》하고 리숙이가 운전칸창문으로 다가왔다.
혜련이가 운전수에게 량해를 구하고 땅에 내려서자 리숙은 그의 손을 이끌고 적재함뒤로 갔다.
《저… 언제부터 물어보고싶은것이 있었는데…》
《어서 말하세요.》
리숙은 얼른 주위를 살피더니 들릴듯말듯 조심스레 물었다.
《혜련동문 커피에 대해서 잘 알고있겠지요?》
《무슨 말뜻인지요?》
《끓여먹는다는 커피말이예요.》
《커피가 필요한가요?》
《아니예요. 직접 먹어본 사람의 말을 듣고싶어서 그래요.》
리숙이 이처럼 커피를 알고싶어하는데는 그럴만 한 일이 있었다.
반년전, 방하철이 이곳 지배인으로 온지 며칠 안된 어느날 저녁녘이였다. 때이르게 합숙에 들어온 그는 갑자기 평양에 올라갈 일이 생겼다면서 출장준비에 서둘렀다. 리숙은 조급해났다. 아직 저녁식사준비가 되지 않았던것이다. 리숙은 재빨리 쌀을 씻어 밥솥에 안치고 찬거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 기미를 눈치챈 방하철이 그럴 시간이 없다면서 커피나 얼른 끓여달라고 부탁했다.
리숙은 책상서랍에서 꺼내주는 외국제상표가 요란한 커피통을 받아든채 잠시 서성거렸다. 어떤 재료이든 조선음식이라면 막힐것 없는데 이름조차 생소한 커피를 어떻게 끓여야 할지 알수가 없었던것이다. 그렇다고 아직 낯도 채 익지 않은 지배인한테 물어보기도 뭣했다.
잠시 망설이던 그는 커피가 보약처럼 짐작되여 약탕관에 넣고 탄불우에 올려놓았다. 설상가상 방금전에 열어놓은 탄불이라 불담이 있을리 없었다. 급해 난 그는 탄아궁에 풍구를 들이대고 바람을 불어넣었다. 푹 내려쓴 수건밑 이마엔 굵은 땀방울이 맺혔고 두볼은 빨갛게 익어갔다.
한참 바삐 돌아치는데 출장가방을 든 지배인이 《내가 가지구 온 전기차관이 어덴가 있겠는데요.》하고 부엌안을 기웃이 들여다 봤다.
《??…》
리숙은 지배인이 무엇을 념두에 두고 말하는지 가늠이 안갔다. 그러면서 그가 그냥 떠날것만 같아 속이 바질바질 탔다. 후에 안일이지만 리숙은 그때 전기차관을 보통 늄주전자로만 알고 그릇당반우에 정히 보관하고있었다.
부엌안을 들여다보던 지배인은 무엇을 감촉했는지 아무말 없이 몸을 돌렸다.
《이젠 약탕관이 끓기 시작합니다. 물을 얼마큼 둬야 하는지 그 량만…》
리숙은 부엌문밖으로 나서며 안타까이 말했다. 했으나 지배인은 괜히 무리한 요구를 했다면서 바삐 뜨락을 나서고말았다.
순간 핼쓱해지는 리숙의 귀밑머리아래로 땀줄기가 주르르 흘러내렸다. 그는 지배인을 붙잡을듯 황급히 몇걸음 따라가다가 솟을대문 문설주를 꽉 그러쥐며 신음소리 비슷한 가느다란 소리를 냈다. 점점 멀어지는 지배인의 뒤모습을 애타게 바라보던 리숙은 자신에 대한 참을길 없는 수치감으로 하여 눈물이 나올것만 같았다.
이런 일이 있은후 지배인은 다시는 그 어떤 부탁이나 사사로운 말조차 건네는적이 없었다. 물론 그것이 지배인사업이 바쁘고 성미가 그래서 그러려니 하고 지내지만 커피부탁을 받았던 그날의 일이 가끔 떠오르며 매사에 자신을 더 다잡게 되는 리숙이였다.
《솔직히 혜련동무한텐 허물될것 같지 않아 묻는거예요. 언젠가 책을 뒤져보니 커피가 사람몸에 아주 좋다고 씌여있더군요.》
《글쎄 우리 사람들은 그걸 먹지 않아도 다들 건강하지 않나요. 하여튼 커피는 강장제작용도 하고 피로회복제로 인기가 있긴 있어요.》
《그게 사실이군요.》
《커피가 필요하면 제가 구해보겠어요.》
《제발 그러지 마세요. 이름도 잘 모르는 그런 물건을 내가 뭣에 쓰겠나요. 이젠 됐어요. 어서 차에 올라요.》
혜련은 의혹이 풀리지 않은채 등을 떠미는바람에 운전칸에 오르고말았다.
《안녕히들 계셔요.》
그는 차문을 열어잡은채 남편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잘 가오.》
화물차는 매캐한 연기타래를 쏟아놓더니 강한 두줄기 불빛을 너울거리며 점차 멀어져갔다. 가늘어지던 엔징소리가 그만 잠잠해지고 조명등의 후광조차 사라지자 사위는 한치앞도 내다볼수 없었다. 한대식과 리숙은 그 어떤 헤여날길 없는 심연속에 빠져든 사람처럼 오래도록 움직일줄 몰랐다.
밤하늘의 별들만이 더욱 초롱초롱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