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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째나 알탄성형기도면을 붙들고있는 한대식의 마음은 불을 달아놓은듯 급했다. 한초한초가 살점이 떨어져나가는것만큼 안타까웠다. 자기를 위해주려는 석근수와 라석호 등 작업반원들의 뜨거운 관심을 마다할수 없고 또 알탄찍는 문제는 장차 반드시 기계화해야 할 대상이므로 받아들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그것이 후회되였다. 현재 애를 먹고있는 이상현상을 해명하는것이 그들의 관심과 믿음에 보답하는 연구사의 도리이지 합숙에 편안히 앉아 설계도면을 완성하는것은 심히 례의에 어긋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한대식은 설계도면은 아예 밀어놓고 이상현상을 밝혀내는데만 신경을 썼다. 석탄가스화에 필요한 기술자료와 최근 학보들을 탐독했고 지금까지 진행한 중간시험과정을 몇번이나 검토해나갔다. 이 과정에 언젠가 라석호가 의문시했던 시험로와 시험방법에는 결함이 없다는것을 재확인할수 있었고 문제는 주원료인 알탄의 조성에 그 요인이 있다는 실로 귀중한 실마리를 쥐게 되였다. 일단 이상현상의 원인을 포착하자 합숙에 순간인들 앉아있을수가 없었다. 당장 현장에 나가 그 실마리를 확인해봐야 했다.

한대식은 안해가 자리를 뜬 사이에 작업복을 갈아입고 발생로현장으로 나갔다. 오래동안 누워있던탓인지 다리가 후들거리고 눈앞이 어질어질했다.

현장에 도착한 그는 곧 철판층계를 딛고 로상부로 올라갔다. 온몸에서 진땀이 났다. 로상부에 있던 석근수가 한대식을 보자 펄쩍 놀라며 노여움을 썼다.

《연구사선생, 왜 우리를 믿지 못하겠수, 맘놓고 성형기도면이나 완성하라지 않수.》

《아바이, 제 마음도 리해해주십시오. 지금이 어느땐데 알탄성형기도면입니까?》

석근수는 숨이 차서 헐썩거리며 로안부터 관찰하는 한대식을 이윽히 바라보다가 그의 팔을 끼고 아래로 내려갔다.

《하여튼 여긴 서있을 자리가 못됩네다.》

한대식은 할수 없이 석근수한테 이끌려 휴계실옆 연구실로 들어갔다.

《선생님, 정말 그 몸으로 견딜수 있겠어요?》

금희가 따라들어서며 걱정을 놓지 못했다.

《내 몸은 괜찮소. 금희, 이제부턴 매 시간당 기록수치들을 여기로 가져다주오. 로반응상태, 혼합기, 송풍량 등 모든 련관공정을 다 알아야 하겠소.》

이렇게 한대식은 일에 착수했고 안해가 가져온 점심을 먹으면서 현장을 뜨지 않았다. 그의 결심을 움직일수 없다는것을 알게 되자 그 누구도 더는 강요하지 않았다.

그날 저녁시간이였다. 지배인으로부터 작업반협의회를 가지겠으니 한명도 퇴근하지 말라는 지령이 떨어졌다. 작업반원들이 웬일인지 몰라 수군거렸다.

지배인이 이처럼 직접 협의회를 조직하는것이 아무래도 이상했던것이다.

한대식만은 대체로 짐작이 갔다. 그래서 더욱 난처했다. 앓아눕기전 지배인이 현장에 왔을 때 그처럼 촉급해하던 모습이 자꾸만 떠오르며 온몸이 과다드는것 같았다. 듣기 좋은 말로 작업반협의회를 가진다고 알려왔지 실제는 자기를 추궁하러 온다고 한대식은 생각했다.

협의회는 예정되로 퇴근시간이 되자 현장휴계실에서 열렸다.

먼저 라석호가 그간 발생로운전의 실태보고를 한후 몇명의 발언이 있었다.

앞탁에 혼자 앉은 지배인 방하철은 실태보고와 발언들이 끝날 때까지 기침 한번 하지 않고 꼿꼿한 자세다. 더는 일어설 기미가 보이지 않자 그의 날카로와보이는 눈길이 수굿이 앉아있는 오일규에게 박혔다.

《반장동문 왜 가을뻐꾸기처럼 입이 붙었소. 그렇게두 할 말이 없는가요?》

낮으나 창끝같은 방하철의 목소리에 분위기는 대번에 얼어붙고말았다.

사람들은 그때야 지배인이 토론을 심중히 듣고있은것이 아니며 협의회목적이 걸린 고리를 풀자고 소집한 회의가 아님을 깨달았다.

《이미 실태보고와 토론들에서 다 제기됐기에…》

엉거주춤 일어선 오일규가 짓눌린 목소리로 변명하는데 우악스런 발톱으로 걸고채듯 짜증어린 소리가 날아갔다.

《무슨 소릴 하오. 동문 구경군인가? 발생로의 주인은 반장인 동무란말이요. 언제봐야 저렇게 안개속처럼 흐리멍텅하니 발생로가 앉은방아를 찧을수밖에.》

방하철은 입맛이 쓰거운듯 개탄했다. 이때 한대식이 조심스레 일어섰다.

《지배인동지, 모든 책임은 저한테 있습니다. 로의 주인인 제가 구실을 못하구 며칠간씩 자리에 누워있다나니…》

《잠간, 발언중에 안됐는데 연구사선생, 자리에 앉으시오. 오늘 협의회는 연구사선생이 합숙에서 앓고있다고 하기에 우리 공장사람들끼리 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니 여기 참가하지 않아도 됩니다.》

순간 한대식은 여지없이 무시당하는것 같은 느낌을 받으며 풀썩 주저앉았다.

누군가 팔굽을 붙들어주는것 같았으나 귀가 멍멍하고 눈앞이 캄캄해서 볼수가 없었다. 빈혈이 오는것 같았다. 이래선 안되겠다고 입술을 깨물고 바싹 긴장하니 눈앞에 떠돌던 까만 동그라미가 점차 사라지고 귀에서 바람소리같은것이 윙윙 들렸다. 그것은 높지 않으나 마디마디에 날이 선 방하철의 목소리였다.

《동무들이 누구도 해보지 않은 발생로를 붙들고 고생한다는걸 모르지 않소. 화학기계를 전공한 나두 발생로에 대해서 잘 모르겠는데 생소한 동무들이야 말해서 뭘하겠소. 내가 격분하게 되는것은 관점문제요. 지금이 어느때요. 모든 사람들이 내달리구있단 말이요. 동무들은 옆에서 바람을 일쿠며 씽씽 날아가는 천리마가 보이질 않소? 왜 우리가 천리마를 타야 하는가? 지난날 뒤떨어졌던 우리 나라는 3년간의 전쟁에서 또 한차례 타격을 받았소. 우리 인민은 날아야 하오. 날지 않으면 또 뒤떨어지게 되오. 그래서 나는 긴장되는 로력과 자재를 짜내여 발생로작업반을 무어주었소. 우린 어떤 일이 있더라도 시비년도 비료량을 초과생산해야 하오. 그래서 지금 온 공장이 끓고있소. 그런데 이 작업반에서만 유독 헛딴 일을 벌려놓고 셈평좋게 지낸단 말이요. 분발해두 시원치 않겠는데 도대체 어쩌자는거요? 이런 관점으로 발생로가 될것 같은가?》

방하철은 번열이 나는지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문대고 앞에 놓인 물고뿌를 획 잡아당겨 입에 가져갔다. 필요한 말만 그것도 극력 한두마디로 집약하던 방하철이다. 그래서 말붙이기 어려워했고 엄엄한 자세로 하여 위엄을 느껴왔었다. 그런데 오늘은 첫마디부터 신경질을 내며 시세가 어떻소 관점이 서지 않았소 하며 장황하게 열을 올리니 사람들은 북받치는 의혹을 금할수 없어했다. 지배인의 신경을 자극한것이 한대식연구사의 주택건설같은데 그것을 왜 헛딴 일로 평가하는가. 벽돌이며 아연도금판 등 귀한 자재까지 어서 가져다쓰라고 자재과장을 시켜 보장해주고는 이제와서 관점이 서지 않았다고 뒤통수를 때려야 옳은가. (작업반성원들은 주택건설용 자재를 지배인이 자재과장을 내세워 보장해준걸로 알고있었다.)

정녕 지배인답지 않은 처사였다. 군중심리란 언제나 예민하고 빠른 법이여서 사람들은 손짓눈짓을 해가며 수군대기 시작했다.

좌중의 설레임을 다르게 해석한 방하철이 한결 낮아진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나두 큰소릴 쳐서 일이 잘된다구 생각지는 않소. 그러나 아무런 전진도 없이 이렇게 질질 끌 날자가 없다는것을 명백히 알아두시오. 이건 결코 지배인의 위협이 아니요. 시대가 그걸 요구하고있단 말이요. 오늘 협의회 목적은 동무들에게 경종을 울리는데 있었소. 자, 그만합시다.》

사람들이 웅성대며 자리에서 일어설 때 《석근수아바이는 좀 남아주십시오.》하고 방하철이 말했다.

한대식의 어깨를 부축하여 일으켜세우던 금희가 할끔 방하철의 쪽을 돌아보더니 입속으로 무슨 말인가 중얼거렸다.

《이 앞으로 좀 나와 앉으십시오.》

사람들이 다 나가자 방하철이 석근수에게 자기 앞탁을 가리켰다. 이때까지 말 한마디 없이 묵묵히 앉아있던 석근수는 그가 가리키는 의자에 다가앉으며 개가죽담배쌈지를 꺼냈다.

《제가 좀 과하게 말했다구 속으로 욕하지 않았습니까?》

《일을 쓰게 못했는데 무슨 욕을 했겠나?》

석근수가 선선히 나오자 방하철이 안타깝다는듯 속에 있는 말을 했다.

《전 오늘 단순히 발생로때문에 목소릴 높인게 아닙니다. 발생로야 어디까지나 기술문제이니 연구사가 풀어야 하지요. 내가 참을수 없는건 이 바쁜통에 주택건설을 벌려놓고 온 공장에 소동을 피운겁니다. 아바이가 여기 계시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생길수 있습니까?》

《집 한채 진것이 무슨 큰 일이라구 그런 요란한 딱지를 붙이나. 청년들이 잠 안자구 살림집 하나를 지었으면 좋은 일이 아닌가.》

《아니 그게 진정으로 하는 말입니까? 아바이가 그렇게 나오리라군 정말 뜻밖이군요.》

방하철은 숨소릴 거칠게 내쉬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냥 앉아있다간 큰소리가 나가든가 앞탁을 치든가 자신을 자제하지 못할것 같았던것이다. 그가 이처럼 흥분하는데는 그럴만 한 까닭이 있었다. 사실 방하철이 어제 오늘 사이에 여기 공장지배인으로 부임된후 제일 난처한 봉변을 당했던것이다. 어제저녁때다. 우연히 변전소 소장과 함께 퇴근하게 됐는데 그는 변전소확장공사에 쓰려고 아껴오던 벽돌을 발생로에서 실어갔다면서 몹시 아수해했다. 오늘아침엔 출근하자마자 전화종소리가 나기에 수화기를 들어보니 전해직장 지령원이 볼부은 소리를 했다. 아연도금판이 없어서 평방수를 따져가며 쓰는데 그런 식으로 솔솔 뽑아가면 어떻게 하느냐고 했고 기술학습실 관리원은 비품을 만들기로 된 피나무를 가져다 가구류를 짜고있는데 목공반에 그런 지령을 준 일이 있는가고 물어왔다.

분명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진것 같아 료해해보니 발생로작업반에서 한대식연구사의 주택을 건설한다는것이다. 참말로 어이없는 일이였다. 당장 가져온것들을 되돌려주고싶었으나 그럴 형편도 못되였다. 집은 이미 다 되였고 목공반에선 이불장과 찬장, 의자들에 니스칠을 하고있었다.

방하철은 이 사건을 조용히 덮어두기로 작정했다. 사람들은 이번 일이 지배인의 지령에 의해 벌어진것으로 알고있는데 부디 그 책임을 따져 석근수를 곤경에 빠뜨리고싶지 않았던것이다. 그러나 이런 무질서를 그냥 스쳐버릴수는 없었다.

발생로작업반에 나가 경종을 울려주고 석근수에게는 따로 만나 조용히 타일러주기로 했다. 그런데 당자인 석근수가 천연스레 잘한것처럼 나서니 방하철이 억이 막힐 지경이였다. 방하철의 심정을 알리 없는 석근수는 여전히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지배인, 우리 너그럽게 생각하세나. 연구사선생의 부인이 함께 있겠다고 내려왔는데 합숙에서 살림을 하랄순 없지 않나. 아무리 바쁜 때라두 우리가 지킬 도리야 지켜야지.》

《그게 무슨 도립니까. 연구사야 발생로만 되면 래일이라두 떠나갈 사람입니다. 그리구 그 부인두 편안히 살림이나 하자구 내려오지는 않았을겁니다.》

《그야 물론 그렇겠지. 연구사도 여기 오래 있을 사람은 아니네. 아무렴, 그런 귀한 사람이 한곳에 오래 배겨있으면 안되지. 그런 사람은 자꾸자꾸 자리를 옮겨야 하네. 그래야 나라의 재부가 늘어날것이네. 그런 귀한 사람한테야 대궐을 줘도 아깝지 않겠는데 문화주택 한채가 뭐겠나.》

방하철이 더는 듣고만있을수 없다는듯 주먹으로 자기의 손바닥을 내려치며 안타까이 말했다.

《그만하십시오. 제가 뭐 문화주택 한채때문에 그러는줄 아십니까. 시간이 급해서 그럽니다. 지금 공장이 어떤 형편에 있다는거야 아바이도 잘 알지 않습니까?》

《…》

석근수는 입을 꾹 다문채 묵묵히 있었다. 방하철은 마침내 그가 자신의 실책을 뉘우치는줄로 알고 한결 가라앉은 소리로 말했다.

《그리구 이런 측면도 고려해보십시오. 과학자에겐 연구조건만 보장되면 실상 더 바랄것이 없는데 우린 그에게 정도이상 모든걸 풀어줬다고 봅니다. 그랬으면 됐지 문화주택에서 살림살이를 꼭 시켜야 만족하겠습니까?》

《그래 살림살이를 시키면 좋지 나쁠거야 없지 않수, 지배인, 큰 공장 호주답게 맘도 좀 크게 가지라구.》

《?…》

방하철은 뜨아한 눈길로 석근수의 얼굴만 쳐다봤다. 진담인지 롱담인지 가늠이 안갔다.

《섭섭하겠지만 내 한마디 합세. 그동안 지배인이 발생로를 적극 떠밀어준것만은 사실이네. 그런데 오늘 보니 그것이 과시 무엇때문에 그랬던가싶구만. 발생로에서 비료나오길 그렇게 바라는 지배인이 그것을 붙들고 애쓰는 사람은 왜 중히 여기지 않수? 우선 사람부터 먼저 생각해야 되지 않겠소. 항차 연구사선생은 나라에서 아끼는 인재가 아니요.》

《아바이, 그런 인정때문에 공장이 지장을 받아선 안됩니다. 말이 난김에 한마디 권고해드리겠습니다. 오늘 우리 천리마시대의 과학자들에 대한 견해를 바로 가졌으면 합니다. 그들은 지난 일제시기의 고용자적 인테리들이 아닙니다. 그들 역시 우리 로동계급, 우리 공장을 위해 힘껏 헌신하고있으며 또 그런 각오로 일하고있다는것을 알아주십시오.》

《그만두슈. 난 지배인의 가슴이 이렇게 랭랭한줄은 생각도 못했수다. 지난날 고생두 했구 이젠 큰 일을 맡아보기에 높이 봤는데 인정머리란 영 없구려.》

석근수는 눈빛이 서늘해져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에 당황해난 방하철이 따라 일어서며 무슨 말인가 하려 했지만 석근수를 붙잡아세울순 없었다. 이날 밤 방하철과 석근수는 다같이 괴로운 마음속에 오래도록 잠들지 못했다.

이런 일이 있은 후 방하철지배인은 주택문제와 관련하여 일언반구 없었다.

그리하여 며칠이 지난 어느날 점심때 완공을 보게 된 문화주택에 새집들이가 조직되였다.

집들이래야 힘들것이 없었다.

박혜련이 평양을 떠나면서 수화물로 부쳐온 이불과 식기류 한 상자를 리숙이네 집에서 가져오면 된다. 조촐한 이사짐치고는 집이 너무 요란했다. 아래웃칸에 서재가 달린 세칸짜리 집인데 가장집물까지 없으니 방안이 운동장처럼 너렁청하다. 아연도금판을 씌운 지붕은 해빛을 받아 번들번들 광택을 뿌리는데 청석으로 매츨하게 석축한 퇴지며 가슴높이만 한 토벽으로 둘러막은 정원은 안온한 느낌까지 준다. 점심때라 온 작업반성원들이 몰려와 집안팎이 흥성거렸다. 처녀들은 신방을 맡기라도 한듯 괜스레 들락날락 부산을 피웠고 알탄조의 성미 깐깐한 녀인은 어디 불미한곳이 없는가 해서 회가루솔을 들고 추녀밑을 기웃거린다. 정원 한쪽 땅바닥에 펑더거니 주저앉아 이 모든 풍경을 부감해보고있던 석근수는 자기나름의 생각도 해본다. 이만한 품계의 집이면 누가 와서 산다 해도 한당대는 불편없이 지낼것 같았다. 처음 계획보다 빠른 날자에 그것도 훨씬 훌륭하게 된 셈이다. 항간의 세습대로 성냥을 가지고 와서 축하도 해주고 작업반성원들을 모아놓고 한바탕 춤판이라도 벌려놓아야 되겠으나 속은 선떡 먹은 기분이다. 가슴노리에 딱 맺힌 지배인의 그 못마땅해하던 목소리가 체기받았을 때처럼 때없이 치받치군 했다.

그의 이런 불안은 한대식내외분을 데리러 합숙에 갔던 차금희가 어깨를 떨구고 나타났을 때 급격한 파도를 일으켰다.

석근수는 자리를 차고 일어나 금희의 앞으로 마주 달려갔다.

《도대체 어떻게 된 감투끈이냐?》

《…》

금희의 초리긴 속눈섭이 물기에 촉촉히 젖어있었다. 합숙에 간 금희를 혼례 후 행군처럼 여기며 이제나저제나 기다리던 작업반원들이 와 몰려와 그를 둘러싼다.

《너 정말 정신없구나. 빈가마만 오면 어쩌니?》

《금희야, 한대식선생님한테 무슨 일이 생겼니?》

《야 참, 말좀 하렴.》

한대식부부가 그처럼 짧은 기간에 지어놓은 멋진 문화주택을 보고 깜짝 놀라할 그 짜릿한 환희의 순간을 기다리고있던 작업반원들이라 가랑잎에 불달린 마음들이다.

바싹 다가서며 중구난방으로 다과대는통에 고개만 푹 숙이고있던 금희가 《헉-》하고 흐느끼며 사람들 틈을 비집고 휭하니 달아났다.

《?!…》

모여섰던 사람들은 서로 마주보며 벙벙해지고말았다. 대략 짐작할수 있는 사람은 석근수뿐이였다. 그러나 석근수도 일이 이처럼 번져질줄은 생각도 못했다.

작업반성원들이 영문모를 불안에 잠겨있는 이 시각 한대식부부는 합숙에 앉아있었다. 한대식은 설계도면을 마주하고있었고 혜련은 며칠전부터 갑갑증을 없애려고 시작한 뜨개질감을 든채 우두커니 창밖만 내다본다. 그들은 그렇게 앉아있을뿐 생각은 온통 뒤죽박죽이다. 방금전에 혼자서는 가지 않겠다는 금희를 억지로 돌려보낸 그들이다. 한시간나마 눈물을 머금고 안타까이 호소하는 금희를 그냥 돌려보냈으니 무슨 경황이 있으랴. 혜련의 하얗고 연연한 볼로 맑은것이 소리없이 흘러내리고있었다. 눈물은 선이 부드러운 아래턱에 맺혔다가 뜨개질감을 쥔 손등우에 떨어져내린다. 애오라지 남편만을 생각하고 남편을 곁에서 도와주자고 불원천리 찾아왔는데 오히려 남편은 어서 빨리 평양에 올라가라고 한다. 그래야 맘놓고 발생로를 빨리 할수 있다는것이다. 내놓고 이렇게 말하는것은 아무리 부부사이라도 지나친것 같았다. 혜련은 그것이 서러웠다. 안해가 곁에 있으면 도움이 되겠지 설마 방해야 되겠는가. 야속하다 할 정도로 그렇게 말하는 남편의 심중엔 필경 그 어떤 곡절이 있는것 같았다.

안해에 대한 애정이 식어서인지 아니면 연구사업에 지쳐서 그런지 하여튼 그전과 달라진 남편이였다. 그들 부부는 말보다 생각을 많이 했고 행동으로 자기들의 의사를 나타내군 했었다. 직업상 특성때문인지 성격탓인지는 알수 없으나 어쨌든 그렇게 하는데 습관되여버린 그들이다.

어제저녁때다. 침울한 기색으로 합숙에 들어온 남편은 노상 안정을 못하고 서성거렸다. 웬간해서는 자기 감정을 나타낼줄 모르는 남편이라 자연히 혜련의 마음도 무거워졌다. 아닐세라 밤이 좀 깊어지자 남편이 정색해서 말했다.

여기 흥수에 아주 살려고 내려온것이 정말인가. 만약 그랬다면 잘못된 생각이니 더는 지체말고 어서 빨리 떠나라는것, 그래야 발생로도 맘편히 할수 있다는것이다. 이때까지 남편은 금희의 전보를 받고 병간호를 위해 내려와있은줄 알고있었다.

혜련이 역시 석근수의 말을 들은 후 구태여 자기의 처사를 까밝히지 않았다.

지각있는 안해라면 응당 이런 결심을 했어야 되리라고 생각하고있던 그는 남편의 그 불만스런 요구가 못마땅했다. 이렇게 되여 그들은 부부생활시작이래 처음으로 의견상이가 일어났다. 각자가 깊이 생각한 뒤끝에 하는 언행들이라 그이상 다른 말들이 오고간것이 없으나 혜련은 온밤 잠들수가 없었다. 남편에 대한 그의 심리적굴절은 방금전 금희가 합숙에 찾아온것을 계기로 하여 더 깊어졌다. 그들 부부가 점심을 끝내고 합숙에 잠시 앉아있는데 얼굴에 환한 웃음을 담은 금희가 뛰여들었다.

《아유 우스워. 오늘은 선생님과 사모님이 신랑신부와 같대요. 나는 뭐 혼례 후 행군이라나요. 호호…》

금희는 흰목을 뒤로 젖히며 그 특유한 소리로 깔깔 웃었다. 한대식은 오랜만에 듣게 된 그 명쾌한 웃음소리에 얼떠름해졌다. 사실 요즘 며칠사이에 금희의 생활에선 변화가 일어났다. 발생로가 상부의 의도에 저촉된다느니 연구사선생의 경력이 어떻소하며 부디 막아나서던 외삼촌 로익두조차 주택건설에 앞장섰던것이다. 이와 같은 현실은 자신도 어쩔수 없이 소심해지군 하여 안타깝고 원망스럽던 그 내심의 고민을 말끔히 씻어버린 청신한 샘물과도 같았다.

《아이참, 왜 그렇게 쳐다만 보세요. 어서 새집들이 차비를 하세요. 그렇지만 타고갈 가마는 없다는걸 아세요. 시대가 달라졌으니까요. 아바이랑 작업반성원모두가 지금 눈이 까매서 기다리고있답니다.》

《아니 그건 무슨 소리예요?》

혜련은 영문을 알수 없어 달려오느라고 아직도 가쁜숨을 내쉬고있는 금희의 손을 잡아흔들었다.

《사모님, 그전에 연구사선생님이 잠시 리용한 바다가옆 반토굴집 있지요. 사모님이 먼저번에 내려와 며칠 묵은 집, 바로 그 집터에 멋진 문화주택을 지어놓았답니다. 오늘 그 집에 이사하기로 했어요.》

《뭐라구요. 우리가 그 집으로 간단 말이예요?!》

《그럼요. 사모님이 여기 아주 내려왔다는 소식을 듣구 우리 작업반원들이 야간작업으로 한채 제꺽 지었답니다.》

《?!…》

혜련은 두눈이 휘둥그래졌다. 그러나 하얀 꽃들이 만발하여 벌들이 부산을 피우던 살구나무아래에서 이곳에 살림을 하러 내려왔다는 말을 듣고 그리도 흡족해하던 석근수아바이의 모습이 떠오르는 순간 모든것이 석연해졌다. 그때는 친정아버님같은 인자함과 부드러움에 이끌려 어려움도 잊고 속에 있는 말을 숨김없이 했는데 이처럼 살림집까지 지어줄줄은 생각도 못했었다.

《철이 아버지, 이게 사실인가요. 우리를 위해 집을 지었다는게?》

혜련의 목소리는 떨렸다.

《옳소!… 나두 뒤늦게야 이 사실을 알게 됐소.》

그러자 혜련의 눈빛이 광채로 빛났다.

《금희동무, 먼저 가세요. 곧 준비해가지고 우리 철이 아버지와 함께 가겠어요.》

《여보, 서두르지 마오. 우린 그 집으로 가서는 안되오.》

기쁨에 넘쳐 성급히 자리에서 일어서던 혜련은 말귀를 알아들을수 없어 남편을 피끗 바라보았다. 금희 역시 놀란 눈길로 한대식을 멍히 쳐다보았다.

《금희, 돌아가서 잘 말해주오. 나야 발생로만 끝나면 여기를 뜰 사람이 아니요. 그리구 집사람은 인차 평양에 올려보내려고 하오.》

《야참, 안타깝네. 왜 그런 말씀 하십니까? 그 집은 온 공장이 관심하여 지은 집입니다. 선생님이 새집들이를 하셔야 석근수아바이랑 우리모두가 기쁠게 아닙니까.

사모님, 어서 선생님한테 말 좀 하세요. 이러면 정말 안됩니다. 전 혼자 갈수가 없습니다. 지금 온 작업반이 선생님을 기다리고있답니다.》

《…》

한대식은 금희의 눈길을 피하듯 고개를 돌렸다.

혜련은 입을 꾹 다문채 돌처럼 굳어진 남편의 그 엄엄하고 매정한 모습이 더없이 야속했다. 물론 남편의 말처럼 발생로만 끝나면 래일이라도 올라가야 할 처지다. 그러나 이왕 지어놓은 집인데 그들의 성의를 봐서라도 집들이를 해야 옳지 않는가. 얼굴조차 내밀지 않는다면 그들이 뭐라고 하겠는가. 이처럼 도덕에 어긋나는 일이 어디 있담. 아, 앞으로 석근수아바이를 무슨 낯으로 대할수 있는가.

한대식이 여전히 침묵만 지키자 혜련의 손을 붙들고 안타까이 두발만 구르던 금희는 눈물을 뿌리며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의 뒤를 몇발자국 쫓아가던 혜련이 문설주를 꽉 붙잡은채 입술을 피가 나게 깨물었다. 그의 동실한 어깨가 세차게 오르내렸다.

《이건 너무 하시군요. 세상에 어디 이럴수가 있어요. 석근수아바이랑 우릴 사람값에 치겠어요?》

경련일듯 떨리는 혜련의 입에서 짓눌린 원망이 터져나왔다.

《누가 뭐라든 우린 그 집으로 갈수가 없소. 가서는 안된단 말이요.》

《?!…》

두부모베듯 하는 남편의 칼날같은 소리에 혜련은 흠칫 몸을 돌렸다.

《그리구 내 어제밤에도 말했지만 당신은 여기에 더 지체말고 평양으로 올라가야겠소.》

《?!…》

련이어 쏟아지는 남편의 서리발같은 말에 혜련은 온몸에 전률을 느꼈다.

《여보, 왜 그리도 내 맘을 몰라주. 당신은 내가 그들의 성의를 무시하는 랭랭한 인간처럼 여기는데 사람은 량심이 있어야 하오. 생각 좀 해보오. 지금까지 시험자료로 쓴 자재와 로력과 설비만 해두 끔찍한데 그런 집을 쳐다볼 렴치가 있겠소?》

《아니예요. 그것이 아니예요. 그런 형편은 저도 알고있어요. 그전과는… 어딘가… 많이 달라졌어요. 사람들의 진정을 너무도 몰라봐요.》

북받치는 설음을 겨우 눌러가며 토막토막 이어가는 혜련의 흐느낌은 강한 금선처럼 한대식의 가슴을 세차게 흔들었다. 그는 두눈을 지그시 감아버렸다.

명치끝이 찌르는듯 아팠다.

《이보세요. 제발 다시 생각해주세요. 공장에서 성의껏 지어준 집인데 부디 마다할 필요야 없지 않나요. 전 당신이 10년나마 언제 한번 따뜻한 방안에 앉아보지 못한게 가슴아파서 그래요.》

한대식이 천천히 눈을 떴다. 그는 푹 가라앉은 소리로 절절히 말했다.

《여보, 당신은 혹시 과학자를 귀하게 아껴주는 나라의 덕을 응당한것으로 여기는게 아니요? 만약 그런 생각이 티눈만큼이라도 있어선 절대로 안되겠소.

돌이켜보오. 지난날 나의 존재라는게 뭐였소. 연구사업은커녕 영영 매장됐어야 할 죄많은 몸이 아니였소. 그랬던 내가 이날까지 남부럼없이 연구사업을 해왔으면 됐지 여기서 뭘 더 바라겠소. 사람이란 도의가 있어야 하오. 나는 가끔 지나간 인생이 떠오를 때마다 죄스러움을 금할수 없소. 그런데 오늘은 또 제구실도 못하는 불민한 과학자를 위해 그처럼 큰 문화주택까지 지었으니 분에 넘친 이 혜택을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마음만 천근같소.》

한대식은 뜨거운 입김을 내불며 주먹을 가슴우에 꽉 눌렀다.

《여보, 당신이 38선을 넘어 서울로 나가던 때가 45년도 초겨울이였지?》

《하필 그 부끄러운 일은 왜 갑자기…》

혜련은 생각조차 하기 싫은듯 눈살을 찌프렸다.

《그때 사람들의 눈이 무서워 숨어살던 내가 오늘은 덩실한 문화주택에 어서 집들이를 하라구 하니 생각되는게 많아서 물어본거요. 인생이란 참…》

한대식은 막을수 없이 떠오르는 해방직후의 그 나날들에 자신을 맡겨버리고 말았다.

 

과연 하루하루 살아가기가 고역이였고 치욕스러웠다. 한대식은 자신이 삶의 막다른 계선에 서있다고 생각했다.

지겹고 숨막히던 1945년 12월 중순 어느날이였다. 신흥화학공장에서 그를 데리려 청년 하나가 또 왔었다.

《왜 왔소. 왜 또 왔는가 말이요?》

《선생님, 진정하시고 제 말을 들어주십시오.》

청년과 한대식은 우뚝 솟은 해변가 바위우에 격투나 벌리려는듯 마주 서있었다. 한대식은 두번째로 찾아온 이 청년의 거동이 심상치 않아 이 외진곳으로 그를 데리고 나왔던것이다. 정 마음을 괴롭힌다면 여차직 바다물에 뛰여들 비장한 각오였다. 어떻게 이처럼 매일 매시각 뭇사람들의 증오와 규탄과 감시속에 살아간단 말인가. 응당 새 제도에서 매장되여야 할 몸일진대 더 살아무엇하랴.

코밑에 가뭇이 수염티가 잡히기 시작한 청년은 만나자마자 분격을 터치는 한대식의 앞에서 어찌할바를 몰라 쩔쩔맸다.

발밑에선 파란 바다물이 쉼없이 바위굽을 때렸고 송림을 스쳐 내려부는 맵짠 바람이 바다표면에 하얀 물갈기를 일으켰다.

《어서 가오. 난 아무데도 안가겠소. 정 끌고가겠으면 포승줄로 묶어가오.》

《선생님, 전번엔 제가 죽을죄로 잘못했습니다. 이렇게 용서를 빌겠습니다.》

청년은 한대식의 발밑에 두손을 짚으며 너픈 엎디였다.

한대식은 쓰겁게 내려다보다가 그의 어깨를 잡아일으켜세웠다.

《도섭을 부리지 마오. 난 동무를 탓하지 않소. 내스스로 자신을 저주할뿐이요.》

한대식은 끓어오르는 울분을 참을수 없어 모자를 벗어 허공에 힘껏 던졌다.

세찬 바람에 그의 머리칼이 마구 흩날렸다. 얼음같은 저 바다물에 뛰여들어 기운이 진하도록 몸부림치고싶었다. 그전에는 나라없는 인테리의 설음이 골수에 사무쳤으나 이발을 사려물고 참아왔는데 그처럼 기다리던 해방이 되자 이번엔 그 무슨 역적취급을 당해야 하니 이제 더는 살아있을 필요가 없었다.

석달전 바로 이 청년한테 받은 봉변이 아직도 피멍처럼 가슴에 맺혀있다.

그날도 울적한 낯으로 오전 마지막수업을 끝내고 시름속에 복도를 걷고있는데 코밑수염이 가무스름한 청년이 그를 다짜고짜로 공원안으로 끌고갔다.

《한대식이란 사람 맞지요?》

《그렇소.》

《이제 당장 우리 화학공장에 가야겠소.》

《?!…》

《공장을 돌려야겠는데 기술자가 없어 그러오. 미처 도망치지 못한 쪽발이기술자 대여섯놈을 붙들어놨는데 어디 우리 말을 듣소. 당신이 그놈들과 친한 사이라니 당신 말이야 듣겠지.》

《뭐라구요?… 난 친일분자가 아니요.》

《그럼 왜 여기 도망쳐왔소? 일제때 그만큼 놀아먹었으면 이젠 우리 말을 순순히 들어야지. 두말 말고 떠날 준비나 하오.》

《…》

한대식은 고개를 푹 떨구고말았다. 옆구리에 끼고있던 출석부와 교수안이 맥없이 떨어져 바람부는대로 딩굴었다. 아무런 반박도 할수 없다. 부인할수 없는 자신이였다.

해방전 그는 일본 도꾜 물리과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함흥 노구찌연구소 연구사를 거쳐 과장까지 했다. 일본인중에서도 선출된자들만이 있던 이 연구소에 그가 입직할수 있은것은 일류급 대학의 수석졸업생이라는것이 작용한것 같다. 이 연구소에서 해방을 맞은 그는 시세의 흐름이 험악해지는것 같아 이곳으로 몸을 피해와 고등녀학교 청탁 화학교원을 하고있었다.

한대식이 대답없이 고개만 떨구고있자 청년이 버럭 고함쳤다.

《가겠소 안가겠소?》

《난 못가오.》

《좋소, 아직 민주방망이맛을 못봤군. 공장을 돌려야겠으니 할수 없이 찾아다니지 당신이 해방된 땅에 머리쳐들구 다닐수 있는가?》

청년은 금시 꽉 틀어쥔 주먹을 휘들어댈듯 호통을 치다가 할수 없는지 그냥 가버렸다.

한대식은 동요속에 모대겼다. 나라가 해방됐으나 공장을 돌리지 못해 숱한 사람들이 이리저리 뛰며 애타하는데 자기는 목숨이 두려워 조용한곳에 피신하여 교편이나 잡고있자니 마음이 괴로왔다. 로동자들의 몽둥이에 머리가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 청년을 따라갔어야 했다. 마음이 답답하고 괴로와질수록 그 청년이 다시 오지 않겠는가 하고 기다려졌다. 그처럼 기다리던 청년이 이렇게 석달만에 찾아와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건만 왜 그런지 반감이 솟구쳐오르는것을 억제할수가 없었다. 청년은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찾아왔다.

닷새째 되는날 한대식은 함흥으로 갈것을 결심했다. 응당 새 제도에서 제재를 받아야 할 몸인데도 마다하고 모처럼 찾아와 거듭 권고하는것을 그냥 모른다고만 할수 없었다. 더구나 자기를 불러준 사람이 일제시기 려순공대까지 나온 함흥지구 5대공장 기사장이라는데 마음의 안정을 느꼈던것이다.

한대식은 교장에게 떠난다는 하직인사를 했다. 교문을 나서던 그는 걸음이 무거워져 마지막으로 학교청사를 부감했다.

꺼먼 이끼가 돋은 화강석층계는 고색이 짙은데 말라버린 담쟁이넌출이 4층벽까지 꽉 덮었다. 원산에서는 력사가 있다는 녀학교다. 비록 피신한 몸으로 석달이란 짧은기간 청탁수업을 했으나 떠나자니 감회가 애틋했다. 해빛에 번뜩이는 4층창문 어디선가 가지 말아달라고 소리쳐 부르는것만 같았다.

《선생님-》

웬 녀학생이 운동장을 가로 질러 엎어질듯 달려오며 손저어 불렀다. 그가 남달리 애정을 기울며 배워주던 화학소조 조장이며 학교 학생자치회회장인 혜련학생이였다.

《선생님, 떠난다는게 사실입니까?》

숨가쁘게 달려온 혜련은 그 커다란 눈에 놀라움을 가득 담고 한대식을 빤히 쳐다봤다.

《마침 잘 만났소. 좀 걸으면서 말합시다.》

한대식은 불쑥 자석처럼 강한 힘으로 발목을 붙잡는 작별의 애릿한 정이 바로 이 녀학생에게 있었다는것을 느꼈다.

《선생님이 가시면 우리 화학소조는 어떡합니까? 제발 가지 말아주세요. 네?》

혜련은 한대식의 팔을 붙잡으며 열렬히 간청했다.

《난 가야 하오. 건국을 하는데 내가 필요하다고 두번씩이나 사람이 왔소.》

《건국을 하는데 필요하다구요?… 그 다음엔 어떻게 한답니까?》

《그이상은 바랄게 없소. 우리 나라가 문명강국으로 되는게 내 소원이요. 그 어느놈두 우리 민족을 업수이 보지 못하게말이요.》

《전 선생님의 그 뜻을 언제나 존경해요. 그런데 하필이면 그곳으로 다시 가시다니요.》

혜련은 이미 그 결심을 막아낼수 없음을 알자 호- 하고 가는 숨을 내쉬였다.

그들은 어느덧 학교뒤 야산을 벗어나 송도원 모래불을 가까이 하고있었다.

일요일이나 야유회때 자주 나오군 하던 곳이였다. 여기 시원한 해수욕장과 산뜻한 그늘의 송림속에서 그들은 사제간의 감정을 벗어나 야릇한 정취에 잠기군 했었다.

남달리 학구욕이 강하고 총명했던 혜련은 느닷없이 눈앞에 나타난 한대식을 하늘에서 내려보낸 사도처럼 우러러따르게 되였다. 조선사람으로서 도꾜 물리과대학 수석생이며 노구찌연구소 과장까지 했다는 한대식이 박혜련에게 있어서는 하늘의 별과 같은 존재였다. 그런데다 6척장신의 그쯘한 체격에 사색과 열정이 비발치는 영특한 눈매는 단번에 뭇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조선의 큐리가 될것을 꿈꾸던 혜련에게 한대식의 출현은 혜성의 발견이였고 대공을 날으려는 날개와 같았다. 그는 화학청탁교원인 한대식의 곁에서 떨어질줄 몰랐다. 조금이라도 의문이 생기면 밤이고 낮이고 가림없이 그의 숙소로 달려가 묻군 했다.

녀학생의 불같은 정열과 엉뚱한 질문에 한대식은 자주 놀라군 했다. 그 접어드는 품과 지칠줄 모르는 열정이 록록치 않았다. 잘만 이끌어준다면 두각을 나타낼수 있는 예지로운 처녀가 분명했다. 그래서 그를 유일한 제자로 점찍고 심혈을 기울였다. 지향과 사색과 정열의 공통성은 이들의 관계를 떼여놓을수 없을 정도로 밀착시켰고 행복한 사람들로 만들었다.

어느날 혜련의 어머니가 한대식을 집으로 초대했다. 한대식은 마다할수 없어 석양이 깃들무렵 송도원이 눈앞에 보이는 시내변두리에 위치한 그의 집으로 갔다. 빨간 벽돌로 키를 넘게 담을 싼 정원안에 수세가 좋은 세그루의 감나무가 있었다. 누렇게 뜬 이파리들은 건듯 불어오는 선들바람에 하나둘 핑그르르 돌며 땅우에 내려앉는데 가지가 휘도록 매달린 자홍색의 주먹같은 감들이 석양을 받아 신비한 발광체처럼 빛을 뿌렸다. 나무밑에는 꼭지가 물러나 떨어진 말큰한 감알들이 두툼한 락엽속에 딩굴고있었다. 한끗 무르녹은 자연의 이 풍경은 담쟁이가 한벌 쫙 덮인 2층양옥집의 번뜩이는 유리창들과 조화를 이루면서 웅건한 운치를 한껏 돋구고있었다.

그가 커다란 널문옆에 매달린 초인종끈을 잡아당기자 신발을 찰찰 끄는 소리와 함께 대문이 활짝 열리며 아래우 수수한 옥당목 치마저고리를 입은 녀인이 반겨맞았다. 혜련의 어머니였다.

《어서 들어오세요. 인력거로 모셔와야겠는데 우리 딸애가 성을 내는바람에…》

《감사합니다.》

한대식은 세면이 책들로 꽉 채워진 자그마한 방으로 안내되였다. 혜련의 방이다.

간단한 인사의 말이 끝나자 상우에 풍성한 다과가 올랐다. 혜련의 어머니가 딸을 향해 슬며시 눈짓했다.

《얘야. 선생님한테 피아노를 한 곡조 쳐드리렴.》

《어머닌 그저 피아노밖에 모르셔. 선생님은 그런것 좋아안해요.》

혜련은 어머니를 할깃 바라보며 시치밀 뗐다.

《피아노를 들으면서 다과를 하면 좋지 나쁠게 뭐냐. 그렇지요. 선생님?》

《어머님 말씀이 옳습니다.》

《그것 봐라. 뭐니뭐니해두 사람 맘 즐겁게 해주는게 피아노다. 선생님의 심신이 확 풀리게 어서-》

혜련의 어머니는 안달이 나서 독촉했다. 혜련은 수집은듯 갸름한 볼을 발깃하게 물들이며 한대식을 조심스레 쳐다봤다. 한대식이 동의한다는듯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더는 거절할수 없게 된 혜련은 사뿐 일어나 창문가에 놓인 피아노앞으로 갔다.

보기 희귀한 가정용피아노였다. 의자에 단정히 앉아 명상에 잠겼던 그는 이윽하여 한대식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선생님, 무슨 곡을 쳐드릴가요?》

《어머님이 제일 좋아하는 곡을 쳐보우.》

《그건 안돼요. 어머닌 슈벨트나 쇼뻰, 모잘트의 고전음악들중에서도 서정적인것들을 좋아하시는데 저는 그런 목가적이고 이슬의 속삭임과 같은 잔잔한 곡들은 싫어요. 그다음 어머님이 즐기시는 곡은 〈봉선화〉나 〈밀양아리랑〉인데 피아노곡으론 어딘가 흥취가 안난답니다.》

《저런년 봤나, 이 에미 성미하군 정 반대라니까. 선생님, 어찌겠습니까. 선생님이 곡을 하나 선정해야겠군요.》

음악과 거리가 먼 한대식이 생각이 궁해져 딱한 미소를 그리였다. 대학시절야회나 모임때 음악감상을 자주 했으나 듣고 음미해보는것을 더 즐겼다. 혜련은 그럴줄 알았다는듯 새뭇이 웃어보이더니 《선생님맘에 드는 곡은 제가 택하겠어요.》하고 피아노건반우에 손을 얹었다. 역시 속에 든것이 있는만큼 촉기 빠르고 령리한 처녀였다.

살갗이 뽀얗고 말쑥한 손끝이 꽃우를 날으는 흰나비처럼 사뿐사뿐 옮겨지자 솟아오르는 해빛처럼 조용하고 단조로운 선률이 은은히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짙은 정서와 다감한 생활이 깔려있어 사색에로 이끄는 피아노곡 《이딸리아의 정원》이였다. 단조롭던 선률은 속삭이듯 호소하듯 유연히 굽이치는 시내물로 변해 깊고 청신한 숲을 지나 벼랑굽에 떨어지는 폭포수로 점차 고조되여 장중하게 울리더니 또다시 드넓은 바다에 합류되듯 한없이 부드럽고 풍만한 곡조로 바뀌여 천길 물속깊이로 잦아든다.

한대식은 자기의 심혼을 한순간에 틀어쥐고 신비의 세계로 이끌어가는 피아노의 선률에 심취되여 혜련의 모습을 넋없이 바라보았다. 그의 윤기 흐르는 까만 머리태는 선률의 고조와 함께 파도우를 날으는 갈매기의 날개처럼 퍼득였고 동실한 어깨는 건반을 힘있게 내짚는 경쾌하게 쭉 빠진 나긋나긋한 팔의 률동에 따라 흥겹게 춤을 추는것 같다.

그의 세련되고 변화무쌍한 자태는 열정과 호소성이 강한 선률로 하여 더욱 우아하게 보이는데 일류급 극장 피아노수 못지 않았다.

《선생님, 저 애의 피아노솜씨가 어떻습니까?》

한껏 자부와 자애가 깃든 혜련이 어머니의 묻는 말이였다.

《대단합니다. 정말 천부적인데가 있는것 같습니다.》

《선생님이 그렇게 평가해주시니 제 마음이 푹 놓입니다. 난 그전에 저 애를 로마나 윈에 보내여 피아노수로 키워볼가 했는데 어디 이 에미 말을 들어줍니까. 애 아버진 상업계통에 진출시키려 하지만 저 앤 음악을 해야 성공합니다. 선생님, 제발 저를 좀 도와주세요. 선생님을 이 에미보다 더 따르는 애니 선생님이 권고하면 차마 마다하진 못할거예요.》

그러고보니 자기를 집에 초대한 목적이 여기에 있는것 같았다.

한대식은 딸가진 어머니의 이 소박한 념원을 탓하고싶지 않았다. 어머니의 말처럼 천부적인 재간을 가진 혜련이가 음악계통에서 크게 성공할수도 있지 않는가.

한대식은 모녀간의 의견차이를 알고싶어 한마디 물었다.

《저런 재간을 가지고 왜 류학을 가지 않겠다고 합니까?》

《자기는 뭐 과학자가 되겠다나요. 음악은 한때의 감상과 흥취로 끝나지만 과학은 인류의 영원한 창조물이라는거지요.》

《허허, 그럴듯 한 지론이군요. 제가 권고는 해보겠습니다만 본인의 지향을 부디 막아서는 안됩니다. 그도 이젠 다 자란 처녀가 아닙니까.》

《아니 선생님까지요?!…》

이런 일이 있은 후 한대식과 혜련은 더 깊이 리해하게 되였다. 혜련은 사제간이라는 한계를 벗어나 한대식을 친근한 맏오빠처럼 따랐다. 한대식이도 혜련이가 있는것으로 하여 자기가 피신해온 쓸쓸하고 궁색한 처지라는것을 종종 잊을수 있었다.

한마디로 한대식에게 있어서 혜련은 사막의 오아시스였다. 그 오아시스를 여기 두고 신변의 안전을 바이 담보할수 없는 떠나온 고장으로 다시 가야 하는것이다.

혜련이도 그것이 안심찮은듯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저 멀리 검푸른 바다가를 바라보며 가는 숨만 내쉬고있다. 그는 자기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라 가쁜 숨만 몰아쉬다가 망설이고만 있을수 없다는듯 한대식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선생님, 저의 부탁을 하나 들어주시겠습니까?》

《무슨 부탁인데.》

《우선 약속부터 하세요.》

《첫 부탁인데 싫다고 할수야 없지.》

《그럼 됐어요. 선생님, 저와 함께 서울로 가십시다.》

한대식은 뜻밖의 부탁에 어리둥절해지고말았다.

《사실은 먼저 서울로 나간 아버님께서 어서 어머님을 모시고 나오라는 독촉이 몇번이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선생님과 떨어지기 싫어서 이때까지…》

《그랬구만. 그러나 서울로는 갈수 없소. 그곳엔 미국놈들이 들어왔소.》

《그놈들이 우리와 무슨 관계예요. 가시자요. 거기 가서 선생님은 대학에서 교편을 잡으시고 저는 그 대학 학생이 되구요.》

《그렇게는 할수 없소. 혜련이도 서울로 가지 말았으면 하오.》

《부모님들도 없이 저 혼자 어떻게 여기 남아있는다고 그러세요.》

《혜련인 혼자가 아니요. 여긴 내가 있지 않소. 난 혜련일 놓아주지 않을테요. 영원히.》

했으나 이 말은 입안에서만 맴돌았다. 할수가 없었다. 눈앞의 운명이 위태한때 꽃다운 이 처녀의 순결한 가슴속에 한점 티라도 남길수 없다. 미련없이 헤여지자. 깨끗한 추억을 간직한채, 리성은 이렇게 심장의 문을 두드렸으나 점점 가빠지는 숨결을 어쩔수가 없었다.

이름할수 없는 류다르고 그윽한것이 가슴속에 꽉 들어차 뜨겁게 소용돌이쳤다. 그는 간절한 요구가 가득한 이슬젖은 처녀의 구슬픈 눈동자를 당장 태워버릴듯 들여다봤다. 처녀는 몸을 약간 흠칫하더니 촉촉이 젖은 긴 살눈섭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갑자기 숨결이 높아지고 이글대는 눈길로 다가서는 사나이가 두려웠던것이다. 처녀의 봉긋한 가슴이 세차게 오르내렸다.

《혜련이!-》

격한 목소리에 처녀의 놀란 눈길이 한대식의 얼굴을 타는듯이 마주바라본다.

그것도 순간 파르르 떨리던 속눈섭에 맑은 물방울이 맺히는것과 동시에 처녀는 얼굴을 감싸쥐며 고개를 꺾었다.

《전… 전 헤여지고싶지 않아요. 헤여질수… 없어요. 가시자요. 가시자요. 저와 함께…》

처녀는 어깨를 세차게 들먹이며 애절히 속삭였다. 한대식은 숨이 콱 막혔다.

그 어떤 위로의 말도 기약도 할수 없는 궁한 처지에 뼈가 녹는것 같았다.

그들의 머리우에 은가루같은것이 나풀대며 내려와 앉는다. 이해 두번째로 내리는 눈이였다. 흰눈송이는 점차 굵어지면서 리별의 사품치는 안타까움을 대신 속삭여주듯 사르륵사르륵 많이도 내렸다.

이렇게 헤여진 한달후 어느날 한대식은 뜻밖의 편지를 받았다.

《… 저는 오늘 어머님을 따라 서울로 갑니다. 차마 발길이… 떨어지질 않습니다. 선생님이 그곳으로 가신 후 하루인들 맘놓을수가 없었습니다. 이 편지가 과연 선생님께 가닿기나 하겠는지…》

한대식은 어이없어 먼 남쪽하늘가를 쳐다봤다.(끝내 이렇게 헤여지고말다니… 이제는 영영 다시 만날길이 없어졌구나!…)

가슴이 쓰렸다. 여기로 올 때 그를 데리고 오지 못한것이 분했다.

그때 한대식이가 그처럼 주저하고 두려워했던 공장에서는 그를 귀인처럼 맞아주었고 책임기사라는 중책까지 맡겨주었다. 진정 꿈에도 바랄수 없던 기이한 일이였다.

알고보니 그것은 어버이수령님께서 친히 베푸신 조치였다.

보름전 흥수비료공장에 몸소 찾아오신 수령님께서는 해방직후 모래알처럼 산산이 흩어진 과학자, 기술자들의 행처를 한사람한사람 세심히 알아보신 후 그들모두가 나라의 귀중한 보배들이라 하시며 어떤 일이 있어도 다 찾아내야겠다고 간곡히 말씀하셨던것이다.

수령님의 신임과 배려는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책임기사로 일한지 1년도 못되는 어느날 한대식책임기사는 연료화학에 남다른 뜻을 둔 곡절많은 사람이니 과학원에 소환하여 그의 소원을 꼭 풀어주라는 뜨거운 은정을 베푸시였다.

소환장을 받아든 한대식은 북받치는 감격을 참을수 없어 오래도록 큰소리로 격정을 터치였다.

어릴 때부터 탄광지구에서 자라난 그는 특이할 정도로 석탄에 대한 애착이 컸다. 이 땅에 석탄이 어떻게 생겨났을가? 석탄은 왜 새까만가? 우리 나라에 그 많고많은 석탄으로 먹고 입는것을 만든다면 조선사람들이 얼마나 잘 살겠는가. 그렇게만 되면 일본놈들보다 더 강대해질수 있고 식민지노예살이도 하지 않을것이다. 이러한 호기심과 탐구심은 점차 일제에 대한 적개심으로 타올랐다. 그 귀중한 석탄이 현해탄을 넘어 일본땅으로 실려갔고 일제의 대륙침략을 위한 군수물자로 탕진되고있었다.

한대식은 이를 악물고 학업에 전력했다. 석탄이 아까왔고 일본놈들한테 눌려사는것이 원통해서였다. 대학을 수석으로 마친 그는 노구찌놈의 동해지구연구소에 배치된 그해 오래동안 고심해온 《석탄과 합성수지》란 소론문을 세상에 내놓을수 있었다. 그런데 이 론문이 그처럼 큰 불행의 화근이 될줄이야…

론문이 기술잡지에 발표되자 연구소소장놈은 즉시에 그를 호출하여 시약관리원으로 강직시켰다. 반도인으로서 소위 연구소의 엄정한 《질서》를 어기고 제맘대로 론문을 발표했다는것이 그 구실이였다.

한대식은 미칠것만 같았다. 그는 며칠간 밥도 먹지 않았고 일본《천황》에게 항의문도 써봤다. 그 모습이 가긍했던지 한 일본인 연구사가 조소어린 소리로 비꼬았다.

《당신 참 어리석소. 그것이 반도민족의 응당한 운명인데 웬 삿대질인가?》

한대식은 온몸이 후들후들했다. 과학으로써만이 일본놈들을 눌러볼수 있다고 생각한 자신이 어리석기 그지없었다. 집으로 달려간 그는 소중히 간직했던 론문을 꺼내 불을 달았다. 론문은 순식간에 불길과 연기에 휩싸여 한점 재도 남기지 않았다. 앞이 캄캄했다. 꿈도 미래도 삶도 저 연기처럼 영영 사라지고만것이다.

한대식은 그날부터 벙어리가 되고말았다. 듣지도 보지도 않았다. 속에서 피가 흘렀고 울분으로 숨이 막히는것 같았다. 당장 연구소를 뛰쳐나오고싶었으나 혀를 깨물며 참았다. 대세의 흐름이 일제의 패망을 예고하고있었다. 아니나다를가 44년도에 들어서자 과장 등 연구소의 많은 직원들이 태평양전쟁터로 나갔다. 연구소는 텅 비게 되였다. 이렇게 되자 소장놈은 할수없이 한대식을 과장자리에 앉히게 되였으나 명색뿐 과에는 한대식 한사람뿐이였다.

해방과 함께 한대식은 갈피를 잡을수 없었다. 오매불망 기다리던 날이였으나 반역의 오점이 찍혀진 몸이라 사람들앞에 나설수가 없었다. 그를 구원해주신분이 바로 수령님이시였다. 수령님께서는 오욕에 젖어 숨어있던 그를 풀숲의 바늘 찾듯 애써 찾아내시여 누구도 모르게 간직하고있던 가슴속 소망까지 풀어주신것이다.

어디 그뿐이신가. 흥수비료공장에 찾아오신 수령님께서는 우리의 화학은 석탄과 석회석을 기초로 하여 발전시켜야 한다고 앞길을 환히 밝혀주셨으니 그 강령적교시는 연료과학자인 한대식에게 온 우주를 안겨준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때부터 한대식은 사색과 활동의 강력한 발화점을 가지게 되였고 수령님의 뜻을 실현하는 이 길우에 영원토록 변함없을 충성을 맹세다졌던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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