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한대식은 발생로밑에 두무릎을 쪼그리고 굳어진채 움직일줄 몰랐다. 긴 앞머리칼은 마구 헝클어져 이마를 덮었고 꽉 틀어쥔 왼쪽손등엔 빨간 피자욱이 내배였다.

역에서 달려오는 길로 불꺼진 로를 목격하자 격정을 참을수 없어 로벽을 주먹으로 쳤던것이다.

벌어진 사태는 로에 불이 꺼지고 인명피해를 낸것으로만 끝나지 않았다. 이번 사고의 후과로 발생로작업반을 그냥 두겠는가 아니면 해산하겠는가 하는 문제가 심각히 론의되고있었다.

바야흐로 눈앞에 박두했던 중간시험결속이 물거품으로 되였다. 령상태로 된셈이다. 아니 령상태로만 볼수 없다. 이날 이때까지 깡그리 바쳐온 땀과 노력과 심혼을 무엇으로 보상할수 있는가. 진정 되찾을수 없는 세월과 정력과 희망이였다. 그것으로 하여 가슴은 찢어지는듯 했고 모든것이 끝장났다고 한대식이 몸부림치고있었다.

《선생님, 이제는 일어나십시오.》

한대식의 뒤에서 가슴을 조이던 금희가 흐느끼듯 뇌이였다.

바람을 일쿠며 달려온 승용차가 공장구내에 멎자 정신없이 달려가는 한대식의 뒤를 쫓아온 금희다. 그는 이번 사태가 자기와 직접 련관된것으로 하여 숨조차 제대로 못쉬고 울먹이는 소리로 또다시 사정했다.

《선생님, 모든게 우리의 잘못입니다. 저희들을 용서해주는 마음으로 어서 일어나십시오.》

한대식은 여전히 움직일줄 몰랐다. 숨소리도 없었다. 가끔 불어오는 바람기에 긴 앞머리칼이 제멋대로 흩어졌고 피딱지가 붙은 손등에 먼지가 뽀얗게 올랐다. 모든 감각이 마비된것만 같았다.

《선생님, 선생님이 이러시면 우린 어떻게…》

흐느끼듯 뇌이던 금희는 말끝을 맺지 못하고 얼굴을 싸쥐였다.

《연구사선생, 맨땅에 그게 무슨 꼴인가?》

쇠소리나는 석근수의 목소리에 굳어졌던 몸이 약간 흠칫했다. 라석호와 남수가 입원한 공장병원에 들렸다가 그 길로 달려오는 석근수였다.

《선생 어서 일어나슈. 누가 보면 뭐라겠수.》

한대식은 그때야 정신이 드는듯 일어나려고 몸을 움직였으나 땅에 그대로 녹아붙었는지 옴짝할수가 없었다. 무릎관절아래로 맥이 통하지 않았다.

《사람두 참, 금희네가 앞에서 선생의 두손을 잡아끌어라.》

금희는 잠시 어찌했으면 좋을지 몰라 주춤거리다가 물기어린 긴 속눈섭을 내리깐채 한대식의 팔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금희가 한대식의 두손을 잡아끄는것과 동시에 뒤에서 석근수가 허리를 떠밀었다. 두무릎에서 뚝뚝하는 소리가 나더니 한대식이 낯을 찡그리며 일어섰다.

《정말 돌부처가 될번 했소. 그랬더라면 이 흥수땅에 기막힌 전설이 생길번 했는데, 허허.》

석근수는 허구픈 웃음을 날리며 쇠의자에 한대식을 앉히더니 허리를 굽히고 그의 무릎을 주근주근 주물렀다.

《연구사선생, 너무 상심마슈. 점결제를 가져왔으니 로에 다시 불을 살구면 되지 않겠소. 병원에 가보니 석호랑두 별일 없습데다.》

《…》

《이번 일이 잘 안됐지만 석호기사가 아주 좋은것을 시도했다구 봅네다. 대용점결제는 앞으로 꼭 해결해야 할 절실한 문제가 아니였수.》

《아바이, 제발 절 혼자있게 해주십시오.》

한대식의 목소리는 어딘가 신경질에 가까왔다.

《?!…》

순간 그의 두무릎을 주근주근 주무르던 석근수의 손이 떡 멎으며 두툼한 입귀가 씰룩했다. 솟구치는 내심의 충격을 꽈악 눌러버리듯 잠시 까딱 안하고있던 석근수는 신음비슷한 가느다란 소리를 내며 천천히 허리를 폈다.

《금희야, 네가 좀… 난 손이 잘 놀려지지 않누나.》하고 나직이 뇌이며 한걸음 뒤로 물러서던 석근수가 오금을 꺾으며 한쪽으로 비칠했다.

《아바이, 왜 갑자기 그러세요. 얼굴색이 말이 아니군요.》

《한참 서있었더니… 늙은탓이겠지.》

석근수는 겁이 더럭나서 두팔을 부여잡는 금희의 어깨에 몸을 의지했다.

《아바이는 누워야겠어요. 어서 가시자요.》

그의 팔을 목에 건 금희가 무작정 이끌었다. 몇걸음 끌려가던 석근수는 억지로 팔을 뽑으며 나직이 타일렀다.

《난 내발루 혼자 갈수 있다. 연구사선생을 저렇게 혼자 놔두고 가면 어쩌겠니? 네가 남아서 돌봐줘라.》

《제가 있으면 더 괴로와할거예요.》

《?!…》

《전 아무래도 연구사선생님의 조수자격이 없는것 같습니다.》

쓸쓸하게 말하는 금희의 목소리엔 어딘가 실망이 담겨있었다. 그처럼 존경하며 따르던 그가 왜 이처럼 소격해하는지 짐작이 갔다. 연구사에 대한 자신의 감정도 어쩔수 없이 이렇게 허우룩해지는데 가뜩이나 죄책감에 다몰려있던 금희의 마음이야 말해 뭣하랴. (연구사도 너무 안타깝고 분하니 저도 모르게 분별없는 말이 튀여나왔겠지. 그도 사람이 아닌가?)

석근수는 순간이나마 연구사를 고깝게 생각했던 자신을 탓하는 심정으로 금희에게 말했다.

《넌 무엇인가 오해하고있는것 같다. 넌 이제껏 연구사선생을 나무랄데 없이 도와줬고 연구사선생도 그걸 더없이 고맙게 생각하고있다. 앞으로 더 잘 도와줄수 있을게다.》

《전 어쩐지… 선생님앞에 무슨 면목으로…》

《그러면 못써. 이럴 때일수록 더 잘 도와야 한다. 넌 이길루 합숙에 가서 연구사선생의 사모님한테 알려줘라. 출장갔던 선생이 돌아왔다구. 선생은 지금 제정신이 아닌것 같아. 난 여기 좀더 있겠다.》

금희는 의자에 멍하니 앉아있는 한대식을 야속하게 바라보다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한편 이때 한대식연구사가 길주에서 돌아왔다는 통보를 받고 발생로현장에 나가려던 지배인 방하철은 길게 울리는 전화종소리에 송수화기를 들었다.

전화는 평양에 있는 부상 남주혁이한테서 왔다.

《뭘 하댔소. 혹시 회의중은 아닌가요?》

《현장에 좀 나가려던참입니다.》

《그럼 됐소. 될수록 현장에 붙어있는게 좋지. 나두 서부지구에 나갔다가 엊그제 돌아왔소. 그런데 흥수에서 올라온 최근 일보를 보다가 의문되는것이 있어 전화했소. 지배인동무, 동무넨 성에서 취한 증산예비안이 접수되지 않소? 전해능력확장문제말이요. 기초안을 빨리 올려보내라는데 왜 아직 감감하오? 동무네때문에 비준에 제기할 문건이 늦어진단 말이요.》

《현재실태를 종합하고있습니다.》

방하철은 두리뭉실하게 대답했다. 전해능력확장에 대한 기초안은 성의 여러 지령선을 통해 벌써 몇차례 독촉이 있었던것이다. 했으나 애당초 확장공사가 아니라 이미부터 해오는 설비개조로서 증산예비를 찾고있는 방하철이 그 독촉을 묵묵히 깔고있었다. 그런데 이제 더는 침묵으로만 대할수 없었다. 설비개조가 예상외로 애를 먹고있는데다 한가닥 기대를 걸고있던 발생로마저 막연한 상태다.

《될수록 빨리 올려보내오. 하루가 급해서 그러오. 그리구 어제 올라온 일보에는 공정기사 한명과 로동자가 화상을 당해 입원했다는데 어찌다 그런 일이 생겼소?》

방하철은 속이 띠끔했다. 피할수 없는 질문이였다. 어떻게 대답했으면 좋을지 송수화기를 왼손에 바꿔쥐고 잠시 망설이던 그는 아무래도 부상이 알고있어야 될 일같아 발생로운전작업반을 무어준 일이며 거기서 일하던 공정기사와 재배출공 청년이 화상당하게 된 경위를 간단히 설명했다.

《그래 화상은 어느 정도요?》

《한 열흘간 치료받으면 완치될 경상입니다.》

《음, 다행이요. 그런데 지배인동무한테 아주 나쁜 고집이 있구려. 그 고집이 결국 아까운 우리 동무들을 그렇게 만들었소. 그 뿔이 무슨 일을 또 저지를지 모르겠구만. 언제부터 그렇게 안하무인격이 됐소?》

남주혁이 노한 소리로 추궁했다.

《그건 어떻게 하시는 말씀입니까?》

《여보시오. 내 초봄에 내려갔을 때 명백히 결론하지 않았소. 무연탄가스화말이요. 그런데 운영작업반까지 꾸려주고 거기에 공정기사를 배치했다니 이게 뿔질 아니구 뭐요? 혹시 지배인동문 증산예비를 무연탄가스화에서 찾고있는게 아니오? 아직도 확장공사기초안을 제기하지 않는 까닭도 이제 보니 심상치 않단 말이요.》

《…》

방하철은 대답할 말이 없었다. 물론 부상이 변죽을 친것처럼 무연탄가스화에 기대를 걸고 확장공사기초안을 외면해온것은 아니다. 왜냐면 발생로가 중간단계에서 성공한다해도 생산에 물리자면 많은 공정과 기일이 요구되기때문이다. 대답할수 없는것은 발생로에 의한 비료생산을 인정조차 하지 않으려는 부상을 한두마디로 납득시킬수 없다는데 있었다. 더구나 아무런 전진도 없이 실패를 거듭해오다가 인명피해까지 낸 현 정황에서 발생로는 심중히 타산해봐야 할 대상이였다.

방하철이 송수화기를 든채 잠잠해있자 남주혁의 목소리가 한결 누그러졌다.

《지배인동무, 내가 너무 신경을 썼다면 량해해주. 왜 그런지 안심찮아서 그러오. 우리 성의 기둥인 흥수가 조용하니 걱정된단 말이야. 오늘은 그만합시다.

… 가만 발생로는 당장 그만두시오. 그 연구사가 정 하겠다면 발생로가 있는 황철이나 김철에 가서 제 하고싶은대로 하라시오.》

《…》

《망설일게 없소. 무조건 그렇게 하오. 비료부문도 아닌 연료연구사가 왜 하필 그곳에 가있는지 그것부터 리해할수 없소.》

방하철은 맥없이 송수화기를 놓은채 우두커니 서있었다. 방금전만 해도 발생로현장에 나가 한대식연구사를 위로도 해주고 점결제문제는 자재인수원에게 담당시켜 공장에서 전적으로 보장해주려고 맘먹었는데 그럴 용기가 전혀 없었다. 오히려 이번 사고를 계기로 발생로중간시험을 그만두는것이 옳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불쑥 치밀었다. 아직 확고한 전망도 없는 (방하철이 요즘 발생로를 구체적으로 료해하고 참고서들을 봤지만 방도가 보이지 않았다.) 형편에서 지금 상태로 계속 끌고간다는것은 어딘가 우둔해보였다. 일단 발생로작업반을 해산하고 그동안 연구사에게는 실패원인을 찾도록 하는게 어떨가?

… 십분 이렇게 하는것이 현명한 처사같았다. 그래야 연구사본인에게도 숨돌릴 틈을 줄수 있고 한명의 로력과 자재가 귀한 때 공장측의 옹색한 처지도 덜어줄수 있었다.

(그런데 중도에서 어떻게…)

방하철은 낯이 화끈해지며 완강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난 기간 자기는 한대식연구사에게 요구하고 독촉만 했지 발벗고 도와준것이 없었다는 심한 자책이 뇌리를 때렸던것이다. 이번 사고만 놓고봐도 그렇다. 공장에서 관심했다면 점결제를 가지러 연구사본인이 길주에까지 가지 않았을것이며 대용점결제문제도 상정되지 않았을것이다.

생각이 깊어질수록 방하철은 발생로작업반을 해산하고 중간시험을 일단 중지시키려던 자신의 결심이 세차게 뒤흔들리였다.

무겁고 불안한 심뇌로 방안을 서성대던 그는 끝내 사무실을 나서고말았다.

어느 현장에 나가 땀을 흘리며 사색을 좀더 정리하지 않고는 무섭게 유혹하는 동요를 걷잡을수 없었다.

행정청사마당을 방금 벗어나려는 때다.

《지배인동지-》하고 부르는 웨침소리와 함께 작업복을 걸친 호리호리한 몸매의 기사장이 반달음치듯 다가왔다. 방하철은 웬일인가 하여 마주 향했다.

《방금전 부상동지한테서 전화가 왔기에 지배인동지를 찾아오던 길입니다.》

《전해확장문제가 아니요?》

《옳습니다. 지배인한테도 전화했으니 기초안을 래일중으로 올려보내랍니다. 이젠 더 끌수 없을것 같습니다.》

기사장역시 어지간히 닥달을 받은 모양이다. 느닷없이 속이 부그그 괴여올랐으나 그 누구를 탓하거나 반박할수가 없었다.

《부상의 지시인데 그대로 해야지요.》

《어디 몸이 편찮습니까? 신색이 좋지 않군요.》

어딘가 석연치 않은 전에 볼수 없던 방하철의 태도에 기사장이 두눈을 쪼프렸다.

《오늘저녁 지휘성원들이 모여 기초안에 대한 토론을 합시다. 난 지금 현장에 나가봐야겠소.》

방하철은 자기의 울적한 내심이 엿보인것 같아 얼른 몸을 돌렸다. 그러나 얼마를 가지 못해 걸음이 점차 떠졌다. 현장에 가서 일손을 잡는다해도 지금의 기분상태가 달라질것 같지 않았다. 무슨 일이나 확신과 결단을 가지고 배심있게 내밀던 자신이 왜 이처럼 당황하게 되고 자조해지는지 역스러울 정도였다.

그는 저도 모르게 사람들의 눈길을 피해 합숙으로 향했다. 마침 점심시간도 가까운 때라 조용한곳에 가서 안정하고싶었던것이다. 정문을 벗어난 그는 종업원들이 출퇴근길을 당기려고 낸 지름길로 걸음을 옮겼다.

지름길은 한적했다. 고개를 수굿하고 스적스적 걷느라니 따스한 볕이 목덜미에 와닿고 설렁설렁 불어오는 바다바람이 달아올랐던 몸을 시원히 어루만졌다. 했으나 늘 소란스런 전화와 다몰리는 일감에 습관된 그는 조용하고 노그라지는것 같은 지름길이 오히려 피로감을 주는것 같았다. 합숙널문은 활짝 열려있었다.

석비레를 깔아놓은 반반한 뜨락을 지나 퇴지에 올라서려던 그는 무춤 서버렸다. 꽃밭앞에서 리숙의 딸 선화가 발끝걸음으로 살근살근 무엇을 따라가고있는것이 눈에 띄웠던것이다. 그의 앞에 빨간 고추잠자리 한마리가 요리저리 자리를 옮겨앉고있었다. 고사리같은 연연한 두손을 앙징스레 펴고 맨발벗은 두발을 살짝살짝 옮겨가는 선화의 모습이 여간만 귀엽고 깜찍해보이지 않았다.

순간 그는 선화의 그 오목할사한 까만눈으로 하여 온몸에 전률을 느꼈던 한달전의 일이 떠올랐다. 가슴속의 깊은 상처까지 헤집어놓던 그 인상적인 충격은 선화가 리숙의 딸이라는것을 알게 되자 부끄러움으로 변하고말았었다. 그런데 청신한 한송이 꽃망울마냥 다시 나타난 어린것의 목가적인 모습을 보니 마음이 이상스레 따스해졌다. 따스하게 젖어드는 야릇한 그 감정은 세차게 기울어지는 마음속 동요를 다잡을수 없어 사람들의 눈길을 피해 허든허든 달려온 그여서 배가의 반작용을 일으키는것 같았다. 어린것을 골려주기라도 하듯 요리조리 날아예던 고추잠자리는 그 어떤 위험을 느꼈는지 꽃밭우를 한바퀴 맴돌더니 담장을 넘어 사라지고말았다. 몇발자국 빠르르 옮기던 선화는 널담장이 막아서자 두발을 동동 굴렀다.

방하철은 선화도 잠자리처럼 어디론가 달아날것만 같아 한쪽에 나딩구는 그의 운동화를 집어들고 나직이 불렀다.

《선화야-》

《지배인아저씨 안녕하세요?》

선화는 방하철을 알아보자 방싯 하고 미소를 그렸다.

《이 신발을 신어라. 그러다 발 상하겠다.》

방하철은 선화의 곁으로 다가가서 무릎을 꺾으며 그의 발앞에 신발을 놓아주었다. 선화는 신발을 신을 생각보다 다시금 담장우를 바라보며 아수해했다.

《고놈의 잠자리 놓치고말았네.》

《너무 섭섭해말어라. 내 이담에 그런 잠자리 많이 잡아다주겠다.》

《아저씨가 언제 그럴 시간 있어요?》

《시간이야 낼탓이지. 그런데 너 왜 우리 집에 놀러오지 않니?》

한달전에 인상적인 충격을 받은후 은근히 마음속에 기다려지군 하던 선화다.

《내가 여기 놀러다니면 되나요. 방해나 되지요. 지배인아저씬 한초한초를 쪼개쓰시는 바쁜분이래요. 아저씨, 전 오후반이 돼서 이젠 집에 가겠어요.》

선화는 뜰밖을 할깃 넘겨다보며 신발을 신었다. 아마 어머니가 보면 꾸중이라도 들을것 같아 그런가보다.

《아직 시간이 많구나. 여기서 밥을 먹구 학교두 내 차를 타구 가도록 하자. 그게 좋지?》

어머니한테 늘 엄격한 타이름만 받아오던 그는 뜻밖의 친절에 어리둥절해진것 같다.

까만 오목눈에 의혹을 담고 방하철을 빤드름히 올려다보던 선화의 고개가 옆으로 살랑살랑 흔들리더니 《아니예요. 난 집에 가야해요.》하고 허리를 갑신 숙이더니 널문밖으로 뽀르르 달아났다. 미처 붙들사이도 없었다. 선화의 상큼한 목에서 나풀대던 빨간 넥타이가 순식간에 골목으로 사라졌다. 생기를 쑥 뽑아가지고 달아난것 같아 우두커니 서있던 방하철은 인기척을 느끼고 몸을 돌렸다.

푸성귀를 가득 담은 싸리바구니를 머리에 인 리숙이가 담장을 에돌아왔다.

무심히 뜰안에 들어서던 그는 방하철을 띠여보자 얼른 바구니를 내리우며 고개를 약간 숙여보였다.

리숙의 갸름한 볼은 발깃하게 상기되였고 하얀 옥당목적삼의 등어깨는 땀에 차분히 젖어있었다.

《바구니것이 산채가 아닙니까?》

방하철이 한발 다가서며 바구니를 넘겨다보았다.

《그렇습니다. 삼봉산골짜기에 이런 고사리, 참나물, 삽지취들이 한창입니다.》

《아, 철기가 벌써 그렇게 됐던가. 그럼 요즘 먹군 하는 산채가 거기서 뜯어온거요?》

삼봉산은 지름길로도 30리가 넘는곳이였다.

《그전부터 늘 다닌 길이여서 이제는 대문밖같아요. 그런데 어쩌나, 식사가 미처…》

리숙은 목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훔치며 황황히 부엌으로 들어갔다.

《천천히 합시다. 오늘은 시간도 있고 해서 우정 점심전에 들어왔습니다.》

불쑥 튀여나간 거짓말에 그는 반사적으로 부엌쪽에 눈길을 보냈다. 벌써 안에서는 쌀을 안치고 그릇들을 가시는지 딸가닥 소리가 날뿐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다른때 같으면 자신도 모르게 새여나간 그 말에 화가 버럭 났겠으나 오늘은 자연스럽고 적중한것처럼 느껴지는것이 이상했다.

방하철은 뒤짐을 진채 뜨락안을 천천히 거닐었다. 바다물에 씻겨 하얗고 동글동글한 차돌로 수를 놓듯 가생이를 돌린 꽃밭앞에 이른 그는 진하게 풍겨나는 향기를 깊숙이 들이켰다.

방금 물기를 받은 이파리와 꽃잎들은 하나처럼 생기를 뿜는데 정오의 따가운 볕이 그우에 아지랑이를 피워올리며 쟁글쟁글 뛰논다. 그중에서도 가운데 우뚝 솟아 싱싱한 이파리를 너풀대며 불길처럼 이글거리는 홍초는 장쾌한 맛을 주었다. 향기가 진동하고 각양각색의 꽃들이 만발한 화단우로 수많은 꿀벌들이 앵앵거리며 분주히 넘나드는데 이글거리는 불길처럼 보여서 그런지 홍초에는 감히 다가붙을념을 못했다. 저런 미물들도 꽃을 가려볼줄 아누나 하고 동심같은 생각을 하며 꽃밭을 유심히 살펴나가던 그는 끝내 홍초뒤에 숨어있는 백리향을 찾아내고야말았다.

(이런 키작은 꽃나무야 앞에 심어야 조화가 맞지. 그 철없는 선화가 속으로 원망을 많이 했겠지.)

방하철은 마치 선화의 모습이 무시당하는것 같아 너풀대는 커다란 홍초잎을 뚝뚝 따주었다. 리숙이한테 미리 귀띔해주지 못한것이 후회되였다. 꽃밭에서 눈길을 돌린 방하철은 뜨락의 구석구석을 살펴나갔다. 섬세하고 알뜰한 손길이 미치지 않은곳이 없다. 이른아침 나갔다가 늦게 들어오군 하여 꽃밭이며 집둘레를 언제한번 살펴볼 경황이 없던 그는 아늑하고 정갈함에 심취되여 전혀 생소한 집에 들어선것만 같았다.

《지배인동지, 식사가 준비되였습니다.》

은근하고 부드러운 리숙의 목소리가 등뒤에서 울렸다.

《그렇게 빨리 됐는가요?》

《뭐 별로 차리는게 없어서…》

리숙은 반듯한 이마에 송골송골 내돋은 땀을 손등으로 살짝 찍어내며 귀밑머리를 쓸어올렸다.

《좀전에 딸애가 왔댔습니다.》

부엌으로 다시 들어서려던 리숙은 하얀 앞치마에 두손을 문대며 송구스러워 했다.

《집에 어려운 사람없이 커놔서 눈에 거슬리는게 많을겁니다. 지배인동지가 잘 타일러주십시오.》

《애가 참 귀엽고 똑똑합니다. 생각하는 품이 어른스러워 그게 탈이지만.》

《…》

《너무 단속하지 말구 여기 와서 맘대루 놀라구 하시오.》

《고맙습니다.》

고개를 약간 숙여보인 리숙은 얼른 부엌안으로 몸을 숨겼다. 뜻밖의 친절에 눈굽이 화끈했던것이다. 언젠가 커피를 부탁받았다가 말없는 봉변을 당한 후 처음으로 말을 건네본 리숙이였다. 그처럼 엄하고 뚝한 지배인이 딸애에 관심있다는것이 믿어지질 않았다.

아궁앞에 쪼그리고 앉은 리숙은 마른 섶에 불달리듯 자꾸만 심란해지는 마음을 진정할수가 없었다. 아버지의 얼굴도 모르고 자라난 딸애가 측은했고 혈붙이 하나없는 외로운 자기 처지 또한 딸애 못지 않게 가긍하게만 생각되였다.

불현듯 갈마드는 청승맞은 생각을 털어버리듯 그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러나 막혔던 보물이 틈새기라도 만난듯 자꾸만 터져나오려고 출렁거렸다.

이날이때까지 참기 어려운 유혹과 절절한 권고도 마다하고 옹친 마음으로 살아온 내가 왜 이 모양이람. 지배인의 그 한두마디가 뭐길래 숙맥처럼 속이 흔들거려 옴짝 못할가. 자신에 대한 반발이 크면클수록 심란하게 휘저어대던 그것은 마침 눈굽을 뜨겁게 지져대기 시작했다. (나이탓일가? 세월탓일가?…)

리숙은 식사를 끝낸 방하철이 언제 공장에 나갔는지 그리고 설렁설렁 끓던 솥안의 물이 바싹 말라드는줄도 모르고 아궁앞에서 움직일줄 몰랐다.

하얀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맑은것이 보드라운 손등우에 방울방울 소리없이 떨어졌다. 그는 걷잡을수 없이 솟구쳐오르는 설음을 더는 누르려하지 않았다.

오랜만에 맛보는 설음이였다. 눈물도 마음놓고 흘려볼사이 없이 흘러가버린 세월이였다.

이윽하여 아궁앞에서 일어선 그의 크고 사려깊은 두눈은 예전과 다름없이 초불처럼 고요히 빛나고있었다. 그 어떤 의지의 힘으로 막을수도 누를수도 없는 설음과 어혈진 마음을 때로는 눈물만이 부드럽게 정화시킬수 있는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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