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막내아들 면회갔던 석근수는 선자리에서 공장으로 나갔다. 어제 저녁때와 오늘낮에 라석호가 찾아왔었다는것이다.

라석호가 두번씩이나 왔다갔을 때는 분명 발생로에서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음을 예고하고있었다.

군부대의 련락을 받고 분계연선에서 복무하는 막내아들한테 떠날 때부터 마음놓이지 않던 발생로였다. 그의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발생로현장은 으쓸할 정도로 조용했다. 불길한 징조를 느끼며 로곁으로 다가서던 그의 눈이 대뜸 휘둥그래졌다. 로상부의 원료투입장치며 로밑 전동장치들이 해체되였고 알탄들이 너저분하게 굴러다녔다. 석근수는 가슴이 띠끔했다. 폭풍우가 휘몰아친것 같은 어쓸한 현장은 황페하기 그지없는데 당신은 어디 갔다가 이제야 어정어정 나타났는가고 묵묵히 질시하는것 같았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뜻밖의 참상앞에 그는 돌처럼 굳어지고말았다.

이때 등뒤에서 발자국소리가 났다. 본능적으로 고개를 획 돌린 그의 눈길은 날카로왔다.

연구사가 량손에 전동치차를 들고 힘겹게 걸어오고있었다. 그의 이마와 목덜미에선 굵은 땀줄기가 철철 흘러내렸다. 발끝만 내려다보며 한발두발 힘들게 다가오던 그는 망두석처럼 굳어져있는 석근수를 보자 흠칫하며 들고있던것을 털썩 놓는다.

석근수는 명치끝이 알알해져 얼른 다가서며 허리춤의 목수건을 뽑아 그앞에 내밀었다.

《어서 땀을 씻으시우.》

《오셨군요…》

한대식은 수건을 받을 생각도 못하고 입가에 어설픈 미소만을 그리는데 그것도 곧 쓸쓸히 사라지고만다.

이런 험한 꼴을 보이는것이 죄스럽고 민망스러운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보니 석근수의 마음은 더 아팠다. 죄스러운것을 론한다면 오히려 자기쪽이 몇배 더하다. 그는 그 마음을 표현할길 없어 묵묵히 연구사의 이마며 목덜미의 땀만 주근주근 문대주었다.

《아드님은 별일 없던가요? 무척 반가웠겠습니다.》

《예, 잘있는걸 괜히 찾아다니며 부산을 피웠수다.》

군부대의 련락을 받고 부대에 도착한 석근수는 곧 사단병원에 안내되였다.

알고보니 연선지대를 순찰하던 막내아들은 자동총을 휘두르며 악랄하게 도발을 걸어오는 미국놈들에게 반타격을 가하다가 부상을 당했던것이다.

총탄이 허벅다리를 꿰고나갔는데 치명상은 아니였다. 인차 돌아설가 하다가 애처로운 감이 들어 며칠을 묵었다. 석근수는 이런 사실을 말해줄 경황이 없었다.

그들은 휴계실로 들어갔다. 휴계실의자우에는 먼지가 뽀얗게 올라있었고 책상이며 그우의 재털이 등 누가 거두지 않아 나간 집처럼 썰렁했다. 이 휴계실에 가득 모여앉아 발생로의 실패원인을 찾으며 떠들어대던 일들이 얍쌀하게 눈굽을 찔러댔다. 더는 내심의 감정을 누르고있을수 없게 된 그는 혀아래소리로 나직이 물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슈?》

《면목이 없습니다. 모든 일은 예견했던 그대로입니다.》

《그게 무슨 말이슈? 지배인이 계속하자구 직접 허락하지 않았소.》

《물론 그랬지요. 그런데 부상이 내려오자 사태가 달라지더군요.》

한대식은 마치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하듯 태연하게 그동안의 일을 대충 말했다.

부상이 내려왔다는 첫마디에 사태의 진상을 대략 가늠해보던 석근수는 발생로설비까지 뜯어갔다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듣고만 있을수가 없었다.

《그 부상이라는 량반이 닭잡아먹구 오리발 내미는 놀음을 했단말이웨까?》

《이러나저러나 마찬가지지요.》

한대식은 그만 지쳐버린듯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사실이 그렇다면 참아내기 바쁜 일입네다. 표리부동해두 분수가 있지 명색 부상이란 사람이 그럴수야 있겠소.》

석근수는 치미는 분격을 참을수 없는지 개가죽담배쌈지를 꺼내여 마라초를 말기 시작했다. 살이 빠져 마디만 툭툭 불거진 그의 장알진 손이 후들후들 떨었다. 원래 부상에 대하여 좋게 보지 않는 석근수다. 지난기간 두세번 흥수비료에 내려온적이 있는데 그때마다 지배인이나 그러루한 간부들을 대동하고 시찰하는 식으로 욱욱 밀려다니다 올라가군 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일제시기 고생도 하고 감옥살이를 했다고 하는데 그런티는 전혀 볼수 없었다. 그에 대한 인상이 더 나빠진것은 봄에 내려왔을 때다.

화학부문의 중책을 지녔으면 비료생산의 새로운 돌파구로도 될수 있는 무연탄가스화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보여야겠는데 오히려 시대착오라느니 상부의 의도와 맞지 않으니 당장 그만두라고 호통치고 올라간것이다. 그것이 어디 부상이 취할 태도인가. 나라의 무진장한 석탄을 가지고 비료를 만들어보겠다는것이 얼마나 기특하고 훌륭한 시도인가. 부상에 대한 나쁜 인상은 그후 지배인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던가싶게 적극적으로 밀어주는바람에 점차 삭막해졌었다. 그런데 부상이 또다시 그 문제를 상정시키고 막아나선것이다. 이제는 지배인 방하철이까지 한걸음 물러섰으니 이 난국을 헤쳐나갈수 있겠는지. 그네들은 왜 그처럼 완강히 반대해나서는가? 혹시 그네들의 주장처럼 무연탄가스화가 실현불가능하지나 않는지… 화학부문에서 중진들이라 할수 있는 지배인이나 부상이 극력 두손 들고 나서는데는 그럴만 한 까닭이 있을것이다. 그 까닭이 도대체 무엇인가. 터질듯이 솟구치던 분격은 점차 고개를 숙이고 대신 속만 답답하다.

《그래 연구사선생은 앞으로 어쩔셈이요?》

《어쩌다니요?!…》

한대식이 무슨 말인가 하여 두눈이 휘둥그래진다.

《이렇게 설비까지 뜯어가며 막아나서는데 해낼 자신이 있는가 말이우다.》

《아바이앞에 정말 부끄럽습니다. 솔직히 저는 사태가 이렇게까지 험하게 번져질줄은 몰랐습니다. 그래서 어제는 너무 당황하여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했고 대낮에 집으로 피해들어가는 어처구니없는 행동을 했습니다. 지금은 또 이렇게 추한 꼴로 나타났구요. 제모습이 얼마나 가긍했으면 아바이가 그런 말을 다 하겠습니까.》

하얗게 조갈이 튼 입술을 감쳐물며 속깊이 터놓는 숨김없는 모습은 온갖 진통을 겪고난 후의 근엄한 기상이였다. 가슴이 아프기도 하고 한편 몰라보게 굳건해진 그가 무등 대견했다.

《선생, 사실은 형편이 막부득해진것 같아 물었던거웨다. 내 마음이 흔들렸수다. 내 소견엔 발생로라면 왼고개부터 트는 부상이 내려와 확장공사준비작업을 벌려놓은데다 발생로설비까지 뜯어가는 이 최악의 형편에서 중간시험을 계속한다는것이 거의 불가능하군요.》

한대식은 처음대하듯 석근수를 이윽토록 바라보다가 힘주어 말했다.

《물론 저도 지금의 형편에서 확신할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다른 방도야 없지 않습니까. 지배인의 말처럼 증산과제나 해놓고 로의 설비를 개조한 다음 계속하면 헐하겠으나 그건 허용되지 않습니다. 만약 그렇게 되면 전해능력확장공사가 본격화될것은 물론 중요하게는 발생로가 그만큼 늦어질겁니다. 지금 공장이 처한 정황에서 발생로는 하루가 급합니다. 저는 전해확장이란 말을 들은 다음부터 석탄을 가지고 화학공업을 발전시키라고 하신 수령님의 그 강령적교시의 정당성을 시시각각 절감하게 됩니다. 수령님의 이 가르치심에는 우리 민족과 우리 나라에 대한 절대적인 사랑과 옹호와 자부심이 담겨있으며 우리 민족, 우리 나라가 무궁할 비결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봅니다. 저는 이것을 온 나라에 세차게 타번지는 천리마운동을 보면서 이 운동역시 우리 인민의 힘, 우리 자원과 지혜의 풍부성을 그토록 중시하시는 수령님의 민족주체성이 낳은 막을수 없는 위대한 분출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바이, 전 잠시도 주저앉을수가 없습니다. 오늘은 증산과제가 급하다고 부랴부랴 전해공사를 시작했는데 래일은 또 무슨 일을 벌려놓을지 모릅니다. 이렇게 환경과 조건을 어쩔수 없는 간판처럼 내걸고 한걸음 두걸음 헐하게 발등의 불만 끈다면 결국 우리 공업의 주체성은 그림자도 남지 않을겁니다. 더욱 엄중한것은 우리 민족의 모든 우수성이 영영 파묻히고마는겁니다. 이것은 생각만 해도 몸서리치는 죄악이며 파멸입니다. 저는 오랜 인테리로서 지난날 일제의 악랄한 식민지통치하에 이 모든것을 뼈저리게 체험한 사람입니다.》

《연구사선생, 정말 고맙쉐다. 내 마음이 든든해지는군요. 난 선생의 가슴속에 그처럼 귀하고 굳센것이 들어있는줄 미처 몰랐쉐다.》

석근수는 감동에 겨워 이렇게 말하며 한대식의 손을 뜨겁게 감아쥐였다.

《아바이, 그런 말씀 마십시오. 그동안 고생만 시켜서 미안하기 이를데 없습니다. 앞으로 지금처럼 욕된 일을 하지 않아도 될것 같습니다.》

《??…》

《부상이나 지배인의 견해는 확고한것 같습니다. 이런 형편에서 발생로작업반을 다시 뭇는다는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아바이한테 한가지 부탁할 일이 있습니다.》

《어서 말하슈.》

《이제부터는 발생로에서 손을 떼주십시오. 그리구 라석호나 금희들두 여기 오지 못하게 해주면 좋겠습니다.》

《그건 무슨 말이요?》

《이제 또다시 발생로때문에 말썽이 생기면 걷잡지 못합니다. 그땐 저도 더 지탱하지 못할겁니다. 그래서 조용히 혼자 하겠습니다. 혼자서도 얼마든지 할수 있으니 맘 놓으십시오.》

《그건 진정 선생답지 않은 소리웨다. 이게 어디 발생로를 계속하느냐 마느냐 하는 단순한 문제요? 선생이 방금 말한것처럼 우리 민족의 주체성을 지키는가 아니면 양보하는가 다시말해 우리 사람들이 제 정신을 가지고 똑똑히 살게 하자는 사활적인 문제란 말이웨다.》

《전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끝장을 봐야 하겠기에…》

《선생두 참…》

굳은 썩살이 박힌 한대식의 손바닥을 쓸어만지는 석근수의 우묵한 눈이 축축히 젖어들었다. 여기 내려올 때만 해도 나근나근하고 매츨하던 손이 늙은이손처럼 거칠거칠했고 탄가루가 박히고 뜨거운 열기게 끄슬려 얼굴은 고동색으로 변했다.

《빵 빵-》

자동차의 요란한 경적소리에 석근수는 그의 손을 놓고 휴계실밖으로 나갔다.

발생로곁에 웬 화물차 한대가 와 섰는데 자재창고지도원이 이쪽으로 다가오며 소리쳤다.

《발생로설비를 다시 실어왔는데 어디 부리겠습니까?》

《잠간만 계시오.》

한대식이 반달음쳐 달려가더니 뒤바퀴를 딛고 적재함에 성큼 뛰여오른다.

《원래 설비는 어떡하구 왜 이런 낡은것들을 가져왔습니까?》

《자재과장동무가 이걸 실어다주면 된다고 하던데요.》

자재지도원은 내 알바 아니라는듯 시치미를 뗀다. 무슨 쪼간이 있는것 같아 석근수가 적재함에 올라가보니 전동기며 선풍기 등 되는대로 처실은 설비는 낡을대로 낡은 페품이였다. 밸이 울컥했다.

《당장 다시 가서 본래의것들을 실어오게.》

《아바인 왜 중뿔나게 큰소립니까. 지령대루 움직인것두 내 잘못이요?》

자재지도원이 낯이 빨개지며 발끈했다.

《자재를 다루는 사람이 물세가 뻔할텐데 이런걸 싣구온단 말이야. 쓸개는 뒀다 뭘하자는겐가. 여러말 할것없이 어서 당장 가게.》

팔팔 뛰던 자재지도원은 경우가 몰렸던지 황소숨만 씩씩거리며 운전칸발판에 털썩 주저앉고만다. 될대로 되라는 태도다. 적재함에서 뛰여내린 석근수가 그의 앞으로 다가섰다.

《자네 발생로가 얼마나 귀한건지 알기나 하나?》

《내가 그런건 알아서 뭘 하겠소.》

《허참, 이 사람아, 청맹과니노릇할 때는 지나갔소. 단단히 정신을 차려야겠네.》

석근수는 숨이 탁 막히는것 같아 허구프게 웃고말았다.

이때 로익두가 숨을 헐떡거리며 뛰여왔다. 자동차를 기다리다가 달려오는 걸음같았다. 눈이 꼿꼿해서 다가오던 그는 석근수를 보자 고개를 끄덕여보이며 어줍은 미소를 그렸다.

《아들 면회갔다더니 언제 오셨습니까?》

《지금 오는 길이네. 그런데 자재과장, 도대체 어쩌자구 이런 파철같은걸 실어보냈소?》

역기 빠른 로익두는 찌붓해서 앉아있는 자재지도원을 흘깃 스쳐보더니 알만 하다는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두 일하기 참 힘이 듭니다. 저저마다 손내밀고 달라는게 이런 설비와 자재인데 어디 맘대로 줄수 있습니까. 이 발생로만 해두 그렇지요. 제 생각엔 최우선으로 보장해줘야 할 대상같은데 웃간부들은 다르게 봅니다. 전해직장확장공사를 1차대상으로 찍지요. 모든 력량을 거기에 집중합니다. 매일 따지고 들지요. 좀전에도 발생로설비를 원상대로 주겠다고 했다가 코만 납작했습니다. 그래서 할수없이…》

로익두는 한대식을 바라보며 리해해달라는듯 두손을 맞비비며 송구스런 자세를 취했다.

석근수는 울컥하는것이 치받쳤지만 뭐라고 할말이 없었다. 하는짓을 보면 괘씸하고 야스껍기 그지 없는데 막상 이렇게 마주서면 말문이 막히는게 이상했다. 소문난것처럼 수완과 언변이 좋아서만이 아니다. 그의 일거일동은 치밀한 계획과 타산에 의해 진행되는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맞다들리는 장소마다 이처럼 용의주도하게 행동할수 있는가.

《그럼 지배인이 발생로설비를 확장공사에 돌리라고 합데까?》

《그런 내부사업까진 따지지 마십시오. 모든 자재사업이 그런 방향에서 진행된다는것만 알아두십시오. 솔직히 말한다면 웃간부들은 생각밖입디다. 며칠있다 평양에 올라갈 연구산데 아무거나 갖다주라는거지요.》

석근수는 입을 다물고말았다. 말끝마다 웃간부요 지배인이요 하면서 걸고드는것이 역겨웠고 은근히 가시를 품은것 같은 그 억양이 기분나빴다.

로익두는 석근수의 심중해지는 표정을 눈치채고 얼른 한대식이쪽에 말꼬리를 돌려댔다.

《연구사선생, 그렇다구 너무 손맥을 놓진 마시오. 내가 잠을 좀 못자구 뛰여서라두 확장공사엔 다른 설비를 들이대겠으니 여기서 뜯어간 설비는 먼지하나 다치지 않구 다시 가져오도록 합시다. 아바이, 그렇게 하면 되겠지요, 허허.》

저혼자 앙바틈한 어깨를 달싹거리며 호기스럽게 웃던 그는 운전수를 향해 큰소리로 웨쳤다.

《자, 한탕 더 뛰여야겠소. 사실은 자동차 쓸일이 있어서 독촉하러 왔댔는데 혹을 붙여가게 됐구만. 자재지도원, 멍해 앉아있지 말구 빨리 타라구.》

자동차는 곧 시꺼먼 연기를 내뿜으며 굴러갔다.

석근수는 먼지를 말아올리며 멀어져가는 화물차에 눈을 박은채 까딱 움직이지 않고있었다.

그는 지나치게 림기응변하고 용의주도한 한 인간에 대하여 생각하고있었다. 마치 왼쪽주머니것을 오른쪽에 옮겨넣듯 제마음 내키는대로 자재를 휘둘러대는 로익두의 경솔한 태도가 리해되지 않았다.

벽돌 한장, 철판 한㎡을 엄격한 입출고질서에 따라 움직이는 이때 배포유한 그의 월권행위는 아무모로 보나 지나쳤다. 그렇다. 로익두는 그만 오랜 로동계급인 석근수앞에 자기 정체의 일단을 보여주고말았다. 그것은 큰 실수였다. 수완과 언변이 뛰여나 자재과장으로는 그저그만이라는 귀맛좋은 여론에 코대가 높아진 그는 제 꼬리가 얼마나 늘어나는지도 모르고 들까부는 장돌뱅이의 그 약점을 드러내고만것이다.

한달전 문화주택을 건설하던 때의 일도 련상되였다. 생각지도 않았던 로익두가 자진하여 끼여들면서 얼마나 복잡한 문제를 야기시켰던가. 그때 역시 그의 월권행위를 미심쩍게 여기면서도 발생로를 도우려는 좋은 측면으로 리해하고말았는데 이번 일까지 겪고보니 분명 미타한것이 있었다.

자재과장인 그가 발생로와 한대식연구사에 대하여 왜 그처럼 관심이 높은가. 혜련이 여기 오는 날에는 역에까지 마중나갔고 그후 그들부부를 초대하여 요란한 환대까지 했다 한다. 주택건설 때는 귀중한 생산자재까지 들이밀며 사면팔방 뛰여다녔다. 다른 사람들한테 자재를 내줄 때는 좁쌀알도 세여준다는 위인이 아니던가.

《아바이,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한대식은 화물차가 사라진지도 이윽한데 까딱 움직이지 않는 그가 이상하여 나직이 물었다.

《자재과장에 대해 생각해봤수다. 발생로일이라면 손발벗고 극성이니 별스럽지 않소.》

《손발까지야 뭐… 아무튼 관심이 높은것만은 사실입니다.》

《혹시 자재과장과 무슨 연고관계가 있는건 아닙네까?》

《웬걸요. 여기 와서 첨 알게 되였습니다. 그런데 그의 남다른 관심이 딱 질색입니다.》

《그건 무슨 뜻이웨까?》

한대식은 대답을 피했다. 뭐라고 한마디로 말할수가 없었다. 얼굴만 화끈 달아올랐을뿐이다. 지배인실에 갔다오는 사이를 참지 못해 독수리 병아리 채가듯 발생로의 설비들을 다 뜯어가고도 자기네 부부의 출신과 경력을 들춰내며 동정과 우려를 표시하던 그 퇴매하고 야스껍던 낯짝이 떠올랐던것이다. 금시 바지까지 벗어줄듯 살갑게 구는가 하면 아픈곳을 꼬집어내여 박박 긁어대는 이 변화무쌍한 인간을 뭐라고 규정하겠는가.

더우기 짙은 의혹을 던져주는것은 로내 이상현상을 야기시켜 그처럼 속을 태워주던 점결제의 농도문제다. 원인모르게 희박해졌던 점결제의 농도며 또 퍼그나 남아있던 그 점결제마저 길주에 갔다온 사이에 자의대로 없애버린 로익두의 괘씸한 행동은 속에 딱 맺혀 내려가지 않았다.

그러나 과학연구에만 온갖 신경을 집중하고있는 그에게는 아직 그것을 분석해볼만 한 눈이 없었고 설사 그 인간이 아주 치졸하고 표리부동하다고 생각돼도 본인 없는 뒤에서 시비질하는것은 심히 점잖지 못한 처세라고 여기는 한대식이였다.

석근수는 눈길을 피하는 그에게 더 물으려 하지 않았다. 만약 이때 로익두가 놀아난 그 간교한 행동을 한가지만이라도 로출시켰더라면 그의 정체를 쉽게 알수 있었고 한대식자신도 돌이킬수 없는 랑패를 보지 않을것이다.

석근수는 그길로 지배인을 찾아갔다. 발생로가 이렇게 우롱당하는것을 보고만 있을수 없었다. 지배인의 처사이든 로익두의 술책이든 계선을 갈라놓고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관점을 바로세우도록 해야 했다.

한대식은 제발 말썽을 일으키지 말아달라고 앞을 막아서며 신신당부하는데 이것이 어디 말썽으로 론할 일인가. 무연탄가스화는 그가 말하듯 우리모두의 넋과 같다. 되면 하고 어려우면 그만둘 그런 성격이 아니며 한대식연구사 한사람에게만 맡겨둘수는 더욱 없다.

저으기 흥분되여 지배인을 찾아갔으나 방은 비여있었다. 확장공사장지휘부에 나갔다는것이다.

발길을 돌려 지휘부를 찾아갔다.

확장공사지휘부는 2전해직장휴계실 한쪽을 널판자로 막고 거기에 전개되여 있었다.

방안은 의외로 조용했다. 한쪽 책상에 마주앉아 무슨 시공설계도면을 보고있던 라석호가 반겨맞아주었다. 뜻밖에 이런 자리에서 그를 보게 된 석근수의 눈이 야릇하게 쪼프러졌다.

《언제 오셨습니까?》

《좀전에 왔네. 여기가 확장공사지휘부가 옳긴 옳은가?》

《예, 림시로 쓰고있습니다.》

무뚝뚝한 물음에 라석호는 더수기에 손을 올리며 어줍게 대답했다. 발생로가 그꼴로 됐는데 여기 와있자니 바늘방석에 앉은것 같아 두번씩이나 석근수의 집에 찾아갔던 그다.

《그래 기사동문 무슨 소임을 맡았나?》

라석호는 사무실안을 여기저기 훑어보며 여전히 못마땅하게 묻는 바람에 얼굴이 불깃해졌다. 이때 전화종이 요란히 울렸다. 했으나 그는 전화받을 엄두를 못하고 송구스레 발끝만 내려다본다.

《어서 전화를 받게나.》

석근수가 의자 한귀퉁이에 걸터앉으며 푸접없이 권고했다.

그의 기분은 좋지 않았다. 가뜩이나 흥분되여 달려왔는데 라석호를 보니 그 어떤 배신을 받은것 같은 불쾌감이 지물지물 솟아올랐던것이다.

《아바이, 면목없게 됐습니다. 이렇게까지 될줄은 생각도 못했지요.》

전화를 받고난 라석호가 엉거주춤한채 면적스레 말했다. 그 모습을 보니 라석호한테 역성을 낼 일이 아니라는 지각이 들었다. 그래서 석근수는 어떻게 된 감투끈인지 들어보자고 한결 부드러워진 어조로 물었다.

《모든 일은 부상이 내려온 다음부터 급진적으로 달라졌습니다. 전해직장확장안은 초여름에 성에서 떨군 계획이더군요. 그런걸 지배인이 깔구있은것 같습니다. 그러니 불이 번쩍나게 조겨대더군요. 대가 세다고 하는 지배인도 쩔쩔매더군요. 그 즉시에 확장공사를 벌릴데 대한 종업원모임이 있었고 그자리에서 공사지휘부와 각 분과들, 로력, 설비 등 조직사업이 벌어졌습니다. 저는 자재분과 설비담당을 맡아보게 됐습니다.》

《지배인이 노상 하자고 내밀던 설비개조안은 어떻게 됐나?》

《한마디 비췄다가 된방망이를 맞은가봅디다. 로동계급적관점이 없다구.》

《그건 또 무슨 소리요?》

《로동계급의 피와 넋이 스민 설비를 아까운줄도 모르고 망탕 뜯어버리려 한다는거지요. 전 그처럼 결패사납고 완력이 세찬 사람을 첨 봅니다. 이제 온 전화도 부상한테 온것입니다. 따지구 독촉하구. 두시간이 멀다하게 다과대는데 정신을 못차릴 형편입니다. 1단계확장공사가 끝날 때까지 우리 공장에 틀구앉아있겠다고 합니다.》

라석호가 저렇게 급한 소리를 하니 부상이란 사람이 간단치 않은 인물같았다.

석근수는 어딘지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가 보기에는 지배인의 그 설비개조안도 해볼만 한 일이며 불가부득 그렇게 해야 할것으로 여겨왔다.

지난 기간 아무리 고귀한 피와 넋이 스며있는 설비들이라 해도 오늘에 와서 낡고 생산에 지장을 준다면 교체해야 한다. 그런 부단한 교체과정을 통해서 공장의 면모가 달라지고 현대화될수 있다. 교체를 할수 있는 능력만 있다면 빨리 할수록 좋다. 이것은 지난것을 무시하고 버리는것이 아니라 더욱 계승빛내이는것으로 될수 있다.

과연 부상이란 사람이 이런 발전의 법칙이라 할수 있는 설비갱신문제를 관점문제로 걸고들어야 옳은가. 석근수가 대답없이 침묵을 지키자 라석호는 동정의 표시로 추측하고 답답하던 가슴을 헤쳐놓듯 불만을 터뜨렸다.

《이번에 벌려놓은 확장공사만 놓고봐도 심각한 문제가 내재돼있다고 봅니다. 지금 전해조가 모자라 비료를 더 못냅니까? 협의회때 이구동성으로 이 문제가 제기됐는데 단마디로 꾹 눌러놓더군요. 확장공사는 성의 계획이니 전기문제도 성에서 해결해줄거라는 식이죠. 전 요즘처럼 무연탄가스화의 절박성을 느껴보기는 첨입니다. 발생로가 이미 성공했다면 이런 확장공사가 무엇에 필요하겠습니까. 전 어제 길가에서 연구사선생을 만났댔는데 제 정신있는 사람같지 않더군요. 아바이, 말 좀 하십시오. 이대로야 그냥 있을수 없지 않습니까?》

그냥 있을수 없는 답답한 마음이기에 아들면회간 석근수를 안타깝게 기다렸고 두번씩이나 찾아갔던것이다. 연구사를 혼자 내버려둔다면 아무리 의지가 굳세다 해도 지리멸렬할것 같았다. 그를 도와줄 방도를 모색했으나 신통한 방법이 없었다.

퇴근후 밤에 가서 일손을 몇번 거들어줬는데 그런 식으로야 어떻게 할수 있는가. 그나마도 요즘엔 부상이 달구치는 성화에 자리를 뜰수조차 없다. 이처럼 난감한 처지에 있던 라석호라 석근수를 만나자 구원자를 만난듯 화풀이겸 푸념을 해보는것이다.

《실은 나두 발생로문제가 심각하여 지배인을 만나자구 여기까지 왔댔소.》

《무슨 방도라두 있습니까?》

라석호가 생기를 띠며 물었다.

《방도야 지배인을 납득시키는것이구 견해를 바로 세워주는것이지.》

라석호는 그만두라고 말하려다가 당돌한것 같아 참았다. 석근수의 말이라면 지배인두 내놓고 몰박아주진 못하겠지만 그런 연고관계나 인정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였다. 석근수는 지배인을 어서 만나봐야겠다고 움씰 자리를 일었다.

그의 기상은 자못 엄엄했고 걸음발도 다기찼다. 라석호는 문밖까지 따라나가며 바래주었다.

《저녁때 짬을 내여 발생로에 가겠습니다.》

《한번 와보게. 그리구 기술부실험실에 있는 금희를 꼭 데리구 오게.》

석근수가 바람을 일구며 나가기 바쁘게 전화종이 요란스레 울렸고 자재분과 성원들이 꼬리를 물고 들어섰다. 라석호는 어느덧 복잡한 사무처리에 파묻히고말았다. 기초굴착의 깊이와 그 성토량, 설비구입차로 각 곳에 나갔던 인수원들의 사업정형총화와 재포치… 패기있고 날파람있는 그였으나 하루종일 시달림을 받고나면 곤죽이 될 지경이다.

그는 시간이 어떻게 지나는지 느낄사이도 없었다. 눈앞에는 근엄한 기상이 되여 지배인을 찾아간 석근수의 모습이 사라지지 않는다. 무슨 소식이 있을것같은데 잠잠했다.

문돌쩌귀에 불이 날듯 여닫기던 출입문이 잠잠하여 벽시계를 쳐다보던 그는 흠칫 놀랐다.

벌써 퇴근시간이 퍽 지난것이다. 저녁에 금희를 데리고 발생로에 와달라고 당부하던 석근수의 부탁이 떠올랐다. (금희가 퇴근하지 말았어야겠는데.) 그는 책상우의 서류를 대충 간종그려놓고 문을 나섰다. 바로 이때 전화종소리가 자지러지게 울어댔다. 명령지시에 습관된 그는 지체없이 송수화기를 들었다.

전화는 지배인실에서 왔다. 하루사업실태자료를 가지고 곧 와달라는 부상의 호출이였다. 난처했다. 간단히 끝날 일이 아니였다. 결심을 못하고 망설이고있던 그는 미심결에 송수화기를 들고 공장기술부를 찾았다.

마침 금희가 방금 실험실문을 나갔다는것이다. 안도의 숨이 나갔다.

그는 문을 박차고 정문을 향해 줄달음쳤다. 출근길에 서두르던 후야근교대성원들이 뗑해진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금희는 실험실이 위치한 건물에서 얼마를 벗어나지 못하고있었다. 한쪽에 손가방을 메고 고개를 다수굿이 걷는 그의 모습은 깊은 상념에 잠긴듯 굼뜨게 움직였다.

《금희동무-》

웨침소리와 동시에 가쁜 숨결이 불빛어린 금희의 파릿한 볼에 화끈 들씌워졌다. 금희는 흠칫 몸을 떨며 반사적으로 옹송그렸다. 덮칠듯 다가든 사람이 라석호임을 알아본 그는 놀란 가슴을 꼭 누르며 눈을 할깃 흘긴다.

《웬일이세요?》

《하마트면 놓칠번 했구만.》

라석호는 숨을 헉헉 내쉬며 이마의 땀을 훔쳤다. 금희는 그 커다란 눈에 의혹을 담고 빤드럼히 쳐다보는데 구내등의 어수크레한 빛으로 하여 침울하고 어딘가 축간 느낌이 들었다. 그래 그런지 선뜻 말이 나가지 않았다. 금희는 돌연히 나타난 애인이 가쁜숨만 내쉬며 무엇인가 망설이고있자 그것을 이성의 감정으로 포착하고 크고 억실억실한 눈에 생기를 띠웠다.

그는 라석호가 이끄는대로 길역 나무밑으로 소곳이 따라들어갔다.

《금희, 이길로 발생로에 좀 가주오.》

《발생로에요?…》

금희는 뜻밖의 말이 나오자 두눈이 휘둥그래졌다.

《면회갔던 석근수아바이가 돌아오셨는데 퇴근하는길에 들려달라누만.》

《그런데 발생로에는 왜 와달라고 할가요?》

《??…》

전혀 반기는 기색도 없이 어떻게 보면 그 부탁이 이상하다는듯이 눈살을 쪼프리는 금희의 태도에 그는 놀라움을 금할수 없었다.

《오해하진 마세요. 이제는 발생로설비까지 확장공사에 돌렸다고 하기에…》

역기 빠른 금희가 급급히 변명하며 어설픈 미소를 그려보였으나 허전하긴 마찬가지다. 그런 허튼 소리를 그대로 믿고있은 금희가 새삼스레 보였다.

그는 자신이 지내 선입견을 가지고 대하는것 같아 설명을 가했다.

《금희도 알다싶이 발생로가 지금 막다른 곤경에 처하지 않았소. 그래서 석근수아바이가 이 문제를 풀어보겠다구 면회갔다오는 길로 지배인을 찾아갔소. 이제 발생로에 가면 아마 그 정형을 알수 있을거요.》

《그렇게 됐군요…》

《난 지배인실에 가야 할 사정이 생겼소. 거기서 하루사업정형을 총화하는데 시간이 좀 걸릴것 같애. 그러니 금희동무 혼자 가주오.》

《저 혼자서말입니까?》

《왜 혼자 가기가 무섭소?》

《호호… 무섭긴. 큰 소임을 맡은 기사동무하구 함께 갔으면 해서 그러지.》

금희는 손등으로 입을 가리우고 나직이 웃었다. 그 연약한 웃음은 인차 사라지고말았다. 흰 목을 드러내고 큰소리로 깔깔대던 처녀가 이렇게 갑자기 소심해진것이 애인앞에 선 처녀의 수집음만이 아니라는것을 라석호는 무거워지는 마음속에 감수했다. 며칠전 달빛 유정하게 흘러내리던 호젓한 그밤 강변 방축길을 거닐 때도 금희의 태도는 애매했고 내심의 모대김이 력연히 얼굴에 나타나있었다. 혹시 그의 심중에 어떤 변화가 일어난것이 아닌가. 누구보다 연구사를 열렬히 존경하고 따르던 그가 왜 이처럼 소격한 태도를 보이는가.

(그럴수 없어. 다른 사람은 다 변해도 그만은 변할수 없어.)

라석호는 어지럽게 떠오르는 환영을 털어버리듯 고개를 세차게 가로 흔들었다.

그런데 부정할수록 머리가 착잡해졌다. 뒤축높은 구두를 따가닥거리며 멀어져가는 금희의 뒤모습을 점도록 바라보는 그의 심중은 안개속을 헤매는것 같았다. 그것은 활달한 성미에 마음 또한 불덩이처럼 뜨거워 보기만 해도 즐거워지고 분발심을 자아내던 사랑하는 처녀에 대한 첫 의혹이였다. 라석호의 그 의혹은 틀리지 않았다.

발생로현장을 향해 걷고있는 금희의 마음은 울적했다. 웃는 낯으로 라석호의 곁을 떠났지만 갈수록 걸음발이 떠지기만 했다. 전망이 묘연한 발생로였다.

물론 과학적발명과 그 도입과정이 헐치 않으며 지금보다 더 험한 상태가 빚어질수도 있다. 그러나 무연탄가스화만은 좀 다른것 같은 생각이 지꿎게 갈마든다. 흔한 석탄으로 비료를 만든다는것은 더없이 효과적이고 경제적이겠으나 그 실현성이 갈수록 더 희미해지고 이제는 막다른 지경에 처했다. 이 명백한 사태를 외면한다면 돌이킬수 없는 파국이 초래될것이다.

누구보다 사물의 현상과 비밀을 예리하고 정확하게 투시해보는 연구사선생이 왜 위험계선에 그냥 서계시는가. 외삼촌이 말하듯 그 무슨 딴 목적이 있어서 할수없이 붙들고있는가. 그럴수는 없다. 그분들이 어떤분들인가.

금희는 자기가 그 어떤 소용돌이속에 잠겨든것 같은 착각이 종종 일어났으나 연구사 부부를 끝까지 믿고 존경하리라 맘먹었다. 그들부부에 대한 좋지 못한 말을 들은 후 옥에 티를 보는듯한 상실감이 있었으나 그 허물은 어디까지 과거사회가 남긴 상처다. 인간으로서의 그들의 성실성과 강한 의지, 자기 사업에 대한 드팀없는 신념은 그 상처자리를 흔적도 없이 지워버렸다고 해야 할것이다. 이것을 의심한다면 죄악으로 될것이다. 이런 믿음이 크기에 연구사선생이 발생로를 그만두었으면 하고 간절히 바라게 되는 금희다. 지금의 험악한 사태를 외면하고 부디 주장을 내세웠다가 완전한 실패로 끝난다면… 아, 그렇게 되면 항간에 떠돈다는 그 어지러운 뒤소리는 얼마나 요란할것인가. 게다가 손해준 그 막대한 자재, 자금으로 하여 그들부부는 견뎌내지 못할것이다.

그것이 두려웠다. 그 두려움은 멀리 있는것이 아니라 눈앞에 있는것 같다.

부상은 이미 초봄에 발생로에 경종을 울린바 있다. 그때는 지배인이 막아나서 쏟아질것 같던 비구름이 수평선너머로 사라졌었다. 그런데 오늘은 폭풍우를 예고하는 먹장구름이 정수리우에서 룡트림하고있는것이다. 이제는 그 폭풍우를 막아줄 지배인도 없으며 방조자들도 흩어졌다. 어느 시각에 우뢰가 울고 벼락이 떨어질지 모른다. 바라건대 연구사선생이 시세를 현명하게 가려보고 어서 몸을 피해야 한다. 비료공장이 어디 여기뿐인가. 그것없이는 못사는 연구사선생이니 다른 공장에 가서 하면 오죽 좋을가. 금희는 좀전에 라석호에게 자신의 이런 내심을 토설하고싶었다. 그러나 어딘가 경원하는듯 한 눈길을 받고보니 턱밑까지 치밀어오르던 말마디가 가뭇 사라지고말았다. 그것은 잘한 일이다. 아직은 말할수 없으며 말해서도 안된다. 때가 되면 그도 나의 마음을 리해해줄것이다. 발생로를 향해 시름시름 걷고있는 금희의 심리는 이러했다.

현장에서는 석근수가 친정집 나들이온 딸만큼이나 금희를 반겨맞아주었다.

《어떻게 외기러기만 날아들었나. 엉? 그 확장공사설비담당기사량반은 왜 안온대?》

《어서 와요. 기다리고있었어요. 이렇게 와줘서 정말 고마와요.》

한쪽에 앉아 땀을 들이고있던 혜련이도 그의 두손을 잡아쥐며 반가와 어쩔줄 모른다. 로안에 알탄투입작업을 하다가 잠시 쉬고있는것 같았다.

낯이 화끈해진 금희는 그들을 바로 바라볼수가 없어 두눈을 내리깐채 허리를 굽혀 묵묵히 인사를 했다.

《아바이, 석호동문 부상동지가 불러서 지배인실로 갔습니다. 인차 끝날것같지 못하다면서…》

《그래, 하긴 금희당자가 왔으니 됐소. 금희 기뻐하라구. 래일부터 금희가 발생로에 다시 오게 됐소. 말하자면 그전처럼 당당한 조수의 자격으로 말이네.》

《제가 말입니까?》

《왜 믿어지지 않나. 아까 지배인실에서 합의가 있었네. 그동안 금희가 맘고생을 수탠 했지. 허-》

《금희동무, 또 고생을 시키게 되여 미안하오.》

한대식이 어줍은 소리로 한마디 했다.

《저… 오일규반장동지랑 다른 동무들은 어떻게 됐습니까?》

《차차로 해결되겠지. 현재는 금희하구 나, 연구사선생 이렇게 셋이요.… 왜 세명이 힘들것 같아 그러나?》

금희의 얼굴에 실망의 그늘이 얼핏 지나가자 석근수가 물었다.

《아, 아닙니다…》

당황해난 금희가 황황히 부인했다.

《금희가 그전하군 달라진것 같다. 솔직하지 못한걸 보니.》

석근수는 당황해하는 그를 중떠보듯 지그시 넘겨다보며 시뭇이 웃었다.

《내 금희의 맘을 모르지 않네. 사실 세명이 한다는게 말이 안되지. 그러나 조건이 그러니 어찌겠나. 한사람이 열사람 맞잡이루 분발해보자구. 그러면 옆에서들 가만있지 않을거네. 아주머니, 그 보온병의것을 좀 주슈.》

석근수는 문뜩 엉거주춤 허리를 굽히며 혜련에게 손을 내밀었다.

혜련은 제꺽 그의 요구를 알아차리고 사기고뿌에 보온병의 물을 가득담아 두손에 받쳐올린다.

《여기 오느라구 땀을 흘렸겠는데 어디 좀 마셔봐라. 맛이 어떤가?》하고 고뿌를 받아든 석근수가 그것을 금희에게 넘겨주었다.

《탄산수예요. 맛은 없지만 땀이 좀 들거예요.》

고뿌를 받아들고 영문을 몰라하는 그에게 혜련이가 나직이 귀띔했다.

금희는 마시고싶은 생각은 없었으나 일부러 권하는것을 마다할수 없어 입에 대는척 했다. 혀끝이 짜릿하고 달짝지근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봉싯한 입술을 벌리고 야금야금 다 들이키고말았다. 명치끝까지 찌르르해지더니 속에 있던 더운 열기가 쑥 빠져나온다. 그 모양을 흐뭇이 바라보고있던 석근수가 은근히 물었다.

《그래 어떠냐?》

《맛이 좋습니다. 우리 공장 탄산수보다 더 찡한것 같애요.》

《허허, 평가가 괜찮구나. 이 탄산수는 사모님이 만든거다. 발생로에서 나오는 페기가스로말이다. 말하자면 발생로의 첫 시제품과 같지.》

석근수는 어깨를 들썩이며 흡족하게 웃었다. 그 웃음소리는 금희의 흉벽을 세차게 때렸다. (이런분들을 외면할순 없어. 어차피 나도 발생로와 운명을 같이하는수밖에…)

그는 밑굽까지 낸 고뿌를 든채 석근수의 훌쭉 꺼진 볼을 감심어린 눈길로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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