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지배인실에서 나온 한대식은 잠시 대기실에 서있었다. 발목에 천근추를 달아놓은듯 움직일수가 없었다. 부상 남주혁과 이렇게 헤여져서는 안된다고 그의 리성은 강하게 호소하고있었다. 출신과 경력까지 들추어내며 모욕을 주는것은 얼마든지 참을수 있으나 무연탄가스화를 한갖 석탄장난에 비유하는 그 황당한 발언을 새겨넘길순 없었다. 결코 안목이 좁아서가 아니다. 한 공장의 지배인이나 전문가라면 몰라도 나라의 화학부문을 담당한 그의 이런 태도는 심각한 문제가 아닐수 없다. 이것은 무연탄을 기초로 비료뿐아니라 화학공업을 다양하게 획기적으로 추켜세우려는 우리 당의 뜻에 심히 대치되는 무서운 장벽이다.
한대식은 그것이 두려웠고 장벽으로 막아나선 남주혁과 결판을 내고싶었다.
그는 흑색라크칠한 묵직한 지배인실문을 뚫어지게 쏘아봤다. 남주혁과 자기 사이의 거리는 장바 한기장도 못되지만 거무틱틱한 문으로 하여 그가 딴세계의 사람처럼 느껴졌다. 두세사람이 앞을 지나 그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한대식은 그만 몸을 돌리고말았다. 이제는 조용히 그와 맞대들이 할수 없게 된것이다.
(후에 다시 만날 기회가 있겠지.)
이렇게 생각을 돌려먹은 그는 고개를 짓수굿하고 행정청사를 나섰다. 일단 발생로를 계속하라고 허락받은 이상 바싹 다그쳐야 했다. 중간시험만 끝내놓고 다시 맞서보자. 그때 가서야 부상이 오늘처럼 도고하고 어리석은 망동을 부리지 못하겠지 하고 부지중 반발심이 솟구쳐오른 그는 걸음발을 다그쳤다.
그러나 현장에선 더 어망차망한 일이 그를 기다리고있었다. 발생로두리에는 알탄들이 되는대로 널려져있고 송풍기며 전동기 등 주요설비들이 보이지 않는다. 물초롱과 삽까지 없어진것으로 보아 뜯어낼수 있는 설비는 다 뜯어갔다.
황량하기 그지없는 현장을 망연한 눈길로 바라보던 한대식의 가늘게 떨리던 입술에서 신음소리가 나왔다. (사람을 이처럼 롱락할수 있는가.)
그의 눈은 점차 날카롭게 빛났다. 이대로 치면 맞고 내리누르면 짓밟힐수만 없다. 아무리 남의 공장신세를 진다해도 내놓고 롱락당하고싶진 않았다. 분노를 느낀 그는 성큼 일어나 자재창고로 향했다. 우선 로익두의 표리부동한 처사를 따져야 했다. 지배인실에 어서 가보라고 부추겨놓고는 두시간을 참지 못해 이런 만신창을 만들어놨으니 그런 괘씸한 인간이 어디 있는가.
로익두는 마침 창고안에 있었다. 그는 무슨 좋은 일이 있는지 앙바틈한 어깨를 달싹거리며 껄껄 웃고있었다.
체구가 우람찬 한대식이 씽 바람을 일쿠며 창고안에 들어서자 일순 로익두의 그 재피씨같은 눈이 딱 굳어졌다가 확 풀리며 수선을 떨었다.
《연구사선생이 어떻게 이런 루추한델 왕림하시우?》
《발생로에서 뜯어온 설비는 다 어디에 두었소?》
한대식의 눈에선 불이 펄펄 일었다. 꽉 틀어쥔 커다란 주먹이 우들우들했다.
이처럼 성난 기상을 처음 보게 된 로익두는 겁이 났던지 얼른 다가와 그의 팔굽을 꼭 붙잡는다. 번들거리는 대머리가 한대식의 어깨밑에서 살래살래 흔들렸다.
《진정하시우. 내 이제 말씀드리지요. 자, 이 의자에 좀 앉으슈.》
서너명의 창고성원들이 웬일인가 하여 그들을 둘러쌌다.
《동무들은 왜 모여들면서 그래. 어서 아침에 분공한대루 지체 말구 빨리들 나가보시오.》
로익두가 불시에 짜증을 내자 모여섰던 사람들이 슬그머니 흩어져갔다. 단층으로 된 창고는 천정이 2층높이만 한데 각종 자재들이 꽉 차있었다.
《사람들 있는데서 그게 뭐요? 연구사선생이라면 하늘처럼 높이 우러러보는데. 내가 막 급하더군요.》
로익두는 단둘이 남자 사뭇 한대식의 체모를 걱정해주었다.
《자재과장동무는 대단히 옳지 않소. 지배인실에 갔다오는 두시간을 참지 못해 그런짓을 하오. 정말 상상밖이요. 그 의도가 뭐요?》
한대식이 격한 목소리로 따지고들었다. 아직까지 천연스레 노는 그가 혐오스럽기 그지없었다. 딴 속심이 아니고야 어찌 그런 행동을 할수 있는가.
그가 찌르는듯 한 눈길로 무섭게 다그어대자 로익두는 사위를 얼핏 살피며 나직이 물었다.
《부상이 발생로를 계속하라고 승인합디까?》
《그게 문제가 아니오. 난 과장동무의 그 속심을 알자는거요. 지난 시기에는 누구보다 적극 나서주던 과장이 왜 그렇게 갑자기 변했소?》
《그렇게 오해하면 난 정말 억울합니다. 나두 그래 우리 집사람두 그래 우리는 선생네 내외분을 딴사람처럼 생각해본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오늘두 사실은 선생의 딱한 립장이 하두 걱정돼서 용단을 내렸지요.》
한대식은 기가 막혔다. 아무리 구변좋고 참새굴레 씌운다는 로익두라지만 이런 적반하장이 어디 있는가. 그런데 그의 입에선 점점 험악한 말만 튀여나왔다.
《연구사선생은 지금 위험계선에 있습니다. 운명적인 순간에 있지요.》
《?!…》
《왜 그리두 세상물계에 어둡소. 부상은 벌써 초봄부터 연구사선생을 당장 쫓아보내라고 했댔소. 나라의 화학을 뒤걸음치게 한다구. 그때 지배인이 막아서지 않았더라면 무슨 벼락이 떨어졌지요. 그런데 이젠 지배인조차 두손 들지 않았소. 그러니 누구를 믿구 여기 있겠소. 부상은 발생로를 당장 불도젤로 밀어버리고 확장공사를 다그치라는거요. 형편은 이렇소. 지각있는 선생이니 대세에 역행할순 없지 않소. 다른곳에 가서 하면 될걸 가지구 왜 그리 고집을 쓰시오.》
《여보시오. 누가 그런 걱정해달라오? 내가 할 일은 내가 잘 알고있단 말이오.》
《어이구 맙시사. 마이동풍이군.》 로익두는 입속으로 중얼거리며 작은 두눈을 재빨리 깜박거렸다. 그쯤하면 끔쩍 놀랄줄 알았는데 이발이 들어가지 않는 모양이다. 그는 꺼지게 후- 하고 한숨을 내쉬더니 개탄조로 말했다.
《할수없이 한마디 해야겠군요. 듣기 거북해서 이 말만은 하지 말자구 했는데 지금 항간에서 어떤 흉흉한 소문이 떠도는지 알고있습니까?》
《?…》
《찧구까불구 내 가슴이 선뜩선뜩합디다. 선생의 사모님으로 말하면 내 은인의 따님으로서 어지고 현숙하기 이를데 없지요. 그런 훌륭한 부인이 아버지때문에 큰 봉변을 당한단 말입니다. 월남한 애비가 이남에서 큰 상인으로 떵떵거리는데 미국놈들과도 어쩌구저쩌구한다나요. 그런 집 딸 곱다구 문화주택까지 척 안겨줬으니 공장간부들이 쓸개가 빠졌다구 야단들이지요. 어디 그뿐입니까. 선생보구는 뒤가 께름하니까 발생로를 놓지 못하구 기를 쓰며 딴꿍꿍이를 한다는거죠. 이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내가 다 분통이 터져옵디다. 솔직한 말루 선생이나 사모님이 뭐가 모자라 여기 내려와 그런 고생을 하겠소. 다 나라와 인민을 위해서지요. 그런 애국심이 없다면 벌써 권세와 재산과 향락이 기다리는 이남에 나간지 오랬을거요. 이걸 몰라주니 얼마나 통탄할 일이요. 선생은 그래 분하지두 않소. 해방후 오늘까지…》
《그만두지 못하겠소. 당신이 우리 부부에 대해서 뭘 안다구 그런 허튼 소리요?》
한대식이 듣다 못해 버럭 소리를 쳤다.
《똑똑히 듣소. 내 앞에서 다시 그따위 소리를 하면 가만두지 않겠소. 그리구 발생로를 계속하기로 했으니 뜯어낸 설비들이나 제자리에 가져다놓으시오.》
《?!…》
한대식은 퀭해서 바라보는 로익두에게 창끝같은 시선을 주었다가 천천히 몸을 돌려 창고를 나왔다. 가슴을 마구 허벼대는 그의 번들거리는 음험한 상통에 침을 탁 뱉어주고싶은것을 겨우 참았다.
몇걸음 내짚던 그는 불쑥 뇌리에 치는것이 있어서 창고쪽에 대고 불렀다.
《자재과장동무, 한가지 확인해봅시다.》
엉거주춤 서있던 로익두가 한대식의 심상치 않은 태도에 흠칫 놀라며 황급히 다가왔다.
《예, 어서 무슨 일인지…》
《창고에 있던 점결제말이요. 내가 길주로 떠날 땐 퍼그나 남아있는걸 봤는데 어떻게 이틀도 넘기지 못해 동이 났댔소?》
《아… 아직 모르고있었는가요?》
그처럼 말주변 좋던 로익두였으나 너무도 갑자기 찌르는 창끝이라 혀끝이 잘 돌아가지 않았다.
《뭘 말이오?》
《그때 오일규반장한테 말했던것 같은데요. 점결제가 못쓰게 되여 새것을 가지러 연구사선생이 길주에 갔다는 말 듣고 없애버렸다구 말입니다.》
《그런 권한을 대체 누가 줬소? 당신은 점결제가 발생로의 생명수와 같다는걸 모르오? 그래서 담당자인 내 승인없이 누구도 출고못하게 하지 않았소.》
《난 그저 창고안이 좁다는데만 급급해서… 선생님, 한번만 너그럽게 용서해주시오. 그러지 않아도 우리 동무들한테 숱한 비판을 받았수다. 선생님, 정말 큰 교훈을 찾았습니다.》
낯이 벌겋게 된 로익두가 고개를 연방 갑신거리며 우는 소리를 했다.
한대식은 수선과 굴종기가 다분한 그의 태도가 석연치 않았으나 꾹 참고말았다. 더 따져봤대야 구린내나는 변명뿐일것이고 그보다 로익두란 인간자체가 눈뜨고 마주대할수 없는 불결한 덩어리같아 어서 피하고싶었다.
한대식이 그쯤하고 돌아서자 로익두는 후- 하고 소리가 나게 큰 숨을 내쉬며 어깨를 떨쿠었다.
한낮의 태양이 정수리에서 불볕을 내리 퍼붓고있었다. 화끈 단 땅김이 숨을 턱턱 막았다. 숨이 가쁘고 아래다리가 나른해지며 걸음발이 잘 나가지 않았다. 출신과 경력을 거들며 딴곳에 가서 발생로를 하라던 로익두의 어지러운 말소리가 그냥 살아 진동하는데 그 소리는 쏘파에 젖비듬히 앉아 떠보는듯 한 눈길로 주어섬기던 부상의 목소리와 공명되면서 우뢰처럼 귀전을 때렸다.
그는 다리가 휘청거리고 눈앞에 무수한 동그라미가 떠올라 길가의 가로수를 부여잡고 몸을 기댔다. 살구나무였다. 새로 떠옮겨심었는지 팔목굵기만 한 밑둥에는 받침대가 매여있었다. 갓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나무는 이파리도 무성하지 못했다. 허약한 그 모습이 꼭 자기처럼 보이였다.
한대식은 마음을 다잡으며 걸음을 뗐다. 어디선가 왁짝 떠드는 소리가 난다. 저쪽 전해직장확장공사장이였다. 젊은 로동자들이 삽과 괭이를 휘둘러대고있었다. 무엇이 좋은지 와하- 하는 웃음소리가 터지군 한다. 한대식은 그 활기찬 모습과 웃음소리가 자기를 야유하고 조소하는것만 같아 도망치듯 걸음을 다그쳤다.
《여보시오. 동무, 거기 서시오-》
어디선가 다급한 목소리가 울렸다. 뒤이어 급히 달려오는 발자국소리가 나더니 누군가 앞을 막아선다.
《동무, 귀가 먹었소. 왜 서지 않고 달아만나오?》
그때야 한대식은 걸음을 멈췄다. 몸이 갱핏한 50전후로 보이는 사람이 숨을 헐떡거리며 자기를 쏘아보고있었다.
《여기다 발자국을 내면 어쩌자는거요? 멀쩡한 대낮에 이게 무슨 짓인가?》
영문을 몰라 얼떠름히 서있던 그는 한팔을 뻗쳐 가리키는곳을 살펴보다가 흠칫 몸을 떨었다. 갓 포장한 도로우에 큼직큼직한 발자국이 찍혀있었다.
《동무처럼 심보 사나운 사람 내 첨 보우. 동무, 직장이 어디요? 단단히 버릇을 떼줘야지. 자, 어서 직장과 이름을 대오?》
《저… 전 이 공장 사람이 아닙니다.》
《이 동무가 제정신이 아니구만. 좋소, 그럼 우리 작업반사무실에 들어가 어디 한번 뻗쳐보우. 자, 갑시다.》
갱핏한 사나이는 펄펄 뛰며 한대식의 등을 떠밀었다. 팔에 어찌나 알이 박혔는지 준비없이 서있던 한대식의 몸이 비틀했다.
《보수반장동무. 잠간만-》
이때 저쪽에서 소리치며 껑충껑충 뛰여오는 웬 청년이 있었다. 라석호였다.
가까이 달려온 그는 보수반장이라고 부른 갱핏한 사나이의 팔소매를 붙들었다.
《반장동무, 할 말이 있으니 저쪽으로 좀 갑시다.》
보수반장은 영문을 몰라 두눈을 뜨부럭거리며 라석호가 이끄는데로 따라갔다.
그쪽에서 몇마디 오고가더니 보수반장의 허거픈 웃음소리가 들렸다.
《선생님, 정말 뜻하지 않은 봉변을 당하셨군요. 어서 갑시다.》
라석호가 곁으로 다가오며 유쾌하게 웃었다.
면구스러워진 한대식이 고개를 돌려 보수반장을 바라보니 그는 너그러운 웃음을 담고 손을 흔들어보였다.
그들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인도를 따라 걸었다. 라석호는 한대식을 자주 건너다보며 무슨 말을 할듯 했으나 입을 열지 못했다. 침울해진 그의 표정을 보니 말이 나가지 않는 모양같다.
어제저녁 공장에서는 전해직장확장공사준비를 위한 종업원모임이 있었고 뒤이어 조직사업이 이루어졌다. 생산부지배인을 책임자로 하는 공사지휘부가 나왔고 시공, 자재, 운수, 후방 등 각 분과들이 조직됐다.
라석호는 자재분과 기술설비를 맡아보게 되였다. 말하자면 전해설비를 받아오고 설치하고 조업할 때까지 전해공정기사로서의 임무를 하게 되였다.
종업원들이 가득 모인 회의실에서 엄숙히 선포된 이 조직사업에 그는 뗑해지고말았다. 몇시간전만 해도 기사장실과 생산부에 들어가 발생로작업반을 재조직해달라는 의견을 강경히 제기했던 그였다.
《선생님, 어제부터 전해직장확장공사준비작업이 시작됐습니다. 내각에 올려보낸 계획이 비준만 되면 세단계로 꺾어 1년내에 끝내야 한답니다.》
《알고있소.》
《공사지휘부가 조직됐는데 저는 자재분과 기술부문을 맡아보게 됐습니다.
그래서 지금 공사장으로 가는 길입니다.》
《…》
《지휘부측에 저의 의도를 제기했습니다. 발생로작업반 재조직문제말입니다.》
《괜한 노릇이요.》
고통을 씹어삼키듯 울분에 찬 그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다.
《선생님, 제가 정말 돌이킬수 없는 실책을 범했습니다. 발생로사고만 없었다면 사태가 이렇게까지는 안됐을겁니다.》
라석호의 얼굴에선 진땀이 흘렀다. 어딘가 방황하는듯 한 한대식의 컴컴한 낯을 대하니 발생로사고를 일으킨 죄책감이 송곳처럼 찌르고들었다.
《너무 자신을 괴롭히지 마오. 물론 파악없는 대용점결제를 쓴통에 후과가 막심하오. 그러나 근본은 관점문제요. 관점이 다르다고 해서 이처럼 험하게 나올줄은 몰랐소. 참으로 상상밖이요.》
라석호는 걸음을 멈추었다. 함께 걷는것이 그에게 괴로움만을 더해주는것 같았다.
《전 그만 공사장으로 가겠습니다. 선생님, 절대로 손맥을 놓지 마십시오. 이제 석근수아바이가 돌아오시면 다시 강하게 문제를 세우자고 합니다.》
한대식은 무슨 말을 더 할듯 라석호의 뒤를 한걸음 따라서다가 고개를 가로흔들었다. 라석호가 자기의 곁에서 멀어질수록 속이 텅 비는것 같다.
저 멀리 사라지는 그의 뒤모습을 넋없이 바라보던 한대식이 천천히 걸음을 놓았다.
그러나 몇걸음을 떼지 못하고말았다. 갈데가 없었다. 의식하든 안하든 공장구내만 들어서면 저절로 발길닿던 발생로였는데 이 시각엔 어쩐지 두려움을 자아냈다. 자기 주인을 속절없이 원망하고있을 그 어수선하고 황량해진 발생로가 떠올랐던것이다. 구내길로 다니는 종업원들도 자기를 그러한 눈길로 보는것만 같아 고개를 쳐들수가 없었다.
그는 사람들의 눈길을 피해 구내변두리를 따라걸었다. 딱히 향방을 정할수 없는데 한참 걷고보니 공장후문을 지나 얼마전까지 반토굴집이 있던 나직한 언덕길을 오르고있었다. 어처구니없었다. (펀펀한 대낮에 집에 들어오다니… 한몸 맡길만 한 조용한곳이 여기밖에 없단말인가!)
짜릿한 고독과 피해감이 명치끝을 찔러댔다. 그는 걸음을 멈춘채 고개를 들어 반토굴집자리에 우뚝 솟은 자기 집을 부감했다. 네귀가 휘우듬히 들린 추녀는 번쩍거리는 아연도판의 지붕으로 하여 금시 날아갈듯 한 경쾌감을 주는데 하얀 바람벽과 규모있게 낸 창문들이 아늑한 조화를 이루고있었다. 어깨높이로 둘러친 울바자와 원색그대로 대우를 낸 마루, 청석으로 장식한 퇴지우에 덩실하니 올리쌓은 단층주택은 이 아근에서도 보기드문 훌륭한 살림집이였다.
어디선가 귀에 익은 노래소리가 들려왔다. 가만히 귀기울이니 노래소리는 분홍색카텐이 흐느적이는 열려진 창문에서 흘러나왔다. 낮으나 부드럽고 청아한 목소리는 안해의것이였다. 참으로 오래간만에 들어보는 목소리였다.
기억에도 삭막해졌던 그 소리는 고독과 피해감에 젖어 방황하는 그에게 막을수 없는 향수를 불러오며 점점 더 크게 울려왔다.
저 소리는 아버지가 초청한다는 처녀의 수집은 속삭임을 받고 설레이는 마음으로 그의 집 뜨락에 들어서던 해방직후의 어느날 가슴을 울려주던 잊을수 없는 소리였었다.
부드러우나 그 무엇을 끝없이 호소하는 애잔하고 청신한 음성은 장중하고 은은한 피아노에 실려 초저녁 고요를 조심조심 흔들어놓고있었다.
한대식은 심혼을 파고드는 그 선률을 깨칠것만 같아 선뜻 마루바닥에 올라설념도 못하고 창문에 비낀 처녀의 모습을 넋없이 바라보았다. 악상에 심취된 처녀의 섬세한 손마디는 피아노건반우를 넘나드는 흰나비와 같았고 등어깨에 닿을듯말듯 한 윤택이 나는 중발머리는 잠시도 가만있지 못하고 세차게 진동했다. 애잔하고 청신한 목소리는 가만가만 벌리는 발깃한 입이 아니라 그 윤택을 뿜는 머리채에서 흘러나오는것 같았고 피아노건반우를 넘나드는 희고 말쑥한 손가락은 자유분방하게 뛰노는 무용수와 같았다.
한대식은 사랑하는 처녀가 저렇게 신비하게 느껴지고 아름답게 보인적은 없다. 생기와 환희에 넘친 저 모습은 시원한 이슬을 함뿍 마시고 아침해살을 받아 금방 터치려는 한송이 꽃망울이였다. 그는 그들먹이 차오르는 자부와 행복을 뿌듯이 느끼며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우러렀다. 밤하늘의 별들도 처녀의 노래에 이끌려 창문가에 내려앉은듯 더 커지고 더 밝은 빛으로 반짝이는것 같았다. 저 반짝이는 별들을 바라보며 이대로 한밤을 지새우면 얼마나 좋으랴.
그는 아버지의 생신날을 함께 축하해드리자고 낯이 빨갛게 되여 속삭이던 혜련의 부탁도 감감 잊고 창문밖 뜨락에서 움직일줄 몰랐었다.…
《아니 오늘은 어찌된 일이세요. 서쪽에서 해가 뜬게 아니예요?》
노래소리가 뚝 그치며 안해의 반기는 목소리가 창밖으로 울려나왔다.
한대식은 흠칫하며 상념에서 깨여났다. 그밤 피아노를 치던 혜련이도 이처럼 뜰밖으로 뛰여나오며 반겨주었지. 그때나 이제나 반겨주는 그 목소리는 변함없는것 같은데 내 마음은 왜 이렇게 무거운가.
밖으로 반달음치듯 나온 혜련의 손에 편지봉투 하나가 들려있었다.
《마침 잘 들어오셨어요. 그러지 않아도 현장에 찾아가려던참이예요. 이것 보세요. 철이한테서 편지가 왔어요. 난 그 애가 벌써 편지까지 쓸줄은 생각도 못했군요.》
혜련은 편지를 가슴노리에 가져다대며 감회에 넘쳐 말했다. 흥분과 기쁨에 휩싸여 활짝 웃는 그의 눈가엔 맑은 물기가 반짝이는데 광채를 뿌리는듯 한 그 웃음으로 하여 주위세계가 환해지는것 같았다. 모성의 자부와 자애가 얼마나 크고 뜨겁고 열화같은지 아직 깊이 알지 못하고있던 한대식은 전에 들을수 없던 노래소리가 이 편지에서 흘러나왔군 하고 생각하며 안해의 싱싱해진 얼굴을 새삼스럽게 바라보았다.
《아니 왜 그렇게 나만 쳐다보세요. 어서 편지를 뜯으세요. 당장 보구싶은걸 겨우 참았는데.》
《그렇게 급하면 먼저 볼것이지.》
한대식은 퇴지에 걸터앉으며 편지를 뜯었다. 연필로 넙적넙적하게 쓴 글은 16절용지를 꽉 채웠다. (세월이 벌써 이렇게 흘렀던가?) 생남했다는 전보를 탄매장량 확인을 위해 탐사대원들과 함께 저 순천골안에 가있을 때 받은지가 엊그제 같은데 어언 인민학교 4학년생이 된것이다.
《뭐라고 썼어요? 좀 읽어주세요.》
혜련은 편지를 무릎우에 놓고 생각에 잠겨있는 남편이 감질이 날듯 안타까와 연방 고개를 넘겨다보았다.
《당신이 직접 보구려.》
한대식은 흥분과 환희에 잠겨 안타까이 독촉하는 안해를 민망스레 보다가 그에게 편지를 내밀었다. 그러기를 기다렸다는듯 혜련은 주저없이 편지를 받아들었다.
《먼곳의 아버지, 어머니에게 인사를 보냅니다.》하는 글자가 안겨오자 그의 입에선 《자식두!》하는 흡족한 소리가 저절로 새여나갔다.
《아마 부원장동지가 평양에 올라가자마자 철이한테 들렸던것 같소. 그 장난꾸러기가 무슨 편지 쓸 생각까지 했겠소.》
한대식 역시 대견은 하면서도 미심쩍다는듯 푸접없이 한마디 했으나 귀밑머리를 쓸어올리는 혜련의 눈가에는 봄볕같은 자애가 그윽히 넘쳐나고있었다.
보고싶은 아버지,
저는 오늘도 아버지가 가있는 동쪽하늘가를 바라보며 기쁜 소식이 날아들기만 기다리고있습니다. 며칠전에 과학원부원장 선생님이 나한테 와서 말씀하기를 아버지가 연구사업을 끝내고 인차 올라온다고 전해주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고모랑 우리 온 집안이 떠들썩 환성을 질렀습니다. 나는 요즘 학교에 열성적으로 다닙니다. 어제 산수시험을 쳤는데 5점을 맞았어요. 나도 아버지처럼 꼭 과학자가 되겠어요. 그래서 우리 나라를 세상에서 제일 으뜸가는 나라로 되게 하겠어요. 그런데 아버지, 난 엄마가 보구파 막 죽겠어요. 엄만 왜 거기 갔나요? 그전에는 아버지 혼자서 출장가군 했는데 왜 갔나요? 빨리 오라요. 엄마, 열밤을 자겠다고 한 엄마가 이제는 열밤이 몇번이나 지나갔는지 몰라요. 엄마를 손꼽아 기다리고있겠어요. 고모부랑 모두 잘 있다고 전하라고 합니다. 엄마, 소금물로 하루 두번씩 양치질하라고 한 엄마말을 꼭꼭 지켜나가요. 어머니가 아버지하구 함께 오면 더 좋겠어요.
아들 철이 올림
편지를 쥔 혜련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모성의 자애와 따스함이 어렸던 심려깊은 두눈에는 맑은것이 소리없이 고여올라 하얀 볼을 타고 흘러내린다. 고모네 집에 놀러간다고 좋아서 깡충거리던 귀여운 아들의 모습이 선하도록 망막에 비껴든다. 깔깔거리며 기뻐하던 새별같던 그 눈에 눈물을 가득 담고 엄마를 손꼽아 기다리고있을 아들을 생각하니 애모쁜 마음 금할수 없다.
당장이라도 달려가 《철이야! 이 엄마가 왔다.》하고 젖품에 꼭 그러안아주고싶다. 맑디맑은 그 순결한 동심을 속이고 여기 와있는것이 못할짓을 하는것같아 죄스럽기만 하다. 그런데 이런 옹색한 나날을 얼마나 더 보내야 하는가.
《이보세요. 철이한테 거짓말을 하고 온것이 막 죄스럽군요.》
아들의 편지를 눈물젖은 볼에 가져다대고 쓸어만지던 혜련이 안타까움에 젖어 뇌였다. 한대식은 담배연기만 피워올릴뿐 대답이 없었다.
《대략 언제쯤 그 애한테 가게 될가요?》
《글쎄… 지금 같아선 예언할수가 없소.》
《예?!…》
혜련은 남편의 침울한 대답에 어안이 철렁했다. 하루하루 날이 바뀔 때마다 철이한테 갈수 있는 시간이 박두해온다고 기다리던 혜련이다.
혜련은 그때야 남편의 기색이 몹시 좋지 않음을 간파했다. 노상 발생로에 붙어있어 운반식사하던 남편이 때아닌 대낮에 집에 들어온 일이며 아들의 첫 편지를 받고도 별로 반가운 티가 없었다.
혜련은 그러한 남편과 더 마주앉아있어야 괴로움만 줄것같아 얼른 부엌으로 들어갔다. 했으나 갑자기 들어온 남편이라 준비된 점심이 없었다. 잠시 궁리하던 그는 밀가루를 꺼내여 반죽을 하기 시작했다. 남편이 그중 좋아하는 제비국을 끓이고싶었다. 그의 잽싼 손끝은 잠간사이에 밀가루반죽을 국수오리처럼 가늘고 질깃하게 썰어놓는다. 미구에 노란 기름방울과 발깃한 고추가루를 띄운 하얀 제비국이 한대식의 상우에 놓였다. 보기만 해도 구미가 당기는 제비국을 한술 드는척 하다가 물러나고만다.
혜련은 남편의 식성을 맞추지 못한것 같아 쩔쩔매였다. 오늘처럼 더운 때는 차고 개운한것이 제격인데 당장 손닿을데가 없다.
상에서 물러난 남편은 옷을 걸치더니 밖으로 나가려 했다. 이때 그의 머리에 피뜩 떠오르는것이 있었다.
《잠간만 기다리세요.》
신발을 신던 한대식은 부엌으로 뛰여들어가는 안해를 바라보다가 퇴지에 걸터앉았다.
잠시후 부엌에서 나오는 혜련의 손에 사이다병만 한 약병 하나가 들려있었다.
그는 병을 기울여 커다란 사기고뿌에 가득 붓는다. 약간 노르끄레한 액체는 무수한 기포를 만들어내며 부그그 거품을 피워올렸다.
《좀 마셔보세요.》
《이건 뭐요?》
한대식은 영문을 알수 없어 고뿌를 든채 안해의 얼굴을 쳐다봤다. 이때까지 그 어떤 보약제를 써보지 않은 그다.
입에 대보니 짜릿하고 달큰하여 그대로 쭉 들이켰다. 시원하고 상쾌한 감칠맛을 주었다.
《이건 탄산수가 아니요?》
《정말 탄산수맛이 맞는것 같아요?》
《탄산수맛이 아니라 농도높은 진짜 탄산수요. 이건 어디서 났소?》
《그럼 됐어요. 당신까지 인정하는걸 보니 이젠 성공한것 같아요.》
발깃해진 혜련의 볼에 밝은 미소가 그려졌다.
《당신 무슨 재간을 피운게 아니요?》
《재간이야 무슨 재간이라 하겠어요. 이 더운 철에 탄산수가 모자라 애타하는 공급원들을 보니 어디 가만 있을수 있어요. 그래서 발생로가스를 가지고 실험해봤죠뭐.》
《발생로가스로 만들었단 말이지?!…》
흥분된 한대식이 다그쳐물었다. 사실 안해가 만들어낸 탄산수는 이만하면 나무랄데 없었다. 발생로가스로 탄산수를 만들겠다고 생각한것은 참말 기발한 착상이다. 이것은 무연탄가스화의 유익성과 합리성을 다른 측면에서 웅변으로 보여준것이다.
《당신이 소문도 없이 아주 좋은 일을 했구만. 우리 로동자들이 이걸 알면 얼마나 기뻐하겠소. 그래서 내 의견은 실험실에서 맴돌지 말고 빨리 공장적인 사업으로 전환하자는거요. 지금이 마침 제일 더운 삼복철이 아니오.》
《당신 성미두 참, 이보세요. 아직은 널리 공개하고싶지 않아요. 좀더 확고한 테타를 잡아야겠어요.》
《당신은 언제봐야 소심한게 탈이야. 하여튼 빨리 서둘러 빛을 보도록 합시다. 나도 적극 도와주겠소. 당신이 여기 내려온 보람이 정말 크오.》
한대식은 좀전까지 답답하고 무겁던 자기의 가슴속에 한가닥 따스한 공기가 스며드는것 같았다. 무엇보다 로동자들을 아끼고 그들을 위해 애쓰는 안해의 그 심정이 대견했다. 이것은 가정과 남편밖에 모르던 안해로서 큰 걸음을 내짚었다고 볼수 있었다.
빈고뿌를 돌려준 그는 《여보, 여기 내곁에 좀 앉소.》하고 안해를 불러앉히였다.
《여보, 언제부터 당신하구 의논하자던 일이 있는데 오늘 철이의 편지를 받고보니 더는 미룰수 없구려. 철이 말이오. 그애를 여기 데려옵시다.》
《철이를 데려오다니요?!…》
혜련은 너무도 뜻밖의 말에 자기 귀를 의심하듯 두눈이 휘둥그래졌다.
《철이를 그냥 남의 집에 맡겨둘순 없지 않소. 난 오늘 철이의 편지를 받고 그처럼 기뻐하는 당신을 보는 순간 벌써 그렇게 하지 못한걸 후회했소. 아마 철이도 여기로 오고싶어 야단일거요. 집두 평양것보다 더 크구 좋지 학교도 가깝지. 편지 쓴걸 보니 이젠 곁에 두고 내가 직접 키우고싶구만. 우리 그렇게 합시다.》
《아이참, 당신은 여기서 영영 살것처럼 말씀하는군요. 발생로만 끝나면 곧 뜨겠는데.》
한대식은 안해의 심상한 태도에 다시금 속이 답답해왔다. 그래서 발생로실태를 솔직히 말해줘야겠다고 맘먹었다.
《여보, 내 말을 듣소. 지금 발생로는 아주 난감한 상태에 빠졌소. 지금형편에선 여기서 중간시험을 계속할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가 심히 우려되오. 무연탄가스화를 달가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한두사람이 아니구려.》
《언젠 그런 사람들이 없었는가요 뭐.》
《그전하군 다르오. 정황이 아주 나빠졌소. 당신두 알다싶이 발생로작업반이 해산됐지 지배인동지도 이제 더는 어쩔수 없게 됐소. 그런데다 전해확장이 당장 시작될판이오. 참으로 힘들게 됐소. 그렇다고 내가 여기를 떠날수 있는가? 아무리 형편이 어렵다 해도 절대로 그럴수 없소. 요즘 나는 전해확장이 있다는 말을 들은 다음부터 잠을 이룰수 없소. 전해대신 발생로계통을 하는것이 나의 목적인데 일이 거꾸로 돼간단 말이오. 내가 살아있는 한 어떻게 전해확장을 그냥 보고만 있겠소. 그렇게 해선 안돼. 그래서 난 이고장에 든든히 뿌리를 내리고 끝까지 해볼 결심이였는데 마침 당신이 오늘 큰힘을 주었구려. 로동자들을 위해 애쓰는 당신을 보니 내 결심이 더 굳어진단 말이오.》
혜련은 비장하게 울리는 남편의 그 어조와 표정을 통해 매우 심각한 사연이 있었다는것과 아들 철이 문제는 오래동안 모대기다 꺼낸 말이라는것을 똑똑히 알수 있었다.
혜련은 온몸이 땅속에 잦아드는것 같았다. 무연탄가스화가 아무리 초행길이라 해도 날이 갈수록 이처럼 막막할줄은 상상도 못했다. 웬간해서 그런 티도 안보이던 남편이 오죽 참기 어려우면 이처럼 결사의 각오까지 내놓고 표현하겠는가. 남편의 정상이 눈물겹도록 측은했고 그런 남편을 대신해줄수 없는것이 무등 안타까왔다. 그러나 철이만은 문제가 달랐다. 그를 여기 데려와서는 안된다. 그 천진한 동심에 부모들의 좋지 못한 뒤소리를 듣게 할수는 없다.
《여보, 왜 대답이 없소. 우리 철이를 데려옵시다.》
혜련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남편을 애타게 바라보았다.
《이보세요. 저를 용서해주세요. 전 그저 밥이나 날라다주고 하찮은 뒤시중이나 해왔지 당신이 그런 역경에 처한줄은 정말 몰랐어요. 이제 제가 뭘 했으면 좋겠나요. 종이장도 맞들면 가볍다는데 무엇이든 시키세요. 제 힘자라는껏 하겠어요.》
자책과 근심이 콱 실린 다급한 소리였다.
《여보, 그러지 마오. 내가 괜한 말을 해서 당신 속을 아프게 했구만. 난 당신을 언제나 고맙게 생각하오. 한때 당신이 여기 내려온것을 좋지 않게 여긴적이 있는데 그것이 얼마나 옹졸하고 수양이 어렸던가를 날이 갈수록 깊이 깨닫게 되오. 난 당신에게 더 바랄게 없소. 당신도 이 고장에 내려와 이미 무엇이 귀중하고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걸 점차 체험하지 않았소. 그것이면 다요. 나에겐 그보다 더큰 힘이 없소. 철이를 여기로 데려오자는 목적도 실은 그 애를 어려서부터 로동계급이 있는 이 벅찬 현실속에서 키우고싶어서요. 그래야 생활두 알고 인간도 알게 되며 똑똑한 과학자로 자랄수 있단 말이오.》
혜련은 혀끝을 깨물며 타는 숨을 내쉬였다. 자기를 뜨겁게 대해주는 남편이 송구스러울 정도였으나 철이문제만은 한치도 양보하고싶지 않았다.
《귀중한 말을 해줘서 고마워요. 당신의 뜻을 명심하겠어요. 그렇지만 철이만은… 철인 아직 너무 어린것 같아요. 그 어린것이 여기 와서 부모들에 대한 흉한 뒤소리를 들으면… 그래선 안돼요.》
《아니 그건 도대체 무슨 말이오?》
《…》
혜련은 입술을 감쳐물며 괜한 말을 비쳤다고 자신을 탓했다. 항간에 떠도는 그런 구접스런 소리를 듣는다면 남편인들 속이 얼마나 어수선하겠는가. 허나 때는 이미 늦었다.
《어서 내놓고 말하오. 혼자 속앓지 말구.》
사정하듯 다우쳐묻는 남편앞에 혜련은 더 침묵만 지킬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서울에 있는 친정아버지며 해방전 생활경력을 놓고 이러쿵저러쿵 뒤소리들이 있다는 말을 조심스레 했다.
《여보, 난 그 순진한 철이의 어린 가슴에 그런 못을 박고싶지 않아요. 그렇겐 못해요. 나도 그런 말 들은 날 밤엔 잠을 잘수가 없는데 그 어린것이 그런 경우를 당하면 우리 부모들을 얼마나 원망하겠어요. 제발 철이만은 데려올수 없어요.》
쥐여짜듯 간절히 바라는 혜련의 권고는 눈물에 젖어있었다.
한대식은 가슴이 선뜩했다. 미처 생각지 못한 심중한 문제였다. 요즘 항간에선 자기들부부를 놓고 이러저러하게 말들이 많다. 자재과장 로익두는 로골적으로 출신과 경력을 끄집어내여 가슴을 긁어댔고 알만 한 위치에 있는 부상 남주혁이까지 은근히 가시를 돋구지 않던가. 만약 발생로시험이 지금처럼 계속 고초를 겪는다면 그 뒤시비질과 압력이 얼마나 요란하고 세차겠는가. 오직 티없이 깨끗하고 정의로운것만 알고 자라나야 할 철이에게 이것은 분명 좋지 않은 영향을 줄것이다. 주접이 들고 실망을 안겨줄수 있다. 이런 면에서 아들에 대한 모성의 우려와 근심은 그르다고만 할수 없다. 그렇지만 안해는 보다 큰것, 본질적인것을 모르고있다. 이 순간 한대식은 좀전에 가졌던 안해에 대한 믿음이 때이른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과 함께 허무감이 드는것이였다.
그는 정색한 어조로 나직이 타일렀다.
《여보, 나도 항간에 떠도는 말을 대충 알고있소. 그런 소릴 들을 때마다 물론 속이 좋지 않아. 그러나 두렵지는 않았소. 오히려 일부 사람들의 그 협애하고 나쁜 시비를 들을 때마다 더 큰 배심이 생기오. 여보, 당신은 아직 우리가 어떤 사람들속에 살고있는지 다 모르고있소. 석근수아바이와 같은 우리 로동계급이 그처럼 따뜻이 돌봐주고 굳게 믿어주고있는데 뭐가 무섭소. 더구나 우리 부부는 어버이수령님의 사랑과 믿음을 누구보다 많이 받아안은 행복한 가정이 아니오. 여보, 돌이켜보면 우리 가정처럼 높은 신임과 배려를 받고있는 집도 쉽지 않을거요. 그런데 철이가 왜 축잡히겠소. 이런 측면에서도 우린 철이를 어려서부터 잘 키워야 할 그런 부모의 의무감도 있다는걸 알아야 하오.》
《…》
한대식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성적인 안해라 철이문제를 선뜻 받아물리가 없었다. 좀 생각해볼 시간이 필요했다. 그렇지만 어차피 멀지 않아 철이는 부모를 따라 내려올것이며 반드시 아버지의 뒤를 이어야 할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