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20년대-동요와 예술가요의 창작보급으로부터
계몽기가요는 흔히 동요(아동가요), 예술가요(서정가요)와 신민요 그리고 당대시기 류행가라고 불러온 대중가요로 분류된다.
이러한 가요종류들의 발생과 발전의 력사적과정을 놓고보면 일정한 순차와 특징으로 구분된다.
계몽기가요의 발생발전은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동요와 예술가요의 창작과 보급으로부터 시작되였다고 말할수 있다.
따라서 동요와 예술가요의 발생과 발전, 쇠퇴의 과정과 그 대표적창작가들의 활동에 대하여 먼저 보기로 한다.
○ 새로운 발전의 길에 들어선 동요
동요란 말그대로 어린이들을 위하여 만들어진 노래를 말한다.
동요는 원래 전통적인 민요들처럼 생활속에서 창작되여 입으로 오랜 세월 전하여온 어린이들의 노래로서 흔히 구전동요라고 하였다.
우리 나라에서 동요는 1920년대에 들어와 새로 자라난 직업적인 시인, 작곡가들에 의하여 활발하게 창작되면서부터 새로운 발전의 길을 걷게 되였다.
이 시기 동요창작이 활발하게 진행되게 된것은 다음의 세가지 요인으로 분석할수 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민족의 미래이며 희망인 어린이들에 대한 애국주의교양, 민족성배양문제가 민족의 장래운명과 관련된 중요한 사회적문제로 나서고있었던것과 관련되여있었다.
당시 일제가 악랄한 조선민족말살정책을 실시하면서 모든 학교들에서 강요한 일본식교육조치들과 퇴페적인 일본류행창가의 강압적인 보급은 조선어린이들의 순결한 넋부터 거세말살하여 동화시키려는 추악한 목적에서 출발한것이였다.
이러한 엄혹한 현실은 민족적량심을 간직한 애국적인 문화인들로 하여금 민족의 장래인 어린이들에게 민족의 넋과 조국애를 심어주어야 한다는 자각을 더욱 가다듬게 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당시 새로 자라난 첫 세대 작곡가의 한사람인 홍란파가 발표한 평론 《악단뒤에서》라는 글에서 《요즘 장안에서 열리는 어린이음악회에 가보면 술집에서 불러야 마땅할 노래를 어린이들이 부르는것을 볼 때 통탄하지 않을수 없다. 어린이들이 그런 노래를 부르는것은 어린이의 잘못이 아니라 그것을 가르친 어른들의 잘못이다. … 이런 음악회를 열어 자라나는 어린이들의 마음을 좀먹게 하는것은 어린이들의 장래를 해치게 할 우려가 있다.》(《동아일보》 1924년 7월 7일)라고 한것과 음악평론가 홍종인이 《이제 누구나 한번 가두에 나간다면 거기에서 저속한 류행가의 범람을 엿볼것이다. … 때로는 중학교나 전문학교 응원단의 뺀드(취주악대)가 운동장의 한모퉁이에서 그런 류의 곡을 천연스럽게 불고있다는것은 더구나 조선청년들이 뛰노는 운동장을 모독하는 비참한 사실이라 할바이다. 싸우려는 남아의 기개를 문지르는 독소이다.》(《신동아》 1932년 11호)라고 한것을 통하여 잘 알수 있다.
이와 같이 당시 활동한 문예인들이 일제의 악랄한 민족말살책동으로부터 민족의 미래를 지키려는 애국심을 가지고 동요창작의 길에 적극 나섬으로써 우리 나라 음악사상 처음으로 동요가 직업적인 음악창작의 한 분야로 부각되게 되였다.
이 시기 동요창작이 활발하게 진행되게 된것은 다음으로 어린이들의 전통적인 노래형식인 구전동요의 우수한 선률형식을 계승발전시켜 시대적미감에 맞는 새로운 동요곡들을 창작하려는 진보적인 음악가들의 적극적인 창작경향과도 관련되여있다.
구전동요는 오랜 세월을 거쳐 어린이들의 소박한 동심과 다양한 생활정서를 반영하여온 대표적인 민족가요형식의 하나이다.
구전민요와 마찬가지로 인민창작적성격을 띠고 계승되여온 구전동요에는 당대의 시대적요구와 인민들의 지향과 념원, 견해들이 어린이들의 심리정서적특성에 맞게 반영되여있으며 음악형식도 민족적인 색채가 짙으면서도 어린이들의 소박한 동심과 정서에 맞게 매우 간결하고 통속적으로 되여있다.
당시 활동한 진보적인 음악가들은 이러한 전통적인 아동민요형식을 시대적미감에 맞게 계승발전시킴으로써 어린이들에게 민족적정서를 심어주는 동시에 우리 나라 민족가요의 종류와 형식을 보다 다양하고 풍부하게 발전시키려는 목적에서 동요창작의 길에 적극 나섰던것이다.
이 시기 동요창작이 활발하게 진행되게 된것은 또한 진보적인 가요들에 대한 일제의 탄압이 날로 우심해가고있던 조건에서 창작가들이 어린이들의 노래에 의도적인 관심을 돌리게 된것과도 관련되여있다.
일제는 우리 인민의 반일감정과 민족의식을 말살하기 위해 혈안이 되여 날뛰면서 대중속에 침투력이 강한 가요들에 대하여 특별한 주목을 돌리였다. 일제는 엄격한 검열제도와 세칙을 만들어놓고 진보적인 계몽가요들은 물론 새로 나오는 노래들과 전통적인 민요들에 대한 검열통제를 강화하면서 조금이라도 반일적요소나 민족적감정을 고취하는 내용이 엿보이면 《금곡령》을 내려 매장해버리군 하였다.
이러한 실정에서 진보적인 문예인들은 일제의 감시와 탄압의 눈길이 덜 미치는 어린이들의 노래에 겨레의 목소리를 담아 사람들에게 조국애와 민족애, 향토애를 심어주려는 의도에서 동요창작에 적극 나서게 되였던것이다.
해방전시기 동요의 발생발전은 크게 두단계로 나누어 고찰할수 있다.
첫 단계는 동요의 발생기로서 1920년대초부터 1920년대 중엽까지의 시기를 포괄하는데 한마디로 동요의 음악형식이 개척된 단계라고 할수 있다.
이 시기는 동요가 일정한 음악교육을 받은 사람들에 의하여 창작되면서 구전동요나 창가라고 불리운 계몽가요와 엄연히 구별되는 독자적인 가요형식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어가기 시작한 시기이다.
새로 창작된 동요는 오랜 세월 우리 어린이들속에서 불리워온 구전동요의 우수한 특성들을 계승하면서도 주제내용에서 어린이들에 대한 교양적성격을 보다 강화하고 음악적으로도 당대 사람들의 정서에 잘 맞는 현대적인 선률표현수단과 수법들을 적극 인입함으로써 음악전문가에 의한 창작동요로서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었다.
동요는 또한 그보다 앞서 나온 계몽가요가 일반적인 선동과 호소로 일관된 노래인데 비하여 어린이들의 현실생활과 보다 밀착되고 개성화된 노래였으며 음악형식에서도 계몽가요보다 민족적바탕에 철저히 의거한 보다 예술성이 풍부한 가요형식으로 등장하였다.
동요창작의 첫 시기에 나온 대표적인 노래들은 박태준의 《가을밤》(작사 윤복진, 1920년), 윤극영의 《반월가》(작사 윤극영, 1924년)와 《따오기》(작사 한동정, 1925년), 정순철의 《형제별》(작사 방정환)과 《짝자꿍》(작사 윤석중) 등이다.
둘째 단계는 동요의 발전기로서 1920년대 후반기부터 1930년대말에 이르는 기간을 포괄하는데 이 시기는 한마디로 동요창작과 보급의 전성기라고도 할수 있다.
이 기간에 홍란파, 안기영을 비롯한 많은 작곡가들이 동요창작에 적극 나서게 됨으로써 동요가 량적으로나 질적으로 더욱 풍부하게 발전하면서 계몽기가요의 한개 종류로서의 형식적면모를 기본적으로 갖추게 되였다.
동요는 1940년대에 들어와 일제가 태평양전쟁의 개시를 전후하여 제놈들의 군국주의정책을 찬양하는 이른바 애국가요, 국민가요와 일본군가만을 부를것을 강요하면서 진보적인 가요들에 대한 가창금지와 탄압소동을 강화함에 따라 그 창작과 보급이 중단되게 되였다.
해방전시기 진보적인 문예인들에 의한 동요창작과 보급은 다양한 방법과 형식으로 진행되였다.
우선 동요창작이 일정하게 조직화된 성격을 띠고 진행되였다.
조직화된 성격의 동요창작으로 처음 꼽게 되는것은 문학가 방정환이 주동이 되여 어린이문화운동을 제창하며 무은 색동회 성원들에 의한 동요창작이다.
1922년에 조직된 비상설적인 문화단체인 색동회에는 당시 일본 동양음악학교에 재학중이던 윤극영, 정순철 등의 음악가들이 회원으로 망라되여있었는데 이들이 주장한것은 《아름다운 꿈과 용기와 희망을 주는 동요를 창작하여 어린이들이 부르게 하자》는것이였다.
이들에 의한 동요창작은 당시 일부 사람들에 의해 창작되기 시작한 동요가 종래의 구전동요나 계몽창가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있던 때에 예술성이 풍부하고 시대적감정에도 잘 맞는 새로운 동요곡의 선률형식을 개척하는데 기여하였다고 할수 있다. 일부 연구자들이 윤극영의 동요 《반월가》를 창작동요의 효시라고 하는것은 이것을 실증해준다.
동요창작의 조직화된 형태로는 1927년에 아동문학가 김태오가 주동이 되여 조직한 조선동요협회에 의한 동요창작활동에서도 찾아보게 된다.
이 단체의 구성이나 구체적인 활동정형은 전해오지 않으나 김태오자신이 문학가이면서도 작곡을 겸하여 여러편의 동요작품들을 남긴것을 보면 당시 작곡가가 부족하였던 실정에서 이 단체가 진행한 창작활동의 일부 측면을 짐작할수 있다.
1920년대에 로동운동의 장성과 함께 결성된 카프의 문예인들의 문학예술활동중에 프로레타리아음악운동의 일환으로 동요창작이 진행된것은 그 조직적성격과 진보성에 있어서 새로운 측면을 보여준다.
카프는 당시 전문음악가들을 가지고있지 못한것으로 하여 이렇다할 음악작품들을 내놓지는 못하였으나 어린이들과 청소년학생들의 계급의식을 높여주기 위한데 깊은 관심을 가지고 카프의 리념을 반영한 동요들을 창작하여 보급하였다. 그 대표작들로 전해오는것이 로농동맹을 주제로 한 《대장간》을 비롯하여 《알롱아 달롱아》(작사 양우정, 작곡 김태원), 《거머리》(작사 손풍산, 작곡 리일권), 《편싸움놀이》(작사, 작곡 리향파) 등이다.
이 노래들의 창작가들인 김태원과 리일권은 염홍성, 리주홍 등과 함께 잡지 《음악과 시》 제1호의 편집발행에도 참가하고 무산계급을 위한 음악의 대중화를 제창하며 프로레타리아음악운동의 길에 나섰던 사람들이다.
카프의 문예인들에 의한 동요창작은 카프자체에 계급적으로 준비된 음악가들이 망라되지 못한것으로 하여 노래선률창작은 일정한 한계에 머물고말았으며 시인들에 의한 가사창작이 위주로 되였었다. 1930년대에 들어와 카프에 소속되였거나 그 영향을 받은 진보적인 시인들이 어린이들의 반일민족의식과 계급의식을 높여줄수 있는 경향성이 좋은 동요가사들을 많이 창작하여 내놓았는데 이것은 해방전 동요작품들의 사상주제적내용에서의 진보성과 우수성을 돋구는 중요요인의 하나로 되였다.
해방전시기 진보적음악가들에 의한 동요창작은 1920년대말부터 가요협회, 조선음악가협회와 같은 문예인단체들의 결성과 더불어 보다 조직화된 성격을 띠고 활발하게 전개되였다.
1920년대말까지만 하여도 우리 나라 음악계에는 전문작곡가라는 직업적인 창작분업이 뚜렷하게 형성되여있지 않았다. 일제의 식민지민족문화말살정책으로 하여 음악전문가들을 육성하는 변변한 교육기관조차 없었던 조건에서 외국에 가서 음악공부를 한 기악연주가나 성악가들중에서 작곡에 뜻을 둔 사람들이 간단한 가요정도의 음악창작에 나서게 되면서 비로소 작곡분야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1928년에 결성된 가요협회는 이러한 음악가, 시인들이 진보적인 가요창작을 지향하여 조직한 비상설적인 문예인단체의 하나였다.
이들이 목적하고 실행한것이 무엇인가에 대하여서는 그들중의 한사람인 안기영의 수기가 그대로 말해준다.
《내가 작곡을 시작한 동기는 이러하다. 1920년대말경부터 류행가라는것이 대두하기 시작하였다. 그때 문학예술에 종사하던 우리 젊은 전문가들은 이 류행가라는것이 건전한것이 못되고 퇴페적인것이라고 인정하였다. 그리하여 우리가 이 퇴페적인 류행가를 구축하기 위하여 <가요협회>라는 조직을 뭇고 론의하던 끝에 결정한것이 문인들은 가사를 지어 제공하고 음악인들은 거기에 곡을 붙여 선전하자는것이였다. 말하자면 건전한 내용의 좋은 노래를 만들어 민중들과 청소년, 어린이들에게 민족의 넋을 심어주자는것이였다. 그래서 나는 작곡가는 아니였지만 동요 4곡을 작곡하여 내놓았는데 그것이 바로 <그리운 강남>, <조선의 꽃>, <우리 아기날>, <뜻> 등이였다.》
가요협회에 뒤이어 1930년 2월에 결성된것이 조선음악가협회였다. 이 문예인단체는 가요협회에 비하여 그에 소속된 구성원의 규모와 지역적범위, 창작적지향과 방향에서 보다 확대된 비상설적인 조직체였다.
조선음악가협회는 현제명을 리사장으로, 홍란파를 상임리사로, 김영환, 안기영, 채동선 등을 리사로 하고 박태준, 김세형, 박원정, 리흥렬, 박태현을 비롯하여 많은 새 세대 음악가들을 망라한 규모가 큰 문예인단체였다. 당시 이 단체에 망라된 성원들은 보통학교로부터 전문학교에 이르는 각급 학교들에서 현직교원으로 활동한 사람들이 기본을 이루었다.
조선음악가협회의 간부진영만 보아도 초대리사장이라 할수 있는 현제명(1903-1960년. 경상남도 대구 출생)은 평양숭실중학교에 다니면서 성악과 피아노를 자습한 후 다른 나라에 가서 성악공부를 하고 1929년초부터 연희전문학교 음악교수를 하고있던 성악가출신의 음악가였다.
그리고 홍란파는 그 당시 중앙보육학교에서, 안기영은 리화녀자전문학교에서, 박태준은 대구 계성학교에서 음악교원을 하고있었다. 그외 채동선(1910-1953년. 도이췰란드 슈테르쉔음악원에서 바이올린과 작곡 전공, 1929년 귀국), 리흥렬(1931년에 일본 동경음악학교를 마치고 귀국하여 보통학교 교사를 함.) 등과 같이 외국에서 음악공부를 하고 갓 귀국한 음악가들과 비상설적인 악단들에서 연주생활을 하던 음악가들이 망라되여있었다.
조선음악가협회는 창작방향에서도 동요에만 머무르지 않고 서정성이 깊으면서도 예술적경지가 높은 새로운 가요형식(초기에 이것을 가곡 또는 예술가곡이라고 함.)을 개척하는데로 지향하였다.
이와 같이 1920년대초부터 여러가지 규모와 형태의 문예인단체들이 조직되여 동요창작활동을 적극 벌려나감으로써 일제식민지통치와 민족문화말살책동속에서도 동요가 어린이들은 물론 겨레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대중적인 가요형식의 하나로 발전할수 있게 되였다.
이 시기 동요창작은 일련의 조직체들에 망라되지 않은 개별적인 음악가들속에서도 활발하게 진행되였다.
그들중에는 사립학교나 보통학교들에서 학생들을 직접 가르치며 그들의 동심에 맞는 노래들을 지은 교원들도 있었고 여러 지방에 있던 교회의 어린이성가대를 지휘하며 동요를 창작하여 보급한 음악가들도 있었다. 이들에 의한 동요창작은 그 경위가 각이하였지만 민족의 미래이며 희망인 어린이들을 건전한 노래를 통하여 교양하려는 목적과 지향은 공통되여있었다.
해방전시기 동요는 그 보급 또한 여러가지 경로를 통하여 다양하게 진행되였다.
동요보급에서 가장 보편화된 형태는 각급 학교들과 마을의 야학(또는 노래방)을 통한 보급이였다. 당시 전국각지에 설립된 사립학교와 보통학교들은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이 늘 모여있는 합법적인 교육현장이였다. 때문에 진보적인 음악가들과 교원들은 일제경찰의 감시를 피해가며 교수와 과외시간의 여가들에 새로 나온 동요들을 배워주는것을 통하여 학생들에게 민족의식과 반일감정을 배양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런가 하면 학교에 갈 형편이 못되는 빈곤한 가정의 아이들이 다니던 마을의 야학이나 개별적인 음악가들이 아이들을 위하여 꾸린 노래방이 동요보급의 합법적인 장소들로 되였다.
1924년에 윤극영이 자기 집에 꾸린 노래방이 그 대표적인 실례라고 할수 있다. 당시 이국땅에 가서 음악공부를 하고 돌아온 윤극영은 동요보급을 위하여 자기 집 웃방을 《일성당》(한소리집이라는 뜻)이라고 이름짓고 마을의 어린이들을 모아 《다알리아회》라는 어린이노래회를 만들었으며 이 노래방에서 그들에게 동요를 배워주었다.
한편 이 시기 시대의 발전과 더불어 널리 보급되기 시작한 여러 악보집들과 레코드 및 유선방송과 같은 물질기술적수단들도 동요보급의 중요한 통로로 되였다.
이 시기에 5선보와 같은 발전된 음악기보법이 리용되면서 동요들도 여러가지 노래집으로 편찬되여 광범한 대중속에 널리 보급되게 되였다. 해방전시기에 새로 창작된 동요들이 노래집으로 편찬되여 보급된 정형을 년대순으로 요약해보면 아래와 같다.
1924년 《조선동요집》(장문사 발행)
1926년 《반달》 윤극영
1929년 《조선동요100곡집》상편 (연악회) 홍란파
《조선동요100곡집》은 1928년에 등사본으로 출판되였다가
후에 상, 하편으로 나누어 재판함.
1929년 《갈잎피리》(개성개벽사) 정순철
1929년 《중중때때중》 박태준
1929년 《안기영작곡집》 1권
1929년 《조선동요선집》 1집 (박문서관)
1931년 《양양범벅궁》 박태준
1931년 《안기영작곡집》 2권
1932년 《강신명99곡집》 * 동요와 기타 가요 포함
1932년 《윤석중동요집》(신구서림) * 윤석중은 작가임
1933년 《조선동요100곡집》하편 (연악회) 홍란파
1934년 《새야 새야 파랑새야》 김성태
1936년 《동요곡선300곡집》(농민생활사) 강신명
1936년 《안기영작곡집》 3권
1937년 《박태현동요집》 제1집
1938년 《조선동요작곡집》 리일래
1944년 《현대동요, 민요집》(대동인쇄서관)
이와 같이 새로 자라난 작곡가들이 창작한 동요곡들이 5선보로 수록한 노래집으로 출판되게 된것은 이 시기에 와서 창작동요가 종래의 구전동요와 같은 재창조과정이 없이 작곡가의 창작품그대로 보급되고 이어지게 될수 있게 한 중요요인으로 되였다.
동요는 또한 평양과 서울 등에 설립되여있던 유선방송국과 레코드회사들이 제작한 소리판들 그리고 여러 신문, 잡지들을 통해서도 널리 보급되였다.
유선방송을 통해 동요보급이 진행된 대표적인 실례로 1930년대에 평양에서 어린이성가대를 지휘하며 동요창작을 많이 한 강신명(1909-1985년)이 평양방송국을 통하여 동요보급을 적극 진행한것을 들수 있다.
서울에 있던 경성방송국도 동요보급의 중요한 통로로 되였는데 《조선일보》(1937년 3월 2일)에 실린 당일에 보급할 노래목록을 통해 그 일면을 볼수 있다.
3월 2일(화요일) 오후 6시 동요제창과 독창
1. 제창 《뒤집할멈환갑날》
2. 제창 《춤추는 락엽》
3. 독창 《고드름》
4. 제창 《집보는 아기노래》
5. 제창 《고추장》
6. 독창 《할머니노래》
7. 제창 《새색시 새서방》
8. 제창 《겨울밤》
9. 제창 《비탈길》
10. 제창 《물망초의 그늘》
11. 제창 《눈내리는 밤》
련동유년 주일학교 아동.
지휘: 조창대, 반주: 박규원
우에 실린 동요곡목을 통해 당시 동요가 독창과 함께 전통적인 민족성악연주형식인 제창으로 많이 연주되여 사람들에게 민족적정서를 북돋아준 정형을 알수 있다.
다음은 어린이들을 위한 동요창작의 길에 나섰던 대표적인 동요작곡가들의 창작활동과 결부하여 동요의 창작보급정형을 보다 구체적으로 보기로 하자.
《동요의 할아버지》라고 불리운 윤극영
윤극영(1903-1988년)은 1920년대 초엽부터 어린이들을 위한 동요창작에 앞장섰던 선구자의 한사람이다.
그는 1920년대에 서울에서 보통학교를 마친 후 일본으로 건너가 고학으로 바이올린과 성악을 배웠다.
재학기간에 그는 민족의 장래인 어린이들에 대한 교양에 깊은 우려를 느낀 량심적인 재일류학생들로 무어진 색동회라는 비상설적인 문화단체에 망라되여 동요창작을 시작하였다.
귀국후 그는 고향마을의 처녀애들을 모아 어린이노래회를 조직하고 자기 집의 웃방을 《일성당》이라고 부르면서 이 노래방을 거점으로 하여 동요를 지어 동네아이들에게 배워주었다.
이 시기 그는 널리 알려진 동요들인 《반월가》, 《설날》, 《꾀꼬리》를 자기가 직접 가사를 짓고 곡을 붙여 보급하였으며 이외 《두루미》(작사 한정동), 《귀뚜라미》(작사 방정환), 《꼬부랑할머니》(작사 최영애), 《소금쟁이》 (작사 한정동), 《고드름》(작사 유지영), 《흐르는 시내》(작사 윤석중)를 작곡하였다. 그중 《흐르는 시내》는 1925년 봄에 양정고등학교 학생이였던 윤석중(당시 14살, 이후 동요가사들을 많이 작사함.)이 지은 가사에 윤극영이 곡을 만들어붙인것이다.
윤극영은 1925년 동요극 《파랑새를 찾아서》(전 5막)를 창작하여 동네아이들의 출연으로 태평로에서 대중공연을 진행하였다.
그가 이 시기 작곡한 10편의 동요들은 1926년에 《반달》이란 제목의 동요집에 실리고 몇년후에는 같은 표제로 레코드판에 실려 전국각지에 널리 보급되였다.
그는 1925년에 중국 룽징(룡정)으로 옮겨간 후 어느 한 고등녀학교 음악교원을 하면서 국내에서 윤석중 등이 보내오는 동요가사들에 곡을 지어붙이며 수십여편의 동요들을 창작보급하였다.
그중에는 그자신이 작사도 한 노래들이 적지 않았다.
윤극영이 지은 동요들은 그가 작사, 작곡한 《반월가》의 가사에서 표현한 삿대도 없이 가는 《서쪽나라로》, 구름나라 지나 반짝반짝 비치는 새별등대따라 《길을 찾아라》라는 동화적인 의인화수법들을 놓고 알수 있듯이 사람들모두가 행복하게 사는 새 나라에 대한 동정 그리고 자유롭고 평화로운 새 생활에 대한 열렬한 지향과 그리움의 정서를 통하여 어린이들을 애국애족의 정신으로 교양하는데 기여하였다.
그가 작곡한 동요곡들은 또한 통속적이면서도 서정성이 깊은것으로 하여 어린이들은 물론 어른들속에서도 널리 불리우면서 사람들의 감명을 불러일으켰다.
100여편의 동요를 작곡한 홍란파
홍란파(본명 홍영후, 1897-1941년)는 우리 인민이 일제에 의하여 류례없는 민족적수난을 겪던 시기에 동요, 예술가요를 비롯한 음악창작과 연주, 음악계몽 및 문필활동 등 다방면적인 음악예술활동을 적극 벌려 우리 음악예술의 현대적발전에 기여한 선구자의 한사람이다.
빈농가의 둘째아들로 태여난 홍란파는 1912년에 중학교를 마치고 조선정악전습소 신악부에 입학하여 성악과 바이올린을 전공한 후 전습소 조교원(1915-1917년)으로 일하면서부터 음악생활을 시작하였다.
그후 음악을 더 배울 뜻을 안고 일본으로 건너가 음악공부를 하면서 카프작가들의 영향을 받았으며 재학기간과 귀국후 여러가지 음악계몽활동을 적극 벌렸다.
홍란파는 1910년대 후반기부터 가요창작을 시작하여 동요, 예술가요, 대중가요 등 다양한 가요종류들과 바이올린독주곡, 관현악을 비롯한 기악곡창작과 연주활동을 활발하게 벌려 현대초기 조선음악사에 깊은 자취를 남기였다.
그는 특히 일제가 의도적으로 저들의 퇴페적인 류행창가를 퍼뜨려 어린이들의 순진한 마음을 좀먹게 하고 그들의 장래를 해치게 하는데 대하여 깊이 우려하면서 1927년경부터 동요에 관심을 두고 어린이들이 부를 동요들을 많이 작곡하여 내놓았다.
그는 1920년대와 1930년대초에 이르는 기간 100편의 동요들을 작곡하여 《조선동요100곡집》(상편 1929년, 하편 1933년)에 나누어 실었는데 그중 많은 동요들이 어린이들은 물론 어른들속에서도 즐겨불리웠다.
동요 《고향의 봄》은 홍란파의 동요창작에서 가장 성공한 작품인 동시에 조국과 고향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을 반영한 계몽기동요들중에서 가장 인상깊은 대표작이기도 하다. 《고향의 봄》은 홍란파가 음악공부에 뜻을 두고 이국땅에 가있던 1929년에 조선인사립학교 어린이들의 작문수업을 참관하면서 고향을 애타게 그리는 어린이들의 소박한 동심에서 강한 충동을 받아 작곡한 노래이다.
빼앗긴 고향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 그것은 그 시대 어린이들의 소박한 동심만이 아닌 작곡가자신의 심정이였고 타향에로 흘러간 겨레모두의 한결같은 열망이였다.
하기에 이 노래는 어린이나 어른이나 할것없이 각계층의 사람들속에서 민요 《아리랑》 다음으로 널리 불리우면서 고향에 대한 한없는 사랑의 감정과 그것을 기어이 되찾으려는 의지를 심어주었다.
홍란파가 작곡한 노래들은 그 주제내용이 다양할뿐아니라 선률형식과 양상 또한 다양하다.
동요 《고향의 봄》과 같이 고향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을 민족적정서가 풍부한 밝고 아름다운 선률에 담아 노래하였는가 하면 《가을밤》, 《기러기》에서와 같이 달밝은 가을밤의 전경과 더불어 부모형제를 그리는 소년의 애달픈 심정을 처량하고 구슬픈 정서로 절절하게 노래하기도 하였다. 그런가 하면 자연풍경에 대한 표상을 《개구리》, 《나팔꽃》에서처럼 밝고 경쾌한 양상으로 재미있게 엮어 그려보이기도 하고 《옥토끼》, 《시내물》에서와 같이 귀엽고도 가벼운 정서로 펼쳐보이기도 하였다.
홍란파의 동요곡들은 선률음조와 리듬이 단순하고 명료하며 선률진행에서 심한 굴곡이 없이 평이하고 간결한것이 특징적이였다.
동요 《그리운 강남》을 작곡한 안기영
안기영(1900-1980년)도 사람들속에 널리 알려진 동요 《그리운 강남》, 《조선의 꽃》을 비롯한 동요와 예술가요창작활동을 적극 벌려 해방전시기 가요예술발전에 기여한 작곡가의 한사람이다.
15살때 배재중학교를 다니면서 당시 리왕직양악대장을 하던 백우용에게서 코르네트를 배웠으며 1917년에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다니다가 학비난으로 중퇴한 후 중국에 들어가 려운형의 소개로 난징(남경) 진릉(금릉)대학에 다녔다. 1923년에 귀국하여 리화녀전 음악과장의 조수로 있다가 1926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공부를 하였으며 1928년에 귀국하여 1932년까지 리화녀자전문학교 성악교수로 있었다.
안기영은 1920년대 말엽부터 가요창작을 본격적으로 벌려 1930년대 중엽에 이르는 기간 수십여편의 동요와 예술가요들을 작곡하였다.
그의 동요작품들가운데서 널리 알려진 대표작들은 1929년 2~3월에 련이어 창작한 《그리운 강남》(작사 김석송)과 《조선의 꽃》(작사 리은상)이다.
이 노래들을 보면 그의 동요창작의 특기를 잘 알수 있다.
동요 《그리운 강남》에서 작곡가는 평화롭고 행복한 리상향인 강남과 제비에 대한 형상을 통하여 착취와 압박이 없는 새 나라를 동경하며 해방의 날을 학수고대하는 당대 인민들의 지향과 념원을 민족적색채가 짙은 서정적인 선률로 감명깊게 형상하였다. 이와 달리 동요 《조선의 꽃》에서는 민족의 미래이며 희망인 어린이들이 억세게 자라 평화롭고 부강한 새 조선의 주인공이 되기를 바라는 인민들의 념원과 믿음을 담은 가사내용에 알맞게 곡조를 밝고 씩씩한 정서와 민족적향취가 흘러넘치게 하고있다.
안기영의 동요작품들이 민족적정서가 짙은것은 그가 전통적인 조선민요들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그 우수한 특성들을 자기의 가요작품들에 잘 구현해온데 있다.
안기영은 1931년에 잡지 《동광》 5호에 발표한 《조선민요와 그 악보화》라는 글에서 동양의 음계가 변화발달되여 서양의 음계가 되였다고 주장하면서 서양의 7음계적인 화성을 5음계선률에 붙여쓰는것이 결코 5음계의 정조를 변하게 하지 않을것이라고 하였으며 조선민요의 반주도 피아노나 관현악으로 할수 있다는 견해를 표명하였다.
그는 자기의 이러한 견해를 실천적으로 구현하였는데 《양산도》를 비롯한 민요들을 합창곡으로 편곡형상하여 《조선민요합창곡집》(1931년 10월 5일 발행)으로 묶어내기도 하고 민요합창곡을 가지고 수십여회의 공연활동도 벌리였다.
이것은 그가 자기의 가요창작에서 조선민요의 우수한 선률적특성들을 적극 살려나갔을뿐아니라 인류의 음악문화가 달성한 우수한 성과들도 창조적으로 받아들여 우리 나라 가요예술의 현대적발전을 실현하는데 기여한 음악가의 한사람이였음을 보여준다.
《고향하늘》을 작곡한 박태준
박태준(1900-1986년)은 민족수난의 시기에 어린이들에게 조선민족의 강의한 넋과 얼을 심어주기 위하여 동요들을 많이 창작한 작곡가의 한사람이다.
경상북도 대구에서 출생한 그는 대구 계성중학교를 마친 후 평양숭실중학교에 다니면서부터 동요창작을 시작하였다.
재학기간인 1920년에 동요 《가을밤》으로부터 창작을 시작하여 이후 15편의 동요들을 창작하여 내놓았다. 1921년에 평양숭실중학교를 졸업한 후 경상남도 마산의 창신학교와 대구 계성중학교에서 음악 및 영어교원으로 있었으며 1930년대 중엽에는 평양숭실중학교에서 교원으로 활동하였다.
이 시기 그는 동요와 예술가요창작을 적극 벌려 1940년대초에 이르는 기간에 70여편의 동요를 작곡하였다. 그의 작품들은 동요곡집 《중중때때중》(1929년), 《양양범벅궁》(1931년)에 실려 보급되였다.
박태준은 동요창작에서 주로 민족적색채의 5음계대조식을 잘 썼다. 이것은 어느 한 노래집에 실린 그의 동요 35편중 34편이 5음계대조로 되여있고 나머지 1편이 7음계로 되여있는것을 통하여 잘 알수 있다.
이것은 홍란파나 윤극영 등이 동요창작에서 7음계조식을 많이 쓴것과는 구별되는 그의 동요곡들의 조식적특성으로 된다.
박태준의 동요곡들에는 정서적으로 밝고 발랄한 노래들도 있고 서정성이 깊은 노래들도 있다.
그중 《고향하늘》은 홍란파의 동요 《고향의 봄》과 함께 고향을 그리는 어린이들의 가식없는 동심세계를 통하여 겨레의 애향심을 진실하게 노래한 대표적인 동요작품으로 널리 알려졌다.
《푸른 산 저너머로 멀리 보이는/새파란 고향하늘 그리운 하늘》이라는 가사로 불리운 이 노래는 어린이들이나 어른들이나 다 통할수 있는 깊은 서정성과 예술성을 갖춘 선률형상으로 하여 사람들속에서 널리 불리우며 그들의 애향심을 더욱 북돋아주었다.
박태준이 1922년에 창작한 예술가요 《동무생각》(사우)도 원래는 동요라고 불리웠다가 노래의 예술적경지가 높은것으로 하여 후날에 예술가요라는 새로운 가요종류이름이 나오면서 그에 속하게 되였다고 한다.
동요 《짝자꿍》을 지은 정순철
정순철도 해방전시기에 어린이들을 위한 노래를 지어 보급한 대표적인 동요작곡가의 한사람이다.
그는 일본류학당시부터 방정환, 윤극영과 함께 어린이사랑운동의 하나로 무은 단체인 색동회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동요창작을 시작하였다.
그는 1929년에 개성개벽사에서 발행한 동요집 《갈잎피리》에 《까치야》(작사 김기진), 《늙은 잠자리》(작사 방정환), 《여름비》(작사 방정환), 《나무잎배》(작사 방정환), 《흰 모자》(작사 황세관), 《갈잎피리》(작사 한정동), 《밤》(작사 한정동), 《우리 아기 행진곡》(작사 윤석중)들을 발표한외에 적지 않은 동요곡들을 지어 보급하였다. 그가운데서 《우리 아기 행진곡》은 사람들속에 널리 퍼진 동요로서 후에 《짝자꿍》이라고 제목이 바뀌였다.
《엄마앞에서 짝자꿍 아빠앞에서 짝자꿍/엄마 한숨은 잠자고 아빠 주름살 펴져라》라는 가사와 함께 민족적인 5음계조식*에 기초하여 선률적으로 아기자기하게 엮어진 이 노래는 고달픈 생활속에서도 아기의 밝은 웃음에서 행복한 앞날을 그려보며 살아가던 인민들의 생활감정을 진실하게 담은것으로 하여 사람들속에서 많이 불리웠다.
5음계조식? 흔히 5음계라고 하는데 한옥타브가 5개 음으로 이루어진 조식을 말한다. 5음계조식의 매개 계단들은 대체로 린접계단과 서로 대2도(하나의 전음) 및 소3도(하나의 전음과 반음)의 음정관계로 배렬된다.
우리 나라 민요5음계조식은 주음이 어느 음인가에 따라서 다섯가지 형태로 구분되는데 그중 평조, 계면조가 가장 많이 쓰인다.
평조는 주음으로부터 전음, 전음 반, 전음, 전음, 전음 반의 관계를 가지고 구성된 민요5음조식으로서 대조식의 성격을 띠고 있다. 우리 민요에 흔히 사용되는 평조는 《쏠》음을 바탕으로 하는 《쏠》, 《라》, 《도》, 《레》, 《미》로 구성되였다.
계면조는 주음으로부터 전음 반, 전음, 전음, 전음 반, 전음의 관계로 구성된 민요5음조식으로서 소조식의 성격을 띠고있다. 우리 민요에 흔히 사용되는 계면조는 《라》, 《도》, 《레》, 《미》, 《쏠》로 구성되였다.
동요곡으로 어린이들의 밝은 미래를 축복한 권태호
권태호(1903-1972년)는 《조선의 아기》를 비롯하여 어린이들의 교양에 이바지하는 경향성이 좋은 동요들을 작곡하였다.
그는 22살때 일본에 건너가 고학으로 성악공부를 하였으며 1928년에 귀국한 후 진보적인 성악연주활동과 동요창작을 하였다.
그는 당시 양성가수들이 외국성악작품을 기계적으로 받아들여 외국노래만을 부르고있을 때 조선사람의 구미에 맞는 우리 노래를 부르는것을 지향하여 새로운 성악연주형상을 창조한 애국적이며 민족적인 음악가였다.
이에 대해서는 그가 1928년 9월 14일 서울에서 가진 독창회에 출연하여 양성으로 조선노래들을 불러 사람들을 감동시킨 사실을 놓고서도 잘 알수 있다. 이에 대해서 《동아일보》 9월 16일부는 《특별히 이 독창회는 조선사람이 작곡한 조선가요를 발표한것만큼 재래의 음악회와 의미가 달라 여러 청중에게 많은 감명을 주었다.》고 소개하였다.
이것은 그가 비록 외국땅에 가서 양악, 성악을 공부하고 왔으나 양성연주양식을 조선노래 가창에 적용하여 조선음악의 우수성을 시위하려 한 애국적인 음악가였음을 보여준다.
권태호는 1920년대말부터 어린이들을 위한 동요창작에 힘을 기울여 《기러기떼》, 《내 동생》, 《봄나들이》, 《봄바람아 불어라》, 《조선의 아기》, 《제비가 오누나》, 《눈꽃새》, 《꽃피는 삼천리》 등을 내놓았는데 그중 《조선의 아기》(일명 《조선아기의 노래》)가 널리 알려져있다.
《조선의 아기》(작사 남궁랑)는 조선의 앞날을 떠메고 나갈 어린이들의 밝은 미래를 꽃피는 봄과 더불어 확신에 넘쳐 축복한 가사내용을 밝고 랑만적인 정서가 짙은 행진곡적인 선률형상에 담은 노래였다.
해방전시기 진보적인 동요창작의 길에 나섰던 작곡가들은 이들외에도 적지 않았다.
일 화
이역땅에서 창작된 동요 《고향의 봄》
동요 《고향의 봄》은 처음 나온 때로부터 80여년이 지난 오늘도 사람들속에서 나서자란 고향에 대한 뜨거운 추억과 애착을 안겨주는 노래로 널리 불리우고있다.
우리 인민이 일제침략자들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력사에 류례없는 민족적수난을 겪던 시기에 이처럼 나서자란 고향에 대한 열렬한 사랑과 그리움을 담은 애향가가 창작되게 된데는 가슴뜨거운 사연이 깃들어있다.
1929년 10월의 어느날이였다.
당시 음악공부에 뜻을 두고 이국땅에 가있던 홍란파는 조선인구락부에서 사립학교 교원을 하고있는 친구를 찾아갔다.
마침 작문시간이여서 친구는 칠판에 《고향》이라는 제목을 써놓고 한창 수업을 하고있었다.
홍란파는 그자신도 이국타향에 살며 고향에 대한 그리움에 젖어있던지라 흥미가 동하여 뒤자리에 조용히 앉아 작문수업을 참관하였다.
얼마후 학생들은 작문을 다 짓고 교원의 지시에 따라 자기가 지은 작문을 발표하기 시작하였다.
그중 한 학생이 지은 작문이 이목을 끌었다.
그 학생은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내가 태여난 고향은 ××입니다. 맑은 시내물이 졸졸 흐르는 고향마을은 봄이면 복숭아꽃, 살구꽃, 진달래꽃이 활짝 피여나 꽃동네를 이루는 아름다운 고장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왜놈의 구두발에 짓밟혀…》 하고는 설음이 북받쳐 더 읽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며 흐느끼는것이였다.
그러자 다른 학생들도 고향을 빼앗긴 설음이 북받쳐올라 울음을 터쳤고 삽시에 교실안은 울음바다를 이루고말았다.
이러한 광경은 홍란파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저 어린 마음들에도 빼앗긴 고향에 대한 사랑의 넋이 저렇듯 순결하고 열렬하게 깃들어있거늘 내 식민지민족의 음악인으로서 저들의 애향심을 북돋아줄 한편의 노래도 안겨주지 못하고 무엇을 하였는가.)
하여 그는 고향을 그리는 아이들의 동심을 담아 아기자기하면서도 애틋하고 향토적인 정서가 한껏 풍기는 선률을 지었고 교원인 그의 친구는 학생의 작문내용을 그대로 시화하여 가사를 지어붙였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진달래
울긋불긋 꽃대궐 차리인 동리
그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사람들에게 아름답고 정다운 고향마을의 정경을 생동하게 펼쳐보이면서 고향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더욱 북돋아주는 동요 《고향의 봄》은 이렇게 조국과 멀리 떨어진 이국땅에서 나오게 되였다.
빼앗긴 고향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은 그 시대 어린이들의 소박한 동심만이 아닌 겨레모두의 한결같은 심정이고 소중한 감정이였기에 이 노래는 어린이들은 물론 광범한 대중이 사랑하는 겨레의 노래, 민족의 노래로 널리 불리워졌다.
상 식
연 악 회
홍란파가 1922년에 조직한 음악계몽단체이다.
음악창작과 연주, 교육, 출판 등을 포괄한 종합적인 기관이였다.
여러가지 음악회들을 주최하여 열었으며 1923년에 바이올린을 전공하는 학생 8명을 받아 음악교육을 시작하였다.
1929년경에는 학과를 확대하여 바이올린, 피아노, 음악리론과를 내와가지고 학생들을 모집양성하였다.
출판은 주로 홍란파가 작곡한 기악곡들과 가요집, 그가 집필 및 편찬한 문학도서들을 편집발행하였다.
출판목록을 보면 1924년에 바이올린독주곡 《애수의 조선》, 《하야의 성군》, 《여름밤의 별무리》, 《로만스》, 《라 단조 가보테》를, 1925년에 《세계명작가곡집》, 1929년에 《조선동요100곡집》(상편), 1933년에 《조선동요100곡집》(하편), 《조선가요곡집》(제1집), 바이올린독주곡 《동양풍무곡》, 1938년에 《음악만필》 등을 내놓았다.
연악회는 1925년 4월 27일에 기관잡지로 《음악계》를 창간하였는데 이것이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나온 음악잡지였다.
당시 《동아일보》는 이에 대하여 《시내 서대문옆에 있는 홍영후씨가 경영하는 <연악회>는 이번에 새로이 기관잡지 <음악계>를 창간하였는데 조선에서는 처음으로 순전한 음악잡지일뿐아니라 신작악보, 평론 등의 내용이 풍부하다.》고 소개하였다.
◇ 대표적인 동요 몇곡






○ 가요음악의 새 모습-예술가요의 출현
예술가요는 1920년대 초엽부터 진보적인 음악가들의 동요창작과 병행하여 창작보급되였다.
예술가요의 발생에 대하여서는 여러가지 설들이 나왔다. 즉 동요와 함께 창가(계몽가요)에서 분화되여나왔다는 설도 있고 우리 나라 중세말기에 창작보급되였던 가곡, 가사와 같은 도시서정가요들을 바탕으로 나왔다는 설도 있으며 동서음악문화의 교류과정에 유럽랑만주의음악의 산물인 예술가곡이 개화의 물결을 타고 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에 류입되면서 우리 나라에도 영향을 주어 예술가요가 나오게 되였다는 주장도 있다.
물론 일정하게 일리가 있는 견해들이다.
창가분화설은 예술가요가 선행한 창가의 근대화된 선률양식의 특성과 창조경험, 그의 계몽적성격을 계승하여 나왔다고 볼 때 일리가 있으며 중세도시서정가요바탕설도 예술가요에 선행한 가곡에서처럼 시조시와 결부된 노래들이 일부 있다는 점과 예술가요의 선률창작자체가 전문가적인 가창을 전제로 하고 예술성의 제고를 중시한것 등에서 중세가곡형식과 공통성을 가진다는 측면에서 일정한 타당성이 있다고 보아야 할것이다. 그리고 서양음악결부설을 《서양가곡에 대한 맹목적인 모방》으로 보는 견해는 엄격히 경계해야 할것이지만 예술가요가 음악표현수단과 수법에서 인류음악문화가 달성한 성과들을 창조적으로 받아들여 현대화된 가요음악의 새로운 면모를 개척한 측면이라든가 창작가들이 당대의 환경에서 다른 나라들에 나가 음악공부를 하지 않으면 안되였던 사정과 결부하여볼 때 일정하게 리해가 가는 점이 없지 않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들은 그것이 각각 예술가요음악양식의 형성에 일정한 작용을 하였다는 점에서는 일리가 있으나 그 모든것이 예술가요발생의 직접적인 요인으로 되였던것은 아니다.
해방전시기 예술가요라는 새로운 형식의 가요음악이 나오게 된것은 당시 식민지민족의 천대와 멸시를 받으면서도 이악하게 음악공부를 하였던 젊은 음악가들속에서 발양된 우리 가요음악을 건전하고 현대적으로 발전시키려는 열망과 우리 민족이 당하는 피눈물나는 처지를 창작가자신의 체험세계와 결부하여 표현하려는 의도가 기본요인이였다고 보아야 할것이다.
가요종류이름도 당시 창작가들이 자기의 노래가 대중적성격을 띤 구전민요나 창가보다 새로운 예술적경지를 개척한 노래라는 뜻에서 예술가곡 또는 예술가요라고 한것이라든가 그후 음악학자들이 창작가자신을 대변하는 서정적주인공의 내면세계를 반영한 서정적인 가요형식이라고 하여 예술가요라고도 이름지었던것이 이를 실증해준다.
예술가요로서는 1920년에 창작된 홍란파의 《봉선화》선률을 먼저 꼽게 된다.
그러나 이 곡은 그 당시 시문학과 음악이 결합되여 불리운 노래가 아니라 바이올린곡으로 창작된것이였다.
1920년 서울에서 음악활동을 하던중에 고향마을을 찾아갔던 홍란파는 소꿉시절의 동생이나 다름없던 이웃집처녀 봉선이의 가슴아픈 운명에 대한 정신적체험에서 이 곡을 바이올린으로 즉흥연주하였었다.
봉선이의 운명이자 나라잃은 민족의 운명이기도 하였기에 당대의 수난의 현실이 슴배인 이 바이올린곡은 후날 김형준이 쓴 가사와 어울려져 겨레의 설음과 울분을 토로하고 함께 나누는 노래로, 자주독립의 날을 절절히 념원하는 노래로 되였던것이다.
《봉선화》는 1925년에 가사와 선률이 결합된 노래로 되였지만 그 곡조가 1920년에 창작되였을뿐아니라 가사의 사상주제적내용과 곡조의 예술적품위에 있어서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것으로 하여 예술가요의 성과작품으로 인정받아온다. 그와 함께 홍란파는 창가시대를 마감짓고 우리 나라 현대가곡의 시대를 연 선구자로 음악사에 깊은 자취를 남기게 되였다.
해방전시기 예술가요는 1920년대초, 중엽을 발생기로, 1920년대 말엽부터 1930년대 중엽을 전성기로 하여 발생발전하였으며 그 이후시기는 점차 쇠퇴하면서도 명맥을 유지해간것으로 볼수 있다.
예술가요의 발생기에 나온 노래들로는 홍란파 작곡인 《봉선화》, 《사공의 노래》(작사 함호영, 1921년경), 《봄처녀》(작사 리은상, 1920년대 중엽)와 박태준이 1922년에 리은상의 시에 곡을 붙인 《동무생각》, 《미풍》, 《님과 함께》, 《소낙비》 등이다.
예술가요의 개척기라고도 할수 있는 이 시기에 나온 작품들은 얼마 되지 않으며 그 창작가력량도 소규모적이다.
그리고 우리 나라 가요예술이 종류적으로 분화되여가던 초기에 나온 작품들인것만큼 그에 대한 가요종류이름도 명백하지 못하였다.
례컨대 박태준의 《동무생각》도 처음에는 동요라고 불러오다가 후에 예술가요가 하나의 가요종류로 고착되면서 예술가요라고 부르게 된것이 그러하다.
하지만 이 시기에 《봉선화》와 《동무생각》과 같은 예술가요의 대표작들이 나오고 다양한 선률양식이 개척된것은 초기예술가요가 거둔 중요한 성과로 된다.
예술가요창작보급의 전성기는 1920년대말부터 1930년대 중엽에 이르는 기간이다.
이 시기는 일제식민지통치하에서도 민족의 음악예술을 현대적으로 발전시킬 일념으로 국내외에서 이악하게 음악공부를 하여 재능을 키워왔던 신진음악가들이 예술가요창작에 적극 인입됨으로써 예술가요가 량적으로 많이 창작되였을뿐아니라 독자적인 가요종류로서의 지위를 뚜렷이 한 시기로 특징지을수 있다.
이 시기에 홍란파, 박태준뿐아니라 안기영, 현제명, 채동선, 리흥렬, 김성태 등의 음악가들이 예술가요창작에 적극 나섰다. 그리고 조두남과 같이 해외에서 활동하며 예술가요창작에 나선 음악가들도 일부 있었다.
이들의 적극적인 창작활동에 의하여 예술가요는 시문학과 음악이 고도로 융합되고 비교적 높은 예술적품격을 지닌 현대가요의 면모를 갖추게 되였던것이다.
이 시기 예술가요는 초기예술가요가 거둔 성과에 토대하여 음악양식적으로나 양상적으로 보다 풍부하고 세련된 면모를 보이며 발전하였다.
양식적측면에서 볼 때 《성불사의 밤》, 《마의태자》, 《오 내 사랑》, 《옛동산에 올라》 등과 같이 애가적인 선률양식으로 된 노래들이 있는가 하면 《방아타령》, 《사공의 노래》, 《얼씨구 절씨구》 등과 같이 신민요풍의 선률양식으로 된 노래들도 있었고 맑고 우아하면서도 랑만적인 색채가 풍기는 고전적인 선률양식으로 된 노래들도 있었다.
이러한 선률양식적특성에 따라 음악양상적으로 사색적이고 서정적인것을 위주로 하면서 밝고 랑만적인것, 부드럽고 처량한것 등의 정서적색갈로 다양한 음악양상을 개척하고있다.
1930년대말부터 해방전까지의 시기는 예술가요의 쇠퇴기(또는 침체기)라고 할수 있다.
이 시기에 안기영의 가극 《콩쥐팥쥐》와 《견우직녀》의 주제가들인 《환우곡》과 《진주담의 노래》 등이 아리아나 창극의 창형식이 아니라 예술가요형식으로 창작되였으나 그것으로 예술가요의 명맥이 이어질수는 없었다.
이 시기 예술가요가 쇠퇴되여간것은 여러가지 요인과 결부되여있다.
무엇보다 1930년대 중엽을 전후하여 통속적인 대중가요가 사람들속에 급속히 보급되면서 예술가요가 점차 군중적지반을 잃게 된데 중요한 요인이 있다.
예술가요는 주제내용에서 민족의 아픔을 반영하면서도 시문학적으로 은유의 대상을 깊이 묻어놓고 심각성과 고상함을 추구하였기때문에 일반대중이 그 뜻을 감득하기 어렵게 되여있었다. 그리고 노래선률에서도 다른 가요에 비하여 넓은 음역과 복잡다양한 선률선적굴곡을 가지며 성악전문가들의 가창을 전제로 하는 등 고상한 예술성의 제고를 지향한 가요였다.
이런것으로 하여 한때 대중적관심이 컸던 예술가요는 이 시기에 이르러 보다 생활적이며 통속적인 대중가요에 밀리우게 되였던것이다.
예술가요가 쇠퇴되게 된 요인은 또한 일제가 《대동아공영권》의 야망밑에 제2차 세계대전에 가담하여 더욱 파쑈화되여가면서 일본군가나 퇴페적인 류행가외의 그 어떤 가요보급도 가혹하게 탄압한데 있다.
그리하여 이 시기 적지 않은 작곡가들이 예술가요창작에서 손을 뗐고 일부 사람들의 창작으로 간신히 공백을 면해오다가 1940년대초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다른 한편 예술가요창작이 일정하게 전문화되지 못하고 주로 여러 학교에서 교원을 하던 음악가들이 동요와 함께 예술가요를 지었던것으로 하여 그 활발한 창작을 기대할수 없었던 점도 없지 않다.
예술가요창작이 왕성하게 진행되지 못하고 작품수도 얼마 안되는것은 이러한 사정과 관련되여있다.
그러나 이들이 일제식민지사회환경속에서도 나라의 가요예술발전에 이바지하려는 념원을 안고 예술가요창작에 힘을 기울여 새로운 가요형식을 개척한것은 긍정적으로 평가해야 할 일이다.
그러면 대표적인 예술가요작곡가들의 창작활동과 결부하여 그 창작보급정형을 살펴보기로 하자.
작곡가 홍란파는 《봉선화》를 내놓은 후 1933년까지의 기간에 예술가요창작을 활발하게 벌려 예술가요선률양식의 개척자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하였다.
그는 1920년대 말엽에 리은상이 지은 시조들에 곡을 붙인 련가곡 《나그네의 마음》을 내놓았는데 이것은 시조시를 가사로 하여 처음 나온 예술가요들이였다. 련가곡 《나그네의 마음》은 7편의 노래들로 구성되였는데 그 제목들을 보면 《고향생각》, 《사랑》, 《옛동산에 올라》, 《그리움》, 《금강에 살으리랏다》, 《관덕정》, 《입다문 꽃봉오리》이다.
홍란파는 1933년 2월에 《조선가요작곡집》을 내놓았는데 거기에는 우에 소개한 7편의 노래들과 함께 《봄》, 《봄처녀》, 《할미꽃》, 《개나리》, 《옛 강물을 찾아서》, 《성불사의 밤》, 《만천교우에서》, 《장안사》를 포함한 15곡의 노래들이 실려있었다. 이 노래들은 대부분이 리은상의 시조를 가사로 한 노래들이였으며 한두편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1920년대말부터 작곡집을 내놓기 전까지의 기간에 창작한 작품들이다.
홍란파는 1933년 10월 29일에 현제명과 함께 공동작곡발표회를 가지고 자기가 편곡한 합창곡 《봄노래》와 예술가요들을 무대에 올렸으며 1939년에는 《동아일보》가 주최한 제1회 전조선창작곡발표대음악제에 련가곡 《나그네의 마음》(7편)을 관현악반주에 맞추어 최창은(1913-1991년)의 노래로 발표하였다.
홍란파의 예술가요들은 대체로 자연이나 력사고적과 결부하여 망국의 설음과 비운의 감정을 내심적이면서도 서정이 깊은 선률형상에 담고있는것이 특징적이다.
소조식의 주도적인 리용과 5음계조식의 효과적인 활용, 약박에 의한 노래시작과 3련음적리듬형의 주도적인 활용, 림시변화음의 특색있는 적용 등으로 선률형상에서 은근하고 절절한 감정을 돋구면서도 음률의 규칙성과 선률적련결의 류창성을 보장하고있는것은 홍란파가 작곡한 예술가요들의 주요특징들로 된다. 이런것으로 하여 그의 노래들은 어딘가 바이올린으로 연주하듯 섬세하고 풍부한 선률감이 느껴지고있다. 홍란파의 예술가요들가운데는 일반대중이 부르기 어려운 노래들도 일부 있으나 전반적인 노래들이 선률성이 풍부하고 서정성이 깊으며 작곡가의 창작적개성이 뚜렷한것으로 하여 예술가요음악형식의 개척과 발전에 공헌한것으로 평가되고있다.
예술가요창작에서 두각을 나타낸 다른 한사람은 안기영이다.
1929년초부터 가요창작의 길에 나선 안기영은 그해에만도 예술가요 《추억》(작사 박순덕), 《춘사》(작사 리은상), 《한강의 노래》(작사 리순영), 《남산에 올라》(작사 리은상), 《진달래꽃》(작사 김소월), 《오늘도 조약돌을》(작사 리은상) 등을 창작하여 여러편의 동요와 함께 첫 작곡집으로 묶어냈다.
그는 1930년대에 들어와서도 예술가요창작을 줄기차게 벌려 《만월대》(작사 김안서), 《마의태자》(작사 리은상), 《배사공의 안해》(작사 김동환), 《하소연》(작사 리은상), 《방랑객의 노래》(작사 김경), 《오 내 사랑》(작사 김경)을 비롯한 수십편의 예술가요들을 작곡하여 《안기영작곡집》(2권 1931년, 3권 1936년)에 실어 보급하였다. 그의 예술가요들중에는 김소월, 리은상 등이 지은 시조시들을 가사로 하여 작곡한 노래들도 일부 있었는데 이것은 예술가요중에 절가형식이 아닌 통절가요들이 생겨나게 된 기본원인으로 되였다.
안기영이 창작한 예술가요들은 《콜럼비아》(1930년), 《빅터》(1931년) 등의 레코드에 취입되기도 하고 음악회무대들에서도 연주되였다.
안기영의 노래들은 예술가요일반에 해당한 공통점들을 가지면서도 일련의 다른 특징들을 보이고있다.
그것은 우선 주제면에서 보다 구체적인 인간문제에 초점이 돌려지고 사람들의 심리정서세계를 서정적으로 노래하고있는것이다.
또한 선률형상에서 감정이 적극적이고 정서적굴곡과 대조, 음률의 변화를 많이 주고있으며 성악전문가적인 선률감이 지배적인것이다. 이것은 그가 성악을 전문으로 하였던 사정과도 관련되여있다.
그는 조식에서 어느 하나에 치중하지 않고 7음계대조와 소조를 자유롭게 썼을뿐아니라 5음계조식도 적극 활용함으로써 예술가요가 가지는 민족적인 선률양식의 한 측면을 돋구는데 기여하였다.
홍란파가 3박자계통을 잘 쓰는데 비해 안기영은 3박자계통과 함께 노래의 사상정서적내용에 맞게 4박자형태도 적극 살려썼으며 선률의 리듬도 곡조의 성격에 따라 자유분방하게 활용하였다.
예술가요의 대표적창작가들중에는 박태준도 있었다.
예술가요의 개척기에 가요창작을 시작하였던 그는 1934년경부터 평양숭실중학교 교수로 있으면서 예술가요창작을 재개하였다.
그는 1934년에 윤석중의 가사를 가지고 《님생각》, 《추석》, 《첫겨울》을 작곡한데 이어 1940년까지 《물새알》, 《백두산하늘못》을 비롯한 10여편의 예술가요들을 창작하였다. 그의 예술가요들은 1939년에 출판된 가곡집 《물새발자욱》에 실려 전해온다.
박태준의 예술가요들중에서 사람들속에 널리 알려진 대표작은 《동무생각》이다.
옛동무에 대한 그리움의 정서를 통하여 잃어버린 조국에 대한 그리움을 은유적수법으로 표현한 이 노래는 선률구성이 매우 특색있게 되여있다.
4/4박자와 9/8박자의 교체박자로 이루어진 선률은 특징적인 리듬형과 선률선의 일관한 반복으로 정서깊게 흐르면서 우아하고 랑만적이면서도 회고적성격이 짙은 선률형상으로 가사에 은유화되여있는 심원한 뜻을 잘 살린것으로 하여 사람들에게 깊은 사색적인 여운을 안겨주었다.
채동선도 1930년대에 예술가요창작에서 한몫을 한 작곡가이다.
그는 경기고등보통학교를 다니던 1918년에 홍란파에게서 바이올린을 배웠다. 1924년에 도이췰란드에 류학을 가서 베를린 슈테르쉔음악원에서 바이올린과 작곡공부를 하였다. 1929년에 귀국한 후 바이올린독주회를 여러차례 여는 등 본격적인 음악활동을 시작하였다.
채동선은 1930년대에 기악곡창작과 가요창작을 벌려 《조선찬가》(작사 리은상, 1931년), 《고향》(작사 정지용, 1933년), 《갈매기》(작사 리은상)를 비롯한 예술가요들을 창작하여 1937년에 첫 작곡집을 발간하였다. 이 시기 그는 전통적인 민족음악에 관심을 가지고 민요들을 발굴채보하고 새롭게 편곡형상하여 내놓기도 하였다.
그의 대표작의 하나로 전해오는 《조선찬가》는 백두산과 더불어 유구한 력사를 가진 이 땅의 주인은 조선사람이며 모두가 재주와 힘을 합쳐 광명의 아침을 마중해가자는 격조높은 사상주제적내용을 밝고 박력있는 선률형상으로 힘있게 노래하고있다. 서정적인 정서가 짙은 다른 예술가요들과는 달리 창가조와 비슷한 선명하고 박력있는 리듬형들로 엮어진 선률은 3절마감에 곡조의 둘째 부분을 반복승화시켜주면서 이 땅에 반드시 밝아올 광명의 날에 대한 환희적인 감정을 열정에 넘쳐 강조하고있는것이 특징적이다.
채동선의 가요들은 당시 나온 예술가요들에 비하여 시적내용이 참신하고 음악적으로도 새로운 면모를 보여준것으로 하여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다.
1930년대에 예술가요는 해외에 나가 활동한 음악가들속에서도 창작되였다.
대표적인 음악가로 조두남(1912-1984년)을 들수 있는데 평양에서 태여난 그는 어려서부터 누이에게서 풍금을 배웠으며 11살때에 벌써 가요 《옛이야기》를 작곡하여 음악적재능을 나타냈다. 그후 평양숭실중학교를 다니면서 피아노와 작곡공부를 독학으로 하였으며 16살때 첫 작곡집을 발간하였다.
조두남은 1933년부터 중국 동북지방에 옮겨가 살면서 여러가지 공연활동과 함께 가요, 가극, 기악곡창작을 하였다. 그가 작곡한 가요작품들은 《선구자》, 《무단강의 노래》, 《제비》, 《산》, 《배노래》, 《접동새》, 《새타령》, 《그리움》, 《고향생각》, 《홍안령마루에 서운이 튼다》 등이 전해오는데 그중 예술가요 《선구자》가 널리 알려졌다.
창작당시 《룽징의 노래》라는 제목으로 불리웠던 이 노래는 독립투사의 애국의 넋을 찬양한 가사의 내용을 부드럽고 선명하면서도 전문가적인 가창성이 풍부한 서정적인 선률로 폭넓게 형상한것으로 하여 사람들에게 깊은 정서적여운을 안겨주었다.
이외에 해방전시기 예술가요를 창작한 작곡가들로 현제명(1903-1960년), 리흥렬(1909-1980년), 라운영(1922-1994년) 등이 있었다.
예술가요는 계몽기가요의 다른 종류들에 비하여 그 창작과 보급이 활발하게 진행되지 못하였으며 작품수도 그리 많지는 않다. 그러나 예술가요는 다른 계몽기가요들과 마찬가지로 비운속에 살아가던 인민들의 가슴속에 지난날의 모든것에 대한 사랑과 추억, 그리움의 정서를 통하여 반일애국의 정신을 심어주고 우리 나라 가요음악의 현대적발전에 일정하게 기여한것으로 하여 음악사에 뚜렷한 자취를 남기였다.
일 화
예술가요 《봉선화》의 유래
민족수난기에 창작보급된 예술가요 《봉선화》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겨레의 노래로 되게 된데는 작곡가에게 가슴아픈 충격을 준 그 시대의 참혹한 현실이 깔려있다.
1920년의 어느날 홍란파는 수원의 팔달산기슭에 자리잡은 고향마을을 찾아갔다. 해외에서 몇년간 음악공부를 하면서 타향살이의 설음속에 그려보군 하던 그리운 고향이였다.
그런데 그가 고향에 온 이튿날 이웃집의 봉선이란 처녀가 방직공장 녀공으로 팔리워가면서 그를 찾아왔다.
봉선이는 홍란파와 어렸을적부터 함께 노래도 부르고 술래잡이도 하며 뛰놀던 소꿉동무였는데 홍란파가 왔다는 소리를 듣고 떠나기에 앞서 인사하러 왔던것이다.
《영후오빠, 오랜만에 오빠를 만나자마자 헤여져야겠군요.… 이젠 영후오빠의 양행금(바이올린)소리도 다 들었군요. 마지막으로 한곡조 듣고싶어요.》
《?!…》
홍란파는 가슴이 뭉클하였다. 자기를 친오빠처럼 믿고 따르던 봉선이였다. 병으로 돌아간 아버지대신 빚값으로 팔려가는 신세가 된 봉선이를 보는 홍란파의 가슴에는 피눈물이 고이는듯 하였다.
(무슨 곡을 타야 봉선이를 위로해줄수 있을가?)
천천히 바이올린을 꺼내들고 적중한 곡조를 더듬어보는 홍란파의 눈에 비껴든것은 언제나 방실 웃는 얼굴로 그를 대하던 봉선이가 아니였다. 마치도 늦가을의 차거운 솔솔바람에 애처롭게 떨고있는 한떨기 봉선화의 처량한 모습이였다.
남달리 봉선화를 사랑하며 집뜨락 울바자밑에 심고 가꾸며 붉은 꽃잎을 짓이겨 손톱에 물들여가지고 좋아라고 웃고 떠들던 처녀였다. 그래서 홍란파는 봉선이를 찾을 때 아름다운 꽃이 피는 봉선화의 이름을 붙여부르군 하였다.
그러나 오늘 그의 앞에 선 봉선이는 그토록 아름다움을 주던 봉선화가 아니라 울밑에 홀로 피여 외롭게 떨고있는 서리맞은 봉선화의 애처로운 모양이였다.
애처로운 그 모양을 보지 않으려는듯 두눈을 감으며 머리를 털던 홍란파의 뇌리에 언뜻 하나의 곡상이 떠올랐다. 홍란파는 저도 모르게 바이올린을 들고 활을 그어나갔다.
고요한 뜨락에 봉선이의 슬픔을 하소연하는듯 한 애처로운 선률가락이 조용히 울려퍼지기 시작하였다. 못 잊을 지난날을 추억하는듯 회고의 감정을 한층한층 쌓으며 점차 승화되여가던 곡조가 고조를 이루어갔다. 그와 함께 바이올린을 타는 홍란파의 눈에서도, 입술을 깨물고섰던 봉선이의 눈에서도 눈물이 비오듯이 쏟아져내렸다. 마당가에 모여섰던 마을사람들도 오열을 터치며 목메여 울었다. 부모잃고 팔려가는 봉선이의 슬픔이자 나라잃은 그들모두의 슬픔이였던것이다.
그날 봉선이를 바래주고난 홍란파는 멍울이 앉은 무거운 마음으로 좀전에 탔던 곡조를 악보지에 옮겨놓고 《애수》라는 제목을 달았다. 그것은 봉선이의 가련한 운명이 그 하나만이 아닌 이 땅의 수많은 봉선이들의 불행한 운명이자 나라를 잃은 민족의 설음이고 비운이라는 생각이 치밀어오르면서 그러한 민족의 슬픔을 담은 곡조라는 뜻에서였다.
홍란파가 그후 단편소설집 《처녀혼》을 지어 출판할 때 첫페지에 《애수》라는 제목으로 이 곡조를 실어 내놓은것이라든가 이 자작소설을 연극으로 각색하여 공연할 때 자신이 직접 주역으로 출연하면서 연극시작전마다 무대에 나가 이 곡을 바이올린으로 타군 한것은 바로 봉선이의 불행을 통하여 민족의 비운을 뼈저리게 감수하게 된 그자신의 통절한 심리적세계로부터 흘러나온것이였다.
홍란파가 바이올린으로 연주하군 한 이 곡조는 사람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소박하면서도 절절한 극성을 가지고 흐르는 선률에는 사람들을 빼앗긴 고향과 조국을 그리는 깊은 사색의 세계에로 끌어가는 힘이 스며있었다.
거기에는 애조적인 정서와 함께 슬픔도 있었고 분노도 있었으며 소생의 날에 대한 희망도 있었다.
그때 여러 사람들로부터 이 곡조에 가사를 붙여 노래로 부르게 하자는 의견들이 이구동성으로 제기되였다. 그리하여 김형준이 작곡가의 창작동기와 체험담에 기초하여 이 곡에 가사를 지어붙이면서 제목도 《봉선화》로 바뀌게 되였던것이다.
노래에는 한송이의 봉선화에 대한 소박한 형상을 통하여 망국의 비운속에서 오열하던 민족수난기의 비참한 현실과 그러한 시대 인민들의 가슴마다에 엉켜있던 슬픔과 분노의 감정, 화창한 봄과 더불어 봉선화처럼 조국과 민족의 넋이 소생하기를 바라는 창작가의 절절한 념원이 뜨겁게 맥박치고있다.
가요 《봉선화》가 광범한 인민들속에 급격히 보급되면서 민족의 설음과 분노를 터치는 겨레의 노래, 민족의 목소리가 되여 대중의 심금을 울려준것도, 아득한 세월이 흐른 오늘까지도 예술적생명력을 잃지 않고 사람들의 추억에 남는 노래로 간직되게 된것도 바로 당대의 시대적지향과 정서를 진실하게 반영한것으로 하여 지니게 된 예술적감화력과 떼여놓고 볼수 없다. 음악은 시대정신과 인민대중의 사상과 지향을 진실하게 반영할 때 비로소 예술로서의 참된 생명력을 가지는것이다.
상 식
성 우 회
1928년 9월 당시 리화녀자전문학교 음악교원으로 있던 안기영이 주동이 되여 성악교육과 공연활동을 목적으로 하여 조직한 비상설적인 음악단체이다.
성우회에는 리화녀자전문학교, 연희전문학교 교원 및 학생, 기자 등이 망라되였는데 피아노반주자로 박현숙, 백옥란이 있은외에 안시영, 최택, 김현순 등의 성악지망자들이 속해있었다.
성우회는 독창, 2중창, 합창 등의 종목을 구성해가지고 서울과 여러 지방들에서 공연활동을 진행하였는데 그중에서 리화녀자전문학교 학생들이 출연한 민요합창이 이채를 띠였다. 주요곡목은 조선민요 《양산도》, 《방아타령》 등이였는데 합창지휘는 안기영이 하였다. 이외 성우회의 공연무대에서는 안기영이 작곡한 《그리운 강남》, 《배사공의 안해》를 비롯한 여러 계몽기가요들이 독창, 중창으로 불리우기도 하였다.
성우회는 당시 봉건에 물젖은 일부 사람들이 녀학생들이 기생들처럼 《조선소리》를 부른다면서 《리화권번》이라고 비난하는 속에서도 변함없이 민요와 계몽기가요를 가지고 수십여차의 공연활동을 벌리였으며 1933년 3월까지 존재하였다.
◇ 대표적인 예술가요 몇곡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