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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렬차는 정시로 줄기차게 달리고있었다. 달가닥 달가닥…
가락맞게 끊임없이 울리는 그 진동은 자장가인듯 려객들을 꿈나라로 불러주고있었다. 박혜련은 창턱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아보았으나 정신은 여전히 말똥해진다. 바싹 다가붙어 손님들의 눈치를 슬쩍슬쩍 보아가며 끝없이 속살대던 앞의자의 신혼부부도 그만 지쳤는지 혼곤히 잠들었다. 뽀얗고 말큰한 볼을 남편의 어깨에 살그머니 기댄 새색시의 발깃한 입술에 아지랑이 같은 미소가 그려지군 하는데 그때마다 박속같은 하얀 이가 살짝 드러났다. 잠결에 꿈을 꾸고있는것 같다. 누빈 솜옷에 령장자리가 또렷한 제대군인청년은 드렁드렁 코까지 골았다. 포연과 들바람에 검실검실해진 얼굴과 뭉툭한 턱에는 세상모를 안정과 고요가 깃들었다.
제대되여 어느 광산으로 배치받아간다는 청년과 그를 따라가는 농촌태생인 그의 안해다. 박혜련은 이들 신혼부부가 부러웠다. 가없이 뻗어간 두줄기 레루처럼 이들의 앞날도 거침없이 창창할것 같았다. 시작도 끝도 한치의 드팀없이 평행으로 뻗은 두줄기 레루, 심한 구배나 가파로운 령이나 아찔한 교각우나 변함없는 간격으로 앞으로만 향한 레루이기에 그우로 달리는 렬차는 질풍같은 속도로 내닫는것이다.
박혜련은 문뜩 부부관계도 이와 상통한데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에 앉은 이들 신혼부부는 두줄기 레루우에 몸을 싣고 방금 출발역을 떠났다고 할수 있다. 앞에 어떤 도중역들이 기다리는지 알수 없으나 천상배필이라 할수 있는 순박하고 어져보이는 눈섭검은 저 새색시와 억센 인상을 주는 새신랑인 이들부부는 출발자세의 그 미소로 거침없이 내달릴것이다.
누구에게나 의당 차례지는 결혼의 시작점은 비슷한데 부부생활은 왜 그처럼 천태만변인지 박혜련은 호- 하고 가는 숨을 내그었다. 자기들부부앞에도 보이지 않던 구배길이 피뜩 스치는것 같았는데 그것은 앞으로 내달릴수록 심한 반경을 그리며 자주 나타났다. 그냥 내닫다가는 탈선이라도 생길것 같아 여러모로 생각던끝에 이처럼 남편을 찾아 흥수비료공장으로 내려가는 혜련이다.
돌이켜보면 처녀시절이 끝나던 아득한 그 시절, 앞에는 얼마나 황홀한 길이 열렸던가. 생명의 위험도 아랑곳없이 38°선을 넘어 사랑하는 처녀를 찾아 서울로 왔을 때 혜련은 애인의 넓은 품에 온몸을 맡기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었다. 불같은 그 사랑에 목이 메였고 열아홉의 너무도 짧은 처녀시절이 애닲았었다.
긴긴 가을밤 뜬눈으로 베개잇을 적신후 동해의 거센 파도를 넘어올 때 부모의 슬하를 떠나는 석별의 아쉬움은 참을길 없었으나 슬프지는 않았다. 오히려 처녀시절에 성취못한 과학연구에 대한 푸른 꿈이 님의 리상속에 실현된다고 생각하니 풍랑사나운 바다길도 랑만적으로만 보였다.
이렇게 시작된 신혼생활이 어언 십여년을 썩 넘기고있었다.
혜련은 남편이 과학자이기에 남들처럼 이마를 맞대고 오손도손 살것을 바라지 않는다. 외지에 늘 나가있다가 가끔 들리군 하는 집은 림시숙박소처럼 되여버렸으나 혜련은 탓할 대신 남편의 신상이 걱정되였다. 부부의 정이란 씻길대로 씻기고 다듬어질대로 다듬어진 변치않는 순결한것이여서 그가 어디에 있든 건강하여 본신사업에만 충실하면 된다. 이런 혜련이기에 황홀하게 시작되던 결혼생활이 순편하지 못하고 입빠른 녀인들의 동정이 있을 때도 자신을 불행하다고 생각해본적이 없었다. 이번에 이렇게 급행차를 타게 된것도 반년나마 소식 한장 없는 남편이 걱정스러웠고 힘겨워하는 남편을 현지에 내려가 도와줘야겠다는 곡진한 심정에서 떠난 길이였다.
렬차는 날이 활짝 밝아서야 함흥역에 도착했다. 앞의자에 앉은 신혼부부는 아직 갈길이 멀었는지 깨여날 기미가 안보였다.
박혜련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눈 한번 붙여보지 못해 피곤이 몰렸으나 쩌릿한 대기를 마시며 홈에 내리자 몸이 거뜬해졌다.
억양이 드세고 빨라 거칠게만 느껴지는 왁자하던 목소리들이 잠간사이에 사라지고 배낭을 지고 트렁크를 한손에 든 혜련이만이 홈에 남게 되였다. 분명 전보가 닿았겠는데 아무리 둘러봐야 키가 큰 남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썰렁해진 홈에 외로이 서있던 그는 뜨거운것이 눈굽을 쿡 찌르는감을 느꼈다.
그다음은 뽀얀 안개가 앞을 가리우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혀끝을 꼭 깨물며 갑자기 하사분해진 다리로 겨우 몇걸음 옮겼을 때다.
《저… 이보세요. 평양에서 한대식선생을 찾아오는 사모님이 아닌가요?》
억양이 센 그러나 조심스러우면서도 친근한 목소리가 등뒤에서 울렸다.
혜련은 얼른 소매속에서 손수건을 꺼내 눈굽을 찍어낸 후 몸을 돌렸다.
《?…》
낯선 처녀였다. 자주 깜빡이는 크고 검은 두눈은 보는 사람의 속까지 시원하게 해주는데 아침해살을 받은 그 눈동자가 눈이 부실 정도로 생기를 뿜었다.
연하게 화장을 한 발그레한 두볼과 꽃잎을 문듯 선이 또렷한 입술, 상큼한 목뒤로 츠렁츠렁 흔들리는 흑단같은 외태머리는 쉽게 볼수 없는 매력을 주었다.
그런데다 발등을 동그랗게 오려낸 하얀 편리화를 신은 늘씬한 다리와 진곤색양복저고리가 터질듯 부풀어오른 앞가슴은 미끈하게 자란 물버들처럼 싱싱한 느낌을 주었다.
《내 짐작이 맞지요. 난 첫눈에 알아보았어요. 제 이름은 차금희예요. 정말 반가워요. 기다렸어요.》
차금희는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덮치듯 트렁크를 받아들었다.
《배낭도 어서 벗으세요.》
그는 박혜련이가 만류할 사이도 없이 배낭을 벗겨 한쪽 어깨에 겅중 둘러멨다.
《사모님, 어서 가시자요.》
차금희는 늘씬한 다리를 성큼성큼 내짚으며 앞장서 걸었다.
《사모님, 선생님이 역에 마중나오지 않았다고 너무 섭섭해마세요. 선생님은 사흘전에 점결제를 가지러 길주에 갔답니다. 아이참, 사모님은 점결제가 뭔지 모르겠군요. 시험용 재료인데 무연탄으로 알탄을 만들자면 점착물질을 넣어야 하는데 길주팔프에서 부산물로 나오는 페액이 껍진껍진한게 알탄을 만드는데는 그저 그만이죠뭐. 그래서 그 페액을 우린 점결제라고 부른답니다. 사실 그런것은 선생님의 조수인 제가 척척 날라와야 되겠는데 어디 선생님이 시킬 념두나 냅니까. 난 말이 조수지 심부름도 제대로 못하는 맹꽁이죠 뭐. 사모님, 선생님한텐 제가 선생님의 조수라는 말 했다고 하지 마십시오. 조수라는건 내혼자 붙여놓은 말이니까요. 우습지요. 호호…》
금희는 고개를 젖히고 하얀 목을 드러놓은채 깔깔거렸다.
혜련은 그때야 가슴속에 괴였던 서운함이 스르시 녹아내리는것같았다.
《우리 철이 아버지 건강은 어떠한가요?》
《사모님은 이제야 말을 하는군요. 걱정놓으세요. 사모님 대신 우리가 옆에 있지 않나요. 솔직히 말해서 선생님은 순간이나마 앉아있거나 더우기 앓아누울 짬이 없는게 제일 걱정이죠뭐. 호호…》
금희는 또다시 목을 뒤로 젖히며 까르르 웃음발을 날린다.
개찰원처녀가 차표받을 생각도 잊고 어리둥절하여 차금희를 쳐다보았다. 개찰구를 나온 그들은 곧장 역광장으로 나갔다.
이때 급히 달려오던 화물차 한대가 그들옆에 와서 멎었다.
《외삼촌!-》
금희가 반겨 소리치며 차앞으로 뛰여갔다. 운전칸문이 열리더니 밤색캪을 눌러쓴 앙바틈한 키의 사나이가 내렸다. 자재과장 로익두였다.
《하마트면 늦을번 했구나.》
《정말 고마와요, 이렇게 나와주어서.》
《우리 금희의 부탁인데 안나오구 견디겠니. 그래 손님은 오셨니?》
금희는 한눈을 끔뻑해보이며 뒤를 돌아보았다.
《사모님, 우리 외삼촌이예요. 공장 자재일을 맡아본답니다.》
혜련이는 허리를 꺾으며 인사를 했다.
《첨 뵙겠습니다.》
《먼길 오시기 고생많았습니다. 로익두라고 합니다.》
밤색캪을 약간 들었다놓으며 인사를 나누던 로익두의 입에서 가느다란 탄성이 흘러나왔다.
《아니,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원산 세거리 감나무집 따님이 아니십니까. 여기서 이렇게 만나다니요.…》
《?…》
박혜련은 의아해진 눈길로 로익두를 쳐다봤다. 머리칼이 정수리까지 빠진 대머리며 앙바틈한 목덜미에 깊숙이 패인 주름살들은 퍼그나 지숙했으나 반반한 이마와 그아래 유리알을 쪼아박은듯 반짝이는 두눈 그리고 윤기가 흐르는 팽팽한 볼과 얄팍한 입술에 떠도는 미소는 나이보다 젊고 사교성이 밝은 인상을 주는데 아무리 생각해봐야 처음 보는 모습이였다.
《아, 제가 실례했습니다. 세월이 흐른건 생각안하구… 그러나 나는 사모님을 잘 알고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여기에?!…》
두사람의 미묘한 상봉을 신기하게 주시하고있던 금희가 로익두의 팔소매를 슬쩍 잡아당겼다.
《외삼촌, 한대식연구사선생님의 부인이예요. 평양에 살고계시는.》
《그래?!… 이거 정말 반가운 일이구만. 넓은것 같으면서두 좁은것이 세상이라더니, 감나무집 따님이 한대식선생의 부인이시라니. 정말 희한한 일이군요.》
박혜련은 누군지 알지도 못하면서 거듭 인사를 받는바람에 두볼이 홧홧 달아올랐다.
《외삼촌은 참 별스럽게 구네. 어서 가기나 하자요.》
《하긴 네 말이 옳다. 회포는 후에 풀구 이젠 떠나보자. 자 어서 운전칸에 오르시지요.》
《우린 적재함에 타겠어요. 시원하게 그게 좋지요, 사모님?》
어느새 적재함에 올라간 금희가 팔을 앞으로 쑥 내밀고 박혜련을 빨리 오르라고 독촉했다.
《저것이 언제 철들겠는지, 쯔쯔…》
로익두는 혀를 차다가 할수 없다는듯 운전칸에 오르며 문을 후려닫았다.
차는 곧 떠났다. 적재함우에는 류안가마니들이 절반쯤 쌓였는데 금희가 그우에 꽃수건을 펴놓으며 혜련에게 앉으라고 권고했다.
혜련은 그 꽃수건을 차금희의 목에 다시 감아주고 맨 가마니우에 앉았다.
시내를 벗어난 차는 속도를 내기 시작하였다. 초봄이라 하지만 쌀쌀한 바람이 바늘끝처럼 옷섶에 스며들었다. 길량쪽엔 구릉지대밭들이 탁 트이게 펼쳐졌는데 이른아침부터 바삐 돌아치는 농민들의 모습이 여기저기에 보였다. 어느새 사래긴 밭이랑을 열서돌기 갈아엎은 보잡이군이 굵직한 마라초를 걸탐스레 들이키는가 하면 헐썩이며 내닫는 소궁둥이에 연방 채찍을 안기는 달구지군의 거동 또한 이채롭다. 무엇인가 이고지고 반달음치는 사람들을 자세히 살피니 허연 김이 뭉실뭉실 나는 시꺼먼 거름짐이다. 흥취를 돋구듯 어디선가 목청껏 뽑아넘기는 타령조, 높이 뜬 종다리의 지종대는 은방울소리들 이 모든 풍경은 봄계절을 앞당기려는 약동하는 숨결처럼 정답게 안겨왔다.
《사모님, 우리 고장 인상이 어떠세요?》
차금희는 한마디 말도 없이 벌풍경에 심취된 혜련에게 장난기 어린 눈빛을 보냈다.
《어떻다고 해야 할지… 농민들모두가 무척 생기가 넘쳐있군요. 그래서 제마음도 즐거워져요.》
《그러세요…》
금희는 저도 모르게 혜련의 다감한 표정에 끌려들어 고개를 끄덕였다.
《사모님이 옳게 보셨어요. 전국적으로 협동화를 끝내고 맞는 첫 봄이 아닌가요. 농민들모두가 이젠 한집안식솔이 된셈이죠뭐. 이래놓으니 결국 우리 공장이 발등에 불맞은 형편이 되고 말았답니다. 그래서 연구사선생은 잠도 제대로 못자고 애쓰고있답니다.》
《그러니까 비료생산이 딸리게 됐단 말이지요?》
《맞았어요. 작년에 비해 곱은 더 생산하는데 사기가 부쩍 오른 농민들의 욕심을 어디 당해낼수가 있습니까. 비료만 더 달라, 쌀은 문제없다고 기세들이 여간 높지 않아요. 아마 전국의 협동조합자재인수원들이 우리 공장에 다 모여든것 같아요. 하지만 우린 그들을 조금두 탓하지 않아요. 오히려 천리마시대비료생산자들의 명분을 잊지 않게 채찍을 안겨주는 고마운분들로 여기지요. 말하자면 우리 공장 천리마운동의 고삐는 농민들이 쥐고있는셈이랍니다.》
점차 흥이 나서 엮어대던 금희는 자리에서 상큼 일어나 농민들을 향해 꽃수건을 높이 흔들어보였다. 뒤이어 그의 봉싯한 입술사이로 《천리마타고서 번개처럼 달린다…》의 노래가락이 새여나왔다. 정말 잠시도 가만있지 못하는 성미였다. 명쾌하고 붙임성좋은 활달한 그 성격에 호감이 갔다. 박혜련의 마음도 어느덧 흐뭇해졌다. 그처럼 왼심을 써오던 남편이 이런 처녀의 방조를 받아가며 비료문제를 풀기 위해 연구사업에 전심하고있다니 더 바랄것이 없었다.
갑자기 화물차가 멎었다. 그와 때를 같이하여 차금희의 총알같은 목소리가 튀여나갔다.
《정신있어요. 외삼촌, 왜 연구사선생님의 합숙으로 가지 않고 여기로 왔어요?》
《허허, 내 다 생각이 있다. 그 썰렁한 반토굴집으로 어떻게 사모님을 모시겠니. 사모님, 어서 내리십시오. 우리 집입니다. 우선 여기서 로독이나 푼 다음 차후행동을 의논해봅시다.》
로익두의 말대로 그 알량한 합숙으로 가야 한대식은 출장중이여서 랭기만이 맞아줄것 같았다.
《아이참 외삼촌두, 미리 그렇다구 말해줘야지. 사모님, 어서 내리자요.》
로익두를 곱게 흘겨본 금희가 살짝 뛰여내렸다. 뒤따라 차에서 내린 혜련은 결심을 못하고 망설였다. 남편이 기숙하는 집을 가까이 두고 여기서 로독이나 풀수는 없었다.
《왜 그러고있어요. 이 집은 우리 집이나 같애요. 외삼촌, 이 트렁크를 좀.》
차금희는 트렁크를 로익두에게 넘겨주고 주춤거리며 망설이고있는 박혜련의 팔을 잡아 안으로 끌었다.
《집이 좀 루추하지만 그 썰렁한 합숙보다야 낫겠지요. 어서 들어갑시다.》
트렁크를 든 로익두가 앙바틈한 턱을 쓸어만지며 친절을 표시했다.
키가 넘게 널판자로 울타리를 친 외통식 양철집은 어딘가 으슥한 감을 주었다. 밤색 라크칠을 진하게 먹인 반들반들한 마루를 딛고 들어서니 이불장, 양복장, 3면거울 등 고급가구류들이 방벽을 꽉 채웠는데 평양에서도 보기 드문 진품들이였다.
금희가 닭털깔개를 가져다놓으며 말했다.
《사모님, 이 방에서 쉬세요. 여긴 쓰지 않는 방입니다. 그런데 아침식사를 못하셨지요?》
《걱정말아요. 차안에서 요기를 했어요.》
《그럼 점심때 오겠어요. 전 공장엘 좀…》
《어서 그러세요. 정말 고마워요.》
금희가 서둘러 나가자 박혜련은 온몸이 잦아드는것 같아 왕골지적바닥에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외삼촌, 차가 공장쪽으로 안가는가요?》
《이 차는 지동리에 나가는 차다.》
《또 촌에 바꿈질하러 가는군요? 이제는 개인농들이 다 없어졌는데 누가 뒤거래를 하겠어요. 제발 옛날 장사군습성을 버리세요.》
《네가 뭘 안다구 그러니. 요즘처럼 비료시세 높은적은 없었다. 협동조합들에선 조건부 없이 달라는게 비료란다. 옴니암니 흥정하던 개인농들하군 대비도 안돼.》
《그렇게 바꿈질로 자재사업하다 큰코 다치지 않나 이제 두고보세요. 지금 때가 어떤 때예요. 한 사람이 두몫 세몫해도 시원치 않아하는 들끓는 천리마시대란 말이예요. 자재사업도 이런 시대에 맞게 한번 좀 혁신해보란 말이예요.》
《아따, 연구사선생하구 반년나마 함께 일하더니 이젠 제법 훈시질까지 하게 됐구나.》
밖에서 나는 소리다. 아슴프레 먼곳에서 들려오는듯 한 그 목소리가 점점 작아진다. 아늑하고 따스한 방안에 들어앉아 맥을 놓고 고개방아를 찧던 혜련은 배낭에 기댄채 잠들어버리고말았다. 벽에 걸린 구식 무종이 그의 고르로운 숨소리에 박자를 맞추듯 단조롭게 딸깍거리였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잠결에 흠칫 놀라 깨여난 혜련은 귀밑머리를 쓰다듬어 올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계를 보니 한시간도 못잤는데 몸이 거뜬했다. 밖은 조용했다. 마루밑에 목을 길게 빼고 누웠던 누렁개가 목털을 푸시시 살구며 일어나다가 알만 하다는듯 꼬리를 휘휘 내저었다. 뜰을 지나 대문까지 나왔던 그는 우뚝 멈추며 배낭을 내려놓고 속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들었다.
《저를 찾지 마세요. 철이 아버지 합숙으로 갑니다. 박혜련.》
수첩장을 뜯어 문패에 끼워놓은 혜련은 대문을 나섰다. 반시간이 지나서 그는 벌써 남편이 자취하는 집마당에 들어서고있었다.
집이래야 나지막한 둔덕에 추녀가 손길에 닿는 반토굴이였다. 꺼멓게 곰팡이가 낀 목삭판의 부엌문에는 주먹만 한 열쇠가 걸려있었다. 뜨락은 서너평 되나마나한데 한쪽에 통나무를 쪼개 걸쳐놓은 세면대가 있었고 그옆에 석탄무지와 무슨 시험설비같은것들이 주런이 보였다. 휴지쪼박과 검불들이 딩굴고 부스러진 탄덩어리들이 여기저기 널려있어 한산하기 그지없었다.
《제가 곁에 있으면서 미처 관심을 돌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유별나게 은은한 녀인의 목소리가 등뒤에서 들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하얀 옥당목적삼에 검정치마를 받쳐입고 곧게 탄 가리마에 랑자를 틀어올린 단아한 차림의 녀인이였다. 희고 반듯한 이마며 좀 깊을사한 눈확속에 초불마냥 고요히 빛나는 두눈 그리고 입가에 떠도는 따스한 미소는 첫눈에 이상할 정도로 부드러움과 친근감을 느끼게 했다.
공장관리일군들의 합숙을 맡아 식사보장을 해주고있는 리숙이였다.
리숙은 혜련에게 눈인사를 해보인후 부엌문앞으로 가더니 자물쇠를 열고 안으로 들어가 방문을 열어놓았다.
《너무 상심 마세요. 원래 선생님은 공장외래자합숙에 거처하고 계신답니다. 이 집은 새로 지은 아빠트에 이사를 가고 헐기로 됐는데 선생님이 림시로 리용하고있답니다. 선생님은 이 집을 웃는 말로 자택연구소라고 하더군요.》
그 말을 들으니 서글픈 마음이 다소 가셔지면서 이렇게 내려오기를 썩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퇴지에 배낭을 벗어놓고 방안에 들어서려는데 어느새 리숙이가 부엌아궁에 불쏘시개를 넣고 성냥을 그어대고있었다.
박혜련은 부엌으로 들어서며 리숙의 손목을 잡았다.
《이러지 마세요. 바쁘실텐데 이제는 어서 가보세요.》
《난 저 아래 관리일군합숙을 맡아보는 관리원 리숙이라고 해요. 원래는 합숙생이 아홉이였는데 하나둘 다 나가고 이제는 세명뿐이예요. 그러니 바쁠 일도 없답니다. 먼길을 왔는데 방안에 앉아 푹 쉬면서 집구경이나 하세요.》
리숙은 이러며 혜련의 등을 떠밀었다. 혜련은 어쩌는수 없이 방안에 들어가 배낭아구리를 벌리고 허드레옷을 꺼내입었다. 그는 굴뚝모퉁이에 세워둔 모지랑싸리비자루를 찾아들고 뜰안을 박박 쓸어내기 시작했다.
아궁이에 불을 지펴놓고 물바께쯔를 들고나오던 리숙은 먼지를 뽀얗게 들쓰며 서둘러대는 박혜련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더는 아무말 없이 그들은 부지런히 손들만 놀린다. 눈썰미가 빠르고 손끝이 여무진 녀인들이라 잠간사이에 집안팎이 훤해지는것 같았다. 이마에 땀발이 서서 한참 닥달질을 하는데 금희가 뛰여 올라왔다.
《사모님두 참. 이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그는 당장 큰일이나 난듯 들어서는 길로 혜련의 손에서 물걸레를 빼앗아들며 떠들어댔다.
《미안해요. 빈방에 혼자 있기가 뭣해서…》
혜련은 금희와 낯을 익힌지 얼마 안되나 오래된 사이처럼 친숙감이 들어 웃는 낯으로 말했다.
《미안하다면 다예요. 어서 빨리 가시자요. 외삼촌이랑 밥을 해놓고 얼마나 섭섭해하는지 몰라요.》
《일부러 찾아까지 왔는데 가보세요. 여기 집안일은 내 마저 하지요.》
리숙이가 조용히 미소를 그리며 권고했다. 혜련은 난처했다.
《금희동무, 내 심정을 리해해줘요. 어쩐지 오자마자… 철이 아버지가 오시면 그때 함께 가서 인사를 드리겠어요.》
《야참, 별스럽겐 구네. 그럼 난 어쩌나…》
금희는 속이 상한듯 두발을 동동 굴렀다.
《금희, 너무 지나치게 권하진 말어. 그 집하군 초면인데 쉽게 문턱을 넘어서겠니. 그렇게 가서 말씀드리렴.》
혜련의 심정을 충분히 알게 된 리숙이가 금희를 타일렀다.
《리숙언닌 괜히 알지도 못하면서, 외삼촌은 사모님을 옛날부터 잘 아는 잊을수 없는 사이라면서 꼭 모셔오라는거예요.》
《그래?!…》
리숙은 그 무슨 연고가 있는것 같아 더 다른 말을 못했다.
박혜련은 딱한듯 금희의 손목을 꼭 잡았다.
《금희동무, 출장가셨던 철이 아버지가 언제 불쑥 오실지 모르겠는데 빈집에다 모시면 안되지 않나요. 난 그렇게는 못해요. 내가 여기 내려와 있구야 어떻게 그렇게 하겠어요.》
간절한 호소에 금희는 할수 없다는듯 긴 속눈섭을 내리깐다.
《제가 사모님의 그 깊은 마음속까진 미처 생각 못했어요.》
박혜련은 어깨가 처져 돌아서는 금희를 둔덕아래까지 바래주었다.
이날 그는 리숙이 들고온 음식으로 점심과 저녁을 치르면서 집안팎을 닦아내기에 시간가는줄 몰랐다. 귀떨어진 아궁턱과 부뚜막에 흙매질을 하고 선반우에 댕그랗게 놓여있는 식기 네개까지 닦아놓았을 때 밤은 벌써 퍼그나 깊었다.
후끈하게 더워진 방에 들어가니 온몸은 꺼져들어가는것 같았다. 그런데 왜그런지 잠은 오지 않고 시간이 갈수록 정신이 마록마록해졌다. 트렁크에서 영문판 약물학을 꺼내 펼쳐들었다. 일찌기 의학에 푸른 꿈을 두었으나 남다른 곡절로 준의자격에 머무르고있는 혜련이였다. 그는 자기 직업에 상당한 애착을 두고있다. 만약 그 애착까지 없다면 상시적으로 떨어져있어야 하는 부부간의 공백을 무엇으로 메꿀수 있겠는지. 원서에 파묻힌 혜련은 벌써 자신이 서까래가 앙상한 천정이며 곰팡이가 새까맣고 파리똥이 다닥다닥한 남편의 방에 외롭게 와있다는것도 잊어버렸다.
어디선가 땅을 쿵쿵 울리는 성급한 발자국소리가 들리는것 같았는데 어느새 방문이 벌컥 열리였다. 동시에 우람한 키에 눈이며 코, 입이 시원시원하게 생긴 사나이가 방안을 꽉 채우며 들어섰다.
《당신이 왔구려. 소식도 없이 이게 웬일이요?!》
혜련은 일어날 사이도 없이 《아!》하는 소리와 함께 손에 들고 있던 책을 툭 떨구었다. 이어 텁텁한 땀내와 잊을수 없는 향긋한 체취가 확 풍기고 뜨거운 입김이 목덜미를 화끈 달구었다. 그는 숨이 막힐 정도로 꽉 그러안는 억센 팔의 힘에 몸을 맡긴채 두손을 뻗쳐 남편의 머리칼이며 꺼칠해진듯 싶은 얼굴을 조심히 쓸어만졌다. 순간이 정지된듯 천정낮은 비좁은 방안엔 오래동안 그들의 더운 숨결만 가득찼다.
《어서 등에 진 배낭을 내려놓으세요.》
이윽하여 혜련이가 속삭이듯 말하며 어깨를 파고들어간 배낭끈을 벗겼다.
《아유, 배낭이 돌덩이같군요. 이게 그 알탄점결제라는건가요?》
혜련은 허리를 휘청거리며 배낭을 겨우 들어내렸다.
《그러니 철이 아버진 지금 길주에서 곧바로 오는 길이군요?》
대답없이 애정에 넘친 눈길로 고개만 끄덕이던 한대식이 한마디했다.
《공장쪽으로 가다가 여기를 보니 불빛이 보이질 않겠소. 정말 당신이 이렇게 올줄은 뜻밖이요.》
《반년동안 소식 한장 없으니 어디 가만있게 됐어요.》
《무소식이 희소식이란 말 있지 않소. 그래 평강공주가 바보온달네 집을 찾아온셈인데 어떻소. 실망해서 눈물을 짜지 않겠소?》
《평강공준 제 소원이 그랬으니 험한 산골 온달네 집에 찾아갔을 때 후회할수 없었답니다.》
《그랬던가, 허허…》
한대식은 누빈 솜옷을 벗으며 흐뭇해했다. 혜련이도 즐겁게 따라 웃었다.
《잠간만 기다리세요.》
혜련은 문턱에 걸어놓았던 수건을 머리에 쓰며 급히 부엌으로 나갔다. 탄불우에 올려놓은 무쇠가마에서 뽀얀 김이 칙칙 소리를 내뿜고있었다.
《여기 더운물을 떠놨어요. 우선 세수하고 발부터 씻으세요.》
세면대야에 설설 끓는 물을 가득 퍼담아놓은 그가 평양을 떠날 때 들고온 음식과 안주 몇가지를 챙겨들고 방안에 들어서니 남편은 벌써 배낭을 벤채 네활개를 펴고있었다.
남편이 깨날세라 살근살근 상을 차려놓고 깊이 간수해온 술병을 꺼냈다. 식사전 약주 한잔 하는것을 그리도 좋아하는 남편이다.
《철이 아버지, 이젠 좀 일어나세요.》
나직한 목소리로 남편을 깨웠다. 그러나 끄떡없는 남편의 숨소리는 변함이 없었다.
남편을 깨울 용기가 더는 나지 않았다. 며칠째 깎지 못한 더부룩한 수염이며 먼지와 땀에 얼룩진 컴컴해진 얼굴, 푹 꺼져들어간 눈확과 량볼, 두팔을 벌린채 드렁드렁 코까지 골아대며 세상모르게 자는 남편을 보니 속이 쓰렸다.
이날이때까지 남편의 연구사업을 가장 신성하고 긍지높은 일로 떠받들어온 자신이건만 정작 너무도 달라진 모습을 눈앞에 대하니 목이 메이고 그 어떤 아쉬움이 명치끝을 찔렀다. 이때까지는 어쩌다가 집에 들릴 때 너무도 흔연한 태도를 보이군 하여 외지생활이 힘들긴 해도 그쯤 여겨왔었는데 말이 아닌것같았다. 혜련은 자기가 내려오기 썩 잘했다는 생각과 함께 현지에서 부디 이런 고생을 안해도 그 누가 탓하랴 하는 얄궂은 맘이 치밀어올랐다.
해방전 동경물리과대학시절부터 수재로 이름났고 그후 조선사람으로선 감히 넘겨다 볼수도 없던 노구찌재벌놈의 연구소 과장까지 한 남편이다. 그런 뛰여난 두뇌에 지금처럼 쏟아붓는 정력으로 연구소에 앉아 론문을 쓰거나 대학교단에 섰더라면 이미 당당한 명예를 가지고 존경을 받고있을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남편의 뜻을 귀중히 여기고 그의 생활방식을 좋게 생각하려 해도 긍정이 안갔다.
혜련은 호- 하고 가느다란 숨을 내쉬며 책궤짝우에 댕그랗게 포개놓은 털빠진 모포를 꺼내 남편의 몸에 덮어주었다.
순간 그처럼 곤하게 자던 남편이 벌떡 일어났다.
《내 그만 깜빡 잠들었구만.》
한대식은 황급히 한쪽구석에 놓여있는 점결제배낭을 끌어당겼다. 전혀 자던 사람같지 않게 서둘렀다.
《아니 이 깊은 밤에 어델 간단 말이예요?》
혜련이가 펄쩍 놀라며 남편의 팔을 붙잡았다.
《내 당신한테 미처 말을 못했구만. 여보, 그렇게 애를 태우던 중간시험로조립이 사흘전에 끝났다오.》
《아니 그게 정말이세요?!》
혜련은 뜻밖의 말에 두눈이 휘둥그래졌다. 그도 중간시험로가 연구사업에서 어떤 단계에 있다는것쯤은 알고있었던것이다.
《사실이요. 이번에 완성조립한 시험로는 그대로 생산로로 쓸수 있게 만든 아주 실용성있는 로요. 우린 지금 확대시험준비에 모든 힘을 넣고있소. 내가 길주에 갔던것도 바로 그 준비때문이였소. 요즘엔 정말 몇밤을 지새워도 흥겹기만 하구려.》
《끝내 어려운 고비를 넘어섰군요. 그런데 확대시험은 언제부터 할 작정이세요?》
혜련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고 두눈은 환희로 빛났다.
《내각협의회에 올라간 지배인동지가 내려오면 지체없이 시험로에 불을 지피자고 하오.》
한대식은 안해의 기쁨어린 얼굴을 대하자 진짜 어려운 일들은 이제부터라는 말을 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사실 요즘 한대식은 시험로 확대시험을 앞두고 머리가 자못 무거웠다.
지난기간 한대식의 연구사업을 총괄해본다면 소형시험로에서의 반복시험과 여기서 얻어쥔 테타를 확증할수 있는 합리적인 중간단계 시험로제작과정이라고 할수 있다.
그렇지만 확대시험단계에서는 사정이 다르다. 종전에는 아무리 참기 어려운 고통이라 해도 연구사본인의것으로 끝날수 있었으나 이제부터는 확대시험에 참가하는 매개 사람들과 직접 련결되는것이다. 피할수 없는 사람들의 이 관계가 시험연구보다 몇십배나 더 어렵게 생각되였다.
한대식은 이것이 두려웠고 감당해낼만 한 확신이 생기지 않았다. 이날이때까지 과학연구 하나밖에 모르고 살아온 자기가 다른 사람들의 운명에 영향을 줄수 있다고는 아직 한번도 생각해본적 없는 한대식이였다.
얼마후 한대식은 안해의 바래움을 받으며 점결제가 든 배낭을 메고 석근수아바이가 기다리고있는 발생로현장으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