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30년대-대중가요와 신민요의 활발한 창작보급

 

앞서 이야기된것처럼 계몽기가요의 발생발전과정에 대한 력사적고찰에서 1920년대에는 주로 동요와 예술가요의 창작보급이 기본을 이루었다면 1930년대에는 대중가요와 신민요가 계몽기가요의 창작과 보급에서 주류를 이루었다고 할수 있다.

일제의 야만적인 식민지통치가 가장 악랄하게 감행되던 1930년대에 그 창작과 보급이 활발히 벌어진 대중가요와 신민요.

높아가는 조선민족의 울분과 항거의 정신을 선률마다에 절절히 담아낸것으로 하여 사람들속에서 널리 불리워진 대중가요와 신민요의 창작보급과정을 력사적사실과 대표적 창작가, 예술인들의 활동을 통해 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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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행가란 이름으로 불리워진 대중가요

 

대중가요는 민족수난의 시기에 창작보급된 계몽기가요종류들가운데서 기본주류를 이룬 노래들이다.

우리 나라에서 류행가라고 불리운 대중가요가 창작보급되기 시작한것은 1920년대 중엽부터이다. 이때부터 1920년대말엽까지의 기간을 대중가요의 발생기라고 할수 있다.

대중가요의 발생을 이보다 앞선 시기에 《서양음악의 수입》과 더불어 다른 나라의 노래들이 번역 또는 가사개작되여 우리 사람들속에 류행된 때부터였다고 보는 설도 있다. 그 실례로 1916년에 리기세라는 사람이 똘스또이의 《부활》을 각색하여 상연한 연극에 나오는 《까쮸샤의 노래》라든가 《희망가》(서양곡조에 가사를 지어붙인 노래), 윤심덕의 《사의 찬미》 등을 들고있다.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라는 가사로 시작되는 《희망가》는 1925년 《닙보노흥》레코드에 김산월, 도월색이 불러 취입한 후 류포되였고 《사의 찬미》는 우리 나라의 첫 녀성고음가수로 일러오던 윤심덕이 서양곡조에 가사를 지어붙여가지고 1926년에 취입한 후 사람들속에서 류행창가라고 불리우며 널리 류행되였다.

그러나 이 노래들은 어디까지나 다른 나라 곡조에 우리 사람들이 가사를 지어붙인것으로서 작사, 작곡을 다 조선사람이 한것은 아니기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 대중가요의 발생으로 보는것은 맞지 않는다.

우리 나라에서 대중가요는 1920년대에 들어와 일제의 탄압과 략탈을 피하여 조국땅을 떠나가는 류랑민들이 그칠새 없었던 당대의 현실을 반영하여 창작되기 시작한 류랑가, 애향가들에 의하여 나오게 되였다.

그 대표작들이 《압록강의 노래》(창작가 미상), 《잃어진 고향》(작사, 작곡 윤시정), 《류랑가》(작사, 작곡 김영환) 등이다.

《압록강의 노래》는 3.1인민봉기이후 피눈물을 삼키며 조국땅을 떠나는 독립투사의 비분의 감정과 기어이 나라를 다시 찾겠다는 비장한 결의를 담은 노래로서 당시 반일독립운동자들속에서 많이 불리웠다.

이 노래는 위대한 김일성주석께서 나라찾을 큰뜻을 품으시고 혁명의 길에 나서시던 력사의 그날 압록강을 건느시면서 빼앗긴 조국을 다시 찾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굳은 맹세를 다지시며 부르신 사연깊은 노래이기도 하였다.

《잃어진 고향》은 1925년에 발행된 잡지 《관북월간》 3호에 수자악보로 실렸던 노래로서 고향을 떠났다가 몇해만에 돌아와 황페화된 고향마을을 마주하게 된 서정적주인공의 심리정서세계를 통하여 당대 인민들의 가슴속에 간직된 향토애의 감정을 진실하게 표현한것으로 하여 북부조선일대와 중국 동북지방의 조선사람들속에서 많이 불리웠다.

이때부터 시작하여 1920년대말에 이르는 기간 대중가요는 진보적인 음악가들에 의하여 한편한편 창작되면서 자기의 본태를 서서히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 대중가요의 창작과 보급에서 주목할만 한 작용을 한것은 일명 《류랑극단》이라고 불리운 순회극단들과 사람들의 인기를 끌고있던 무성영화였다.

1920년대 초엽부터 우리 나라에서는 연극인, 음악가들로 무어진 여러가지 명칭의 극단들이 생겨나 국내는 물론 중국 동북일대를 순회하며 공연활동을 벌리였다.

일제의 식민지민족문화말살책동으로 하여 예술창조활동의 거점인 극장은 물론 자립적인 예술인단체를 가질수 없었던 조건에서 우리 문예인들은 비상설적인 순회극단을 무어가지고 조선사람들이 사는 국내외의 방방곡곡을 무대로 삼아 떠돌이를 하지 않으면 안되였던것이다.

이들의 공연활동자체가 눈물겨웠거니와 그들이 가는 곳마다 보고 듣고 체험한 현실 또한 눈물겨운것이였으니 그들이 짓고 부른 노래에 자연히 민족의 비참한 처지가 그대로 담기지 않을수 없었다.

하기에 대중가요는 발생초기부터 동요나 예술가요와 같은 다른 가요형식에 비하여 비애와 슬픔, 원한과 울분의 가요라는 락인이 찍혀 세상에 나오게 되였던것이다.

동요와 예술가요가 주로 교원생활을 하던 음악가들이 작곡한 노래라면 초기대중가요는 순회극단들에 있던 연주가 등의 음악가들이 지은 노래로부터 시작된것이라고 할수 있다.

대중가요의 발생기에 《잃어진 고향》을 비롯한 애향가, 류랑가들에 이어 나온 노래들로는 전수린의 《황성옛터》와 김영환이 작곡한 무성영화의 주제가들이 대표작으로 된다.

《황성옛터》는 극단 《취성좌》에서 조직한 순회극단이 황해도지방을 순회공연하던중에 배천에서 창작되여 나온 초기대중가요의 하나이다.

이 노래는 1927년에 김소랑이 무은 연극단체인 《취성좌》에서 연극 《류랑의 남녀》(천한수 작, 연출)를 만들어가지고 개성, 배천 등 황해도지방을 순회공연하던중 극단에 망라되여있던 바이올린연주가 전수린이 곡을 짓고 연극배우 왕평이 가사를 지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거치른 성의 발자취란 뜻에서 《황성의 적》이라고 제목을 달았는데 그후 이 노래가 사람들속에 널리 퍼지면서 《황성옛터》라고 불리우게 되였다.

이 노래는 극단이 서울로 돌아온 후 단성사 무대에서 연극의 막간에 리애리수가 불렀는데 노래를 부르던 가수도 울고 청중들도 오열을 터뜨리며 울분을 토하다못해 의자까지 들부시는 소동이 일어났다고 한다. 이 소문이 퍼지면서 사람들은 연극보다도 리애리수의 노래를 듣기 위하여 공연장에 모여들었고 《취성좌》가 공연하는 장소들에는 《연극공연의 막간에 명가수 리애리수양이 독창에 출연, 명곡 <황성의 적>외 여러곡》이라는 광고판을 세우기까지 하였다.

《황성옛터》는 대중가요의 발생초기에 나온 노래이지만 허물어진 고려왕조의 옛성터에 비추어 나라잃은 민족의 설음과 조국애의 감정을 진실하게 반영한것으로 하여 대중의 심금을 울리였으며 대중가요의 대표작의 하나로 후세에 길이 전해오게 되였다.

이와 같이 대중가요는 여러 연극단체들에서 활동한 작가, 음악가들에 의하여 창작되고 가수가 따로 없었던 관계로 연극인녀배우들의 가창으로 대중속에 보급되였다.

당시 비극배우이면서 막간가수를 겸하여 이름이 났던 대표적인 녀배우들은 리경설, 리애리수, 전옥, 차홍녀들이였다.

이 시기 대중가요창작보급의 다른 하나의 통로로 된것은 무성영화였다.

우리 나라의 영화력사를 간단히 언급하면 프랑스의 발명가 루미에르형제에 의하여 《움직이는 사진》으로 불리운 활동사진이 발명된 2년후인 1897년초에 서울에 있던 영미연초회사에서 상업적목적으로 활동사진을 상영하면서부터 영화가 일반대중속에 상영되였으며 일제의 조선강점후에는 일본의 퇴페적이며 흥미본위적인 《신파》비극영화들과 서방영화들이 쓸어들어왔다. 그후 1920년대에 이르러 연극인출신의 영화인들속에서 민족영화를 만들기 위한 활동이 벌어지면서 일명 극예술영화라고 하는 무성영화들이 나오기 시작하였는데 1920년대 중엽부터 《아리랑》, 《암로》, 《풍운아》, 《세 동무》, 《락화류수》를 비롯한 많은 영화들이 창작보급되였다.

이때의 영화는 필림에 록음을 함께 수록하지 못하였으므로 변사와 가수가 무대옆에서 확성기에 대고 영화장면을 해설하거나 대사와 노래를 불러주군 하였다.

이 시기에 나온 무성영화의 주제가들중에서 일시 사람들속에서 불리운 노래는 1925년에 제작된 영화 《장한몽》의 주제가 《장한몽》이였다.

무성영화 《장한몽》은 1913년에 극단 《문수성》에서 연극으로 각색하고 그후 1925년에 영화로 개작한 작품이였다.

청춘남녀의 사랑담을 엮은 이 영화의 주제가가 신식노래같아보여 젊은이들속에서 한때 불리웠으나 그 가사내용이 저속한데다가 곡조도 창가풍에서 벗어나지 못한것으로 하여 대중가요다운 생명력을 가지지 못하였다.

이러한 때인 1927년에 서정 김영환이 대본창작과 연출을 한 무성영화들인 《락화류수》와 《세 동무》의 주제가들이 나와 급격한 류행성을 띠며 대중속에 퍼져갔다. 이 주제가들의 제목은 영화의 제목과 같았는데 작사, 작곡은 김영환이 하였다.

김영환은 1920년대 중엽부터 1930년대초에 이르는 기간 사람들속에 깊은 인상을 남긴 동요와 대중가요들을 창작하였으며 초기대중가요의 건전하고 서정성이 깊은 선률양식을 개척한 작곡가이면서 영화인이기도 하였다.

그는 일찌기 바이올린을 배우고 1920년대초부터 박승필의 단성사 음악부에서 바이올린연주가로 예술활동을 시작하였다.

그후 무성영화가 나오게 되자 영화와 화술에 취미를 가지고 영화계에 뛰여들어 영화대본창작과 연출, 변사로 이름을 날렸다.

1926년에 그는 라운규의 무성영화 《풍운아》를 해설하여 인기를 올린데 이어 10여편의 영화들을 능숙하게 해설함으로써 명변사로 널리 소문이 났다.

이 시기 김영환은 라운규로부터 영화 《아리랑》의 주제가를 의뢰받고 1926년에 《신아리랑》(현재 《아리랑》으로 불리움.)을 편작한데 이어 《오너라 동무여 강산에 다시…》로 널리 알려진 동요 《봄노래》를 작사, 작곡하여 내놓음으로써 음악창작에서도 뛰여난 재능을 보였다.

그가 1927년에 작사, 작곡한 《락화류수》(일명 《강남달》)는 당대의 현실을 잘 반영한 가사내용과 5음계조식을 바탕으로 한 서정적이며 통속적인 선률로 하여 광범한 대중속에 급속히 보급되였다. 그 과정에 제목이 《강남달이 밝아서》라는 1절가사 첫 구절을 딴 《강남달》로 바뀌여 널리 알려지게 되였다.

《강남달》은 1929년에 리정숙의 가창으로 《콜럼비아》레코드에 취입되여 국내외에 널리 보급되였는데 이것으로 하여 이 노래는 조선사람이 가사를 짓고 곡을 지은 대중가요로서는 처음으로 소리판에 수록된 작품으로 기록되게 되였다.

이 작품에 이어 김영환이 작사, 작곡한 《세 동무》도 영화와 더불어 사람들속에 널리 보급된 노래였다.

무성영화 《세 동무》는 1927년에 제작되여 이듬해 1월 단성사에서 처음 상영되였는데 이 영화의 주인공으로 출연하였던 김련실이 확성기에 대고 주제가를 불러 보급하였다.

김영환이 1928년에 작사, 작곡한 《류랑가》(김영필 대본, 김유영 연출, 무성영화 《류랑》의 주제가)와 1929년에 작사, 작곡한 《젊은이의 노래》(김영환의 대본, 연출인 무성영화 《젊은이의 노래》의 주제가)들도 각각 리애리수와 석금성의 가창으로 불리우면서 사람들속에 류행된 초기대중가요들이였다.

김영환은 이와 같이 1920년대 중엽부터 영화와 함께 사람들속에서 널리 불리운 통속적인 노래들을 지어 내놓음으로써 대중가요의 발생기에 그 음악양식의 형성에 뚜렷한 자취를 남기였다.

1920년대 후반기에 대중속에 널리 보급되기 시작한 무성영화의 주제가로 창작되여 가수나 변사의 육성으로 영화상영장소에서 불리웠던 대중가요는 1929년부터 《콜럼비아》레코드에 취입되여 증폭장치를 한 축음기를 통하여 관객에게 전달되기도 하고 소리판과 더불어 전국각지에 널리 보급전파되였다.

이와 같이 초기대중가요는 1920년대 중엽부터 순회극단들과 영화창조와 더불어 급속히 창작보급되면서 대중가요의 선률양식을 형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초기대중가요는 선행한 시기의 창가(계몽가요)나 동시대에 창작보급된 동요, 예술가요들과 뚜렷하게 분화되지 못한 측면을 가지면서도 자기의 독특한 특징을 보이고있다.

초기대중가요는 다른 계몽기가요종류들과는 달리 3박자와 그에 기초한 단순한 리듬형들로 곡조를 이루면서 서정성을 짙게 풍기고있다. 이 시기의 대표작 7곡중 모두가 3박계통(3/4박자 4곡, 6/8박자 3곡)으로 된것이 이를 실증해준다.

조식에서는 대조식과 소조식을 다양하게 쓰고있는데 특히 김영환의 작품들에서 5음계대조식을 적극 살려쓴것은 이후시기의 대중가요와 구별되는 특징으로 된다.

선률전개에서도 비교적 단순한 반복수법을 많이 활용하였으며 주로 1부분, 2부분과 같은 간결한 구조형식을 리용하였다.

초기대중가요에서 개척된 이러한 창작경험과 선률양식적특성은 1930년대에 들어서며 보다 활성화된 순회극단들에서의 가요창작과 유성영화 및 연극의 주제가창작과정을 통하여 더욱 공고화되였으며 이 시기 레코드회사들에서 활동한 작곡가들에 의하여 활발하게 창작보급되면서 자기 발전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대중가요는 1930년대초부터 신민요와 함께 류행가라는 이름을 달고 본격적으로 창작보급되기 시작하였다.

류행가라는 말은 이 시기 가요창작가들이 자기가 지은 노래를 레코드에 취입하면서 그것이 구전민요나 다른 가요들보다 많이 불리워지는 노래라는 뜻에서 가요종류이름을 저저마다 류행가라고 표기한데서 생겨난 말이였다.

그러다가 1933년에 신민요가 가지는 선률양식적특성으로 하여 독자적인 이름을 달고 갈라져나오면서 신민요와 대중가요가 각각 서로 다른 가요종류로 분화되였다.

이때부터 대중가요는 여전히 류행가라는 이름을 가지고 왕성하게 창작보급되면서 1930년대 중엽에 자기의 고유한 양식적면모를 확립하였으며 1930년대말을 전후한 시기에 전성기를 이루었다. 대중가요라는 말은 1940년대에 이르러 쓰이기 시작하였다.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대중가요창작보급이 활성화된데는 여러가지 요인들이 작용하였다고 볼수 있다.

이 시기 대중가요창작보급이 활발하게 진행된것은 무엇보다 수난의 현실과 비분의 감정을 적라라하게 담을수 있는 통속적인 가요형식을 필요로 하였던 현실적요구와 관련된다.

1930년대에 들어와 더욱 횡포해진 일제의 식민지적폭압과 략탈로 하여 인민들속에서는 민족적울분이 보다 격화되고 식민지사회현실과 망국노의 참혹한 운명에 대한 원망과 개탄의 목소리가 더없이 높아졌다. 이러한 현실에서 선행하여 나왔던 동요나 예술가요만 가지고서는 사람들의 미학정서적요구를 충족시킬수 없었다.

사람들은 가슴속에 쌓인 원한과 울분을 노래로나마 풀어보려고 지향하였으며 현실생활과 밀착되여 마음의 벗으로, 길동무로 삼을수 있는 통속적이며 생활적인 노래를 요구하게 되였다.

1930년대에 리별가, 방랑가, 애향가라고 불리운 비가풍의 대중가요들이 많이 나와 광범한 대중속에 류행되게 된것은 이와 관련되여있다.

이 시기 대중가요창작보급이 활발해진것은 다음으로 당시 레코드기업이 성행하면서 여러 레코드회사들에 작곡가, 가수 등 일정한 예술창조집단이 형성된것과 관련된다.

1887년에 토마스 에디슨의 발명으로 세계에 류포된 축음기가 우리 나라에 들어오기 시작한것은 20세기 초엽부터이다.

초기에 축음기(당시 유성기라고도 함.)는 악기, 도서 등을 취급하는 상인들을 통하여 들어왔는데 1913년 8월 3일부 《매일신보》에는 《송만갑의 노래를 넣은 소리판을 유성기와 함께 판다.》는 광고가 실리기도 하였다. 이 시기 축음기는 일부 부유층들이 소유한외에 약장사, 잡화상들이 구매자들을 끌기 위한 돈벌이수단으로 리용하는데 불과하였으며 소리판들의 거의 모두가 다른 나라 노래들을 넣은것들이였다.

1920년대 중엽에 이르러 축음기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높아지면서 그 보급이 활발해지자 일본에 지사를 두고있던 서방 여러 나라의 레코드회사들이 경쟁적으로 밀려들어오기 시작하였다.

이때의 레코드회사들이란 대체로 서방나라들에 본사를 두고 일본에 합작형태로 내온 주식회사들이였는데 그모두가 일제의 식민지예속화정책에 따르는 정치적목적과 경제적치부를 추구하여 들어온것들이였다.

때문에 1920년대 중엽이후부터 밀려든 《빅터》, 《콜럼비아》, 《포리돌》 등의 레코드회사들은 들어온 첫날부터 퇴페적이고 저속한 일본류행가들을 비롯한 부르죠아문화를 류포시키며 일제의 사상문화적침투와 침략전쟁정책수행에 복무하였다.

이러한 레코드회사들이 제한된 범위에서나마 민요들을 비롯한 조선노래들을 취입하고 음악가들을 전속으로 채용하여 쓴것은 값눅은 식민지나라의 창작가, 가수들을 리용하여 더 많은 리윤을 획득하려는 목적에서였다.

하여 1930년대초부터 여러 레코드회사들에는 시인 및 작곡가, 가수들을 망라하는 일정한 예술창조력량이 형성되게 되였는데 이때의 작곡가들 대부분이 작곡수업을 전문적으로 받은 사람들이 아니라 이역땅에서 고학으로 음악공부를 한 기악연주가 또는 성악가출신으로 가요창작에 뜻을 둔 사람들이였다.

그리고 가수들 역시 전문적인 음악교육을 받지 못하고 순회악단의 지방공연길이나 가요콩클(가수선발경연)을 통하여 도시와 민간에서 선발된 사람들이였다.

이들외에 가사창작을 지향하였던 일부 문학가들이 망라되여있었는데 그들은 보통 레코드회사의 문예부장을 겸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여러 레코드회사들에 소속되여 새로운 형식의 가요창작과 보급을 지향해나선 문예인들속에서 대중가요창작이 적극화되게 된것은 당시의 환경에서 레코드란 합법적인 공간을 리용하지 않고서는 자기의 창작품을 실현시키기 힘들었던 사정도 있었지만 보다 중요한것은 진보적인 가요에 대한 일제의 탄압을 피하여 류행가의 모자를 쓰고 민족의 설음과 울분을 노래에 담아 사람들에게 민족의식, 반일의식을 심어주려고 한 그들의 애국적이며 량심적인 창작경향과 많이 관련되여있었다. 그렇기때문에 이들의 대중가요창작과 보급은 일제의 악랄한 검열과 탄압을 무릅쓰고 진행한 진보적인 음악활동으로 평가하게 되는것이다.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시였다.

《계몽기가요의 창작보급에 기여한 창작가, 예술인들에 대해서도 정확히 평가하여야 합니다.》

계몽기가요의 창작보급에 기여한 창작가, 예술인들을 옳게 평가하는것은 일제식민지통치하에서도 민족음악을 지키고 사람들을 반일사상으로 각성시키기 위하여 진행한 그들의 량심적이며 의로운 예술창조활동을 후대들에게 정확히 알려주는 동시에 그들의 창조활동을 통하여 그 시기의 가요예술발전정형을 리해하는데서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1930년대에 활발하게 진행된 대중가요의 창작보급도 그 직접적담당자들인 창작가, 가수들의 적극적인 창조활동과 떼여놓고 볼수 없다.

그러므로 이 시기 대중가요창작보급에 기여한 대표적인 문예인들의 활동과 결부하여 대중가요의 활발한 창작보급정형을 보기로 하자.

 

◎ 대표적인 대중가요작사자들

 

해방전시기 대중가요들이 망국의 설음과 울분속에 살아가던 인민들의 가슴속에 뜨거운 향토애와 조국애, 민족애를 심어주고 반일애국적인 사상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마음의 벗으로, 길동무로 될수 있었던것은 노래의 사상예술적기초로 되는 가사들을 많이 지어 내놓은 작사자들의 진보적인 창작활동과 떼여놓고 볼수 없다.

 

많은 대중가요가사들을 창작한 조령출

 

대중가요가사들을 가장 많이 지은 작사자를 꼽으면 김일일상계관인 작가 조령출(1913-1993년)을 첫자리에 놓게 된다.

충청남도 아산군의 고려의사의 가정에서 태여난 그는 고보시절부터 문학공부를 하였는데 이 시기에 이미 시와 노래가사들을 창작하여 두각을 나타냈으며 그중에는 현상응모에 당선되여 사람들속에 널리 알려진 가사도 있다.

그는 1935년부터 일본에 건너가 고학으로 와세다대학 불문과를 마친 후 조선연예주식회사 전속작가로 있으면서 여러 레코드회사들의 청탁을 받아 대중가요가사들을 많이 지었다. 이 시기 그는 여러가지 필명으로 가사들을 내놓았는데 가장 많은 노래를 낸 《오케》레코드(한때 이 회사 문예부장을 함.)에는 조명암, 《콜럼비아》레코드에는 리가실, 《빅터》레코드에는 고마부 등의 필명을 주로 쓰군 하였다.

조령출이 작사한 대중가요들은 주제령역이 매우 폭넓고 다양하였다.

그중에는 리별많던 당대의 사회현실을 눈물겹게 반영한 《울며 헤진 부산항》, 《잘 있거라 단발령》, 방랑의 설음을 담은 《집없는 천사》, 《외로운 가로등》, 향토애를 노래한 《연자방아》, 《고향설》 그리고 식민지사회현실을 예리하게 풍자비판한 《세상은 요지경》, 《청춘문제》 등이 있었다. 그가 1930년대말-1940년초기간에 작사한 《락화류수》, 《청춘일기》 등은 항일무장투쟁의 승리로 반드시 도래할 조국해방에 대한 확신이 흐르던 시대상을 밝고 생기있는 시련들에 담아 정서깊이 노래한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조령출은 8.15해방후 남조선에서 어버이수령님을 조선독립대장으로 높이 칭송한 연극 《독립군》을 창작하여 서울 동양극장무대에 올렸으며 1948년에 공화국의 품에 안긴 후 조선영화문학창작사 초대주필, 민족예술극장 총장, 조선문학예술총동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등의 중요직책에서 사업하면서 많은 시와 가사, 연극 및 가극대본들을 창작하였고 《춘향전》, 《심청전》, 《온달전》, 《사성기봉》 등의 고전소설들을 윤색하였다.

 

조령출과 가사창작에서 쌍벽을 이루었던 박영호

 

작가 박영호(1911-1953년)도 해방전시기 민족이 겪는 고통과 울분을 반영한 대중가요가사들을 많이 창작한 작사자의 한사람이다.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시였다.

《박영호는 해방전에 <번지없는 주막>을 비롯하여 수많은 계몽기가요가사들을 창작하였으며 전쟁시기에는 인민군종군작가로 있다가 전사하였습니다.》

박영호는 강원도 통천군 고저리에서 태여나 원산에서 성장하였다. 광명보통학교를 마친 후 문학공부를 열망하였으나 학비를 마련할 길이 없어 독학으로 대학과정안을 공부하였다고 한다.

그는 1920년대말부터 카프에 관계하면서 연극 《눈먼 동생》, 《너는 미치였지만》 등 경향성이 좋은 작품들을 창작하였으며 1930년대초부터 가사창작을 시작하여 많은 대중가요가사들을 창작하였다.

이 시기 그는 《시에른》, 《태평》레코드회사 문예부장을 하면서 가사창작을 하는 한편 남인수, 고운봉 등 신인가수들도 많이 발굴하여 가요계에 내세웠다.

조령출과 함께 해방전 대중가요작사에서 쌍기둥을 이루었던 박영호는 주로 나라를 빼앗긴 설음과 울분, 리별의 아픔을 담은 비가들과 조국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주제로 한 노래들을 많이 지었다.

그가 작사한 《짝사랑》, 《무너진 황성》, 《울어라 문풍지》 등은 나라잃은 겨레의 설음과 울분에 대한 은유적인 서정토로를 통하여 빼앗긴 조국에 대한 그리움과 일제에 대한 항거의 감정을 고취한 노래들이였다.

정든 사람들사이의 리별이 많았던 수난의 현실을 생동하게 반영한 《련락선은 떠난다》, 《애수의 제물포》, 《비오는 라진항》, 《포구의 인사》 등은 리별의 대명사와도 같았던 항구를 배경으로 하여 당대 사회현실에 대한 저주와 울분의 감정을 적라라하게 반영한 노래들이였다.

그는 이외에도 고향을 빼앗기고 이국땅으로 건너간 류랑민들의 타향살이설음을 반영한 《번지없는 주막》, 《천리타향》, 《류랑마차》, 《북극 오천키로》와 같은 방랑비가들과 떠나온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절절하게 노래한 《풍차도는 고향》, 《고향은 부른다》, 《꽃피는 록지》 등의 애향가들도 많이 작사하였다.

박영호는 해방후 1946년 12월부터 공화국의 품에 안겨 당시 갓 조직된 북조선연극동맹 초대위원장을 하면서 여러편의 연극작품들을 창작하였으며 조국해방전쟁이 일어나자 조선인민군 종군작가로 활동하다가 1953년 3월에 전사하였다.

 

《타향살이》를 작사한 김릉인

 

김릉인은 1930년대 초엽부터 《오케》레코드회사 문예부장을 하면서 《타향살이》를 비롯한 대중가요가사를 많이 지은 작가의 한사람이다.

그의 본명은 승응순이며 필명으로 김릉인, 남궁월을 썼다.

그는 원래 음악에 뜻을 두고 전통적인 구전민요들을 연구하고 어린이들의 동심을 담은 동요곡들을 짓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음악적재능은 이후 그가 대중가요가사창작에 나서면서 가사와 곡조의 조화로운 결합을 실현하는데 도움이 되였다고 볼수 있다.

김릉인은 주로 련정가형식의 노래가사들을 잘 썼는데 그 밑바탕에 은유화된 암시적인 색채가 짙은것이 특징적이다. 그가 1932년에 지은 《불사조》를 비롯한 《락화의 눈물》, 《사랑의 고개》, 《관서천리》 등의 가요들을 음미해보면 님에 대한 그리움을 하소한 련정가인듯 한 가사내용속에 사람들의 운명문제를 날카롭게 제기하면서 당대 사회에 대한 저주와 행복에 대한 갈망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고있다는것을 잘 알수 있다.

그가 1932년초에 작사한 《타향살이》도 사람들속에서 널리 불리운 노래로서 그의 문학적재능을 뚜렷이 보여주었을뿐아니라 당시 《오케》레코드회사에 갓 입직하였던 작곡가 손목인과 총각가수 고복수를 유명하게 만들어준 성과작이였다.

김릉인은 어둡고 침울한 비가풍의 노래들이 성행하던 시기에 비교적 밝은 색조가 흐르는 가사들도 잘 지어 내놓았다.

그가 작사한 《봄강》, 《오대강타령》들은 당시 강에 대한 노래들이 주로 리별의 설음과 결부된 비가풍이였던것과는 달리 강변의 봄경치나 조국의 주요 강들에 깃든 력사적자취를 밝고 은근한 정서를 나타내는 시어들에 담아 노래하고있다.

그가 1930년대 중엽에 창작한 《바다의 교향시》, 《인생가두》들은 미래에 대한 희망과 락관을 밝고 랑만적인 정서가 짙은 시어들에 담아 노래한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김릉인은 1938년경 20대의 나이에 일찌기 사망하였으므로 더 많은 작품들을 남기지는 못하였으나 그가 창작한 대중가요가사들은 그에 담겨진 은유적인 뜻이 깊어 사람들의 감흥을 불러일으켰다.

 

《황성옛터》를 지은 왕평

 

왕평(1901-1941년)은 널리 알려진 대중가요 《황성옛터》를 비롯한 당대의 시대상을 반영한 노래가사들을 많이 지은 작사자의 한사람이다. 그의 본래이름은 리응호이며 필명으로 왕평 또는 편월이란 이름을 썼다.

경상북도 김천에서 태여난 그는 1920년대 중엽부터 연극계에 나서 극작가 및 연출가, 배우로 활약하면서 남다른 재능을 나타냈다. 그가 창작한 극작품으로는 《경성야화》, 《인간모욕》, 《코스모스호텔》과 영화 《나그네》가 알려져있다.

왕평은 대중가요가 발생하던 초기에 망국의 설음과 울분을 절절하게 터친 《황성옛터》(전수린 작곡)의 가사를 지어 내놓음으로써 망국노의 오열을 삼키며 살아가던 겨레의 심금을 뜨겁게 울려준 시인으로 깊은 인상을 남기였다.

왕평은 이외에도 《칠석날》, 《청춘을 찾아서》를 비롯한 대중가요들과 신민요가사들을 많이 창작하였다.

그는 1941년에 《포리돌》악극단과 함께 무대감독으로 지방순회공연을 하던중 강계에서 앓아누운 배우대신 연극 《남매》의 큰아들역으로 무대에 나섰다가 연기중에 뇌출혈로 사망하였다고 한다.

 

대중가요 《찔레꽃》을 작사한 김영일

 

김영일(1914-1986년)은 향토애가 짙은 노래로 널리 알려진 《찔레꽃》을 비롯한 대중가요와 동요가사들을 지은 작사자의 한사람이다. 불사조, 불로초라는 필명으로 자기 작품들을 발표하였다.

그는 1930년대초부터 어린이들을 위한 노래창작에 관심을 가지고 《물새발자욱》, 《꽃동산》을 비롯한 동요창작으로 문단에 등장하였으며 1930년대 후반기부터 대중가요가사들을 창작하였다.

그는 1938년경에 진방남의 첫 취입곡으로 유명한 《불효자는 웁니다》를 내놓아 성공한 후 당대의 눈물겨운 현실을 반영한 《눈오는 백무선》, 《무명초항구》, 《아리랑고개》 등 많은 대중가요가사들을 창작하였다.

그가 1940년경에 작곡가 김교성과 함께 중국 동북지방을 순회공연하던중에 지은 대중가요 《찔레꽃》은 낯설은 이역땅에서 고향에 대한 그리움에 젖어있던 류랑극단배우들의 심정이자 타향살이에 부대끼던 겨레모두의 절절한 애향심을 진실하게 담은것으로 하여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며 널리 불리웠다.

 

《나그네설음》의 작사자 고려성

 

고려성(1911-1956년)은 1930년대 중엽부터 연극분야에서 활동하다가 1938년경부터 《태평》레코드회사 전속작가로 있으면서 대중가요가사들과 가요극들을 창작하였다. 원래이름은 조경환이며 고려성은 필명으로 쓴것이 이름처럼 되여 전해지게 되였다.

그는 주로 《월야의 탄식》, 《님찾는 배길》, 《꽃이 피면》 등과 같이 리별의 슬픔이나 님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가사들을 잘 썼다.

그가 지은 대중가요가사들중에서 널리 알려진것이 《나그네설음》이다.

이 노래가사는 1939년의 어느날 그가 전속가수로 같이 있던 백년설과 함께 세종로 뒤골목술집에서 현실을 개탄하며 울분을 토하던중 령감이 떠올라 담배갑에 적은것이였다고 한다.

찬바람에 흩날리는 가랑잎마냥 정처없는 떠살이를 하지 않으면 안되였던 나그네의 가슴속에 서린 설음과 울분은 식민지문예인들의 마음속에 맺힌 설음이였고 울분 그대로였다. 하여 이 노래는 리재호가 작곡한 정서적인 선률과 결합되여 백년설의 노래로 레코드에 취입된 후 광범한 군중속에 널리 퍼져갔다.

 

◎ 대표적인 대중가요작곡가들

 

대중가요발생초기부터 민족수난의 현실을 담았던 전수린

 

전수린(1907-1984년)은 1920년대 중엽부터 김영환과 함께 대중가요창작의 길에 나서 《황성옛터》를 작곡한데 이어 1930년대에 들어와서도 민족수난의 현실을 반영한 대중가요들을 많이 창작하였다.

개성에서 태여난 그는 9살때부터 바이올린을 배우며 일찌기 남다른 음악적재능을 나타냈다. 그후 개성지방에 있던 소년음악단에 들어가 바이올린연주와 노래를 하면서 14살때에 첫 가요를 지어 내놓았다고 한다.

전수린은 18살 나던 1925년에 송도고등보통학교를 중퇴하고 홍란파가 운영하던 음악계몽단체인 연악회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며 홍란파의 방조밑에 가요창작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후 연극단체들인 《토월회》, 《취성좌》에서 바이올린연주를 하면서 연극의 개막곡들과 주제가들을 작곡하였다. 이 시기 그가 작곡한 노래들이 바로 초기대중가요들로 알려진 《사양의 비도》, 《고요한 장안》, 《황성옛터》들이였다. 이때 창작한 《황성옛터》는 《취성좌》의 연극배우 겸 막간가수였던 리애리수의 노래로 막간무대에서 울리며 가는 곳마다에서 눈물의 바다를 펼쳐놓았는데 이것은 작곡가와 가수를 인기절정에 올려놓은 계기로 되였다.

그때 우리 나라에 갓 들어온 《빅터》레코드회사에서 대중속에 인기있는 이 노래를 재빠르게 레코드에 취입하였는데 그것이 무려 10만장의 매상고를 올리게 되였다. 이에 놀란 《빅터》는 작곡가 전수린과 리애리수를 전속으로 채용하였는데 이것은 전속채용이 헐치 않았던 당시로서는 전수린에게 있어 쉽지 않은 행운이였다.

하여 그는 1920년대말부터 《빅터》레코드회사 전속작곡가로 활동하면서 당대의 시대상을 반영한 가요들을 많이 창작하였다.

이때부터 그가 창작한 《빛잃은 강산》, 《한숨고개》, 《알뜰한 당신》, 《헐어진 쪽배》, 《외로운 가로등》 등의 노래들은 일제식민지통치하에서 우리 겨레가 겪은 비참한 운명이자 작곡가자신이 체험해야 하였던 슬픔과 피눈물이 슴배인 비가들이였다.

이 노래들중에서 망국의 울분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빛잃은 강산》과 《한숨고개》는 민족의식을 되살리고 반일기운을 조장시키는 《불온가요》라는 일제검열계의 딱지가 붙어 《금곡》으로 매장되여 현재 그 곡조차 전해오지 못하고있다.

이 시기 그가 작곡한 대중가요들중에서 널리 알려진것은 1936년에 지은 《외로운 가로등》이다. 고향도 조국도 혈육도 다 잃고 타향의 길거리를 방랑하며 희미하게 비치는 가로등을 마주하고 서서 슬픔과 울분을 하소하는 방랑객의 쓸쓸하고 원한이 서린 내면세계를 담은 이 노래는 수난당하는 겨레의 가슴에 맺힌 한을 그대로 표현한것이여서 사람들의 심금을 울려주었다.

전수린은 한때 평양의 《금천대좌》에서 《빅터》레코드회사가 주최한 신인가수발굴을 위한 콩클심사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30년대말에는 왕평과 함께 《빅터》가극단의 중심인물로 활약하며 악극창조와 순회공연활동들에 참가하였다. 이 나날에 그는 신민요가수로 이름났던 황금심과 가정을 이루고 수난의 노래들을 짓고 부르며 겨레와 함께 해방의 봄을 그려왔다.

 

《눈물젖은 두만강》의 작곡가 리시우

 

리시우(1913-1975년)는 해방전 우리 인민들의 비통한 생활감정과 함께 조국해방에 대한 간절한 념원을 뚜렷이 보여주는 대중가요 《눈물젖은 두만강》과 함께 널리 알려진 작곡가이다.

경상남도 부산에서 나서자란 그의 본명은 리만수이다.

극단 《예원좌》의 기타연주가를 하면서 음악의 길에 들어선 그는 1920년대말부터 주로 순회극단에 망라되여 연주생활을 하였으며 그 과정에 현실속에서 노래를 짓군 하였다.

이 시기 그는 주로 강들마다에 비낀 겨레의 설음과 한을 아프게 감수하면서 강을 주제로 한 비가들을 많이 지었다. 일제식민지통치시기 압록강, 두만강을 비롯한 이 땅의 강들은 리별의 설음과 슬픔, 망국의 울분과 희망을 상징하는 대명사와도 같았다. 그래서 이 시기 강과 결부하여 겨레의 설음과 울분을 터친 노래와 시들이 많이 나왔던것이다.

리시우가 1930년대 중엽에 창작한 《봄잃은 락동강》은 고향을 떠난 사람들의 비참한 모습만이 물결우에 비끼는 강변의 봄풍경에 비유하여 나라를 잃고 봄마저 빼앗긴 수난의 현실을 비가조의 선률에 담은 노래였으며 1930년대 말엽에 작곡한 《눈물의 국경》(일명 《두만강배사공》)도 그러한 시대적감정을 눈물겹게 펼쳐보인 노래였다.

그가 중국 동북지방순회공연중에 룽징에서 지은 《하이란강락화류수》도 민족수난의 비극을 이국타향의 강과 결부하여 표현한 비가였다.

당시 수만의 조선사람들이 살고있던 룽징의 변두리를 흐르는 하이란(해란)강은 독립의기를 지닌 애국지사들과 조국을 떠나온 류랑민들이 넘나든 의미깊은 강이였으며 일제의 침략이 중국 동북으로 확대된 후에는 한가닥 희망을 안고 룽징에 왔던 조선의 청춘남녀들이 실망과 비관에 빠져 몸을 던지는 비극적인 사건이 꼬리를 문 겨레의 슬픔과 원한이 맺힌 강으로 되였다.

리시우가 순회공연길에 이러한 사연을 전해듣고 창작한 《하이란강락화류수》는 이처럼 이국땅에까지 증폭되는 민족의 고통과 슬픔을 정서적인 선률에 담아 표현한 노래였다.

강을 주제로 한 리시우의 대중가요에서 대표작으로 되는것은 《눈물젖은 두만강》이다. 이 노래 역시 작곡가가 1935년에 극단 《예원좌》에 망라되여 동북지방을 순회공연하던중 두만강을 옆에 둔 투먼(도문)려관에서 일제에게 남편을 잃은 녀인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충격을 받아 현지에서 창작한 작품이였다.

창작후 순회공연무대에서 연극에 출연하던 소녀배우 장월성이 처음으로 불러 관객을 크게 감동시켰던 이 노래는 그후 레코드에 취입하여 국내외에 널리 퍼져가면서 광범한 대중의 가슴속에 반일감정과 해방의 념원을 더욱 북돋아주었다.

 

《찔레꽃》의 작곡가 김교성

 

김교성(1904-1961년)은 1920년대 중엽부터 음악활동을 시작하여 대중가요들과 신민요들을 많이 작곡하였다.

서울에서 나서자란 그는 일찌기 음악의 길에 나서 1927년에는 홍란파와 함께 갓 창설된 경성방송국의 관현악단을 꾸리는데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는 1931년부터 《빅터》레코드회사 전속작곡가로, 그후 《포리돌》, 《태평》으로 전속을 옮겨가며 서정성이 깊은 대중가요들을 많이 창작하였다.

그가 작곡한 노래들을 보면 《처녀행진곡》, 《첫사랑푸념》, 《할미꽃아리랑》, 《피리소리》, 《한바탕과거사》, 《직녀성》, 《가는 봄》, 《오동잎맹세》 등 생활세태적인 감정을 담은 노래들이 대부분을 이룬다. 이처럼 인간생활의 다양한 감정을 담고있으나 그 곡조들은 비탄조이거나 진부한감이 없이 유연하면서도 부드러운 정서로 흐르는것이 특징이다.

그의 대중가요창작에서 가장 성공한 대표작은 《찔레꽃》이다.

이 노래는 1940년경에 그가 속한 순회극단이 중국 동북지방에서 순회공연하던중에 어느 한 려관방에서 고향생각을 하다가 그리움이 북받쳐 지었다고 한다.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나라 내 고향/언덕우에 초가삼간 그립습니다》라고 고향에 대한 사무친 그리움을 절절하게 담은 이 노래곡조는 당시 류행하던 슬픈 비가들과 달리 맑고 부드러운 서정성이 깊은것으로 하여 사람들에게 깊은 감명을 안겨주었다. 순회극단의 막간무대에서 백란아가 불렀던 이 노래는 그후 《태평》레코드에 취입되여 전국에 널리 보급되였다.

김교성이 1941년에 작곡한 《직녀성》도 설음에만 젖어있지 않고 살아가려는 겨레의 마음을 서정적인 선률에 담아 정서깊이 노래한 작품이였다.

김교성은 1940년대초에 각이한 명칭을 가지고 진행된 콩클심사원으로 활동하면서 신진가수들을 선발육성하는데 기여하였다. 이 시기 그에게 《콩클대왕》이란 별명이 붙었다고 한다.

 

《락화류수》의 작곡가 리봉룡

 

리봉룡(1914-1987년)은 1930년대 후반기부터 가요창작의 길에 나서 《락화류수》와 같은 밝고 정서적인 대중가요를 창작한 작곡가이다.

전라남도 목포태생인 그는 원래 음악에 재능이 있었으나 생계를 위해 레코드매점을 차려놓고 소리판장사를 하였었다. 그의 녀동생이 당시 《비가의 녀왕》으로 이름난 가수 리란영이였기에 레코드점이름도 《란영축음기상회》라고 달았다고 한다.

이러한 리봉룡이 갑자기 가요창작의 길에 나선것을 보면 재능도 있었거니와 레코드영업을 하면서 음악수업을 한것이 한밑천되였다고 할수 있다.

하여간 리봉룡은 턱이 높은 《오케》레코드회사 전속작곡가로 입직한지 몇년이 되지 않는 기간에 적지 않은 대중가요들을 창작하여 내놓았다.

그의 대중가요들은 주로 리별의 슬픔을 노래한 비가류들이 많으며 일부 향토애를 노래한 가요들이 있다.

당대의 눈물겨운 현실을 담은 《포구의 인사》와 싸락눈내리는 정거장에서 눈물속에 리별한 어머니를 그리는 아들의 마음을 담은 《어머님 안심하소서》를 비롯하여 《잘 있거라 단발령》, 《항구의 수첩》, 《국경의 다방》, 《뒤져본 사진첩》, 《울어라 쌍고동》 등 그가 작곡한 많은 노래들이 리별의 서러움을 담은 비가들로서 곡조들도 서글픈 양상을 띠고있다.

리봉룡은 1940년대에 들어와 새로운 시대적분위기를 감수하면서 비교적 밝은 정서의 가요창작을 지향하였다.

이 시기 그가 창작한 《청춘썰매》는 힘차게 지쳐가면 봄날이 온다는 은유화된 뜻이 담긴 시구들과 결부된 비교적 밝고 활기있는 곡조로 미래에 대한 희망과 확신을 노래하였다.

그가 1942년에 창작한 《락화류수》는 밝은 미래에 대한 확신이 넘치던 당대의 시대상을 적극적으로 반영한 대표적인 노래였다.

민족수난기에 삼국시기의 삼천궁녀이야기가 깃든 락화암과 결부하여 망국의 설음을 터놓은 비탄조의 노래들이 많이 나왔는데 리봉룡이 작곡한 《락화류수》는 비가풍의 곡조에서 완전히 탈피하여 민족장단이 안받침된 무곡풍의 활기있는 선률형상으로 《이 강산 봄소식을 편지로 쓰자》는 시대적분위기를 정서깊이 노래함으로써 사람들에게 밝아올 래일에 대한 신심과 락관을 안겨준 대중가요였다.

 

《나그네설음》을 작곡한 리재호

 

리재호(1914-1960년)는 《태평》레코드회사의 전속작곡가로 활동하면서 당대의 현실을 반영한 대중가요들을 많이 작곡하였다.

그의 본명은 리삼동이며 리재호는 필명으로 쓴 이름이였다.

20살때인 1934년부터 가요창작의 길에 나선 그는 《태평》레코드회사의 기둥작곡가로 활동하면서 《귀재》(귀신같은 인재라는 뜻)라고 하리만치 대중가요창작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이 시기 리재호는 전국각지와 중국 동북지방을 순회공연하던 류랑극단배우들의 서글픈 생활을 담은 《막간아가씨》, 《오동극단》을 비롯하여 《무명초항구》, 《북극 오천키로》, 《간도선》, 《남강의 백무선》, 《망향초사랑》 등 많은 대중가요들을 작곡하였다.

그가 1938년에 작곡한 《나그네설음》은 정든 고향을 잃고 류랑민의 신세가 된 나그네의 설음을 통하여 당대의 눈물겨운 현실을 생동하게 펼쳐보인 노래였다. 정처없이 걸어온 눈물의 자욱들을 돌이켜보는듯 한 회고적이며 사색적인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이 노래는 당시 대중가요계에 류행되던 소조식에 기초한 비가풍의 곡조에서 벗어나 5음계대조식에 기초하여 민족적인 정서를 잘 살린것으로 하여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며 널리 불리웠다.

 

《타향살이》의 작곡가 손목인

 

류랑민의 설음을 담은 눈물의 노래로 널리 알려진 대중가요 《타향살이》를 작곡한 손목인(본명 손득렬)은 경상남도 진주태생이다.

그는 1920년대말부터 음악공부에 뜻을 두고 이국땅에 가있으면서 조국을 그리며 살아가는 동포들의 눈물겨운 정상을 목격하고 이 노래를 지었다고 한다.

산설고 물설은 이국땅에서 부평초같이 떠살이를 하는 고달픈 신세, 고향이 사무치게 그리워도 갈수 없는 빼앗긴 땅이여서 더욱 서글프고 기막히기만 하였던 서정적주인공-나그네의 향수에 젖은 심정이 절절하게 슴배인 노래였다.

귀국후 《오케》레코드회사 전속작곡가로 입직한 손목인은 첫 취입곡으로 《타향살이》를 내놓아 작곡가로서 재능을 널리 시위하였다.

손목인은 이후 리별의 슬픔과 한이 쌓여 눈물의 부두로 이름난 목포항에 서린 설음을 담은 대중가요 《목포의 눈물》을 비롯하여 《울리는 만주선》, 《애수의 제물포》, 《항구여 잘 있거라》, 《울어라 문풍지》, 《애수의 압록강》, 《바다의 교향시》, 《짝사랑》 등 수십여편의 대중가요들을 창작하였다.

그중 《아 으악새 슬피 우니 가을인가요/지나친 그 세월이 나를 울립니다》라는 가사로 시작되는 대중가요 《짝사랑》은 나라를 잃은 설음을 처량하면서도 정서적여운이 강한 선률에 담아 터친 노래인것으로 하여 사람들속에서 많이 불리웠다.

손목인은 비가류만이 아닌 《아리랑풍년》, 《떼목 이천리》와 같이 민요적인 색채가 짙은 노래들도 잘 지었다.

 

《홍도야 울지 말아》를 작곡한 김준영

 

김준영(1908-1961년)은 황해남도 해주태생으로 서울배재고등보통학교를 다닌 후 1930년대초부터 방송악단 피아노연주가로 있으면서 가요창작을 하다가 《콜럼비아》레코드회사 전속작곡가로 입직하여 신민요와 대중가요창작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한때 《콜럼비아》레코드회사의 문예부장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김준영의 창작적재능은 널리 알려진 신민요 《처녀총각》, 《청춘타령》들을 작곡한것과 함께 대중가요창작에서도 남다른 특기가 있은것을 통해 잘 알수 있다.

그가 대중가요계에 나선 초기에 작곡한 《서울노래》는 채규엽의 노래(1934년 《콜럼비아》에 취입)로 소리판에 실려 나오자마자 일제검열계에 의해 독립을 선동하는 《불온가요》로 발매금지를 당하고말았다.

그후 김준영은 류랑민들의 애향심을 담은 대중가요 《항구의 애수》를 비롯하여 《눈물의 부두》, 《사창야월》, 《호궁처녀》 등 많은 대중가요들을 작곡하였는데 작곡가를 유명하게 해준것은 《홍도야 울지 말아》였다.

1937년에 극단 《청춘좌》에서 창조한 신파비극작품인 연극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의 주제가의 하나로 창작되였던 이 노래로 하여 연극은 사람들속에서 대인기를 끌었고 노래를 취입한 소리판이 무려 10만장이상 제작판매되는 실적을 올리여 노래와 함께 작곡가도 널리 알려지게 되였던것이다.

김준영은 민족의 불우한 처지를 반영한 비가류의 대중가요들을 잘 지었지만 민족적정서가 짙은 신민요창작에서도 남다른 특기를 발휘하여 해방전시기 신민요음악양식의 확립에 한몫 기여하였다.

 

《감격시대》를 노래한 작곡가 박시춘

 

박시춘(1913-1995년)은 경상남도 밀양태생으로 본명은 박순동이다.

일찌기 기타를 배워 능숙하게 연주하였으며 구전민요들을 수집채보하며 작곡지식을 익혔다.

그는 1935년경부터 《시에른》레코드회사, 그후 《오케》레코드회사 전속작곡가로 있으면서 《애수의 소야곡》, 《집없는 천사》, 《서귀포 70리》, 《울며 헤진 부산항》을 비롯하여 주로 비가풍의 노래들을 많이 작곡하였다. 그중 《울며 헤진 부산항》은 리별의 눈물이 그칠새없던 부산항을 배경으로 하여 수난의 현실을 생동하게 반영한것으로 하여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던 노래였다.

이처럼 나라잃은 민족의 슬픔과 울분이 서린 비가들을 누구보다 많이 지었던 박시춘은 《감격시대》와 같이 반드시 도래할 조국해방에 대한 확신의 감정을 랑만적으로 노래한 대중가요도 창작함으로써 슬픈 비가류에만 치우치지 않은 창작가적자세를 뚜렷이 나타냈다. 1939년에 그가 작곡한 대중가요 《감격시대》는 해방의 봄을 확신하며 밝은 앞날에 대한 희망을 안고 살아가던 당대 인민들의 정신세계를 사실주의적으로 반영한 가사내용을 랑만과 희열, 환희의 감정이 약동하는 생기있는 선률형상에 담아 열정적으로 노래함으로써 대중가요의 새로운 선률양식적면모를 뚜렷이 보여준 대표작의 하나로 되였다.

박시춘의 남다른 창작적재능은 썩어빠진 식민지사회현실을 유모아적으로 풍자조소한 《세상은 요지경》과 같은 해학적인 선률로 하여 만요라고 불리웠던 노래창작에서도 특기를 발휘한것을 통해 잘 알수 있다.

기타연주에 능하였던 그는 자기가 작곡한 노래들을 순회공연무대에서 직접 기타로 반주하기도 하고 레코드취입에 출연하기도 하였다.

그는 편곡에도 재능이 있어 대중가요 《눈물젖은 두만강》을 비롯한 많은 노래들의 반주편곡을 맡아하기도 하였다.

 

다양한 주제와 양상의 노래들을 잘 지은 김해송

 

김해송(1911-1950년, 본명 김송규)은 평안남도 개천에서 태여나 평양숭실중학교에 다니면서 기타연주와 노래를 잘하여 인기있었다. 졸업후 음악에 뜻을 두고 극단 《연극호》에서 기타연주가로 있다가 1935년경부터 《오케》레코드회사 작곡가 겸 가수로 활동하였다.

레코드취입때마다 자기 작품을 본명 김송규로 발표하고 가수로는 김해송이라는 애명을 써왔는데 점차 김해송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지면서 1939년경부터 작품에도 김해송이란 이름을 썼다.

당시 《비가의 녀왕》으로 이름났던 《오케》레코드회사 전속가수 리란영과 가정을 이루고 함께 활동하였던것으로 하여 그의 노래들은 리란영의 독창이나 부부의 2중창으로 레코드에 취입한것이 적지 않았다.

그는 창작에서 주로 《락화삼천》, 《련락선은 떠난다》, 《무너진 황성》, 《설음의 벌판》 등과 같은 비가류들을 잘 썼지만 《천리춘색》, 《단풍제》와 같은 민족적인 색채가 짙은 노래들이나 《개고기주사》와 같은 해학적인 노래 그리고 《청춘의 푸른 꿈》과 같은 미래에 대한 락관의 감정을 담은 생기발랄한 노래들도 잘 지었다.

김해송은 작곡가 리봉룡과 매부, 처남지간이였으므로 그와 합작으로 작곡한 노래들도 일부 있는데 《고향설》, 《어머님 안심하소서》, 《코스모스탄식》 등이 리봉룡과 공동작곡으로 된 노래들이다.

그는 1940년대초부터 조선악극단(일명 《오케》악극단)에 망라되여 국내외지역들에 순회공연을 다니면서 기타연주와 노래를 잘하여 사람들의 인기를 모으기도 하였다.

 

◎ 대표적인 대중가요가수들

 

《수난의 가수》라고 불리운 채규엽

 

채규엽(1906-1949년)은 대중가요의 발생초기부터 막간무대를 통하여 대중가요를 보급한 오랜 가수의 한사람이다.

함경남도 함흥에서 출생하여 1920년대말부터 리화녀자전문학교에서 음악교원을 하였다.

이 시기 그는 연극단체인 《토월회》와 《취성좌》의 막간가수로 출연하여 계몽가요 《학도가》, 《희망가》, 동요 《봄노래》 그리고 자신이 작사, 작곡한 대중가요들인 《고독한 몸》, 《류랑인의 노래》들을 즐겨불렀다. 그중 《고독한 몸》은 시적형상이 세련되지 못한 부족점은 있으나 방랑자의 설음과 결부하여 행복한 새 나라에 대한 동경을 진실하게 노래한것으로 하여 사람들의 심금을 울려주었다.

채규엽은 1920년대말 《콜럼비아》레코드회사가 새로 나온 후부터 전속가수로 입직하여 가수생활을 시작하였다.

1933년에 그는 리면상이 작사, 작곡한 《들국화》를 《콜럼비아》레코드에 취입하였는데 이 노래로 하여 첫 수난을 당하였다. 노래가사에 조국애가 은유되여있다 하여 일제경찰이 소리판을 모두 압수하고 창작가와 가수를 《불온분자》로 취급하였던것이다.

채규엽은 그 이듬해 4월에 취입한 《서울노래》(작사 조령출, 작곡 김준영)로 하여 또다시 일제의 탄압을 받았다. 노래가사에 있는 《아시아의 바람아 서울의 잠을 깨라》는 대목이 독립을 선동하는것이라고 걸고들었기때문이였다.

그는 이외에도 《페허에서》, 《뜬 세상》, 《종로네거리》 등의 노래들이 《금곡》으로 매장될 때마다 취입가수로 일제경찰의 탄압을 당했으며 그로 하여 그에게는 《수난의 가수》라는 기막힌 별명이 붙었었다.

하지만 그는 변함없는 목소리로 세계마라손경기에서 우승한 손기정(1등)과 남승룡(3등)을 민족의 자랑스러운 아들로 긍지높이 찬양한 대중가요 《마라손제패가》를 비롯한 수많은 대중가요들을 부르며 겨레와 함께 설음을 나누었다.

그는 한때 순회악극단을 조직하고 순회공연길에 나서기도 하였으나 역시 《수난을 타고난 사람》이였던지 공연에서 실패하여 숱한 빚을 지고 감옥살이를 하게 되였는데 의리심 많은 동료들이 그를 구원하기 위한 공연을 벌려 빚을 갚아주어서야 무사하게 되였다고 한다.

해방후 채규엽은 고향 함흥의 삼일동에서 살다가 1949년 12월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비극의 3대녀왕》에 꼽히는 리경설

 

리경설은 1925년부터 《토월회》의 비극배우 겸 막간가수로 활동하며 초기대중가요들을 불렀다.

당시 연극계에서는 비극무대에서 관중의 인기를 모았던 리경설, 전옥, 차홍녀를 가리켜 《비극의 3대녀왕》이라고 하였다. 전옥과 차홍녀는 비극으로 유명했던 연극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의 주인공 홍도역을 맡아한 배우들이였다.

1920년대 중엽에 리경설은 초기대중가요들인 《세기말의 노래》, 《방랑가》와 같은 노래들을 막간무대를 통해 보급하였다. 그중 《피 식은 젊은이 눈물에 젖어/락망과 설음에 병든 몸으로》라고 부르는 《방랑가》는 일제에 의해 《금곡령》을 받은 후에도 리경설에 의해 막간무대에서 계속 불리우고 1930년대초에는 《시에른》레코드에 취입되였다.

이로 하여 리경설은 《금곡령》을 받은 노래를 불렀다고 하여 옥중고초를 겪었으며 출옥후 순회공연길에 올랐다가 옥중에서 생긴 병으로 객사하였다. 비극배우 겸 비가가수로 유명하였던 리경설이였으나 나라를 빼앗긴탓에 그자신이 실재한 비극의 주인공이 되여 타향땅에 아까운 재능과 청춘을 묻는 비참한 운명을 겪지 않으면 안되였던것이다.

 

《황성옛터》의 가수 리애리수

 

리애리수(본명 리보전)는 1910년에 개성에서 태여나 9살때부터 연극무대에 출연하였으며 13살때부터는 극단 《취성좌》에서 소녀역을 하였다.

1925년부터 《토월회》의 연극배우로 《장한몽》을 비롯한 연극의 주역을 하였으며 신무대, 조선연극좌에서도 활동하였다.

그는 작곡가 전수린의 권고로 가수의 길에 나서 《라인강》, 《아버지 울지 마세요》를 불렀으며 1927년 가을 대중가요 《황성옛터》를 《취성좌》무대에서 부르고 그 이듬해에 《빅터》레코드에 취입하여 재능있는 인기가수로 되였다.

이때부터 그는 《빅터》레코드회사 전속가수로 입직하여 대중가요 《사양의 비도》, 《슬허진 젊은 꿈》, 신민요 《님맞이 가자》 등을 불렀다.

그는 1932년에 가정사정으로 가요계에서 은퇴하였다.

 

영화주제가들을 많이 부른 김련실

 

공화국에서 영화화면들을 통하여 사람들속에 널리 알려진 인민배우 김련실(1911-1997년)은 1920년대 중엽부터 초기대중가요들을 많이 부른 인기가수의 한사람이였다.

경기도 양주에서 태여난 그는 경성군화녀학교를 다니던 1926년 어느날 지나가던 영화감독이 그의 노래소리를 듣고 선발한것을 계기로 예술계에 들어서게 되였다.

그때의 예술영화란 필림에 록음을 함께 수록하지 못하는 무성영화여서 영화상영때마다 변사가 확성기에 대고 대사를 해주고 가수는 노래를 불러야 하였다.

김련실은 무성영화 《아리랑》의 상영장소(서울의 《단성사》, 평양의 《금천대좌》 등)들을 따라다니며 주제가인 《아리랑》(당시 《아르렁》)을 불렀다. 처음 보는 영화도 인기였지만 그가 아련한 목청으로 부르는 《아리랑》노래 또한 인기여서 그는 영화가 끝난 후 관중의 재청으로 무대에 따로 나와 《아리랑》을 부르군 하였다.

작곡가 김영환이 편작한 민요 《아리랑》(신아리랑)은 이렇게 김련실의 노래로 처음 불리우며 전국에 퍼져갔고 그의 가창으로 《빅터》레코드에도 취입되였다.

이후 김련실은 갓 설립된 《빅터》레코드회사 전속가수로 입직하여 무성영화 《락화류수》, 《세 동무》, 《암로》의 주제가들을 취입하고 방송으로도 불러 보급하였다.

이 시기 그는 무성영화 《세 동무》, 《종소리》, 《종로》, 《홍길동전》 등에 주단역으로 출연하고 극단 《예원좌》의 연극들에도 출연하여 영화배우로서의 남다른 재능도 보여주었다.

해방후 김련실은 조선예술영화촬영소 배우로 활동하면서 예술영화 《정찰병》, 《유격대의 오형제》, 《처녀리발사》, 《보증》, 《림꺽정》을 비롯한 수많은 영화들에 출연하였다.

 

《비가의 녀왕》으로 불리운 리란영

 

리란영(1917-1965년)은 전라남도 목포태생으로서 본명은 리옥례이다.

1931년에 박승희가 이끄는 《태양극단》이 순회공연길에 올라 목포에서 공연하던중에 현지에서 발굴되여 막간가수로 되였는데 란영이란 예명은 박승희가 지어준것이라고 한다.

1933년에 《오케》레코드회사 전속가수로 입직한 후 《불사조》, 《봄맞이》 등을 불러 재능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고향도시의 설음을 담은 《목포의 눈물》, 《목포는 항구이다》, 《목포의 추억》을 비롯하여 수십여편의 대중가요들을 레코드에 취입하였는데 그중 《목포의 눈물》이 그를 《비가의 녀왕》으로 떠올린 성공적인 취입곡이였다.

대중가요 《락화류수》의 작곡가 리봉룡은 그의 오빠였으며 남편은 작곡가 김해송이다. 리란영이 취입한 노래들중에는 《고향은 부른다》와 같이 오빠와 2중창으로 부른것도 있고 남편과 2중창으로 부른 《올팡갈팡》도 있다.

해방전시기 리란영이 부른 대중가요들은 대부분이 비가들이였다.

 

가요계의 혜성으로 이름났던 남인수

 

남인수(1917-1962년)는 경상남도 진주에서 태여나 일찌기 아버지를 잃은것으로 하여 본명인 최창수외 이붓아버지의 성을 딴 강문수라고도 불리웠다.

어려서부터 가수가 될것을 꿈꾸어온 그는 17살에 《시에른》레코드회사 문예부장을 하던 박영호의 도움으로 《눈물의 해협》, 《비젖은 부두》를 취입하면서 전속가수생활을 시작하였다.

그후 《오케》레코드회사로 전속을 옮기고 《애수의 소야곡》(박시춘의 곡으로서 《눈물의 해협》을 가사만 바꾼것이였다.)을 취입하였는데 이 노래를 취입한 소리판이 《오케》레코드회사 설립후 처음으로 최대매상고를 올리면서 그는 가요계에 나타난 혜성으로 떠받들리게 되였다. 남인수란 이름도 이 노래를 수록한 소리판에 붙었던 예명이였는데 그때부터 본명보다 남인수로 사람들속에 널리 알려지게 되였던것이다.

이때부터 그는 《집없는 천사》, 《울며 헤진 부산항》, 《서귀포 70리》, 《락화류수》, 《감격시대》를 비롯한 수많은 대중가요들을 레코드에 취입하고 순회공연무대에서 부르면서 《오케》레코드의 기둥가수로 활약하였다.

큰 키에 인물 잘난 멋쟁이청년이였던 그는 《오케》악극단의 순회공연무대에 독창으로도 출연하고 악극 《춘향전》의 리도령역을 비롯한 여러 악극작품들의 주인공으로 출연하여 가는 곳마다에서 사람들의 절찬을 받았다.

남인수는 평양의 《금천대좌》에서 《춘향전》을 공연하던 도중 무대우에서 피를 토하며 쓰러졌는데 그후 페병으로 많은 고생을 하였다. 그는 모진 병마와 싸우면서도 노래를 멈추지 않았으며 설음과 울분을 터치고 희망과 용기를 주는 노래들과 더불어 겨레와 함께 해방의 봄을 꾸준히 마중해갔다.

남인수가 부른 노래들은 대부분이 조령출이 가사를 쓰고 박시춘이 작곡한 대중가요들이였다.

이들외에도 《나그네설음》을 부른 백년설, 《눈물젖은 두만강》을 부른 김정구, 신민요와 함께 대중가요를 잘 부른 황금심, 《찔레꽃》을 부른 백란아 등 수난의 그 시절 식민지예술인의 비참한 처지에서도 노래로 설음많은 가슴들을 달래주며 대중가요의 보급에 기여한 유명무명의 가수들은 적지 않다.

 

3

일 화

겨레를 울린 대중가요 《황성옛터》

 

1929년 여름 황해도 배천의 어느 한 려인숙에는 장마에 길이 막힌 순회악극단 《연극회》성원들이 묵고있었다.

평양의 《금천대좌》(극장이름)를 비롯하여 신의주, 남포, 개성을 순회하며 망국의 한이 맺힌 겨레의 설음을 달래주던 악극단이였다.

그런데 배천에 이르러 그칠새없이 쏟아지는 장마비때문에 공연도 하지 못하고 려인숙에 갇힌지 한달, 이제는 려비마저 떨어져 오도가도 할수 없는 신세에 처하였으니 20여명 악극단원들의 가슴들은 절망과 설음에 젖어있었다.

바이올린수였던 전수린의 가슴에도 쓸쓸한 회오리바람이 쓸어들었다.

유구한 력사국으로 이름높던 이 땅이 일제의 발굽아래 짓밟힌지도 어언 20여년, 그사이 3.1인민봉기로 독립만세도 웨쳤고 리조의 마지막왕이였던 순종의 사망을 계기삼아 6.10만세시위투쟁으로 쌓이고쌓인 민족적울분을 터치기도 하였지만 일제의 야수적탄압앞에서 좌절의 쓴맛을 보지 않으면 안되였다.

(아, 세상이 무심도 하구나. 우리 백의민족은 이대로 사그라져버린단 말인가. …)

서글픔과 울분이 엉켜 치솟는 가슴을 두드리며 장대같은 비발이 내리치는 창밖을 바라보고 서있던 그의 눈앞에는 문득 개성순회공연중에 찾아본 만월대의 쓸쓸한 전경이 비껴들었다.

우리 나라의 첫 통일국가로 위용떨치던 고려의 웅장화려한 왕궁이 자리잡았던 만월대!

개성에서 나서자란 전수린은 어릴적에 동무들과 함께 송악산 남쪽기슭에 있는 만월대에 자주 가보군 하였다.

철없던 그 시절 인상깊이 새긴 만월대여서 이번 순회공연의 달밝은 저녁 악극단성원들과 함께 만월대를 다시 찾아본 그였다.

허나 철들어 다시 찾은 만월대여서인지, 나라잃은 망국의 설음이 엉켜서인지 그날의 만월대의 처량한 모습은 그의 가슴에 류다른 애수를 안겨주었다.

민족의 지혜와 재능을 안고 위풍있게 일떠서있던 웅장한 궁전들과 성벽은 어디로 가고 잡초만이 우거진 페허에 딩굴던 이끼오른 바위돌들, 교교한 달빛이 흘러드는 허물어진 빈터에 깃든 고요…

그것은 일제의 발굽아래 민족의 넋까지도 사그라져가는 망국의 현실을 보라고 일깨워주는듯싶었다.

가슴이 터질듯 치밀어오르는 심사를 토할 길 없어 모대기던 전수린의 머리속에는 서글픈 선률가락이 안겨왔다.

저도 모르게 집어든 그의 바이올린에서는 하많은 슬픔과 울분에 젖은 선률이 흘러나왔다.

페부를 찌르는듯 한 서글픈 선률은 함께 있던 동료들의 가슴들에도 걷잡을수 없는 충격을 안겨주었다. 동료들과 함께 눈물을 머금으며 곡조를 듣던 악극단의 연극배우 왕평이 곡조에 가사를 지어붙였다.

그리고 《황성의 적》이라고 곡명을 달았다.

나라를 잃은 망국노의 슬픔을 옛 고려왕조의 페허에 비겨 노래한 대중가요 《황성의 적》(후날 노래제목을 《황성옛터》로 바꿈)은 창작후 급속히 퍼져가면서 눈물의 노래로 유명해졌다.

장마가 걷힌 뒤 간난신고끝에 서울로 돌아온 악극단은 그해 가을 어느날 《취성좌》에서 공연하면서 막간에 이 노래를 무대에 올렸다.

당시 연극배우와 가수를 겸하고있던 리애리수가 부르는 《황성옛터》는 삽시에 관객의 심금을 울렸다. 노래를 부르는 가수도 솟구치는 오열을 걷잡지 못하여 노래절반, 울음절반으로 불러나갔고 관객들은 그들대로 설음에 젖어 눈물을 흘리며 재청을 요구하였다.

노래가 거듭될수록 장내는 온통 관객의 울음소리와 박수, 재청의 열광으로 끓어번졌고 막간 다음종목을 하지 못할 정도로 번져갔다.

《취성좌》의 이날 공연은 삽시에 소문이 퍼져 연극보다도 리애리수가 부르는 《황성옛터》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높아졌으며 《취성좌》에 밀려온 관객들은 가수와 함께 이 노래를 합창하며 빼앗긴 조국에 대한 그리움과 일제에 대한 항변을 토하였다.

당시 이 극장공연을 감시하던 담당경관은 처음에는 구경온 관객들이 울고불고 하는 리유를 모르고 벙벙해있다가 후에야 노래의 내용과 관객이 흥분한 사연을 알아차리고 경찰서에 달려가 보고하였다고 한다.

이에 질겁한 일제경찰은 《황성옛터》를 지은 전수린과 왕평을 구속하고 《금곡》처분으로 이 노래의 공연보급을 중지시키는 소동을 벌렸다.

노래에 내포된 슬픔이 곧 민족혼을 불러 반일감정을 조장케 한다는 리유에서였다.

하여 대중가요 《황성옛터》는 일제의 탄압으로 최초에 보급금지된 류행가의 하나로 되였으나 일제의 야수적인 총칼도 노래의 생명력을 거세할수 없었다. 《황성옛터》는 나라를 잃은 겨레의 울분의 노래, 은유적수법으로 식민지현실에 맞섰던 항변의 노래로 널리 보급되였으며 대대손손 피눈물의 력사를 잊지 말자는 추억의 노래로 오늘날에도 불리우고있다.

 

4

일 화

《락화류수》라는 제목으로 불리운 노래들

 

일제식민지통치시기 우리 인민들속에는 옛 삼국시대의 삼천궁녀이야기와 결부된 《락화암》과 관련한 노래들이 많이 창작되여 불리웠다.

《락화삼천》, 《락화류수》, 《락화류수목로》, 《락화류수다방》, 《락화류수호텔》이라는 제목으로 불리운 노래들이 그러하다.

해방전시기에 이처럼 《락화》라는 말과 결부된 노래들이 많이 창작되여 불리우게 된데는 우리 인민들속에서 오랜 세월 전해져온 《락화암》에 대한 이야기와 떼여놓고 볼수 없다.

머나먼 삼국시기 백제의 수도였던 충청남도 부여에는 백마강(일명 금강)이란 강이 있었다. 이 강기슭에 부소산이라고 부르는 봉우리가 있었는데 거기에 이름없는 벼랑이 있었다.

660년(백제 의자왕 20년)에 당나라군대가 백제왕궁이 있던 사비성을 공격하였는데 그때 왕은 도망쳤으나 궁녀들은 침략군에 포로되여 굴욕을 당하지 않으려는 각오를 품고 자결의 길을 택하였다.

그들이 부소산벼랑우에서 치마를 뒤집어쓰고 백마강에 몸을 던졌는데 그 모양이 마치 여러가지 색갈의 꽃이 떨어지는것과 같아서 그때부터 이름없던 그 벼랑바위를 《락화암》이라고 부르게 되였다고 한다.

《반월성너머 사자수 보니/흐르는 붉은 돛대 락화암을 감도네》라고 시작하여 후렴에서 《물어보자 락화삼천 어데냐》로 끝나는 대중가요 《락화삼천》이 바로 삼천궁녀의 비참한 운명에 비추어 망국의 비운을 통탄한 노래인것이다.

해방전시기에 이 노래와 함께 《락화류수》라는 제목의 여러가지 노래들이 창작되여 널리 불리우게 된것은 나라를 잃은 우리 인민의 처지가 옛 백제 궁녀들의 처지나 다름없고 물우에 떨어져 정처없이 흘러가는 꽃이나 다름없었기때문이였다.

처음 나온 노래가 1927년에 나온 무성영화 《락화류수》의 주제가 《락화류수》(작사, 작곡 김영환)였다.

《강남달이 밝아서 님이 놀던 곳/구름속에 그의 얼굴 가리워졌네》라는 가사로 망국의 현실을 은유적으로 비유한 이 노래는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며 보급되는 과정에 제목이 《강남달》로 많이 통하였다. 오늘날 계몽기가요곡집들에서 이 노래를 《강남달》로 표기하고있다.

두번째로 나온것이 1930년대 중엽에 극단 《예원좌》가 중국 동북지방에서 순회공연하던 때에 룽징에서 창작한 《락화류수》(작사 김상배, 작곡 리시우)이다.

 

봄이면 진달래꽃 담아 흐르고

가을이면 단풍잎 담아 흐르는

하이란강의 류수야 너는 알리라

 

이 노래 역시 한가닥의 희망을 안고 두만강을 건너 룽징땅에 왔던 젊은이들이 살길이 막히자 하이란강에 몸을 던지는 비극적현실을 《락화》에 비유하여 담은 대중가요였다. 이국땅의 강가에 서린 비극을 통하여 민족이 겪는 고통과 울분을 반영하였던 이 노래는 후날에 나온 리봉룡의 《락화류수》와 혼돈을 피할 의도에서 《하이란강락화류수》라고 제목을 고쳐불렀다.

이처럼 망국의 설음과 울분을 상징하는 대명사처럼 되였던 《락화류수》에 밝은 앞날에 대한 희망과 동경을 담은 노래도 나왔으니 그것이 바로 1942년에 창작된 작사 조령출, 작곡 리봉룡의 《락화류수》이다.

이 강산에 반드시 오고야말 행복의 봄을 그려보면서 꽃다운 인생살이 고개를 넘자는 은유적인 시어들을 통하여 해방의 봄에 대한 희망과 확신을 절절하게 담은 이 노래는 각계층 사람들속에 급속히 보급되면서 그들의 심금을 크게 울려주었다. 그런것으로 하여 오늘날 《락화류수》라고 하면 이 노래를 대표작으로 꼽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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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표적인 대중가요 몇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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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민요의 출현과 창작보급

 

신민요는 계몽기가요의 다양한 종류들중에서 전통적인 조선민요의 선률형식을 계승발전시켜 창작한 노래들이다. 그래서 신민요를 가리켜 직업적인 작곡가들이 작곡한 새로운 양식의 《창작민요》라고도 하는것이다.

음악형식의 견지에서 볼 때 신민요의 선률형식은 그것이 발생할 당시에 널리 보급되던 구전민요의 선률형식과 많은 공통성을 가지고있다. 이것은 직업적인 작곡가들에 의한 신민요창작이 전통적인 구전민요의 자체발전과정에 발현된 새로운 양식화과정과 불가분리의 관계속에서 진행되였음을 시사하여준다.

새로운 음악사조나 음악양식의 발생이 아무러한 토대나 전제가 없이 일시에 이루어질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신민요창작도 어느 창작가개인에 의하여 마련된 그 어떤 신민요의 원형이나 또는 약속된 창작수법을 가지고 진행된것은 아니다.

신민요의 선률형식은 근대시기에 이르러 구전민요들에서 발현되여온 근대음악적경향성 즉 민요발전의 합법칙적과정이 낳은 새로운 선률양식적특성들에 기초하여 형성되였다.

그러므로 신민요의 발생문제를 옳게 리해하기 위하여서는 그 음악양식형성의 원천으로 된 구전민요의 새로운 양식화과정 다시말하여 근대시기의 구전민요들에서 나타난 새로운 음악양식의 형성과정에 대하여 잘 알아야 한다.

우리 나라 민요발전에서 근대적경향은 19세기 후반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19세기 후반기의 격변하는 사회력사적현실과 근대적발전을 지향하는 인민들의 미학적요구를 반영하여 전통적인 구전민요는 새로운 근대음악적요소들을 첨가하면서 그 선률양식에서 일련의 변화를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이 시기의 민요들은 중세음악의 세계로부터 근대음악의 세계에로 이행하는 변화과정에 있어서 필연적현상으로 되는 과도적성격을 가진다.

근대민요의 과도적성격은 그것이 봉건적인 중세음악의 낡은 형식과 정서를 부정하여 나오기는 하였으나 본래의 선률적요소의 일부를 그대로 가지면서도 새로운 선률적요소들을 개척하고있는데서 표현된다. 다시말하여 이 시기의 민요들에서 나타난 새로운 양식화과정은 오랜 기간 굳어진 형식과 정서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보수적인것이 있는가 하면 변화된 시대의 요구와 인민들의 지향을 민감하게 반영한 혁신적인것이 있는데서 표현된다는것이다.

근대민요에서의 새로운 양식화과정은 선률표현수단과 수법들의 활용에서 종래의 민요들과는 다른 특징들이 나타나는데서 찾아볼수 있다.

19세기말-20세기초에 우리 인민들속에서는 외래침략과 봉건을 반대하는 투쟁이 세차게 벌어지면서 이를 반영한 민요들이 창작되여 불리웠다. 이 시기에 나온 여러 지방의 《의병가》들과 《담바구타령》을 비롯한 반침략애국민요들에서는 중세민요들에서 보편적이였던 3박자계통의 복합박자들이 자리를 내고 대신 보다 단순한 박자형태와 리듬들을 적극 살려쓰고있으며 선률음조와 전개수법에서도 당대 사람들의 비위와 정서에 잘 맞게 론리성과 통속성이 일정하게 높아졌다.

이러한 현상은 이 시기에 널리 불리운 서정적민요들인 《강타령(한강수타령)》, 《뽕타령》, 《꽃타령》, 《정든 님 가니》 등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고있다. 특히 이 노래들에서는 중세민요들에서 흔히 씌여온 사설조나 랑송적인 엮음제와 같은것이 없어지고 대중이 보다 쉽게 리해하고 받아들일수 있는 간결하고 통속적인 구조형식들이 많이 리용되고있으며 정서적으로도 밝고 지향적인 성격을 적극 살려내고있다.

이것은 종래 민요의 형식과 정서와는 확연히 구별되는 근대민요의 새로운 선률적면모들이 아닐수 없다.

구전민요의 자체발전과정에 발현된 새로운 양식화과정은 1910년대에 이르러 보다 뚜렷한 질적면모를 보인다.

이 시기 일제의 조선강점과 가혹한 식민지적폭압과 략탈로 인한 민족적 및 계급적모순의 첨예화와 자본주의경제관계의 장성발전으로 촉진되여가는 계급분화과정 그리고 새로운 시대사상의 대두와 날로 높아가는 근대적발전에 대한 지향 등은 인민들의 사상의식에서는 물론 정신적창조물인 인민음악의 발전에서도 새로운 경향성을 나타내게 하였다.

따라서 이 시기 구전민요에서는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긴 민족적울분과 항거정신을 반영한 주제들이 보다 전면에 나서고 반봉건적인 사상감정이 강하게 표현되였다.

이와 더불어 구전민요의 음악양식에서도 중세민요의 중요한 징표로 되여오던 지방적특성들이 점차 혼합되면서 가창과 보급의 대중적성격이 보다 강화되기 시작하였다. 선률음조에서도 종래민요들에서 보편화되여온 과도한 선률적굴림이나 장식적요소들이 정리되고 대중적가창을 의도한 평이하고 통속적인 음악언어들이 새롭게 개척되였으며 조식현대화경향이 강화되면서 현대적감정에 맞게 종지의 안정감을 강화하려는 시도들도 나타났다.

대표적인 실례로 당시에 널리 불리운 민요 《사발가》나 이 시기에 서도지방의 범위를 벗어나 전국에 널리 보급된 민요 《양산도》를 들수 있다. 이 노래들에서는 지역적범위에서 벗어나 보다 새로운 선률적발전을 추구하는 경향과 선률적서술의 론리성, 통속성을 높이려는 지향이 뚜렷하게 엿보인다.

당대 사람들의 미적감정에 잘 어울리는 이러한 선률양식적특징들은 근대음악사조의 영향이 보이지 않는 힘으로 노래전반을 지배하고있는것과 관련된다.

민요자체발전과정에 발현된 신민요적현상은 1920년대에 들어와 현대사람들의 요구와 정서를 반영하면서 보다 질적인 완성에로 접근해갔다.

우리 인민들속에 널리 알려진 민요 《신고산타령》과 《아리랑》이 시대적변천을 거치는 과정을 통하여 그 선률양식이 《신민요풍》으로 완연하게 변화발전한 사실이 이를 뚜렷이 실증하여준다.

《신고산타령》은 오랜 구전민요인 《어랑타령》의 가사내용에 강원도 고산지방의 변화된 현실을 반영한 새로운 내용들이 보충되면서 제목이 바뀌여진 민요이다.

민요 《신고산타령》선률의 변화과정은 1914년에 리상준이 채보하여 실은 《조선속곡집》의 악보와 그 이후시기에 불리운 곡조를 대비하여보면 잘 알수 있다.

1914년에 악보로 기록된 곡조는 동도와 《도-라-쏠》음조를 중심으로 단순하게 흐르는 선률서술, 중세민요의 중요한 조식적기초로 되는 평조와 련속적인 반복성을 요구하는 불안정한 종지투 등으로 보아 종래민요의 형식과 정서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있다. 이것은 이 노래가 1910년대초까지 상당한 정도로 보수성을 띠고 이어지고있음을 말하여준다.

이 노래는 그후 농촌을 떠난 농민들이 로동자로 계급분화되여가던 시대적변화를 반영하면서 선률양식에서도 많은 질적발전을 가져왔다. 음조와 조식, 리듬, 선률전개에서 중세민요적인 흔적들을 많이 가지고있으면서도 신민요에 가까운 선률양식적면모를 일정하게 갖추고있다.

이러한 신민요적현상은 오랜 력사적연원을 가지고 전해오는 민요 《아리랑》의 시대적변화과정을 통해서도 잘 알수 있다.

민요 《아리랑》은 19세기 중엽부터 전국에 널리 보급되는 과정에 수많은 변종을 낳았는데 20세기에 들어와 선률양식에서 일련의 변화들이 일어나면서 점차 전국적인 민요로 발전하였다.

1914년에 《조선속곡집》에 수록된 악보와 그 이후시기의 악보를 대비고찰하면 그 선률양식의 변화발전과정을 상세히 알수 있다.

1914년의 《아리랑》곡조를 보면 선률흐름이 단조로우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근대민요다운 맛을 찾아볼수 있다.

종전의 다른 《아리랑》노래들과 달리 《도》평조를 조식적기초로 하여 종지투의 정서적완결감을 주고있으며 선률발전의 고조점이 뚜렷해지고 지역적색채도 그리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곡조전반을 볼 때 선률적발전이나 정서적측면에서 종래민요의 세계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흔적들도 보인다.

1920년대 중엽에 이르러 《아리랑》은 가사에 새로운 시대적내용들을 반영하면서 선률양식이 보다 세련되였다.

《아리랑》은 1926년에 영화 《아리랑》의 주제가로 불리우면서부터 지역적국한성을 완전히 벗어나 전국적인 노래로 널리 보급되였다.

당시 경성군화녀학교에 다니다가 영화배우 겸 가수로 선발된 김련실(16살때)이 부른 《아리랑》은 1914년에 《조선속곡집》에 수록된 《아리랑》곡조와 선률음조적인 공통점을 많이 가지면서도 현대사람들의 미적감정에 잘 맞는 새로운 선률양식적면모를 보여준다. 뚜렷한 정서적내용을 안고있는 굴곡있는 선률가락들이 보충되여 종래의 선률형상과 질적으로 구별되는 새로운 음악적양상을 개척하고있으며 선률발전의 론리성도 더욱 강화되였다. 그래서 이 노래를 가리켜 《신아리랑》 또는 《신조아리랑》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물론 《신아리랑》은 1926년 당시 무성영화변사를 하면서 가요창작을 하던 김영환이 편작한 곡조이다.

그렇다고 하여 이 곡조를 신민요라고 할수는 없다. 그것은 당시 김영환이 전문작곡가도 아니였을뿐아니라 원민요즉 《본조아리랑》의 선률가락들을 현대감이 나게 다듬고 정리한것이 《신아리랑》이기때문이다. 그러므로 《본조아리랑》이 이 시기에 와서 인민창작적성격을 가지고 변화발전한것으로 보는것이 옳다.

민요 《아리랑》의 시대적변천과정은 구전민요의 선률양식이 초기의 근대음악적경향성으로부터 시작하여 점차 질적공고성을 띠면서 《신민요풍》으로 발전하여왔다는것을 뚜렷이 보여준다.

《신고산타령》, 《아리랑》을 비롯한 인민창작민요들에서 형성발전하여온 현대민요적인 선률양식적특성들은 그자체로서는 신민요를 발생시킨 기본요인으로 되지는 않으나 그것이 직업적인 작곡가들에 의한 신민요창작의 음악양식적바탕을 마련하는데 직접적인 작용을 한것으로 하여 음악사상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계몽기가요의 다른 종류들과 마찬가지로 신민요도 자기의 발생기를 가지고있다.

음악전문가들에 의한 가요창작에서 민요조에 가까운 곡조를 작곡하려는 경향은 1920년대의 동요와 예술가요작곡가들속에서부터 나타났다.

1920년대 말엽에 창작된 안기영의 동요 《그리운 강남》, 홍란파의 예술가요 《봄처녀》, 《금강에 살으리랏다》 등이 그 례곡들이다. 이 노래들은 다른 동요곡들이나 예술가요곡조에 비하여 민요적인 맛이 짙게 안겨온다. 그러나 이 노래들은 어디까지나 동요, 예술가요라는 해당 가요종류속에서 민요적인 정서를 돋군 곡들일뿐이다.

신민요는 류행가라고 불리운 노래들속에서 갈라져나온 가요형식이다.

1927년에 나온 《오동나무》(작사 리규송, 작곡 강운석)는 창작년대에 대한 기록으로 전해오는 최초의 신민요라고 할수 있다. 나라잃은 민족의 설음을 담으면서도 그것을 비애적으로가 아니라 밝고 유순한 민족적인 선률가락으로 정서깊이 노래한 곡조에서는 신민요적인 맛이 진하게 안겨온다.

그러나 그 당시 이 노래는 신민요가 독자적인 가요종류로 구분돼있지 않았던것으로 하여 류행가의 모자를 쓰고 대중가요속에 뒤섞여있었다. 《오동나무》는 그후 1932년에 연극배우 겸 막간가수, 방송음악가수로 있던 강석연의 가창으로 《콜럼비아》레코드에 취입되여 보급되면서 신민요로 구분되게 되였다.

1930년대에 들어와 문호월 작곡인 《노들강변》이 나와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으나 당시 이 곡도 가요곡으로 쓴것이 아니라 무용곡으로 작곡한 노래였다. 그때 문호월은 옥명화라는 무용가로부터 무용곡을 작곡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노들강변》을 지어주었는데 옥명화가 준비한 《신작무용발표회》가 일제경찰의 금지령으로 무산되는 바람에 그 곡조도 인차 빛을 보지 못하고 묻혀있게 되였다.

그후 1933년에 이르러서야 《오케》레코드회사 창설자인 리철이 자기 회사의 첫 취입곡으로 《노들강변》(작사 신불출)을 실은 소리판을 제작판매함으로써 이 노래가 사람들속에 널리 알려지게 되였다. 하지만 취입당시에도 《노들강변》에는 신민요라는 가요이름이 정식 붙지 못하고 류행가라는 표제가 붙어있었다.

그 당시까지 새로 나온 계몽기가요종류가 동요, 예술가요외에 더 구분되지 않았으므로 대중가요나 신민요가 독자적인 가요이름을 가지지 못하고 류행가라는 모자를 다같이 쓰고있었던것이다. 이러한 사정은 1932년경에 소리판으로 취입발매된 민요조의 노래들인 《앞강물》(작사 김릉인, 작곡 문호월), 《방아타령》(작사 김동환, 작곡 안기영), 《삼천리강산 에라 좋구나》(작사, 작곡 전수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신민요는 1933년에 류행가속에서 갈라져나와 신민요라는 독자적인 가요이름을 가지면서부터 뚜렷한 선률양식적면모를 드러내며 자기 발전의 활성기를 맞게 되였다.

당시 신민요라는 말이 나오게 된것은 작곡가 리면상이 지은 《꽃을 잡고》가 계기로 되였다.

그때 리면상은 이 노래를 민요가수 선우일선의 창법에 맞게 작곡하여 레코드취입에 넘기면서 민요라고 표제를 달았는데 동료작곡가들로부터 《작곡가의 창작물을 어떻게 민요라고 할수 있는가.》 하는 의견을 받게 되였다. 그리하여 전통적인 구전민요와 새로 창작하는 민요형식의 노래를 구분하기 위해 새롭다는 《신》자를 달아 《신민요》라고 부르자는 안을 내놓았는데 모두의 일치한 지지를 받았다.

이때부터 민요형식으로 창작한 노래들이 취입되는 소리판들에 신민요라는 용어가 쓰이기 시작하였으며 이와 더불어 대중가요(당시 류행가라고 불렀다.)와 신민요가 각각 독자적인 가요종류들로 구분되여 해방전 가요창작의 기본령역으로 등장하게 되였던것이다.

그러므로 신민요의 발생기는 1920년대 후반기부터 1933년까지의 기간으로, 신민요의 발전기는 그것이 전통적인 민요에서 갈라져나온 1933년경부터 1940년대초까지의 기간으로 구분하여보게 된다.

1930년대 전반기부터 새로 자라난 작곡가들속에서 신민요창작이 활발해지게 된것은 일제의 민족음악말살책동과 퇴페적인 음악의 침습에 맞서 민족적인것을 지켜내고 발전시키려고 한 그들의 진보적인 창작경향과 떼여놓고 볼수 없다.

당시 우리 인민들속에서 민족의 넋을 살려나가도록 하는 문제는 시대의 절박한 문제로 제기되고있었다.

1930년대에 들어와 일제는 각종 레코드기업을 장려하면서 그를 통하여 퇴페적인 류행가들을 의도적으로 퍼뜨리기에 피눈이 되여 날뛰였다. 이로 하여 퇴페적인 류행가들이 사회일반에 범람하면서 우리 인민의 민족의식, 계급의식을 마비시키고있었다.

다른 한편 일제의 악랄한 민족음악말살책동으로 하여 전통적인 민족음악은 질식상태에 처해있었다.

이러한 실태는 우리 인민의 민족성을 잃지 않게 하는데 도움이 되고 전통적인 민족음악을 고수발전시키는데 기여할수 있는 새로운 가요형식을 절실히 요구하였다. 이에 대하여 당시 한 출판물에서는 《새로운 민요와 새로운 가요를 지어서 우리의 우리다운 심정을 참으로 노래하며 함께 웃고 함께 울어야 할것을 절실히 깨달아야 하겠습니다.》라고 호소하기도 하였다.

신민요와 같은 새로운 가요형식의 출현은 당시 우리 가요예술분야의 실태와 관련하여서도 절실하게 제기되였다.

당시 가요분야에는 《봉선화》나 《방랑가》, 《황성옛터》와 같이 가요에 대한 일제의 감시와 탄압을 피하기 위해 애조적인 정서속에서 은유적수법으로 나라잃은 민족의 설음과 울분, 조국애를 반영한 비가류들이 주류를 이루고있었다.

그러나 한탄과 비애에 젖은 이런 비가적인 노래들만 가지고서는 당대 인민들의 미학정서적기호를 전면적으로 반영할수 없었으며 민족의 넋은 물론 음악의 고유한 전통을 지켜낼수 없었다.

하여 이 시기 류행가라고 불리운 대중가요들을 창작하던 진보적인 작곡가들속에서는 앞날에 대한 기대와 념원을 보다 밝고 생기있는 민족적인 선률형식에 담아 형상함으로써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민족의 넋을 심어주려는 적극적인 창작의도를 가지게 되였던것이다.

이에 대하여 대표적인 신민요작곡가의 한사람이였던 리면상이 남긴 창작수기가 뚜렷이 보여준다.

《나라를 빼앗긴탓으로 하여 민족의 존엄이 무참히 짓밟히던 그때에는 향토애나 조국애를 노래한 애국적가요들이 일제총독부 학무국검열계와 경찰의 탄압대상이 되였다.

가요에 대한 일제의 탄압이 우심해짐에 따라 나는 주로 민요조의 노래를 창작하였다. 그것은 일제가 부식시키는 퇴페적인 가요의 범람속에서 우리 민족의 고유한 선률을 현대적미감에 맞게 살려나가기 위해서였다. …

대부분의 가요들이 비탄에 젖어 생기를 잃고있을 때 나는 밝고 명랑한 음조로 조선의 넋을 노래해보려고 애썼다. 나라잃은 민족의 슬픔을 명랑한 선률로 이겨나가고싶은 생각에서였다.》

당시 새로 자라난 작곡가들속에서 발현된 이러한 애국심과 창조적적극성에 의하여 조선민요의 우수한 선률형식을 변화된 시대의 요구와 인민들의 미적감정에 맞게 계승발전시킨 새로운 민족가요형식인 신민요가 창조되게 되였던것이다.

신민요는 1933년경부터 많은 작곡가들이 민요형식을 계승한 노래창작에 적극 나서면서부터 활발히 창작보급되기 시작하였으며 1930년대 중엽부터 1940년까지를 자기 발전의 전성기로 기록하였다.

이 기간 신민요는 량적으로 많이 나왔을뿐아니라 양상적으로 다양하게 창작되였으며 민족적선률의 고유한 특성을 계승하면서도 현대적요구를 구현하여 새로운 면모를 갖춘 창작민요다운 독자적인 선률양식을 확립하였다.

그리고 광범한 인민들속에 급속히 보급되면서 계몽기가요중에서도 인민들이 가장 좋아하는 대중적인 노래로 그들의 환영을 받았다. 이에 대해서는 1936년에 잡지사의 기자가 레코드판매업자와 나눈 회견담에서 1935년에 가장 많이 팔린 레코드는 《조선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좋아하는 조선적인 가사에 민요곡》을 붙인 노래를 취입한것이였다고 하면서 《신춘(새해)에도 …가장 참신한 민요가 류행할것이다.》(잡지 《삼천리》 1936년 2호)라고 한 사실을 통하여 잘 알수 있다.

이처럼 민족성이 짙은 신민요의 급속한 보급발전에 깊은 우려를 느낀 일제는 1930년대말부터 적지 않은 신민요작품들에 《금곡령》을 내리고 가창보급을 금지시켰다. 1940년대에 들어서서는 침략전쟁확대와 병행하여 군가만 부를것을 강요하면서 가요탄압에 더욱 광분한것으로 하여 다른 계몽기가요들과 마찬가지로 신민요도 그 창작보급이 점차 쇠퇴해졌다.

그러면 대표적인 신민요창작가, 가수들의 활동과 결부하여 신민요의 보급발전정형을 자세히 보기로 한다.

 

◎ 대표적인 신민요작곡가들

 

누구보다 많은 신민요곡들을 작곡한 리면상

 

김일성상계관인이며 인민예술가인 리면상(1908-1989년)은 해방전부터 신민요창작보급에 적극적으로 기여한 오랜 작곡가이다.

함경남도 함흥태생인 리면상은 함흥사범학교를 졸업(1925년)한 후 원산제2보통학교 교원을 하면서 동요창작을 시작하였다. 1929년 11월 광주학생사건에 호응해나선 원산청년학생들의 련대시위에 동조한 《죄》로 교단에서 쫓겨난 후 그 이듬해 일본에 건너가 고학으로 음악공부를 하였다.

1933년 봄에 귀국한 후 《포리돌》, 《빅터》레코드회사 전속작곡가로 있으면서 진보적인 가요창작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처음부터 민족적정서가 짙은 민요형식의 노래창작을 지향하여 《꽃을 잡고》를 첫 작품으로 낸 후 신민요창작을 줄기차게 벌려 《뻐꾹새》(일명 《포곡성》), 《신닐리리》, 《어부가》, 《날라리바람》을 비롯한 수십여편의 신민요들을 창작하여 주로 왕수복, 선우일선의 노래로 레코드에 취입하여 보급하였다. 리면상은 이러한 신민요들을 창작하기 위해 황해도, 평안도를 비롯한 전국각지를 다니며 민요들을 수집채보하여 연구하면서 창작의 밑천으로 삼았다고 한다.

리면상이 창작한 신민요들은 대표작인 《뻐꾹새》를 통해 알수 있듯이 밝고 서정적이며 민족적흥취가 강하게 흐르는것이 특징적이다.

리면상은 신민요외에 《연자방아》, 《진주라 천리길》, 《청춘을 찾아서》를 비롯한 여러편의 대중가요들을 창작하였으며 1930년대말부터 반도가극단 작곡가로 활동하면서 가극 《춘향전》, 《금강산팔선녀》의 노래들을 작곡하기도 하였다.

해방후에 그는 다년간 조선음악가동맹 중앙위원회 위원장으로 사업하면서 《빛나는 조국》, 《조국보위의 노래》, 《문경고개》, 《내 고향의 정든 집》, 《압록강 2천리》, 《눈이 내린다》를 비롯한 명가요들과 가극음악들을 수많이 창작하여 주체음악예술발전에 적극 기여하였다.

 

신민요 《노들강변》의 작곡가 문호월

 

문호월(1905-1949년)은 경상북도 김천에서 태여나 서울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무성영화반주단 바이올린연주가로 음악생활을 시작하였다.

이 나날에 그는 민요에 관심을 가지고 서도, 경기지방민요들을 수집하여 연구하면서 작곡기술을 터득하였으며 순회악단에서의 연주와 편곡을 맡아하면서 작곡가로 성장하였다.

그는 1930년에 무용가 옥명화의 부탁으로 민족적정서가 짙은 무용곡을 지었는데 그것이 후날 신불출의 가사와 결합되여 《노들강변》으로 불리운 신민요였다. 이 노래는 처음에 《오케》레코드회사를 꾸리던 리철에 의해 소리판시험곡으로 쓰이다가 1933년에 박부용의 노래로 레코드에 취입되여 보급되면서 사람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으며 그후 라지오방송과 순회극단의 무대들에서도 많이 불리웠다.

이 노래로 하여 문호월은 재능있는 작곡가로 널리 알려지게 되였으며 《오케》레코드회사 전속작곡가로 입직하여 신민요와 대중가요들을 창작하였다.

그가 작곡한 신민요들은 《노들강변》외에 리은파가 부른 《개나리》, 《앞강물》, 《덩더꿍타령》, 《지는 석양》, 리란영이 부른 《봄아가씨》, 《봄맞이》 등이 전해온다.

문호월은 이 시기 대중가요창작에도 힘을 기울여 《고적》, 《불사조》, 《관서천리》, 《청춘해협》, 《인생극장》, 《천리타향》을 비롯한 여러편의 대중가요들을 남기였다.

 

《조선팔경가》를 작곡한 형석기

 

형석기(1911-?)의 창작활동정형은 구체적으로 전해오지는 않으나 그의 이름은 신민요 《조선팔경가》, 《맹꽁이타령》과 더불어 음악사에 깊이 새겨져있다.

신민요 《조선팔경가》는 그가 1935년 봄에 경주지방에 갔다가 동해에서 솟아오르는 아침해가 석굴암을 비치면서 신비경을 이루는 아름다운 자연경개를 보고 감흥을 받아 작곡한것이라고 한다.

그는 이곳에서 선률초고를 쓰고 후에 친우였던 리면상과 함께 곡을 다듬어 민족적흥취가 넘치는 선률형상으로 완성하였는데 그 과정에 당시 신민요작곡가들의 열렬한 조국애와 창작적열정을 보여주는 가슴뜨거운 일화를 낳기도 하였다.

당시 악극단의 연주배우 겸 무대감독으로 있던 왕평이 가사를 쓴 이 노래는 처음에 선우일선의 노래로 레코드에 취입되여 보급되였으며 대중의 요구에 의해 1939년초에 재취입되여 보급되면서 사람들의 심금을 울려주었다.

일제의 민족말살책동이 날로 우심해지던 때에 《조선》이란 이름을 긍지높이 부르면서 유구한 력사와 찬란한 문화로 이름높은 조국의 아름다운 자연경개를 밝고 락천적인 민족적선률에 담아 례찬한 이 노래는 망국의 한이 맺힌 겨레의 가슴에 조국과 민족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을 후련하게 안겨주었다.

형석기가 작곡한 《맹꽁이타령》(작사 리부풍)도 님을 그리는 녀인의 애끓는 마음을 애수적이 아니라 약동적인 장단과 특색있는 선률가락에 담아 노래한 작품이였다.

 

《꼴망태목동》을 작곡한 김룡환

 

김룡환(1909-1949년)은 강원도 원산태생으로서 원산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원산의 어느 한 극단에서 막간가수로 음악생활을 시작하였다. 1930년대초부터 《포리돌》레코드회사 가수 겸 작곡가로 활동하면서 신민요와 대중가요들을 창작하였다. 필명으로 조자룡, 김영파, 김탄포라는 이름을 썼다.

김룡환의 신민요창작에서 주목되는 점은 작품들의 주제와 정서적성격이 다양하고 특색있는것이다.

그가 작곡한 《릉라도타령》(《대동강실버들》)은 평양 릉라도의 아름다운 풍경을 밝고 명쾌하면서도 장단성이 풍부한 선률형상에 담아 흥겹게 노래하고있는가 하면 1932년에 작곡한 《조선타령》(왕수복과 혼성2중창으로 취입)은 유순하고 류창하면서도 서정적랑만이 흘러넘치는 선률형상으로 조국산천의 아름다움을 긍지높이 노래하고있다.

그는 근로인민들의 로동생활감정을 담은 노래창작에서도 특기가 있었다. 그가 발굴하여 양성한 신민요가수 리화자가 불러 취입한 《꼴망태목동》에서는 하루일을 끝내고 소를 몰고 집으로 돌아가는 목동의 저녁길 정서를 흥겨우면서도 건드러진 흥취가 넘치는 구성진 선률가락으로 명랑하게 노래하였는가 하면 《노다지타령》에서는 금광에서 금을 캐는 품팔이로동자들의 로동생활정서를 전통적인 로동민요의 선률적특성으로 되는 먹이고 받는 선률형식을 창조적으로 적용하여 생동하게 노래하고있다.

김룡환은 이밖에 《뽕따러 가세》, 《님전화풀이》, 《어머님전상서》를 비롯한 여러편의 신민요곡들을 작곡하였다.

그는 해방전시기에 대중가요창작에도 힘을 기울여 《락화류수호텔》, 《두만강배사공》, 《초가삼간》을 비롯한 여러편의 대중가요들을 작곡하였다.

 

활기와 랑만이 넘치는 신민요들을 작곡한 전기현

 

전기현은 《포리돌》레코드회사의 창설초기부터 전속작곡가로 있으면서 신민요와 대중가요들을 작곡하였는데 출생지나 경력은 전해오는것이 없다.

그가 작곡한 신민요의 대표작들은 《조선타령》(작사 유도순)과 《백두산을 바라보고》이다.

《콜럼비아》레코드회사에로 옮겨간 직후인 1934년에 작곡한 《조선타령》은 다른 신민요곡들과는 달리 활기있고 박력있는 선률가락으로 조선의 기상과 자랑을 격조높이 노래한 신민요작품이다. 조종의 산 백두산의 정기가 뻗쳐간 조국산천의 아름다운 전경을 담은 《조선타령》은 일제침략자들의 야수적인 탄압과 억압속에서도 꺾일줄 모르는 조선의 기상을 정서적앙양이 흘러넘치는 선률형상으로 긍지높이 노래한것으로 하여 사람들에게 큰 감흥을 주었다.

그가 작곡한 노래들은 민요적이면서도 호탕하고 활기있는 랑만적인 성격이 강한것이 특징인데 이 노래들이 항상 강홍식의 우렁차고 씨원씨원한 남성적인 목소리로 형상됨으로써 더욱 절찬을 받았다.

전기현은 해방전시기 신민요들외에도 대중가요 《칠석날》, 《국경의 부두》, 《비오는 해관》, 《일자일루》 등을 작곡하였다.

우에 소개한 작곡가들외에도 민족적정서가 짙은 신민요들을 창작하여 인민들에게 민족의 넋을 심어주려고 노력한 작곡가들이 적지 않았다.

대중가요창작으로 이름난 전수린, 김교성, 김준영, 리봉룡, 리재호도 신민요창작에서 한몫을 한 작곡가들이다.

대중가요 《찔레꽃》의 작곡가 김교성은 신민요 《능수버들》, 《피리소리》, 《아리랑고개》(《아리랑랑랑》)를 비롯한 신민요들을 많이 창작하였다.

그중 《능수버들》은 서도민요의 음조에 기초하여 씌여진 노래로서 당대 인민들의 가슴속에 간직된 행복한 생활에 대한 동경과 념원을 밝고 우아하면서도 사색적인 정서로 일관된 선률에 담아 정서깊이 형상한 작품인것으로 하여 인민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가 작곡한 《아리랑고개》도 해방의 봄을 학수고대하던 인민들의 지향과 념원을 밝고 발랄한 선률형상에 담은 노래였다.

대중가요 《홍도야 울지 말아》의 작곡가 김준영은 《처녀총각》, 《먼동이 터온다》와 같은 밝고 명랑한 정서를 가진 신민요들을 작곡하였다.

신민요 《처녀총각》은 새봄을 맞이한 처녀총각에 대한 형상을 통하여 해방의 봄을 그리는 인민들의 심리세계를 민족적정서가 흘러넘치는 생기있고 명랑한 선률에 담아 노래한것으로 하여 각계층 인민들속에서 널리 불리우며 밝아올 앞날에 대한 희망을 안겨주었다.

당시 이 노래가 광범한 대중속에서 즐겨불리운데 대하여 잡지 《조광》 1941년 5호에서는 일제의 군국주의를 설교하는 군가류의 류행가들이 범람하는 현실을 개탄하면서

《잠간 옛날을 돌아보면 <오너라 동무야 강산에 다시 되돌아 꽃이 피고>란 봄노래가 중학생간에 류행된 때도 있었고 <봄이 왔네 봄이 와 숫처녀의 가슴에도…>의 <처녀총각>이 오륙세 어린이들 입에까지 올랐다.》고 소개하였다.

대중가요 《황성옛터》의 작곡가 전수린은 신민요들인 《삼천리강산 에라 좋구나》, 《님맞이 가자》, 《날 다려가소》, 《요핑게 조핑게》를 내놓았으며 대중가요 《나그네설음》을 지었던 리재호는 신민요 《락랑공주》, 《주릿대치마》를, 대중가요 《락화류수》의 작곡가 리봉룡은 신민요 《약산의 진달래》, 《신농부가》를 작곡하였다.

이들외 정사인(리왕직군악대 플류트연주가출신)은 신민요 《농촌사절가》(해방후 《어화 우리 농민들아》로 불리움.)를, 김면균은 신민요 《봄맞이 가자》를 작곡하였다.

 

◎ 대표적인 신민요가수들

 

우렁찬 목소리로 신민요를 잘 부른 강홍식

 

강홍식(1902-1971년)은 해방전시기 남성가수로서는 유일하게 신민요를 불러 보급한 대표적인 신민요가수이며 연극 및 영화인이기도 하였다.

평양에서 태여난 그는 평양고등보통학교에 다니다가 고등반 2학년때에 중퇴하였다. 좋은 목소리를 타고났던 그는 그때 성악을 전공하려는 꿈을 안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처음에는 일본 오페라극단 견습생 겸 심부름군을 하면서 성악기초를 닦았으며 그후 도꾜영화촬영소에 들어가 배우생활을 하다가 차디찬 일본땅의 현실에 실망을 느끼고 1925년에 조국으로 돌아왔다.

귀국후 그는 무성영화 《장한몽》(1925년), 《먼동이 틀 때》(1927년)에 출연하고 그후 연극 《물감장사》(박영호 작), 《개화전야》(림선규 작), 번역극들인 《뺨맞은 그 자식》, 《돌아오신 아버지》 등에 출연하였다.

1930년대에 그는 영화 및 연극들에 출연하는 한편 신민요가창의 길에 나서 신민요들을 우렁차고 시원스러운 남성적인 목소리로 잘 불러 사람들의 절찬을 받았으며 《만년불패의 신민요가수》(잡지 《삼천리》 1938년 8호)라고 불리웠다.

이 시기 그가 부른 신민요들은 《먼동이 터온다》, 《처녀총각》, 《조선타령》, 《풍년타령》, 《청춘타령》, 《배따라기》, 《봄총각 봄처녀》, 《열여덟시약시》 등이다.

이중에서도 《조선타령》(작사 유도순, 작곡 전기현)은 그의 우렁찬 목소리로 레코드에 취입되여 전국각지에 보급되면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에 대하여 잡지 《삼천리》 1935년 11호에서는 《강홍식씨가 부른 <조선타령>》이란 제목아래 《…강홍식씨의 그 우렁차고 활기있는 남성적인 목소리에다가 조금이라도 남에게 칭찬받겠다고 그 목청을 내인것 없는 아주 씩씩한 남자의 노래를 유감없이 발휘한 명곡절창인데 이것이 나오자 반도가 진동해버렸다. 지금 시내 모녀학교에서도 배우고있는것은 강홍식씨의 <조선타령>뿐인것이다. 그 구절구절, 마디마디 넘어갈 때에 어깨춤이 절로 나며 우렁찬 목소리로 청산류수와 같이 씨원씨원하게 부른 노래는 과연 힘을 주고 소생을 줄 노래의 하나이다.》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그후에도 신민요 《열여덟시약시》를 잘 불렀는데 이에 대해 당시 출판물에서는 《만년불패의 신민요가수 강홍식군의 <열여덟시약시>가 요사이 매우 좋은 성적을 가지고 팔린다.》(잡지 《삼천리》 1938년 8호)고 소개하였다.

강홍식은 해방후 황해남도 신천지구예술선전공작대 책임자, 그후 영화인동맹 초대위원장을 하면서 예술영화 《내 고향》(1948년)을 비롯한 여러편의 영화들을 연출 및 편집하였으며 예술영화 《최학신의 일가》에 리챠드목사역으로 직접 출연하기도 하였다.

 

신민요의 1인자로 불리운 선우일선

 

선우일선(1919-1990년)은 12살때 평양공회당에서 열린 《동아일보》지국의 가요콩클 소년조에서 1등으로 당선된 후 평양가무양성소에 1년간 다녔으며 1933년에 왕평의 방조로 신민요 《꽃을 잡고》를 취입한 후부터 《포리돌》레코드회사 전속가수로 활동하였다.

선우일선은 왕수복과 함께 《포리돌》의 기둥가수로서 《조선팔경가》, 《능수버들》, 《신닐리리》, 《개나리》를 비롯하여 수십여편의 신민요들을 레코드에 취입하여 보급하였다. 그는 지내 얇지도 굵지도 않은 맑고 유순한 목소리에 독특한 형상적기교를 소유한것으로 하여 사람들의 찬사를 받았는데 그의 가창력에 대해 사람들은 《노을비낀 호수》라고 특징지어 평가하였다.

류행가수가 되기보다는 민족의 얼이 깃든 신민요를 많이 불러 겨레의 가슴속에 민족의 고유한 정서와 넋을 심어주려고 지향해나섰던 선우일선의 가창재능은 당시 출판물에서 《선우일선의 소리는 보통류행가로만 볼것이 아니라 조선의 정조를 발휘하는 우리 민요를 노래할 품위가 높은 목청…누구누구 하여도 조선민요로서 선우일선의 목청이 아니고는 도저히 표현할수 없는것》(잡지 《삼천리》 1935년 11호)이라고 하면서 《신민요의 선우일선은 각사(레코드회사)를 통해 제1인자로 될것이다.》(잡지 《삼천리》 1938년 8호)라고 평한것을 보아도 잘 알수 있다.

선우일선은 해방후 평양음악대학 성악학부 민족성악교원으로 사업하면서 재능있는 민요가수들을 수많이 육성하였다.

 

《조선의 꾀꼴새》로 불리운 왕수복

 

왕수복(1917-2003년)은 평양태생으로서 11살때인 1928년부터 평양가무양성소에서 민요, 가곡, 가사 등을 배웠다.

1933년에 《포리돌》레코드회사 전속가수로 입직한 후부터 《뻐꾹새》, 《봄맞이아리랑》, 《출범》, 《조선의 달》, 《어부사시가》를 비롯한 많은 신민요들을 불러 취입하였다.

왕수복은 1934년에 잡지 《삼천리》가 조직한 전조선인기가수투표에서 단연 1등을 함으로써 신민요와 더불어 《조선의 꾀꼴새》로 널리 알려졌다. 청아한 목소리와 풍부한 성량, 민족적정서가 짙은 창법에 기초하여 높은 예술적형상력으로 노래의 품위를 살려나가는 그의 독특한 가창재능을 두고 당대 사람들은 《설레이는 바다》라고 특징지어 평하였다.

그는 1930년대에 신민요외에 전통적인 민요들인 《룡강기나리》, 《서도아리랑》, 《긴아리랑》, 《닐리리야》, 《매화타령》들과 가곡, 가사작품들도 잘 불렀으며 《칠석날》, 《청춘을 찾아서》, 《인생의 봄》을 비롯한 대중가요들을 레코드취입하였다.

해방후 그는 국립교향악단, 조선중앙방송위원회 독창가수로 활동하면서 전통적인 민요들과 신민요, 공화국의 사회주의현실을 반영한 민요풍의 노래들을 많이 불렀으며 말년에는 윤이상음악연구소 명예가수로 있으면서 민요가수후비들을 육성하였다.

 

《요핑게 조핑게》를 잘 불러 이름을 날린 리은파

 

리은파는 평안남도 남포태생으로서 1930년대 후반기에 《오케》레코드회사 전속가수로 활동하였다.

그는 맑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문호월이 작곡한 신민요 《노들강변》, 《개나리》, 《앞강물》, 《덩더꿍타령》과 전수린의 《요핑게 조핑게》, 강윤석의 《오동나무》 등을 잘 불러 사람들의 화제에 올랐다.

리은파의 가창재능은 잡지 《삼천리》 1938년 8호에서 《리란영, 장세정 두 가수가 앞을 다투는 틈에 독자의 경지를 개척해나가는 가수로 신민요적속 리은파가 있다. 진남포(남포의 옛 지명)기생으로 <빅터>에서 발견해다가 <오케>에로 넘긴 가수이다. 아름다운 음성, 곱게 빼는 숨길-신민요의 명인임에 틀림이 없다. <요핑게 조핑게>라는 그의 신민요가 요새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팔리는것만 보아도 그의 세력을 알수 있다고 본다.》라고 평한것을 통하여 잘 알게 된다.

우에 소개한 가수들외에 신민요들을 부른 가수들을 보면 《포리돌》 및 《빅터》레코드회사 전속가수로 있으면서 《한양은 천리원정》, 《날 다려가소》 등을 부른 황금심, 《태평》레코드회사 전속가수로 있으며 《아리랑고개》, 《갈매기 쌍쌍》등을 부른 백란아, 《빅터》레코드회사 전속가수로서 《맹꽁이타령》, 《날라리바람》, 《왜 몰라주나요》, 《대보름달맞이》 등을 부른 박단마, 《오케》레코드회사 전속가수로서 《진달래시첩》, 《봄아가씨》 등을 부른 리란영 등이 있었다.

이상에서 1930년대에 레코드회사들을 중심으로 하여 활동하면서 신민요의 창작 및 보급에 기여한 음악가들에 대하여 소개하였다.

이들의 예술활동은 일제식민지통치하의 사회력사적조건에서 진행된것으로 하여 일련의 제한성을 가지고있지만 총체적으로 볼 때 애국적이며 진보적인 성격이 강하였다.

참다운 조국애와 민족적량심을 지닌 음악가들속에서 전개된 신민요창조활동은 일제의 온갖 탄압과 박해속에서도 전통적인 조선민요의 선률형식을 시대적요구에 맞게 더욱 발전풍부화시키고 전반적인 민족음악발전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을뿐아니라 비탄속에 살아가던 인민들의 가슴속에 민족의 넋을 심어주고 반일애국사상을 고취하는데 적지 않은 기여를 한 의로운 예술활동이였다. 바로 여기에 이들의 신민요창조활동이 가지는 진보성이 있고 애국적성격이 있는것이다.

 

21

일 화

《신민요》라는 용어의 유래

 

1933년 어느날 레코드회사의 전속작곡가로 있던 리면상의 방에서는 여러 작곡가들이 모여앉아 론쟁을 벌리고있었다.

론점으로 제기된것은 리면상이 작곡한 민요풍의 가요 《꽃을 잡고》를 두고 그 종류를 어떻게 규정하겠는가 하는 문제였다.

물론 《꽃을 잡고》가 창작되기 이전시기부터 새로 자라난 작곡가들속에서 민요형식을 본따서 지은 노래들이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당시 널리 류행되고있던 대중가요들을 류행가로 부르던 인식그대로 민요풍의 노래들도 류행가라는 명칭으로 부르고있었다.

이것은 작곡가 리면상에게 큰 의문을 주었다.

(왜 조선의 전통적인 옛 가락을 본따서 지은 민요풍의 노래들을 무작정 류행가라고 하는가? 류행가라고 하는 노래들과 조상전래의 민족적인 넋을 담은 민요풍의 노래들이야 곡조의 선률음조나 양상도 다르고 가수들의 창법까지도 엄연히 구별되지 않는가. 그래 작곡가들이 지은 노래를 민요라고 하면 안되는가.)

그리하여 리면상은 《꽃을 잡고》가사에 민요풍의 곡조를 붙여 선우일선의 창으로 레코드취입에 넘기면서 그 종류적명칭을 민요라고 버젓이 달아 내놓았던것인데 이것이 동료작곡가들속에서 론쟁을 일으킨것이다.

민요에 대한 일정한 식견을 가진것으로 알려진 김룡환이 먼저 의견을 내놓았다.

《면상군, 이것을 어떻게 민요라고 할수 있나. 이 노래야 작곡가 리면상의 창작품이 아닌가.》

그러자 곁에 앉았던 김교성이 풍채좋은 몸통을 뒤로 젖히며 주를 달았다.

《음, 하긴 작곡가의 창작품을 전통적인 민요가락들과 같은 그릇에 담을수야 없지.》

그럴만한 주견들을 가진 의견이였다.

그때까지만 하여도 민요라고 하면 그것이 인민들속에서 구두적인 방식으로 창작되고 이어져오는 과정에 수많은 가창자들의 재능이 보충된 인민적인 창조물이라는 생각이 일반적으로 지배하고있었던것이다. 그래서 민요라고 하면 조상전래의 옛 가락이라고만 생각하였으며 여기에 직업적인 작곡가의 개인창작품을 뒤섞을수 없다는 견해들이였다.

동료들의 의견을 음미하며 생각을 굴리던 리면상이 신중한 어조로 말하였다.

《자네들의 의견들도 일리는 있다고 보네. 그러나 작곡가의 창작물이라고 하여 민요라고 못할 법은 없다고 보네. 민요를 조상전래의 옛 가락에만 귀착시킨다면 민요라는것은 자기 발전의 일로가 없이 백년전에도 그 가락이요, 백년후에도 그 가락으로 남아있어야 한단 말인가. 아닐세, 민요도 시대의 변화와 함께 발전하는것이며 거기에 작곡가들이 지은 새로운 창작민요들도 보충되여 보다 풍부한 발전을 이룩하는게 아니겠나.》

잠자코 듣고있던 전기현이 머리를 끄덕이며 말하였다.

《허허, 역시 면상군다운 주장일세. 그렇게 보면 작곡가도 이 땅에 태를 묻은 백성이니 민요를 짓지 못할 법이야 없지. 그런데 사람들에게 정확한 인식을 주자면 무슨 구별은 줘야 할것 같구만.》

그때 리면상이 무릎을 치며 흥분된 어조로 말하였다.

《그렇지! 전통적인 구전민요와는 다른 새로운 민요라는 뜻에서 <새 신>자를 덧붙여 신민요라고 하면 어떻겠나?》

《그게 좋겠네. 신문화운동의 추세에도 어울리는 용어일세.》

모두들 이구동성으로 적합한 용어라고 찬동해나섰다.

그리하여 《포리돌》레코드회사에서 제작한 소리판에 처음으로 신민요라는 새로운 용어가 붙기 시작하였고 그후 다른 레코드회사들에서도 이것을 본따 새로 창작한 민요풍의 노래들에다가 신민요라는 명칭을 달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신민요라는 말은 오늘까지 전해오면서 조선민요발전사적견지에서 볼 때 1920년대 말엽부터 1940년대 중엽(해방전)까지의 기간에 창작보급된 직업적인 작곡가들이 지은 창작민요에 대한 력사적개념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전통적인 조선민요의 선률형식을 시대의 요구와 미감에 맞게 계승발전시킨 현대화된 민요양식에 대한 음악양식적인 개념으로 리해하고 학술적으로도 약속되게 되였던것이다.

 

22

일 화

신민요 《노들강변》에 깃든 이야기

 

우리 인민이 일제의 발굽아래 력사에 류례없는 민족수난을 당하던 시기에 모든 불행과 고통의 화근인 일제침략자들에 대한 분노와 울분의 감정을 은유적으로 담아 노래한 《노들강변》, 비탄에 젖은 곡조가 아니라 민족적정서가 진하게 풍기는 유순하고 흥겨운 선률가락으로 수난의 현실을 부정해나선듯싶은 이 노래가 창작된데는 작곡가 문호월의 창작적지향을 보여주는 사연이 있었다.

노들강변이라는 말은 버들과에 속하는 크고작은 나무들이 자라는 버들방천의 강기슭을 의미한다. 예로부터 노들강변을 노들갯변이라고 불렀는데 이러한 강변의 나루를 노들나루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노들이라는 말은 지금에 와서는 쓰이지 않지만 옛날에는 낫버들의 준말로도 통하였다.

낫버들이란 수양버드나무와 같은 큰 버드나무가 아니라 가지를 많이 치는 키버들(고리버들)을 가리켜 부른 말이다. 이 버들가지들은 키와 바구니를 비롯한 가정생활도구들을 만들기에 좋은 재료였으므로 사람들이 낫으로 베여다가 쓰군 하였는데 낫으로 자른 키낮은 버들가지밑에는 다시 새로운 가지가 솟아나군 하였다.

이것을 가리켜 민간에서는 낫으로 벤 버들이라는 뜻에서 낫버들이라고 불러왔다.

이렇게 보면 노들강변이란 말은 이런 낫버들(키버들)이 많은 강변을 이르는 말이라고도 볼수 있다.

봄철이면 나루터주변에 크고작은 버들이 무성하게 자랐는데 키높은 수양버드나무와 키낮은 낫버들이 대조적으로 한벌 덮여 강변의 풍치를 돋구고있었다.

신민요 《노들강변》의 형상의 중심에 놓여있는 수양버드나무와 낫버들, 고향을 떠난 수많은 사람들과 애국자들의 울분과 눈물의 자욱들이 찍혀있는 로량진나루에 깃든 사연은 작곡가의 창작을 추동케 한 요인으로 되였다.

어느날 작곡가 문호월은 친구의 병문안을 위해 이 나루터를 리용하게 되였다. 돌아오는 길에 나루터에 이르니 살길을 찾아 고향을 떠나는듯 한 한 류랑민의 가족이 배를 기다리고있었다. 올망졸망한 어린아이들과 함께 세간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도 어설픈 괴나리보짐을 지고 서있는 량주의 얼굴에는 수심과 절망의 빛이 무겁게 드리워져있었다.

일제놈들에게 나라를 빼앗긴 민족의 비참한 모습과 도탄에 빠진 현실을 깨우쳐주는듯 한 류랑민가정의 눈물겨운 정상은 작곡가 문호월의 눈뿌리를 아프게 찔렀다.

얼른 눈길을 돌려 강변을 보느라니 무연하게 펼쳐진 강기슭에서는 휘늘어진 수양버드나무가지들이 봄바람에 휘적이며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싶은 류다른 정서를 풍기고있었고 그밑에선 《이것도 봄인가?》고 항변이라도 하듯 밑둥까지 잘리운 낫버들들이 애처로운 모습을 드러내보이고있었다.

강변에 비낀 이러한 현실을 아는듯마는듯 푸르른 강물은 유유히 흐르고있었다.

앞길을 기약할수 없는 운명의 쪽배에 오르듯 우는 아이들을 달래며 배에 오른 류랑민가족과 함께 강을 건느는 문호월의 가슴속에서는 억제 못할 창작적충동이 끓어올랐다.

봄바람타고 휘적이는 수양버들과 대조를 이루며 바람에 떠는 낫버들의 애처로운 자태들, 한많은 사연의 증견자인양 무수한 발자욱이 찍힌 백사장과 유유히 흐르는 푸른 물…

나루배에서 내려 오선지와 연필을 꺼내든 작곡가의 머리속에는 운치나는 선률가락이 무르익고있었다.

노들강변에 쌓이고쌓인 한많은 사연을 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슬픔과 비애에만 젖고싶지 않은 작곡가의 사상감정과 창작적지향은 그대로 악보에 옮겨졌다.

선률을 적은 악보를 그대로 들고 온몸을 사로잡는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채 나루터주변의 《목로집》(자그마한 술집)으로 걸음을 옮긴 문호월은 여기서 당시 화술배우로 있던 신불출을 만나게 되였다.

작곡가에게서 금방 지은 선률과 창작의 사연을 들은 신불출은 그 자리에서 가사를 적어나갔다. 작곡가의 창작적흥분은 그대로 작사자에게 옮겨져 억제 못할 창작적충동을 준듯싶었다.

강변의 봄버들을 두고 덧없이 흐르는 세월과 인생을 개탄하기도 하고 백사장모래에 찍힌 자욱들을 두고 세상풍파를 겪어온 나날들을 묻기도 하며 나라잃은 슬픔과 쌓이고쌓인 원한을 싣고 두둥실 흘러가라고 푸른 물에 하소하기도 한다.

그토록 아름다웠던 자연경개를 두고서도 분노와 울분의 감정을 담을수밖에 없었던것이 그 시대가 가져온 필연이였고 작사자의 가슴에서 떼여버릴수 없이 엉켜붙은 감정이였던것이다.

신민요 《노들강변》은 이렇게 되여 세상에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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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표적인 신민요 몇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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