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민족수난의 세월속에 불리워진 계몽기가요

 

어떤 류형의 유산이든지 그것은 력사와 떼여놓고 생각할수 없다.

민족문화유산이라고 할 때 민족의 선행세대들이 력사적으로 내려오면서 창조하여 후세에 물려주는 정신적 및 물질적재부를 의미한다.

따라서 민족문화유산에 대한 옳은 리해를 가지는데서 그에 대한 력사적고찰은 필수적인 문제인것이다.

계몽기가요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시였다.

《음악은 민족생활의 구체적인 반영이며 시대의 산물이다.》

일제침략자들에게 나라를 송두리채 빼앗겼던 민족수난의 암담하던 시기에 식민지노예의 운명을 강요당해야 했던 우리 인민들의 눈물겨운 처지와 민족적울분의 곡성이였고 침략자들에 대한 분노와 항거의 웨침이였던 계몽기가요의 곡절많은 력사를 그 발생발전의 요인과 과정에 대한 력사적고찰을 통해 보기로 한다.

 

2

□ 계몽기가요-발생발전의 요인은 무엇인가

 

계몽기가요 발생발전의 요인을 밝히는것은 계몽기가요에 대한 옳바른 리해를 가지는데서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계몽기가요가 발생발전하게 된 요인을 정확히 알아야 계몽기가요의 내용과 음악형식, 그 진보성과 음악사적의의, 제한성 등을 옳게 분석평가할수 있다.

계몽기가요 발생발전의 요인은 무엇보다 반일애국정신을 반영한 새로운 가요음악을 창작하는 문제가 절실한 사회적요구로 제기된데 있다.

음악은 시대의 반영이며 시대의 사명에 이바지한다. 시대가 발전하고 사회력사적환경이 변하는데 따라 새로운 사상과 시대정서가 나오며 그에 맞는 새로운 음악종류의 형식이 발생발전하는것은 음악사발전의 합법칙성이다.

계몽기가요가 나온 1920년대부터 해방전까지의 시기는 일제의 식민지통치가 더욱 악랄하고 잔인해질수록 일제침략자들을 반대하는 우리 인민의 반일투쟁기세가 더없이 높아가던 력사적시기였다.

민족의 운명이 생사존망의 기로에 놓이고 겨레의 설음과 사무친 원한이 극도에 달하던 사회력사적현실은 음악예술앞에 당대 인민들의 지향과 념원을 사실주의적으로 반영하면서도 그들의 반일애국감정을 더욱 격조시킬수 있는 가요형식의 출현을 절실히 요구하였다.

그러므로 1920년대에 들어서며 동요와 예술가요창작으로부터 시작된 계몽기가요의 발생발전은 그에 직접적영향을 준 사회적요구와 떼여놓고 볼수 없다.

위대한 김일성주석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일제침략자들은 조선에서 세계력사상 류례없는 잔인무도한 총독정치를 실시하면서 우리 인민을 야만적방법으로 통치하였습니다. 그들은 조선의 가는 곳마다에 군대, 헌병, 경찰을 비롯한 온갖 폭압기구들을 수많이 늘어놓고 조선인민의 초보적인 권리와 자유마저 모조리 빼앗았으며 우리 인민을 가혹하게 탄압학살하였습니다.》

1905년 침략적인 《을사5조약》을 날조하여 우리 나라를 강점하고 잔인무도한 식민지폭압정책을 실시하여온 일제는 1920년대에 들어와 보다 교활하고 포악한 방법으로 식민지통치를 더욱 강화하였다.

1919년 3월 1일 전국각지에서 세차게 일어난 조선인민의 전민족적반일봉기에 질겁한 일제는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저들의 식민지통치의 간판을 무단통치로부터 《문화통치》로 바꾸어달고 보다 교묘한 방법으로 조선민족에 대한 정치적억압과 경제적략탈을 감행하였다.

일제는 헌병경찰제도의 정비강화와 침략무력의 증강배치, 각종 폭압기구의 대대적인 증설과 여러가지 파쑈악법들의 조작으로 우리 인민을 전대미문의 야수적방법으로 억압하였으며 모든 정치, 문화단체들의 강제해산과 애국적출판물들의 강제페간 등으로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와 같은 초보적인 민주주의적권리를 허용하지 않았다.

일제는 또한 조선의 주요경제명맥을 거머쥐고 민족경제의 자립적발전을 저해하는 한편 친일역적들과 매판자본가들을 통하여 일본독점자본의 침투의 길을 열어놓았으며 《토지조사령》에 의한 대대적인 토지략탈과 봉건적착취관계의 유지로 농촌경리의 발전을 가로막으면서 농민들을 가혹하게 착취하였다.

일제는 특히 사상문화분야에서 조선인민의 민족의식과 애국정신을 없애버리고 노예적굴종사상을 주입시키기 위해 갖은 책동을 다하였다.

일제는 교육기관들을 독점하고 악랄한 식민지노예교육과 《황국신민》화정책을 실시하면서 조선인사립학교들을 페쇄하고 조선의 력사와 지리과목들을 없애버리였으며 조선어교육을 억제하고 일본어교육을 강요하는 등 조선민족을 제놈들의 영원한 식민지노예로 만들기 위하여 미쳐날뛰였다.

하여 이 시기 우리 인민은 완전한 정치적무권리와 봉건적 및 자본주의적인 착취와 략탈속에 비참하기 그지없는 생활고에 허덕이게 되였으며 청년학생들은 진정한 배움의 길을 잃고 지식인, 문화인들은 참다운 진리탐구나 예술활동을 할수 없는 처지에서 살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러나 일제의 그 어떤 탄압과 철쇄도 조선민족의 독립의지와 반일투쟁을 막을수 없었다.

우리 인민의 반일민족해방운동은 1920년대에 들어와 로동계급의 투쟁이 적극화되면서 새로운 발전단계에 들어서게 되였다.

당시 우리 나라 로동계급은 청소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반일투쟁에 적극 떨쳐나섰다. 그들은 조선로동공제회(1920년 4월), 조선로동련맹회(1922년 10월), 조선로농총동맹(1924년) 등 전국적인 성격을 띤 대중적로동단체들을 조직하고 단결과 련대성을 강화해가면서 일제와 자본가들의 착취를 반대하는 투쟁을 힘있게 벌렸다.

이와 함께 농촌에서는 농민들이 소작인조합, 농우회를 비롯한 여러가지 농민단체들을 조직하고 소작쟁의를 힘있게 벌렸으며 청년학생들도 일제의 식민지노예교육을 반대하는 투쟁을 활발하게 벌려나갔다.

우리 인민의 반일애국사상은 1930년대에 들어와 거세차게 전개된 항일무장투쟁의 영향밑에 더욱 앙양되여갔다.

절세의 애국자이시며 민족재생의 은인이신 김일성주석께서 도탄에 빠진 조국과 민족의 운명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백두광야에서 조직전개하신 항일무장투쟁의 불길은 원한과 울분속에 살던 인민들의 가슴속에 조국해방의 서광을 안겨주었으며 그들의 반일투쟁열의를 더욱 북돋아주었다.

그리하여 이 시기 항일무장투쟁의 영향밑에 국내외의 애국적인 선각자들속에서는 인민들을 반일애국정신으로 계몽각성시키기 위한 반일계몽활동이 다양한 형태로 진행되였다.

1920년대 중엽부터 1930년대 중엽에 이르는 시기에 진보적인 작가들속에서 전개된 프로레타리아문학예술운동도 그 일환으로 볼수 있다.

1920년대부터 무산계급의 요구와 사상감정을 대변하여 당대 식민지사회제도를 폭로비판하고 로동계급을 비롯한 우리 인민의 민족적 및 계급적해방을 주장하여나섰던 카프문학은 1930년대에 들어와 항일무장투쟁에 대한 인민들의 열렬한 공감과 지지성원을 반영하는것을 통하여 자기의 반일계몽적인 성격을 뚜렷이 나타냈다.

카프문학은 이러한 진보성으로 하여 로동계급을 비롯한 인민들을 반일애국정신으로 계몽각성시키는데 기여하였을뿐아니라 계몽기가요와 같은 비판적사실주의가요음악이 발생발전하는데도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

다른 한편 이 시기 애국문화계몽을 호소하던 계몽가요(창가)의 쇠퇴와 더불어 새로운 가요예술에 대한 사회적요구가 높아가고있었던것도 계몽기가요의 발생발전에 영향을 주었다.

계몽가요는 19세기 후반기부터 애국적지식인들속에서 세차게 벌어진 애국문화운동의 영향속에 출현한 새로운 형태의 대중적가요였다.

당시 나라의 자주독립과 문명개화를 제창한 애국문화운동을 반영하여나온 계몽가요는 반침략, 반봉건적인 내용과 시대상에 어울리는 근대적인 선률양식이 잘 결합된것으로 하여 청소년학생들은 물론 광범한 대중속에 널리 보급되면서 인민들을 계몽각성시키는데서 일정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계몽가요는 3. 1인민봉기이후 일련의 요인들에 의해 한때 왕성하였던 창작과 보급이 중단되고 점차 쇠퇴되여갔다.

계몽가요가 쇠퇴되게 된것은 그 창작보급의 추동력으로 되였던 애국문화운동이 일제의 탄압으로 하여 자기의 력사적과제를 수행하지 못한채 중단되였을뿐아니라 계몽가요 역시 진보적인 가요에 대한 일제의 가혹한 탄압과 일본창가의 강제보급 등으로 인하여 자기 발전의 길을 잃게 된것과 련관되여있었다.

이와 같은 현실은 급속히 변화되는 시대와 인민들의 지향을 반영한 새로운 가요형식에 대한 사회적요구를 더욱 증대시켰다. 다시말하여 현실은 진보적인 음악예술인들로 하여금 민족적 및 계급적모순으로 가득찬 불합리한 사회현실을 폭로비판하고 인민들의 가슴속에 조국애와 민족애를 심어주며 그들을 반일애국정신으로 계몽시키는데 이바지할수 있는 새로운 내용과 형식의 노래들의 출현을 절박하게 요구하였다.

이것은 1920년대부터 여러가지 종류의 계몽기가요들이 발생발전하게 된 사회력사적요인으로 되였다.

계몽기가요 발생발전의 요인은 다음으로 당시 우리 나라에 새로운 종류와 형식의 가요음악이 발생발전할수 있는 음악적전제가 마련되여있은데 있다.

어느 시대의 음악예술이든지 빈터우에서 발생발전할수는 없다. 음악력사에서 획기적인 변화는 선행세대가 이룩하여놓은 민족음악유산의 진보적이며 인민적인 내용과 형식을 계승하여 그것을 새로운 시대의 요구에 맞게 발전시키는 기초우에서 이루어진다.

계몽기가요도 선행한 시기 구전민요를 비롯한 민족음악에서 이룩된 성과들을 디딤돌로 삼고 그의 진보적이며 인민적인 내용과 형식을 이어받음으로써 인민들의 민족적정서와 감정에 잘 맞는 다양한 가요종류들로 발생발전할수 있었다.

1920년대를 전후한 시기 우리 나라의 음악예술은 당대의 시대적요구와 인민들의 지향과 념원을 반영하면서 다양한 양상을 띠고 발전하였다.

무엇보다 구전민요를 비롯한 전반적인 음악작품들의 주제내용에서 인민들속에서 날로 커가는 일제에 대한 항거와 울분의 감정을 사실주의적으로 반영하려는 지향이 더없이 강화되였으며 이와 병행하여 음악형식에서도 새로운 근대음악적요소들이 보충되면서 일련의 질적변화를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 우리 인민들속에서 이미전부터 《신아리랑》가요군을 형성하여오던 여러가지 《아리랑》민요들과 《신고산타령》, 《흥타령》을 비롯한 전통적인 구전민요들이 종래의 세태적인 주제범위에서 벗어나 일제에 대한 분노와 항거의 감정을 담은 새로운 내용들을 보충하면서 널리 불리워졌다. 구전민요는 음악형식에서도 당대 인민들의 시대적미감을 반영하여 종래민요의 형식과 정서에서 벗어나 부르기 쉽고 평이한 선률음조와 선률적서술, 밝고 지향적인 정서, 지역적국한성의 극복 등으로 새로운 근대적경향을 나타내며 발전하였다.

한편 민족기악분야에서도 선행한 가야금산조음악이 이룩한 성과에 토대하여 당대의 시대상을 반영한 여러가지 악기별산조들이 창작보급되면서 사람들속에 반일애국의 감정과 민족의식을 고취하는데 적지 않은 작용을 하였다.

또한 이 시기에 해외에 나간 독립운동자들을 비롯한 국내외인민들속에서 나라를 빼앗긴 민족적울분과 뜨거운 조국애, 기어이 나라를 찾으려는 투쟁의지 등을 담은 《조국생각가》, 《망향가》, 《3. 1만세가》, 《독립운동가》와 같은 노래들이 창작되여 널리 불리우면서 반일감정과 독립의지를 시위하였다.

그런가 하면 3. 1인민봉기이후 중국 동북지방에서 활동하던 독립군들속에서 나라의 독립을 위한 싸움에 떨쳐나설것을 열렬히 호소한 《독립군가》, 《장검가》, 《군도를 높이 들고》를 비롯한 많은 독립군가요들이 창작보급되였다.

이와 같이 이 시기에 전통적인 구전민요를 비롯한 전반적인 음악예술분야에서 반일애국적인 주제들이 보다 전면에 나서고 반일투쟁현실을 사실주의적으로 반영하려는 지향이 강화되였을뿐아니라 당대 인민들의 시대적감정과 정서에 맞는 새로운 선률적특성들이 형성된것은 그것을 토대로 하여 다양한 계몽기가요종류들이 발생발전할수 있는 음악적전제로, 요인으로 되였다.

계몽기가요 발생발전의 요인은 다음으로 당시 우리 나라에 새로운 가요음악을 창작형상할수 있는 자체의 음악가력량이 준비되여있은데서도 찾아볼수 있다.

1920년대에 들어와 동요, 예술가요가 발생하고 1930년대초에 이르러 신민요와 대중가요가 활발하게 창작보급되게 된것은 그것을 맡아할수 있는 음악가, 작곡가력량이 일정하게나마 마련되여있은것과 떼여놓고 볼수 없다.

우리 나라에서 작곡가라는 직업적인 음악창작분업이 사회일반에 일찌기 형성되지 못한것은 낡고 보수적인 봉건사회관계가 낳은 후과의 하나였다.

20세기초에 들어와 자본주의적관계의 장성발전과 더불어 사회적분업의 세분화가 보다 심화되면서 전문음악가 또는 작곡가라는 직업적인 분업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초기에는 음악교육 및 계몽활동을 하던 사람들이 노래를 지어 보급하는것으로 시작되였으며 1920년대에 들어와 여러 경로를 통해 일정한 음악교육을 받은 연주가나 성악가들속에서 음악창작활동이 전개되면서 작곡가에 의한 음악창작이 점차 독자적인 사회적분업으로 형성되여갔다.

이 시기에 새로 자라난 작곡가들을 보면 일부 다른 나라에서 음악공부를 한 후 가요창작을 시작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국내의 여러 학교들에서 일정한 음악교육을 받고 교원으로 활동하면서 가요창작을 시작한 음악가들도 적지 않았다.

그중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민족음악과 양악을 다같이 배워주는 민간음악교육기관으로 세워진 조선정악전습소(1909년 9월에 발족된 조양구락부의 후신)와 평양에 있던 숭실중학교 등은 새 세대 음악가들을 키워내는데 기여한 학교들이였다.

1911년 6월 16일 정악유지회가 조직되여 교육강령을 개편하고 학생규모를 늘이면서 그 명칭을 조선정악전습소로 고치였다.

조선정악전습소는 개편후 1912년에 첫 졸업생을 낸데 이어 해마다 많은 졸업생들을 배출하였는데 그속에는 우리 나라의 첫 세대 작곡가들이라고 할수 있는 홍란파, 리상준 등이 있었다.

그런가 하면 평양숭실중학교는 음악전문교육기관은 아니였으나 수준이 높은 음악교수를 통하여 박태준, 조두남을 비롯한 여러명의 새 세대 작곡가들을 배출하였다.

이와 같이 이 시기 국내외의 여러 경로를 거쳐 새 세대 작곡가들이 자라나 일정하게나마 음악창작력량이 형성되게 된것은 1920년대초부터 동요와 예술가요와 같은 새로운 계몽기가요종류들이 적극 창작보급될수 있은 중요한 요인으로 되였다.

1930년대에는 당시 우리 나라에 생겨난 여러 레코드회사들에 새로 자라난 작곡가들을 비롯한 문예인집단이 형성되고 이들의 적극적인 창조활동에 의하여 대중가요, 신민요들이 급속히 창작보급되였다.

 

3

상 식

카프의 음악활동

 

카프는 조선프로레타리아문학예술총동맹의 략칭이다.

카프는 1923년에 이미 조직되였던 프로레타리아문학단체인 《염군사》를 모체로 하여 1925년에 조직되였다.

염군사시기인 1924년경에 음악부를 내왔으나 당시 우리 나라에 음악전문가가 얼마 없는데다가 로동계급의 선진사상으로 준비된 음악가가 없다싶이 한 실정으로 하여 프로레타리아음악간부대렬을 꾸리지 못하였다.

그러나 로동청년, 학생청년들로 염군합창단, 기악합주단(퉁소, 저대, 하모니카 등의 악기수로 구성)과 같은 예술소조들을 조직하여 로동자들을 돕기 위한 의연금모집공연, 수해민구조공연, 조선로농총동맹창립대회 축하공연을 비롯한 로농대중들을 위한 순회공연들을 진행하였다.

카프의 문예인들은 대중을 각성시키는데서 노래가 노는 역할을 인식하고 창가와 민요를 비롯한 기성곡조에 새로운 가사를 지어붙여 보급하는 한편 아동음악보급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아동예술대의 조직과 공연활동, 학생소년들과 무산계급의 자녀들의 계급의식을 높여줄수 있는 동요창작과 보급 등 로동계급의 리해관계를 대변하는 음악예술을 확립하기 위한 음악활동을 적극적으로 벌리였다.

이중 음악의 계급성에 대한 론쟁이 기본을 이루었는데 음악평론가 김관이 1930년 12월에 발표한 론문 《프로레타리아음악의 급무》, 1931년 1월에 발표한 론문 《음악시감-1931년을 맞이하면서》와 그후 그가 카프소속의 극작가, 동요작곡가였던 신고송과 작곡가 홍란파 등과 《동아일보》, 《조선일보》의 지면을 통하여 1931년 상반년기간에 벌린 론쟁들이 그 실례들이다.

카프의 음악활동은 일제의 가혹한 탄압으로 하여 더 활발하게 진행되지 못하고 1935년에 카프가 강제해산당한것과 함께 끝을 맺었다.

 

4

상 식

조선정악전습소

 

조선정악전습소는 1911년 6월에 조양구락부를 개편확대하여 발족된 우리 나라의 첫 근대적음악교육기관이다.

조양구락부는 1909년 9월 문명개화를 이룩하려는 사회적요구에 따라 민족음악가들과 일부 애국문화운동가들이 주동이 되여 창설한 음악교육기관이였다.

소장은 한석진, 교과감독은 당시 궁중아악을 담당한 국악사장이였던 함재운(1854-1916년, 당대 《거문고삼절》의 한사람), 음악담당 부교사장은 김경남(《거문고삼절》의 한사람으로서 기악교육을 담당함.), 가악 부교사장은 하순일(가곡, 가사교육을 담당), 거문고, 가야금, 무용학과 교사는 리병문(《거문고삼절》의 한사람)이 하였으며 이외 풍금교사 김인식 등이 있었다.

조양구락부는 구악부(민족음악부), 신악부(양악부)를 두고 각종 민족악기들과 풍금, 양금 등의 양악기들과 음악리론을 가르치는 한편 궁중음악을 대중화하고 악보편찬하는 사업을 진행하였다. 1910년 2월 2일부 《황성신문》이 《종로청년회관에서 개최된 연주회에 배화학당 녀학생이 풍금에 맞추어 창가를 부르고 조양구락부원들은 국악을 연주하여 래참객 1천 2백여명을 감격케 하였다더라.》라고 소개한것은 당시 조양구락부의 공연활동을 보여주는 실례의 하나이다.

조양구락부는 1911년 6월 16일 그 후원단체인 정악유지회가 조직되면서 명칭을 조선정악전습소로 고치고 학생규모를 늘이면서 교육체계도 일부 개편하였다.

종전의 구악부와 신악부를 그대로 두면서 학과를 더 늘여 교수과와 이습과를 새로 내왔는데 교수과는 음악을 처음 배우는 사람들을 체계적으로 교육하는것을, 이습과는 이미 음악을 배운 사람들에게 재교육주는것을 담당하였다.

이와 함께 교원진영을 강화하는데도 관심을 돌려 많은 인재들이 교사로 취임하였다.

학제는 전공에 따라 서로 달랐는데 구악부의 가곡, 거문고는 1년, 가야금, 단소는 6개월, 양금은 3개월로 하고 신악부의 성악, 풍금, 바이올린은 1년으로 하였다.

학생모집도 과에 따라 시기와 절차가 달랐는데 구악부는 수시로 모집하였으나 신악부는 매해 4월에만 모집하였다.

그중에서도 기악과는 음악기초지식이 있거나 전습소의 성악과를 졸업한 사람만이 응시할수 있게 하였는데 실례로 홍란파가 1913년 4월에 성악과를 졸업한 후 기악과에 입학하여 4현금을 전공한것을 들수 있다.

수업시간은 구악과는 매일, 신악부의 성악과는 매주 6회, 기악과는 3~5회로 정해져있었다.

전습소는 1912년 3월 첫 졸업생을 낸데 이어 해마다 많은 졸업생들을 내였는데 그중에는 널리 알려진 민족음악가들인 함화진(1912년 3월 신악부의 악리과 졸업), 리상준(1913년 4월 남창가곡 전공)과 작곡가 홍란파(본명 홍영후) 등이 있었다.

전습소는 교육과 함께 악보편찬사업에도 힘을 넣어 1914년까지의 기간에만도 《악학궤법》, 거문고 및 양금보로 된 가곡악보 《령산회상》(김인식 편찬), 《조선속곡집》(리상준 편찬)을 비롯한 적지 않은 악보집들을 편찬하여 후세에 전하였다.

조선정악전습소는 일제의 민족문화말살책동속에서도 민족음악 및 양악을 전공하는 음악가후비육성과 악보편찬 및 연주보급을 통하여 우리 나라 음악발전에 적지 않은 기여를 하였으며 일제가 최후발악하던 1944년에 페쇄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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