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편 소 설
세번째 봄날에
김 호 성
1
봄날의 새벽이였다.
아직 날이 밝으려면 멀었지만 청신한 기운이 감도는 새벽이였다.
북조선인민위원회 부위원장 김책은 밝은 빛이 비치는 북조선공산당 조직위원회청사 2층을 올려다보고있었다.
《장군님께서 또 밤을 새우시였습니다.》 하고 보초를 서던 경위대원이 근심어린 어조로 김책에게 말했다.
김책은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항일무장투쟁시기나 새 조국건설의 지금이나 장군님께서는 밤을 새우시는 때가 많았다. 그것이 어느덧 습관처럼 되신 장군님이시다. 경위대원은 그러시는 장군님의 건강이 념려되여 김책더러 안타까운 심정을 말씀드렸으면 하지만 김책인들 어쩌랴.
김책은 경위대원의 말에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이고 걸음을 옮겼다.
김책이 영명하신 김일성장군님께서 계시는 2층 집무실에 들어섰을 때 책상우에는 화페교환사업을 진행한 정형과 북조선중앙은행규정을 새로 제정하는것과 관련한 문건들 그리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림시헌법초안과 관련하여 북조선인민위원회와 헌법제정위원회앞으로 보내온 건의문, 감사편지, 헌법지지를 결정하는 문건들이 수북이 쌓여있었다.
《김책동무요? 마침 왔소. 그러지 않아도 찾으려던 참이였소.》
장군님께서는 일어나시며 김책에게 자리를 권하시였다.
《장군님, 또 밤을 새우시였습니까? 그렇게 일하시여서야 무쇠인들 견디겠습니까?》
《나는 일없소. 김책동무는 좀 쉬였소?》
《저야 뭐…》
《난 오히려 김책동무가 걱정이요.》
《장군님, 제 걱정은 마십시오.》
《그래, 우리 견디여냅시다. 새 조국건설에서 참으로 많은 문제들이 우리를 기다리고있소.》
장군님께서는 창문가로 다가가시여 문을 여시였다. 봄기운이 어린 새벽바람이 기다린듯 방안으로 어리광치며 몰려들었다.
한동안 려명이 어린 새벽하늘을 바라보시던 장군님께서는 나직이 혼자소리로 말씀하시였다.
《해방된 조국에 돌아와 세번째로 맞는 봄이요.》
《그렇습니다, 장군님.》
해방된 그해에 당을 창건하고 다음해 첫봄은 토지개혁을 비롯한 제반 민주개혁실시로 맞으시고 그 다음해 봄은 북조선최고주권의 집행기관인 인민위원회창설로 맞으시고 세번째 봄은 정규무력창설로 맞으시였다. 해방된 조국에서의 당, 정권 및 무력건설위업을 3년도 안되는 짧은 기간에 이룩하신 장군님이시였다. 그러시느라니 언제 한번 편히 쉬지 못하시는 장군님이시였다. 조국과 인민을 위해 바치신 장군님의 로고를 무슨 말로 헤아린단 말인가.
《조국의 해방을 이룩하기 위해 싸우다 먼저 간 동지들을 생각하면 아직도 우리가 할 일이 많소.》
장군님께서는 크게 숨을 들이키시며 김책에게 돌아서시였다.
《뭐니뭐니해도 이번 남북련석회의가 제일 중요하오. 오늘 진행할 행사와 관련해서 뭐 제기된것은 없소?》
《모든 준비사업을 다 끝냈습니다.》
《수고했소. 30여만 평양시민들의 대회를 조직하는게 쉽지 않소.》
《남북련석회의를 지지하는 대회여서 그런지 조직하는 우리들도 그렇고 평양시민들도 모두 흥분되여있습니다.》
《그럴테지. 이번 회의는 국내적으로나 국제적으로 큰 의의를 가지오. 우리 조국이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통치에서 해방된 다음 남북조선의 정당, 사회단체대표들이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여앉았다는데도 있지만 조국의 남쪽절반이 미제국주의자들에게 강점되고 남조선을 자기들의 식민지로 만들려는 미제의 시도가 로골화되고있는 조건에서 조국분렬의 위험이 닥쳐오고있는 엄중한 시기에 열렸다는데도 큰 의의가 있소. 이번 회의를 통해서 미제와 리승만역적에게 된매를 안긴셈이요.》
《이번 남북련석회의가 그렇게까지 큰 성과를 거두게 되리라는것을 미처 몰랐습니다.》
《제기된 자료를 보니 세계의 진보적인민들은 제2차 세계대전후 미군이 점령통치하고있는 지역에서 좌익세력과 중간세력은 물론 일부 우익세력까지 련합하여 점령군을 반대해나서고있는 나라는 조선뿐이라고 하면서 우리 나라를 주시하고있다고 하오. 이것은 남조선에 대한 미제의 식민지예속화정책의 반동성이 세계의 면전에서 낱낱이 폭로되고 미제국주의자들이 쓰고있던 해방자의 너울이 벗겨지게 되였다는것을 말하여주오. 우리는 남은 기간에 이번 남북련석회의에 참가한 대표들과의 사업을 더 잘하여 반드시 미국놈들과 그 앞잡이들의 분렬책동을 짓부셔버리고 통일적민주주의정부수립이라는 민족대업을 반드시 이룩하여야 하겠소.》
《알았습니다, 장군님.》
《우리 새벽바람도 맞을겸 오늘 열리게 될 평양시군중대회장을 돌아봅시다.》
《장군님, 아직 날이 밝지 않았습니다.》
《인차 밝을게요.》
장군님께서는 웃으시며 김책과 함께 밖으로 나가시였다.
대동강건너 문수봉쪽이 푸름푸름 밝아오고있었다.
어디선가 새소리도 들리였다.
장군님께서는 김책과 함께 북조선인민위원회청사쪽으로 걸음을 옮기시였다.
《장군님, 이렇게 장군님과 함께 걸으니 마치도 제일먼저 새날을 맞으려고 가는것 같습니다.》
《김책동무가 조기천동무를 도와 <백두산>시를 창작하게 하더니 이제는 제법 시인이 다되였소. 제일먼저 새날을 맞으려고 가는것 같다? 하, 하.》
《장편서사시 <백두산>이 나온지 벌써 한해가 지났습니다.》
《작년 2월달에 나왔지?》
《그렇습니다.》
《조기천동무는 잘 있소?》
《예, 지금도 좋은 시들을 창작하느라고 여념이 없습니다.》
《참 좋은 동무요. 우리 그 시인을 더 잘 도와줍시다.》
《알겠습니다.》
장군님께서는 한동안 말씀이 없이 걸음을 옮기시다가 물으시였다.
《김책동무, 이번 련석회의에 온 남측대표들과의 사업에서 제기된것은 없소?》
《다 잘되고있습니다. 장군님의 가르침대로 하니 우익세력들도 다 좋아하고있습니다. 어제 황해제철소를 돌아보았는데 감동들이 큰것 같습니다. 김구선생과 일행은 조선사람들이 웅장한 용광로를 제손으로 척척 돌리는것이 너무도 희한하다고 하면서 출선때에는 만세까지 불렀습니다. 저녁에 대표자련석회의가 끝난것을 기념하여 열린 경축공연을 보면서도 민족적인 선률과 장단에 맞추어 노래부르고 춤추는것이 좋다고 하면서 박수를 쳤습니다. 김구선생은 신흥의 기상이 약동한다고 말했습니다.》
《전번 정치위원회에서도 말했지만 따뜻한 동포애의 정을 가지고 남조선정당, 사회단체대표들과의 사업을 잘하여야 합니다. 나는 남북련석회의에 참가하기 위하여 북조선에 오는 남조선정당, 사회단체대표들을 민족주의자이건 공산주의자이건 다 동포애의 정으로 따뜻이 맞이할데 대하여 여러번 강조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일부 일군들속에서 민족주의자들을 편협하게 대하는 경향들이 적지 않게 나타나고있습니다.》
《남조선로동당대표들속에서 그런 편향들이 나타나고있는것 같습니다.》
《내 오늘 그 동무들과 만나보겠소. 우리는 정견을 달리하는 중간 및 우익민족주의세력과의 사업에서 언제나 옹졸하고 편협하게 행동하지 말아야 하며 넓은 도량을 가지고 그들을 아량있게 포섭하여야 합니다. 리념과 정견의 차이는 뒤로 미루고 그들의 민족적량심과 애국적지향을 귀중히 여겨야 하며 민족의 공동위업을 위하여 그들과 합작을 하고 공동행동, 공동투쟁을 힘있게 벌려나가야 합니다. 그래야 남북련석회의의 결정을 성과적으로 관철해나갈수 있습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정견을 달리하는 정당들과의 사업에서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태도를 버려야 하며 우리가 공들여 쌓아놓은 탑이 무너지는 일이 없도록 특별히 주의하여야 하겠습니다.》
《장군님, 명심하겠습니다.》
《남북련석회의가 다 끝난것은 아닙니다. 이제 또 련석회의에서 제기된 내용들을 실천할 대책들을 토의하여야 합니다. 그러니 사소한것이라도 놓치지 말고 심중하여야 합니다.》
《우리 동무들에게 다시한번 채근하겠습니다.》
《그렇게 하는것이 좋겠습니다.》
장군님께서 김책과 함께 북조선인민위원회청사앞에 이르렀을 때는 이미 날이 밝았다.
장군님께서는 오늘 열리게 될 남북련석회의지지 평양시민대회 주석단으로 지정된 인민위원회청사의 로대를 바라보시였다.
로대우에 《미제국주의침략자들을 반대하여 헌신투쟁하고있는 애국자들과 조선인민들에게 승리와 영광이 있으라!》라고 쓴 구호가 나붙어있었다.
한동안 로대쪽을 바라보시던 장군님께서 김책에게 물으시였다.
《김책동무, 홍명희선생을 아시지요?》
김책은 얼떠름해졌다.
《예, 벽초 홍명희선생이야…》
《홍명희선생에게 요새 무슨 일이 있은게 아닙니까?》
김책은 긴장해졌다.
벽초 홍명희선생이야 해방전에 신간회일도 그렇고 력사소설 《림꺽정》을 쓴 작가로서 명성이 나있는 사람이였다. 또 해방후에는 김일성장군환영준비위원회를 뭇고 장군님을 흠모한 사람이고 몽양 려운형과 함께 민족대단결을 위해 민주독립당이라는 중간정당을 무어 미국놈들과 리승만도당과 맞서싸운 사람이다. 이번 련석회의에 참가하여서도 그는 결정서 기초위원으로 보선되여 회의성과를 위해 모든 힘을 다하고있다.
그런 벽초선생에게 무슨 일이 있는가? 장군님께서 물으실 때에야 반드시 까닭이 있을터인데 김책은 그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있었다. 그렇다고 김구를 비롯한 우익정당대표들에 대해서만 신경을 쓰다나니 미처 모르고있었다고 말씀올릴수도 없었다.
《장군님, 저의 사업에서 빈틈이 있은것 같습니다.》
《그러니 김책동무도 모른다는 말이군.》
《솔직히 말씀드려서 벽초선생에 대해서는 미처 관심을 돌리지 못했습니다.》
장군님께서는 김책을 바라보시며 미소를 지으시였다.
《북남조선의 56개 정당, 사회단체 대표 695명이 참가하고 해외교포대표들도 참가한 이번같이 큰 회의를 치른다는것이 만만치는 않지. …》
《장군님, 제가 일을 쓰게 못했습니다.》
《뭐 큰일날 일이 있어서 그런건 아니요. 회의때 보니 홍명희선생의 신상에 무슨 일이 있은것 같아서 그러오. 내가 잘못 봤는가?》
《장군님, 제가 알아보겠습니다.》
《노여움을 사지 않도록 하시오.》
《알겠습니다.》
《참, 자기를 민들레꽃씨라고 했다던 그 녀성기자가 알수 있지 않을가? 홍명희선생과 잘 아는 사이라지?》
《예, 그를 만나보겠습니다.》
붉고붉은 아침노을이 동녘하늘에서부터 퍼지고있었다.
2
평양 만수대기슭의 상수리려관.
어딘가 멀리서 땡강땡강 궤도전차의 종소리가 아슴푸레하게 들려온다. 그 소리에 홍명희는 잠에서 깨여났다.
벽초 홍명희는 늦잠을 잤다. 잠에서 깨여는 났지만 그는 그냥 눈을 감은채 폭신한 명주이불을 둘러감으며 돌아누웠다.
(다 잘됐어, 다 잘됐다니까. …) 하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홍명희는 웃음을 지었다.
홍명희는 이왕 늦은김에 더 자리에 누워 딩굴고싶었다. 그러나 오늘 남북련석회의를 지지하는 평양시민대회가 열리고 거기서 자기는 축사를 하게 되였다는 생각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홍명희가 잠자리에서 일어나는데 마침 기다린듯 이 려관의 아래층에 머물러있는 아들이 문을 열고 들어온다.
《아버님, 편히 주무셨습니까?》
《오냐. 그래, 너도 잘 잤느냐?》
《예.》
아들이 시들하게 대답했다.
《너도 나처럼 늦잠을 잔게지?》
《저는 간밤 한잠도 못 잤습니다.》
《건 또 무슨 소리냐?》
웬 일인지 아들은 찌뿌둥한 낯빛이다.
아들이 말없이 잠자리를 거두는것을 바라보던 홍명희는 서두르지 않고 얼굴을 씻고 옷을 입기 시작했다.
눈같이 흰 조선무명저고리를 입고 바지가랭이에 옥색대님을 매는데 아들이 도와준다.
홍명희는 허리를 펴고 혼자 중얼거린다.
《유자신상의 자모수중봉이라…》
아들이 대님을 매다말고 아버지를 올려다본다.
홍명희는 아들의 눈치를 모르지 않는다.
《유자신상의 자모수중봉》은 맹자의 시구절이다.
공산주의자들이 정권을 쥐고있는 평양에 와서 케케묵은 유교의 글줄을 읊조리는것이 속에 걸린다는 소리다.
하지만 홍명희는 모른체 한다. 아무리 봉건이 어떻고 해도 인간생활에 옳은것을 옳다고 하지 아니할수 없는것이다.
《유자신상의 자모수중봉》이라는것도 그렇다.
그 뜻인즉 객지에 나간 아들이 입은 옷은 어머니가 손수 지으신것이라는 말인데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을 언제나 잊지 말라는 뜻이다.
그것이 무어 나쁘다는건가.
자고로 그 누구의 눈치를 보지 않고 살아온 홍명희임에야…
(칠칠치 못한 녀석…) 하고 홍명희는 아들을 두고 속으로 생각하였다.
력사소설 《림꺽정》이 한창 팔리던 때에 있었던 일이 얼핏 떠올랐다.
아들녀석이 아비가 방에 있는줄은 모르고 제 어미에게 하는 말. 《어머니, 아버지가 고정한분이라고 알고있었는데 아버지가 쓴 소설을 보니 그렇지 않은가 보아요. 소설이라는게 아무리 허구라고 하더라도 체험이 없이는 못 쓴다고 하는데 림꺽정이 소홍이랑 녀자들과 노는 장면을 그린걸 보니 아무래도… 항간에서 돌아가는 소문이 좋지 않아요.》 하니 어머니라는 사람이 받는 말. 《그러게 말이다. 본시 그럴 량반이 아닌데… 모르지. 밖에 나가서 하시는 일을 시침 떼시는지…》
그때 문을 여니 두 모자가 당황해하는 꼴이란… 아들녀석은 범 본 놈처럼 달아났지. 허, 허…
홍명희는 떫은 웃음을 삼키며 거울에 비낀 아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물었다.
《너 요새 평양에 와서 이 애비 모르게 별로 신통치 못한 사람들과 만나군 한다면서?》
《그런 일 없습니다.》
《이 애비에게 숨길셈이냐?》
아들은 한숨을 쉬고나서 대답했다.
《누굴 보고 하시는 말씀이신지…》
《박 아무개라는 사람말이다.》
《예, 그 선생 말씀인가요? 만났습니다. 제가 만나자고 해서 만난건 아니고… 그분이 저를 보더니 자기는 언제인가 사회주의에 대해서 강의하시는 아버님의 말씀을 듣고 혁명가로 된 사람이라고 하면서 아버님에 대해서 각별한 관심을 보이더군요.》
《그래서 귀가 벌쭉했다 그 말이냐?》
《아버님도 무슨 말씀을…》
《이것 봐라. 남에게 좋은 말을 해주는건 하나의 미덕이지만 듣는 사람이 우쭐해서는 못쓴다. 남들이 하는 말은 잘 가려듣는게 좋아. 더 좋기는 자기에 대한 편달이라고 생각하는게야. 알겠느냐? 다시는 그런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말아.》
《그래도 그 사람들은 이 평양에서 한다하는 사람들이고 또 아버님과 인연도 없지 않는분들인데요.》
《너 언제부터 애비의 말을 거슬려듣게 됐냐?》
《알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내 말이 귀에 거슬리냐?》
《아, 아닙니다.》
《못된 송아지 엉뎅이에 뿔난다더니, 쯧, 쯧…》
옷매무시를 마친 홍명희는 버릇처럼 책상으로 다가가다가 우뚝 멈추어섰다.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홍명희는 어두운 낯빛으로 한동안 책상우를 우두커니 바라보다가 문득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급히 문가로 다가갔다.
《어디로 가십니까?》
아들이 물었다.
《넌 몰라도 돼.》
홍명희는 서둘러 려관관리원이 있는 곳으로 갔다. 마침 홍명희가 든 방을 관리하는 처녀가 있었다.
처녀에게 다가가던 홍명희는 주춤했다. 관리원처녀가 《림꺽정》소설을 보고있었다. 그걸 본 홍명희는 놀랐다. 처녀가 자기의 소설을 본다는 사실에 놀란것이 아니라 책 그자체를 보고 놀랐다. 원래 소설은 1920년대말부터 《조선일보》에 련재되여 나오다가 홍명희가 감옥에 들어가면서 중단되였었다. 그후 32년부터 다시 련재되긴 하였지만 일제의 가혹한 《출판검열법》에 의해 종시 끝을 맺지 못하였는데 그럭저럭 1940~1941년에 4권으로 출판되였다. 일제말 조선일보사 출판부에서 나온 초판 《림꺽정》의 《의형제편》 2권과 《화적편》 2권이 그것이였다. 나라가 해방되여 1948년 2월부터 을유문화사에서 《림꺽정》 전 6권이 차례로 간행되기 시작하였는데 놀랍게도 평양의 처녀가 그 책을 보고있는것이다.
《처녀는 이 책을 어디서 얻었나?》
다짜고짜 묻는 홍명희의 물음에 처녀는 놀라서 일어났다.
《아, 선생님이십니까? 안녕하셨습니까?》
《응, 고맙네. 그건 그렇고 이 책은 어디서 났지?》
《왜 그러십니까? 뭐가 잘못되였습니까?》
《아니 아니, 뭐 그런건 아니고 그저 호기심이 나서…》
《누가 주었습니다.》
《누가?》
《기자선생님이…》
《기자? 어느 기자?》
《남쪽에서 오신 녀성기자선생님입니다.》
《인숙이라고 하지 않던가?》
《그렇습니다.》
《그를 아나?》
《모릅니다.》
《그런데 어떻게?》
《사실은 그 선생님이 저에게 왔었습니다. 제가 선생님이 계시는 방을 관리한다는걸 아시고서는 이 책을 주셨습니다.》
《처녀가 달라고 했나?》
《아닙니다. 그 녀성기자선생님은 말씀하시기를 제가 관리하는 방에 드신 선생님이 유명한 작가선생이라면서 선생님이 쓰신 이 책을 보라고 하였습니다. 어찌나 고맙던지 저는 막… 저도 책을 좋아해서 렴치불구하고 받아보았습니다.》
《그렇게 됐구만. 그러니 인숙이가 먼저 관리원처녀를 찾아왔단 말이지, 내가 없을 때?》
《잘못되였습니까?》
《아니, 뭐 잘못되기야… 헌데 처녀, 이런 책에 정신팔지 말라구.》
《아니, 왜 그러십니까?》
《응, 다른건 아니고, 이런 시시한 책보다도 더 좋은 책이 많으니까 앞으로는 그런 책을 애써 구해보라구. 내 그런 책을 구해줄수도 있지.》
《어마나, 선생님은 참 별난 말씀을 하십니다. 전 이 책이 재미납니다. 정신나가게 읽었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다 그럽니다.》
《아니, 아니야. 볼만 한게 못돼. 그저 심심풀이로나 볼게야. 그리고 말이야. 앞으로는 누가 이런 책을 주면 선뜻 받지 말라구.》
《왜 말입니까?》
《어, 다른건 아니고 사람들중에는 간혹 이런 책을 들고 와서 처녀의 마음을 사가지고 엉뚱한짓을 할수도 있으니까?》
《제가 보건대 그 녀성기자선생님은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았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어떻게 아나? 앞으로 내가 없을 때 다시 나타나면 받자 하지 말라구. 알겠나?》
《선생님,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눈치가 여간 빠르지 않은 처녀였다.
《일은 무슨… 별게 아니야.》
《아이, 속상해. 선생님, 무슨 일입니까? 어서 말씀해주십시오.》
《허, 허… 별게 아니라는데두.》
《선생님!》
홍명희는 안타까워하는 처녀를 보며 공연히 말을 꺼냈다고 후회했다. 그렇다고 말꼭지를 떼놓고 그냥 지나칠수도 없었다.
《관리원처녀, 하나 묻자구. 그… 이 려관에서 말이지, 손님이 나간 다음에 매일 청소를 하는가?》
《네, 그건 우리 의무입니다. 더구나 선생님들은 나라의 통일을 이룩하자고 오신 귀한분들이신데…》
《그건 과분한 말이고… 혹시 내 방에서 무슨 물건같은것을 건사한게 없나?》
《무슨 물건말입니까?》
《응, 별게 아니고, 그 무슨 종이장같은걸 말이네.》
《문건입니까?》
《아니, 아니야. 그저 낡은 종이장이지. 옛날 종이에 뭐라고 글을 쓴거야.》
《저는 선생님께서 드신 방의 물건은 하나도 다치지 않았습니다. 다만 청소만 했을뿐입니다. 우에서 내려온 높은분들이 여러번 말씀하셨는걸요. 그렇게 해야 한다고.》
처녀는 벌써 눈물이 가랑가랑 맺혔다.
《원, 처녀두… 처녀보고 다쳤다는게 아니야. 혹시 그런 일이 없는가 물어보는거지. 뭐, 별게 아니란데두.》
《언제 그렇게 되였습니까?》
《며칠되였어. 난 처음에 내가 어디 흘렸는가고 생각했지. 그런데 아무리 생각하고 찾아보아도 나타나질 않는구만. 그래서 처녀에게 물어본거지.》
《어떤것인지 자세히 말씀해주십시오. 제가 찾아보겠습니다.》
홍명희는 허거프게 웃었다.
《고맙네만 그만두게. 다른걸 하나 더 묻자구.》
《뭡니까?》
《내가 방을 비운 사이에 처녀말고 또 다른 사람이 들어간적은 없었나?》
처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한동안 생각하다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낯선 사람이 들어간적은 없었습니다.》
《그 녀성기자라는 사람은?》
《그 선생님은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혼자서 들어가시지는 않았습니다. 제가 청소할 때 같이 들어갔댔는걸요. 방을 오래동안 둘러보았습니다. 뭐 불편한데가 없겠는가고 하면서 걱정하시던데요.》
《알만 하네.》
《선생님, 무슨 종이장인지 말씀해주십시오. 제가 꼭 찾아보겠습니다.》
처녀의 말을 들으며 홍명희는 쓴웃음을 지었다.
《공연한 일이야. 처녀가 치우지 않았다면 그건 아마 찾을수 없는 곳에 있거나 이 세상에 없는것인지도 모르네.》
《그럼 어떻게 합니까?》
처녀는 두손으로 얼굴을 싸쥐였다.
《처녀의 잘못은 없어. 이건 다 내 잘못이야, 내 잘못… 처녀에게 부탁하는데 이 말은 다른 사람에게 하지 말아달라구, 알겠나?》
《선생님, 그렇게야 어떻게…》
홍명희는 처녀의 어깨를 두드려주고 돌아섰다.
그러니 인숙이가… 유서를 치웠을수 있다.
하다면 이건 분명 그 어떤 정치적인 도발이야. 내가 왜 그런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을가. 인숙이라…
해방이 되던 그해 가을이던가, 리승만이 보내서 왔노라며 인숙이 하던 말이 귀가에 울렸다.
《선생님은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어째서 리승만박사라면 그리도 쓴 외 보듯 하시는지…》
인숙은 제켠에서 답답한듯 가볍게 한숨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선생님, 저는 선생님이 건국을 위해 민족의 대단합을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하시는걸 잘 알고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저… 실례의 말씀인지는 모르겠지만 허황한 망상이 아닐가요?》
《뭐라구, 망상?》
듣다못해 홍명희가 말소리를 높였다.
《그래요. 어쨌든 말뚝이 있어야 고삐를 맬게 아닙니까? 대단합이든 뭐든… 그런데 그게 어디 있는가요?》
비웃음이 담긴 인숙의 얼굴…
홍명희는 후- 숨을 내쉬였다.
무슨 악연으로 인숙은 여기 평양에까지 와서 나를 괴롭히는가.
3
1948년 4월 25일.
아침일찍부터 북조선인민위원회청사가 자리잡은 광장으로 남북련석회의의 성과를 축하하려고 평양시민들이 밀물처럼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평양의 거리는 프랑카드와 기발, 꽃, 갖가지 장식물과 도구들을 들고 가는 사람들로 사태를 이루었다.
홍명희는 사람들의 물결속에 떠밀리우며 30여만 평양시민들의 경축대회가 열리는 곳으로 가고있었다. 서로 찾고 부르고 웃기도 하며 떠들썩한 사람들속에 끼여든 홍명희는 마치도 꽃수레에 타고 가는듯 했다. 하지만 마음속에서는 다른 생각이 자리잡고 놓아주질 않았다. 아무리 랭정하게 아침에 있은 일을 돌이켜보려고 하였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다. 아니, 그것은 단지 아침에 있은 일이 아니였다.
홍명희의 눈앞에 학생복을 입은 애어린 처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
세칭 신간회사건으로 감옥에 갇혔던 홍명희가 가출옥되여 나오던 때의 일이였다.
학생복을 입은 처녀가 홍명희앞으로 뛰여왔다.
그는 홍명희의 뒤를 흘깃 보며 조급하게 물었다.
《저의 아버님은요?》
홍명희는 아무 말도 못하고 망연히 하늘만 쳐다보았다.
《너의 아버지는… 나 혼자 나왔구나.》
그 소리에 처녀는 소스라치며 뒤걸음쳤다.
처녀의 눈굽으로 이슬이 차올랐다.
《날 원망해라.》
홍명희는 그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처녀는 슬픔에 잠겨 나직이 말했다.
《저의 아버님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민족의 대단합을 이루어야 나라의 독립도 있고 번영도 있다는 선생님의 말씀이 옳다고 여기고 따랐어요. 그런데 결국은 이게 단가요? 아버님은 돌아가시고 저는 부모없는 고아가 되고…》
처녀는 손등으로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홍명희는 꺼지게 한숨을 내쉬였다.
처녀는 잘근잘근 피나게 입술을 깨물며 나직이 따졌다.
《도대체 선생님이 주장하시는 민족대단합이니 뭐니 하는것이 이 조선에서 될걸 가지고 그러신건가요? 말씀해주세요.》
처녀의 물음은 예리한 단검처럼 홍명희의 가슴에 파고들었다.
홍명희는 얼굴에 먹구름을 실으며 말했다.
《너의 아버지는 감옥에서 내 무릎을 베고 숨을 거두었다. 생각하면 나도 가슴이 아프다. 하지만 아버지를 여읜 사람이 너 하나뿐이 아니다.》
처녀는 눈물에 젖은 얼굴을 들고 퍽 가라앉은 소리로 말했다.
《저도 알고있어요. 선생님이 친일을 하지 말고 빼앗긴 나라를 반드시 찾아야 한다는 아버님의 유서를 간직하고계신다는걸. 그리고 그 유서를 지키는 길이 오로지 민족의 대단합에 있기에 신간회의 일에도 앞장섰다는것도요.》
가늘게 흐느끼며 하늘에 눈을 주고있던 처녀의 낯빛이 차츰 얼음처럼 싸늘해졌다.
그는 두손을 가슴에 얹고 안타깝게 몸부림쳤다.
《하지만 그 유서가 어쨌단 말인가요? 서로 단결해서 왜놈들을 물리치자고 모였댔지요, 신간회에요. 그런데도 끝내는 왜놈들앞에서 공산주의니 민족주의니 하면서 패싸움질로 망하고말았지요? 썩어빠진 사대부가 남겨놓은 유산! 사색당쟁, 파벌싸움… 나라가 망하고도 버리지 못하는 그 악습! 유서가 어쨌다는거예요? 그런것에 신물이 나요.》
처녀는 입술을 옥물고 몸을 바르르 떨며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유서? 안돼요, 안돼! 그건 죽어야 고치는 불치의 병이예요. 불치의 병!》
그는 홍명희를 쏘아보며 뒤걸음쳤다.
홍명희의 가슴은 칼로 에이는듯 했다.
…
그날 홍명희의 가슴을 아프게 하던 그 처녀가 바로 인숙이였다.
인숙은 신간회사건이 있은 뒤 미국으로 건너갔다. 홍명희가 알기에는 류학을 갔다고 하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해방이 되자 리승만의 꽁무니를 따라 돌아왔다.
하필 그가 리승만을 따라 조국에 돌아올건 뭐람?
생마 갈기 외로 질지 바로 질지 누가 안다더냐 하더니…
다른 사람도 아닌 신간회동지의 딸이 그렇게 변한것을 보고 홍명희는 가슴이 아팠다. 달라진 인숙을 고운 눈으로 보게 되지 않았다.
인숙은 서울에 있을 때 몇번이나 리승만의 의사를 전달하려 홍명희를 찾아오군 하였다. 그때마다 홍명희는 인숙을 쓴외 보듯 하였다.
인숙이 홍명희자신과 아버님이 남기신 유서를 비웃은것까지는 괴로운대로 참을수 있었고 그런대로 리해할수도 있다. 하지만 그가 다름아닌 리승만의 끄나불로 돼버린것은 도무지 내려가지 않는다.
홍명희는 무겁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아서라! 구태여 지나간 일을 두고 마음쓸 일이 뭐냐.
그래도 마음 한구석에는 인숙의 일이 앙금으로 앉아 불안스러웠다.
대회가 열리는 광장으로 가는 사람들의 물결은 끝이 없었다.
어느덧 모여온 사람들로 광장은 꽉 찬듯싶은데 모란봉쪽과 평양역쪽으로 사람들이 꼬리를 물고 몰려들었다.
광장에서는 민족분렬을 견결히 반대하며 통일적인 자주독립국가를 수립하자는 구호들이 힘차게 터져나왔다.
오전 11시 정각.
절세의 애국자이시며 민족적영웅이신 김일성장군님께서 주석단에 나오시였다. 장군님을 따라 주석단에 초대된 사람들이 나왔다.
광장의 장내를 메운 군중들속에서는 열렬한 환호성이 일었다. 해방산과 창광산, 남산재를 이어 뻗은 모란봉을 뒤흔드는 만세소리가 그칠줄 몰랐다. 때맞추어 대회장 상공을 선회하는 비행기에서 전조선동포에게 보내는 격문이 하얀 배꽃인양 하늘 가득히 날려 뿌려졌다.
주석단에 나온 사람들속에 홍명희의 모습이 눈에 띄웠다. 눈처럼 흰 저고리차림에 어느 누군가가 익살스럽게 표현했듯이 《완전무결한 홍선생 대머리》여서 더욱 그런지 몰랐다.
주석단에 올라 환호하는 평양시민들을 바라보며 박수를 치던 홍명희는 얼떨결에 사람들속을 누비며 취재를 하고있는 인숙을 보고 흠칫했다. 그를 보자 가까스로 잊을사 했던 인숙에 대한 불쾌한 생각이 다시 떠올랐다.
손채양을 하고 하늘을 날며 격문을 뿌리는 비행기를 바라보는 홍명희의 머리속에 서울에서 있었던 일들이 지꿎게 묻어올랐다.
…
평양으로 떠나오기 전날이였다. 어떻게 알았는지 인숙이가 남몰래 홍명희를 찾아왔다.
《선생님은 무엇때문에 평양으로 가려고 하십니까?》
따지듯 묻는 인숙의 말에 홍명희는 이마살을 찌프렸다.
《무엇때문인가? 나는 민족과 강토의 분렬을 차마 앉아서 보지 못하여 남북회담에 참가하고저 평양으로 간다. 지역적인 남북으로서 민족적리해를 달리하는것이 아니라 피차간 백지로 만나 이 회담을 진행하고저 한다.》
《기어코 평양으로 가시겠다면 선생님이 간직하고계시는 아버님의 유서를 가지고 가시는가요?》
《그건 왜 묻나?》
《제가 알건대 그 유서는 공산당이 타도하자고 하는 반동의 유서겠는데요.》
《그게 무슨 상관인가?》
《선생님은 4월 6일 미군사령관 하지중장이 련석회의참가자는 공산당 내지 용공분자로 몰겠다고 선포한것을 모르시지 않겠지요?》
《위협하는건가? 리승만이 그러라던가?》
《저는 그저 선생님의 신상이 걱정돼서 그럽니다.》
《고양이 쥐생각.》
《그건 너무하신 말씀입니다, 선생님.》
《뭐가 너무해. 가서 인숙이가 상전으로 모시는 사람들에게 이르게. 나는 남에서 고집하던 나의 주장을 북에 가서도 고집할 작정이라고. 이번의 남북회담이 성공하고 실패할것은 예기치 못하지마는 우리 민족의 력사로는 한단계의 진전을 이룰것을 확신한다고 이르게.》
《선생님의 말씀은 잘 알겠지만 제가 무슨 상전으로 모시는 사람들이 있다는것은 잘 모를 말씀입니다.》
《허, 꼬집어야 알겠나? 리승만과 하지에게 가서 이르게. 이 홍명희가 그러더라고.》
《리승만과 하지가 저에게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아닌보살 말게.》
《선생님도 참, 저는 민들레랍니다. 하얀색의 우산털에 바람을 담고 뿌리를 내릴 땅을 찾아 하늘을 날아다니는 민들레꽃의 씨앗.》
…
비행기는 떠나기 아쉬운듯 다시한번 평양의 하늘을 돌고 문수쪽으로 사라졌다.
비행기를 바래우고나서 홍명희는 큰숨을 들이쉬였다.
그의 눈길은 다시 광장을 메운 평양시민들쪽으로 향했다. 군중은 여전히 열광적으로 들끓고있었다. 그 광경을 둘러보며 그는 퍼그나 흥분되여있었다. 이렇게 많이 모여든 사람들앞에 나서보기도 처음이거니와 이제 이 30여만 평양시민들앞에서 축사를 하게 되였다는것으로 하여 흥분이 더했다. 그는 그야말로 바다처럼 모여든 사람들을 보기도 하고 터져나오는 환호성과 만세소리와 연설도 들으며 이따금 더부룩한 웃수염을 들축이며 웃기도 하는데 그때마다 흰 이가 드러났다.
홍명희는 평양의 하늘과 땅,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해방산이여, 남산재여, 모란봉이여, 평양이여!
그대가 나를 불렀는가. 내가 그대들에게 끌렸는가!
마침내 홍명희가 연단에 오를 차례가 되였다.
홍명희는 어떻게 마이크앞으로 나갔는지도 몰랐다.
《이번 남북련석회의는 통일독립을 방해하고 동족상잔을 야기할 남조선의 단독선거를 반대하기 위해 개최된것으로서 결정서와 격문을 만장일치로 채택하는 등의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이번 련석회의의 성과는 외래제국주의의 침략을 단절시키고 국내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의 매국적음모를 분쇄하는데 있어서 국내적으로나 국제적으로 보아 전민족적승리라고 아니할수 없습니다.》
좀처럼 흥분할줄 모르는 관조자로 소문난 홍명희였지만 차츰 목소리가 높아졌다.
홍명희는 주먹을 부르쥐고 흔들며 말을 이었다.
《전체 애국세력이 통일되고 단결하여 미제국주의 침략적 야망을 분쇄하고 국내 친일파, 민족반역자의 집단인 한민당을 타도하는데서만 우리는 이 길의 종점인 완전자주독립을 성취할수 있을것입니다. 애국자이거든 다 함께 나아갑시다!》
광장에서는 30여만 군중의 환호성이 터져올랐다.
홍명희는 얼핏 주석단의 가운데 계시는 김일성장군님을 보았다.
환호하는 군중에게 답례를 보내시던 장군님께서는 홍명희에게 밝은 웃음을 지으시였다.
홍명희는 가슴이 벅차오름을 느꼈다.
여기는 평양!
지나간 일은 흘러가는 물결에 일찌감치 실어보내자.
그 누군가 말했듯이 래일의 태양은 또 래일에 떠오르는 법이니까. 마침내 나는 이 평양에서, 바로 오늘 찬란한 태양을 보고있지 않는가!
홍명희가 축사를 마치고 내려오는데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그 앞장에서 인숙이 다가와 성급하게 말을 붙였다.
《선생님의 말씀 잘 들었습니다. 선생님의 감동이 매우 크신것 같은데, 이것이 선생님이 바라시던 민족대단합이라고 보시는가요?》
《그렇소.》
《그런데 이것은 평양이 이룩한 민족의 대단합이 아닐가요?》
《그건 무슨 말이요?》
《서울에서는 절대로 이런 광경을 볼수 없다고 보는데요?》
《그러니 평양의 민족대단결이 남의 집 경사라 그 말이겠지?》
《그렇다고 본다면요?》
《나는 여태껏 남북으로 갈라진 조국을 생각해본적이 없소. 평양의 경사라면 어쨌단 말이요? 기본은 우리 민족의 대단합이 아니겠소?》
《선생님, 아버님이 남기셨다는 유서에 그렇게 써있는가요? 제가 알기에는 선생님의 아버님이 유서에서 결코 공산주의자들이 세우는 나라를 찾으라고 하신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홍명희는 인숙을 바라보며 코웃음쳤다.
《기자선생은 우리 아버님의 유서에 대해서 관심이 크시군.》
인숙이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그러지 말고 점잖게 유서를 돌려주시오. 내가 하고싶은 말은 그뿐이요.》
홍명희는 의아해하는 인숙을 남기고 자리로 향했다.
4
김일성장군님께서는 김책이 가져온 자료들을 보고계시였다.
그것은 남북련석회의에 참가한 남쪽의 대표들이 북조선을 돌아보고 남긴 소감들을 적은것이였다.
장군님께서는 한 자료에서 눈길을 떼지 못하시였다.
《벽초선생의 소감입니다.》
김책이 말씀올렸다.
장군님께서는 가벼이 고개를 끄덕이시고 자료를 들여다보시였다.
《나는 북조선에 대하여 퍽 좋은 인상을 가지고있다. 입북하기까지는 표면적으로 듣고 좋다는것만 알았으나 황해제철소를 돌아보고는 북조선의 모든 건설사업이 잘되여가고있다는것을 실지로 보았다. 지금까지 나는 용광로가 파괴되여있는줄 알았더니 그 부흥된 모양을 보고 우리 민족의 힘이 얼마나 큰가를 느꼈다. 우리 민족은 이제 외국의 힘을 빌것이 아니라 넉넉히 자립할수 있게 되였다. 그리고 이 사실은 북조선만의 자랑이 아니라 남조선사람들에게도 자랑이다. 나는 남조선에서는 아무 일도 해보지 못하였지만 황해제철소를 보고 우리가 하고있는 건설사업이 세계문화에 기여할수 있는 명예를 전 조선에서도 나누어 갖고싶었다.
나는 북남련석회의 전도에 대하여 결정서그대로 그것을 믿는다. 결정서에 명시된 호소는 우리 민족의 호소이다. 지금까지 우리 민족은 운명에 끌렸었는데 이제부터는 운명을 끌어내여 나가야 할것이다. 남조선에서 단선으로 국토를 강단한다 할지라도 우리 민족은 결코 분렬되지 않을것이다. 나는 25일 평양시민들을 보았는데 남조선의 군중대회와는 비할수 없을만큼 굉장하게 생색이 있다. 이것은 잘되여가는 집안과 못되여가는 집안을 비교하면 족할것이다.》
홍명희의 소감을 적은 자료를 다 보신 장군님께서는 빙그레 웃으시였다.
《잘되여가는 집안과 못되여가는 집안이라…》
한동안 생각에 잠겨계시던 장군님께서 말씀하시였다.
《홍명희선생의 감동이 큰 모양이군.》
김책이 활기를 띠며 말씀드렸다.
《그렇습니다. 작가선생이 되여서 그런지 이번 남북련석회의에 대해서 남다르게 받아들이는것 같습니다. 확실히 여느 정객들과는 다릅니다.》
《옳소. 홍명희선생은 한평생 민족대단결을 위해 살아왔다고 볼수 있는분이요. 그래서 아마 이번 회의에 대해서 남달리 흥분되였을거요. 이번 련석회의를 위해서 참 많은 일을 하신분이요. 이런분일수록 우리는 세심하게 관심을 돌려 사소한 불편도 없게 하여야 합니다.》
《장군님, 그동안 홍명희선생에 대해서 좀 알아보았습니다.》
《그렇소? 뭐 별다른 일은 없겠지?》
《장군님, 죄송합니다. 저희들이 먼저 알았어야 하는걸 장군님께서 지적해주셔서야…》
《그런 말은 그만두고, 그래 무슨 일이 있었소?》
《별로 큰일은 아닌것 같습니다. 홍명희선생의 방을 관리하는 처녀동무의 말에 의하면 무슨 종이장을 잃어버린것 같다고 합니다. 홍명희선생이 관리원동무에게 묻더랍니다. 옛날 종이장을 치우지 않았는가고…》
《종이장?》
《그렇습니다.》
《구체적으로 무슨 종이장이라고 하오?》
《그건 홍명희선생도 말하지 않았답니다. 회의문건인가 했는데 그런것 같지는 않습니다. 본인도 관리원동무에게 별치않은것이라고 했답니다.》
《본인은 그렇게 말해도 잘 알아볼걸 그랬소. 혹시 당내문건이라든지, 아니면 작품창작에 필요한 발취문일수도 있지 않소? 옛날 종이라면 꼭 필요한 고문서일수도 있고…》
《저도 그런 생각이 들어서 홍명희선생의 아들을 만나보았습니다.》
《그건 잘했소. 그런데?》
《그 동무의 말이 홍명희선생에게 뭔가 없어진것은 사실이지만 별치않은 사품이라고 합니다. 무슨 종이장인가고 물으니 웃으면서 낡은 휴지라고 하면서 오히려 제편에서 더이상 캐지도 말고 또 일이 더 퍼지지도 않게 해달라고 하는것이였습니다. 별치않은것때문에 소동을 일으키면 아버지나 자기에게도 별로 좋은 일이 못된다고 하면서…》
《그렇다… 헌데 말이요. 참, 이상하지 않소? 그렇다면 홍명희선생은 어째서 그런 낯빛이였을가? 내가 보건대 결코 별치않은 문제 같지 않은데…》
《아들의 말이 홍명희선생은 종종 그런 일이 있답니다. 선생은 어떤 물건을 잃어버리거나 혹은 어디 두었는지 모를 때는 그 물건이 귀중해서가 아니라 그 일이 어떻게 벌어진것인지 생각나지 않아 자기자신에 대해서 스스로 화를 내기도 한답니다. 늙은이의 건망증인지…》
장군님께서는 방안을 천천히 거니시며 생각에 잠기셨다가 말씀하시였다.
《그럴수 있지. 하지만 내가 알건대 홍명희선생은 남달리 사심이 없는분인데… 김책동무, 혹시 정반대의 경우가 아닐가? 홍명희선생이 관리원동무에게 일부러 물어보기까지 했다면 그건 아들의 말과는 달리 홍명희선생에게 없어서는 안될것일수도 있지 않소?》
장군님의 말씀에 김책은 심중해졌다. 만일 그렇다면 이것은 결코 별치않은 문제가 아닐것이다. 혹시 정치적인 음모일수도 있지 않는가. 그러지 않아도 지금 미군정과 남조선반동들이 남북련석회의의 성과를 말살하기 위하여 별의별 악선전을 다하고있다. 그놈들은 남북련석회의가 공산당을 추종하는 당들만이 참가한 회의였다느니, 쏘련의 대조선정책을 실현하고 조선을 공산화하기 위한 회의였다느니, 남북련석회의에 참가한 우익인사 누구는 살해되고 누구누구는 연금되였다느니 뭐니 하면서 회의의 성과에 대하여 비방중상하고있다. 또 보안서동무들의 말에 의하면 평양에 이번 남북련석회의를 파탄시킬 임무를 받은 리승만의 패거리들이 돌아치는것을 여러 놈 잡았다고 하였다.
《장군님, 제가 문제를 너무 허술히 대한것 같습니다. 이것이 남북련석회의를 말아먹으려는 적들의 음흉한 술책일수 있다는것까지 미처 내다보지 못했습니다. 당장 보안서를 동원하여 사건을 해명하도록 하겠습니다.》
《글쎄, 필요하다면 그렇게 해야지. 하지만 내가 보건대 그렇게까지 떠들건 없다고 보오. 홍명희선생 아들의 말에도 일리가 있소. 명망이 있는분인데 사소한 일도 잘못 다루면 본의아니게 큰 영향을 미칠수 있소. 홍명희선생에게서 나타난 분실사고 같은것이 그 려관에 든 다른 사람에게도 나타난것이 있소?》
《아직 없습니다. 워낙 그 려관은 관리원들로부터 시작해서 경비원에게 이르기까지 특별히 선발해서 배치한데다가 또 려관에 든 손님들이 다 한다하는 큰사람들이여서…》
《사소한 분실사고라 해도 문제를 정치적으로 예리하게 보는것은 물론 좋은 일이요. 우리는 응당 모든 문제를 그렇게 보아야 하오. 지금과 같은 때는 더욱 그렇소. 하지만 이것 보오, 김책동무. 우리는 무엇보다도 사람을 먼저 보아야 하오. 홍명희선생이 무엇을 잃어버렸든 그것은 큰 문제요. 먼저 잃어버린 물건이 무엇인가 하는것을 정확히 알고 반드시 찾도록 해야겠소. 설사 그것이 홍명희선생의 아들 말대로 휴지라고 해도 말이요.》
《알겠습니다.》
《참, 민들레라고 하는 녀성기자를 만나보았소?》
《만나지 않았습니다. 뭔가 잃어버린것이 사실이고 또 아들의 말대로 사품이라기에…》
《그 녀성기자가 인숙이라고 했던가?》
《그렇습니다.》
《김책동무의 보고대로라면 그가 리승만패거리들의 일에도 무관하지 않은것만큼 한번 알아보도록 하오. 하긴 인차 이번에 평양에 온 남조선기자단과의 담화도 예견되여있으니 그때 알아보든지…》
《장군님, 제가 먼저 그를 만나보겠습니다.》
《그렇게 하오.》
5
봄날의 밤은 소리없이 깊어가고있었다.
홍명희는 열어젖힌 창문으로 까만 비로도같이 진한 어둠이 깔린 밖을 내다보고있었다. 봄밤이여서 그런지 어둠조차 부드럽다. 봄비가 오려는지 어디선가 먼 봄우뢰가 울었다.
《춘소천금이라, 봄날의 밤이 천금맞잡이라지? 올해의 봄은 참으로 류다른 봄이로다.》
홍명희는 혼자소리로 중얼거리고 생각에 잠겼다.
4월 30일.
우리 나라에서 외국군대를 동시에 철거시키고 조선문제를 조선인민자체의 힘으로 해결하며 외국군대가 철거한 후 내전이나 그밖에 무질서한 사건이 발생하지 않으리라는것, 우리 나라에 통일적민주주의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방도, 미제의 《단선단정》조작음모를 단호히 반대배격한다는 4개 항목으로 이루어진 공동성명서가 남북 정당, 사회단체들의 지도자협의회에서 홍명희의 랑독이 있은 후 만장일치로 통과되였다. 그리고 대표자련석회의에 참가했던 각 정당, 사회단체대표들이 공식서명한 후 《남북조선 제 정당, 사회단체 공동성명서》라는 이름으로 발표되였다. 이로써 남북련석회의의 공식적인 일정이 마감된셈이다.
평양에서의 열흘!
봄날의 하루가 가을 열흘맞잡이요, 봄볕에 그슬리면 보던 님도 몰라본다고 하더니 과연 틀리는 말이 아니다. 얼마나 크나큰, 귀중하고 많은 일들이 그사이에 벌어졌고 이전과는 몰라보게 얼마나 많은것이 변했는가. 우리 민족사에 특기할 일들이 이 봄날에 이루어졌다.
조국과 겨레는 해방되여 세번째로 맞는 이 봄에 이루어진 일들을 영원히 잊지 못할것이다.
홍명희는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아버님께서도 기뻐하실것이옵니다.》 하고 입속말을 하던 홍명희는 꿈에서 깨여나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밝은 빛이 눈부시게 비치는 방안은 고요하였다.
홍명희의 눈길은 책상머리에 닿아 움직일줄 몰랐다. 거기에 의례히 있어야 할것이 없었다. 아버님의 유서였다.
홍명희의 얼굴에는 시름이 실렸다.
유서가 없어졌은즉 가슴벅차게 이루어진 이번 평양에서의 회의성과를 아버님앞에 어떻게 고한단 말인가.
홍명희의 입에서는 저도 모르게 한숨이 새여나왔다.
아버지의 유서를 받은 때로부터 거의 40여년이 가까워온다. 그간 언제 한번 떼여놓고 살아본적이 없어 이제는 몸의 한부분으로 되여버린 유서다. 그 유서가 잃어진지도 벌써 며칠이 되여온다.
홍명희는 다시한번 한숨을 쉬였다.
문득 홍명희는 인기척을 느꼈다.
《누구요?》
《아버님, 접니다.》
아들이였다.
《오, 무슨 일이냐?》
《밤이 깊어가는데 아직 주무시지 않습니까?》
《그런 일이 있구나.》
홍명희는 아들을 바라보았다.
《마침 너를 찾으려던 참이였다.》
《저를요? 무슨 일로…》
아들의 얼굴에 긴장이 어렸다.
홍명희는 아들의 얼굴을 일별하고 나직이 말했다.
《이건 어디 내놓고 할 말이 아니다만 유서가 없어졌구나.》
《무슨 유서말입니까?》
《너의 할아버지가 이 애비에게 남긴 유서다.》
《그게 정말입니까, 언제 그렇게 되였습니까?》
홍명희는 한숨을 쉬였다.
《너도 무척 놀라는구나. 그럴테지. 하지만 사실이다. 나도 처음에는 어디 흘렸겠거니 하고 무심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보아도 나타나지 않는구나. 며칠되였다. 이때까지 이런 일이 없었는데, 참 귀신이 곡할노릇이다.》
《짚이는데가 있습니까?》
《글쎄, 내 생각에는…》
《아버님!》
《왜 그러느냐?》
아들은 한동안 머뭇거리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아버님, 속담에 절에 가서도 눈치가 있어야 백하젓국 얻어먹는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홍명희는 아들이 뭘 말하자는지 뻔히 알고있으면서도 모르쇠하고 물었다.
《그래서?》
《제 생각에는…》
《어서 말해라.》
《그 할아버지의 유서말입니다. …》
《말하라는데도?》
《이왕 없어졌다면 차라리 잘되지 않았는가 합니다.》
《네 보기에도 할아버지의 유서가 눈에 걸렸다 그거냐?》
《눈에 거슬린다기보다 남들의 눈도 있고 하니…》
《그게 어째서? 뭐, 남들에겐 부모도 없다더냐?》
《하지만 여기는 평양이 아닙니까? 서울이라면 몰라라…》
《평양이 어쨌다는거냐?》
《아버님도 참…》
아들은 낯빛을 흐리며 평양에 와서 만났다는 그 박 뭐라고 하는 사람이 하던 말을 떠올렸다.
그는 말했다.
《공산주의자들이 정권을 쥐고있는 이 평양에 와서 나라를 망하게 한 옛 사대부의 유서따위를 뻐젓이 내놓고있는것은 일종의 반항이요. 공산주의자들과 단합하자고 와서 그런 유서 따위나 내들고 다녀서야 되겠나. 우리는 공산주의자들이야. 무산혁명, 프로레타리아혁명을 부르짖는 사람들이야. 알겠나? 우리 프로레타리아트들은 세계혁명을 자기의 슬로간으로 내세워. 리상도 크고 힘도 있어. 우리가 뭐 힘이 약해서 민족주의나부랭이들을 끌어당기는줄 알아? 혁명이라는 이 큰 유령의 회오리바람은 때로 본의아닌 제스츄어도 하게 되거던. 그래야 정치적으로 무지한 백성들을 끌어당길수도 있기때문이야. 통일전선은 전략이 아니고 전술일따름이야. 혁명력량을 마련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필요해서 그러는것이지 혁명의 근본목적에 따르는 전략은 아니란 말이야, 알겠나? 이런 심오한 혁명의 진리를 안다면 어디다 대고 케케묵은 사대부의 유서따위를 내놓고 다녀? 본인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 공산주의자들은 그런 온갖 낡은것을 불태워버리고 프로레타리아트의 새세상을 세우고말거네. 이것은 그 누구도 거스를수 없는 시대적흐름, 시대적인 폭풍일세. 새 잎이 돋아나면 묵은 잎은 떨어진다고 하지 않는가. 인간적인 측면에서도 난 결코 그 유서따위를 용납할수 없네. 잘못하면 아버님이 망신당할수 있거던.》
아들이 전해주는 말을 듣는 홍명희의 얼굴이 컴컴하게 질렸다.
한동안 지나서 홍명희가 아들에게 물었다.
《네 생각은 어떠냐?》
《뭘 말입니까?》
《할아버지의 유서를 어떻게 보느냐 말이다.》
《아버님이 욕하실지 모르지만 제가 보기에도 그게 무슨 자랑거리라고 뻐젓이 내걸게 못된다고 봅니다. 할아버지의 유서가 오늘에 와서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언제부터 말씀드리고싶었는데…》
홍명희는 무겁게 숨을 들이켰다.
아들이 놀랍게 아버지의 얼굴을 본다. 여느때 같으면 한바탕 노기를 터뜨렸을 아버지였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오늘은 별스레 늙어보이는 아버지였다.
홍명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어두운 밖을 이윽토록 내다보고 있었다.
아들의 말을 들어서가 아니라 홍명희는 별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이상한 일이 아닌가? 여느때 유서가 없어졌으면 일을 전페하든가 당장 무슨 큰일이 났을터인데 아직 아무런 일도 없었다.
이게 이상한 일이 아닌가?
유서가 없어진것을 알았어도 밤새워 일은 일대로 했다. 여느때와 다른, 그것이 나라와 민족의 생사존망에 관한 일들이고 또 자기가 그토록 바라던 민족의 대단결을 위한 일이여서 그런가? 아니면 그 일이 무척 바빠서 그런가?
분명 홍명희는 유서가 없어진 때로부터 지금까지를 통해 뭔가 자기에게서 달라진것이 있다는것을 느꼈다.
유서가 없이도 살수 있다. 그것보다 더 바쁘고 보람있게 살수 있다. 평양에 와서 그걸 느꼈다. 그럴수 있는가? 무엇때문인가.
홍명희는 품속을 더듬어 정성스레 건사했던 초대장을 꺼냈다. 그 초대장은 홍명희가 받은 남북련석회의 초대장이였다.
그것을 펼치자 명주천에 붓으로 이름과 초대내용을 쓴 글이 나타났다.
홍명희는 오래동안 그 초대장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60평생에 처음으로 받아본 의의있는 초대장이요, 처음으로 받아본 정성이 깃든 초대장이였다. 받을 때는 몰랐지만 평양에 와서 이 초대장 하나하나에 깃든 영명하신 장군님의 세심하고 크나큰 은정을 받아안으며 충격이 컸다.
홍명희는 아버지의 유서가 있던 자리에 그 초대장을 놓았다.
홍명희는 크게 숨을 들이키였다.
그래, 뭔가 확실히 달라졌다. 확실히…
아들이 침묵을 깨치였다.
《아버님, 무엄하게 말씀드린걸 용서하십시오. 사실은…》
홍명희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네 말에도 일리가 있다.》
홍명희는 한동안 우두커니 생각에 잠겼다가 무겁게 말을 꺼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유서는 누군가에 의해 의도적으로 없어진것 같다.》
《그게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들이 조급하게 물었다.
《내 생각에는 인숙이가 그런것 같구나.》
《뭐라구요, 인숙이말입니까?》
《그렇다.》
홍명희는 고개를 끄덕이였다.
《인숙이는 아닙니다.》
아들이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라구? 네가 어떻게 그걸 장담할수 있느냐?》
《아버님, 인숙에 대한 소문을 듣지 못하셨습니까?》
《그가 어쨌게?》
《테로분자들과 싸우다가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뭐라구, 테로분자? 이 평양에 무슨 테로분자란 말이냐?》
《리승만의 패거리들이 가리는데가 있습니까?》
《그렇기는 하다만 모를 소리다. …》
홍명희는 고개를 기웃거렸다.
《내가 알기에는 인숙이 리승만의 끄나불인데 어떻게 리승만패거리들이 인숙이를 테로한단 말이냐?》
《제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네가?》
《그렇습니다.》
아들이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홍명희는 눈을 내리깔았다.
《그렇게 됐구나. 인숙이 심하게 다쳤다더냐?》
《아마 그런가 봅니다. 그가 아버님을 찾는다는데 차마 말씀드리지 못했어요.》
《뭐라구? 그걸 왜 이제야 말하느냐?》
《아버님이 그 인숙이를 좋지 않게 보시기에…》
아뿔싸, 내가 너무했구나. 이랬든저랬든 인숙은 옛 동지의 딸이 아닌가. 더구나 인숙의 아버지는 내 무릎을 베고 숨을 거두었는데…
시어미 역정에 개배때기 찬다고 리승만이 미워 인숙이까지 밉게 보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마당에 와서도 나 몰라라 하고 외면해서야 쓰겠는가.
평양에 와서 인숙은 몇번이나 홍명희를 만났으면 하였다.
아들이 그 말을 전할 때마다 홍명희는 단마디로 잘랐다.
《다른 곳도 아닌 이 평양에서 무슨 회계고 뭐고 할게 없으니 안 만난다고 해라!》
너무했다.
사상이나 정견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인정으로야 어찌…
가슴이 답답했다.
홍명희는 이마살을 찌프렸다.
《인숙이에게 가자.》 하고 홍명희는 말했다.
6
인숙은 해빛이 밝게 비치는 침대에 누워있었다.
홍명희는 점도록 눈을 감고있는 인숙을 내려다보았다.
《하마트면 큰일날번 했습니다.》
의사가 하는 말이였다.
홍명희는 괴롭게 숨을 내쉬였다.
《회복될수 있겠지요?》
《마음놓으십시오. 어떻게 하나 환자를 꼭 살려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선생님.》
의사가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고맙다는 인사는 김일성장군님께 드리십시오.》
《그건 무슨 말씀입니까?》
《김일성장군님께서 저를 특별히 여기로 보내셨는걸요. 장군님께서는 이 환자를 꼭 살려내야 한다고 저에게 거듭거듭 당부하셨습니다.》
홍명희의 안경이 번쩍이였다.
《장군님께서요?》
《그렇습니다.》
《장군님께서 인숙이를 아신단 말입니까?》
《장군님께서는 이 환자는 남쪽에서 들어온 기자라고 하시면서 평양에는 물론 남쪽에도 한점 혈육도 없는 외로운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장군님께서는 우리는 다만 그가 외로운 사람이여서만 그러는것이 아니라 잘못 걸은 인생길을 후회하고 애국의 새 길을 가려는 사람이기때문에 동지적 의리로 봐도 반드시 살려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장군님께서…》
홍명희는 의사가 언제 나갔는지도 모르고 생각에 잠겨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가?
《선생님.》
인숙이 부르는 소리에 홍명희는 생각에서 깨여났다.
《정신이 좀 드나?》
《선생님, 이런 꼴로 선생님을 뵈워서 미안합니다.》
《아닐세. 진정하라구.》
홍명희는 차마 리승만을 따라다니던 네가 어떻게 다름아닌 리승만패거리들의 테로를 당했는가 하는 말은 꺼낼수 없었다.
《다 들으셨어요?》
인숙이 서글픈 낯빛으로 물었다.
홍명희는 고개를 끄덕이였다.
인숙이 이마살을 찌프리고 슬며시 머리를 돌려 열려진 창가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평양으로 오기 전에 그들이 엄포를 놓더군요. 평양으로 가되 이번 남북련석회의에 대해서 특종기사가 될만 한 글을 써보내라고… 이번 회의를 망신시킬수 있는 그런 글을 말이지요. 저도 처음에는 흥미가 전혀 없지는 않았습니다. 선생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뉴스나 글의 진가는 특정한 권력이나 시세에 아부하는것이 아니라는것을. 그렇기도 하거니와 저는 애당초 평양회의가 민족의 대단합을 위하는 회의라고 해도 믿어지질 않았는걸요. 그런데 정작 평양에 와보니 전혀 달랐습니다. 저는 솔직히 놀랐습니다. 보는 모든것이 새라새로운것이였습니다. 저는 마치 신천지를 발견한 사람처럼 정신없이 그 모든것을 받아들이느라고 뛰여다녔습니다. 그러다나니 언제 평양회의를 비난하는 뉴스를 생각도 못했습니다. 설사 생각났다고 하더라도 저는 엄연한 진실을 외곡할수는 없었습니다. 아마도 리승만의 패거리들은 그것이 거슬렸던것 같습니다.》
《그 패거리들이 그러루한 일을 벌리리라는것을 예감 못한건 아니지만 임자가 그런 일을 당했구만.》
두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한동안 지나 인숙이 입가에 엷은 웃음을 짓고 말했다.
《선생님이 절 미워하시는 심정을 잘 알고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속으로 억울했습니다. 선생님은 제가 리승만의 끄나불이라고 보시지만 사실 저는 그런 녀자가 아닙니다. 리승만이 어떤 사람인지 알려고 한건 사실이지만 그의 끄나불까지는 아니란 말입니다. 저는 다만 이 나라, 이 겨레를 구원할 민족의 지도자를 찾고싶었습니다. 그래서 방황했습니다. 뿌리내릴곳을 찾아 공중에 날아다니는 민들레씨앗처럼 말이예요. 그러나 어디에서도 그런 곳을 찾지 못했습니다. 우리 아버님이 그토록 애타게 바라시던 민족의 대단결을 이룰 곳을 저는 찾지 못했습니다.》
《지나간 일은 그만하게.》
고집스럽게 외면하고있는 홍명희를 바라보며 인숙이 조용한 어조로 물었다.
《언제부터 선생님에게 묻고싶은것이 있었습니다.》
《뭔데?》
《선생님은 민족대단합이 평생의 좌우명이라고 하시군 하셨지요?》
《그랬지. 그런데? …》
인숙은 서글프게 웃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저같은 사람도 외면하시면서 무슨 민족의 대단합을 하신다는겁니까?》
홍명희는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난 리승만과 같은 민족의 원쑤들과도 짝자꿍이 하는것이 민족의 대단합은 아니라고 생각했네.》
《선생님은 저를 그렇게까지 보셨습니까?》
《그렇게 되였네.》
인숙은 해빛이 비쳐드는 창문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김일성장군님께서는 저같은것도 만나주시였는걸요.》
《뭐라고? 장군님께서 자네를 만나주시였다고?》
《그래요.》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선생님께서 놀라실줄 압니다. 저도 처음 여기 평양으로 올 때까지는 그런 생각을 못했습니다. 평양도 서울이나 별로 다를게 없을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입으로는 나라니 민족이니 하지만 속으로는 자파세력의 리익에 미친 무리들이 제노라 하고 활개치는 남쪽이 아닙니까? 그속에서 진정으로 나라와 민족을 위하는 사람들이 어쩔수없이 절망하는 땅이란 말입니다. 그런 곳에서 무슨 민족의 대단합을 부르짖는다는것이 허망하다고 저는 보았습니다. 선생님을 괴롭힌것이 있다면 본의는 아니지만 그런 삐뚤어진 심사에서 그랬던것입니다. 하지만 평양에 와서는 달랐습니다. 저는 우물안의 개구리였습니다.》
인숙의 눈가에는 이슬이 맺혔다.
홍명희는 그가 진심을 말하고있다고 여겼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평양에 와서 달라졌던가. 자기도 그렇고, 김구도 그리고 남쪽에서 온 한다하는 사람들이 새로운 눈으로 평양을 보지 않았던가.
꼿꼿해있던 홍명희의 눈이 차츰 풀어지기 시작했다.
인숙의 눈귀로 샘물이 흘렀다.
《저는 새 출발을 하고싶었습니다. 김일성장군님을 만나뵙고 인생의 새 출발을 하고싶었단 말입니다. 하지만 욕망뿐이지 정작 결단은 내리지 못했습니다. 며칠을 두고 망설이였어요. 글쎄, 저같은것이 어떻게 장군님을 만나뵙는단 말이예요. 그러다가 마침내 기자단 취재일로 김책부위원장을 만나게 되였습니다. 저는 행운아였습니다. 김책부위원장은 제가 김일성장군님을 만나뵈올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자네가 장군님을? …》
《놀라실테지요. 하지만 이것은 사실입니다.》
인숙의 얼굴에는 생기가 돌았다.
《언제인가 제가 선생님에게 버릇없이 따지던 말이 생각나십니까?》
《무슨 말이지?》
인숙이 천진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말뚝!》
《말뚝? 오, 생각나네. 말뚝이 있어야 고삐를 맬게 아닌가고 했지?》
《그렇습니다. 선생님, 저는 비로소 말뚝을 찾았습니다.》
《말뚝이라…》
《말뚝이라도 고작해서 서너개 고삐나 매는 작은 말뚝이 아니라 겨레를 묶어세우는 크나큰 말뚝이였습니다.》
홍명희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건 말뚝이 아닐세. 그건 기둥이네.》
《기둥? 그렇군요.》
홍명희의 충격은 컸다.
도대체 무엇이 저 인숙이까지도 이 홍명희가 그리도 바라는 아름다운 사람으로 만들어놓는것일가?
7
김일성장군님께서는 홍명희를 따뜻이 맞아주시였다.
홍명희는 그간 북에 와서 보고 느낀것을 그대로 터놓았다. 련석회의과정이며 황해제철소를 본거며 평양시군중대회를 본 소감에 대하여…
그끝에 홍명희는 인숙의 말을 꺼냈다.
《장군님, 인숙을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참, 벽초선생님은 그를 잘 아신다지요?》
《그렇습니다, 장군님.》
홍명희는 자기가 왜 그를 멀리했는지에 대해서 말씀올렸다.
김일성장군님께서는 홍명희의 말을 다 들어주시고나서 말씀하시였다.
《허물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는 사람을 대할 때 그의 허물을 먼저 보는것이 아니라 그가 진정으로 애국을 하려고 하는가 하는것을 먼저 보았습니다. 애국의 마음이 있는 사람이면 설사 그가 무슨 일을 하든 어떤 과거를 가졌든 다 애국의 길로 함께 나가자는것이 우리들의 민족대단결주장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백두밀림에서 조국광복을 위한 첫 싸움에 나선 그때부터 들었던 시종일관한 주장입니다.》
장군님의 말씀을 들으며 홍명희는 눈을 슴벅거렸다.
《참, 벽초선생님에게 아버님이 남기신 유서가 있다지요?》
김일성장군님의 물음에 홍명희는 놀랐다.
《장군님께서 그걸 어떻게…》
《저에게 한번 보여주실수 없겠습니까?》
홍명희는 한동안 머뭇거렸다.
여태껏 아버님이 남긴 유서를 품고 살아오는 홍명희였지만 언제 한번 그 누구에게서 유서를 보자는 청을 받아보지 못했다.
홍명희는 그것을 례사롭게 여기였다. 아버님의 유서는 맏아들 홍명희 개인에게 남긴 마지막부탁이다. 그러니 그 누가 보고말고 할것이 못된다고 홍명희는 생각하고있었다. 다른 사람이 볼 때 그것은 망국이전의 한 량반군수가 남긴 글이였다. 나라가 망하지 않았더라면 모르지만 그리고 세월이 흘러 요즈음의 세상은 량반따위를 우습게 보고 지어는 미워하는 때가 되였는데 한 사대부가 남긴 유서가 무엇이란 말인가? 그 누구를 탓하고싶지도 않고 자신의 신세에 대해 원망하지도 않는다. 홍명희는 스스로 이런 생각에 옴해 아버님의 유서에 대한 소리는 일체 하지 않았다.
그런데 장군님께서 어떻게 아시고 말씀하시는가.
《황송한 말씀이시지만 저… 그건 장군님께서 보실만 한것이 못됩니다.》
《누구에게 선뜻 보여줄수 있는게 아니실테지요.》
《그런게 아니라…》
홍명희는 유서를 잃어버렸다는, 그것도 평양에 와서 잃어버렸다는 말을 차마 올릴수 없었다.
홍명희는 가늘게 한숨을 내쉬였다.
《벽초선생님의 아버님이 순국하신것이 경술국치인 1910년 8월 29일이라지요?》
장군님께서 나직한 음성으로 물으시였다.
《그렇습니다.》
《그러니 망국을 당해 우리 나라 최초의 순국이 아닙니까?》
《장군님, 나라없는 백성은 상가집 개만도 못하다고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기자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끊어 망국을 통탄하였습니다.》
《단순한 통탄이 아니라 침략자에 대한 항거였습니다.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것이 쉽지 않습니다. 애국자가 아니고서는 나라가 망했다고 해서 목숨을 끊을수가 없습니다.》
《장군님, 고맙습니다.》
홍명희는 눈시울이 뜨거워났다. 아버님의 순국을 애통해하는 백성들과 유지들, 홍명희의 지우들이 없은것은 아니다. 그러나 스스로 《계급혁명의 유령》이라고 부르짖는 공산주의자들의 세계에서 아버님의 순국은 한갖 나약의 소치일뿐이고 더 가혹하게는 착취계급의 필연적운명의 산물로 되고마는것은 어쩔수 없는 일이라고 홍명희는 생각하고있었다.
그러나 장군님께서는 그렇게 보시지 않으신다. 장군님께서는 나의 아버님의 순국을 침략자에게 항거하는 애국자의 장거로 보신다.
그동안 나라의 독립을 위해 새로운 사조인 공산주의에 대해 연구도 해왔고 제노라 하는 공산주의자들도 볼만큼 보아온 홍명희에게 김일성장군님은 례사로운분이 아니시였다.
공산주의자이시되 참다운 애국자가 아니시라면 이렇듯 가슴을 울리지 못한다. 이것은 홍명희 한 개인에게만 베푸시는 은정이 아니였다. 나라와 겨레에게 베푸시는 은정이시다. 그것은 오로지 나라와 겨레의 운명을 위하시는, 저 하늘의 해님과 같이 뜨거운 열이 없이는 어림도 없는 일이다.
홍명희의 눈굽이 젖어들었다.
장군님께서는 자리에서 일어나시였다.
《량해해주십시오. 제가 벽초선생님에게 아버님의 유서를 보자고 하는것은 단순한 호기심때문이 아닙니다.》
장군님께서는 창가로 다가가시여 밖을 내다보시였다.
홍명희는 장군님의 모습을 지켜보고있었다.
한동안 창밖을 내다보시던 장군님께서 조용히 말씀하시였다.
《누구에게나 아버지가 있습니다. 우리 아버님은 그토록 바라시던 나라의 독립을 보지 못하시고 32살을 일기로 너무도 일찌기 세상을 떠나시였습니다. 아버님께서는 림종의 시각에 우리들을 불러앉히고 말씀하시였습니다. <나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간다. 그러나 너희들을 믿는다. 너희들은 언제든지 나라와 민족의 몸이라는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뼈가 부서지고 몸이 쪼개지는 한이 있더라도 나라를 반드시 찾아야 한다.>》
장군님의 말씀은 홍명희의 가슴을 격정으로 물들게 하였다. 그 누구에게서도 따뜻한 위로의 말이나 칭찬을 들어보지 못했고 또 바라지도 않던 홍명희였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메말라가던 그에게 장군님의 말씀은 따뜻한 봄비와 같이 가슴을 축축히 적셔주는데가 있었다.
장군님께서는 선친에 대한 말씀으로 가슴아픈 사연을 안고 있는 홍명희의 가슴을 녹여주시는것이다.
홍명희의 가슴은 후더워났다.
《장군님, 그런데… 그런데 저는 저의 아버님이 남기신 유서를 잃어버렸습니다.》
홍명희는 온갖 기우도 다 잊고 장군님께 말씀올렸다.
《유서를 잃어버리다니요?》
장군님께서는 몹시 놀라시였다.
《그럼 선생이 뭔가 잃어버렸다는것이 바로 그 유서란 말입니까?》
《장군님께서 어떻게 그걸…》
《그러니 이번 회의에 와서 잃어버렸다는겁니까?》
《그렇게 됐습니다. 다 제 불찰입니다.》
《왜 그걸 진작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남들이 봐도 그렇고 또 저도…》
《무슨 말씀입니까?》
《장군님, 그건 저 봉건사대부의 유서입니다.》
《봉건사대부의 유서라… 선생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홍명희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수그렸다.
《저도 인숙동무를 통해 그 유서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경술국치를 맞아 자결한분의 유서가 결코 반동의 유서로 될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애국의 유서입니다. 우리는 결코 유서를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어느 한 가문의 유서, 어느 한 자식의 유서이기 전에 민족의 유서로 보아야 합니다.》
홍명희는 울컥 북받치는 심정을 이겨내지 못하며 소리쳤다.
《장군님!》
60평생 살아오면서 마음이 이렇게도 울리기는 처음이다.
홍명희의 얼굴에는 눈물이 흘렀다.
갑자기 홍명희의 아들이 장군님앞에 무릎을 꿇었다.
《장군님!》
아들의 행동에 홍명희는 놀랐다.
《무슨 일입니까?》
장군님께서 아들에게 물으시였다.
아들은 꿇어앉은채 품속을 뒤져 무엇인가 꺼내 장군님께 올렸다.
《장군님, 이것이 우리 할아버지가 아버지에게 남기신 유서입니다.》
아들의 말에 홍명희는 당황해났다.
《그러니 네가? 이게 도대체 어찌된 일이냐?》
아들은 홍명희에게가 아니라 장군님께 말씀올렸다.
《장군님, 저는 북에 들어와서 아버님이 그토록 바라시는 민족의 대단결을 이룬 사회를 보았습니다. 남쪽에서는 도저히 이룰수 없는 사회입니다. 이런 사회, 이런 민족의 대단결을 이룬 세상을 저의 아버님은 평생 바라고계셨습니다. 저는 아버님이 사대부집안의 지난날과 결별하고 해방과 독립의 새 사회, 새 길을 마련한 북조선의 공산주의자들과 새로운 길을 가게 하고싶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대부의 유서를 가지고서는 평양에서 환영받지 못한다고 하는 말도 있고 해서… 그래서 저는 아버님이 간직하고계시는 할아버님의 유서를 감추어버림으로써 아버님이 케케묵은 지난날에 대한 미련을 버리게 하고싶었습니다. 저도 할아버님의 유서가 아버님에게 있어서 목숨과 같은것이라는것을 모르지 않았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아버님이나 제가 과거와 결별할수 없다고 보고 그랬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은 과거를 보지 않고 현재를 중시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저는 아버님을 도와드리는 길은 그 길밖에 없다고 보았습니다.》
장군님께서는 근엄한 안색으로 말씀하시였다.
《우리가 민족대단결을 하자는것은 단순히 정치적력량을 마련하자는데만 있지 않습니다. 물론 미국놈들과 리승만역적이 나라를 둘로 갈라놓으려고 발악하고있는 오늘의 정세에서 민족대단결이 필요한 정치적력량을 마련하는 길인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민족대단결을 그렇게만 보지 않습니다. 민족대단결의 싹이라고 할가 출발점이라고 할가 한것은 결코 주의주장의 실현이나 정치적필요로부터 생겨나는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민족대단결을 이룩하자는것은 인간의 참된 행복을 마련하자는것입니다. 그 행복을 마련하는 길이 곧 부모를 사랑하고 나가서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들을 귀중히 여기고 그 마음들을 하나로 묶어세우는데 있습니다.》
장군님께서는 홍명희에게 돌아서시였다.
《지난날 선생께서는 일제의 학정밑에서도 민족적량심과 지조를 굽히지 않고 끝까지 지켜냈습니다. 우리는 산에서 일제와 싸울 때부터 국내에서 선생처럼 민족적량심과 지조를 지켜 일제에게 굴복하지 않고 싸워온분들에 대하여 깊은 존경심을 품고있습니다. 왜정세월에 민족적량심과 지조를 지켜낸다는것은 누구나 다 할수 있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산에서 일제와 직접 싸워온 우리는 그것이 얼마나 비싼 대가를 치러야 하는가 하는것을 잘 알고있습니다. 해방후에도 선생은 미국사람들의 회유와 기만책동을 물리치고 애국적인 활동을 하여왔습니다. 선생께서 허헌선생을 비롯한 각계 인사들과 함께 우리를 환영하기 위한 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그 위원장으로서 활약하였다는것을 인편을 통하여 들었습니다. 나라에 조성된 정세로 하여 비록 그것이 실현되지 못하였지만 우리는 여러분의 애국적소행에서 커다란 감동을 받았으며 고무적인 힘을 얻었습니다.》
《장군님, 미거한 저에 대한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선생께서는 민족대단결을 이룩하는데도 큰일을 하셨습니다.》
《장군님, 저는 입으로는 민족대단결을 부르짖으면서도 친지 딸의 마음 하나 읽지 못하고 곡해하였지만 장군님께서는 온 민족의 마음, 아니 온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다 헤아리시고 그들을 사랑하시는 인간사랑의 태양이십니다. 장군님께서 계시여 저같은것도 이제야 비로소 민족대단결의 참의미, 애국의 참의미를 알게 되였소이다. 장군님, 고맙소이다.》
《이러지 마십시오. 오히려 저는 자기 할아버지의 유서마저 알아보지 못하는 손자의 볼기를 칠것을 권합니다.》
장군님께서 웃으시며 말씀하시였다.
《장군님, 치겠습니다. 볼기를 치겠습니다. 아들의 볼기도 치고 저의 볼기도 치겠습니다.》
홍명희는 장군님을 우러르며 마음속으로 읊조리였다.
하늘이 높다 하되 그 하늘에 날아다녀야 생명이 움틀수 없고 바다가 넓다 하되 그 바다에 잠긴다 해서 사람이 살수 없으며 꽃과 열매, 온갖 생명이 자랄수 없는것이다.
그래서 옛사람들이 어머니대지를 노래해왔던가.
어머니대지, 그것도 만물을 움트게 하는 5월의 대지!
그 누구도 지어는 혈육조차 알려고 하지 않은 옛 사대부의 유서에 담겨있는 애국의 자그마한 마음까지 헤아려주시며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길에 진주보석처럼 내세워주시는 김일성장군님의 품!
그 품은 5월의 대지다.
그날 저녁.
홍명희는 늘 품에 지니고 다니던 아버지의 유서를 바라보고있었다.
그 유서속으로 도포를 입으신 아버지의 모습이 안겨왔다.
《아버님, 기뻐하소서. 영명하신 김일성장군님께서 아버님의 유서를 애국의 유서로 높이 평가해주시였소이다. 아버님의 유서를 받아안은 그때부터 이제는 한생을 마무리할 나이에 이른 지금까지 아버님의 유서를 그렇게 값높이 사주시는분을 저는 아직 보지도 듣지도 못했소이다.》
홍명희는 유서와 함께 안겨오는 아버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웃고계시였다. 놀라운 일이다. 홍명희로서는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처음으로 보았다. 언제 한번 웃음이란 지어본적이 없던 모습이였다.
홍명희의 눈굽이 젖어들었다.
《아버님, 부디 아버님께서 보살펴주시옵소서. 열흘 남짓이 이 평양에 와서 지내고 이제는 집으로 돌아갈 때가 되였소이다. 나그네 집을 그리워하고 집으로 돌아가고싶어하는것은 인지상정이오나 저의 마음은 어쩐지 다르오이다. 이제 집으로 훌쩍 돌아가면 그것이 저의 평생에 한이 될것 같소이다. 저는 이제 새로운 인생의 길을 결단하려고 하옵니다. 저는 평양을 떠나고싶지 않소이다. 저의 한생에 그리도 바라던 민족의 대단합을 이룬 이 평양을 떠나고싶지 않소이다. 일본놈, 미국놈… 외세없고 그놈들에게 붙어먹고 살아가는 매국노들이 없는 평양, 민족의 자주기상이 나래치는 평양, 김일성장군님의 품에 영원히 안기고싶소이다. 아버님, 저의 결심을 어떻게 보시는지 말씀해주시오이다.》
홍명희는 오래동안 눈을 감고있었다.
단정히 앉아있는 아버지가 눈앞에 어려왔다. 아버지는 홍명희를 보며 웃고계시였다.
《네스스로 보고 듣고 느낀것이 있으면 그리하여라. 네 나이 60이면 진리를 알아보지 못할 나이는 아니니라.》
홍명희는 눈을 떴다.
아버지의 말씀이 떨어지기 바쁘게 마음속에서 따뜻한 해빛이 비치는 5월의 대지가 안겨왔다. 그 5월의 대지에서 홍명희는 바지가랭이를 걷어올리고 모내기를 하고싶었다. 마음은 더없이 흥그러워졌다.
그래, 더 늦기 전에 장군님곁에 남으리라! 그것이였다.
이제 나는 나의 한생을 김일성장군님의 품에 맡기고 참된 인생의 행복을 찾으리라.
홍명희는 큰숨을 내쉬였다.
그의 얼굴에 밝은 웃음이 피여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