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한대식은 누군가의 눈길이 자기 몸을 찬찬히 훑어보는감을 느꼈다. 그때야 자신이 좀전에 호실문여는 소리에 잠에서 깨여나있었다는것을 알았다.
간호원처녀가 또 왔겠지 하고 짐작이 갔으나 눈을 뜨게 되지 않았다. 엊그제 붕대를 풀었는데 밝은 빛을 보면 아직 찌르는듯 눈물이 나왔다.
원래 육체적준비가 좋고 의지 또한 강하여 감기나 몸살쯤은 걸어다니면서 넘기군 하던 그다. 그래서 이번에도 입원치료를 완강히 거부했는데 어찌된 일인지 온몸의 마디란 마디는 다 녹아내리는것 같았다. 헛소리가 그냥 나갔다.
난생 처음으로 참기 어려운 진통을 겪은것 같다. 오래동안 과로가 겹친데다가 시신경에 고열과 강한 자외선타격을 받은것이 발병의 원인이라고 했다. 그는 자신이 10여일이 넘도록 침대에 누워있으리라군 상상도 못했다. 병세가 수그러들자 엊그제부터 의사대신 간호원처녀가 하루 세번씩 와서 치료하군 하는데 오늘은 어떻거나 자리를 털고 일어날 결심이였다. 그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러자 밝은 빛살이 두눈동자에 흘러들며 몇번 잔침질을 했다. 어제보다 그 자극이 훨씬 덜했다. 신심이 생기자 마음놓고 크게 떴다.
《제가 잠을 깨운것 같군요.》
《?!…》
너무도 귀익은 목소리에 그는 상반신을 벌떡 일으켰다.
《저예요. 제가 왔어요.》
《당신이 어떻게 된 일이요?》
아직도 믿어지지 않는듯 멍하니 앞에 선 녀인을 바라보던 그는 부축해주는 안해의 두손을 덥석 그러잡았다. 침대머리에 서있던 박혜련이 허리를 굽히며 한대식을 다시 눕히려 했다.
《어서 그냥 누워계세요. 아직 열이 있어요. 누워서 말씀하세요.》
《난 이젠 괜찮소. 그런데 당신 손이 왜 이렇게 차오. 역에서 곧바로 온게 아니요?》
《그랬어요.》
한대식이 더는 눕지 않고 침대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뜻밖에 나타난 안해가 리해되지 않는지 그에게서 눈길을 떼지 못했다. 박혜련은 며칠전에 차금희의 편지를 받은적이 있었다. 문안편지였으나 시험발생로를 공장에 인계해준 후 인차 뒤따라 올라오겠다던 남편이 왜 이때까지 아무 소식 없었는지 짐작이 갔다. 더우기 편지의 마감대목은 그의 눈을 붙잡은채 놓아주질 않았다.
《…그런데 사모님, 무연탄가스화를 달갑지 않게 대하는 견해가 있는것 같습니다. 그것이 어느 개인의 생각이라면 몰라도 우에서 내려왔던 부상의 말이라니 우려되는바가 자못 큽니다.…》
혜련은 두번세번 곱씹어 읽어보았으나 무슨 뜻인지 종잡을수가 없었다.
집떠나 십여년간 온넋을 바쳐가는 연구사업을 그 누가 달갑게 여기지 않는단 말인가. 애오라지 그것 하나만을 위해 살아가는 연구사에게 힘을 주고 축원은 못해준다 해도 소원하게 대할것까지야 어디 있는가. 이런 몰인정한 사람이 있다는 자체가 믿어지질 않았다. 그는 그 길로 과학원 부원장 강지창을 찾아갔다. 잊을수 없는 인연으로 하여 강지창과 혜련은 잘 아는 사이였다.
《그런 사람들이 있을수 있습니다. 새것의 창조가 아닙니까. 무연탄가스화는 꼭 해야 합니다. 이것은 비단 연료과학에서 새로운 발명뿐이 아니라 우리 나라의 화학공업을 어떤 자세와 립장에서 발전시키겠는가 하는 근본문제로 됩니다…》
강지창은 무슨 말인가 더 하려다가 안심하고 어서 돌아가보라고 했다. 혜련은 마음이 놓이였다. 그리고 남편의 사업에 대해 잠시나마 의혹을 가져본 자신이 부끄러웠다. 집에 돌아온 그는 미풍에 하느적거리는 창가림이며 세칸방을 꽉 채운 가구류들과 재봉기며 라지오를 무표정한 눈길로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내려가야 한다. 곁에 있으면서 도와주자. 남편과 떨어져있는 나의 존재란 실상 아무 쓸모가 없다. 왜 오늘에야 이런 생각이 든담. 그렇다. 결혼후 이때까지 나는 헛살아온 셈이다.…)
이러한 결심은 이틀후 날아든 전보 한장으로서 움직일수 없이 확고해졌다.
《연구사선생님 눈치료중. 기회가 있으면 내려올것. 차금희.》
이렇게 되여 혜련은 두번째로 흥수땅에 발을 디뎠다. 그는 묻는듯 바라보는 남편에게 차금희의 전보가 왔기에 내려왔다고 했다.
《고맙소. 그런데 금희가 괜히 소문내며 걱정했구만. 난 오늘부터 현장에 나가려던 참이였소.》
혜련은 어이없는듯 헐끔해진 남편의 모색을 애잔한 눈길로 뜯어보다가 옆에 놓인 배낭에서 사과 몇알을 꺼냈다. 겨울난 사과라 발그노리하고 향기가 물씬 났다.
《하나 들어보세요.》
사과를 받아든 한대식은 터질듯 꽁꽁 다져넣은 배낭이며 그옆에 놓인 트렁크를 못마땅히 바라보았다. 사과를 또 하나 들고 천천히 손칼을 놀리던 혜련은 남편의 심상치 않은 기색에 손을 멈추며 눈을 들었다.
《여보, 먼길 온 당신의 맘 내 잘 알지만 한마디 듣소. 당신은 남편이 늘 외지에서 고생만 하는것 같아 두번씩이나 이렇게 내려왔는데 그건 지나친 걱정이요. 나와 함께 있는 석근수아바이나 당신두 잘 알고있는 리숙동무 그리고 금희랑 모두가 얼마나 친절한지 모르오. 단지 내가 괴로운건 아직도 그들의 방조와 기대에 보답 못하는거요. 그런데 당신이 만사를 제치고 이렇게 또 내려오니 그들 보기가 뭣해지누만.》
심중한 안색으로 남편의 말을 듣고있던 혜련의 얼굴이 점차 밝아졌다. 그는 《여보, 그러니 이제 더는 다른 사람들의 페를 끼칠 필요가 없지 않나요. 제가 아주 내려오길 잘했군요.》하고 말하고싶었으나 꾹 참았다.
남편이 허락도 하지 않은데다가 또 자기의 이번 결심을 어떻게 대할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서둘러 말하게 되지 않았다.
《여보, 그쪽일은 맘 놓으세요. 철이랑 직장일두 다 잘 처리하고 내려왔어요.》
혜련은 웃는 낯으로 적당히 안심시켰다.
한대식은 안해의 천연한 태도에 속이 확 달아올랐다. 지금 어디 적당히 살아갈 땐가. 달려도달려도 시원치 않아 내닫는 천리마에 박차를 가하는 긴장한때 남편의 뒤시중이나 들겠다니 어디 말이 되는가. 그는 손에 들었던 사과를 놓고 자리에서 성큼 일어섰다.
순간 눈앞이 캄캄해지고 다리가 허청거렸다. 침대 모서리를 꽉 잡고 잠시 그대로 서있었다. 그러자 눈앞에 무수히 떠돌던 노랗고 까만 동그라미들이 점차 사라지고 다리에 힘이 갔다.
《왜 그러세요?》
혜련은 하얗게 질렸다가 서서히 불깃해지는 남편의 낯색을 예리하게 살피며 그의 어깨를 부축해주었다. 약학을 전공했으나 림상에도 어지간히 조예가 있는 그였다.
《밖을 좀 내다보고싶소.》
한대식은 안해의 몸에 한 어깨를 실으며 창문가로 다가갔다. 이때 위생가방을 한쪽 어깨에 메고 방안에 들어서던 간호원처녀가 두눈을 새별처럼 빛내이며 손벽을 딱 쳤다.
《야, 선생님이 일어나셨군요. 뭐니뭐니해두 마음속의 간호가 제일이야. 사모님, 정말 고맙습니다. 새벽차에 오셨다지요?》
《그동안 간호원동무가 수고많았어요. 감사해요.》
혜련이 한발 다가서며 동실한 얼굴에 귀밑솜털이 포시시 남아있는 애어린 처녀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됐어요. 이젠 됐어요. 어제도 그냥 발생로에만 나가겠다는거죠뭐. 자신은 의지가 강하니 이젠 얼마든지 견딜수 있다시며 병이 그걸 알아주나요뭐. 아직두 39도 8분데.》
한대식은 마치 기다리고있던 사람이 온듯 신이 나서 주어섬기는 처녀의 목소리가 그 어떤 질책처럼 들려와 고개를 돌려버렸다. 순간 그의 두눈은 환희로 번쩍 빛났다. 창밖아래 공원에는 살구, 복숭아나무가 몇그루 서있는데 아지마다 핀 꽃이 요란했다. 어찌나 만발한지 하얀 솜뭉치를 더기더기 걸어놓은듯 아지는 전혀 보이지 않고 온통 꽃송이뿐이다. 그는 창문을 방싯 열었다. 그러자 진한 향기가 훅훅 밀려들며 페부속을 진동시켰다. 벌써 어디선가 날아든 꿀벌들이 부지런히 날아예며 수밀하기에 분주한데 아직 이슬을 털지 못한 범나비 한마리가 무거운 날개를 원망하듯 길게 늘어진 수염만 흔들거리고있었다.
웬일인지 저 범나비가 자신처럼 생각되였다. 계절은 예나 다름없이 만물에게 자양분과 볕을 주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으라고 서두르고있는데 자기만이 이날까지 침대에 묶여 약동하는 계절의 그 힘찬 맥박을 듣지 못하고있었다.
석근수, 라석호, 차금희들이 창문을 열고 어서 뛰쳐나오라고 소리치는것만 같았다. 속이 답답해난 그는 창문을 활 열어젖혔다.
《선생님-》
혜련의 묻는 말에 무엇인가 끝없이 속살거리던 간호원처녀가 엎어질듯 달려와 창문을 콱 밀어닫는다.
《선생님, 난 몰라요. 선생님이 이러시면 난 어떻거랍니까?》
처녀는 금시 울상이 되여 두발을 동동 굴렀다.
《간호원동무, 너무 걱정마세요. 이젠 병세가 숙어진것 같아요. 저분에겐 바깥공기가 오히려 주사보다 더 좋을수 있어요.》
《뭐라구요? 그럼 사모님두 결국 선생님과 한편이군요?》
《편은 무슨 편. 환자에게 그런 치료법두 있지 않나요.》
《처녀동무, 저 사람두 의학전문가라오. 림상은 아니지만. 시병원에 있소.》
어떻게 되여 안해를 두둔하는것 같은 말이 튀여나온지는 모르겠으나 그의 말은 대번에 분위기를 일변시켰다.
《그러세요? 야 그럼 진작 그렇게 말씀하실게지. 그럼 여직껏 풋병아리 잘은 뿅뿅한다구 속으로 웃었겠군요. 그러나 이 창문만은 안돼요. 우리 담당의사선생님의 허락이 있어야 합니다. 환자선생님, 어서 자기 자리에 가서 누우세요. 얘기장단에 주사시간만 10분 늦어졌네.》
옴짝 못하고 침대에 가서 누운 한대식이가 한눈을 지그시 감고 주사를 맞자 처녀는 혜련을 생긋 쳐다보며 혀를 쪽 내밀어보였다. 그 모습이 어찌나 귀엽고 사랑스러운지 혜련은 그를 담북 안아주고싶었다.
《처녀동무의 이름을 어떻게 불러요?》
《초순이예요. 허초순. 나인 열여덟. 작년에 간호원양성소를 나왔어요.》
《그래요? 초순동물 알게 되여 기뻐요. 초순동무, 오늘부터 투약과 주사는 나한테 맡겨주세요.》
《그래도 될가요?》
《되지 않구. 초순동문 바쁜 몸이구 난 하루종일 빈 방에 앉아있을 손님이 아닌가요.》
《아니 그런게 아니라… 담당의사선생님이 허락하시겠는지…》
《정말 그렇군요. 가서 토론해보세요. 나두 오후 주사시간전에 병원에 나가보겠어요. 그때 나와 만나요.》
주사와 투약을 끝낸 처녀가 오목오목한 손마디를 꼽아가며 주의사항을 주고 코노래를 흥얼거리며 나가자 방안은 별스레 썰렁해보였다.
《여보, 난 오후부터 현장에 나가겠소. 더는 이대로 누워있을수가 없소.》
주사자리를 주근주근 문대며 침대에서 일어나앉은 한대식이 신경질적으로 내뱉았다.
《그 몸으로 꽤 견뎌낼가요?》
《이젠 다 나았소. 오늘 아침부터 입안에 군침이 돌면서 식욕이 생기는것 같소. 이젠 먹기만 하면 기운이 솟을거요. 나야 원래 건강체가 아니요.》
《그럼 소원대로 하세요. 당신한테야 그것이 오히려 좋은 약이지요. 그런데 이보세요.…》
혜련은 남편이 자기를 위안하기 위해 그런 말을 한다는것을 알았지만 다르게 말할수가 없었다.
《전 아직 이곳 사람들한테 인사도 못했어요. 제가 리숙동무랑 사람들을 만나 인사나 한다음 래일부터 현장에 나가도록 하세요. 그래두 되겠지요?》
여전히 낮고 부드럽게 대하는 혜련의 그 다심한 태도에 한대식이 더는 자기 주장을 내세울수 없었다. 더구나 지난밤을 렬차안에서 보냈고 아침밥도 먹지 못한 안해에게 첫마디부터 신경을 세운 자신이 쑥스럽기까지 했다. 한대식은 침대우에 엇비스듬히 누우며 두눈을 감았다. 흥분한탓인지 아니면 바깥바람을 쏘여서 그런지 두눈이 띠끔띠끔 쏘았다.
한편 합숙방을 나선 혜련의 마음은 종잡을수 없이 불안했다. 단단히 맘먹고 집을 떠나 이곳에 내려왔는데 정작 못마땅해하는 남편을 대하니 두려움이 앞섰다. 물론 남편의 그 곧은 성미에 반겨줄것을 바란것은 아니였으나 첫마디부터 이처럼 완강한 태도로 나올줄은 몰랐다. 남편의 뜻과 사색과 고충을 자신의 숨결처럼 귀하게 여겨오는 그로서 이것은 정녕 참기 어려운 정황이였다.
이때 문득 떠오른것이 리숙이였다. 이곳 공장실태와 남편의 형편을 누구보다 잘 알고있는 리숙이 만약 자신이 이곳에 내려오게 된 사정을 알게 되면 그 어떤 좋은 방안을 가리켜줄것만 같았다. 그럴만 한 성품과 능력을 가진 인상깊은 리숙이였었다. 혜련은 이런 기대와 불안을 안고 리숙의 관리일군합숙으로 반달음쳤다.
점심때였다. 꺼칠하게 자란 수염을 반반히 밀어버린 한대식은 안해가 꺼내주는 샛하얀 와이샤쯔를 입고 밥상에 마주앉았다. 없던 식욕이 당장 생긴것은 아니지만 래일부터 현장에 나가야 하니 억지로라도 먹어야 했다. 그런데 상에 차려놓은 식찬을 보니 구미가 부쩍 당겼다. 쌉살하면서도 감미로운 도라지, 더덕, 매울사하면서도 싱그러운 맛을 주는 삽지취, 싱싱한 쑥갓과 그옆에 놓인 깨육고추장, 갖가지 색갈을 낸 송이, 싸리, 보라버섯도 보였다. 기름이 많고 더운 식찬보다 그가 좋아하는 산듯하고 개운한 맛을 주는 식찬만 놓여있었다.
《리숙동무 솜씨구만.》
《맞았어요.》
《료리에선 누구도 따를수 없는 녀성이요. 이를테면 료리박사지.》
《저도 부러워요. 언제가면 그 솜씰 따라배우겠는지. 참 리숙동문 당신이 앓을 때 자주 와보지 못했다구 몹시 미안해하더군요. 어서 드세요. 그 성의를 봐서라두.》
《함께 먹읍시다. 보기만 해두 구미가 당기오.》
한대식은 자신도 놀라울 정도로 이것저것 많이 들었다. 혜련은 그것이 기쁜지 먹을 생각도 못하고 식찬그릇만 남편앞에 자꾸 밀어놓는다. 이때 복도에서 웅성웅성하는 말소리가 들리더니 이어 문기척소리가 났다.
혜련이 자리에서 일어나 방문을 열어보니 웬 낯선 손님들이 우줄우줄 서있었다.
《사모님!-》
웬 손님들인가 하고 물으려던 찰나 귀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이어 그 커다란 눈에 환희의 불꽃이 반짝이는 금희가 앞에 막아선 사람들의 어깨를 떠밀며 덥석 혜련의 두손을 잡는다.
《금희동무였군요!》
혜련은 금희의 어깨를 끌어당겨 가슴에 꽉 안았다.
《사모님, 정말 보고싶었어요. 제가 보낸 편지랑 전보랑 받았어요?》
《다 받았어요. 소식을 알려주어 정말 반가왔어요. 어제 낮 전보를 받고 이렇게 내려왔어요.》
둘레에 서있던 석근수며 라석호, 오일규반장은 자매처럼 반갑게 끌어안고 속삭이는 그들의 모습을 흡족하게 바라보았다. 한참 자기 기분에만 빠져있던 금희는 그때야 생각난듯 고개를 돌리며 《이분들은 발생로작업반에서 연구사선생님과 함께 일하는분들이랍니다.》하고 한사람씩 소개했다.
《옆에서들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혜련은 이들이 무척 오래전에 알고있던 사람들처럼 친근하게 느껴져 깊숙이 허리를 굽혔다.
《자, 문앞에서 그러지들 말구 어서 안으로 들어가자구.》
라석호와 금희의 등을 떠밀며 방안으로 들어서던 석근수는 샛하얀 와이샤쯔차림에 풍성한 식탁을 마주하고선 한대식을 보자 탄성을 올렸다.
《이런 변 봤나. 이렇게 호의호식하는줄도 모르고 우린 걱정만 했지. 반장, 내 뭐라든가. 연구사가 가만히 누워있을 사람이 아니라구.》
한대식은 부러 노죽을 부리는것 같은 석근수의 말에 눈굽이 화끈 달아올랐다.
《짬이 없겠는데 어떻게 이렇게들 왔습니까?》
《할수 없이 왔수다. 연구사선생이 꼭 해줘야 할 일이 생겨서 공정기사, 어서 그 설계도면을 꺼내놓게.》
《아바이두 참, 이분들이 식사나 끝난 다음에 그럽시다.》
오일규가 지내 서두르는 석근수에게 핀잔을 주었다.
《그렇던가. 늙으면 다 이렇다니.》
《괜찮습니다. 우린 방금 식사를 다하구 일어서려던 참입니다.》
《정말 그래요. 어서 이쪽에 앉아서 말씀들 하세요.》
혜련이가 얼른 식탁을 거두기 시작했다. 눈치빠른 금희도 제집 손님들처럼 눈에 띄지 않게 방바닥을 정돈하며 왼심을 썼다.
《이렇게 일어나 앉은걸 보니 저두 기쁩니다. 사실은 우리들끼리 하려고 했는데 이 문제만은 연구사선생님이 꼭 해결해줘야 할것 같아서…》
라석호는 말꼬리를 흐리며 들고온 가방을 선뜻 열지 못했다. 아직 눈이며 얼굴에서 병색 짙은 모습을 대하니 동요가 일어난것 같았다.
《무엇인지 어서 봅시다.》
한대식은 궁금한듯 손을 내밀며 독촉한다. 일감이 생겼다는것이 무엇보다 반가운 그였다. 이때 발그노릿한 사과를 늄다반에 가득 담아든 혜련이가 들어왔다.
《모처럼 오셨는데 대접할것이 별로 없어서…》
《야, 거 보기 희한한 사과다.》
《아주머니, 이런 귀물은 뒀다가 입맛 떨어진 연구사선생한테나 대접하시오.》
응당 그래야 한다는듯 정색해서 하는 오일규의 말에 누구도 감히 손댈념을 못했다.
《따로 대접할건 또 있으니 맘놓고 어서 드세요. 사실은 이런것보다 마실걸 좀 대접해야겠는데…》
《아바이가 먼저 드셔야 우리도 먹지요.》
금희는 묵묵히 개가죽담배쌈지를 펼치는 석근수가 보기 딱했던지 제일 큰것을 넌쩍 집어다드렸다. 이렇게 되자 너도나도 사과그릇에 손들이 갔다.
오일규는 혜련이가 집어주어서야 마지못해 들었다.
사과 한개를 어느새 집어챈 라석호가 《사과맛이 기가 막힌데.》하고 가방을 열었다. 오직 그 가방에만 관심이 있던 한대식은 그가 꺼내놓은 종이말이를 받아들었다. 무슨 기계설계도면이였다.
《알탄성형기인데 아직 착상에 불과합니다.》
《알탄성형기라구요?… 어디 좀 봅시다.》
발생로와 관련한 무슨 기술문제려니했던 그는 자기 귀를 의심하며 성급히 도면을 펼쳤다.
《그래 어떤가. 될상싶은가요?》
석근수는 그 만문한 사과도 깨물수 없는지 손칼을 꺼내 자름자름 썰어 입에 넣으면서 정신없이 도면을 보는 한대식에게 물었다.
《좀 자세히 봐야 알겠습니다. 저야 기계물정은 잘 모르지 않습니까. 하여튼 석호동무가 나두 미처 생각지 못한 아주 좋은것을 착안했습니다.》
《그것만 되면 알탄조에선 흥타령 부르게 될거우다. 우린 선생만 믿겠수다. 그러나 너무 무리하지는 마시우. 당장 알탄이 딸릴 정도는 아니니까. 반장, 그럼 우린 가볼가?》
석근수는 자기 소임이 다 끝났다는듯 성큼 일어났다. 실상 그가 여기에 온 목적이 흥그럽게 락착된셈이다.
오전 중낮때 현장에 찾아나온 리숙이를 통해 래일부터 출근하겠다는 한대식의 결심을 알게 된 그는 몹시 반가왔었다. 병세를 이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는것도 기쁜 일이지만 더욱 흡족하게 생각되는것은 한몸 아낄줄 모르는 그의 불같은 헌신성을 다시 보게 되는것이였다.
이런 귀한 연구사를 잘 돌봐줘야 하는것을 자기 의무로 간주하고있던 석근수는 골똘히 궁리하다가 라석호를 만났다.
요즘 라석호는 알탄제조의 기계화를 위해 남몰래 고심하고있었다.
발생로작업반에서 육체적으로 제일 힘들고 비문화적인 작업이 알탄 만드는 과정이다.
무연탄가루에 점결제를 섞어 성냥곽크기만 하게 만들어내는 알탄은 일정한 규격과 굳기가 보장돼야 하는데 반수동식으로 하다나니 힘만 들고 그 속도를 보장할수가 없었다. 공정기사로 온 첫날부터 이것을 눈에 티처럼 생각하고있던 라석호가 오래동안 애쓰던 끝에 완전기계화할수 있는 설계를 착상하게 되였던것이다.
라석호는 이 설계도면을 연구사에게 맡겨 그가 합숙에서 완성하도록 하자는 석근수의 의향에 두말없이 찬성을 표시했다.
설계도면은 이렇게 되여 한대식의 손에 들어가게 됐던것이다.
석근수와 오일규는 몸조리를 잘하라고 거듭 부탁을 남긴후 밖으로 나갔다.
라석호와 단둘이 마주앉게 되자 한대식이 자기 의향을 말했다.
《석호동무, 이 도면을 공장기술과에 의뢰하는게 어떨가?》
《??…》
《다르겐 생각지 마오. 도면을 완성하자면 아무래두 시간이 들겠는데 내가 이것만 붙들고있을순 없지 않소.》
《저희들은 선생님께 무리하게 요구하는게 아닙니다. 합숙에서 치료받는 기간 이보다 더 좋은 안을 착상해주십시오. 완성은 후에 우리가 합니다.》
라석호는 어줍은 미소를 그리며 말끝을 얼버무렸다. 자신도 모르게 도면을 가지고 오게 된 의도를 발설했던것이다. 한대식은 속이 뭉클하여 라석호와 도면을 오래도록 번갈아보았다. 그러나 이들의 뜨거운 마음을 그대로 받아들일순 없었다.
《음,… 그렇다면 한마디 싫은 소릴 합시다. 다른 사람은 혹 그렇게 생각할수 있으나 공정기사인 동무가 어쩌면 함께 손벽칠수 있소. 지금 발생로가 제구실을 못해 속을 태우고있는데 이런 도면으로 나를 합숙에 눌러놓자니 말이 되오?》
했으나 라석호는 귀머거리가 된듯 가방안에서 기술도서 두권과 설계기구들을 꺼내놓는다.
《선생님은 현장에 나올 형편이 못됩니다. 그리구 맘만 먹으면 이 도면도 며칠내에 끝낼수 있다고 봅니다.》 라석호는 빙긋이 웃음까지 지어보였다.
《허참. 동문 정말 내속을 영 모르는것 같구만.》
이때 석근수일행과 함께 돌아간줄 알았던 금희가 살며시 들어와 혜련을 불러내갔다.
무슨 일인가 해서 금희의 뒤를 따라 밖으로 나가니 저쪽 살구나무아래에 석근수가 앉아있었다.
《사모님, 저녁에 놀러오겠어요. 되겠지요?》
《꼭 와요. 금희가 오면 우리 철이 아버지도 무척 좋아할거예요.》
혜련은 이미 정깊어진 금희와 더 얘기를 나누지 못하고 헤여지는게 서운했다.
그가 살구나무아래로 다가가자 석근수가 자기옆 의자를 가리켰다. 혜련은 치마폭을 조심히 감싸내리며 그의 옆에 앉았다.
《아주머니하구 좀 조용히 의논해보고싶어서 불렀수다. 내 아까 관리일군합숙 리숙이한테 자상한 말을 들어서 알구는 있지만 직접 본인의 의사를 듣고싶어서 그러우. 아주머니가 우리 공장에 아주 내려왔다는게 적실하우?》
《…》
혜련은 낯이 화끈 달아올랐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입을 열수가 없었다.
이곳 사람들을 믿지 못해 내려온것 같기도 하고 어찌보면 남편과 떨어져선 살아가지 못하는 갱충머리 없는 녀편네의 소행같기도 하다. 머리가 점점 숙어지는 혜련의 갸름한 얼굴이 홍당무처럼 물들었다. 이렇게 옹색하고 부끄러운 질문을 받을줄은 생각도 못했다.
《아주머니, 다르게 생각지 마슈. 연구사선생은 내가 잘 아는 사람이우다. 우린 서로 한집안식구처럼 여기지요. 그래 그런지 아주머니를 첨 만나보지만 오래전에 곁에 있던 사람처럼 생각되우다. 집안에 반가운 사람이 왔는데 서로 알고있어야 되겠기에 묻는거웨다.》
혜련은 슬며시 눈을 들어 석근수를 쳐다봤다. 잔주름이 부채살처럼 몰려든 우묵한 눈확과 벙싯이 열린 두툼한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가득했다. 문득 생사를 알수 없는 친정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르며 육친의 정이 서서히 밀려들었다.
《아버님, 전 여기에 아주 내려왔습니다. 제 소행이 잘못됐다면 너그러이 꾸짖어주세요. 이제라두 아버님 처분대로 하겠습니다.》
혜련은 다시 고개를 깊이 떨구었다. 이마와 잔등에 진땀이 쭉 내돋았다.
《잘 생각했네. 그 남편에 그 안해라구 출중한 남편뒤엔 현숙한 부인이 있다는 말이 그르지 않아.》
《?!…》
막혔던 가슴이 탁 트이는것 같아 혜련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석근수가 흡족하게 웃고있었다.
《연구사선생은 우리에게 귀한 사람이네. 그런 사람을 우리가 쓰게 돌봐주지 못했네. 이젠 아주머니가 내려왔으니 내 맘이 푹 놓이우다. 우리 작업반을 대신해서 아주머니에게 진정 감사를 주고싶수다.》
《아버님!…》
혜련은 솜처럼 부드럽고 따스하게 느껴지는 그 진정어린 말에 눈굽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시집살이에 부실한 딸이 친정집에 왔건만 아무 탓함이 없이 오히려 고생많이 했겠다며 왼심을 써주는 친정아버지를 대하는것 같았다.
이때 혜련의 손등우에 범나비 한마리가 날아와 나풀대며 재롱을 피웠다.
머리우에는 하얀 살구꽃이 아지가 휘도록 늘어졌는데 따사로운 볕이 꽃잎마다에 호듯호듯 뛰논다. 꿀벌들이 향기가 진동하는 그 사이사이로 앵앵 날아예며 연연한 꽃잎을 꽃보라처럼 공중에 뿌려놓았다. 꽃잎이 떨어진곳을 살펴보면 벌써 콩알만 한 파란 열매가 보란듯이 자태를 드러낸다. 높이 뜬 태양은 따스한 볕을 아낌없이 뿌려주며 만물의 소생과 무르녹는 계절을 독촉하고있었다.
석근수는 여느때없이 흐뭇한 기분으로 현장에 도착했고 하루작업이 끝나자 협의회를 조직했다. 혜련이 아주 내려온 이상 합숙에 그냥둘수 없었다. 그렇다고 그전에 한대식이 부디 고집하여 연구실겸 합숙으로 리용하던 반토굴집에 살림을 펴라고 할수도 없다. 그 반토굴집은 누구도 살수 없는 전쟁이 만들어낸 피난처다. 석근수의 궁냥은 그것을 헐고 그 집터에 얼싸한 주택을 짓고싶었다.
조용한 산탁에 붙어있어서 탐구자들이 살기엔 더없이 좋은 위치였다.
그가 자기의 생각을 내놓았을 때 다른 의견을 가지는 사람들은 없었다.
다만 내적으로 소문없이 하는 건설이라 자재문제를 걱정했다. 이렇게 되여 발생로작업반성원들은 작업후 누구도 모르게 야간작업을 벌려놓았다.
주택건설을 시작한지 이틀째되는 날이였다. 막돌로 기초겸 벽체를 한m가량 쌓았는데 더 올려놓을 벽돌이 없었다. 이럴것 같아 두명의 청년을 떼서 토벽돌을 찍었으나 그것은 아직 마르지 않았다.
단층 한세대 주택이라 냠냠이 접어들었는데 첫 발자국부터 긴장이 조성됐다.
손을 털고 나앉아있던 오일규가 아까부터 무엇인가 주무르고있는 석근수의 곁으로 갔다. 그는 모로 세워놓은 넙적한 청석에 정대를 세우고 팍팍 망치를 휘두르고있었다.
《마침 오누만, 반장이 어디 한번 때려보게.》
석근수가 숨을 헐떡거리며 망치를 오일규에게 넘겨주었다.
《이건 어쩌자는겁니까?》
《생김새가 구들장돌이 될것 같아 그러네. 자, 한번 힘써보게.》
오일규는 당장 벽돌 한장 없는 형편에 벌써 구들장소리를 하는데 화가 나서 들고있던 메를 힘껏 내려쳤다. 그러자 《퍽-》하는 소리가 나며 청석이 쩍 갈라졌다.
《허허, 이놈두 낯을 가려보누만. 어떤가 자네 보기엔?》
결이 좋은 돌이라 빠개놓고보니 구들장으로 제격이였다.
《아바이, 우리가 준비없이 너무 서둘러서 말짱부터 박은게 아닐가요?》
《준비는 다 해놓고 잔치날 잡는 사람이 없다고 하데. 시작이 절반이란 말있지 않나.》
《허참, 아바이, 지배인한테 한번 제기해보지 않겠습니까. 발생로에 관심이 크니까 다문 얼마라도 해결해주겠지요.》
《반장은 공장형편을 몰라서 손을 내미나. 지배인이 아무리 주고싶어도 줄것이 없네. 지금 온 나라가 건설로 들끓고있지 않나. 세멘트, 강재가 금처럼 귀한 때가 아닌가.》
《예, 그렇던가요. 하마트면 내가 큰 과오를 범할번 했군요.》
오일규는 도무지 말할 재미가 없는지 입삐뚤어진 소리를 하고야말았다.
석근수의 말대로 지금은 어디서나 건설이다. 큰 대상뿐아니라 지방공장들까지 도처에 수풀처럼 솟아나고있었다. 사회주의제도가 수립된 도시와 농촌 그 어디나 반토굴집 대신 번듯한 아빠트와 문화주택들을 짓느라고 신바람들이 났다. 세멘트 한t, 강재 한t을 놓고 날카로운 의견충돌이 생겼고 자재인수원들이 한두달씩 려관방에서 간을 말리고있었다.
《반장, 벌써부터 신경을 세우면 어찌겠나. 호주가 그러면 그 집 대사가 야단아닌가. 이것보라구. 못살던 그전에두 대사는 이럭저럭 다 했다네. 하물며 이 좋은 세월에 뭘 못하겠나. 해두 멋들어지게 소리치며 해야지. 우리 머리를 짜봅세. 우선 작업반성원모두가 부조를 하는셈치구 자기 집에 있는 자재들을 들고나오도록 하세. 깨진 벽돌이든 하다못해 부지깽이든 아무거나 좋네. 그리구 큼직한 보짱이나 서까래감들은 이번 일요일에 검정산골안에 가서 찍어오도록 하세.》
《검정산에요?》
검정산은 삼봉산에서도 70리나 더 가야 있는 험한 산이다.
《신새벽에 화물차로 떠나면 하루 품새에 넉넉하네. 거기 산새는 내가 잘 아니 걱정놓게.》
그 길밖엔 딴 방도가 없었다. 그가 내놓은 안들은 구차스럽지만 현실적인데가 있었고 어찌보면 신통한데가 있었다.
오일규는 숨이 좀 나가는것 같았다.
그는 한쪽에 빙 둘러앉아 웃음판을 벌리고있는 작업반성원들을 모이게 하고 방금 석근수가 내놓은 의안을 설명했다.
《그런데 부조할 자재가 아무것두 없는 집은 어떡합니까?》
맨 뒤자리에 고개를 갸웃하고있던 단발머리처녀가 걱정스레 물었다.
《아이구. 내 가슴이 답답하다. 해변가에 있는 전기공장자리에 가보라구. 거기엔 아직 깨진 벽돌이 날 가져가소 하구 소리치구있어.》
남수가 제 가슴을 치며 흰소리를 치자 단발머리처녀는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며 고개를 푹 박았다가 얼른 솟구며 매파랍게 내쏜다.
《제가 뭐길래 우쭐거린담. 변두도 없는 수탉처럼.》
《와-》하고 웃음이 터졌다.
모임을 끝낸 작업반원들이 떠들썩하며 밋밋한 둔덕을 내려가고있을 때다.
《동무들- 반장동지-》
하고 소리치는 웬 녀자의 목소리와 함께 《빵빵-》하는 자동차의 경적이 행길쪽에서 들려왔다.
《금희다. 금희의 목소리가 분명해. 금희언니-》
변두없는 수탉이라고 매파랍게 면박주던 단발머리처녀가 바람을 씽 일쿠며 엎어질듯 내달렸다.
《자재를 실어왔어요. 어서들 오세요.》
(자재가 왔다니?…)
오일규는 영문을 알수 없어 뛰여가는 청년들의 뒤를 슬근슬근 따라갔다. 어느새 적재함에 올라간 남수가 석비레벽돌 한장을 머리우로 쳐들며 함성을 질렀다.
《반장동무, 수고합니다.》
오일규가 행길에 나섰을 때 뜻밖에도 자재과장 로익두가 벌쭉이 웃으며 마주걸어왔다.
《이게 웬일이요. 자재과장동무?》
적재함우에 무드기 쌓인 석비레벽돌을 본 오일규가 로익두의 손을 잡아흔들며 반가와했다.
《우리 금희가 와서 어찌나 못살게 구는지 어디 견딜수가 있더라구.》
《그렇소?! 이거 정말 고맙수다. 그런데 이 벽돌은 부조요 아니면 공급이요?》
《부조란 또 무슨 소리요?》 로익두의 작은 두눈이 올롱해진다.
《부조면 어떻구 공급이면 어때요. 반장동지, 벽돌이나 어서 부리워주세요. 이제 세탕은 더 뛰여야 해요.》
언제 옴니암니 따질새가 있느냐는듯 운전칸에서 뛰여내리며 팔소매를 걷어붙이는 금희의 등등한 기세는 황소를 엎어놓은 육고집 아낙네의 기상이다. 그 말에 오일규의 입이 벙싯 열렸다.
《아니 이것 말구 세탕이나 더 온단 말이요?》
《손 댔던 때에 마저 해야지요. 벽체만 올리쌓고 말겠소. 상차인원 네명만 차에 배속시켜주시오.》
《알겠소. 자재과장이 이렇게 어벌이 큰줄은 몰랐구만. 경철이, 남수, 택규, 명희, 너두 차에 올라타라. 그 나머지 인원은 모두 운반이다. 자, 날 따르라…》
오일규는 벽돌 두장을 닁큼 어깨에 올려놓고 반달음친다. 이럴때 보면 그에게도 맺고끝는 결패스러운데가 있는것 같다.
화물차는 네명의 청년을 태우고 곧 떠났다. 먼지를 뽀얗게 일쿠며 질주하는 적재함우에서 힘찬 노래소리가 울렸다. 길녁에 부리워놓은 석비레벽돌은 잠간사이에 운반되였다. 자재가 없어 긍긍하던 그들이라 석달가물에 소나기 맞은 기분들이다. 이마며 목덜미며 잔등에서 땀이 철철 흘렀으나 일손들에선 불이 일었다. 규격벽돌이 되여 벽체가 다시 올라갔다. 건설은 자재이고 속도 역시 자재가 결정하는것 같다. 반짝이던 별들이 하나둘 사라지고 등성이에 세운 가두고성기에서 《애국가》의 장중한 선률이 흘러나올 때 벽체는 그들의 키를 넘게 솟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