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한대식은 알탄성형기도면을 공장기술부에 의뢰하기로 맘먹고 서둘러 집을 나섰다. 더는 설계도면을 붙들고있을 경황이 아니였다. 요전날 이상현상의 원인을 확인하고싶어 현장에 나갔었는데 너무 떠미는통에 할수없이 들어온 그다.

사실 그날밤 한대식은 고열이 오르면서 온밤 앓음소리를 냈다.

그러나 새집들이 문제로 야기된 감정은 그에게 불같은 결심을 가지게 했다.

이때까지 주택건설을 전혀 모르고있던 그는 작업반협의회때 취한 지배인의 신경질적인 태도를 몹시 언짢게 여겼는데 알고보니 그 호된 비판은 실상 자기에게 내려진 추궁이나 다름없었다. 한대식은 그렇게 접수했고 그것으로 하여 안해의 소행이 더욱 불만스러웠다.

이날이때까지 묵묵히 남편을 리해하고 도와주던 안해가 어떻게 감히 그런 용단을 내렸는지 리해가 안갔다. 안해는 분명 그 어떤 불안을 느끼고 남편곁에 와서 남편을 도와주고싶어한다. 그런 기미는 벌써 첫번째로 여기 내려왔을 때 내비치지 않았던가.

한대식은 안해의 이 마음속 변화가 심히 우려되였다. 남편을 믿고 따르는데 습관돼있으나 일단 자기 견해를 세우기 시작하면 좀처럼 꺾기 힘든 내성적인 안해인것이다. 그러나 안해의 이번 결심만은 그대로 방임할수 없었다. 다른 직종이라면 안해의 방조가 은을 낼지 모르나 과학연구사업은 어디까지나 전문가인 본인에 한한것이다. 괜히 안해까지 꺼들여 소문낼 일도 아니며 공장에 더 큰 부담을 줘서도 안되는것이다. 그래서 따끔히 한마디 했는데 안해는 그것이 섧다고 온밤 잠 못들고 괴로와한다.

근본은 자신에게 걸려있었다. 안해가 이곳에 내려온것도 그리고 주택문제와 관련하여 일어난 복잡한 문제도 발생로를 제때에 하지 못한데 있었다. (분발하자. 내가 어떤 일을 빚어놨는가. 이렇게 질질 끌다간 앞으로 더 큰 일을 저질러놓을수 있다. 지배인동진 말끝마다 시간이 없다고 독촉하고있다. 그의 말이 백번 옳다. 시간, 시간을 앞당겨야 한다.)

한대식은 이런 다급한 생각으로 공장기술부에 들려 설계도면을 맡기고 그 길로 발생로현장으로 반달음쳤다.

휴계실에 앉아 기록수치를 정리하고있던 라석호가 놀라운 눈길로 그를 맞았다.

《갑자기 왜 이렇게 나오셨습니까? 무슨 일이 생기면 련락하라지 않았습니까?》

《제발 나에게 더 권고하지 마오.》

한대식의 태도는 결연했다. 늘 사색에 잠겨있던 눈에 비상한 광채가 번뜩였고 숨소리도 거칠었다.

《발생로의 이상현상이 알탄에 있는것 같아 그걸 확인해봐야겠소. 요전날 벌써 그랬어야 하는데… 아까운 이틀을 뺏겼소.》

라석호는 그때야 영문을 알고 《하긴 선생님을 합숙에서 안정시키려는 우리가 어리석었지요.》하고 부드러운 미소를 그렸다.

《석호동무, 어서 요즘 진행한 관찰일지를 봅시다.》

《알겠습니다.》

여전히 병색짙은 한대식의 얼굴에서 눈길을 떼지 못하고있던 라석호가 철함을 열고 관찰일지를 꺼내들었다.

《석호동무, 동무도 혹시 점결제의 성분에서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했소?》

관찰일지를 받아든 한대식이 빠른 눈길로 수치들을 살피며 물었다.

《선생님, 거기 빨간색으로 밑줄을 그은 수자를 보십시오. 계통적으로 점차 강하게 나타난것이 알립니다. 그래서 저도 점결제의 성분에 이상이 생기지 않았나하고 의심하던중입니다.》

한대식의 사색적인 눈이 예리하게 빛났다. 몇장을 거듭 번진 그의 입에서 확신에 넘친 소리가 새여나왔다.

《틀림없소. 우리가 정확히 포착한것 같소. 석호동무, 현재 쓰고있는 점결제의 농도를 분석해봤소?》

《아직 못해봤습니다. 창고에서 타다가 그 즉시 미분탄과 혼합하기때문에 분석해볼 필요가 없었습니다.》

길주팔프페액은 여러 단계에서 확증된 기준농도의 점결제이므로 사실 분석해볼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이 순간 라석호는 자기가 큰 실책을 범했다고 인정했다. 점결제의 성분이 이상하다고 생각되면 곧 농도부터 확인해봐야 하지 않겠는가. 연구사앞에 서있기조차 부끄러웠다.

그러나 한대식은 아무 내색없이 실험일지의 그 어느 한 부분에 초점을 박고있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 순간 그들은 그처럼 애를 먹이던 로내 이상현상의 원인이 점결제의 농도에 있었다는것을 확신했다.

이윽하여 한대식이 부드러운 소리로 말했다.

《기사동무, 그동안 나를 대신하여 고생많았소. 정말 안됐소. 오늘은 맘놓고 어서 들어가 보오.》

라석호는 자기를 손님처럼 취급하는 한대식의 태도가 섭섭했으나 짐짓 대범한 어조로 말했다.

《선생님, 점결제의 농도분석을 저도 함께 합시다. 그렇게도 속을 태워주던 이상현상의 원인을 찾은것 같은데 합숙에 간들 잠이 오겠습니까. 어서 맘 푹 놓으시고 지시를 주십시오.》

《그렇소. 난 너무 고생만 시키는것 같아서…》

한대식은 자기 속을 빤히 들여다보는 라석호를 놀라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실은 의혹을 던져주는 점결제의 농도를 지체없이 알아보고싶었던것이다. 그들은 곧 휴계실을 나섰다. 라석호는 창고에 가서 점결제를 가져오기로 하고 한대식은 알탄작업장에서 오늘 찍어놓은 알탄을 분석해보기로 했다.

얼마후 그들이 분석한 점결제의 분석치는 이미 공정일지에 기록된 수치와 차이가 없다는것이 밝혀졌다. 참으로 알수 없는 현상이였다.

한대식과 라석호는 불안과 의혹을 금할수 없었다. 이렇게 희박한 용액으로 알탄을 만들었으니 그 굳기가 보장될리가 없었다.

《선생님, 점결제의 농도가 왜 이렇게 희박해졌을가요?》 라석호가 흥분어린 소리로 물었다.

《나두 그 생각이요. 심상치 않은 문제요.》

《혹시 공장에서 팔프생산공정이 달라진게 아닐가요?》

《…》

한대식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팔프공장에서 그렇게 갑자기 생산공정을 바꿀수는 없는것이다. 그렇다면 농도의 차이가 어디서 생겼겠는가. 현지에 가서 확인해보지 않고는 알수가 없었다. 그는 길주에 직접 가보기로 작정했다. 그러지 않아도 점결제가 동이 나게 된때여서 부득이 팔프공장에 가야 될 형편이다.

《기사동무, 내 아무래도 길주에 가봐야 할것 같소. 그 길만이 이 원인을 밝혀낼수 있소.》

《그 몸으로 어떻게 간다고 그럽니까. 그 일은 저한테 맡겨주십시오.》

《내가 가야 하오. 단순히 팔프페액의 농도나 확인하러 가자는게 아니요. 보다싶이 창고에 당장 점결제가 떨어지게 됐는데. 그건 내가 가야 해결해올수가 있소.》

아직 계획지령에 없는 팔프페액을 시험용으로 뽑아온다는것은 혈기나 열성만 가지고는 힘들다고 생각하는 한대식이였다. 라석호는 병색짙은 그의 창백한 얼굴을 근심스레 바라볼뿐 더 고집하지 못했다. 한번 결심하면 좀처럼 물러설줄 모르는 그의 성미다.

《그동안 기사동무가 여기 일을 맡아주오. 난 밤차로 곧 길주에 올라가겠소.》

《선생님, 가더라도 준비를 좀 해서 래일 떠나도록 합시다.》

《아니오. 그처럼 고심하던 이상현상의 원인을 찾았는데 어떻게 잠시인들 지체할수 있겠소.》

《저 선생님…》

라석호가 한발 나서며 그의 앞을 막아나섰다.

《길주에 꼭 가야 합니까?》

《?…》

《어떻게 매번 그 먼곳에 가서 고생스레 가져다 쓰겠습니까? 좀 다른 방법을 탐구해봅시다.》

《발생로만 빨리 될수 있다면 천리라도 가겠소. 내 걱정은 마오.》

《그런 의미만은 아닙니다. 이제 발생로가 생산에 들어가면 막대한 량의 점결제가 필요하겠는데…》

《그래 말하자는게 도대체 뭐요?》

라석호는 낯색이 굳어지는 그를 보자 말꼬리를 흐렸다. 그러나 머리속에 떠올라 집요하게 자극하던 착상을 아니말할수 없었다.

《선생님, 현재 쓰고있는 팔프페액을 대신할수 있는 점결제를 우리자체로 만들어보자는겁니다. 발생로를 생산에 도입하자면 무엇보다 이 문제가 절박하다고 봅니다.》

《대용점결제를 만든다?!…그래 묘안이 있소?》

《아직은… 그러나 만들어낼 가능성이 있습니다.》

한대식은 새삼스런 눈길로 라석호를 바라보았다.

물론 대용점결제에 대한 착상은 새로운것이 아니다. 한대식자신도 길주에 가서 힘들게 점결제를 구해올 때마다 이 문제를 꼭 해결해야겠다고 맘먹고있었다. 그런데 공정기사로 일한지 얼마 안되는 라석호가 벌써 그 문제를 포착하고 제기해온것이다. 며칠전에는 알탄작업을 기계화할데 대한 착안을 했다.

이 얼마나 진취적이고 활동적인 탐구자세인가. 생각할수록 기쁘고 마음이 든든해졌다.

해방후 이 짧은 기간 그것도 전쟁과 복구건설이란 엄혹하고 숨가쁜 나날속에 이처럼 미더운 새 세대 인테리가 자라난것이 더없이 대견했다. 잘만 이끌어주면 연료화학에서 불원간 두각을 나타낼수 있다. 사실 과학자에게 있어서 자기 뒤를 이을 그런 수제자를 만나는것이상 반가운 일이 없다. 라석호에게는 그럴만 한 열정과 두뇌와 의지가 충분했다.

하지만 한대식은 그러한 감정을 랭정한 리성으로 눌러버렸다. 그 매혹시킬만 한 우점대신 간과할수 없는 결점이 너무도 두드러졌던것이다. 환경과 정황에 맞지 않게 알탄성형기문제를 상종시키던 일이며 대용점결제를 당장 만들것처럼 장담하는것은 혈기탓으로만 볼수 없다. 1차화입때 실패를 놓고 모대길 때 그가 취한 태도가 또한 그 실례로 된다. 그때 라석호는 그 실패의 원인이 마치 발생로의 형태와 시험방법에 있는듯이 주장하여 얼마나 큰 유감을 주었던가. 이 모든것을 돌이켜 볼 때 라석호에게는 확실히 어떤 문제나 너무 헐하게 여기고 속단하는 과학자에게 있어서 가장 경계해야 할 나쁜것이 싹트고있었다.

한대식은 이런 생활자세와 사고방식을 제때에 바로잡아줘야겠다고 맘먹었다.

《석호동무, 대용점결제에 대한 착상은 아주 흥미있소. 나 역시 언젠가 그것을 꼭 풀어야 한다고 생각해왔소. 그렇지만 한시간이 급한 지금의 형편에서 그런 문제를 상정시키는것은 좀 지나치다고 보오.》

《선생님, 전 어떻게 맘먹는가에 달렸다고 봅니다. 그것이 뭐 그리 어렵겠습니까. 전 선생님을 믿기때문에 그런 제기를 한겁니다.》

라석호의 주장은 여전했다.

《그렇게 믿어주는것은 고맙소. 그리고 동무의 그 패기와 담보도 아주 귀중하오. 그러나 우린 새것을 창조하는 과학기술자라는걸 항상 잊지 마오. 혈기나 욕망으로 해결할수 있다면 새것의 창조가 왜 어렵다고 하겠소. 난 동무가 무슨 설계를 하거나 착상을 해도 심사숙고해주길 바라오.》

《…》

《그리구 어느 순간에도 잊지 말것은 현재 석호동무의 직무는 공정기사라는것이요. 하나에서 열까지 모든것은 발생로를 위해서만 바쳐져야 하오. 내 말뜻이 리해되오?》

《예…》

《대용점결제문제는 더 론하지 맙시다. 석근수아바이가 오시면 로내 이상현상의 원인이 점결제의 농도에 있었다는걸 알려주오.》

《알겠습니다. 더 지시할것이 없습니까?》

《없소. 점결제를 구하면 나도 그 길로 돌아서겠소. 그럼 수고해주.》

한대식은 곧 휴계실을 나섰다. 밖은 칠흑처럼 캄캄했다. 그의 몸은 순식간에 어둠에 녹아버렸다.

(자신에 대한 요구성이 저렇게 불같은분이 다른 사람의 진심은 왜 리해하지 못하는가. 내가 정말 아무 타산도 없이 순 혈기나 욕망만 가지고 들떠 덤비는가?…)

어둠속을 바라보는 라석호의 속은 허전하기 그지없었다. 존경과 믿음만 가득했던 한대식연구사에게서 시간이 갈수록 스칠수 없는 허점들을 발견하게 되는것이 괴로왔다.

이 시각 지배인실에는 석근수와 방하철이 마주앉아있었다. 그들사이에는 퍼그나 많은 이야기가 오고간듯 담배연기가 자오록했다.

여기 지배인실에 들어설 때만 해도 석근수는 방하철지배인을 여간 괘씸하게 생각지 않았다.

오늘 점심때 작업반의 경사처럼 조직한 새집들이가 맹랑하게 류산된 전적인 책임이 지배인한테 있다고 생각한 석근수였다. 춤가락이라도 나올듯 들썽대던 작업반원들의 얼굴이 서리맞은 풀잎처럼 되고 퇴근고동이 울리기 바쁘게 뿔뿔이 흩어져 돌아가는 모습을 보니 울컥 치받치는 분기를 참을수가 없었다.

이번 주택건설과 관련하여 취한 방하철의 처사는 심히 편애하고 조포하다고 아니할수 없었다. 그런데 석근수는 방하철과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 스칠수 없는 심중한 문제가 내포되여있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주택건설에 돌려쓴 자재가 지배인의 결재에 의해서 출고된것이 아니라 자재과장 로익두의 자의적인 처분이였다는것이다. 방하철은 로익두의 이번 처사를 될수록 덮어놓으면서 일단 결속된 문제처럼 말했으나 석근수는 간과할수 없는 엄중한 현상으로 락인했다. 발생로를 돕자는 의도에서 월권행위로까지 번져졌다고 방하철은 평가하는데 그렇게만 볼수 없었다. 당장 써야 할 요긴한 생산자재를 람용한것도 문제지만 공장적인 물의를 일으킴으로써 앙양된 발생로작업반원들의 열의에 찬물을 끼얹고 나아가서 한대식연구사를 궁지에 몰아넣은것이다. 문제는 이렇게 봐야 한다. 그러나 석근수는 이번 주택사건을 너무 예리화시키는것 같아 자기 심정을 로출시킬수 없었다. 지배인에게 단단히 침을 놓아주리라고 맘먹고 왔던 그는 뜻밖의 문제에 봉착하게 되자 할 말이 없게 되였다.

오랜 침묵끝에 방하철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바이는 새로 지은 그 집을 어떻게 하렵니까?》

석근수는 방하철이 묻는 의도를 알수 없어 멍하니 쳐다보았다.

《앞으로 연구사가 자기 집때문에 말썽이 있었다는것을 알겠는데 그가 그 집에서 살자구 하겠습니까?》

《지배인은 뭘 말하자는겐가?》

《연구사를 더는 옹색하게 만들지 말구 그 집을 공장에 넘겨주십시오. 숱한 사람들이 눈빠지게 집을 요구하는데 텅 빈 집을 그냥 놔둘순 없지 않습니까?》

《지배인이 언제부터 그렇게 옹졸해졌소. 그 집 한채를 뺏지 못해 몸살이라도 오나?》

《허허, 저두 연구사가 맘 편히 일하게 하자는겁니다. 이제 두고 보십시오. 연구사가 그 집에 갈것 같습니까?》

석근수가 버럭 목소릴 높였다.

《연구사를 진정 생각해준다면 그 집에서 살게 해야 하네. 말은 바른대루 연구사가 언제 집타발해서 우리가 주택을 지었나? 그 연구사는 이날까지 합숙과 현장에서 잠을 자며 일해왔구 앞으로두 그런 각오를 가지구 한생을 살아갈 사람이네. 그래서 우리가 맘먹구 일을 벌리지 않았나. 자재과장과 같은 사람이 있어 말썽이 있었네만 그것이 무서워 집을 내놓겠나. 그럴순 없네. 이런 때 지배인이 공장의 호주답게 연구사한테 사죄두 하구 부인두 만나서 권고해보게나.》

석근수의 마지막 말은 타이르듯 부드럽게 울렸다.

《…》

방하철은 묵묵히 담배만 빨았다.

그는 석근수의 말에 공감할수 없었다. 오히려 이번 일로 하여 한대식에 대한 인상이 더 나빠졌다. 그만 한 생활적애로도 극복하지 못해 녀편네까지 끌고 다니는것이 심히 못마땅했던것이다.

석근수는 아무 대답없이 담배만 풀풀 피우는 방하철을 섭섭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사람이 저렇게도 랭담해질수 있는가. 사업을 조직하고 전개하는 그 견인불발성으로 봐선 도저히 그럴 사람같지 않은데 왜 연구사에 대한 태도에선 이처럼 쓴외 보듯 하는지.

하긴 곰곰히 돌이켜보면 저런 태도는 한대식연구사 한사람에게 국한된 문제가 아닌것 같다. 최근만 해도 현장휴계실에서 한 그의 조포한 발언이며 로동자들을 대하는데서 어딘가 틀스런 행동이 자주 나타나고있다. 처음엔 그것이 엄격한 사업절제를 세우기 위한 좋은 풍모로 생각했는데 그런것 같지가 않았다. 확실히 방하철은 토스레옷을 입고 일밖에 모르며 어질기만 하던 그전의 모습과는 판이하게 달라졌다. 아무리 많은 세월이 흐르고 직제가 달라졌다 해도 마음의 샘이라 할수 있는 인정만은 변하지 말아야 한다. 인정이 변한다는것은 곧 다른 사람이 된다는것을 의미한다. 석근수는 이전의 어질고 의협심 많던 모습을 찾아보려는듯 방하철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이마귀가 패여올라가기 시작한 번듯한 이마며 그아래 예리하게 번뜩이는 작을사 한 두눈, 살이 빠진 감스레한 량볼과 잔주름이 잡히기 시작한 목덜미 등은 세월의 흐름을 찍어놨을뿐 옛 모습그대로였다. 순간 이름할수 없는 련민의 정이 욱 치받쳐오르며 눈굽이 화끈 달아올랐다. 누구보다 일찍 량부모를 잃고 고생하던 방하철이 오늘도 역시 혈육 한점 없는 독신이라는 생각이 뇌리를 쳤던것이다. (연구사의 집생각은 하면서도 지배인한테 가정이 없다는것을 왜 잊고있었는지) 석근수는 황황히 눈길을 떨구며 개가죽담배쌈지를 주섬주섬 꺼냈다. 남 그르다고 탓할 면목이 없었다.

《여기 권연이 있습니다.》

방하철이 앞탁에 놓여있는 《증산》 담배곽을 밀어놓으며 성냥을 그어댔다.

석근수는 권연을 한대 뽑아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석근수가 담배만 태우며 묵묵히 앉아있자 방하철이 저으기 거북한듯 타협조로 나왔다.

《아바이, 주택은 발생로에서 맘대로 처분하십시오. 그렇지만 연구사를 찾아가 제발 이사를 해줍소 하고는 말 못하겠습니다.》

《정 맘이 내키지 않는 일이야 억지루 할수 없지. 나두 지배인한테 그렇게 하라고 더 권고할 체면이 없네. 주책머리없이 지배인한테 큰 소리친걸 량해하게.》

《그건 또 아바이답지 않게 무슨 말씀입니까?》

《나를 용서하라구. 연구사네 집 걱정만 했지 지배인생각은 미처 못했어. 지배인네 량친이 살아계신다면 지배인을 그렇게 독신으로 내버려두겠나.》

《아바이두 참, 언제 재취할새가 있었습니까. 눈앞의 일만 해두 허리펼새 없는데. 제발 그런 말씀 마십시오. 아직까진 독신이 더 좋습니다.》

《하긴 지배인이 언제 한번 독신이란 티를 내본적이 없었지. 그래서 나두 그만 잊었던가보네. 그래 맘에 둔 녀성이라두 어디 있나?》

방하철은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웃음으로 넘겨버렸지만 석근수의 진지한 태도앞에선 그렇게 대할수가 없었다.

《없습니다. 아직 그 어떤 녀성도 생각해보지 않았습니다.》

실상 방하철이 가정에 대해 생각해볼 여유가 없었다. 안해와 생리별한후 전쟁이 터졌고 그후 류학생활, 전후복구건설, 안착할 사이없이 변동되는 직무와 그에 따르는 과중한 일감들…

《글쎄 지난 시기는 할수 없다치구 지금은 모두가 새 생활로 들끓고있지 않나. 객설같지만 우리 제도에선 가정을 꾸리는것두 사회의 화목과 단합을 도모하는데 의의가 있다고 보네.》

《…》

《하여튼 지배인이 생각을 좀 빨리하게. 큰 공장 지배인이 홀아비라니 어디 체모가 됐나. 곁에 있는 사람이 다 민망하네.》

《관심을 돌려주어 감사합니다.》

《내 그런 인사나 받자고 하는 소리가 아니라는걸 명심해두게.》

석근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말이 난김에 생활상문제를 좀더 의논하고싶었으나 바쁜 지배인을 그냥 붙들고앉아있을수 없었다. 그는 들어설 때와는 달리 한결 개운해진 마음으로 지배인실을 나왔다.

석근수가 나가자 사무실안은 갑자기 너렁청해보였다. 방안의 공기가 별로 희박해진것 같은 야릇한 감을 느낀 방하철이 석근수가 사라진 출입문을 이윽히 바라보았다. 그러자 불현듯 너무 오래되여 재생시키기도 힘든 육친의 그 부드러움과 따스함이 봄아지랑이처럼 온몸을 감싸고도는듯 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빠져드는 상념을 털어버리듯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하철이 행정청사 정문을 나서려는 때다. 팔소매를 절반쯤 걷어올린 앙바틈한 로익두가 잰걸음으로 정문을 향해 걸어왔다.

그는 방하철을 보자 팔소매를 황황히 내리며 《마침 지배인동지가 계시는군요.》하고 허리를 깊숙이 꺾으며 몸둘바를 몰라했다.

《무슨 일이요?》

《지배인동지께 조용히 말씀드릴것이 있어서… 바쁘시면 래일 다시 오겠습니다.》 로익두는 다시금 허리를 굽신하며 둬걸음 뒤로 물러섰다. 언제봐야 인사성이 도를 넘어 아첨과 굴종기를 느끼게 하는 로익두의 그런 행동을 경멸하고있던 방하철이 밸굽이 불끈했다. 그러지 않아도 로익두때문에 여지없이 봉변당한 방하철이였다. 로익두를 아직까지 자재과장직에 그대로 두고있는것은 그의 수완때문이다. 아무리 어려운 과제를 주어도 무슨 수를 쓰는지 척척 해결해오군 하는데 모든것이 바른 현 상태에서 그것을 중시하지 않을수 없다. 한마디로 고양이뿔도 구해오라면 냉큼 가져올 위인이다. 그래서 좀 알아봤더니 어렸을 때부터 장사로 이골이 난 사람이라고 했다. 그 말을 들은 후부터는 허리를 굽신거리며 발라맞추는 그의 행동이 어느정도 리해가 됐으나 어느때든 단단히 버릇을 떼주리라 속다짐해오던 방하철이였다. 그전 세월에야 그런 행동이 장사군의 생존방식이겠지만 큰 공장의 관리일군이 된 오늘까지 스스로 인격을 떨굴 필요야 어디 있겠는가.

방하철이 로익두를 더 좋지 않게 본것은 최근에 나타난 그의 돌변스런 행동이다.

부상이 내려왔을 때 100여리가 넘는 함주벌까지 가서 붕어를 잡아온 일은 단순히 그의 오랜 생활습성의 타성만으로 볼수 없었고 특히 한대식연구사의 주택건설에 정도이상의 열성을 내며 월권행위를 한것은 주제넘은 오만한 행동이 아닐수 없었다.

《급한 일이 아니면 걸으면서 들어봅시다. 난 지금 전해직장으로 가는 길이요.》

《이렇게 늦었는데 또 현장에 나가신단말입니까. 제발 그 귀한 몸을 돌봐가면서 일하십시오. 합숙관리원 리숙동무두 지배인동지를 얼마나 걱정하는지 모릅니다.》

《용건이나 말하시오.》

《예, 말씀드리겠습니다. 실은 지배인동지한테 사죄하러 오댔습니다. 정말 이번에 제가 큰 실수를 했습니다.》

《그건 무슨 말이요?》

《솔직히 말해서 전 한대식연구사네 주택건설이 지배인동지의 의도로 알았습니다. 발생로에 관심이 특별한 지배인동지이시기에 연구사네 집을 보란듯이 지어주는줄로 생각했지요. 그래서 발벗고 나섰습니다. 후에 알고보니 그런것 같지 않더군요. 전 너무당황해서 밤잠을 다 못잤습니다.》

《…》

《당장 달려와 사죄하고싶었으나 일단 저질러놓은 일이라 말로만 해서야 되겠습니까. 그래서 람용해쓴것을 방금전까지 원상대로 깨끗이 보충해놓고 이렇게 달려오는 길입니다. 저를 용서해주십시오.》

《원상대루 보충해놓았다구요. 어떻게?》

방하철이 낮으나 찌르는듯 물었다. 또 무슨 오그랑수를 쓰는것 같았다.

《이번엔 안심해도 됩니다. 많지도 않은 자재를 이 넓은 함흥바닥에서 구하지 못하겠습니까.》

역시 수완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방하철은 그의 이런 수완이 께름하고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과장동무, 이번 일을 단단히 교훈삼아야 하겠소. 앞으론 자기 직무에 도가 넘는 일은 절대로 하지 마오. 참새가 황새걸음 하려다가 어떻게 되는지 아오.》

《예예. 지배인동지의 명언을 지침으로 삼겠습니다.》

《그건 내 명언이 아니라 동무같은 사람들을 념두에 두고 만들어낸 격언이요. 그리구 주택건설하는데 람용해쓴 자재를 보충해넣었다는데 래일중으로 제자리에 가져다주시오. 동문 자존심도 없는가. 우리 공장에서 그만 한 자재가 없을것 같아 다른데 손을 내밀며 굽신거리겠소.》

《아니 그건 가져다써도 말썽이 없을 자재들인데…》

《무조건 제자리에 가져다주시오. 그리구 동무는 큰 공장의 자재과장이라는것을 항상 자각하고 행동하시오. 앞으로 그 누구의 앞이든 허리를 굽신거리며 발라맞추기를 했다간 당장 철직시키겠소. 더 할 말이 없으면 여기서 헤여집시다.》

《?!…》

로익두는 흠칫 몸을 떨며 그자리에 굳어졌다. 방하철은 그를 더는 거들떠보지 않고 바람을 일쿠며 전해직장으로 향했다.

《네놈이 코대를 세우며 한대식놈을 끼구돌더니 단단히 쓴 맛을 봤지. 만약 한대식놈한테서 손을 떼지 않으면 앞으로 더 큰 봉변을 당할줄 알라.》

로익두는 방하철의 뒤모습을 쏘아보며 이발을 사려물고 씹어뱉았다. 그는 방하철이 지배인으로 부임되여왔을 때 외국물을 먹었다는것을 등대고 도고하고 극성스럽게 구는것을 보자 그것을 시골뜨기가 생전 처음으로 스코틀랜드위스키를 한잔 들이키고 그 위세를 뽐내보려는 위선처럼 생각하고 슬슬 발라맞춰주면 무엇이나 다 할수 있다고 타산했다. 그런데 방하철은 그렇게 허술히 대할 위인이 아니였다. 오히려 걸음걸음 자기를 무섭게 후려치고있는데 잘못 건드렸다간 후회막급한 후과가 차례질수 있었다. 이럴 때는 잔재간을 피울것이 아니라 한대식놈이 더는 솟아날수 없게 주도세밀한 묘책을 써야 한다. 로익두는 그 묘책에 발생로를 둘러싸고 야기되는 부상과 방하철의 의견대립을 효과적으로 리용하리라 맘먹었다. 방하철은 지금 부상의 지시를 침묵으로 반대하면서 발생로에서 그 어떤 요행수를 바라고있다. 그 요행수를 첫마디에서 짓뭉개버려야 한다. 그렇게만 되면 궁지에 빠진 지배인 방하철이 더는 발생로를 떠밀어줄수 없게 될것이고 한대식연구사는 결국 끈 떨어진 갓 신세가 될것이다. 이거야말로 꿩먹고 알먹는격이다. 로익두는 한대식연구사가 점결제를 가지러 길주에 간 이번 기회에 발생로에 다시한번 타격을 가하리라 맘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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