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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하철은 요즘 참기 어려울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부상 남주혁이 이곳 실태를 어떻게 험하게 반영했던지 세명으로 구성된 성의 료해그루빠가 내려와 지배인사업정형을 전면적으로 검토했다. 검열은 이미 각오하고있었으니 두려울것 없는데 하루 세시간씩 그들과 마주앉아있는것이 딱 질색이였다.
그는 이 세시간이 아까와 아예 공장에서 밥을 먹고 점심시간과 퇴근후 깊은 밤에 검토를 받도록 조절받았으나 괴롭기는 마찬가지였다.
오늘은 마침 검열성원들이 다른 문제가 제기됐다고 하여 관리일군합숙에 들어온 방하철이다. 좀 안정하고싶었다. 그런데 그 타산이 잘못된것 같았다. 너무 조용하고 아늑하기만 하여 괴로움을 다잡을수 없었다. 그는 생각던 끝에 물조리를 들고 꽃밭으로 갔다. 아무리 피곤하고 복잡할 때도 꽃향기를 마시며 꽃밭을 가꾸느라면 어느새 거뜬해지군 하던 방하철이다. 하지만 이것 역시 오늘은 도무지 흥취가 나지 않고 어째선지 매캐한 담배연기가 코끝을 자극해왔다. 그때야 그는 한손에 아직도 담배가 들려있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내가 제정신이 아니군.)
부단한 활동과 사색, 북받치는 의욕만이 삶의 본도라고 인정하던 자신이 이런 처지에 빠질줄은 상상도 할수 없었다. 그럴수록 부상 남주혁의 터무니없는 조치가 격분을 자아냈다.
과연 나에게 부족한것이 무엇인가? 기술인가, 능력인가 아니면 요구성인가?
이날이때까지 가정도 꾸릴 사이없이 다만 일밖에 모르며 달려왔는데 이런 무서운 독단과 관료가 어디 있단 말인가. 불길처럼 솟구치던 이런 불만과 반발은 한대식연구사한테 생각이 쏠릴 때마다 거품처럼 사그러졌다.
요즘 한대식연구사 역시 료해그루빠의 검토를 받고있는데 그를 보기가 막 죄스러웠다. 그가 헤여날길 없는 궁지에 몰려 곤경을 겪게 된 책임이 자기에게 있다고 인정하는 방하철이다.
아직도 사고심의장에서 격조높이 웨치던 한대식의 확신에 넘친 음성이 우뢰소리처럼 들려오는것만 같았다.
《우리의 현실이 절박히 요구하고 우리 혁명에 필요한것부터 해결하는것이 수령님의 뜻이고 우리의 주체라고 말할수 있습니다.》
아, 얼마나 신념에 넘친 불같은 호소인가. 그런 강철의 신념과 지조를 지녔기에 걸음걸음 덮씌워지는 갖은 난관과 모해에도 굴함없이 한치의 양보도 모르고 굳세게 살아올수 있은것이다.
방하철은 혀끝을 꽉 깨물며 두눈을 지그시 감았다. 자기와 너무도 대조를 이루는 한대식이였다. 이때까지 자신도 당의 높은 신임과 은덕에 보답하자고 숨가삐 달려왔건만 돌아보니 시대와 현실이 바라는 그런 넋, 그런 삶의 궤도와는 아득할 정도로 탈선되여있었다. 탈선의 원인은 명백했다. 외국에 가서 배운것이 좀 있다고 하여 주견과 욕망만 앞세우다보니 시대와 인간들을 보는 눈이 어두워졌던것이다.
(나는 이미 지배인자격을 상실했다. 지배인커녕 인간으로서의 그 심장마저 얼마나 랭랭하고 메말랐던가.)
자책이 크고 깊을수록 진정 한대식연구사가 고맙게 생각되였다. 자신의 과오와 실책으로 그 후과는 비할바없이 컸지만 그대신 천금을 주고도 살수 없는 삶의 좌우명을 다시금 깨달은것이다. 그것은 어버이수령님의 뜻을 항상 자기의 숨결처럼 간직한 한대식연구사의 열풍같은 충성심이였다.
《왜 물을 주지 않고 그렇게 서만 있나요?》
방하철은 흠칫하며 생각에서 깨여났다. 언제 왔는지 선화가 빤히 올려다보고있었다. 그때야 그는 자기가 물조리를 든채 화단앞에 서있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방하철은 머루알같은 그 인상적인 두눈을 깜빡이며 이상하게 올려다보는 선화의 어깨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아저씨, 물조리를 주세요. 내가 하겠어요.》
선화는 묵묵히 생각에만 잠겨있는 지배인이 우스웠던지 생긋해보인 후 물조리를 앗아내여 화단우에 요리조리 흔들었다. 하얀 물줄기가 솰솰 뿜어내리자 옹기종기 모아붙어선 백일홍, 금전화, 제라늄 등의 빨갛고 노란 꽃송이들이 촉촉히 젖어들며 한들한들 춤을 춘다. 가운데 우뚝 뻗쳐오른 홍초에는 손이 모자라 물줄기가 닿지 않았다. 어느새 누렇게 뜬 잎이 서너개씩이나 붙어가지고도 키만 높이 솟아 거만스레 너풀대는 홍초가 위불없이 자기의 모습같아 방하철은 고개를 돌리고말았다.
《오늘은 집에서 식사하나요?》
《식사?… 그렇다.》
《야, 좋네. 오늘은 일요일인데 나와 함께 동물원구경 가자요?》
남산공원에 동물원이 새로 생겼는데 요즘 구경군들로 초만원을 이룬다고 한다. 방하철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선화의 첫 부탁을 들어주지 못하는것이 여간 민망스럽지 않았다.
《왜요?… 집에 있으면서 왜 못가요. 같이 가자요. 네?》
선화는 물조리를 놓고 방하철의 손목에 매달리며 졸라대기 시작했다. 언젠가 리숙이한테 가슴아픈 추억의 한토막을 이야기해준 다음날부터 매일 찾아오는 선화다. 일이 바빠 미처 들어오지 못하는 날이면 리숙이대신 선화가 밥그릇을 들고 사무실까지 찾아오군 하는데 그럴 때면 그들은 부녀처럼 다정히 마주앉아 밥을 나눠먹군 했다. 그래서인지 선화는 조금도 어려워하지 않고 마음놓고 응석을 부렸다.
《우리 이담에 엄마랑 함께 가자꾸나.》
《싫어요. 이담엔 우리 아버지하구 함께 갈래요. 엄마가 그러는데 우리 아버지가 인차 집에 온다고 했어요.》
《?!…》
《우리 아버지두 아저씨처럼 전쟁때 군대에 나가 훈장두 많이 타구 지금은 큰 공장 지배인을 한다구 그래요.》
방하철은 선화의 소원이 바랄수 없는 꿈이여서 눈굽만 뜨거워졌다.
아버지의 얼굴도 모르고 자란 이 어린것에게 진정 그런 일이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이때 남새버치를 들고 뜰안에 들어서던 리숙이가 방하철의 손에 매달려 칭얼대는 딸을 보고 나직이 타일렀다.
《선화야, 그러면 못쓴다.》
《그냥 놔두오. 내가 제구실을 못하고보니 선화의 부탁도 들어줄수 없구려.》
《엄마, 아버진 언제 오나. 매일 온다온다 하면서.》
선화가 어머니에게 푸념을 했다.
《이제 곧 오신다. 그때 다같이 동물원에 가서 실컷 구경하자꾸나. 그렇게 하지?》
《난 몰라.》
맑은것이 가랑가랑 고인 눈으로 어머니를 할끔 쳐다본 선화가 홱 돌아서더니 대문밖으로 달음박질쳐나갔다. 그의 뒤모습을 애틋이 바라보던 방하철이 말귀를 더듬으며 조심스레 물었다.
《저… 갑자기 선화의 아버지가 온다는건 무슨 말입니까?》
《미처 알려드리지 못해 미안합니다. 얼마전 주소안내소에서 회답이 왔더군요. 그렇게 찾던 선화의 아버지가 신의주에 있다고 말입니다.》
《아니 그게 사실입니까?!…》
《네, 전쟁때 잘못된줄 알았는데 심한 중상으로 오래동안 전상자병원에 있었더군요.》
이렇게 말한 리숙은 그만 황황히 고개를 돌려버렸다.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그러는것 같아 방하철이 부러 쾌활하게 말했다.《꿈같은 일입니다. 고진감래라 아주머니네 집에 웃음꽃이 피게 됐습니다.정말 축하합니다.》
고개를 돌린채 혀끝을 깨물고있던 리숙이 얼마후에야 조용히 입을 열었다.
《지배인동지, 제 한가지 묻고싶은것이 있습니다.》
《예, 어서요.》
《지배인동지는 왜 요즘 그렇게 얼굴색이 좋지 않습니까. 합숙에도 잘 안들어오시고.》
《내가 큰일을 저질렀는데… 아주머니도 지금 내 처지를 잘 알지 않습니까?》
《저두 지배인동지가 생각이 많으실줄 압니다. 하지만 뒤보다 앞을 더 중히 여기셔야지요. 그렇게 시름에 잠겨있으니 온 공장이 어두워지는것만 같아 막 안타깝습니다. 전 공부도 많이 했고 고생도 많이 하신 지배인동지에게 있어서 이번 기회가 오히려 더 큰힘으로 될줄 생각합니다.》
《아주머니!…》
방하철은 목이 탁 잠겨들어 고개를 푹 떨구고말았다. 이 얼마나 순결하고 진실한 믿음인가.
나라와 과학앞에 로동계급과 한대식부부앞에 씻을수 없는 과오를 저질러 그 어떤 처벌도 마다할수 없는 자기인데 리숙은 예전과 변함없이 굳게 믿고 떠밀어주는것이다. 방하철은 고개를 쳐들지 못한채 눈처럼 새하얀 리숙의 저고리앞섶과 부드럽게 쌍을 지어 길게 늘어진 옷고름만 바라보았다.
그가 갑자기 낯색이 굳어져 아무 대답이 없자 이에 당황해진 리숙의 갸름한 볼이 발깃하게 물들었다.
《지배인동지, 제가 주제넘은 소리를 했다면 용서해주세요.》
《아닙니다. 리숙동무, 정말 좋은 믿음 주어 감사합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진심이 느껴지는 방하철의 대답을 듣자 리숙의 그윽하고 사려깊은 두눈동자가 반짝 빛났다. 그 미소는 실오리같은 눈귀의 주름살을 거쳐 홍조를 띤 갸름한 볼과 윤기 흐르는 발깃한 입술로 서서히 퍼져갔다.
미소를 담은 얄팍한 입술사이로 기쁨어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저같은 사람의 말을 그렇게 높이 사주니 오히려 막 거북합니다. 진정 지배인동지의 마음이 그러하시다니 한가지 더 말씀드리고싶습니다.》
《예. 어서 말씀하십시오.》
《저… 아니 오늘은 그만두겠습니다. 후에… 이 문제만은 후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니 왜 그럽니까. 무엇이든 기탄없이 말하시오. 솔직히 리숙동무에게 사죄하고싶은 말이 많은데… 리숙동무가 그렇게 계선을 두면 제 마음이 더 무겁습니다.》
《아닙니다. 제가 너무 흥분했던가 봅니다. 후에 기회를 봐서 소청을 말씀드리겠으니 그때 탓하지만 말아주십시오.》
리숙은 몹시 당황해했다. 황급히 말을 삼키며 자신을 다잡지 못해하는 그답지 않은 행동이 이상했으나 더 물어볼수가 없었다.
《마침 여기에 둘이 다 있구만.》
울밖에서 석쉼한 소리가 들려오더니 석근수가 대문안으로 성큼 들어섰다.
고열을 내며 앓고있던 그는 사고심의가 있은 날부터 자리를 털고 일어났는데 다시는 누워있을념을 안했다.
《아주머니한테 한가지 부탁할 일이 있어서 왔수다.》
석근수의 말인즉 어제 아침 약초를 캔다며 집을 나간 혜련이 아직도 집에 돌아오지 않았는데 어쩐지 심상치 않다는것이다.
《약초를 캐러 갔으면 삼봉산으로 갔을거예요. 그런데 갑자기 약초는 왜 캐러 갔답니까?》
《바로 그게 문제요. 예심을 받고있는 그로서 그럴 경황이 없겠는데…》
잠시 말들이 없었다. 불길한 예감이 그들 세사람을 사로잡았던것이다.
《제가 찾아보겠어요. 그런데 지배인동지의 점심식사가…》
《리숙동무, 걱정 말고 어서 수고해주오. 아바이, 사람들을 좀더 파견해보지 않겠습니까?》
《소동을 피우지 맙세. 아직 사건처리도 끝나지 않은 사람인데.》
리숙은 간단한 행장을 갖추고 곧 삼봉산으로 떠났다. 그가 잰걸음으로 저 멀리 사라지자 방하철이 흥분어린 소리로 말했다.
《아바이, 리숙동무의 남편이 살아있다는 기별이 왔습니다.》
《무슨 꿈같은 소릴 하나?》
《전쟁때 잘못된줄 알았는데 전상자병원에 오래동안 있었다더군요. 지금은 신의주에 있다고 주소안내소에서 회답이 왔답니다.》
《??…》
석근수는 도무지 영문을 알수 없었다. 갑자기 무슨 남편이 살아 돌아온단 말인가.
리숙에 대해 너무도 잘 알고있는 석근수다. 그의 남편은 애당초 전상자병원에 갈수가 없는것이다. 필경 여기엔 무슨 곡절이 있었다.
《리숙의 남편이 정말 살아돌아온다면 얼마나 좋겠나. 지지리 고생만 하며 살아온 외로운 녀인이 아닌가. 살림이 너무나 어려워 아홉살때 민며느리로 들어가 갖은 고생을 하다가 해방을 맞아 혼례식을 하고 좀 살아볼가 했는데 이번엔 남편이란 사람이 덜컥 병에 걸리지 않았겠나…》
방하철은 충격이 실로 컸다. 언제나 상대의 마음을 밝게 정화시켜주군 하던 단아한 몸가짐과 부드러운 미소가 떠나지 않던 리숙의 그 밝고 조용한 가슴속에 그런 피맺힌 설음이 깃든줄은 생각도 못했다.
(그런데 리숙은 왜 딸한테 그런 거짓말을 했는가? 순진한 그 어린 넋에 아물수 없는 상처를 남기면 어찌려고 그런 엄청난 말을 하는가. 그 마음이 백설같이 깨끗하고 리해와 사려가 남달리 깊은 그가 아니던가?…)
그가 풀길없는 의혹에 잠겨 주근주근 뇌이는 석근수의 말을 듣고 있을 때 리숙은 삼봉산으로 뻗은 지름길로 반달음치고있었다.
리숙의 마음은 조급하고 불안했다. 그 성미 곧은 혜련이가 이틀째나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는것은 불길한 사변이 아닐수 없다.
그가 약초를 캐다가 늦었거나 힘이 지쳤다고 안돌아올순 없을것이다. 불안을 더 짙게 채색해주는것은 요즘 그의 남편과 본인에게 거듭 들씌워지는 엄청난 혐의다. 온실안의 화초처럼 연약한 그가 이 거듭되는 타격을 이겨낸다는것이 용이치 않았다.
떼구름처럼 몰려드는 불안속에 약초가 많은 골안에 들어선 그는 사위를 열심히 살펴봤다. 지배인의 건강과 구미에 맞는 산채와 약초를 뜯어가느라 이틀이 멀다하게 오르내린 삼봉산이여서 한눈에 환한 골짜기들이다. 혜련이 있을만 한 골안을 샅샅이 밟았으나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그는 릉선과 바위에 올라서서 목청껏 혜련을 불렀다.
《혜련선생- 혜련이-》
애타게 부르고 불렀으나 골안의 흐느낌인양 메아리만 소연하다. 극도로 초조해진 그는 이리저리 헤매며 온 산을 발칵 뒤졌다. 했으나 혜련의 모습은 종시 보이지 않았다. 리숙은 선뜩한 예감이 칼날처럼 가슴을 찔러대는것을 느끼며 진대나무를 그러안고 몸부림쳤다.
검푸른 이끼가 덕지덕지 붙은 벼랑밑 바위틈사이에 한 녀인이 반듯이 누워있었다. 혜련이다. 그는 자기 이름을 목타게 부르는 귀익은 소리를 들었고 치마폭이 찢기고 땀을 철철 흘리는 리숙이가 손에 잡힐듯 옆으로 지나치는것을 보았다.
그러나 이승과 저승의 갈림길에서 허덕이던 그는 그를 불러세울 힘이 없었다. 다만 가슴속에 진하게 찍힌 리숙의 그 고결한 품성과 잊을수 없는 고마움을 고스란히 간직해두려고 점차 멀어지는 발자국소리를 안타까이 새겨들었다.
어제아침 혜련은 마음속 번민을 이길수 없어 여기 삼봉산으로 왔었다. 힘이 진하도록 약초를 캐고 또 캐면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상념을 잊을것만 같았다. 그는 될수록 눈길이 미치지 않은 깊고 험한 벼랑을 톺아올랐는데 정말 희귀한 약초들이 많아 흥이 날 정도였다. 그러다가 아차! 하고 발을 헛짚는 순간 수십길 벼랑아래로 떨어졌다. 다행히 벼랑중턱 휘우듬히 뿌리박은 로송에 몸이 걸렸다가 아지가 꺾어지며 내리는바람에 겨우 숨이 붙어있게 되였다.
떨어질 때 생긴 상처의 피는 그만 진한듯 멎고 쑤시던 아픔도 없다. 감각을 잃은 몸은 솜우에 실린듯 편안했다. 정신이 들락날락 혼미해졌고 바람에 휘감긴듯 온몸이 천리만리로 실려가는것만 같았다. (내가 왜 이럴가. 여기가 어딘가?…)
그는 자꾸만 내리덮이는 눈시울을 강잉히 버티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득히 트인 푸른 창공엔 햇솜같은 구름이 둥실 떠있다. 한번만이라도 저 하늘을 맘껏 날아봤으면… 혜련은 자기에게도 창창한 저 하늘처럼 높고 푸른 꿈이 있었다는것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조선의 큐리부인이 되겠다고 청운의 꿈안고 정열에 불타던 때가 생시였던지 꿈이였던지… 돌이켜보면 그 시절은 탐구와 향학열에 불타던 랑만의 시기였다. 구름을 휘여잡던 그 시절 그의 꿈을 깨뜨릴 힘은 어디에도 없었다. 지어 하루라도 못보면 그리워 달려가고만싶던 스승이자 애인인 한대식의 절절한 권고조차 그의 향학열을 막을수 없었다. 서울로 나간 그는 그 길로 대학에 들어갔다.
그러던 어느날, 문득 그 애인이 서울에 나타났다. 딸을 데리러 왔다는 소리에 혜련의 량부모는 펄펄 뛰였다. 과학자의 한생이란 험난한 구배길과 같은데 무엇이 모자라 부디 그런 길을 택하는가. 아무리 사위감이 나무랄데 없다해도 과학자한테는 줄수 없다는것이다.
혜련의 생각은 달랐다. 남조선에서는 진정한 학업도 행복도 바랄수 없다는것을 그동안의 체험을 통해 사무치게 느끼고있었다. 그래서 흰눈내리던 송도원모래불에서 그처럼 막아나서던 애인을 후회속에 그려보며 눈물로 나날을 보내고있던 혜련이였다. 그의 마음을 더 강하게 잡아끈것은 전혀 달라진 애인의 름름한 자태다. 헤여질 때 그토록 가슴조이며 우려했던것이 애인의 신상이였는데 그는 오히려 귀중한 인재로 떠받들려 살뿐아니라 얼마전에는 과학원에 소환까지 됐다는것이다.
진정한 삶 참된 과학은 오직 북에 있었다.
혜련은 애인과 함께 운명을 같이 하리라 결심하고 단연 집을 떠났다.
신혼생활은 그에게 푸른 창공과 같았다. 혜련은 자기가 대공을 날으는 남편에게 날개 하나를 더 달아줬다고 자부했다. 그런데 한두해가 흐를수록 그 창공이 너무도 높아만 보였다. 남편이 그 창공을 끝까지 날을것 같지 못했다.
극도의 초조와 불안 속에 남편을 지켜보던 그는 마침내 강단을 내려 흥수땅으로 내려오고야말았다.
그런데 그 용단이 정반대의 결과를 초래할줄이야. 주택문제로 하여 심각해진 사람들의 관계는 가뜩이나 시련을 겪고있던 남편에게 큰 덧짐으로 된것과 같았다. 그 죄책감을 조금이라도 덜어보려 탄산수를 만들어봤는데 그것 역시 더 넘기 어려운 장벽으로 되고말았다.
결국 자신은 남편에게 힘을 준것이 아니라 걸음걸음 무거운 추를 달아주었고 종당엔 한쪽 날개를 꺾어놓고말았다. 그뿐이 아니다. 서울에 있는 친정집때문에 남편은 얼마나 구접스런 뒤소리를 듣고있는가.
지금도 탄산수를 만든 그 불순한 의도를 까밝히라고 무섭게 다과대던 부상의 그 찍어넘길것 같던 악청이며 숱한 사람들이 혐오와 비난과 이상한 눈초리로 쏘아보던것을 생각하면 몸서리가 쳐진다.
혜련은 생각할수록 억이 막혔다. 다시는 헤여날길 없는 이런 궁지에 빠질줄은 정말 상상밖이였다. 이제 무슨 수로 이 깊은 함정에서 헤여나며 헤여난들 그 누가 반겨줄것인가. 자신은 응당 남편과 이 사회앞에 버림받고 저주받아야 할 죄많은 몸이였다.
원망스러운것은 자기가 남들처럼 굳세지 못하고 연약하기만 한 그것이였다.
남편의 거듭되는 타이름과 석근수, 금희가 그토록 안타까이 일깨워줄 때도 어째선지 자신은 그렇게 살지 못했다. 아, 삶이란 무엇인가. 나는 왜 남들처럼 보람차고 긍지높이 살지 못했던가. 나도 삶에 대한 지향과 요구가 누구보다 높고 강렬하지 않았던가.
지난날 무위도식자로 자라난 나에게 인생의 진미를 깨우쳐주었고 울분과 반감에 모대기던 남편을 귀중한 인재로 아끼고 떠받들어주는 고마운 우리 사회에서 세상에 부럼없이 마음껏 삶을 누리고싶었던 자신이 아니던가…
아득히 트인 푸른 하늘가엔 여전히 흰구름송이들이 뭉실뭉실 피여났다.
저 구름속 어디엔가 사색에 열중한 남편의 얼굴이 보이는것 같고 엄마를 애타게 부르며 달려오는 귀여운 아들이 있는것 같았다.
그는 아들의 이름을 목청껏 불렀다. 그러나 목소리는 입안에서 잠겨들뿐 나오질 않았다. 마지막 기운이 진했던것이다. 그는 자꾸만 내리덮는 눈시울을 필사의 힘으로 버티며 아들의 모습을 찾아보려했으나 갑자기 파랗던 하늘도 철이도 더는 보이지 않았다.
청청한 하늘이 비꼈던 그의 고요한 눈동자가 스르시 감겼던것이다. 그와 함께 실주름 잡힌 눈귀로 피물같은 진한것이 주르르 흘러내려 귀바퀴를 적셨다.
싸늘하게 식어가는 몸우에 이해의 첫 단풍락엽이 하나, 둘 떨어져 쌓였고 눈귀로 흘러내리는 눈물자리로는 아물아물한 개미들이 다투듯 새까맣게 기여오르기 시작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혜련은 그 어디선가 자기를 애타게 부르는 아슴푸레한 소리에 천천히 눈을 떴다. 뿌옇던 앞이 점차 선명해지며 낯익은 얼굴이 눈앞에 나타났다.
《이제야 정신을 차리누만.》
초점을 모아 눈앞의 얼굴을 보던 혜련의 긴 살눈섭이 파르르 떨렸다.
《여기가… 어딘가요?》
《어디긴. 우리가 약촐 캐러 올 때마다 들리던 최로인네 집이야.》
《아니?!…》
혜련이 다시 맥없이 두눈을 감는다. 리숙은 긴장해지며 그의 얼굴에 시선을 박은채 또다시 팔다리를 슬근슬근 주물렀다.
까딱않고 두눈을 감고있던 혜련의 입귀가 실룩거리더니 눈물에 젖은 푸념이 쏟아져나왔다.
《날 왜 업어왔나요? 이 죄많은 몸을 왜 살려놨는가말예요. 마땅히 죽어야 할 몸인데 어쩌자구 업어왔어요?》
《!!…》
《나같은게 뭐라고 여기까지 찾아왔나요. 그토록 돌봐주고 아껴주고 타일러주던 그 고마운 사람들을 무슨 낯으로 대하겠어요. 나같은건 죽어도 싸요. 이제라도 날 버리고 가세요. 막돌처럼. 어서요.》
리숙은 혀끝을 깨문채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그의 눈물만 닦아주었다.
오죽이나 참기 힘들었으면 이런 모진 말까지 하랴. 그 누구보다 희망이 컸고 지향과 요구가 높았던 혜련이 아닌가. 남편에 대한 존경과 지성이 남다르게 지극했던 혜련이다. 그런 그가 남편이 곤경에 처했는데 모든것을 체념한채 산속에서 방황하고있었으니 그 곧은 성미에 얼마나 속이 아프고 쓰렸겠는가.
아무래도 미타하여 세번째로 벼랑아래를 샅샅이 살펴나가던 리숙은 바위틈에 반듯이 누워있는 혜련을 발견하고 숨이 콱 막혔다. 어디를 상했는지 팔굽엔 말라 굳어진 피딱지가 덩이로 붙어있고 흩어진 머리칼이며 찢겨 바람에 너풀대는 치마는 그처럼 단정하고 세련미를 주던 평시의 혜련이라고는 도저히 믿을수가 없었다. 손발은 이미 싸늘하게 식었고 가슴부위만이 약간의 온기가 있었다.
그랬던 혜련을 겨우 소생시켰는데 당자의 눈물겨운 원망까지 듣고나니 가슴이 메이는듯 했다.
한참동안 애끓는 원망과 푸념을 토설하던 혜련은 기운이 진한듯 혼곤히 잠들어버렸다. 이틀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한데다 피를 많이 흘린 그는 약간의 꿀물에도 인차 취해버리군 했다.
그로부터 너덧시간후 혜련은 가슴속 설분을 어느정도 가신듯 잔잔한 눈길로 리숙을 바라보고있었다. 해쓱해진 얼굴은 백지장같았고 식은 땀에 촉촉히 젖은 강글강글한 앞머리칼 몇오리가 이마우에 동그라미를 그리고있었다.
《리숙언니, 정말 고마워요. 언니가 아니였다면 난 누구도 모르게…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쳐요.》
혜련은 리숙의 손을 부여잡고 또다시 뜨거운것을 흘렸다.
《제가 버릇없이 넉두리한걸 용서해주세요. 살아난것이 너무 꿈같아서… 그것이 믿어지지 않아서…》
《혜련이가 내 친동생이라면 난 그냥 두지 않겠어요. 사람이 왜 그렇게 못났어요. 왜 그렇게 약한가말이예요. 생활에서 난관이 좀 제기되구 일부 나쁜놈들의 뒤소리가 있다고 하여 정신나간 사람처럼 산속을 헤매다녀요. 이처럼 비겁한 행동이 어떤 죄로 되는줄 알기나해요? 자기를 낳아 키워주고 돌봐주는 친부모의 뺨을 치는것과 같아요. 친근한 벗들과 남편의 얼굴에 흙칠한것보다 더하단말이예요.》
리숙의 노기띤 목소리는 날카롭고 준절했다. 사실 그는 혜련의 행동이 어처구니 없었고 그처럼 믿고 아름답게 여겨오던 한 녀성한테 속히운것만 같았다.
《어서 저를 더 아프게 때려주세요. 전 아직 사람노릇 하자면 멀었어요. 어리석은 이 응석받이를 마음껏 꾸짖어주세요. 전 벼랑에서 떨어져 생명이 꺼져가는 순간에야 저와 우리 가정이 얼마나 행복했던가를 뼈저리게 깨달은 체면도 량심도 없는 녀자였어요. 나같은건 응당 벌을 받아야 마땅해요.》
리숙은 혜련의 눈물겨운 자책에 낯빛이 부드러워지며 그의 반듯한 이마와 목덜미에서 철철 흘러내리는 땀을 부지런히 씻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