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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숙이 그토록 왼심을 쓰며 극력 숨기려 했던 혜련의 문제는 약초를 싣고 사흘만에 돌아온 그날 점심때 벌써 한대식의 의혹을 자아내고말았다. 안해가 돌아왔다는 전달을 받고 서둘러 집으로 달려간 한대식은 잠시 어리둥절해졌다.

뜰안에 들어서기 바쁘게 달려나와 반겨주던 안해는 기척도 없고 집안팎은 여전히 썰렁했다. 맥이 풀린 그는 그만 퇴지에 걸쳐앉고말았다.

문득 삭풍이 건뜻 불어왔다. 연약한 그 한가닥 바람은 어디선가 누렇게 황이 든 살구나무잎 두세개를 뜰안에 몰아왔다. 며칠간 사람거접이 없었던 빈집이라 구석구석에 널려있던 종이쪼각이며 검불들이 황이 든 나무잎사귀와 한데 어울려 딩굴었다. 안해가 없는 빈집은 불꺼진 방바닥처럼 어쓸한 기운만 풍겼다.

쓸쓸하고 고적해진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고 말았다.

이때였다. 부엌문이 소리없이 열리더니 뜻밖에 안해 혜련이가 고개를 푹 떨군채 조심스레 나왔다. 한대식은 흠칫하며 안해의 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윤기를 찾아볼수 없는 흩어진 머리며 겁먹은듯 깊이 내리깐 초리긴 속눈섭, 하얗게 조갈이 든 입술과 창백하다 못해 푸른기가 도는 수심가득한 얼굴 그리고 절반으로 졸아든것 같은 탁 풀린 몸매는 전혀 다른 녀인을 보는것만 같았다.

《철이 아버지-》

하얗게 조갈이 든 입술사이로 신음소리같은 목소리가 들릴듯말듯 흘러나왔다.

한대식은 마음이 아팠다. 얼마나 속을 태웠으면 저렇게 몰라보게 달라졌는가. 자신도 모르게 가슴속에서 욱-하고 뜨거운 뭉치가 솟구쳐올랐다. 그럴수록 로익두와 강난실의 간교한 책동을 제때에 간파하지 못한 자신의 어리석음이 쓰겁게 생각되였다.

엊그제였다. 마침내 로익두부부의 정체가 들장나고말았었다. 로익두는 옛생활을 꿈꾸던 암해분자이며 그의 처 강난실은 리력을 속이고 깊숙이 박혀있던 계급적원쑤였다는것이 밝혀졌던것이다. 종업원들중 어떤 사람들은 그 사실이 믿어지지 않아 로익두의 집에까지 가서 직접 확인해보았다고 한다.

이미 석근수의 동향보고를 받고 로익두의 뒤를 주시해오던 안전원들은 발생로에서 사고가 일어나고 한대식과 금희의 사실자료까지 보고받자 놈들의 목줄을 바싹 조이였다. 이 기미를 눈치챈 강난실은 늙은 고양이처럼 어느새 꼬리를 감추었고 로익두는 천정에 목을 매고 늘어져있었다. 로익두의 시체를 부검한 결과 서서히 효과가 나타나는 독약을 먹었다는것이 판명됐는데 그 독약성분이 얼마전 사건을 야기시킨 그 탄산수에 들어있던 성분과 같았다.

이렇게 되여 놈들의 파괴암해책동의 진상이 점차 밝혀지게 되였다. 강난실은 어느틈에 북쪽 만포까지 달아나 국경을 넘으려다가 체포됐는데 체포되는 순간 그 무슨 약을 먹고 현재 병원에 있다. 이제 강난실의 입이 열리면 모든 흑막이 더 명백해질것이다.

한대식은 처염하게 달라진 안해의 모습을 보니 분한 마음을 금할수 없었다.

그는 자신을 탓하는 심정으로 힘주어 말했다.

《여보, 탄산수건때문에 너무 고심하지 마오. 놈들이 그처럼 악착할줄 누군들 생각했겠소. 우리 이제부터 든든히 맘먹구 살아가면 되지 않겠소.》

《철이 아버지, 그것때문에… 그런게 아니예요.》

《그럼 왜 그러오. 무엇때문에 기가 죽어있는가 말이오. 솔직히 난 당신이 사흘씩이나 나가있는바람에 별의별 생각을 다 했소. 모든게 내탓이요. 내가 제구실을 못해서 당신 맘고생만 시켰구려.》

《철이 아버지. 제발 그런 말씀… 마세요. 절… 저를…》

혜련은 더는 참아낼수 없는지 한대식의 발치앞에 꿇어엎디며 헉- 하고 흐느꼈다. 성미그대로 속에 꽉 누르고있던 응어리가 터지자 혜련은 몸부림치듯 오열했다. 동실한 어깨는 파도처럼 들먹였고 두눈에선 눈물이 비오듯 쏟아졌다.

《전 용서받지 못할… 죄를 졌어요. 저는 죽어 마땅한년이예요. 저를… 조금도 사정보지 마시고 죽여주세요. 철이 아버지-》

내장을 쥐여짜는듯 한 혜련의 비통한 목소리는 더더욱 세차게 몸부림치는 오열로 하여 간간이 토막졌다.

그때야 한대식은 안해의 신상에 두번다시 있을수 없는 그런 기막힌 상실이 있었다는것을 직감할수 있었다. 순간 숨이 컥 막히는것 같았다. 온몸의 뼈가 그대로 녹아내렸고 눈앞이 아찔했다.

(그렇다면 당신이?… 누구를… 누구를 감히 배신한단 말인가?)

부르르 떨리던 한대식의 두손이 발치앞에 꿇어엎딘 안해의 동실한 어깨를 우악스레 거머쥐였다. 도저히 참을수가 없었다. 무슨 결단을 내지 않고는 치솟는 분격을 누를수 없었다.

혜련은 어서 처분만 기다리고있는듯 그가 잡아일으키는대로 공손히 응했다.

다만 북받치는 오열을 누르지 못해 얼굴을 싸쥔 두손만 내리우지 못하고있었다. 그 손등우에 피멍든 자리와 무엇에 긁히워 째진 자리가 보였다. 그우로 피물같은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험하게 된 상처자리를 보는 순간 한대식은 무엇이 툭 끊어지는감을 느끼며 황황히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와 동시에 두어깨를 거머잡았던 두팔이 맥없이 툭 떨어졌다.

한대식은 온몸이 그대로 꺼져내리는것 같아 퇴지우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잠시 얼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있던 그는 주섬주섬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성냥을 그었다. 왜 그런지 성냥가치가 자꾸만 부러져나갔다. 대여섯가치만에 불이 당긴다. 그는 빈혈이 오듯 허탈상태에서 벗어나려고 담배연기만 자꾸 빨았다. 한대 두대…

침묵이 흘렀다. 당장 질식할듯 그런 천근무게의 침묵이였다. 그 침묵이 두려워 혜련의 입에서도 흐느낌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얼마후 한대식은 뜨거운 입김을 꺼지게 내불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얼굴은 갑자기 10년은 더 늙어보였다.

한대식은 여전히 얼굴을 싸쥐고있는 안해의 두손을 잡아 아래로 내리웠다.

그리고 손수건으로 눈물범벅이 된 그의 얼굴을 천천히 닦아주었다.

《난 당신이 약초를 캐러 갔다기에 그래도 맥을 놓지 않았구나 하고 안심했는데… 그런데 당신은 그동안 꿈속을 헤맸구려. 그것도 사나운 꿈속에…》

《…》

《여보, 사람이 살아가는데 제일 무서운게 뭔줄 아오? 그것은 의리를 저바리는 죄요. 의리를 모르면 그는 벌써 사람이 아니오. 그래서 어떤 때는 그 의리를 지켜 목숨까지 내놓지.

여보, 우리 가정이 과연 세상에 어떻게 태여났소. 어버이수령님이 계시지 않았다면 당신과 나는 아직도 생리별한채 안타까이 가슴만 허비고있을거요. 더구나 당신은 살인마 미국놈들이 살판치는 저 지옥의 땅 서울에서 갖은 민족적수모와 멸시속에 죽지 못해 살아갈거요. 나는 지금도 우리 둘사이의 리별을 그토록 심려하시며 그 만남을 위해 온갖 대책을 다 취해주신 그 친어버이사랑을 돌이켜볼 때마다 눈굽이 젖어드오.

어찌 그뿐이겠소. 지난날 생의 막다른 골목에 숨어있던 나를 애써 찾아내시여 나라의 귀중한 과학자로 내세워주고 온갖 조건과 은정을 다 베풀어주시는분이 바로 우리 수령님이시오. 한마디로 나의 삶과 희망과 넋은 수령님품속에서 마련되였소. 때문에 나와 당신의 운명은 수령님을 떼여놓고는 순간도 생각할수 없소.

나는 나이가 들수록 이러한분을 친어버이로 모신것이 무상의 영광으로 안겨왔고 그분을 위해 한생을 다 바치는것보다 더 큰 자랑, 더 큰 행복이 없다는것을 심장깊이 간직하게 되였소.

그런데 이번에 로폭파사고를 냈으니 그 죄를 어떻게 씻겠소. 우리 수령님께서 오래전부터 간절히 바라시던 그런 발생로가 아니요. 이 사실을 아신다면 수령님께서 얼마나 섭섭해하시겠소. 그토록 아껴주고 줄수 있는 모든것을 다 주었는데 아직도 제구실을 못하는 이 못난것때문에 마음아파할 수령님을 생각하면 가슴에서 피가 흐르오. 앉으나 서나 요즘은 걱정에 잠겨계실 수령님의 존귀하신 영상뿐이요. 내가… 내가 어떤 큰 죄를 졌는가 말이오.》

목이 콱 잠긴 한대식이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솟구치는 격정을 참는듯 어깨가 세차게 오르내렸다.

《철이 아버지!…》

《그런데 당신까지 그런 무엄한… 도대체 가면 어디로 가고 위안은 어디서 찾는단 말이오? 그 누가 뭐라든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우리 수령님 계시는데 무엇이 두렵고 무엇이 무섭단 말이오?

여보. 우리 이렇게 걱정만 끼쳐드려서 언제가야 효자구실을 하겠소.》

《철이 아버지!…》

혜련은 목멘 소리로 뇌이며 남편의 넓은 가슴에 머리를 묻었다. 그리고 피를 토하듯 절절한 소리로 말했다.

《다시는… 다시는 자식된 그 소중한 의리를 욕되게 하지 않겠어요.》

그들부부는 더 말이 없었다. 마주댄 심장만이 더욱 세차게 높뛰였다.

그로부터 시간이 퍼그나 흘러서였다.

마음의 안정을 찾은 한대식이 뜰밖에 나섰다. 그는 라석호가 출장지에서 가져온 대용점결제의 응력시험으로 발생로현장에서 긴장된 하루를 보내고있었다.

라석호가 새로 연구개발한 대용점결제는 원래 점결제로 쓰던 팔프페액 못지 않게 우월했고 경제적효과성도 매우 높았다. 이것은 무연탄가스화를 공업화하는데서 결정적문제를 해결한 셈이다.

한대식이 뜰밖을 나와 얼마쯤 걸었을 때다. 뜻밖에 석근수와 라석호가 이쪽을 향해 반달음치듯 마주 걸어왔다.

《연구사선생, 오지 말구 거기 잠간 서있으슈-》

허리구붓한 석근수가 팔을 흔들며 소리쳤다.

한대식은 의아해진 눈길로 그들을 기다렸다.

《선생, 집에 아주머니 계시우?》

《네…》

《마침 됐구만. 석호 자네 얼른 갔다오게.》

라석호가 고개를 끄덕여보인후 달려갔다. 이틀전 강지창부원장으로부터 공장에 빨리 가보라는 전화련락을 받고 황철에서 돌아온 석호였다.

《무슨 일입니까?》

한대식이 궁금증을 참지 못해 물었다.

《둬시간전에 부원장동지가 공장에 내려왔수다. 당위원회에서 선생하구 아주머니를 데리구 빨리 회의실로 오라구 합데다.》

《?!…》

《나두 아직 자세한 사연은 모르겠소만 발생로를 공업화하기로 된것 같쉐다.》

《발생로를 공업화하기로 됐단말입니까?!… 그게 사실입니까!》

한대식은 혹시 잘못 들은것만 같아 따지듯 되물었다. 했으나 석근수는 묵묵히 고개만 둬번 끄덕일뿐 더 말하려 하지 않았다.이러는사이에 한대식의 집에 갔던 라석호가 돌아왔다.

《사모님은 곧 뒤따라오시겠답니다.》

《그럼 우린 한발 먼저 갑세다.》

석근수는 몹시 서둘렀다. 한대식은 무엇인가 자꾸만 묻고 확인해보고싶은 충동이 솟구쳤으나 어딘지 근엄해진것 같은 석근수의 낯을 대하자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오늘같은날 금희가 있었으면 얼마나 좋아하겠나. 그앤 아마 너무 좋아 춤을 출거야.》

활개짓을 하며 앞장서 걷던 석근수가 한걸음 늦추며 무거운 어조로 말했다.

《석호 자네 금희한테 다시 찾아가보라구. 그리구 래일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꼭 데리고 나오게.》

《…》

라석호는 석근수의 눈길을 피해 고개를 숙였다. 한대식은 금희의 말이 나오자 무딘 칼끝에 찔리기라도 한듯 속이 띠끔했다. 사고심의가 있은 그 다음날부터 몸아프다는 구실을 달아 사표를 낸 후 공장에 얼씬하지 않고있는 금희다. 발생로를 폭파한놈이 로익두라 할 때 금희의 심정을 짐작할수 있으나 텅빈 방에 홀로 앉아 괴로움에 몸부림치고있을 그 정상을 그려보면 온몸의 피가 금시에 말라버리는것 같았다.

늘 생기와 열정에 넘쳐있던 그 다감한 처녀의 가슴에 쉽게 아물수 없는 상처를 남긴것은 연구사업에서 한두번의 실패나 발생로가 파괴된것과는 대비도 안될 큰 상실이였다.

라석호가 황철에서 돌아오던 엊그제 저녁때다. 한대식은 납덩이처럼 매달리는 죄책감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려고 라석호를 그길로 금희네 집에 보냈다.

그런데 금희는 자기가 앓고있는 몸이니 만날수 없다는것이였다. 라석호는 그동안의 일을 좀 구체적으로 알고싶어 장문의 편지를 써보냈다. 그래도 일언반구 반응이 없었다.

라석호는 그만 리성을 잃고 말았다. 아무리 몸이 아픈들 아무리 정신적번민이 크다 한들 한달 가까이 떨어져있던 애인이 그처럼 절박히 만나줄것을 청원하는데 칼로 베듯 할수 있는가. 그렇게 의지가 약하고 사랑 또한 견결치 못한 처녀를 더는 찾아다니지 않겠다는것이다.

한대식은 겁이 났다. 이대로 둔다면 이들의 관계는 영영 결별될것만 같았다.

《석호동무, 내가 큰 죄를 졌소. 금희가 그렇게 된것은 내가 그를 잘 이끌어주지 못했기때문이요.》

《그런 말 마십시오. 외삼촌도 아닌 그런놈한테 끌려들어 롱락당했으니 어디 우리 시대 청년의 자격이 있습니까?》

라석호는 적대감까지 나타냈다.

《혹시 석호동문 금희가 실책을 범했다고 그에 대한 견해까지 달라진게 아니오?》

《과오를 범해서 그러는게 아닙니다. 그만 한것은 얼마든지 리해합니다. 이제보니 그에겐 확고한 신념이 없었단 말입니다. 신념이 그렇게 약한 처녀를…》

라석호는 말끝을 맺지 못하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리고 가쁜 숨만 내쉬였다.

한대식이도 숨쉬기가 괴로왔다. 금희를 불같이 사랑하던 라석호의 가슴속에 피가 흐를것이라고 생각하니 그를 마주 쳐다볼 힘조차 없었다.

《석호동문 무엇인가 잘못 생각하고있소. 난 이렇게 생각하오. 타고난 수재없듯이 역시 타고난 신념이란 없다고 말이오. 왜냐면 신념은 곧 그 사람의 넋이고 삶이며 숨결이기때문이요. 신념이 없거나 확고하지 못할 때 그것처럼 고통스럽고 눈앞이 캄캄한 일은 없소. 바로 이것은 생활을 통해 얻은 더없이 귀중한 나의 교훈이였소.

석호동무, 금희는 이제 겨우 생활의 첫 자욱을 뗐을뿐이요. 그런 금희를 석호동무가 외면한다면 그는 정말 견뎌내지 못할거요. 그는 석호동물 변함없이 뜨겁게 사랑하기때문에 만나주지 않았소. 누구보다 일터에 대한 애착이 컸기때문에 사직서를 냈을거요. 석호동무, 나를 용서해주는 심정으로 금희를 제발 너그럽게 대해주오. 부탁이오.》

한대식이 절절히 권고했으나 석호의 랭랭한 태도는 완강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아침에 있은 일이였었다.

이런 석호인지라 석근수의 말이라고 하여 선뜻 받아들일 그가 아니였다.

석근수는 아무 대답없이 발끝만 내려다보며 걷는 라석호를 못마땅히 건너다보다가 따지듯 다과댔다.

《자네 왜 대답이 없나?》

《차차 기회를 봐서 만나보겠습니다.》

《사내가 너무 옹졸하게 굴지 말게. 금희가 그렇게 된데는 옆에 사람들 잘못이 더 커. 내가 제구실을 못했네. 금희를 탓하겠으면 공장당위원인 나를 후려치게. 그 깨끗한 금희에게 티를 앉게 한걸 생각하면 잠이 다 오질 않네. 그런데 자넨 뭘 잘했다구 뿔질인가. 만약 금희한테 조금이라두 간격을 두고 낯을 붉힌다면 자네를 사람값에 넣지두 않겠네. 알겠나?》

《아바이, 그건 너무합니다. 제 마음도 좀 리해해…》

《너무하긴 뭐가 너무해. 사람의 심장은 더울 때나 추울 때나 같은 열기를 가지고 뛰고있네. 춥다고 심장의 열도가 떨어진다면 그건 벌써 온전한 사람이 아니야.》

석근수의 노기띤 어조는 추상같았다. 라석호앞에 이처럼 아프게 매질하는것은 처음이다. 마디마디에 가슴을 세차게 울려주는 그 천금같은 타이름에 한대식은 자신도 깊은 자책에 잠겨들며 확신있게 대답했다.

《아바이, 맘 놓으십시오. 아무러면 석호동무가 금희를 잊겠습니까. 첫사랑인데.》

《금희를 잊을수야 없겠지요. 그렇지만 사랑이야 변심없이 뜨겁게 해야 할게 아닙네까. 솔직히 이런 측면에선 연구사선생한테도 섭섭한 점이 많쉐다.》

《아바이, 그래서 요즘 심심히 자신을 검토해보고있습니다. 아마 제가 이 공장에 내려오지 않고 서재나 연구실에 그냥 있었더라면 사람구실을 못하고 말았을겁니다. 저는 발생로를 성공한것과는 대비도 안될 그런 귀중한것을 받아안았습니다.》

《이거 한마디 하기가 무섭군요. 내 다시는 선생앞에 무슨 말을 않겠수다. 허허…》

석근수는 어깨를 들썽거리며 호탕하게 웃었다.

한대식은 그 웃음소리가 한없이 부드럽고 따스하고 즐겁게만 들렸다.

그들이 회의실에 도착했을 때 거기에는 이미 종업원들이 꽉 들어차있었다.

허리를 굽히고 서둘러 빈자리를 찾고있는데 좌석을 정리하고있던 지령장이 그들을 띠여보고 둔한 몸을 뚱기적거리며 바삐 다가왔다.

《왜들 이렇게 늦었습니까. 기본주인공들인데.》

그는 별스레 반기며 그들 셋을 맨 앞자리로 안내했다.

이윽하여 과학원 부원장 강지창과 화학성 부상 그리고 지배인 방하철이 주석단에 나왔다.

좌석이 정리되자 강지창이 연탁으로 나왔다. 그는 회의실을 쭉 둘러보다가 맨앞에 앉은 한대식과 석근수, 라석호들을 발견하자 고개를 끄덕이며 눈웃음을 보내주었다.

강지창이 낮으나 흥분어린 목소리로 말을 뗐다.

《여러분, 저는 먼저 위대한 수령님께서 주신 교시내용을 전달하겠습니다.》

그러자 회의실은 잠짓해지며 숭엄한 침묵이 깃들었다.

《현재 이 공장에서 중간시험단계에 있는 무연탄발생로에 대한 구체적인 실태보고를 받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아주 흥미있는 일을 해놓았다고 커다란 만족을 표시하시면서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교시하시였습니다.

〈무연탄을 가지고 비료를 만들고싶은것은 내가 오래전부터 바라던것입니다. 정말 큰일을 해놓았습니다.

내 마음이 더 기쁘고 반가운것은 출신과 경력이 어둡소 발생로의 생산공정이 어떻소 하며 갖은 시비질과 암해책동까지 있었으나 조금도 동요없이 자기의 신념을 끝까지 지켜낸 한대식연구사를 알게 된것입니다. 사람은 이렇게 의리가 있고 신념이 강해야 합니다. 그는 해방직후부터 우리가 아껴오는 오랜 인테리입니다.

과학자는 나라의 귀중한 보배입니다. 이런 보배들을 헐뜯고 모해하는것은 우리 당의 뜻에 도전하는 나쁜놈들입니다.

우리가 협동화방침을 내놓았을 때도 바로 이와 같은자들이 물질기술적토대가 허약하오 시기상조요 하며 악랄하게 막아나섰댔습니다. 그렇지만 협동화는 지체할수 없는 농민들의 절실한 요구이므로 확신성있게 내밀어 결국 작년도말까지 아주 짧은 기간내에 훌륭히 끝낼수 있었습니다.

내가 한대식연구사를 높이 평가하는것은 우리의 현실에 발을 든든히 붙이고 우리 혁명에 필요한것부터 해결하려고 애쓴 그의 애국적소행입니다.

바로 이런 사람만이 나라와 인민을 진정으로 사랑한다고 할수 있으며 주체가 확고하다고 말할수 있습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한대식연구사에게 이처럼 높은 치하의 교시를 주시였습니다.》

순간 모임장은 떠나갈듯 폭풍같은 박수가 터졌다. 요란한 박수소리는 오래도록 그칠줄 몰랐다.

참가자들은 격랑을 만난 바다처럼 뒤설레였다.

《수령님, 저는 나라에 막대한 손해를 준 오늘에야 비로소 끝을 본 불미한 과학자입니다. 해방직후부터 우리 과학자들을 그처럼 귀히 여기시고 내세워주신 그 높은 신임과 배려가 없었다면 저같은게 무슨 존재가치가 있었겠습니까.》

너무나 뜻밖에 그리고 무엇이라 이름할수 없는 과분한 평가의 교시에 그는 눈물이 앞을 가리우고 심장이 튀여나올듯 맹렬히 높뛰여 자신을 주체할수가 없었다.

그는 북받치는 격정을 끝내 참을수 없어 《헉!-》하고 얼굴을 싸쥐며 오열을 터뜨렸다. 자꾸만 터져나오는 오열은 전률을 일으키듯 온몸을 세차게 흔들어댔고 헉헉 흐느끼는 감격의 울음소리는 더욱더 커졌다. 그러자 요란한 박수소리가 점차 멎더니 한순간 장내는 짐짓해졌다. 이때 뒤쪽 어디선가 짓눌린듯 한 녀인의 가느다란 흐느낌소리가 팽팽하게 헹기운 악기의 현줄처럼 참가자들의 심금을 짜릿하게 흔들어놓았다. 혜련의 목메인 흐느낌이였다.

눈굽이 축축히 젖어든 참가자들이 오열에 떠는 한대식과 한쪽 구석에 조심스레 앉아 흐느낌소리도 맘대로 못내며 어깨를 들먹이는 혜련을 목이 메여 바라본다.

참가자들의 대부분이 아직 한대식부부를 잘 모르고있었으나 위대한 수령님의 높은 치하의 한두마디 말씀속에 그들의 순편치 않은 과거와 오늘의 영광이 잇닿아있고 한몸바쳐 헌신해온 땀과 열매가 얼마나 고귀한가를 뜨겁게 체감하고있었다.

《연구사선생!》

석근수가 격한 소리로 부르며 한대식의 어깨를 꽉 그러안았다. 잔주름이 몰려들어간 그의 우묵한 눈확에 그윽히 고였던 맑은것이 홀쭉한 볼을 타고 거침없이 흘러내렸다.

《아바이!-》

한대식은 어린애처럼 그의 품에 와락 얼굴을 묻었다. 서로 꽉 그러안은 그들은 북받치는 감격을 억제할수 없어 강지창이 무슨 말인가 계속 하고있었으나 더는 한마디도 알아들을수 없었다.

강지창이 열화같은 박수속에 연탁에서 물러나자 화학성 부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성에서 일을 잘못하여 위대한 수령님께 커다란 심려를 끼쳐드렸다고 심심히 비판한 후 전 부상 남주혁이 범한 심중한 과오와 그 후과에 대하여 낱낱이 밝혀놓았다.

마감에 그는 현재 벌리고있던 전해직장 확장공사준비를 즉시 중지하고 그자리에 무연탄발생로직장을 하루빨리 건설해야 되겠다고 격조높이 말했다.

회의 뒤끝에 발생로직장 건설과 관련한 실무자들의 협의회가 오랜시간에 걸쳐 진행되였다.

×

발생로직장 건설장은 련일 부글부글 끓어번졌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그처럼 깊은 관심을 가지시고 만족해하시는 발생로를 자기네 공장에 제일먼저 세운다는 긍지와 자부심으로 하여 건설자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듯 했다.

《발생로 1계단공사를 당창건기념일까지 끝내고 시비년도 비료생산에서 혁신을 이룩하자!》

《알탄직장 건설자들이여! 1211고지에 탄약을 생산보장해주는 마음으로 돌격앞으로!》

《모든것을 우리의 자재와 기술로!》

이런 힘있는 프랑카드들이 도처에 펄럭였고 도예술단 배우들과 소년단축하단, 가두녀성들이 노래와 춤과 지원물자를 가지고 끊임없이 밀려들었다.

공장에서는 《리수복돌격대》를 조직하고 건설자들에게 《40일전투》를 호소했다.

한편 현장건설지휘부를 내왔는데 방하철이 이 사업을 자신이 직접 맡아안고 현장에서 침식하고있었다.

시공책임기사로는 라석호가 임명되였다.

강지창은 며칠 체류하면서 과학기술적으로 제기된 문제를 종합하여 내각에 건의했다. 내각에서는 라석호가 연구개발한 금야탄대용점결제가 완전히 공업화될 때까지 길주에서 공장까지 직송체계를 세우도록 조치를 취함으로써 그처럼 애먹던 점결제를 아무런 지장없이 공급받게 되였다.

건설공사가 단대목에 오르고 대상설비들이 련이어 건설장에 도착하던 어느날 중낮때다.

강지창은 떠나기에 앞서 현장지휘부를 찾아갔다. 저녁차로 한대식연구사와 함께 올라가기로 되였는데 그의 형편도 알아볼겸 사람들을 만나 인사를 나누고싶었다.

마침 점심시간이 되여 널판자로 지은 가설막안에 지휘부성원들이 다 모여있었다. 작업복을 입고 목에 수건을 건 방하철이가 앞에 나와 서서 팔을 흔들어대며 무슨 말인가 열을 올리고있었다.

《식사들은 하지 않고 무슨 모임을 벌려놨소?》

강지창이 우선우선한 얼굴로 가설막안에 들어서자 지휘부성원들이 서둘러 일어서며 반겨맞았다.

방하철이 한발 나서며 하소연하듯 한마디 했다.

《부원장동지, 이거 골치아픈 문제가 또 하나 생겼습니다.》

《난 요즘 방하철동무가 청춘으로 되살아났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무슨 우는소릴 합니까?》

《청춘이 다 뭡니까. 저기 앉아 시물시물 웃고있는 한대식연구사때문에 또 과오를 범할것 같아 잠이 다 안옵니다.》

《허허…》

방하철이 정말 우는 소리를 하자 사람들이 어깨를 들썽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말 아예 마시오. 지배인동무가 이번까지 과오를 범하면 난 이 공장에 발길도 돌리지 않겠습니다. 그래 무슨 문제가 제기됐습니까?》

강지창이 역시 웃는 낯으로 물었다.

《글쎄 이 알탄발생로를 일떠세우기도전에 이번엔 또 가루탄발생로를 해야 하겠다는겁니다.》

《그건 무슨 말입니까? 연구사동문 저녁차루 나와 함께 올라가기루 돼있는데. 과학원에서 다른 과제를 주자고 합니다. 한대식동무의 실장이 얼마나 신신당부했다구요.》

《제발 데리고 올라가주십시오. 연구사가 여기 있으면 정말 정신차릴수가 없다니까요.》

사람들속에서 또다시 유쾌한 웃음이 터졌다.

《부원장동지, 그러지 않아도 제가 찾아가 만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가루탄발생로란 무슨 말이요?》

강지창은 앞으로 다가서며 낮은소리로 말하는 한대식을 의아해서 쳐다봤다.

《저는 위대한 수령님의 분에 넘친 치하의 교시를 받고 많은것을 생각했습니다. 이번에 완성한 알탄발생로는 석탄을 종합처리하는 측면에서 아직 해결 못한 점들이 있습니다. 이것이 괴로왔습니다.

위대한 수령님께 더 큰 만족을 드릴수 있는 발생로로 전환시키자. 이렇게 결심하고 가루탄발생로에 대한 연구를 심화시켜보니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현장동무들과 토론해봤더니 화학기계전문가인 지배인동지가 쌍수를 들고 대찬성이 아니겠습니까. 기계설비부문은 자기가 전적으로 맡겠다구 말입니다. 방금전에도 그걸 가지고 론쟁을 벌렸습니다.

부원장동지, 신심이 생깁니다. 저를 여기에 그냥 떨쿼주십시오.》

《?!…》

강지창은 가슴이 뭉클했다. 지칠줄도 굴할줄도 모르는 이 불덩이같은 인간에게 무슨 다른 대답을 하랴. 그러나 그는 잠시 주저하지 않을수 없었다. 가루탄발생로는 두말할것없이 우월하다.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연구과제인가. 한생을 다 바친다 해도 그 성공을 예언할수 없다.

지치고 피로한 그에게 지난날보다 몇배나 더 간고한 연구과제를 또 맡긴다는것은 암만 그래도 지나친 부담이다.

강지창이 아무 대답이 없자 석근수가 한걸음 나섰다.

《과학원에서 막급한 과제가 아니라면 연구사선생을 우리한테 남게 해주시우. 그것이 연구사선생의 간절한 소망인데 우리가 힘을 합쳐 도와주겠습니다.》

《부원장동지, 우리는 한대식선생의 결심을 적극 지지합니다. 우리 현장기술자들이 앞장에 서겠습니다.》

강지창은 석근수와 라석호의 손을 억세게 그러잡고 격동되여 말했다.

《아바이, 동무들, 정말 고맙습니다. 저도 힘이 솟습니다. 이곳 기술자들과 로동계급의 의도를 과학원에 반영하고 우리 과학자들도 힘껏 도와나서겠습니다.》

강지창은 부러운 눈길로 한대식을 바라보았다. 그는 진정 행복한 사람이였다.

이런 사람들속에서 이런 적극적인 지지를 받는다면 가루탄발생로도 멀지 않아 성공할수 있다는 확신이 생겼다.

마음이 푹 놓인 그는 한대식을 떨쿼두기로 맘먹었다.

그가 지휘부성원들과 작별의 악수를 나누고있을 때였다.

《안녕들 하십니까?》

하는 또랑또랑한 목소리와 함께 살결맑고 두눈이 오목하여 귀엽게 보이는 처녀애가 머리우에 손을 깍듯이 올리고 소년단인사를 했다.

그의 상큼한 목에선 빨간 넥타이가 팔랑팔랑 날렸다.

《오, 우리 선화가 또 왔구나.》

《합숙관리원 리숙동무의 딸입니다. 지배인동지가 집에 들어가지 않자 구기자시롭을 비롯한 갖가지 약초를 넣은 단물을 이렇게 매일 가지고 나온답니다.

그 덕에 우리도 요즘은 지배인대접을 받고있지요.》

처녀애를 귀엽게 바라보고있는 강지창에게 라석호가 한바탕 자랑을 엮었다.

방하철은 그 말이 듣기 흡족한듯 환한 웃음을 띠우고 선화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아저씨, 엄마가 편지를 줘요. 며칠 어디에 갔다 오겠다면서.》

선화가 무슨 큰 비밀이나 알려주듯 두손을 방하철의 귀에 앙징스레 모아붙이고 소곤거렸다.

《이리 주렴, 여기 모인 어른들은 봐두 일없단다.》

《아니예요. 절대로 다른 사람들 보이지 말랬어요.》

선화는 모여선 사람들을 할금할금 쳐다보며 몸깊숙이 간수했던 편지봉투를 꺼내 얼른 방하철의 손에 쥐여주었다.

귀여운 딸애의 재롱을 받는것 같아 버죽이 웃고있던 방하철이 편지의 겉봉을 뜯고 속지를 꺼내들었다.

편지를 내려읽던 그의 얼굴색이 점차로 창백해졌다.

《선화야,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응?! 선화야…》

방하철이 한 무릎을 꺾고 와락 그러안으며 격해서 부르짖었다.

《아저씨, 왜 그러나요? 우리 엄마가 뭐라고 했나요?》

《선화야!… 그런데 너희 엄만 어디로 갔단 말이냐,? 선화야…》

선화를 부둥켜안고 정신잃은 사람처럼 그애의 이름만 자꾸 뇌이던 방하철이 성큼 일어나 한대식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는 애끓는 소리로 다우쳐 물었다.

《연구사선생, 선생은 알고있겠지요. 리숙동무 행처를?… 그가 어디로 갔습니까? 선생한테야 무슨 말인가 했을게 아닙니까?》

《아니 왜 그러십니까?》

방하철은 대답대신 손에 들고있던 편지를 내밀었다. 편지를 든 그의 손은 가늘게 떨렸고 두눈길은 구원을 청하듯 한대식의 얼굴에서 떨어질줄 몰랐다.

대뜸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진것을 직감한 한대식이 급급히 편지를 펼쳐들었다.

그 성품그대로 하얀 백지우에 한자한자 정성껏 새겨넣은 글발에는 이런 내용이 담겨있었다.

 

늘 곁에 있으면서 이처럼 편지를 쓸수밖에 없는 저의 궁색하고 옹졸한 심정을 널리 리해하여주십시오.

언젠가 지배인동지는 태백산줄기 송계골에 두고 온 갓난 딸애에 대하여 말씀해준적이 있었지요. 지금도 눈만 감으면 이름조차 지어주지 못하고 헤여진 그 애어린 딸이 애타게 아버지를 부르며 원쑤를 갚아달라고 피타게 절규하는 목소리가 들려오는것 같다고 말입니다.

지배인동지의 가슴에 피멍이 든 그 원한 맺힌 이야기를 들은 후 저는 너무도 기가 막혀 며칠간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 딸이 바로 우리의 선화였습니다.…

저는 50년도 재진격당시 지주놈한테 끌려나간 남편을 찾아 멀리 남쪽까지 나갔더랬습니다. 내성 저수지가 보이는 나직한 산간마을에 이르렀을 때였습니다. 까마귀떼처럼 날아온 놈들의 비행기가 미친듯이 폭탄을 퍼붓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저는 남편을 어서 따라가 찾아야 되겠다는 한가지생각으로 무서운것이 없었습니다. 옆에서 폭탄이 튀고 폭풍에 치마폭이 찢겨나갔습니다. 저는 제정신이 아니였습니다. 그런데 이때 쓰러진 엄마의 젖가슴을 애타게 허비며 목이 쉬여 울고있는 어린애가 보였습니다. 나는 차마 그냥 지나갈수가 없어 그애를 등에 업었습니다. 놈들의 비행기가 사라진 후 한 로파에게 물었더니 폭격에 잘못된 저 녀인은 전쟁전 북에 들어간 남편을 만나겠다고 태백산끝 송계골을 떠나 여기까지 왔다고 하더군요.

저는 이렇게 되여 선화를 만나게 되였습니다. 저는 이날까지 제가 놈들의 폭격속에서 선화를 구원해줬다고는 한번도 생각해본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선화가 나의 생명의 은인 같았습니다. 왜냐면 선화가 없다면 나는 이미 이 세상사람이 아니였습니다. 저는 그때 그처럼 애타게 찾아 헤매던 남편이 지주놈의 총에 맞아 잘못됐다는것을 알자 당장 강물에 빠져 죽으려 했습니다.

남편없이 저 혼자 살고싶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강물에 몸을 던지지 못했습니다. 등에 업힌 선화가 저의 목을 꼭 그러안고 엄마라고 부르지 않겠습니까.

전쟁 3년의 그 어려운 시기와 전후의 그 바쁜 때 저는 선화를 눈앞에 보면서 힘든것을 참아냈습니다. 선화는 저의 생활에서 등불과 같았습니다. 선화는 저의 의지였고 행복이였으며 희망이였습니다.…

지배인동지, 저는 선화를 아버지의 품에 돌려주기로 결심했습니다.

말을 배우기 시작할 때부터 아버지를 찾던 딸입니다. 고사리같은 손마디를 꼽아가며 애타게 기다리던 그 아버지인데 눈앞에 보면서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한다면, 그 사연을 알고있으면서 욕심스레 혼자서 끼고있다면 어찌 저를 사람이라 하겠습니까. 열살이 넘도록 아버지의 모습을 그토록 보고싶어하던 딸은 그 아버지의 품에 안겨야 하며 딸때문에 가슴에 피멍이 든 아버지는 그 딸을 그러안고 이때까지 누리지 못한 락을 백배천배로 더 누려야 합니다. 그래야 미국놈들의 폭격에 눈도 감지 못한채 원한 품고 저세상으로 간 선화의 어머니도 늦게나마 안식의 령혼을 찾을겁니다.

지배인동지, 이름도 모르고 등에 업고 온 애여서 제가 맘드는 이름을 달아 선화라고 지었습니다. 그애는 총명하고 기억력이 좋아 사회과학보다 지배인동지처럼 공학계통으로 발전시켰으면 합니다. 꽃도 란만하고 호함진것보다 향기짙은 백리향 같은것을 좋아하는것으로 보아 조용하고 생각하기를 즐기는 내성적인 성격같습니다.

지배인동지, 선화를 어떤 방법으로 아버지에게 돌려드릴가 하고 여러모로 궁리하던끝에 제가 선화의 눈앞에 띄우지 않는것이 제일 상책인것 같아 이렇게 떠나갑니다. 그러니 앞으로 저를 찾을 생각은 아예 마십시오. 선화가 이제는 지배인동지와 퍽 친숙해졌으리라고 봅니다. 선화가 철이 들어 생활을 알게 될 때 그때 기회가 있으면 한번 찾아오겠습니다.

선화에게 모든 사연을 다 말해주고 떠나고싶지만 그 어린 가슴에 너무 큰 타격이 될것 같아… 차마 그렇게는…

지배인동지의 귀중한 사업과 부녀간의 행복을 부디 축원합니다. 먼길을 떠나면서…

합숙관리원 리숙 드림

 

편지를 다 읽고난 한대식은 축축해진 눈길로 먼 하늘가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 어떤 곡진한 사연이 깃든 편지임을 간파한 눈길들이 한대식의 근엄해진 얼굴만 쳐다봤다. 했으나 그는 오래도록 움직일줄 몰랐다.

이윽하여 한대식은 조심스레 석근수한테 편지를 넘겨주었다.

《선생님, 무슨 편집니까?》

라석호가 참지 못하고 성급히 물었다.

《무슨 편진가구요?… 이건 편지가 아니라 불덩어리입니다. 난 리숙동무가 이처럼 뜨겁게 저의 가슴을 달구어놓을줄은 몰랐습니다.》

한대식의 목소리는 석쉼하게 울렸다.

방하철이 한대식의 두손을 꽉 그러쥐며 부르짖듯 웨쳤다. 그의 볼우로는 더운것이 흘러내린것이 보였다.

《연구사선생, 이 일을 어쩌면 좋습니까? 이렇게 한마디 말도 없이 떠나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제가… 제가 그렇게도 무정한가요? 그 불덩어리 같은 녀인이 왜 저한테는 그처럼 랭랭한가 말입니다.》

《지배인동지, 너무 흥분하지 말고 어서 리숙동무를 찾아 떠나십시오. 그리구 꼭 데려와야 합니다.》

《명심하겠습니다. 이 세상을 다 뒤져서라도 반드시 찾아오고야 말겠습니다.》

방하철의 목소리는 비장하게 울렸다.

《아바이, 전 이길루 리숙동무를 찾아 떠나려고 합니다.》

편지를 든 석근수아바이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두말할게 있나. 그것보다 더 급한 일이 어디 또 있겠나. 석호기산 빨리 가서 역으로 나가는 차를 하나 조직해주게.》

《알겠습니다. 아바이.》

라석호가 힘차게 대답하고 차고를 향해 뛰여갔다. 그도 사태의 진상을 짐작했던것이다.

길떠날 차비로 바삐 옷을 갈아입은 방하철이 아직도 무슨 영문인지 몰라 겁먹은듯 오목눈만 깜빡이는 선화를 담쑥 품에 안았다.

《선화야, 엄마가 멀리로 떠나간것은 전적으로 내탓이다. 내가 이때까지 사람구실을 변변히 못했구나. 나를 용서해다오. 내가 엄마를 꼭 찾아오련다. 너를 두고 엄마가 어딜 간단 말이냐. 너없인 하루도 맘편히 살수 없는 엄마가 아니냐.》

그 목소리가 어찌나 절절하고 다감했던지 선화는 그만 두팔을 활짝 벌려 방하철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잠시후 화물차 한대가 급히 다가와 그들옆에 멎었다. 방하철이 반달음치듯 운전칸에 뛰여올랐다.

《리숙동문 아마 고향인 양덕으로 갔을겁니다. 거기밖에 다른 고장으론 가지 않았을겁니다.》

한대식이 운전칸문을 닫아주며 나직이 귀띔했다.

먼지를 뽀얗게 일쿠며 내닫는 화물차를 이윽토록 바라보던 강지창이 의혹을 숨기지 못했다.

《무슨 일입니까. 갑자기?…》

《지배인동지한테 큰 경사가 생긴것 같습니다.》

《경사라니, 그건 무슨 말이오?》

《후에 한번 꼭 내려오십시오. 그러면 아마 놀라실겁니다.》

《이거 정말 사람간을 태우누만. 연구사동무가 그렇게 큰소리치니 내 만사를 제쳐놓고 꼭 다시 오겠소.》

아직 의혹을 놓지 못한 강지창이 부쩍 흥미를 느꼈다. 한대식은 몸가짐을 바로하며 정숙한 어조로 말했다.

《부원장동지, 한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과학원에 올라가시면 새로 시작하려는 가루탄발생로에 대해선 근심하지 않아도 된다고 전해주십시오.》

《알겠소. 꼭 전하지. 나두 왜 그런지 이 공장을 떠나고싶지 않구만. 연구사동무가 막 부럽단 말이오.》

한대식은 갑자기 숨쉬기가 가빠지는감을 느꼈다. 온몸의 피가 가슴 한곳으로 몰려드는것 같았다. 그것은 삶에 대한 더없는 희열이였고 강렬한 지향이였다.

 

마감이야기

그로부터 몇년후 어느 가을날이다.

질풍처럼 내달리는 남행렬차의 차창가에 나이 지숙한 한 장년이 앉아있었다.

평양에서 열린 최고인민회의에 참가하고 연구소로 돌아가는 한대식이다. 그는 차창밖으로 흘러가는 마가을의 풍경에 온넋을 빼앗긴듯 오래도록 움직일줄 몰랐다.

터질듯 알알이 여물어 무겁게 드리운 시누런 논벼며 팔뚝같은 이삭을 떠멘 무연한 강냉이숲, 릉선과 골마다 제멋대로의 다양한 색갈로 주렁진 백과들…

그 어디를 봐도 금시 땅이 내려앉을듯 푹 실린 대풍이다. 차창으로 훅훅 밀려드는 훈풍조차 낟알익는 냄새, 과일향기로 손에 잡힐듯 껍진한데 이대로 그냥 앉아있다간 그만 취해버릴것만 같았다.

한대식은 부지불식간 고개를 높이 들어 이 땅우에 온갖 만물을 자래워 풍성한 황금의 향연을 마련해놓은 은혜로운 태양을 우러렀다.

이 순간 그의 눈빛은 이름할수 없는 환희로 확 빛났다. 태양보다 더 밝고 따스하던 그 미소, 이 세상 그 어디 가서도 들어볼수 없는 그 다심하시던 음성…

그 미소와 그 음성이 온 우주에 가득찬것만 같았다.

이번 최고인민회의에서 과학자를 대표하여 연단에 나섰을 때 제일먼저 박수를 보내주시며 우리의 오랜 인테리들이 일을 많이 했다고 우리의 주체혁명위업에 큰몫을 맡고있다고 그리도 대견해하시던 어버이수령님의 그 미소, 그 음성을 다 받아안기에는 그의 가슴이 너무도 작았다.

우리 인테리들이 당을 따라 주체혁명위업에 조금이나마 이바지했고 수령님께 기쁨을 드릴수 있었다면 그것은 명실공히 수령님 공적이시였다.그것은 인테리들을 위해 바친 수령님의 그 로고와 심려와 혈투의 결과였고 인테리들을 친자식보다 더 귀중히 여기시여 한사람한사람에게 뜨거운 애정을 부어주신 열풍같은 사랑의 고귀한 결실인것이다.

이때까지 인류는 이미 지나간 과거를 어쩔수 없는 력사의 흔적으로 알고있었다. 하지만 우리의 수령님께서는 오랜 인테리들의 떳떳치 못했던 치욕의 지난날을 더없이 가슴아파하시며 그 나날에 누리지 못한 인생의 모든것을 몇십, 몇백배로 합치여 안겨주셨던것이다.

정녕 수령님이 계시여 우리 인테리들의 과거가 이처럼 빛날수 있었고 수령님 계시여 보람찬 오늘과 환희의 래일이 약속되여있는것이다.

세상에 이런 위인, 이런 수령, 이런 어버이가 그 어디에 또 계신단 말인가.

이는 오직 우리 민족, 우리 조선사람만이 가질수 있는 긍지이고 자랑이며 영광인것이다.

한대식은 그만 어린애처럼 울음을 터치고말았다. 어깨와 온몸이 세차게 들먹였고 눈물은 샘솟듯 쏟아져나왔다. 국사를 론하는 최고인민회의의 엄숙한 자리임을 잘 알고있었으나 폭발적으로 터지는 격정을 도저히 막아낼 힘이 없었다. 그러자 회의참가자들은 민망한 눈길로 마음을 조였다.

《어서 큰소리로 우시오. 한대식선생은 언제한번 맘놓고 울어볼새도 없었을거요. 그리고 앞으로 다시는 울지 말아야지.》

회의장은 삽시에 숭엄해졌다. 참가자들의 눈빛과 얼굴에서 그리고 가슴깊이에서 설레임의 파도가 폭풍을 안은 바다처럼 세차게 뒤번져졌다.

수령님의 그 천금같은 말씀속에 곡절많은 오랜 인테리의 어제와 영광의 오늘이 함축되여있음을 참가자들은 너무도 잘 알고있었다.

《수령님, 전 너무도 기뻐서… 이 행복이 정녕 꿈만같아 그럽니다.…》

목메여 속으로 말씀올리는 한대식의 눈앞에는 지나간 한생이 한순간에 진하게 새겨졌다.

나라없던 그 시기 석탄에 대한 첫 론문을 썼다가 반도인이라 하여 시약관리원으로 강직됐던 피눈물나던 설음이며 해방직후 절망에 빠져 은신해있던 기막힌 일, 그후 수령님의 다함없는 로고와 심려와 세심한 관심 속에 마침내 숨져가던 인생을 되찾았을 때 불길처럼 타오르던 생의 그 환희…

더욱 잊을수 없는것은 무연탄발생로를 안고 씨름하던 그 간고했던 나날들과 로가 폭파되여 법적제재를 받았을 때의 암담했던 일이였다.

그 시련의 나날 어버이수령님이 아니였다면 자신의 운명은 영낙없이 파멸을 면치 못했을것이다.

그때 수령님께서는 법적제재를 받고있던 자기에게 오히려 주체가 확고히 서고 신념이 강한 애국자라고 높이 치하해주셨을뿐아니라 강지창부원장을 책임자로 하는 수십명의 유능한 과학자, 기술자돌격대를 내려보내주시는 뜨거운 배려를 돌려주시였다. 국가적인 강력한 과학자, 기술자집단이 내려오자 온 공장은 부글부글 끓어번졌다. 낮과 밤이 따로 없었다. 충성의 전투로 천리마의 대고조가 세차게 타번지던 그 다음해 6월, 사람들이 상상으로만 그려보던 발생로직장이 드디여 세찬 동음을 울리지 않았던가. 실로 감회깊은 사연이 헤아릴수 없이 많았다. 이 나날들에 그는 박사, 교수의 칭호를 받았고 공화국영웅으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성장했다.

그 누가 사람의 한생이 짧다고 아수해했던가.

이제는 귀밑머리 희슥해졌으나 한대식은 자기가 늙었다는 생각이 티끌만큼도 들지 않았다.

밤과 낮 사계절이 있어 세월의 흐름을 알지 그 계선이 무시되면 아무것도 느낄수 없는것처럼 복락으로 충만되고 사색이 곧 창조와 현실로 되는 자신의 삶은 끝이 없이 영원할것만 같았다.

위대한 태양이 있어 만물이 영생하듯…

렬차는 여전히 질풍처럼 달리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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