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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이다.

연구사 한대식은 지배인이 부른다는 지령대의 전화련락을 받자 반달음치듯 행정청사쪽으로 향했다. 그러지 않아도 한시간이 새롭게 지배인을 기다리고있던 그였다.

한참 걸음발을 다그쳐가던 그는 지배인실이 있는 행정청사가 눈앞에 보이자 조급하던 마음이 이상할 정도로 야릇해졌다.

과연 지배인이 중간시험로를 어떻게 대할것인가 하는 의문이 문뜩 들었던것이다.

사실 한대식은 2년가까이 이 공장에 내려와있었지만 언제 한번 지배인실에 가본 례가 없으며 더우기 반년전에 부임해온 지금의 방하철지배인과는 초면이나 다름없었다. 지금까지 공장구내의 한쪽 변두리에서 소리가 날세라 조용히 연구사업을 진행해왔었다.

그에게는 자기딴의 굳어진 생활습성이 있었다. 즉 매개 사람들에게는 능력과 환경에 따라 각이한 직무가 차례지기 마련인데 각자는 그 직무를 충실히 지켜나가는것으로써 사회와 조국앞에 떳떳할수 있다는것이다. 특히 자기처럼 과학자인 경우 연구사업은 연구사본인이 책임져야지 결코 그 누가 대신해줄수 없다는 견해였다.

이런 한대식이였기에 무연탄가스화연구에서 제기되는 허다한 난관과 감당키 어려운 애로도 응당한것으로 여기고 혼자서만 묵묵히 극복해왔던것이다.

그런데 확대시험이 바야흐로 눈앞에 박두한 이 시각 한대식은 자기의 그런 관념이 어딘가 못마땅하다는것을 새삼스럽게 느꼈다. 왜냐면 그런 관념으로 하여 자기는 이곳 지배인에 대하여 아는것이 너무도 없다는것을 통절히 느낄수 있었고 공장측의 방조도 꽤 받을수 있겠는가 하는것도 전혀 가늠할수가 없었기때문이다.

확대시험은 공장의 적극적인 방조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여기서 또 하나의 문제로 되는것은 현재 공장안에는 자기를 제외하고도 과학원산하 연구사들이 열명나마 내려와있다는 사정이다. 이들 역시 공장측의 방조를 요구할것은 뻔했다.

이런 실태에서 생면부지나 다름없는 지배인에게 무연탄가스화에만 관심하여달랄순 없었다. 한대식은 괜히 자기 혼자서만 흥분하여 들떠있은듯 한 쑥스러운감까지 들었다.

지배인실은 행정청사 2층복도 끝에 있었다. 아직 출근시간전이라 복도는 조용했다.

한대식은 지배인실 문앞에 잠시 서서 기대와 우려감으로 뒤채이는 마음을 지그시 누른후 손기척소리를 냈다.

이때 지배인 방하철은 출장기간에 밀린 문건을 처리하느라고 사무실에 앉아있었다. 그는 방안에 들어서는 사람을 무심히 건너다보다가 흠칫 놀랐다. 예리해진 눈길이 한대식의 얼굴에 박혔다가 얼른 어깨너머로 미끄러졌다.

《?!…》

벌써 두번째로 의혹을 던져주는 모습이였다. 첫번째는 방하철이 지배인으로 부임된 얼마후 공장에 내려와있는 연구사들을 만나 담화할 때 있은 일이다.

그때 방하철은 10여명이 넘는 연구사들속에 앉아있는 어딘가 낯익은 사람을 보고 은근히 놀랐었다. 그래 좀 알아볼가 했는데 일에 다몰리다나니 그럴 짬을 낼수가 없었고 또 다른 연구사들은 이러저러한 사정과 조건을 내걸며 부지런히 찾아왔으나 그 연구사만은 웬일인지 발길 한번 돌리지 않아 그만 감감 잊고있었다. 그런데 오늘 두번째로 이렇게 가까이 마주 대하니 해방전 노구찌재벌놈의 동해지구연구소에 있던 조선인 기사가 분명했다.

방하철이 43년도 《징용》에 끌려나가기전까지 신흥화학공장에 있을 때다.

그때 반년에 한번씩 공장의 주요부분은 노구찌의 심복기사들이 직접 내려와 검열하군 했는데 그속에 이 사람도 끼여있었다.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것은 그 엄엄한 검열단속에 조선사람이 들어있었다는 강한 인상때문인것 같았다.

(해방직후 남쪽 어데론가 자취를 감추었다던데 어떻게 이 방에 나타날수 있는가?…)

한편 지배인의 내심을 알수가 없는 한대식은 놀라움과 적의로 굳어진 방하철의 이상한 태도에 그만 어정쩡해지고말았다.

《지배인동지가 부른다고 하기에… 제가 연료연구사 한대식입니다.》

《예, 제가 무관심하다나니 얼굴도 모르고 지냈습니다.》

뒤늦게야 자신을 수습한 방하철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앞탁의 의자를 가리켰다.

《앉으시오. 석근수아바이를 통해 우리 공장에 내려와서 수고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방하철의 어조는 극히 실무적이고 메말랐다. 이렇게 되자 문턱을 넘어설 때부터 긴장되여있던 한대식은 더욱 송구스러워 의자에 앉을념을 못했다.

방하철은 담배를 꺼내 천천히 피워물며 다시금 한대식의 모습을 찬찬히 뜯어봤다. 그전보다 이마귀가 퍼그나 올라간 훤칠한 이마며 예지가 비발치는듯 한 열정어린 눈빛 그리고 혈색좋은 우둥부둥한 얼굴은 고개도 쳐들지 못한채 일본인기사들속에 끼여 주요 생산설비를 검열하던 해방전의 모습과 판이하게 달랐다. 그 변모된 인상은 불현듯 그때로부터 16년이란 긴 세월이 흘렀다는 현실감을 깨우쳐주었다.

방하철은 순간이나마 과거와 현재를 련결시켜보려 했던 자신에게 환멸이 갔다.

그의 입에서는 부드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연구사선생, 난 어제밤에야 선생의 중간시험로가 완공됐다는것을 알게 됐습니다. 아마 우리 공장에 내려와있는 연구사들이 저를 두고 욕많이 할겁니다. 여느때는 본체만체 하다가 발등에 불이 떨어져야 연구사 귀한줄 안다구 말입니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석근수아바이랑 차금희동무를 방조성원으로 붙여주어 그동안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자, 어서 의자에 앉으시오. 사실은 제가 가스화시험장에 나가봐야 하는데 시간이 허락치 않아 선생을 오시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책상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앉았다.

《선생도 아시겠지만 지금 협동경리가 완성된 농촌을 하루빨리 추켜세우자면 비료가 절실히 요구됩니다. 현시기 비료문제는 중요한 사회정치적문제로 나서고있습니다. 때문에 이번 내각협의회에서도 이 문제가 심각히 론의되였습니다. 우리 공장은 래년도까지 1.5배의 증산과제를 맡게 됐습니다. 1.5배, 이것은 대단한 수자입니다. 현재의 능력으론 사실 곤난합니다. 혁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모든 예비를 총동원하자고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선생의 가스화야말로 매우 흥미있는 예비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떻습니까. 선생을 믿어도 랑패가 없겠지요?》

《그런 믿음을 주어 감사합니다.》

한대식은 허심탄회한 지배인의 태도에 점차 긴장감이 풀렸다.

《중간시험로 화입은 언제쯤 예견하고있습니까?》

《준비를 다 해놓고 지배인동지 내려오기만 기다리고있었습니다.》

《그렇습니까. 괜히 나를 기다렸군요. 우린 지금 잠시도 어물거릴 시간이 없습니다. 다른 일이 없다면 점심시간에 화입식을 합시다. 나도 꼭 나가보겠습니다. 그리구 내 의견은 확대시험을 2~3개월 이내로 끝내고 상반년안에 공업화단계로 이행하자는겁니다. 선생도 그런 각오를 가지고 내밀어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빨리말입니까?!…》

한대식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좀전까지만 해도 확대시험문제를 두고 지배인의 태도가 자못 우려됐는데 그는 오히려 자기보다 더 적극성을 보이는것이였다.

지배인이 일욕심 많고 요구성 높다는것은 알고있었으나 이처럼 불같이 내밀줄은 정말 생각밖이였다. 지배인의 말처럼 그렇게 빠른 기간내에 무연탄가스로 비료를 생산할수 있다면 얼마나 리상적이겠는가. 그것은 자나깨나 애타게 바라던 간절한 소망이다.

그렇지만 바라고 결심한다고 하여 곧 현실로 되는것이 아니다. 더구나 무연탄가스에 의한 비료생산은 우리 나라에서 처음 해보는 초행길이나 같다.

일반적으로 가스화란 말은 산소에 의해 탄소가 가연성가스로 변화되는 열화학적과정을 의미한다. 무연탄가스도 이 원리에 기초하고있다.

무연탄을 발생로(고체연료를 가스화하는데 사용되는 장치를 가스발생로라고 하는데 이 로는 원통형철판에 내화재를 쌓아 만든다.)에 넣고 건류시키면 수소를 비롯한 유용성가스를 얻게 되는데 이것이 곧 암모니아의 원료로 되는것이다.

이런 가스화의 방법으로 암모니아를 생산하면 전해법으로 수소를 생산할 때보다 막대한 전력을 절약하게 된다. 이것은 화학비료생산에서 하나의 혁명이라고 할만치 그 의의가 크며 또 그만큼 어렵고 힘든것이다.

흥분으로 설레이던 한대식의 가슴은 그 어떤 알지 못할 불안이 스며들며 점차 무거워졌다. 그 불안은 상반년안으로 공업화단계로 이행해야 한다는 촉박성때문도 아니며 앞으로 예상치 않았던 난관이 생길수 있다는 그런 실무적타산따위도 아닌것이다.

한대식은 꼿꼿한 자세로 앉아있는 방하철을 눈여겨보는 순간 그 이름할수 없는 불안이 분명 이 사람과 관련되여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확실이 방하철지배인은 어느 모로 보나 만만치 않았다. 한대식은 지배인의 그 불같은 욕망이 긍정되면서도 주관이 지내 강한듯한 그 성미에 어느 정도로 만족을 주겠는가 하는것이 심히 우려되였다. 불안의 실마리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왜 아무 대답이 없습니까. 혹시 내가 너무 욕심을 부린다고 여기지 않습니까?》

방하철은 잠자코 자기 생각에만 잠겨있는 한대식을 미심쩍은 눈길로 바라보았다.

《목표는 높을수록 좋다고 봅니다.》

《선생이 옳게 말했습니다. 특히 우리의 천리마현실이 그걸 요구합니다. 우리 확신을 가지구 한번 해봅시다. 어딘가 선생은 내 마음에 듭니다.》

방하철이 이처럼 서두르는데는 새로 제기된 1.5배의 과증한 증산과제를 맡았다는 책임감만도 아니며 마흔살을 갓 넘긴 왕성한 혈기탓만도 아니다.

그에게는 삶에 대한 자기류의 완강한 지향이 있었다. 즉 사업의 완만성과 사색의 결핍, 페쇄된 활동 이는 곧 삶의 정지를 의미한다. 부단한 사색과 지칠줄 모르는 활동만이 숨쉬고 살아있다고 할수 있는데 그러면 무엇인가 자꾸만 해보고싶은 욕망과 정력이 솟구친다. 잠시라도 정지상태에 있을수 없게 북받치는 충동, 의욕 이것이 인간의 존재가치를 규정하는 참된 삶이라고 생각하는 방하철이다. 이러한 생활관에 기초하고있기에 그는 10여년간 독신생활을 해오면서도 자신이 고독하거나 불편을 느끼지 않았고 오히려 사색과 활동을 보다 적극적으로 더 많이 할수 있다고 생각하고있었다.

그는 반년전에 이곳 흥수비료공장 지배인으로 임명되였다. 기업관리경험이 별로 없는 자기를 이처럼 큰 기업소 지배인으로 임명했을 때 그는 그 어떤 중압감보다 우리의 산업도 이제는 현대기술을 소유한 기술일군을 부르고있구나 하는 가슴치는 분발심이였다.

그는 부임된 첫날 벌써 전해설비를 비롯한 공장의 전반적설비들이 낡았다는것을 포착하고 설비를 갱신하는 사업부터 시작했었다. 곧 실태료해그루빠가 조직되고 인수원들이 설비와 자재를 구하러 대상공장으로 떠나갔다. 점차 본격화되는 설비갱신에 많은 사람들이 놀라움과 의혹속에 그를 주시했다. 그러나 얼마후 전해직장의 한 교대작업반 전해조가 새로운 설비들로 교체되고 종전에 비해 전해능력이 갑절로 뛰여오르자 역시 화학기계전문가가 다르다는 탄성이 일어났다.

바로 이러한 때 증산과제를 받아안게 됐던것이다.

이 높은 목표는 그의 앙양된 분발심에 다시한번 박차를 가했다.

그는 평양에서 내려오는 그 길로 초급일군들의 모임을 가졌고 밤을 꼬박 새워가며 제기된 예비안들을 검토했다. 예비안들중에서 가장 이목을 끈것이 무연탄가스화에 의한 비료생산방안이였던것이다.

그들의 담화는 더 계속될수 없었다. 기요과장이 급한 문건이라면서 지배인실에 뛰여들었던것이다.

방하철은 한대식에게 량해를 구한 다음 문건을 받아 재빨리 훑어보기 시작했다. 전화종이 울렸다. 왼손에 송수화기를 든 그는 짤막짤막 무슨 결론을 주는데 여전히 문건에 수표도 하고 어떤 곳엔 밑줄을 그어나간다. 전화가 끝나기도전에 이번엔 생산과장이며 기사장이 련달아 들어왔다.

한대식은 슬며시 일어나 밖으로 나오고말았다. 담화가 기본적으로 끝난이상 지배인의 바쁜 시간을 더 방해하고싶지 않았다.

그가 행정청사정문을 나서려는 때다.

《선생님, 지배인동지가 뭐라고 하셨습니까?》

맑고 챙챙한 목소리에 한대식은 뒤를 돌아봤다. 언제나 잔즐거리는 미소가 떠나지 않는 그 시원한 금희의 두눈이 기대에 차서 바라본다.

《현장에서 석근수아바이랑 무슨 좋은 소식이 있는지 알아보라고 해서 왔습니다.》

아마 출근전에 한대식을 불러들인 지배인의 의도가 몹시 궁금했던 모양이다.

한대식은 처녀의 그 열정에 넘친 두눈을 보자 시원한 샘물을 마신듯 속이 후련해졌다.

《지배인동진 우리보다 더 적극적이요.》

《저두 꼭 그러실줄 믿었어요. 지배인동진 무슨 창안이나 기술혁신안이 나오면 당자들보다 더 기뻐한답니다. 야, 이 소식을 들으면 석근수아바이가 얼마나 좋아하실가.》

처녀의 커다란 두눈에 금시 맑은것이 고였다. 이날 이때까지 한대식 못지 않게 애써 온 금희다.

《선생님, 이젠 마지막 결승테프라고 할수 있는 발생로화입을 멋들어지게 해서 지배인동지랑 종업원들을 깜짝 놀래우자요.》

《금희, 우린 이제 겨우 출발선에 들어선 셈이야. 그런 각오를 가져야 해.》

《아이참 선생님두, 말하자면 1단계전투 결승테프란 말이예요. 이제부턴 제2단계. 어때요, 제 말이?》

한대식은 금희의 표현이 그럴듯 하여 빙긋이 웃고말았다.

기분이 들뜬 금희는 성큼성큼 내걷는 한대식의 어깨아래에 착 붙어 쉴새없이 주어섬겼다.

《선생님, 오늘은 기쁜날인데 저의 초청을 한가지 들어주시겠어요?》

《금희의 초청이라면 백사불구하고 뛰여가야지.》

《아유, 선생님이 롱말을 다 하시네. 사실은 저의 초청이 아니라 우리 외삼촌의 부탁이예요. 발생로에 화입도 하겠다, 평양에 있던 부인님도 내려오셨겠다, 오늘같이 기쁜날에는 연구사선생두 아마 마다하지 않으실게다. 저녁에 꼭 모시고 오라 이러시지 않겠어요. 그래 가시지요?》

《글쎄 발생로화입이 잘 돼야겠는데…》

《선생님은 발생로밖에 모르셔. 소형시험로에서 잘 되던것이 왜 안되겠어요. 저녁엔 무조건 가셔야 해요. 어제 사모님두 그렇게 약속했거든요. 선생님이 길주에서 오시면 함께 가시겠다구.》

《하여튼 빨리 가서 화입준비를 더 잘해놓자구. 지배인동지두 꼭 나오시겠다구 했소.》

이날 저녁 로익두의 집에서는 전에 볼수 없던 화락한 웃음이 떠돌고있었다. 키를 넘게 두른 울타리와 푹 찔러박군 하는 참나무빗장으로 하여 늘 적막속에 잠겨있던 집이다. 그 적막이 활약가로 소문난 자재과장의 생활과 어울리지 않았으나 주변사람들은 부부간의 단출한 살림이니 그럴수 있겠다고 여겨버린지 오래다. 한대식은 차금희와 약속은 했으나 가고싶은 생각이 없었다. 두세차례씩이나 사람을 띄워 와달라고 하는 로익두와는 시험용자재를 해결받으려 몇번 상종했을뿐이고 더우기 그런 좌석이 성미에 맞지 않았다. 술은 좋아하나 집안에서 안해가 부어주는 술을 조용히 마시며 사색에 잠기는것을 진미로 생각하는 그였다. 그런것을 안해가 굳이 부추겨 로익두의 문턱을 넘어서게 되였다. 낯선 고장에서 유별나게 친절을 표시해서 그런지 혜련은 로익두를 무척 좋은 감정을 가지고 대했다.

한대식은 왕골지적을 깔고 그우에 털빠진 양탄자를 깐 사랑채에 로익두와 마주앉아있었다. 술상은 생각하기보다 검소했다. 생생한 문어회와 그옆에 놓은 생복접시가 품을 들인것 같고 다른것은 더덕, 도라지 등 산채와 돼지내포를 썰어놓은것이 전부였다.

로익두는 벌써 절반쯤 취하여 혀꼬부라진 소리를 번졌다.

《솔직히 말해서 아까는 좀 섭섭했습니다. 두세번 사람을 띄워야 우리 집문턱을 넘어서니 내 신세가 가련해보이더란 말이요. 그런데 이렇게 술상을 마주하니 선생같은 좋은분은 없구려.》

한대식은 묵묵히 로익두의 빈잔에 술을 따랐다.

《예, 예, 선생이 부어주는데 또 먹어야지요. 연구사선생, 앞으론 걱정마슈. 달라는 자재는 다 주겠소. 가스화가 된다느니 안된다느니 하고 떠들어대지만 난 선생님만을 크게 믿겠수다.》

《자, 손에 든 술이나 마저 마시지요.》

녀인들이 따로 모여앉은 안방에서 금희의 활짝 트인 웃음소리가 들썽하게 터지군 했다. 유리알같은 두눈을 반짝이며 그쪽에 귀를 기울이던 로익두가 입귀를 씰룩거렸다.

《선생의 부인은 정말 동방의 클레오파트라요. 그런데다 피아노 잘 타겠다, 수예놓이, 재봉 못하는게 없지요. 선생이 참 부럽기만 하오. 난 정말 녀편네복이 없지, 없지요. 40대상처는 대들보 부러지는격이라는데 어휴…》

《?!…》

《아니, 왜 그렇게 눈이 둥그래지오. 원산 세거리 감나무집이라면 원산바닥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수다. 큰 양주공장 두개에 잡화상까지 차리고 인심후하기로 소문자자하던 박두만씨의 외동딸 박혜련씨를 몰라본다면 고약한 놈이지요. 클레오파트라로 소문 짜하던 그 외동딸을 여기서 만나게 될줄은 꿈에도 생각못했소. 지금쯤 저 하와이나 쌘프랜시스코 별장에 가있는줄로만 알았다우. 선생은 정말 행운아요. 부럽단말이요.》

한대식은 옆에 벗어놓았던 작업모를 머리에 쓰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원래 당기지 않던 좌석인데다 로익두의 입에서 점점 시시껄렁한 소리만 나오니 감탕밭에 들어선것 같아 그냥 앉아있을수 없었다. 그러자 로익두가 황급히 손을 뻗쳐 한대식의 팔꿈치를 붙잡았다.

《선생, 이제 시작인데 벌써 이러면 됩니까. 어서 앉수다. 여보-》

로익두가 안방에 대고 소리치자 진하게 화장을 한 피둥피둥한 몸의 젊은 녀인이 방문을 열고 들어섰다. 로익두의 후처 강난실이였다.

《선생님, 저의 성의가 부족했다면 후에 욕 많이 하시고 좀 더 앉으셔서 지난 회포나 푸십시오. 알고보니 사모님과는 그전부터 가깝게 지내던 사이더군요.》

강난실이 나이에 맞지 않게 수집음을 타며 애교를 부렸다.

이때 마루방을 쿵쿵 울리며 금희가 들어섰다. 그뒤로 박혜련의 얼굴도 보였다.

《선생님, 모처럼 오셨다 벌써 가시면 어떡합니까. 외삼촌, 뭘 좀 더 내놓을게 없어요. 나를 못살게 자꾸 모셔오라 해놓군 이게 다예요?》

금희는 의외로 검소하게 차린 술상을 건너다보며 생탈을 부렸다.

《금희, 난 만족하오. 때가 돼서 일어서는거요. 금희두 내 성미를 알지 않나.》

한대식은 금희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가 내리며 방문을 나섰다.

《성미두 참, 그럼 술은 그만하구 저쪽 방에 가서 좀 쉬다가 부인하구 함께 가도록 합시다.》

로익두가 할수 없다는듯 술상앞에서 일어서며 한대식의 등을 떠밀었다.

《선생님, 그게 좋겠어요. 사모님은 얘기바람에 아직 숟갈도 들지 못했거든요. 사모님, 우린 어서 안방으로 가시자요.》

금희는 다행인듯 박혜련의 팔을 끼며 안방으로 이끌었다. 혜련은 한두걸음 끌려가며 이쪽을 넘겨다봤다. 한대식은 그런 안해에게 더 앉아있으라고 머리를 끄덕여보이고 퇴마루에 내려섰다.

《선생, 끝내 가시려오. 이건 너무하구려.》

취기가 올라 벌겋게 된 로익두가 게슴츠레한 눈을 치뜨며 버럭 노기를 터뜨렸다.

《성의는 고맙습니다만 그만 실례하겠습니다. 더 앉아 유쾌하게들 노십시오.》

한대식은 허리를 약간 굽혀 모두걸이로 인사하고 뜰밖으로 나섰다. 로익두는 마루방우에 엉거주춤 선채 못마땅한 눈길로 그의 뒤모습을 쏘아봤다.

몇잔 술에 후끈후끈 달아오르던 몸이 바깥공기를 쏘이자 빙수를 마신듯 시원했다. 한대식은 만시름을 놓은듯 스적스적 걸었다. 몇걸음 걷지 않았는데 뒤에서 누군가 찾는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철이 아버지-》

안해의 목소리였다. 그는 몸을 돌려 오던 길을 되짚어갔다. 맞은쪽에서 안해가 반달음쳐왔다.

《아니 왜 오우, 무슨 일이 있소?》

《됐어요. 어서 가자요.》

혜련은 숨을 할딱거리며 한발 먼저 걷기 시작했다. 한대식은 그때야 로익두의 집에 혼자 떨어져 있을 안해가 아님을 깨달았다.

《당신은 좀 더 앉아있다 올걸 그랬소. 그 집 성의도 알아줘야지.》

안해의 성품을 모르는바 아니지만 자기때문에 식사도 제대로 못하고 서두르는것 같았다.

《글쎄 그냥 뿌리치고 오자니 제 맘도 좋지 않더군요. 그런데 어찌겠어요. 도저히 나혼자 앉아있기는 싫은데…》

한대식은 할수 없다는듯 더 말없이 안해의 뒤를 따라 걸었다.

《여보, 당신 자재과장동무와 아는 사이요?》

한대식은 고개를 수굿한채 말없이 앞서 걷는 안해에게 물었다.

《왜 그러시나요?》

혜련 역시 무엇인가 생각되는게 있는지 그닥 밝지 못한 목소리였다.

《자재과장이 당신네 집에 대해 잘 알기에 하는 말이요. 물론 취중의 소리긴 하지만.》

《그래요?!…》

혜련은 고개를 들어 남편을 돌아봤다. 사실 그는 오지 않겠다는 남편을 기어이 데리고 온 의도가 로익두에 대해 상세히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평양에서 내려오던 날 아침 옛지기를 만난것처럼 유별스레 굴던 로익두에게 필경 곡절이 있다고 생각했고 이 낯선 고장에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는것으로 하여 한편 의지가 되는것 같았다. 그래서 모처럼 마련된 오늘밤에 서로 통성도 하고 가깝게 지내고싶었다.

《글쎄 저는 아무리 생각해보아야 첨 보는분같은데… 그래서 사실 오늘 저녁에 좀 알아보려고 했어요.》

《그렇다면 진작 그 말부터 할게지 그 사람이 별스럽게 군다 했더니.》

《…》

《여보, 후에 꼭 찾아가 뵙도록 하오. 분명 깊은 연고관계가 있는것 같은데.》

《그래야 할것 같아요.》

로익두의 집에서 있은 일은 이렇게 락착짓게 되자 그들 부부는 한결 마음이 개운해지는것 같았다. 귤쪽같은 초생달이 연약한 빛을 던져주며 그들의 머리우에서 기울기울 따라왔다. 밤이 되여 그런지 공장쪽에서 자주 들려오는 구내기관차의 기적소리가 귀전에 메아리를 일으켰고 여기저기서 번쩍이는 용접광이 하늘을 파랗게 물들였다. 혜련은 종종걸음을 멈추고 활력에 넘친 공장지구의 밤하늘을 신비하게 바라보군 했다.

유정한 밤이였다. 안해와 함께 나란히 걷노라니 이곳에 내려와있었던 가지가지의 일들이 한갖 꿈결처럼만 생각되였다. 그는 시원한 공기를 힘껏 들이키며 무수한 별들이 보석처럼 반짝이는 우주에 눈을 주었다.

《저 이보세요.》

묵묵히 걷기만 하는 남편의 사색을 깨치기 저어하듯 혜련의 나직한 음성이 울렸다.

《오늘 시험발생로에 화입을 했다지요?》

한대식은 상념에서 깨여나며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화입을 했소. 내 아까두 얼핏 말했지만 아주 성공적이요. 지배인동무두 나왔됐다오. 그도 몹시 기뻐하면서 앞으론 발생로운영작업반을 하나 꾸려줘야 하겠다고 하더군. 지배인이 그처럼 적극적으로 나오니까 내 마음이 다 든든해지더란 말이요. 당신두 직접 나가보았더라면 좋았을걸 내 미처 생각못했소.》

《아이참, 그래서 묻는 말이 아니예요…》

혜련은 흥에 취한 남편의 얼굴을 바라보며 무엇인가 바재이고있었다.

《그럼 왜 그러우?》

《이보세요, 이제는 화입까지 했으니 결국 무연탄가스화에 대한 연구사업이 끝났다고 할수 있지요?》

《완전히 끝났다고 말할수 없지만 시험발생로가 제 구실만 하면 연구사로서 더 할 몫은 없게 되오. 그 다음은 생산에 도입하면 되니까. 그래 다음번 연구쩨마는 당신이 알선해주려오? 그래서 평양에서 몸소 이렇게 행차하신게 아니오?》

기분이 어지간히 들뜬 한대식은 시뭇히 웃으며 의뭉스런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래서 찾아왔어요. 과학자의 안해니 별수 있나요. 하루라도 일손을 놓으면 당장 질식할 당신인데.》

좀 신중히 의논하려고 힘들게 운을 뗐는데 남편이 롱으로 대하자 혜련이도 빈정댔다. 얼마쯤 걷다가 한대식이 정색해서 말했다.

《여보, 내 당신맘을 모르는게 아니요. 여기 일을 빨리 결속하고 다음 연구과제를 받으면 얼마나 좋겠소. 그러나 가스화가 그렇게 쉬운것이 아니요. 발생로에 화입은 잘됐으나 맘이 놓이질 않소. 초산한 산모의 심정이랄가. 그래서말이요. 당신은 인차 평양에 올라가오. 나두 발생로만 제대로 가동되면 뒤따라가겠소.》

《저도 그럼 며칠 기다렸다가 함께 올라가겠어요. 휴가기간도 아직 남았는데.》

혜련의 목소리는 대번에 환해졌다.

《당신이 이렇게 억지쓴다는걸 철이가 안다면 꼴 좋겠소.》

《철이가요? 호호… 그래두 아들생각은 잊지 않구있군요.》

혜련은 아들소리가 나오자 즐거운듯 소리내여 웃었다. 열살잡이 아들을 며칠간 옆집에 맡기고 온 그였다. 오래간만에 들어보는 안해의 웃음소리를 들으니 한대식의 마음도 즐거워졌다.

《여보, 난 롱말이 아니요. 래일이라도 곧 올라가오.》

《저도 실없는 소리가 아니예요. 철이두 이 엄마맘은 알아준답니다.》

《허참…》

한대식은 허거프게 웃고말았다. 이쯤되면 안해의 결심은 꺾기 힘들다. 그러나 어쨌든 안해는 빨리 집에 보내야 한다. 옆집에 맡기고왔다는 철이도 문제지만 주부이고 직업을 가진 녀인이 한가로이 남편의 뒤시중이나 든다는것이 말도 되지 않는다. 끊임없는 사색과 창조과정만을 인정하는 한대식에게 남편을 찾아내려온 그 소행자체가 안해로서의 직분을 초탈한것 같아 달갑지 않았던것이다.

어느덧 둔덕에 있는 추녀낮은 집앞에 이르렀을 때 한대식이 걸음을 멈췄다.

《여보, 당신 혼자 들어가보오. 아무래두 난 발생로에 나가봐야겠소.》

《오늘밤은 휴식하기로 됐다지 않았나요. 방금 화입했다면서…》

《지금 석근수아바이가 로를 관리하고있겠는데 주인인 내가 어디 발편잠을 자겠소.》

《그럼 어서 가보세요.》

혜련은 입속말로 뇌였다. 한대식은 안해의 어깨에 손을 얹고 잠시 서있다가 걸음을 내짚었다. 발자국소리가 멀어지자 혜련은 호-하고 가는숨을 내불었다.

이미 남편의 모습은 없고 어둠의 장막만이 절벽처럼 막아섰다. 그는 길잃은 나그네처럼 저멀리 하늘의 별만 바라보며 움직일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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