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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되여 발생로중간시험은 다시 계속되였다.

그들 셋, 한대식과 석근수, 차금희는 이른아침부터 늦게까지 부지런히 몸을 놀렸다. 최소한 일곱명은 있어야 로작업을 순조로이 할수 있는데 허락치 않은 조건으로 하여 그들은 두세몫씩 담당했다. 언제 마주서서 이야기할 틈도 없었다. 긴장한 침묵속에 눈짓, 손짓으로 의사를 전달했고 공정간 실험테타를 종합했다. 이처럼 그들의 일거일동은 정확한 로운전이라는 하나의 지향점에 쏠렸다.

한대식의 모든 사색과 활동은 매우 심중했고 촉박성을 띠였다. 그는 로작업을 최대의 긴장과 조심성을 가지고 림했다.

한대식은 발생로가 단순히 무연탄가스화를 생산에 도입하기 위한 중간설비장치물로만 생각되지 않았다. 발생로야말로 사람들이 무엇을 위해 사고하고 무엇을 바라고 활동하는가 하는것을 가려내는 그 어떤 시금석과 같았다.

실로 지난기간 발생로를 둘러싸고 사람들의 관계가 얼마나 복잡해졌으며 이 과정에 그 모습들이 얼마나 두드러지게 나타났던가? 이와 같은 각이한 견해를 하나로 묶어보면 우리 식 발생로를 인정하는가 안하는가, 다시말해 우리의 자원, 우리의 기술, 우리 인민의 지향을 얼마나 뜨겁게 긍정하는가 하는 관점문제였으며 우리의 화학공업을 어떤 자세로 대하는가 하는 심각한 사회적문제성을 띠고있었다.

한대식은 아무리 새것의 창조가 어렵다 해도 발생로가 이처럼 간고할줄은 몰랐고 또 이렇게 큰 사회적문제성을 야기시킬줄은 생각도 못했다.

이것은 실로 충격적인 교훈이였다.

이 순간 그의 귀전에는 과학은 두뇌가 아니라 뜨거운 심장으로 해야 한다던 강지창부원장의 맵짠 추궁이며 연구사업엔 그리도 밝은 선생이 사람들의 진심은 왜 볼줄 모르는가고 안타까와 하던 석근수아바이의 절절한 말마디들이 수십배로 공명되여 들려왔다.

진정 부끄러운 일이였다. 지난시기 자신은 과학연구 하나밖에 모르고 살아온 결과 과학사업은 과학자만이 할수 있지 그 누가 대신해줄수 없다고까지 여겨왔었다.

이런 생활관에 있었기에 확대시험이 시작될 때 제일 큰 걱정이 사람들의 관계문제였고 그것을 풀기 힘든 무거운 부담처럼 생각했던것이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사고방식이였던가. 그렇다. 지난날 자신은 발생로에서 제기되는 과학기술적문제보다 사람들을 먼저 생각해야 했고 그들을 자신처럼 믿고 뜨겁게 대해줘야 했었다.

이미전에 이런 립장에 확고히 섰더라면 발생로가 그처럼 오랜기간 시련도 겪지 않았을것이며 오늘처럼 조락될 위험한 형편에 놓이지도 않았을것 같았다.

생각이 깊어질수록 가슴저린 자책과 함께 솟구치는 분발심을 금할수가 없었다.

불현듯 부상 남주혁의 얼굴이 떠오르자 그의 마음은 더욱 격렬해졌다.

과연 그는 어떤 사람인가? 말끝마다 시대적명분을 외우는 그가 발생로에 대해선 왜 그리도 인정하려 하지 않는지. 그 까닭이 만약 기술적측면에서의 착오가 아니라 우리 식 발생로에 대한 근본견해상 대립이라면 여기에는 심중한 문제가 있는것이다.때문에 그 까닭은 놓치지 말고 끝까지 밝혀야 할 문제이며 어떻게 해서라도 부상을 납득시켜야 한다. 왜냐면 그것은 부상 한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화학공업의 주체성을 옹호하고 더욱 철저히 확립하는 긴급한 사회적문제로 되기때문이다.

이것은 또한 발생로를 중도에서 포기해버린 방하철지배인의 생활관을 바로 잡아주는 측면에서도 더는 미룰수 없다. 지배인에 대해선 대체로 파악이 간다.

주관과 편견이 강한 사람들이 그러하듯 지배인 역시 눈앞의 실물로서만이 그 완강한 견해를 바로잡을수 있다.

다만 종잡기 힘든 인물은 안개속의 로익두다. 왜 그런지 불신과 반감만이 가는 사람이다. 인간적으로나 공적관계로 보나 척질 근거는 조금도 없는데 왜 그렇게도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헐뜯는지 리해가 안갔다. 어쨌든 로익두의 행동역시 발생로와 직접 련관되여있는것 같다.

이렇게 놓고볼 때 발생로는 시간을 다투며 해결해야 할 절실한 사람들의 문제였다.

한대식의 가슴은 점차 세차게 높뛰였다. 발생로의 현재 실태는 비록 막급한 형편에 놓여있으나 앞이 환해지고 신심이 갔다. 목표와 그 해결방도가 명백해진 이상 두려울것이 없었다.

한대식이 이런 깊은 사색과 비장한 각오로 긴장한 나날을 보내던 어느날 점심참이였다.

뜻밖에 외출복차림의 라석호가 물날은 군대배낭을 메고 현장에 나타났다. 그를 보는 순간 한대식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확장공사에 동원된 후 짬짬이 여기로 달려와 일손을 도와주고있는 라석호였으나 때아닌 때 색다른 그 차림새가 이상했던것이다. 아닐세라 라석호의 입에서 기죽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선생님, 저는 자재구입차로 황철에 가게 됐습니다.》

《?!…》

한대식은 속이 욱 치받쳤다. 라석호가 다시 발생로에 오기는 힘들것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처럼 멀리로 떼버릴줄은 생각밖이였다.

《설비담당책임기사가 이제는 자재인수까지 맡아나섰는가?》

석근수는 쓰거운듯 입속말처럼 중얼거리며 펼쳐놓았던 밥그릇을 덮어놓는다.

라석호는 제잘못이라도 되는듯 떠나지 않으면 안될 각박한 사정을 사죄하듯 말했다.

어제밤 지배인실에서 확장공사준비실태를 놓고 강한 비판총화가 있었다는것, 대책으로 지휘부력량을 보강했는데 자재분과사업은 로익두가 담당하고 자기는 내부사업에서 물러나 자재인수를 맡게 됐다는것이다.

《말하자면 강직된셈이지요. 아침에 출근하니까 로익두자재과장이 책상에 떡 버티고앉아 자재구입차로 황철에 가라는거지요.》

《그러니까 멀찍이 쫓아버리는셈이군.》

《정말 분합니다. 이건 의도적인 조치입니다. 확장공사가 무엇에 필요합니까? 발생로를 왜 이처럼 방해해나서는지 정말 모르겠단말입니다.》

분격을 터치는 라석호를 대하니 석근수의 눈앞에는 문득 면회갔다 돌아온 그날 지배인과 마주 앉았던 일이 떠올랐다. 그때 지배인은 오래도록 망설이던끝에 금희와 석근수를 허락했었다. 공정을 담당한 라석호기사를 뺴놓으면 되는가고 들이댔지만 그는 단마디로 거절해버렸다. 라석호뿐아니라 그 누구도 더 줄수 없다면서 만약 부상이 방조성원들을 붙인 사실을 알면 당장 소동이 일어날것이라고 딱해하였다.

그런 지배인이라 라석호를 먼곳으로 따돌리지는 않았을것이다. 분명 부상이나 로익두의 그 어떤 불순한 의도가 들어있었다. 자못 심중한 낯으로 라석호의 말을 듣고있던 한대식이 낮으나 그루를 박둣 입을 열었다.

《석호동무, 여기 일은 너무 걱정마오. 그리구 거기 가서도 오래 있을 생각은 마오. 공정기사가 자재인수라니 말이 됩니까?》

《?!…》

라석호는 의미심장하고 확신에 찬 한대식의 말에 얼떠름했다.

《모든게 내탓이오. 확장공사가 빚어진것두 그리구 동무가 이렇게 된것두 내가 제때에 발생로를 완성하지 못한데 있었소. 때문에 이젠 더 끌수가 없소. 확장공사준비가 더 본격화되기전에 발생로를 생산에 도입하자고 하오. 석호동무, 황철에 가서도 여기 일에 관심해주. 가능하면 거기 있는 발생로에서 동무가 이미 해오던 대용점결제를 완성해주오. 내가 그때의 시험자료들을 분석해봤는데 십분 가능하오. 그 문제를 차요시한 내 잘못이 크오. 힘든 부탁이지만 난 석호동물 믿겠소.》

전에 볼수 없던 한대식의 진지하고 소탈한 태도와 비장한 결심을 알게 된 라석호의 두눈은 환희로 번쩍였다. 사실 그는 이번 출장기간에 대용점결제를 꼭 완성해보리라 맘먹고있었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선생님의 지지를 받으니 확신이 생깁니다. 선생님이 이러실줄 알고 제가 시험자료들을 가지고 떠나던 길입니다. 진빚이야 어떡하든 갚아야 할게 아닙니까?》

고개를 끄덕이는 석근수의 주름잡힌 얼굴에도 만족한 미소가 그려졌다.

《석호동무, 진빚으로 계산한다면 할 말이 없는 나요. 진정 석호앞에 서있을 면목조차 없지. 그러나 이제부턴 믿어주오. 뒤늦은 감은 있지만 그 빚을 꼭 갚겠소.》

한대식의 얼굴엔 진한 자책과 함께 무엇인가 서두르는 기색이 떠올랐다. 라석호가 그걸 놓칠리 없었다.

《선생님, 대용점결제에 대해선 너무 걱정마십시오. 그 문젠 제가 꼭 풀어보겠습니다. 지금 발생로만 붙들고있자 해도 눈코뜰새 없는데 어디 다른데 신경쓸 짬이 있습니까. 아예 그런 생각 마십시오.》

한대식의 시선이 무심중 라석호의 왼쪽 관골우에 가서 멎었다. 라석호를 대할 때마다 자연히 그쪽으로 눈길이 가군 한다. 언젠가 길주에 갔을 때 금희와 함께 대용점결제를 만들어 로에 넣은것이 원인이 되여 화상당한곳인데 이제는 그자리가 희미했다. 얼마 안있어 그 화상자리는 흔적조차 찾아볼수 없겠으나 자신의 가슴에 새겨진 생활의 오점은 일생 아물수 없다고 생각하는 한대식이다. 그래서 강지창부원장이 왔다간 후 곧 틈틈이 대용점결제에 대한 연구를 심화시켰고 수많은 자료작업에 기초하여 라석호의 시험과정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어떡하나 라석호의 착상, 그의 희생성이 반드시 열매를 맺도록 해줌으로써 마음속깊이 패워진 흔적을 얼마간이라도 메꾸고싶었다. 이는 또한 발생로를 공업화하자 해도 더는 미룰수 없는 실무적문제이기도 했다. 이 과정에 한대식은 금야탄을 주원료로 하는 점결제가 가장 현실성있다는 확고한 실마리를 잡게 되였다. 금야탄을 원료로 하면 무엇보다 만들기 쉽고 그 자원이 무진장하며 공장지구와 가까운것이 매우 경제적이였다.

한대식은 라석호가 자재구입차로 황철에 가게 됐다는 소리를 듣는 순간 금야탄에 의한 점결제착상과 이때까지 진행해온 자료들을 그에게 넘겨줘야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다. 여기서 남들의 눈치를 봐가며 하는것보다 발생로가 있는 그곳에 가서 맘놓고 하는것이 몇배 유리할수 있었다.

《잠간 기다리오.》

라석호와 석근수는 영문을 몰라 한대식의 심중해진 거동만 살폈다. 한대식은 얼른 휴계실옆에 있는 연구실로 들어가 금야탄을 주원료로 진행한 자료묶음을 들고나왔다.

《석호동무, 이걸 가지고 가오. 대용점결제에 대한 연구자료인데 참고하시오. 그리고 황철에 우리 과학원의 연구사가 몇명 내려가있는데 그들의 방조를 받소. 내 후에 편지는 쓰겠지만.》

라석호의 눈이 대번에 휘둥그래졌다.

《아니 그럼 선생님은 이미전부터?!… 그렇지만 전 이걸 받지 못하겠습니다.

그전에 선생님한테 진 빚도 있는데 이 귀중한 자료까지 받으면 그 많은 빚을 언제 갚겠습니까.》

라석호는 한손을 내흔들며 펄펄 뛰였다.

《헛참, 동문 어느때 봐야 안팎이 너무도 맑고 깨끗해 탈이야. 나같은 인간은 마주서기조차 막 두렵단 말이야. 할수 없이 내가 타협안을 내놔야겠구만. 우리 관계는 오늘로써 령으로 선포하는게 어떻소? 물론 후에 동무쪽이 손해를 봤다고 신소하지 않는 조건에서말이오. 보증인은 여기 석근수아바이시오. 아바이, 어떻습니까 제 의견이?》

《허허, 선생도 그런 롱할 때가 다 있구려. 그러니까 석호는 자재때문에 가는것이 아니라 대용점결제를 연구하러 가누만. 연구사선생, 부상이 알면 어쩔려구 그런 중임을 떠맡기우? 허허…》

석근수가 어깨를 들썽대며 호탕하게 웃자 한대식이와 라석호도 따라웃었다.

《자. 어서 이 꾸레미를 받소. 그리구 가는길에 금야탄을 얼마간 가지고 가오. 꼭 필요할게요.》

《알겠습니다. 선생님.》

라석호는 뜨거워진 눈길로 한대식을 바라보며 자료묶음을 받아들었다.

《선생님, 발생로가 제일 힘든 고비를 당할 때 이렇게 떠나게 되니 정말 괴롭습니다. 선생님은 제몸 아낄줄 모르는것이 결함인데 제발 너무 무리하지 마십시오. 아바이, 선생님을 잘 부탁합니다.》

《알겠네. 맘놓구 대용점결제나 어서 완성하라구. 선생한텐 그것이 제일 큰힘으로 될걸세.》

라석호가 작별인사를 하고 떠나려는데 마침 물뜨러 나갔던 금희가 주전자를 들고 휴계실로 들어왔다.

《금희야, 석호기사가 출장간다면서 여기 들렸구나. 자, 어서 가보라구.》

석근수가 라석호의 등을 떠밀었다.

금희는 외출복에 배낭까지 멘 라석호를 보자 흠칫하며 눈인사를 보냈다.

《통근차시간이 된것 같은데 어서 가면서들 얘기하라구. 금희야, 좀 바래주렴.》

《아이참, 뭐 손님이라구 바래주구 말구 하겠어요.》

《이것봐라. 금희한테야 손님으로 될수 없지만 우리한테야 귀한 손님이나 같지.》

《금희, 어서 아바이 말씀대로 하오. 석호동문 단순히 자재구입을 가는게 아니오. 대용점결제를 완성하자면 출장지에서 아마 고생 많이 해야 할거요.》

라석호는 한대식의 굳센 믿음에 가슴이 후더워졌다. 그는 무거운 걸음으로 휴계실을 나왔다. 금희가 솔곳이 뒤따랐다.

《정말 바래줄셈이요?》

《바래주면 안되나요?》

《이 대낮에 다른 사람들 보면 어쩌자구.》

《보면 뭐라나요. 그 배낭을 인주세요.》

《뭐 배낭까지?… 허참.》

순간 걸음을 딱 멈춘 금희가 야무지게 뇌였다.

《난 그만 돌아가겠어요.》

《금희, 그렇게 앵돌아지지 마오. 이번 출장길이 즐겁지 못해서 그러오. 자, 어서 더 걷기요.》

당황해난 라석호가 급급히 변명했다. 그랬으나 금희의 대담한 행동을 보니 무겁게 내리누르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는 긴 살눈섭을 살풋이 내려깐채 발끝만 내려다보며 탄력있게 걷는 처녀의 모습을 미더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희고 갸름한 볼은 노여움이 채 가시지 않은듯 발그레 상혈되였고 쑥 빠진 시원한 목덜미를 부드럽게 감싼 소담한 쌍태머리가 해빛에 반사되여 령롱하게 반짝인다.

구내정문을 벗어난 그들은 걸음을 멈추었다. 정오의 따가운 해볕은 무섭게 작렬했다. 멀지 않은 저쪽에서 통근차의 기적소리가 독촉하듯 연방 울어댔고 개찰구를 벗어난 통근생들이 성급히 홈으로 빠져나가는것이 보였다.

《어서 가보세요.》

《…》

《며칠이나 걸리는가요?》

《글쎄 자재사업이란 어디 기약할수가 있소. 더구나 계획에도 없는 자재를 받으러 가니…》

《그래요?!…》

서로 마주쳐다보던 그들은 약속이나 한듯 방향을 꺾어 강변쪽으로 향했다.

그대로 헤여지고싶지 않았던것이다. 하루를 못봐도 못견디게 그리워지는데 기약할수 없는 출장이라니 어디 말이 되는가. 서로 사귄 기간은 비록 한계절밖에 안되지만 소생의 봄계절마냥 발생로의 순편치 않은 생활은 그들의 가슴에 또하나의 색다른 심장을 뛰놀게 했던것이다. 처음 부정맥처럼 나타난 그 미미한 맥박은 점차 세차게 자주 나타나 순결하게만 뛰던 처녀의 가슴을 흠칫흠칫 놀래우군 했다. 정신을 혼미하게 만드는 그 맥박을 두려움속에 행복속에 조심조심 감수해오던 처녀는 뜻밖에 생긴 발생로의 사고와 함께 작업반이 산산이 흩어지자 불현듯 그 맥박도 멈추지 않을가 하는 불안으로 마음조이고있었다. 그 맥박은 처녀의 숨결이였고 넋이였으며 희망이고 미래였다. 한마디로 그 맥박은 자기자신의 전부와 같았다. 만약 이제와서 그 소중한 맥박이 멎는다면 처녀는 그만 질식하고말것이다. 처녀는 활달하고 탁 트인 자기의 성미처럼 애인을 자기의 높뛰는 심장처럼 불같이 사랑했다.

비록 멀지 않은 출장길이나 이제 헤여지면 아득한 구름속으로 사라질것만 같아 처녀는 애인을 놓아주고싶지 않았다.

그들은 말없이 걸음만 옮겼다. 바람이 불어왔다. 습기머금은 선선한 바람이다. 비릿하고 쩝쩔한 바다바람은 석별의 정으로 달아오른 그들의 얼굴을 선들선들 쓸어만졌다.

그들은 자꾸만 걸었다. 발밑은 주단을 깐듯 푹신푹신했다. 무성히 자라난 잡풀이 큼직큼직 내걷는 사나이의 운동화와 희고 곧은 처녀의 장딴지에 희롱하듯 휘말려든다. 금희는 어느새 꺾어든 보라색 들꽃 한송이를 입가에 가져가며 록음우거진 향취를 음미해본다. 싱그러운 향기와 록주단같은 풀밭과 고기비늘처럼 번뜩이는 시원한 강물은 두 청춘을 위해 마련된듯 더없이 포근하고 호젓한 감을 준다.

문뜩 걸음을 멈춘 라석호가 발밑을 굽어본다.

《금희 이자리를 보오. 생각나지 않소?》

《?…》

라석호의 하얀 운동화가 찍혀진 발밑은 진록색의 잔디가 수북이 깔렸는데 수를 놓은듯 자지색 할미꽃 몇송이가 소곳이 인사를 보내고있었다.

묻는듯 한 애인의 눈길을 받는 순간 《아!…》하는 입안의 소리가 봉싯한 입술사이로 새여나왔다. 아직 깔밋한 바람이 불어오던 초봄의 황혼 깃든 그날이 생각났던것이다.

순복이 오빠라고 친근하게 부르며 나란히 앉았던 그 잔디밭이였다. 그때는 해묵은 노란 잔디가 푹신하게 깔렸고 보이는것은 엉성한 갈대와 웃초리에서 멋없이 한들거리던 말라버린 갈대꽃뿐이였다. 그러나 그는 불같은 열정을 지닌 한 청년을 알게 되여 기뻤고 그러한 청년한테 꾸중을 받은것이 억울하고 분하여 눈물을 뿌리며 달아났었다.

고개를 들어 강변쪽을 바라보니 그때 꺾어들었던 버들개지는 키높이 자라나 청청한 아지로 강물우에 그늘을 던져주고있었다.

《자, 좀 앉을가. 이 강변에 이만 한 자리는 없을것 같소.》

라석호는 바싹 다가서며 금희의 손을 꼭 그러잡는다. 말큰하고 보드라운 손은 한번 옴지락하고는 가만 있는다. 고개를 푹 떨쿤 처녀의 하얀 목덜미가 분홍색으로 물드는데 숨소리가 점차 높아졌다. 처녀는 빨라지는 숨결을 더이상 참아낼수 없는듯 살그머니 손을 뽑더니 치마를 내려쓸며 라석호의 곁에 다가앉았다. 어디서 날아왔는지 고추잠자리 한마리가 팔랑팔랑 두리를 감돌다가 무릎우에 놓은 오목오목 패인 처녀의 말쑥한 손등우에 내려앉았다. 강변쪽에 눈길을 주고있던 금희는 두손을 뻗치고 잠자리를 잡으러 다가드는 라석호의 손을 보자 황급히 뿌리쳤다.

《허허. 그것참. 아쉽게 됐는걸.》

라석호는 헛탕친 손을 후후 불며 껄껄 웃었다.

《금희,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오?》

《이자리에 앉고보니 그때 동무가 하던 말이 생각나는군요.》

《무슨 말?》

《사람을 믿는다면 그가 하는 일도 믿으라고 하던 말.》

《아, 내가 그랬던가. 그래 그 말이 틀렸소?》

《저는 이렇게도 생각해보았어요. 그가 하는 일이 지지를 받지 못하면 그 사람도 환영받을수 없지 않겠는가고.》

《말하자면 반증법이군. 그래 뭘 말하자는걸가?》

《발생로말이예요. 제 생각에는…》

《쉿!- 이 강변에서만은 우리 둘의 세계에 잠겨봅시다. 그게 좋지. 어서 그래주겠다고 약속해주.》

라석호는 금희의 입에 약손가락을 세워보이며 처녀의 크고 억실억실한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금희는 그의 손을 잡아 자기의 무릎우에 올려놓고 천천히 쓸어만졌다. 그 촉감이 따스한 비단결같다.

《고마워요. 그랬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런데…》

처녀는 쓸어만지던 애인의 손을 두손으로 꼭 그러잡더니 기여들어가는 소리로 말을 이었다.

《저는 요즘 그 생각에서 벗어날수 없어요. 동무까지 먼 고장으로 떠난다니 겁이 나는군요. 전 어쨌으면 좋을가요?》

처녀의 눈은 애달프게 빛났다. 사랑하는 처녀의 향긋한 체취와 뜨거운 입술의 속삭임과 싱그러운 들바람에 한껏 취해보고싶던 라석호는 그 눈빛을 피할수가 없었다.

《무슨 일이 있었소? 어디 말 좀 해보오.》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발생로가 걱정돼서 그러죠뭐.》

《그거야 나두 같은 심정이지. 난 하루에도 몇번이나 발생로에 달려가고싶은걸 겨우 참소. 그런데 사정이 허락치 않으니… 리해해주.》

《그래서가 아니예요. 동무가 온다구 사정이 달라지겠어요. 중요한건 사람문제입니다. 지금 항간에서…》

긴 속눈섭을 치뜨며 그를 얼핏 넘겨다본 금희는 말꼬리를 힘들게 갑자르고있었다.

《이건 심각한데. 연구사선생을 념두에 두지 않소?》

《동문 쉬쉬하는 소리를 못들었어요?》

《금시초문이요. 그래 무슨 뒤소리들을 합디까?》

라석호는 다과대듯 금희의 두손을 잡아 흔들었다. 눈길을 피하는 팽팽한 처녀의 가슴이 세차게 오르내렸다. 저 멀리 하얀 연기가 솟구쳐오르는 공장쪽을 이윽히 바라보던 그는 짓눌린 소리로 입을 뗐다.

《다르게 생각진 마세요. 동무도 앞으로 알게 될 말이기에…》

이렇게 말머리를 뗀 금희는 한대식부부의 출신과 경력 특히는 무연탄가스화의 목적이 그 어떤 야심에 있다고 한다는 말들을 힘들게 옮겨놓았다.

《그래 금희는 그 험담을 믿소?》

영채돌던 라석호의 눈빛이 준엄하게 타올랐다. 숨결도 듣기 거북할 정도로 거칠어졌다.

《그게 사실인것 같아요.》

《무엇이?》

《출신과 경력말이예요. 알고보니 지난날 그분들과 함께 지낸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이더군요.》

《?…》

금희는 로익두를 념두에 두고 말했다. 라석호는 입을 약간 벌린채 처녀의 얼굴만 뚫어지게 바라본다.

《출신과 경력이 그러니 그가 하는 연구목적도 딴데 있다. 이런 언어도단이 어디 있소. 이건 연구사선생에 대한 참을수 없는 모독이요. 어디 이럴수 있는가?》

라석호는 앉아있기가 괴로운듯 자리를 박차며 성큼 일어섰다. 그의 두손에는 한웅큼의 록색잔디가 뽑혀져있었다.

《저도 괴로워요. 도저히 그런 말을 믿을수 없어요. 그렇지만 항간의 여론을 덮어놓고 무시할순 없지 않나요. 부상이나 지배인동지가 지식과 리론이 모자라 가스화를 그처럼 막아나서겠어요. 기술부사무실에서도 머리를 기웃거리는축들이 한둘이 아니예요. 그들은 한다하는 전문가들이예요. 이들이 뭐 연구사선생이 미워서 가스화를 의심하겠어요.》

《물론 그런 여론도 있을수 있고 머리를 내젓는 기술자도 있소. 실패만 거듭하니 무슨 소린들 없겠소. 그러나 금희 이것을 똑똑히 알아두오. 무연탄가스화에 의한 비료생산은 우리 당이 내놓은 방침적문제요. 당의 방침은 곧 진리요. 이 진리는 그런 산수적계산이나 다수가결의 원칙이 통하지 않는 법이요.열이나 백사람이 기웃거려도 진리는 반드시 승리하고마오. 지동설을 처음 내놨을 때 그걸 인정한 사람이 어디 한사람이나 있었소? 그러나 그는 자기의 과학적주장을 끝까지 고수했고 그것으로 하여 결국 이단자의 딱지를 받고 불타죽었소. 이런 실례는 인류과학발전사에 부지기수요. 새것의 창조는 언제나 힘겹게 배태되기마련이요. 그런데 금희동무. 그 뒤소리를 연구사선생내외분이 알고계시오?》

《글쎄요…》

《우리 각성을 높입시다. 여기에는 색다른 목적이 있소. 당의 방침관철에 본인의 출신이 무슨 련관이 있겠소. 지금 오랜 과학자들은 대부분 일제시기 공부한 사람들인데 출신과 경력을 내걸고 의심부터 하면 어떻게 되겠소. 대학에서 나를 배워준 강좌장선생이나 담당지도교원도 일제때 고생을 하면서 대학을 나왔는데 참으로 훌륭한분들이요. 이런 과학자, 인테리들을 의심하는것은 무서운 청맹과니들이요. 우리 민족을 다시금 노예로 만들고 우리 나라를 몽매한 후진국으로 만들려는 반역자이며 원쑤로 락인해야 하오.》

라석호는 두손에 움켜쥐고있던 잔디를 허공에 확-뿌려던지며 항의하듯 웨쳤다. 금희는 이글거리는 그의 눈빛을 마주볼수 없었다. 외삼촌이란 말이 튀여나가지 않은것이 천만다행이였다.

《금희, 내 지내 흥분한게 아니요? 목소릴 높였다면 량해해주.》

《오히려 제가 괜한 말을 꺼내서 미안해요.》

그들은 잠시 말이 없었다. 서로 리해한다고 했지만 좀전의 밝은 기분으로 돌아갈수 없음을 그들은 괴롭게 인정하지 않을수 없었다. 라석호의 마음은 더했다.

속을 바재이며 꺼내려던 금희의 말은 진정 무엇이였던가. 항간에 떠도는 뒤소리나 알려주려고 한것 같지는 않았다.

《금희. 연구사선생과 관련해서 무슨 할 말이 있던것 같은데 어디 말 좀 해보오.》

《이제 뭐 또 할 말이 있겠어요. 전 할 말을 다 했어요.》

금희는 라석호의 찌르는듯 한 눈길을 피하며 호-하고 가는 숨을 내불었다.

《거짓말. 얼굴에 다 씌여져있는데. 내가 쩍하문 흥분한다는걸 잘 알면서 그렇게 시치밀 떼겠소?》

기어코 속심의 말을 들어볼 잡도릴 하자 눈길을 허둥거리던 금희는 손등으로 이마의 해를 가리고 하늘을 쳐다보더니 펄쩍 놀라며 일어선다.

《통근차는 벌써 지나갔소.》

라석호가 그의 손목을 잡아 끌어앉히려 했다. 그러자 금희는 생긋 웃으며 라석호를 두손으로 잡아당겨 일으켜세웠다.

《통근차는 떠났으나 오후 작업시간을 늦어선 안돼요. 우린 세명뿐이여서 정말 치차처럼 맞물려있답니다.》하고 치마에 묻은 풀검불을 툭툭 털며 급히 서두른다. 더는 막아낼수 없었다.

그들은 강변길을 되돌아오고있었다. 걸음만 옮겼다. 서둘러 일어선 걸음이라 무거웠다. 무슨 말이든 꺼내여 무거운 기분을 가셔내야겠는데 그런 말들이 떠오르지 않았다.

했으나 그들은 더는 아무 말도 건네보지 못한채 강변길이 끝나는 둔덕 갈림길에 닿았다. 그들은 걸음을 멈추고 마주섰다. 여기서 헤여져야 했다. 크고 억실억실한 금희의 눈동자에 따스한 미소가 어리더니 생기로 반짝였다. 밝은 낯으로 애인을 바래주려는 강심이 작용한것 같았다.

《먼길에 잘 다녀오세요.》

《금희, 발생로가 힘들수 있소. 누가 뭐라든 연구사선생님을 잘 도와주오. 선생님은 지금 제일 어려운 고비에 있소. 그러나 결심은 대단하오. 확장공사가 본격화되기전에 발생로를 공업화하겠다는거요. 난 오늘 선생님한테 큰 충격을 받았소.》

《그랬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전 어쩐지… 될수록 빨리 돌아오세요. 동무 없인…》

애끓는 눈길로 바라보며 열싸게 부르짖던 처녀는 목이 메였던지 고개를 옆으로 푹 꺾는다.

가슴이 저릿해진 라석호는 뜨거운것이 욱 치밀어올라 자신도 모르게 처녀의 어깨를 와락 그러잡고 앞으로 당겼다. 처녀의 둥실하고 탄력있는 상체가 억센 손아귀에 그대로 끌려들며 애인의 넓은 가슴에 안겼다.

처녀는 눈물이 가득한 눈을 들어 애인을 태울듯이 올려다보더니 불현듯 두팔을 활짝 쳐들며 그의 목을 꼭 그러잡았다. 그와 동시에 가는 흐느낌이 새여나왔다. 흐느낌은 점차 커지고 빨라졌고 뜨겁게 달아오른 긴팔은 애인의 목이며 얼굴을 자꾸만 어루쓸어만졌다.

한덩어리가 되여버린 그들의 머리우에서 정오의 태양이 자글자글 끓고 두 청춘을 그대로 불태워버릴듯 화끈 달아오른 열풍만이 회오리친다.

얼마후 라석호와 헤여져 발생로에 돌아온 금희는 로가스의 종합과 분석, 신호공의 역할을 동시에 하면서 바삐 움직였다. 매츨하게 뻗은 다리는 잽싸게 움직였는데 탄력에 넘친 그의 모든 동작은 싱싱한 기운을 발산했다.

그는 북받치는 즐거움과 열정을 어디 쏟을데가 없는지 시험관을 들고 갸웃거리다가도 터지는 웃음을 참아내느라고 입술을 감쳐물며 사위를 할끔할끔 엿본다.

라석호와 금희와의 관계를 륙감으로 감수하고있던 석근수는 그럼직한 일이 있었겠다고 흐뭇이 바라보군 하는데 한대식은 종종 일손을 멈추고 고개만 기웃거렸다. 처녀는 자기에게 쏠리는 이상한 눈길을 전혀 느낄수가 없었다. 누구보다 역기빠르던 처녀의 예민한 감각은 사랑으로 하여 무디여진것이다.

이글거리던 애인의 눈동자가 떠오르고 입술과 볼에 뜨겁게 뿜어대던 향기와 같던 입김이 그대로 남아있는것 같다. 억센 팔로 허리를 감아 숨이 가쁘도록 포옹해주던 그 넓은 가슴과 높뛰던 그 심장의 맥박은 얼마나 안온한 감을 주던가.

그때는 부끄럽고 당황하고 심장만 터질듯 하여 무아의 상태에 빠지고말았는데 그 순간이 회고될수록 구름우에 실린듯 한 이름 못할 쾌감이 전류처럼 심신을 흔들어놓는다. 숨가쁘던 그 순간이 그리워지고 생각할수록 훈훈하고 흥겹기만 하다.

사랑에 취한 처녀는 오후시간이 언제 흘러갔는지 몰랐다. 그는 사랑의 힘이 이처럼 크고 즐겁고 앙양되는 분출과 감미로운 향취로 하여 이제까지 맛볼수 없던 환희의 절정에로 치달아오르게 할줄은 생각도 못했다.

행복감에 뜬 처녀는 퇴근할 생각도 잊고 밤을 밝히기로 맘먹었다. 긴장되는 로력과 기일의 촉박으로 한대식과 석근수가 교대로 로를 지키며 밤을 지새우군 하는데 그 일을 도맡아나섰던것이다.

한대식은 뜻밖의 이 제의에 펄쩍 뛰였으나 석근수가 그의 팔을 잡아끄는바람에 할수없이 퇴근했다. 혼자 남게 된 처녀는 로앞에 놓인 쇠의자에 난짝 앉는다. 밤에는 주로 로반응의 안전과 보위사업이 기본이라 처녀는 어느새 앙양된 자기의 취흥에 잠겨들고말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문득 들려오는 발자국소리에 상념에서 깨여난 금희는 소리난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손에 보꾸레미를 든 혜련이가 몇걸음 앞에 와 서있었다. 곤청색작업복을 가뜬히 차려입고 머리에 하르르한 삼각수건을 썼는데 세련된 그 옷차림이 막 시샘이 날 정도로 아름다왔다. 30을 갓 넘긴 부드러운 몸매와 희디흰 살결, 깊을사 한 눈확속의 그 조용하고 사려깊어보이는 눈은 어둠속에서도 신기한 빛을 발산하는것 같다. 늘 보아오던 모습이고 이미 인식된 혜련의 그 장점이건만 첫사랑에 빠진 처녀는 미래의 새로운 눈길로 비춰보고있는것이다.

(이 부인은 아무런 차림새를 해도 그저그만이구나! 나도 후에 처녀때의 몸매를 그냥 간직해낼가? 이 부인처럼…)하고 생각하던 그는 화달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혜련이가 고요히 미소를 그리며 다가왔다.

《무슨 좋은 꿈을 제가 깨친게 아니예요?》

《저한테 무슨 꿈.》

금희는 그가 자기의 마음속을 들여다본것 같아 낯이 화끈거렸다. 의아한 눈길로 로둘레와 저쪽 휴계실을 살펴보던 혜련이가 나직이 물었다.

《금희동무가 어떻게 여기 앉아있어요?》

《사모님, 제가 여기 앉아있으면 안되는가요?》

금희는 괜스레 싱숭생숭해져 생긋이 웃으며 엇뚜질을 했다.

《아니 그런게 아니구…》

그것이 진정인가 해서 혜련은 말꼬리를 흐리며 당황해한다. 금희는 안팎이 저렇게 비단결처럼 부드럽고 꾸밈을 모르는 부인에게 더는 자기 기분에 취해 롱말을 할수 없다는것을 느끼자 그의 손에 든 보꾸레미를 받아들었다. 이맘때면 의례히 가지고나오던 밥그릇이였다.

《선생님은 얼마전에 집에 들어가셨어요.》

《그래요?… 그럼 어디 들리셨나.》

《그럴수 있어요. 안들어가시겠다는걸 아바이가 떠밀어 모시고갔으니 아마 아바이네 집에 갔을거예요. 분명 그랬어요. 걱정 마시구 들어가보세요.》

《아버님네 집이 어디쯤 되는가요?》

그래도 맘놓이지 않은듯 서성대던 그는 아바이네 집에 찾아가려는지 밥꾸레미를 다시 받아들었다. 금희는 공장정문을 벗어나 산기슭에 자리잡은 단층마을을 친절히 가리켜주었다.

혜련은 급급히 자리를 뜨더니 곧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생각같아선 길안내를 해주고싶었으나 자리를 뜨면 안된다. 초행길에 아바이네 집을 찾느라 고생하겠구나 하고 왼심을 써보는데 얼마후 어둠속으로 사라졌던 그가 숨가쁘게 돌아왔다. 금희는 겁이 더럭 나서 마주나갔다.

《아니 무슨 일이 있었어요?》

《금희, 절 속으로 욕많이 했겠군요. 한사람밖에 모르는 갱충머리없는 녀인이라구.》

혜련은 귀밑머리를 쓸어올리며 몹시 죄스러워했다.

《무슨 말인지?…》

혜련은 영문 몰라 서있는 금희의 팔소매를 끌고 휴계실로 들어갔다. 휴계실책상우에 보꾸레미를 올려놓은 그는 보자기를 풀어헤쳤다. 보기 희귀한 3단늄밥통과 커다란 양은쟁개비가 나왔다. 양은쟁개비안에는 보기만 해도 먹음직한 싱싱한 부루와 쑥갓, 오이생채가 들어있었다.

《어서 이 앞에 나앉으세요. 얼마나 시장하겠어요.》

《아니 이러면 안됩니다. 전 요기를 했습니다.》

그때까지 영문을 몰라 엉거주춤 서있던 금희는 잡아끄는 혜련의 손을 뿌리치며 한걸음 물러섰다. 연구사선생의 저녁식사를 축낼수가 없었다.

《노염을 탔어요? 그래서 용서를 빌지 않았나요. 어서 드세요. 자.》

더는 마다할수 없게 된 그는 밥상에 마주앉았다. 그러나 선뜻 수저를 들수 없었다.

《아니 왜 그래요. 하긴 우리 철이 아버지 구미에 맞추느라고 했으니 금희식성엔 어울리지 않을수 있어요. 그럼 어떻게 할가?…》

《사모님, 제발 그런 말씀 마세요. 그런게 아닙니다.》

금희가 손을 내흔들며 더욱 송구스러워하자 그때야 알만 하다는듯 고개를 끄덕였다.

《철이 아버지 걱정은 마세요. 그분의 성미는 내가 잘 알아요. 석근수아버님네 집에 가셨다니 오늘저녁엔 나오지 않을거예요.》

금희는 감심된 눈길로 혜련의 그윽한 모습을 이윽토록 바라보다가 천천히 절을 들었다. 찬은 약숟갈만큼 크기로 갈금갈금 빚은 만두국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산뜻하고 개운한 맛을 주는 남새류가 많았다.

갑자기 시장기를 느낀 금희는 입안의 쟁을 절로 돌게 하는 부루와 쑥갓을 곁들여 빨간 고추장을 살짝 묻혀 봉싯한 입안에 쏙쏙 넣었다. 윤기나는 입술을 꼭 다문채 뽀잇한 볼을 천천히 놀리며 맛스레 먹는 광경을 자애의 눈길로 바라보던 혜련의 눈가에 아지랑이같은 미소가 피여났다.

《금희동무에겐 오늘 좋은 일이 있는가부죠?》

《아이참. 사모님두, 제게 무슨 좋은 일이 있겠나요. 하긴 선생님한테 대접할 성찬을 가로챘으니 이보다 더 큰 횡재가 없지요뭐, 호호…》

《얼굴에 다 씌여있어요.》

《무슨 일이 있었을가?…》

금희는 여기가 걸리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딴전을 피웠으나 세심하고 예민한 혜련의 지긋한 눈길에서 벗어날수 없었다.

혜련은 금희가 깊은 상념에 잠겨 발생로앞 쇠의자에 앉아있는것을 보고 륙감으로 느꼈었다. 반기며 일어서는 그 몸가짐과 억양에서, 생기로 반짝이는 환희의 눈빛에서 봉오리를 터치며 뿜어대는 청춘의 향기를 충분히 감수할수 있었다.

금희는 자신의 내심을 감추려 애썼으나 난생처음 첫사랑에 현혹된 한창때라 자기의 눈과 얼굴과 온몸에서 발산되는 특이하고 강한 그 향취를 감득할만 한 능력이 없었던것이다.

《난 오늘 금희동무의 명쾌한 모습을 보니 막 기쁘군요. 앞으로두 오늘처럼 그렇게 밝은 얼굴로 살아주길 바래요.》

《어마나, 사모님은 정말 내속을 빤히 들여다보는것 같군요.》

《처녀의 눈빛은 속이지 못한답니다. 영원히 행복만이 있기를 축복해요.》

빨갛게 달아오른 낯을 어디다 건사할지 몰라 쩔쩔매던 처녀는 혜련의 가슴에 얼굴을 콱 묻었다. 더는 속일수도 없고 속여서도 안된다고 생각한 처녀는 수집은 목소리로 고백했다.

《사모님-》

무슨 말을 더 할수 없는 처녀의 몸은 엄마의 품속을 파고드는 어린애마냥 혜련의 봉긋한 젖가슴에 자꾸만 얼굴을 문댔다.

혜련은 품속을 파고드는 그 지긋한 힘이 부끄러움만이 아닌 행복의 환희를 주체할수 없는 처녀의 몸부림이라는것을 기쁘게 느꼈다. 그는 자신도 아득한 시절의 환각속에 잠겨들며 불덩이처럼 달아오른 처녀의 등어깨와 칠칠이 땋아드리운 머리태를 천천히 쓸어만지며 애무해주었다.

이윽하여 고개를 쳐든 금희의 눈은 물기에 젖어 령롱하게 빛났다. 수집음과 환희의 불꽃이 아직 그대로 담긴 눈빛이였다.

《사모님. 한가지 물어도 좋아요?》

《어서-》

《사모님은 원래부터 그렇게 웃음이 없었던가요?》

《웃음?!…》

뜻밖의 물음에 처녀의 눈을 마주 바라보던 혜련은 혀끝을 꼭 감쳐문다. 웃음이 없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으랴. 웃음이란 기쁨과 즐거움, 만족과 희망 그리고 자부와 긍지감이 넘쳐날 때 자신도 모르게 솟구치는 환희의 막을수 없는 분출이다.

혜련은 누구보다 웃음이 많은 녀인이였다.

처녀시절엔 더욱 그랬다. 하루하루의 흐름과 주위의 모든것이 웃음속에 용해되군 했다.

물질생활과 정신문화활동에서 추호의 구속도 있을수 없던 그에게 모든것은 찬란한 무지개빛이였다. 희망이면 곧 현실로 성취되던 그 시기 생의 환희는 활짝 트인 먼 수평선과 같았다. 거칠것이란 하나도 없던 처녀시절 봄바람마냥 부풀어오르던 그 웃음도 범상치 않은 한 청년을 사모하게 되면서부터 그리고 결혼이라는 인생의 두번째시절의 시작과 함께 점차 줄어들었다.

혜련은 이러한 변화를 슬퍼하지도 않았고 구태여 재생시키려 하지도 않았다.

결혼과 신혼생활은 그에게 웃음에 대한 신비한 진미를 깨우쳐주었는데 웃음이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남편을 위해서 바쳐질 때 정녕 값비싼것이였다.

남편의 웃음속에 가정의 기쁨이 있고 남편의 희망속에 안해와 한가족의 미래가 있었다.…

《사모님, 제가 쓸데없는 말을 물었지요?》

아무 대답없이 깊은 상념속에 잠겨든 혜련의 숙연해진 안색을 두려운 눈길로 살피던 금희가 조심스레 물었다.

《아니… 갑자기 묻는 말이여서…》

혜련은 고요한 눈가에 한가닥 생기를 불러오며 금희의 손을 더듬어잡았다.

《나두 한때는 금희처럼 웃음이 많았답니다.》

《전 믿을수가 없군요. 사람이 그렇게 달라질수가 있어요?》

《그럴거예요. 어떤 땐 나자신도 믿어지지 않을 때가 있답니다. 아마 저의 친정부모님들이 이렇게 달라진 저를 보면 깜짝 놀랄거예요.》

《?…》

《전 유년기와 처녀시절엔 무엇이나 부족한것이 없이 자랐어요. 이런 환경이 결국 저를 무위도식자로 만들었어요. 어디 가나 웃고 떠들고… 그래서 우리 부모들은 〈저게 사내로 태여났더라면…〉하고 아쉬워했고 마을사람들은 사람구실하긴 틀렸다고 수군수군했어요. 이런 말을 들을 때면 너무도 분해서 밥도 먹지 않았어요. 저는 철이 들기 시작해서야 제가 얼마나 경망했던가를 점차 깨달았어요.

제가 멋없이 웃고떠들 때 많은 사람들이 죽 한끼를 에우기 위해 갖은 고욕과 수모를 당했고 〈징용〉과 〈징병〉, 〈정신대〉에 끌려가 생죽음을 당했어요. 나라가 없던탓이였지요. 정말 분한 생각이 들더군요. 참기가 힘들었어요.

우리 조선사람들이 뭣이 모자라 쪽발이들한테 눌려살겠는가. 원래 섬오랑캐난쟁이들을 우리 조상들은 사람축에 넣지도 않았어요. 저는 일본놈들이 꼴보기 싫어 공부에 전심전력하는것으로 자신을 위안했어요. 저의 이런 의분을 지지해주고 부추겨준 사람이 바로 지금의 남편이였어요. 알고보니 그분의 가슴에도 나라없던 울분과 반감이 돌덩이처럼 굳어져있더군요.》

《그러니까 사모님은 연구사선생님을 만난 후부터 딴사람이 되셨군요?》

뜻밖의 혜련의 뒤생활을 듣게 된 금희는 생각깊은 어조로 물었다.

《아니예요. 내가 단단히 개심하게 된 계기는 서울에 나갔다가 다시 공화국북반부에 들어온 다음부터예요. 남편과 함께 분계선을 넘어왔을 때 사람들이 우리를 어찌나 극진히 환대해주던지… 그날부터 우리 가정은 정말 사는 보람이 있었어요. 하루하루 흘러가는것이 막 아까울 지경이였어요. 세상의 복은 우리가 다 차지한것만 같았어요.》

《전 정말 잘 리해되지 않는군요. 그처럼 행복했던 사모님이 어째서 시름을 안은것처럼 웃음이 없어졌는지?…》

《이봐요 금희동무, 가정의 락은 세대주에게 있어요. 그런데 그이가 오늘까지 발생로를 끝내지 못했구 또 그것때문에 신경도 몹시 예민해졌어요. 모두 내 불찰같기만 해요. 그러니 하루인들 내 마음이…》

《전 사모님의 그 견해에 찬성할수가 없어요. 사모님처럼 그렇게 정성이 지극한 녀성이 어디 쉬운가요. 그런데 그 정성이 모자란다니 어디 말이 되세요?》

《그건 금희가 모르는 소리예요. 난 아직 멀었어요.》

자신에 대한 반발과 하소연이 느껴지는 혜련의 말에 금희는 정색한 표정을 지었다.

《사모님은 뭣인가 잘못 생각하고있어요. 가정은 생물체의 한개 세포와 같다고 봐요. 이 세포가 건전하자면 그 세포를 이루고있는 유기체가 왕성해야 하는것처럼 한가정의 행복역시 우리 사회가 더 부강하고 유족해질 때 확고할거예요.

저는 이것을 최근 1~2년사이에 온 나라를 부글부글 끓게 하는 천리마운동을 보면서 똑똑히 느꼈어요. 서로 돕고 이끌며 더 빨리 내달리려는 그 불같은 지향속에 온 나라는 한가정처럼 화목해졌고 사상정신적풍모는 또 얼마나 변모됐나요. 때문에 지금은 누구나가 천리마기수로 되는것을 제일 큰 희망으로 자랑으로 여기고있어요.

제 생각엔 한대식선생님도 당당한 천리마운동의 선구자라고 봐요. 온갖 반대와 보수적인것을 묵묵히 짓부시고 우리의 자원, 우리의 기술로 우리 식 발생로를 도입하기 위한 그 대담하고 완강한 모습이 얼마나 장해요. (금희는 자기가 한때 발생로를 놓고 동요하던 일이 떠올라 얼굴을 붉혔다.) 지금 종업원들모두가 선생님을 도와주지 못해 얼마나 안타까워하고있는지 모른답니다. 그런 사람들을 볼 때마다 전 사모님이 더없이 돋보이고 부럽기까지 해요.》

혜련은 열싸게 부르짖는 금희의 얼굴을 생각깊은 눈길로 바라보았다. 딱히 찍지는 않았으나 그의 말속에는 세태적감정에서 벗어나 집단과 사회, 시대적분위기에 따라서라는 강한 요구가 담겨있었다.

혜련은 부끄럽기도 했고 금희가 부럽기도 했다.

《그러고보니 금희가 날 깨우쳐주려고 물었군요.》

《주제넘게 제가 뭘 깨우쳐주겠어요. 전 다만 저를 포함해서 우리 녀성들이 부러워할만 한 성품과 학력을 지닌 사모님이 훌륭한 연구사선생님을 모시고있는데도 생활에서 왜 그렇게 웃음을 모를가 하고 이상해서 물었던거예요. 혹시 제가 경망스레 굴었다면 용서해주세요.》

《…》

혜련은 대답을 못했다. 실상 첫사랑에 들뜬 처녀에게 선배다운 말을 해주자고 했는데 오히려 언젠가 석근수아바이한테 들은 말과 똑같은 타이름을 받고보니 자연 충격이 컸다.

이때 뜻밖에도 로익두가 휴계실안에 불쑥 들어서며 웨치듯 말했다.

《아니 오늘은 웬일들이요?》

생각에 잠겨있던 두 녀성은 와뜰 놀라며 일어섰다. 금희가 그에게 두눈을 할기작 흘기며 팩 내쏘았다.

《외삼촌은 뭐예요? 사람들을 놀래우면서.》

《허허. 무슨 비밀이라두 토론하댔니?… 사모님. 진정 놀랐다면 욕많이 하시오.》

로익두는 히물히물 웃으며 혜련을 향해 밭은 목을 갑신했다. 혜련은 묵묵히 답례를 표시했다. 고개를 기웃거리며 휴계실안을 살피던 로익두가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어떻게 주인이 안보인다?…》

《주인이 뭐 따로 있어요. 우리모두가 주인인데. 사모님, 전 로에 가보겠어요. 얘기바람에 정신없이 앉아있었군요.》

재차 한마디 내쏘고 바람처럼 달려나가는 금희를 벙벙해서 바라보던 로익두가 입맛을 쩝쩝 다셨다.

《연구사선생을 조용히 만나려고 왔댔는데 할수없이 그냥 가야겠군요.》

《무슨 일이 있었어요?》

《오죽하면 내가 이렇게 밤길을 찾아다니겠습니까.》

《…오늘밤엔 나오지 못하실것 같은데 어쩌면 좋을가요?》

로익두는 다시한번 휴계실안을 두리번거리며 살피더니 혜련에게 바싹 다가서며 나직이 말했다.

《하긴 연구사선생보다 사모님이 알고 조처해야 할 일이지요. 사모님, 지금 항간에선 별별 험악한 여론이 걷잡을수 없이 떠돌고있수다.》

《?!…》

《사실 사모님의 친정아버지야 얼마나 마음 어진분입니까. 그래서 지금두 서울에서 소문을 내며 큰 장사를 하고있는데 그런분의 딸이 어떻다구 출신이 어떻소, 경력이 요란하오 하고 떠들어대는게 귀가 솔아 듣지 못할 지경이지요.》

《사실이 그런데 어쩌겠어요. 제가 이제 다시 태여날수는 없지 않나요…》

《문제는 거기에 있는게 아닙니다. 우에 간부들이랑 숱한 사람들이 반대하는데 기를 쓰고 발생로를 놓지 못하는데는 딴 목적이 있다는거지요.》

《딴 목적이라니요?》

《출신과 경력이 하두 험하니까 어떻게 해서라두 목숨을 부지해보려는 마지막 발악이라는거지요.》

《뭐라구요?!… 그건 너무하군요. 어쩌면…》

혜련은 물먹은 흙담벽처럼 그자리에 털썩 주저앉는다.

로익두가 당황한척 허스레를 떨며 그를 부축하려 하자 혜련은 점잖게 뿌리치며 간신히 일어나 의자에 등을 기댔다.

《혀끝을 깨물고 본인들앞에서만은 하지 말자던것인데 차마 모른다고 할 처지가 아니여서… 정말 분통이 터질노릇입니다. 그런 모욕과 배척을 받구야 어떻게 참을수 있습니까. 래일이라두 당장 이 더러운 고장을 뜨시오.

연구사선생같은 수재는 꽃방석을 만들어놓고 어서 오라고 할데가 너무도 많습니다. 사모님이 이 험한곳까지 따라내려와 고생하는걸…》

혜련은 두귀를 감싸쥐고 책상우에 얼굴을 묻었다. 귀안이 멍멍하고 온몸이 그악한 발길에 마구 짓밟히는것 같았다. 로익두가 무슨 말인가 악의에 차서 부르짖었으나 더는 들리지 않았다. 더 서있을 필요가 없게 된 로익두는 들어올 때처럼 소리도 없이 휴계실을 빠져나갔다. 꼭 늙은 구렝이가 닭알 녹여내는 행동같았다.

로익두는 요즘 하루하루를 극도의 불안과 초조감 속에 보내고있다. 꿈을 꾸어도 안전원들이 눈앞에 나타났고 누구한테 쫓기는 꿈만 꾸었다. 밤마다 이런 악몽에 시달리다나니 잠자리에 들기도 끔찍했다. 그래서 이제는 한대식이 보기만 해도 두려움이 앞섰고 진절머리가 날 지경이다.

출신과 경력이 어둡고 과학 하나밖에 모르는 선비같아 웬만큼 타격을 가하면 폴싹할줄 알았는데 그것은 큰 오산이였다. 발생로작업반이 해산되고 지배인과 부상까지 극력 막아나서는 형편인데 한대식은 돌부처마냥 요지부동이다. 오히려 타격을 가할수록 반발심만 더 커지는것 같았다. 저런 인간은 사막에서도 우물을 파서 끝내 물을 끌어올릴 독종이다.

그런데다 점결제를 가지고 롱간을 피운 다음부터 석근수며 라석호가 자기뒤를 밟는것 같아 그들과 마주칠 때면 온몸이 오싹오싹 떨렸다. 지금 같아선 그들이 언제 자기 뒤덜미를 거머잡을지 순간도 방심할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동요하거나 뒤걸음칠 형편도 못된다. 조금만 그런 눈치를 보이면 강난실의 독기어린 눈총이 온몸을 벗겨내듯 무섭게 압력을 가하군 했다. 정말 진퇴량난이였다. 모든것이 귀찮고 무서웠다. 그는 저녁만 되면 독한 술을 몇사발씩 퍼마시고 찰거마리처럼 딱 붙어 자기피를 말리우는 강난실에게 행패질을 했다. 그럴 때면 강난실이 로익두의 목을 꼭 그러안고 눈물방울을 똑똑 떨구면서 팔자고치기가 그리 쉬운줄 아는가, 조금만 더 일을 한다음 이남으로 가자고 살살 빌붙었다. 결국 강난실의 말을 따르는수밖에 별도리가 없었다.

오늘저녁도 강난실의 성화에 못이겨 발생로에 접근했는데 마침 한대식이 자리를 뜨고 없었다. 혜련에게 접근하긴 절호의 기회였다. 남편을 위해서라면 칼날우에라도 선뜻 올라설 혜련이라 손에 쥔 떡과 같았다. 말하자면 측면타격을 하고싶었다. 그의 타산은 의외로 큰 효과를 나타냈다.

휴계실밖으로 나온 로익두는 여전히 책상우에 머리를 묻고있는 혜련을 바라보며 《그러면 그렇겠지!》하고 쾌재를 올리더니 이번에는 발생로앞에 앉아있는 금희의 곁으로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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