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과학원 부원장 강지창은 하루 더 머무르기로 했다. 전력문제를 풀어보겠다면서 장진강발전소에 간 방하철지배인을 다시 만나 확답을 받고싶었다. 그는 흥수에 내려올 때만 해도 일이 이처럼 심각히 제기될줄은 예견도 못했다.

이틀전이였다. 한대식이로부터 문뜩 전화가 걸려왔다. 내용인즉은 발생로 중간시험에 일정한 난관이 조성됐는데 시간이 허락되면 한번 내려와달라는것이다.

강지창은 중간시험운전이 심상치 않음을 간파했다. 웬간해서는 손내밀기 싫어하는 고지식한 한대식이다. 그래서 부랴부랴 내려왔는데 사태는 훨씬 험하게 된것이다.

그는 내려오는 길로 곧장 지배인실을 찾아갔다.

몇몇 사람들과 협의회를 하고있던 방하철은 서둘러 회의를 끝내고 강지창을 응접탁으로 안내하며 반가와했다.

《오시기 수고하셨습니다. 전화로 알려주셨더라면 역에 차를 보내드리는건데.》

《여기가 뭐 초행길이라구 전화질이겠소. 서부지구에 있을 때 하구는 영 딴사람이 된것 같구려. 몸두 좋아지구 틀스럽구.》

강지창은 이마의 땀을 문대며 반색을 지었다.

《갑자기 큰 황소대가리를 맡은감이 납니다. 보십시오. 제가 일을 쓰게 못하니 부원장동지까지 내려오지 않았습니까.》

판단력이 예민한 방하철이 예고도 없이 나타난 강지창을 조심히 대했다.

《힘들거요. 지금 농촌 어디서나 절박히 요구하는것이 비료가 아니요. 그런 지배인을 도와줄 대신 우리가 시끄럽게 굴어 미안하오.》

《섭섭한 말씀 마십시오. 과학사업이야 나라의 흥망성쇠와 관련되는 일인데 제 힘이 모자랄뿐입니다.》

《옳소. 우리 일군들모두가 그런 립장에서 과학사업을 떠밀어준다면 얼마나 고마운 일이겠소. 그런데 여기 와있는 한대식연구사가 왜 갑자기 애로가 제기됐다구 하는지 모르겠소. 그게 잘 리해되지 않아 내려왔소.》

방하철은 짐작했던대로 한대식문제가 화제에 오르자 주춤하더니 곧 자세를 바로가지며 주저없이 사실을 밝혔다.

《저도 짐작했습니다. 한대식연구사를 다른곳으로 가라고 한것은 바루 접니다.》

《?!…》

강지창은 자기가 잘못 듣지 않았나 하고 태연히 앉아있는 방하철을 이윽히 바라보았다. 몇년전만 해도 방하철자신이 류학을 하고온 사람으로서 누구보다 과학을 중시하고 적극 관심해준다는 소문까지 나지 않았던가.

《믿을수가 없구만. 내 알기엔 지배인동무가 발생로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있던것 같은데.》

《…》

방하철은 지그시 바라보는 강지창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강지창은 낯이 벌겋게 달아올라 가쁜 숨만 몰아쉬는 그의 심중이 짐작되여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만나자마자 옹색하게 만들어서 안됐소. 필경 문제가 있는것 같은데 실태를 좀 알아봅시다.》

지배인실에서 나온 강지창은 발생로현장을 료해했고 한대식이와도 구체적인 담화를 나누었다.

강지창은 퇴근시간이 퍼그나 지난 조용한 틈을 타서 지배인실로 갔다. 커다란 량수책상에 틀스럽게 앉아 문건철을 검토해나가던 방하철은 성급히 일어서며 그를 원탁으로 안내했다.

《오늘은 어찌나 분주한지 그만 손님대접도 못했습니다. 면목없습니다.》

《별말씀, 지배인동무와 한가지 견해일치를 보자고 또 왔습니다.》

강지창이 경어를 쓰며 진중한 태도를 보이자 방하철이 무척 송구스러워했다.

《내 오늘 발생로실태를 알아봤습니다. 한대식연구사도 만나보구요. 그런데 문제는 무연탄가스화에 대한 견해가 차이난다는것을 알게 되였습니다.》

《…》

《지배인동무도 화학전문가인데 발생로에 대한 견해를 그렇게 쉽게 달리할수 없지 않습니까?》

송구스레 앉아있던 방하철의 몸은 벌써 태연한 자세로 변했다. 례의를 지켰을뿐 자기 견해를 달리 표현할 방하철이 아니였다.

《부원장동지, 전 결코 발생로에 대한 견해를 달리한것이 없습니다. 다만 일정한 준비단계가 있은다음 계속해야 되겠다는것을 깨달았을뿐입니다.》

이렇게 허두를 뗀 그는 운전작업반이 꾸려진후 두달이 넘는 오늘까지 투자만 해온 발생로의 시험운전정형을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저는 이 과정에 두가지 난점을 포착했습니다. 하나는 가스화의 원료인 무연탄의 질적성분이였고 다른 하나는 로의 설비장치물이 문제로 되였습니다. 부원장동지도 아실테지만 발전된 나라에서도 가스화의 원료로는 기름기가 많은 갈탄이나 력청탄만을 쓰고있는데 이런 경우에도 액체연료와 합성물질을 뽑을뿐 암모니아는 생각도 못하지 않습니까. 때문에 무연탄으로 가스화를 하자면 로의 장치물들을 결정적으로 개조해야 된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현재의 로설비를 가지고는 무연탄가스화를 공업화하기 힘들다는거지요?》

《옳습니다. 그것을 제가 늦게야 깨달았습니다.》

《?!…》

강지창은 믿어지지 않는 눈길로 방하철을 바라보았다. 누구보다 발생로에 호감을 가지고 그것을 적극 떠밀어주던 그가 갑자기 이처럼 견해를 달리한다는것이 놀랍기만 했다.

그의 주장은 연료화학에서 최첨단이라 할수 있는 나라의 실태를 념두에 두고있는데 그 나라에서는 무연탄가스화란 말조차 없다. 이것은 오직 우리의 현실로부터 절박하게 요구되는 생소한 분야다. 때문에 무연탄가스화는 그가 뒤늦게 깨달았다는 그 어떤 과학기술문제가 아니라 현실에 대한 관점문제로 봐야 한다. 다시말해 우리의 자원, 우리의 기술, 우리 시대 인간들을 뜨거운 애정을 가지고 대할 때만이 풀릴수 있는 문제다.

방하철은 자신이 발생로에 대한 견해가 변함이 없다고 하는데 진정 그 말은 아직 우리 식의 발생로를 잘 모르고있다는 말과 같은것이다.

강지창은 자기가 방하철에 대하여 지내 속단하는것 같아 은근한 소리로 한마디 더 물었다.

《지배인동무, 다르게 생각진 마시오. 정확히 알고있어야 우리 과학원에서 해당한 대책을 세우겠기에 그럽니다. 발생로를 그만둔것이 단순히 로설비때문만은 아니겠지요?》

방하철은 잠시 눈을 내리깐채 대답이 없다가 힘들게 입을 뗐다.

《구차스런 변명같은데 지금 공장형편이 매우 긴박합니다. 그런데다 한쪽으로 당장 전해계통확장공사까지 벌려야 할 피치 못할 정황입니다.》

《그건 무슨 말입니까?》

강지창은 뜻밖의 소리에 긴장해졌다.

《벌써 초봄부터 제기된 문제인데 더는 미룰수 없게 됐습니다. 그래서 있는 자재, 있는 설비와 로력을 이 확장공사에 총 집중하기로 했습니다.》

강지창의 마음은 더욱 무거워졌다. 비료생산에서 전해공정대신 발생로계통으로 이행하자는것이 무연탄가스화의 초과제인데 사태는 그와 반대로 번져지고있었다.

발생로는 어느모로 보나 순간도 미룰수 없는 절실한 문제였다.

《대체로 공장의 분위기와 고충을 알만 합니다. 그래 발생로문제를 앞으로 어떻게 할 작정입니까? 아무리 실태가 그렇다 해도 지배인 동무의 각오에 달려있지 않습니까.》

《…》

방하철은 온몸에 진땀이 났고 숨쉬기조차 가빠졌다. 발생로작업반을 해산한 후 이 며칠동안 난생처음으로 그런 따분하고 옹색한 처지에 빠져본것 같다.

공장당위원회에서는 가능한껏 시험로운전을 계속 보장해주라는 무거운 의견을 주었고 석근수아바이는 이틀이 멀다하게 찾아와 이번 처사는 매우 옹졸한 행동이며 당의 뜻을 받드는 자세에서도 환경에 따라 달라질수 있는 옳지 못한 태도라고 강경히 들이댔다. 했지만 그 모든 권고와 설복과 충고를 받아들일수 없었다. 이미 심중히 타산하고 내린 결심이였고 일단 주견을 세우면 끝까지 내미는 성미탓도 있었다.

그런데 과학원 부원장까지 현지에 직접 내려와 이렇게 절절히 요구하는 정황에서 그냥 모른다고 했다간 문제가 점점 더 커지고 복잡해질것 같았다. 강지창은 지배인의 이러한 심리를 꿰뚫어보듯 부드러운 어조로 다시금 호소했다.

《그동안 많은 품을 들여 중간시험을 해왔는데 이제 다른곳으로 옮길수야 없지 않습니까. 만약 그렇게 한다면 누구보다 지배인동무속이 더 좋지 않을겁니다.》

방하철이 더는 자리에 앉아있을수가 없었다.

《과학원의 결심대로 하십시오. 그러나 이전처럼 도와주진 못할것 같습니다. 리해해주십시오.》

《…》

침묵이 흘렀다. 그들은 다같이 내심의 감정을 누르느라 마주 보기를 피했다.

무거운 침묵만이 한동안 계속되였다.

이윽하여 강지창이 나직한 소리로 말했다.

《좋습니다. 방조성원문젠 우리 과학원에서 해결해보겠습니다.》

강지창이도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생각같아선 지배인에게 해주고싶은 말이 많았으나 다음기회로 미루는수밖에 없었다.

방하철이 문밖에까지 따라나왔다.

《언제 올라가시겠습니까?》

《사람들을 좀 만나봐야 하겠습니다. 지배인동무, 바쁘겠지만 우리 연구사동무를 잘 좀 도와주시오. 부탁합니다. 그는 꼭 해내고야말겁니다.》

《그랬으면 제 마음도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지배인과 헤여진 강지창은 발생로현장으로 걸음을 다그쳤다. 지배인의 허락을 받은이상 어서 대책을 세워야 했다.

점심무렵이였다.

강지창은 혜련을 만나보고싶어 그가 있다는 외래자합숙으로 갔다. 공장구내에서 멀지 않는 외래자합숙 둘레에는 잎새 무성한 살구나무 몇그루가 서있는데 벌써 밤알만 한 살구가 아지가 휘도록 달려있었다.

문기척소리에 무심히 문을 열어주던 혜련은 들고있던 책을 떨구며 탄성을 올렸다.

《부원장동지가 오시긴 오시는군요. 그런 법이 어디 있어요. 집없는 나그네신세라구 너무 깔보는게 아니세요?》

전에 볼수 없던 칭원과 롱말에 얼떠름할 지경이였다.

《허허, 이거 문전박대가 여간 아니군. 일이 그렇게 되였으니 용서하오.》

강지창이 쩔쩔매며 사죄를 하자 혜련은 그래도 믿을수 없다는듯 두눈을 곱게 치떠보인 후 그의 손가방을 받아들었다. 과학원에서 부원장이 내려왔다는 말을 들은 다음부터 줄곧 창밖만 내다보고있은 혜련이였다. 남편이 헤여날길 없는 사면초가에 빠지고 자기 또한 어찌했으면 좋을지 모를 절박한 이때 강지창의 출현은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니였다.

강지창을 맏오빠처럼 믿고 의지하고있는 그는 이 낯선 곳에 내려와 그동안 겪은 시름과 안타까운 괴로움을 실컷 토설하고 앞으로의 일을 의논해보고싶었다.

《어서 여기 침대에 걸터앉으세요. 우린 이렇게 살고있답니다.》

혜련은 눈에 거슬리는게 없나 하고 이것저것 다스리며 분주스레 방안을 정돈했다. 강지창은 선뜻 앉을수가 없었다. 아무때 찾아가도 그윽하고 사려깊어 상대방까지 몸가짐을 돌이켜보게 하던 혜련의 그 세련된 모습대신 푸념부터 늘어놓는 그 애소어린 목소리가 가슴을 젖어들게 했던것이다. 그래 봐서 그런지 발그스름하고 윤기가 돌던 그의 얼굴색은 백지처럼 희고 차거운데 물기어린 두눈에는 안타까움과 수심이 가득 어려있는것 같았다.

《방을 신방처럼 아늑하게 꾸렸구만. 그러고보니 혜련동무넨 신혼부부가 된 셈이요. 내가 다 부럽소.》

《그렇게 평가해주니 참 다행이예요.》

혜련은 어줍은 미소를 그리며 강지창의 웃옷을 받아 옷걸개에 걸어놓는다.

《정말이요. 난 이때까지 이런 단란한 방에서 오손도손 살아본것 같질 않소. 이런 재미를 보자구 혜련동무가 부진부진 여기로 내려온게 아니요?》

입에 붙지 않는 익살과 롱을 해가며 혜련의 기분을 전환시켜보려던 그는 아차 하고 자기의 실언을 깨달았다. 그러나 어느덧 혜련의 눈가에는 쓸쓸한 한줄기 그늘이 얼핏 지나가고있었다.

문득 하던 말을 끊고 어색하게 바라보는것을 느낀 혜련은 얼른 숫저운 미소를 그려보였다. 상대방의 감정을 예민하게 포착할줄 아는 그는 《여기에 며칠이나 계시겠어요?》하고 밝은 표정으로 물었다.

《글쎄, 문제가 해결되는 차제로 올라갈가 하오.》

강지창은 그 어떤 속박에서 벗어난듯 서근서근 대답했다.

그들은 다같이 이 따분하고 괴로운 상태에서 헤여나려 애를 썼으나 변덕과 노죽을 모르는 성격들이라 끝내 적중한 표현을 찾을수가 없었다. 마주앉으면 할 말이 가슴에 넘쳐날것 같았는데 웬일인지 옹색하기만 했다.

역시 바쁜 대목에서 기발한것은 녀자들이라 혜련이 상큼 일어났다.

《이 정신 좀봐, 점심때가 지났는데…》

혜련이 밖으로 나가자 그는 방안을 두루 살펴봤다. 아까는 롱으로 해본 소린데 정말 알뜰히도 꾸려놓은 방이다. 창문턱에 달아놓은 해당화수놓이레스며 백설같은 침대와 원탁보, 티 하나 없는 닭알색의 장판바닥 등 어디라없이 섬세하고 정갈한 느낌을 주었다. 원래 눈썰미 빠르고 손동작이 섬세하여 무엇이나 이채를 띠게 만들어놓군 하던 남다른 그의 재간을 알고있지만 이 방은 그렇게 의도적으로 꾸린것 같지 않았다. 분명 잠시도 가만있기 싫어하는 그 성미에 남편이 출근한 후 빈방에 무맥하게 앉아있을수 없어 시작한 위안거리였을것이다. 그러자니 그 하루하루가 얼마나 초조하고 괴로왔겠는가. 간절한 기대를 가지고 여기까지 내려와 성공의 그날만 촉박히 기다렸는데 성공은커녕 쫓겨갈 신세가 되였으니 유약하기만 한 그가 침식인들 제대로 했겠는가.

강지창이 이런 생각을 굴리고있는데 손기척소리와 함께 문이 벌컥 열리며 석근수의 얼굴이 나타났다.

《마침 여기 계시는군. 교환대에 알아보니 합숙에 갔다기에 오는 길이웨다.》

이렇게 말을 건네며 성큼 들어서는 그의 얼굴엔 그 어떤 초조한 기색이 떠돌았다.

《벌써 와봤어야 하는건데 오늘에야 왔다구 혜련동무한테 혼났습니다.》

《고맙쉐다. 암, 선참 들려봐야 할 집이지. 이집 내외분한테야 부원장이 잊을수 없는 은인 아니오.》

강지창은 예나 다름없는 석근수의 그 웅심과 텁텁한 성품에 어버이같은 친근감이 느껴졌다. 해방직후 이 공장에 올 때면 집을 멀리 떠나 외지에 와서 건국사업에 고생한다고 어찌나 융숭하게 대해주던지 남쪽 대구에 계시는 고령의 아버지를 생각케 하던 석근수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은인이 다 뭡니까. 혜련동무를 보니 큰 죄를 진것 같아 얼굴을 들수가 없습니다. 사태가 이처럼 험하게 될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멀리 떨어져있던 부원장이 별수가 있겠소. 우리들 책임이 크웨다. 그래 지배인하구는 어떻게 락착을 봤쉐까?》

사실은 그 결과를 알고싶어 여기까지 달려온 석근수였다.

《여기서 그냥 하기로 합의했습니다.》

《그럼 됐수다. 부원장이 정말 어려운 문제를 풀었수다. 연구사선생이 이 소식을 들으면 얼마나 좋아하겠수.》

《그런데 발생로작업반은 다시 못내오겠답니다.》

《그건 걱정마슈, 아무렴 연구사선생 혼자서 하라구 내버려두겠소. 그 완고한 성미에 허락한것만두 다행이지요. 난 요즘 지배인 그 사람이 왼고개를 트는바람에 밥맛까지 잃었댔수다.》

석근수는 만사가 풀린듯 흡족해했다.

《아바이, 그런데 한가지 물읍시다. 공장에서 전해설비확장공사가 있다는걸 알고계셨습니까?》

《예, 성에선 생산예비가 확장공사에 있는데 빨리 받아물지 않는다고 독촉이 불같지요. 연구사선생도 그래서 더 몸달아했수다.》

《저는 그걸 오늘에야 알았군요…》

《일이 거꾸로 된것만은 사실이웨다. 그렇지만 세상에 기적이란 말두 있지 않수. 이제 두고보슈. 확장공사가 아니라 발생로직장을 건설하게 되는걸. 난 한대식연구사선생을 굳게 믿수다.》

《아바인 여전하시군요.》

마음이 어지간히 무겁던 강지창은 석근수의 배심있는 소리에 웃음이 나왔다.

이런 때 방문이 열리더니 한대식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강지창과 석근수의 웃는 모습을 보자 억지로 가느다란 미소를 지어보였다.

강지창은 후줄근한 작업복에 고개도 제대로 쳐들지 못하는 그를 대하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연구사선생, 발생로를 계속하기로 했으니 기뻐하슈. 부원장어른이 그렇게 합의를 봤다우.》

말귀를 알아듣지 못한듯 음울한 낯으로 강지창을 바라보던 한대식이 퉁명스레 물었다.

《지배인이 그렇게 쉽게 머리숙일 때도 있답니까?》

《너무 엇뚜질을 마오. 발생로에 대한 인식이 다른 지배인이 아무렴 손벽치며 하라겠소.》

강지창이 정색하여 충고했다.

《내 올라가서 방조성원들을 인차 내려보내주겠소. 내 잘못이 크오. 실태를 제때에 알아보고 대책을 세웠어야 했는데 보충인원이 필요없다는 동무의 말만 믿고 그동안 방심해왔소. 발생로가 중요하다고 강조만 했지 실제적인 조직사업을 못했단 말이요.》

《부원장동지, 사태를 이 지경으로 만든건 제 잘못입니다. 그러니 방조성원들은 내려보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또 그 소리요.… 내 연구사동무를 믿지 못해서가 아니요. 무연탄가스화는 시간을 다투는 문제요. 공장에선 당장 전해설비확장공사를 벌리겠다고 하오. 그리구 지배인의 립장두 이전과 달라진것이 별로 없소. 이런 정황인데 동무혼자 어떻게 해낸다고 그러오. 그 문젠 나한테 맡기오.》

강지창이 두부모 베듯 말했다.

《방조성원 말고 우리 본원에서 도와줄것이 또 뭐가 있소?》

《…》

《어려워말고 어서 제기하오. 가능한껏 풀어주겠소.》

눈길을 떨구고있던 한대식이 무엇을 결심한듯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애로되는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제기할것이…》

《어서 말해보오.》

《아시다싶이 발생로는 현재 중간시험단계에 있습니다. 때문에 로를 직접 맡아 운전할 현장 동무들이 필요합니다. 저는 이때까지 석근수아바이랑 모두가 적극 도와주어 아무런 불편도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방조성원들이 내려올 필요가 없다는거겠지?》

《네, 한번 더 믿어주신다면…》

강지창은 가슴이 뭉클했다. 그 오랜기간 참기 어려운 고통과 숱한 수모를 받아오면서 맡은 과제를 어떻게 하나 자기 힘으로 결속을 보려는 지칠줄 모르는 의지와 분발심앞에 더 다른 말을 할수가 없었다. 사실 지금 과학원에도 저마다 긴장한 연구과제를 맡아놔서 연구사 한사람을 떼낸다는것이 그리 헐치 않았다.

《부원장, 우리가 곁에서 잘 도와주겠으니 연구사선생의 제기를 받아주시오. 말은 바른대루 발생로운전이야 이제는 우리가 전적으로 맡아해야지요.》

강지창은 석근수의 두손을 꽉 붙잡으며 진정으로 감사를 표시했다.

《그렇게만 해주면 우리 과학원에서 한짐 더는 셈이지요. 그러니 난 이번 길이 싱거운 유람객처럼 됐군요.》

그 말에 한대식은 큰시름이 놓이는듯 어깨숨을 내쉬였다.

《유람객이 다 뭡니까. 난사스런 문제가 아직 있수다.》

석근수가 짐짓 심각한 표정을 보이자 사뭇 흥겨워지던 분위기가 다시 굳어지는듯 했다.

강지창은 우선우선한 얼굴에 호기심을 띠우며 은근히 물었다.

《아바이가 해결 못할 문제가 다 있습니까?》

《어찌나 고집을 쓰는지 나두 두손을 들었수다.》

석근수는 연구사내외분을 위해 문화주택을 지어놓았는데 집들이를 하지 않은 사실이며 혜련이도 공장병원에 내보냈으면 좋겠는데 한대식연구사가 허락하지 않는다고 그간에 있은 일을 푸념하듯 말했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강지창은 온몸이 훈훈해지는것을 느끼며 입속말로 중얼거렸다. 연구사가 무슨 큰일을 한다고 그런 호혜와 관심을 돌려주는가. 벽돌 한장, 세멘트 한삽이 바른 때 그런 크고 아담한 집을 지은 이들의 소중한 기대와 념원이 과연 무엇이였는가. 지난날 못살고 수모만 받아온 그들이기에 연구사를 그토록 귀중히 여길것이다. 생각할수록 과학일군 된 무거운 사명감과 긍지감이 뿌듯이 차올랐다.

《연구사동무, 아바이 말씀을 들었습니까. 우리 과학자들은 정말 많은 빚을 지고있습니다.》

강지창의 목소리는 격하게 울렸다.

《연구사동무, 주저하지 말고 당장 새 집으로 옮기시오. 그래야 집을 진 분들의 마음도 좋을게 아니요. 그리구 부인두 공장병원에 내보내는게 좋을것 같소. 바꿔놓구 생각해보오. 한동무보구 빈방에 앉아있으라면 큰변날거요. 잠시도 가만있지 못하는 혜련동무가 그동안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소.》

《…》

《왜 대답이 없소. 아직도 그 고집이요?》

《부원장동지, 저도 량심이 있지 않습니까. 숱한 페를 끼쳐놓은 주제에 큰 집 쓰고 호강하겠습니까. 저는 발생로만 그냥 할수 있다면 아무 불편 없습니다. 처는 곧 평양에 올려보내겠습니다.》

《그만하게.》

석근수가 몰풍스레 그의 말을 잘랐다. 그의 주름많은 갱핏한 볼은 노여움으로 굳어졌다.

《여기 부원장두 앉아있으니 내 오늘은 말좀 하세나. 연구사는 아직 우리 로동자들을 너무도 모르고있수다. 우리가 뭐 품값을 생각하며 집을 진줄 아슈? 우리의 수령님께서 그토록 바라시는 가스화문제를 해결해보겠다는 그 마음이 천금 같아서 너두나두 떨쳐나섰던거요. 그런데 선생은 어떤 립장을 취했소. 마치 집때문에 문제가 복잡해진것처럼 곁에서 도와주겠다고 내려온 안해한테 불만까지 터뜨리지 않았수. 그리구 알탄성형기설계도면은 누구와 의논 한마디 없이 공장기술부에 넘겨버렸다지요? 이번에 일어난 로사고때에 취한 태도는 더 참기 어려웠수다. 어떡하든 로의 불을 끄지 말자고 몇밤을 지새우며 대용점결제를 만들어낸 공정기사 석호를 어쩌문 그렇게 모른다고 할수가 있수? 도대체 사람들의 성의를 뭘루 생각하슈? 과연 연구사가 그처럼 애써 하자는 발생로는 어떤거요? 과학에는 그처럼 밝은 연구사가 사람들의 진심은 왜 볼줄 모르는가 말이웨다.》

안타까움에 젖은 석근수의 목소리는 절절했다.

놀라운 눈길로 한대식을 이윽토록 바라보던 강지창이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난 동무가 남달리 지향이 높고 의지 또한 강하기에 자랑으로 여겨왔소. 그래서 늘 외지에서 고생한다고 왼심만 써왔지 동무의 그 심장을 보지 못했소. 보려고 맘도 먹지 않았지…》

자책에 잠긴 그 목소리는 흥분에 젖어있었다.

《안해의 그 소박한 념원도 작업반원들의 그 뜨거운 성의도 그렇게 외면해버리는 랭랭한 인간인줄은 정말 몰랐단 말이요. 아바이의 말을 듣고보니 1년전 여기 함께 내려왔던 세명의 방조성원들이 도중에 올라온 일두 다시 음미해보게 되오. 그때 난 시험발생로 타발을 하며 올라온 그 동무들을 몹시 추궁했었소. 그런데 이제보니 그렇게만 볼것이 아니란 말이요. 연구사동무가 그들을 뜨겁게 대해줬다면 난관이 좀 제기된다고 하여 자기네 조장을 여기 혼자 남겨두고 저희들끼리 올라올수 있겠는가?… 연구사동무, 내 말을 귀담아 듣소. 어느 사회를 막론하고 과학자들인 경우 그들에게도 자기 나름의 지향과 의지가 있으며 제 나라, 제 민족을 위해 한생바친다는 자부심들이 있소. 이건 과학자들에게 있어서 하나의 속성이라고도 할수 있소. 그래 과학연구 하나밖에 모르는 동무의 랭랭한 태도가 과연 그들과 무엇이 다르오? 그런 과학자는 우리에게 필요없소. 우리의 과학연구는 두뇌나 의지가 아니라 뜨거운 심장으로 해야 하오. 우리 식의 발생로가 바로 그것을 요구하고있단 말이요.》

한대식이 입술을 꽉 깨물며 고개를 푹 떨구었다. 내심의 충격을 지그시 누르는듯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부원장, 그건 너무 지나친 말이웨다. 허물없는 자리가 되여 내 한마디 추궁해봤수다.》

석근수는 자기때문에 그처럼 혹독한 꾸지람을 듣는것 같아 몹시 당황해했다.

《아바이, 아바이도 잘 아시지만 한대식연구사야말로 수령님의 은혜로운 품속에서 다시 태여난 과학자가 아닙니까. 한걸음을 걸어도 한순간을 살아도 오직 수령님의 뜻과 의지대로만 살아야 할 사람이 아직도 그런 심장을 가지고있다는것이 가슴아파서 그럽니다.》

강지창은 한대식을 향해 격한 소리로 말했다.

《동무도 잘 알지 않소. 어버이수령님께서 왜 오래전부터 그처럼 무연탄가스화를 바라고계시겠소. 여기에는 우리에게 흔한 자원으로 우리 인민모두를 더 잘살게 하시려는 뜨거운 사랑이 깃들어있는것이 아니겠소. 우리는 언제나 수령님의 이 인간중심의 숭고한 뜻을 잊어선 안되오. 우리의 모든 사색과 활동은 바로 여기서 시작되여야 하며 그 기준점도 여기서 찾아야 하오. 이 길에선 한점의 티도 있어선 안된단 말이요.》

강지창의 흥분어린 얼굴은 불깃해졌고 목소리는 엄엄했다. 방안엔 숭엄한 침묵이 흘렀다.

《내가 왜 이처럼 심각히 말하는가? 동무는 아직 우리 시대의 인간들을 잘 모르고있기때문에 그러오. 찍어서 까밝힌다면 과학연구는 오직 과학자자신만이 할수 있지 그 누구의 방조나 성의가 도움이 될수 없다는 그전날의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있단 말이요. 이 얼마나 시대착오적인 생활관이요. 생각해보오. 전쟁으로 페허만 남았던 이 땅우에 오늘처럼 강유력한 사회주의자립적공업토대를 마련해갈수 있는 그 비결이 어디에 있었겠소? 그 힘은 바로 우리의 의식, 우리의 생활리념으로 된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라는 공산주의구호속에 있다고 나는 보오. 동무도 느꼈을거요. 모든것이 빠듯한 공장형편에서 발생로시험작업반을 무어주고 주택을 짓고 대용점결제를 해결해보겠다고 애쓴것들 이 하나하나가 과연 누구를 위한것이였소? 이런것은 우리 시대 인간들만이, 천리마정신만이 낳을수 있는 고귀한 소행들이 아니겠소. 그런데 동문 이 뜨거운 마음들을 알려고도 하지 않았소. 동무가… 다름아닌 동무가 어쩌면 그럴수 있단 말이요?》

강지창의 마지막말은 가늘게 떨렸다. 그는 내심의 괴로움을 감추려는듯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쪽으로 몸을 돌렸다. 천근같은 무게가 방안을 꽉 내리눌렀다.

이윽하여 그 침묵을 힘겹게 밀어내듯 강지창의 심뇌어린 목소리가 나직이 울렸다.

《사람은 제아무리 뛰여나고 학식이 많다해도 심장이 뜨겁지 못하면 아무일도 해낼수 없소. 왜냐면 과학연구도 결국은 사람들을 위한것이기때문이요. 뜨거운 인간애, 이것은 우리 사회의 힘의 원천이며 매 사람들의 생존방식과 같다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이미 오래전에 말씀하셨소. 나는 지금두 해방직후 동무 한사람 문제때문에 그토록 심려하시던 어버이수령님을 생각할 때면 눈굽이 뜨거워지군 하오. 사실 이 말만은 동무앞에서 하지 말아야 하겠기에 이때까지 숨겨왔는데… 오늘만은 꼭 해야겠소.》

강지창의 목소리는 어느덧 부드러워졌고 두눈은 세월의 갈피를 헤치듯 가늘어졌다.

《한대식동무, 46년도 초가을 서울에 나가 혜련동무를 데려오던 일이 생각나겠지?》

한대식은 뜻밖의 물음에 고개를 쳐들며 입속말로 대답했다.

《네, 잊을수가 없습니다.》

《내 오늘 바로 그 얘기를 하자는거요. 우리 수령님이 계시지 않았다면 동무는 애인을 영영 잃고말았을거요. 동무네 부부의 사랑을 되찾아주신분이 바로 수령님이시였소…》

…그것은 46년도 초가을에 있은 일이였다. 산업국에서는 남조선에 파견할 사람문제를 놓고 론의가 거듭됐다. 과연 누구를 내보내야 수령님의 교시와 의도를 정확히 집행할수 있겠는가? 이 시기 남조선의 많은 과학자들이 건국으로 들끓고 새 생활로 약동하는 이북의 현실을 끝없이 동경하고있었다. 충격적인것은 어버이수령님께서 조국에 개선하신 그 길로 강선과 황철, 흥남비료공장을 비롯한 산업지구와 농어촌 등 민중이 있는곳이면 멀고 험한 길도 마다하지 않으시고 찾아가시여 살기 좋은 내 나라를 일떠세우시기 위해 온갖 혈투를 다하신다는 소식과 특히 인테리들을 나라의 보배로 여기고 한사람한사람 찾아내여 건국의 주추돌로 내세워준다는 격동적인 소문이였다. 그러나 그들은 분계선이 막혀 이북에 들어올수가 없었다. 산업국에서는 바로 이들의 열망을 풀어줄데 대한 수령님의 말씀을 받들고 남조선에 내보낼 사람을 물색했는데 이것저것 타산하다보니 적임자가 쉽게 나서지 않았다.

산업국에서는 심중히 론의한끝에 몇명의 명단을 림시인민위원회에 건의하였다.

산업국에서 올라온 명단을 받아드신 수령님께서는 오래동안 생각에 잠기셨다가 《왜 한대식선생의 이름이 없습니까?》라고 물으셨다.

《?!…》

해당 일군은 놀라움과 의혹을 금치 못했다. 전혀 생각밖의 물으심이시였다.

명단을 작성한 초기 한대식의 이름이 한두번 오른적이 있으나 그것은 즉석에서 부결되고말았었다. 한대식의 출신과 경력이 너무도 어두웠고 그것이 두려워 본인자신이 해방이 되자 원산에 내려가 은신하고있던 사람이였다. 그런데다 서울에는 해방후 월남하여 리화녀대에 다니는 그의 애인이 있었고 가까운 친척들도 많았다. 이런 사람을 남쪽에 보낸다는것은 상상도 할수 없는 일이였다.

해당 일군이 놀라와하자 수령님께서는 부드러운 어조로 말씀하시였다.

《한대식선생은 나두 좀 압니다. 작년도 12월초 내가 흥수비료공장에 갔던적이 있는데 그때 강지창동무가 그에 대하여 자세히 말해주더군요. 그후 알아보았는데 지금까지 신흥화학공장에서 책임기사로 일을 잘하고있다고 합니다.》

《수령님, 그렇지만 남쪽에 내보내는것만은 고려해주셨으면 합니다.》

《그러니 그를 믿지 못하겠다는거지요?》

수령님의 안색은 점차 숙연해지시였다.

《생각해보오. 사람에게서 믿음을 떼버리면 과연 남는것이 뭐겠소. 믿음이란 곧 정이요. 정없이는 한순간도 살수 없는것이 우리가 아니요. 그래서 우리는 당을 창건할 때 당마크에 마치와 낫과 함께 붓을 새겨넣지 않았소. 이것은 로동자, 농민과 함께 인테리도 우리 당의 영원한 길동무라는것을 의미하오. 혁명전우들사이에는 목숨보다 더 중한 의리가 있는 법이요. 물론 우리의 인테리들속엔 약점도 있소. 그러나 그것은 식민지사회가 남겨놓은 하나의 허물일뿐이요. 그들에겐 허물보다 민족적인 의분과 애국심이 더 많았소. 이것이 무엇보다 귀중한거요. 동무들이 문제시하는 한대식선생의 경우만 봐도 그렇게 말할수 있소. 그는 출신과 경력, 그때의 상황으로 봐선 벌써 이남으로 나가야 될 사람이며 또 거기 가면 더 좋은 생활이 차례질수도 있었을거요. 그러나 그는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고 지금은 건국에 한몸 바치고있소. 그는 그 어떤 명예나 재부나 안락한 생활을 바라지 않았소. 오직 우리 민족이 부흥하고 우리 나라가 강성하여 조선사람도 세상에 떳떳이 머리 쳐들고 살기를 바랄뿐이였소. 이런 인테리를 믿지 않는다면 누구를 믿겠소. 그리고 내가 그를 남쪽에 보내고싶어하는 다른 하나의 중요한 리유는 서울에 그의 애인이 있다는 사정이요. 이번 기회에 그 녀자를 데려오지 않으면 그들을 영영 생리별할수도 있소. 만약 그렇게 되면 한대식선생의 마음속엔 일생아물수 없는 상처가 남을거요. 그래선 안되오. 우리가 그들의 사랑조차 지켜주지 못한다면 혁명은 해서 뭘하겠소. 지난날 일제놈들은 인테리들을 과학과 기술의 노예로 무참히 짓눌렀다면 우리는 그들을 가장 귀중한 인재들로 아끼고 내세워줘야 하오. 때문에 그들의 마음속에 한점의 그늘도 있을세라 우리가 할수 있는것은 힘자라는껏 해줘야 하오. 우리가 혁명하는 목적도 결국은 사람들을 위한것이요.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우리의 생존방식은 인간애라고 할수 있으며 우리 사회를 떠받드는 힘도 매개 사람들의 뜨거운 마음들에 있소. 나는 이것을 그동안의 혁명투쟁 전과정을 통해 똑똑히 확인했소. 우리 한대식선생을 남쪽에 보냅시다. 그동안 애인과 떨어져 얼마나 속이 탔겠소. 아마 맘편한 날이 하루도 없었을거요. 그리구 이번을 계기로 강지창동무를 비롯해서 남쪽에 집을 둔 인테리들의 가족들을 빨리 데려올데 대한 대책을 세워야겠소. 내 거듭 강조하지만 인테리들에게는 사소한 불편이나 애로가 있어선 안되오.》…

《한대식동무, 수령님께서는 이렇게 뜨겁게 말씀하셨소. 우리 수령님은 바로 이런분이시오.》

강지창의 음성은 격하게 울렸다.

《부원장동지, 전 정말… 아무것두 모르고있었습니다.》

한대식이 목이 메여 말을 더 못했다. 이 순간 그의 눈앞에는 그때 남쪽에 나갔다가 약속된 기일보다 보름이나 늦어 왔으나 분계선을 넘어섰다는 련락을 받자 그달음으로 내려와 자기와 혜련의 손을 뜨겁게 잡아흔들며 《왔구만, 동무들이 왔소. 이 소식을 곧 수령님께 보고드리겠소. 수령님께서는 닷새전 먼 북방지구로 떠나시면서 한대식동무의 행처를 또 물으시였다오.》라고 몹시도 반가와하던 김책동지의 모습이 선하게 떠올랐다.

《한대식동무, 부모의 속을 다 아는 자식 없듯이 우리 인테리들에 대한 수령님의 로고와 심려를 우리가 어찌 다 헤아릴수 있겠소. 그저 언제 어디서나 수령님의 사상과 의도대로 숨쉬고 행동하면 그것이 곧 수령님께 충성다하는 효도라고 생각하오.》

《부원장어른이 옳게 말했수다. 문제는 우리모두가 수령님의 뜻이 몸에 푹배도록 하는것이지요.》

이때까지 묵묵히 앉아있던 석근수가 근엄한 소리로 말했다.

《부원장동지!…》

좀처럼 자기 감정을 나타낼줄 모르던 한대식의 그 사색적인 눈이 축축히 젖었고 지그시 감쳐문 입술은 깊은 회오로 하여 부르르 떨렸다.

그처럼 세심하고도 뜨거운 은정과 배려를 받아온 자신의 지난 생활이 부끄럽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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