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석근수는 중낮무렵에 목적지인 길주역을 가까이하고있었다.
다몰렸던 피곤탓인지 나이탓인지 그 장쾌한 맛을 준다는 동해의 해돋이도 볼수 없었고 파도가 은빛모래불을 쉼없이 내리쓸고 올리쓰는 해변가의 굴곡들이 언제 지나가는지도 모르고 고개방아만 찧었다.
갑자기 왁작 떠드는 소리에 정신을 버쩍 차리니 차창에 몸을 허리까지 내놓은 손님들이 솥뚜껑같은 꽃게들을 가득 실은 이동판매차를 손저어 부르고있었다. 석근수는 선반에 올려놓았던 배낭을 끌어당겨 어깨에 걸치고 개찰구로 걱신걱신 걸어나갔다.
발길은 어느새 역식당을 향했다. 따끈한것을 고이지 않고는 허기져 지탱해낼것 같지 않았다. 정문밖까지 따라나오며 걱정을 놓지 못하던 금희가 떠올랐다.
《할아버지, 무엇을 드릴가요?》
(할아버지라구?) 석근수는 부지중 심사가 꼬였다. 거칠게 눈을 들어보니 중학을 갓 나온 애어린 접대원처녀가 방싯 미소를 그린다.
《할아버진 먼길을 오신것 같은데 따끈한 국밥을 가져올가요? 우리 식당엔 밀가루빵두 있고 록두지짐도 한답니다.》
볼우물을 옴폭 파며 해실거리는 처녀를 보니 중학에 다니는 맏손녀 생각이 나며 괜히 심통을 부렸다고 후회했다.
《술은 없냐?》
《있어요.》
《좀 높은걸루 한 고뿌만, 다른건 내게 다 있다.》
접대원처녀는 고개를 까딱해보이고 날새처럼 사뿐 사라진다. 일에 한창 재미를 붙인것 같았다.
석근수는 배낭아구리를 열고 로친네가 다심히 잔소리를 하며 싸준 종이꾸레미를 주섬주섬 헤쳤다.
그로부터 얼마후 배낭을 어깨에 걸친 그는 먼지가 폴싹폴싹 일어나는 좁은 읍거리를 터벅터벅 걸었다. 밸굽까지 쩌르르 녹아흐르던 술이 점점 기운을 뻗쳐 숨쉬기가 가빴다.
공장은 역에서 초간히 떨어진 한참길이였다. 팔프공장 부지배인실에 들어섰을 때 벌겋게 상혈된 그의 이마엔 한두줄기의 땀발이 서기까지 했다.
책상을 서너개 맞붙여놓은 사무실안에는 서른살안팎의 젊은이가 혼자 있었다. 버쩍 올리춘 상고머리며 날이 선 코등과 살폭이 없어 칼칼해보이는 그 젊은이는 방안에 들어서는 석근수를 본체도 안하고 책상우에 무드기 쌓아놓은 전표같은 쪽지를 부지런히 세여넘기고있었다. 배낭을 의자밑에 밀어넣은 석근수는 청년이 일손을 놓기만 기다렸다.
《아바이는 왜 또 왔습니까? 닷새동안 발길도 돌리지 말라구 직장마다 통보해줬는데.》
젊은이는 피끗 눈길을 들었다놓으며 또다시 한웅큼의 전표뭉치를 손에 든다.
《난 사람을 만나보러 왔수다.》
젊은이는 그때야 석근수의 아래우를 재빨리 훑어보다가 먼지가 뽀얗게 오른 로동화에 눈길을 멈췄다.
《누구를 만나시려오?》
《여기 흥수비료에서 온 연구사가 있지요?》
《도대체 아바이는 어디서 오셨소?》
《난 흥수에서 왔소. 그 연구사선생이 약속된 날자에 오지 않아서 찾아왔소.》
《난 여기 판매지도원인데 그런 사람 없습니다.》
《무슨 소릴 하슈. 어제 연구사와 전화련결까지 있었는데. 어디 한번 알아보슈.》
그러자 판매지도원의 눈이 대번에 세모졌다. 그 어떤 직위의 출장원이나 자기앞에선 곰상곰상하기 십상인데 오히려 제편에서 사람을 찾아내라니 어이없는 모양이다.
《여기가 뭐 아바이네 아래목인줄 아오. 판매지도원 3년에 첨 보는 아바이군, 허참.》
《자네 일본새를 보니 그 전표딱지를 가지구 숱한 사람들을 롱락했겠군. 그러면 못써. 그 전표는 국가물자를 공정하게 팔라고 만든 공급증표지 세도를 쓰라는 관료딱지가 아니란 말일세.》
《?!…》
판매지도원은 세모졌던 눈이 올롱해지더니 책상우의 전표를 빼람안에 마구 쓸어넣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엇을 달라고 왔다면 으르딱해보겠는데 그렇지 않으니 할 소리가 없었다. 그런데다 쇠소리나는 목소리며 우묵한 눈확에서 섬광이 번뜩이는 찌르는듯 한 눈길을 보자 자리를 피하는것이 말썽없을것 같았다.
《젊은이, 좀 앉게. 한가지 더 물을게 있네. 여기 나이는 쉰댓쯤 나구 키가 후릿한 부지배인이 있지?》
《난 아무것두 모른다고 하지 않소. 오늘 정말 별난 늙은이와 맞다들렸군-》
판매지도원은 신경질적으로 사무실문을 와락 밀어제끼더니 씽-바람을 일쿠며 꽁무니를 뺐다. 석근수는 너무 어이없어 쓰겁게 입맛을 다시며 앞에 놓인 의자에 털석 주저앉았다. 모름지기 한대식연구사도 저 상고머리녀석한테 숱한 구박을 당했을것이다. 아직도 왜 저런 몰상식한 녀석한테 국가물자를 맡겨두고있는지 부지배인을 만나면 단단히 추궁하리라 다짐했다.
전화종소리가 끊임없이 울리고 출입문이 풀때기마냥 닫길새 없는데 방주인이 없는지라 들어오는 사람은 없었다.
잡친 기분이 좀 가라앉자 방에서 나온 석근수는 문설주에 써붙인 간판을 기웃거리며 복도에서 서성거렸다. 이때 문서를 한아름 안고 지나치던 통토무레한 중년의 녀인이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어느 방을 찾으세요?》
녀인의 목소리는 무척 상냥하고 친절했다.
《나이는 쉰살쯤 되구 키가 후릿한 부지배인이 있지요. 갑자기 이름이 떠오르지 않아서 그럽니다.》
《녜, 량부위원장동지 말이군요.》
《네네, 량가라고 했습니다. 한 5년전에 우리 공장에 왔던 일이 있습니다. 그분을 좀 만나자고 그러오.》
《이 일을 어쩌나. 그분은 재작년부터 공장을 그만두었습니다. 전쟁때 입었던 상처가 도져서…》
《그렇다?!…》
석근수는 그 어떤 탕개가 끊어지는것 같아 다리맥이 매시시했다. 녀인은 그것이 자기의 잘못처럼 자리를 뜨지 못하고 송구스런 낯으로 주춤거렸다.
《보매 외지에서 오신것 같은데 어떻게 도와드릴가요?》
《고맙수다.》
석근수는 이처럼 맘씨 고운 녀인두 있구나 하고 생각하며 그와 헤여져 복도를 걸어나오다가 미심결에 한대식연구사에 대한 행처를 물었다.
《전 잘 모르겠는데 저쪽 복도에 앉아 잠간 기다리세요. 제가 알아보겠습니다.》
녀인은 석근수를 도와줄수 있는 일감이 생긴것이 그리도 좋은지 반달음치듯 복도굽이로 사라졌다. 그렇게 서둘러 사라진 녀인은 한참후에야 다시 나타났는데 실망한 얼굴이였다.
《지령실과 외래자합숙에랑 전화로 알아보았는데 그 연구사선생은 벌써 이틀전에 자기 공장으로 돌아갔답니다.》
《모를 소린데요. 어제 아침에 연구사와 직접 전화까지 했는데.》
《그러세요?! 분명 외래자합숙에단 인사까지 하고 떠났다는데요. 그런데 아바인 누구세요?》
《그 연구사와 함께 일하는 사람이웨다. 기다리다 못해 급한 일이 제기되여 찾아왔지요.》
《이 일을 어쩌나.》
《그 연구사는 분명 이 공장안에 있을거웨다. 하여튼 이렇게 애써주어 고맙쉐다.》
석근수가 돌아서 나오려는데 그자리에 굳어진듯 서있던 녀인이 다급히 불러세웠다.
《아바이, 연구사가 공장안에 있으면 제가 반드시 찾아낼수 있습니다. 전 여기 기요실 기요원이예요. 근심말고 어서 외래자합숙에 가서 푹 쉬세요. 찾으면 인차 기별해드리겠어요.》
녀인의 성의는 더없이 고마왔으나 외래자합숙에 가서 편안히 행장을 풀고 기다릴수 없었다. 공장안의 신경이라 할수 있는 지령실과 외래자합숙에서 떠나갔다고 하니 도무지 가늠이 안갔다. 그런데 어제 아침엔 어떻게 되여 전화가 련결되였는지, 문득 세시간만에 겨우 전화를 걸었다고 하던 라석호의 말이 떠올랐다. 세시간이라?… 요즘치고 세시간만에 시외전화를 했다면 그닥 오래걸렸다고 할수 없다. 그렇다면 그는 분명 공장구내에 있는것이다. 석근수는 점결제와 련관된 부문을 하나하나 튕겨보았으나 팔프생산공정을 잘 모르니 표상이 안갔다. 순간 섬광처럼 피뜩 떠오르는것이 있었다. 아, 내가 왜 교환대에 가볼 생각을 못했을고…
허겁지겁 공장 전화교환소로 달려간 그는 《출입금지》라고 패쪽을 써붙인 묵직한 문을 무작정 열어제꼈다. 쌍태머리우에 머리수화기를 눌러쓰고 부지런히 코드를 놀리고있던 얼굴 갸름한 처녀가 화달짝 놀라며 엉거주춤 일어났다.
영문을 알게 된 교환수처녀는 《아바이, 한시간에 가입자가 몇백명이나 되는지 아세요. 호호…》하고 허리를 꼬며 까르르 웃었다.
더는 행방을 정할수 없게 된 그는 길가에 나와 분잡스레 오고가는 사람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한대식연구사의 행처만 알수 있다면 그 어떤 푸대접과 망신도 마다하지 않겠는데 발길 돌릴만 한 곳이 없으니 안타까왔다.
그러는새 점심때가 퍽 기울어 허리가 꼬부라들었다. 늙어서 그런지 일단 배가 허룩해지면 팔다리 놓을 힘도 없어졌다. 그렇다고 식당에 기신기신 찾아들어가기도 뭣했다. 그는 허리띠를 한돌기 더 옹쳐맨 후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어 팔프후처리직장으로 향했다.
풀숲에 떨어진 바늘찾는격이라 점결제의 첫 생산공정부터 출하장과 창고에 이르기까지 련관부문을 샅샅이 뒤져볼 심산이였다.
이날 그는 계획했던 절반공정도 돌아보지 못한채 합숙문턱을 겨우 넘어서자 다다미바닥에 곤드라지고말았다.
다음날은 이른 아침부터 직장과 작업반을 빠짐없이 훑어나갔다. 허리가 지긋지긋하고 몸이 천근처럼 무거웠으나 불쑥불쑥 불길한 예감이 들어 더욱 서두르게 되였다. 어느덧 해가 서산마루에 걸릴무렵 석근수는 아무런 소득도 보지 못한채 지친 다리를 끌고 구내길을 걷고있었다.
증기를 뽑아대는 구내기관차의 아츠런 기적과 종이퉁구리와 통나무를 무너지게 처실은 화물차들, 하얀 표백분가루를 흩날리며 내닫는 지게차들로 구내길은 몹시 붐비고있었다.
어디선가 《아바이-》하고 부르는 귀에 익은듯 한 목소리가 소란스런 잡음을 타고 들려오는것 같았다. 무심중 걸음을 멈춘 그는 사위를 살펴봤으나 자기를 부를만 한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그가 다시 발길을 떼려는데 《아바이, 여기예요. 여기-》하고 보다 큰소리가 재차 날아왔다. 피끗 눈길을 돌리니 종이퉁구리를 산더미처럼 올리쌓은 《지쓰》화물차 한대가 먼지를 일쿠며 질주하는데 웬 사람이 그우에서 손을 흔들고있었다.
《지쓰》는 얼마쯤 가더니 《삑-》소리를 내며 급정거했다. 그와 동시에 종이퉁구리우에 앉아있던 사람이 떨어지듯 아래로 내려왔다. 누군가하여 그쪽으로 슬근슬근 다가가던 석근수는 껑충껑충 다가오는 사람을 알아보았을 때 그만 입을 떡 벌리고말았다.
수염이 더부룩하고 얼굴이며 온몸에 까맣게 먼지를 뒤집어쓴 허우대 큰 사나이는 그처럼 찾아헤매던 한대식연구사였다. 기름때가 반질반질한 모자며 앞단추가 두개밖에 남지 않은 노닥노닥한 작업복, 가는 철선으로 호아맨 창떨어진 구두…
《아바이가 맞구만요. 비슷하다 하면서두… 그런데 어떻게 된 일입니까?》
한대식은 몇십년이나 떨어졌던 친아버지를 만난듯 석근수의 두손을 덥석 그러잡고 반가와 어쩔줄 모른다. 석근수는 눈굽이 화끈 달아올라 얼른 대답을 못하고 피딱지가 말라붙은 한대식의 험한 손등만 쓸어만졌다.
《여, 〈흥수〉, 자네 정신나간게 아니야. 여길 보라구-》
《지쓰》운전칸 문을 열어제낀 중년의 사나이가 버럭 고함을 쳤다. 좁은 구내길에 《지쓰》가 길을 막아놓으니 그뒤로 지게차며 화물차들이 들이닥쳐 연방 경적을 울리고있었다.
한대식은 더 말할사이 없이 석근수의 배낭을 받아 한쪽 어깨에 걸치고 차있는곳으로 달려갔다.
《여보 〈신의주〉, 우리 아바이를 운전칸에 좀 태워주게.》
운전칸앞에 이른 한대식이 방금 《흥수》라고 소리친 중년의 사나이에게 부탁했다. 중년의 사나이는 석근수쪽에 고개를 끄떡해보이더니 제법 훈시조로 말했다.
《거 보라구. 자네처럼 얼뜬해가지군 공장사람들까지 고생시켜. 아바이, 어서 여기로 올라오십시오.》
《난 적재함우에 타겠소.》
석근수는 그 말투가 귀에 거슬려 운전칸문을 후려닫았다.
《아바이, 적재함은 위험합니다.》
한대식이 부디 만류했으나 석근수는 부진부진 종이퉁구리우로 기여올랐다.
어찌나 높이 쌓았는지 내려다보니 어찔어찔했다.
차는 곧 떠났다. 한대식은 안심찮은지 석근수의 두무릎을 꽉 붙든채 놓지를 못했다. 석근수는 애써 찾던 연구사였으나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종잡을수 없었다. 연구사가 어떻게 되여 이런 처참한 몰골의 상하차공이 됐는지 그리고 출장원들이 흔히 이름대신 지대명으로 부르군 하는 《흥수》라는 대명사가 붙었는지 가늠할수가 없었다. 그들은 《지쓰》가 공장구내를 벗어나 한동안 달릴 때까지 말들이 없었다.
한대식은 석근수를 보는 순간부터 속이 바질거렸으나 그가 침울한 기색이니 선뜻 입을 열지 못하고있었다.
《아바이, 발생로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습니까?》
한대식이 참지 못하고 끝내 먼저 물었다.
《일은 무슨 일이 있겠소. 약속된 날자에 오지 않으니 떠났지.》
《그렇습니까? 저두 하루가 십년맞잡입니다. 그러나 이젠 됐습니다. 래일저녁이면 돌아갈것 같습니다.》
한대식은 발생로가 무사하다는 말을 듣자 대번에 들뜬 기분이였다. 생각과는 다르게 한대식의 밝은 얼굴을 보자 석근수는 다소 시름이 놓이는것 같다.
《연구사선생은 어쩌다가 이런 몰골이 됐소?》
《몰골이야 아무러면 뭐랍니까. 점결제만 더 해결할수 있다면 전 빤쯔라도 입고 나서겠습니다. 말하자면 운전칸에 탄 〈신의주〉친구와 품팔이하는 격이 됐지요.》
한대식은 여전히 흔연한 기색이다. 아마 석근수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으려는것 같다.
《품팔이한다구요?》
《수송기재가 있어야 점결제를 역에 실어내갈게 아닙니까. 사실은 이 품팔이계약두 이틀만에야 겨우 성사됐습니다.》
한대식이 무심중 왼쪽 손목에 눈길이 갔다. 그러나 손목시계가 있을리 없다.
《아니 이 공장엔 자동차 하나 해결해줄 그런 일군이 없다던가. 여긴 천리마정신이 없대?》
석근수가 노성을 터뜨렸다. 이처럼 노해서 큰소리치는걸 처음본 한대식은 괜한 말을 했다고 후회했다. 석근수는 더운 숨을 내쉬며 개가죽담배쌈지를 꺼내다가 종이퉁구리가 눈에 띄우는지 다시 쿡 쑤셔넣는다.
《아바이 진정하십시오. 그럴만 한 까닭이 있었습니다.》
한대식은 석근수가 너무 분해하는것 같아 할수없이 여기와서 겪은 일을 들려주는수밖에 없었다. 기분 나쁜 일들이여서 누구한테도 말하지 않으려고 작정했던 그였다.
닷새전 여기에 도착한 한대식은 첫걸음부터 일이 꼬인다는것을 느꼈다. 그전에는 별로 수요가 적던 팔프페액이 흉년에 쌀 금세오르듯 껑충 뛰여올랐다.
각곳에 지방공장들이 일떠서고 화학공업이 한계단 뛰여오르자 팔프페액의 용도와 리용분야가 급격히 늘어났던것이다. 광산과 세멘트공장, 식료공장들에서 요긴한 자재로 되였다. 이렇게 되자 생산되는 족족 지령실 생산일지에 등록되고 판매과의 저울추에 따라 할당되였다.
한두번 가져다 쓰면서 낯을 익힌 직장장을 찾아갔을 때 형편은 이러했다.
직장장은 무척 딱해하며 자기가 전화를 걸어주겠으니 판매과에 가보라고 미안해했다. 십분 리해되는 일이였다.
그가 판매과에 찾아갔을 때 상고머리의 젊은 판매지도원이 마침 직장장한테서 오는 전화를 받고있었다.
《직장장동지, 그런 식으로 내리먹이면 곤난합니다. 계획에 있는것두 보장하지 못해 추궁을 받고있는데 시험용이 다 뭡니까. 사정한다구요… 사정할게 따로있지 국가물자를 그렇게 허투루 줄수 없습니다. 글쎄 직장장동지가 여기 직접 와도 달리는 될수 없을겁니다. 그건 맘대로 하시오.》
한대식은 눈섭하나 까딱안하고 야멸차게 전화를 받는 상고머리와 마주서고 싶지 않았으나 한가닥 기대를 걸며 직장장이 써준 쪽지를 꺼내보였다.
먼눈으로 쪽지를 띠여본 상고머리는 받을 생각도 않고 큰소리부터 쳤다.
《동문 도대체 누구길래 쪽지를 들고다니며 우리 공장질서를 파괴하는거요.
그래 좀 압시다. 직장장과 어떤 사이요?》
어처구니 없었다. 생면부지의 손님앞에 이런 무례한 인간이 어디 있는가. 한대식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한걸음 다가섰다.
《지도원동무, 사정이 급해서 그럽니다. 그전에두 여기서 불편없이 보장해줘서 잘해왔는데 도중에 짜르면 로가 죽습니다.》
《그전에두 여기서 가져갔다구요?》
《예. 직장장동무가 적극 보장해줬습니다.》
《몇번이나 가져갔습니까. 그 량은 얼마구요?》
한대식은 뒤를 캐는것 같아 신경이 곤두섰다.
《그러지 말구 좀 주시오. 꼭 필요해서 그러오.》
《필요없이 가져가는 사람이 어디 있겠소. 페액금새가 얼마나 올라갔는지 알기나 하오. 동무 이름이 뭐요? 어디 좀 알아봅시다.》
한대식은 돌아서고 말았다. 그냥 마주서있으면 큰소리가 나가든가 무슨 일을 저지를것 같았다.
《동무 서시오. 직장장과 짜고들어 뒤구멍으로 빼낸걸 변상하란말이요.》
상고머리가 붙잡을듯 한손을 쳐들며 따라나왔다.
한대식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채 그길로 지배인을 찾아갔다. 50전후의 체소한 지배인은 한대식의 이야기를 듣더니 미안하게 됐다며 량해부터 구했다. 퍼그나 사리에 밝은 일군 같았다.
《그런 일이야 계획에 없다해두 우리가 보장해드려야지요. 그런데 한가지 리해할수 없는 일이 있군요. 시험자재를 연구사선생이 직접 가지러 다녀야 합니까?》
《이쪽으로 출장올 일이 생겨서 겸사겸사…》
본의아닌 거짓말을 하자니 낯이 화끈했다.
《하여튼 일이 잘 안된것 같습니다. 그런 연구자재는 계통적으로 받는 체계를 세워야 합니다. 구걸하는 식으로 연구사업을 할수가 없지요. 내가 직접 성생산국하구 토론해보겠으니 합숙에 가서 기다려주십시오.》
한대식은 문밖까지 따라나오는 지배인에게 거듭 사의를 표하고 외래자합숙으로 갔다. 그런데 인차 소식을 알리겠다던것이 저녁때가 되도록 잠잠했다. 안절부절하던 그가 더는 앉아기다릴수 없어 합숙을 나서려는 때다. 관리원아주머니가 전화가 왔다고 알려왔다. 그는 계단을 두세개씩 건너뛰며 접수실로 달려갔다. 전화는 기다리던 지배인한테서 왔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오. 그런데 좋은 소식이 못되오. 성생산국하구 토론이 있었는데 시험자재를 줄수 없게 됐소.》
《왜 안된답니까?》
《글쎄 그쯤 알아두오. 내 아니할 참견같지만 한마디 해도 괜찮겠소?》
《네… 어서 하십시오.》
《그만둡시다. 그닥 좋은 소리가 못되오. 하여튼… 그럼 잘 다녀가시오.》
한대식은 송수화기를 든채 그대로 얼어붙고말았다. 온몸이 그대로 땅속에 잦아드는것 같았다. 까딱 움직이지 않은채 돌미륵처럼 굳어져있자 관리원녀인이 발끝걸음으로 다가와 겁먹은 눈길로 살펴본다.
그는 얼마후에야 접수실에서 천천히 나왔다. 짐작할수 있는 일이였다. 그처럼 상냥하고 리해성있던 지배인이 하루낮사이에 돌변한것은 분명 성에서 어떤 침을 맞은것 같았다. 한쪽 송사만 듣고 외면해버리는 지배인이 야속했으나 그를 찾아가 설복하고싶지는 않았다. 그럴 용기도 없었거니와 그렇다고 사태가 달라질수도 없는것이다.
밖으로 나오니 그믐밤이라 한치 앞도 안보였다. 망연한 눈길로 캄캄한 밤하늘을 바라보느라니 이름할수 없는 허무감만이 그들먹이 고여올랐다. 그는 소리없이 내리는 밤이슬을 맞으며 합숙마당둘레를 자꾸만 돌았다. 이제는 사정이나 호소해볼데가 없었다. 그렇다고 빈손으로 돌아갈수도 없었다.
그냥 간다는것은 로의 운명이 끝장난다는것을 의미하며 초지의 뜻이 꺾인다는것을 말해준다. 궁리에 궁리를 거듭하던 그는 번쩍 떠오르는것이 있어서 합숙에 들어가 작업복을 갈아입고 페액종합저장고로 향했다.
밤이 어지간히 깊은지라 페액탕크두리엔 사람그림자하나 볼수가 없었다. 맞춤한 기회였다. 탕크문을 열어제낀 그는 주저없이 몸을 들이밀었다. 화끈한 열기와 코와 눈을 찌르는 가스로 하여 숨을 제대로 내쉴수가 없었다. 그는 두눈을 꾹 감고 탕크밑바닥과 벽을 손더듬해나갔다. 껍진껍진한것이 손과 발에 묻었다. 당장 환성이 터져나올듯 기뻤다. 그러나 오래 있을순 없었다. 가슴이 터져오는것 같았다. 그는 물속에서 솟구쳐나오듯 탕크문으로 머리를 솟구며 《푸-》하고 막혔던 숨을 내뿜었다. 탕크안을 정찰해낸 그는 숨을 돌린후 바께쯔를 들고 들어가 긁어뫃기 시작했다. 이렇게 여러번 반복하니 그것도 괜찮은 수확이였다. 한바께쯔 두바께쯔 늘어나는 점결제를 보니 성수가 나고 힘든줄을 몰랐다. 벌써 이렇게 자체로 해결했더라면 상고머리녀석한테 그런 구역질나는 모욕을 받지 않았을것이라는 후회까지 났다.
다음날 아침 어떻게 알았는지 한대식이 빈 탕크안에 들어가 팔프페액을 긁어모았다는 소문이 짜하게 퍼지자 여기에 크게 감동된 자재인수원들이 얼마량씩 떼여 그에게 넘겨주었다.…
《지쓰》는 세차게 들추며 내달렸다. 흔들리는 차에 몸을 맡긴채 한대식의 말을 듣고있는 석근수의 두툼한 입귀가 자주 씰룩거렸다. 한대식이 당한 참기 어려울 정도의 모욕과 고생한 소리가 나올 때마다 신경이 돋아나고 가슴이 활랑거렸다.
석근수는 철선으로 호아맨 창떨어진 그의 구두와 터슬터슬해진 바지아래도리를 두손으로 쓸어만지며 갈린 소리로 말했다.
《이꼴이 되도록 애를 썼겠으니… 상고머리판매지도원녀석이 그런 상스런 모욕까지 했다니 정말 참기 바쁘웨다.》
당장 달려갈듯 공장쪽을 쏘아보는 석근수의 우묵한 눈은 날카롭게 번뜩였고 숨결은 듣기 거북할 정도로 거칠어졌다.
《연구사선생, 그러니까 이 화물차〈계약〉두 그런 구박을 받으며 맺었겠수다?》
《막부득이한 판인데 이것저것 가릴 형편이 됩니까. 꿩잡는게 매라구 어쨌든 점결제를 가져가구 볼판이죠뭐.》
한대식은 큰소리로 우선우선 말하며 벙긋이 웃었다.
《아바이, 너무 노엽게 생각지 마십시오. 저도 처음엔 상고머리지도원한테 터무니 없는 모욕을 받은것 같아 밸이 불끈 합디다. 하지만 시간이 좀 지나니까 그 청년이 책임성만은 높아보이더란 말입니다. 전 그날 비록 점결제는 받지 못했으나 기분은 자못 유쾌했습니다. 왜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 흔하던 점결제가 상고머리청년이 말하듯 쉽게 가져갈수 없는 귀중한 원료로 됐다니 나라의 화학공업이 그리고 우리의 과학이 그만큼 발전하고 폭이 깊어졌다는것을 말해주는 뚜렷한 증거였습니다. 정말 힘이 솟더군요. 그래서 나는 그날 저녁 페액탕크속에도 기꺼운 맘으로 들어갔고 이제 공장에 들어가면 팔프페액을 대신할수 있는 대용점결제를 꼭 만들어야 되겠다는 결심이 더욱 굳어졌습니다.》
석근수는 믿기 어려운 눈길로 환하게 웃는 한대식을 오래도록 주시했다. 그런 고생과 그런 모욕쯤은 하찮게 여기고 오직 나라의 공업과 과학발전에서 기쁨을 찾는 이 사람의 진정을 무엇이라 해야 할지… 한대식의 눈빛과 미소는 너무도 밝고 순결했다. 그는 이때야 비로소 걱정스러워 달려온 자기 석근수를 위안하기 위해 꾸며낸 말이 아님을 똑똑히 알수 있었다. 한대식의 미더운 모습을 보면 볼수록 이처럼 귀중한 연구사가 자재인수원취급을 당하는것이 마른 고추를 삼킨듯 쓰려났다. 그들은 《지쓰》가 갑자기 서는바람에 화제를 더 나누지 못했다.
차가 어느새 역화물선에 도착했던것이다.
운전칸에서 내린 《신의주》는 수화물취급소며 역장실로 들락날락하더니 《지쓰》를 곧장 빈 화물방통으로 갖다댄다. 역시 수완이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자, 번호가 척척 맞을 때 제꺽 옮겨실읍세.》
신바람이 난 그는 웃동을 벗어제끼며 화물방통에 힝하니 날아올랐다. 기중기도 없이 어떻게 옮겨싣나했는데 어느새 두대의 통나무를 들고 온 한대식이 그것을 《지쓰》적재함과 화물방통사이에 경사지게 가로건너놓는다. 종이퉁구리를 그우로 올리굴리자는것이다. 의외로 육중한 종이퉁구리가 경사진 원목우로 슬슬 잘 굴었다. 그런데 마지막 한m를 두고 딱 뻗친다. 셋은 발을 벋디디며 용을 썼다.
《여, 〈흥수-〉 좀 더 기운을 쓰게.》
했으나 한t이 넘는 퉁구리는 어디 힘내기를 해보자는듯 오히려 아래쪽으로 내리굴기 시작했다. 힘이 점점 진했던것이다. 바빠맞은 《신의주》가 날쌔게 지레대를 들이꽂으며 고아대기 시작했다.
《여, 〈흥수-〉 오늘은 왜 맥을 못춰. 체통값을 해야지, 어서-》
석근수가 듣다못해 단김을 헐썩거리며 그를 무섭게 힐책했다.
《여보게, 왜 그리 고아대는가. 이 선생이 누군질 알기나 하구 그렇게 채찍질인가?》
《지쓰》를 코에 걸고 제집 머슴처럼 부려먹는 《신의주》가 괘씸하기 그지 없었다. 그러는 석근수의 팔을 한대식이 슬쩍 당겼다.
《가만 계십시오. 발생로앞에서나 제가 연구사지 여기서는 〈흥수〉가 더 맥을 씁니다.》
《아무리 그렇기로서니 이건 너무하지 않나?》
《이것이 마지막 상차니 꾹 참읍시다.》
《거기선 뭘 수군대나. 퉁구리한테 깔려 편포맛을 보려고 그래?》
《알겠수다. 자 하나, 둘, 셋-》
한대식이 큰소리로 선소리를 먹이며 어깨에 부쩍 힘을 준다. 드디여 아래로 쏠리던 퉁구리가 천천히 올리굴기 시작했다.
《올라간다!-》
굴대를 타고 올라간 퉁구리가 방통안에 데굴데굴 굴러가자 《신의주》가 환성을 질렀다.
종이상차작업은 두시간나마 진행되였다. 작업이 끝났을 때 그들 셋은 땀으로 미역을 감았다.
《자네는 여기 남아 경비를 좀 서게. 난 공장에 들어가 한차분의 종이를 더 사업해야겠네. 이번 기회에 예비를 차고 가자구 그래.》
《알겠소. 어서 가보시오.》
석근수가 그의 앞을 막아나섰다.
《여보게, 자동차품값이 그렇게 비싼가. 이 세상에 없는 무연탄발생로연구사를 제집 머슴처럼 부려?》
《?!…》
뜻밖의 소리에 《신의주》는 얼떠름했다. 이때까지 흥수비료공장에서 온 자재인수원이라고 소개하기에 그런줄 알고있던 그다.
《당장 경비를 다른 사람 세우게. 눈이 달렸으면 하늘도 볼줄 알아야지.》
《아바이, 난 발생로가 뭔지 알고싶지두 않수다. 연구사가 아니라 박사라두 경비야 서야 될게 아닙니까. 내 딱한 사정두 있지 않습니까?》
《여보게 〈신의주〉, 맘 놓구 어서 가보게.》
한대식이 선선히 나오자 《신의주》는 멋적었던지 벙싯 웃더니 운전칸으로 달려가 웬 꾸레미 하나를 들고왔다.
《아바이, 죄송합니다. 우선 이걸루 요기나 하십시오.》
《허, 엉큼하기란…》
웃는 낯에 침 못뱉는다고 석근수는 어이없어 돌아서고말았다.
《지쓰》가 떠나자 역구내는 다시 조용해졌다. 드문드문 화토불이 보이는걸 봐서 자재를 싣고갈 인수원들이 여기저기 모여있는것 같다.
《아바이, 이젠 할 일도 없으니 여기서 푹 쉬십시오.》
멍석 반잎만 한 방습지를 종이퉁구리 사이에 깔아놓고 베고누울 목침같은 나무토막을 그우에 가져다놓은 한대식이 벙싯 웃으며 말했다. 사흘째나 이런 자리를 만들어놓고 경비를 서고있는 그였다.
석근수는 잠간사이에 그럴듯 한 잠자리를 만들어놓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배낭아구리를 열고 잘금잘금 싼 꾸레미들을 꺼내놓았다.
《이크, 이게 무슨 변이야…》
꾸레미를 펼쳐놓던 석근수가 골살을 찡그렸다. 집떠날 때 연구사한테 대접하라고 싸주기에 손댈념을 안했더니 시큼한 냄새가 났다. 아쉬운대로 버리는수밖에 없었다.
《그 아까운걸 왜 버리겠습니까. 아직 먹을만 한데요.》
지짐 한잎을 들어 맛을 보던 한대식이 펄쩍 뛰며 자기앞으로 끌어당겼다.
석근수는 보기 민망했으나 더 만류할수 없어 《신의주》가 주고간 꾸레미에서 술병을 꺼내 벤또뚜껑에 부었다.
《이걸루 안주하게. 그래야 탈이 없네.》
《경비를 서야겠는데 그건 아바이나 하십시오.》
《하긴 그렇지. 잠간 기다리게. 물이라두 떠와야겠네.》
왜 그런지 속이 급해난 석근수는 자리에서 성큼 일어났다. 저쪽 외등이 켜져있는 화물취급소 야간근무실에 들어가 물을 떠가지고 오니 한대식은 이미 모로 쓰러져 코를 골고있었다. 한손에는 반입가량 축낸 지짐이 그대로 들려있었다. 석근수는 시큼한 냄새가 물씬 풍겨나는 지짐꾸레미를 밖으로 훌 던져버리고 그자리에 한대식을 편안히 눕히였다. 어찌나 곯아떨어졌는지 그 육중한 몸을 씨름하듯 옮겨놓아도 깨여나질 못했다. 그걸 보니 명치끝이 알알했다. 자기가 옆에서 잘 돌봐주지 못해 이 먼 북방에까지 와서 고역을 치르는것 같았다. 참으로 얼마나 귀한 사람인가. 누구나 다 이런 귀한 인재를 떠받들어 그의 하루하루를 아껴주고 빛나게 해줘야 할것이다. 예로부터 인재의 육성선발이 민족의 성쇠를 좌우한다고 했거늘 지난날 나라를 떠메고 나갈 인재들이 없어뒤떨어지고 그래서 결국 망국노의 설음을 당하지 않았던가. 그런 설음과 사무친 원한을 신물이 나도록 맛본 사람들이 왜 아직 인재 귀한줄 모르고 버럭속의 막돌대하듯 하는지.…
술병을 거꾸로 든 그는 쓰리고 아픈 가슴을 씻어내듯 한대식의 손을 조심조심 씻어주었다. 피딱지가 엉겨붙고 먼지에 매닥질이 된 터슬터슬한 손등이 알콜에 의해 발긋하게 드러났다.
밤은 소리없이 깊어갔다. 석근수는 잠자는 한대식연구사의 안식과 평온을 영원히 지켜주려는듯 까딱 움직이지 않고있었다. 늦어서야 갸웃이 내민 손톱눈같은 초생달이 잠결에 드문드문 신음소리를 내는 한대식의 훌쭉해진 볼을 조심스레 어루만졌다. 석근수는 가위눌리운것 같은 그 신음소리가 듣기 괴로와 자리에서 일어나고 말았다.
(저렇게 한몸 아낄줄 모르고 투신하는 사람이 왜 안해의 그 지극한 맘을 리해하지 못하는지, 그의 안해 혜련은 남편 하나만을 믿고 남편을 위해서만 살아가는 쉽지 않은 녀인이다. 오죽하면 하나밖에 없는 어린 자식을 다른 집에 맡기고 낯설은 이 고장에 내려왔겠는가. 그처럼 간절한 기대속에 내려온 안해를 다시 올라가라고 했다니 어디 될 말인가?)
석근수는 여기로 떠나오기 전날 혜련을 만났던 일이 다시금 떠올랐다. 새집들이로 찾아왔던 금희를 그냥 돌려보낸후 울적한 기분에 잠겨있던 혜련은 석근수를 보자 눈물부터 앞세웠다. 어느때나 그윽한 표정과 온화한 목소리로 상대를 대하군 하던 교양높은 녀인의 얼굴에서 한줄기 눈물을 보자 마음이 뒤숭숭해졌다. 혜련은 남편의 동의없이 훌쩍 내려와 숱한 사람들을 고생시키고 나중에는 발생로에까지 지장을 주었으니 진정 그 경솔한 행동을 용서해달라고 했다. 석근수는 대뜸 이들 부부가 새집들이를 놓고 심상치 않은 론의가 있었다는것을 짐작했다.
우선 세대주인 한대식을 만나는것이 급선무였다. 그는 길주에 간 한대식을 기다리다가 겸사겸사해서 이리로 찾아왔던것이다. 그러나 정작 점결제문제로 고생하는 그를 마주대하니 집들이문제를 화제에 올릴수가 없었다. 공장에 돌아가서 의논해봐야 했다.
한대식과 석근수는 이튿날 저물녘에야 길주역을 떠날수 있었다.
점결제를 공장에서 역으로 실어오고 화물에 발송하는 일들은 전적으로 《신의주》가 도맡아했는데 그는 《흥수》가 무능한 자재인수원이 아니라 학식이 대단한 연구사라는것을 알자 몹시 부끄러워했다.
《신의주》와 인상적인 작별인사를 나눈 한대식과 석근수는 점결제호송원자격으로 화물칸에 올랐다. 쾌청한 날씨였다. 연두색이 다문다문하던 산과 들은 진록색으로 더욱 무성해지고 산산한 느낌을 주던 바람조차 훈훈하고 싱그럽기만 하여 무개차에 앉은 그들의 머리칼이며 옷자락을 기분좋게 흔들어주었다. 깎아지른 벼랑들과 은모래 깔린 눈부신 백사장, 천군만마의 기치마냥 끝없이 몰려와 그 백사장을 쉼없이 쓸어내리는 흰 물갈기. 달리는 화물렬차와 경쟁이나 하듯 끼륵거리며 따라서는 흰 갈매기를 넋없이 바라보는 한대식의 마음은 자못 흡족했다.
며칠간 길주에서 보낸 나날들이 꿈결처럼 느껴졌다. 상고머리 판매지도원에게 무참히 모욕당하던 일이며 당장 숨이 넘어갈것 같던 페액탕크, 왼심을 써주던 직장장과 리해성 많던 체소한 지배인, 인정과 활동성이 겸비된 인상깊은 《신의주》… 좋은 결과를 가지고 귀로에 오르니 지나간 갖가지 일들이 더욱 인상깊다. 다만 공장을 떠날 때 원인모르게 희박해졌던 점결제의 농도가 속에 맺혀있었다. 그 원인을 시급히 밝혀내야 한다. 그래야 이번에 가져가는 점결제도 안전성을 담보할수 있는것이다. 다시 분석해보자, 구체적으로.
그들은 떠난지 7일째 되는날 아침 함흥역에 닿았다.
한대식은 무개차에서 내리는 길로 역마당 한쪽에 있는 체신분소로 가서 점결제를 실어갈 유조차를 내보내달라고 오일규에게 전화했다.
그로부터 반시간도 못되여 풍을 친 《갱생》이 질풍처럼 내달려오더니 역마당앞에 급정거를 했다. 먼지가 풀썩 떠오르는것과 동시에 차문이 열리며 오일규와 금희가 뛰여내렸다.
웬일인가 하여 승용차를 바라보던 한대식이 반달음쳐갔다.
《선생님-》
금희가 한대식의 앞으로 마주 달려왔다.
《선생님, 왜 이제야 오십니까? 전보를 석장이나 쳤는데.》
《?!…》
한대식은 눈물이 그렁하여 안타까이 두발을 구르는 금희를 보자 온몸의 맥이 쭉 빠지는 감을 느꼈다. 보내달라는 유조차가 아니라 승용차가 나타났을 때부터 바싹 조여들던 탕개가 걷잡을새 없이 툭 끊어졌던것이다. 뒤따라 다가온 석근수가 엄하게 타일렀다.
《금희야, 무슨 일인지 말을 해야 알게 아닌가?》
《아바이-》
금희는 석근수의 가슴에 얼굴을 콱 묻으며 《흐흑-》하고 어깨를 떨었다.
《발생로에 대용점결제를 썼는데 그것이 말썽부려 그만 사고가 났수다. 로에 불은 꺼지고 라석호기사와 남수가 병원에 실려가구요.》
오일규가 짓눌린 소리로 떠듬떠듬 말했다.
《대용점결제란 무슨 말입니까?》
《창고에 점결제가 떨어진것을 보고 석호기사랑 며칠밤을 새우며 그와 비슷한걸 만들어냈수다. 소형시험로에 넣어보니 그만하면 쓸만 하더구만요. 그래서 길주에 전화도 하구 전보를 거퍼 쳤는데 어디 소식이 와야지. 로에 불은 거의 꺼져가구. 할수없이 우리끼리 결심하구 했는데 그만…》
얼굴이 핼쓱해진 한대식이 노성을 터치기 시작했다.
《왜 시키지도 않은 일을 제마음대로 합니까. 점결제를 그렇게 쉽게 만들것 같으면 그 먼곳에 가서 이 고생을 하겠습니까. 너무합니다. 저를 무시해두 너무 무시한단 말입니다. 발생로를 왜 그렇게 허술히 보는가말입니다.》
《연구사선생, 진정하시우. 다 잘하자구 하다가 그렇게 된것 같은데 빨리 가서 수습해야지요.》
한대식의 푸념과 힐책이 도가 넘는것 같아 입을 꾹 다물고있던 석근수가 나직이 건네며 그의 등을 승용차쪽으로 떠밀었다.
금희와 오일규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뒤에 이끌리듯 따라섰다.
승용차는 올 때처럼 전속으로 달렸다. 상사말뛰듯 하는 차안에 납덩이같은 침묵이 무겁게 드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