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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식은 김규식선생의 녀동생이였다. 미국에서 공부한 녀성으로서 은영의 음악적재능을 믿고 6살난 외동딸 김미리에게 피아노와 성악수강을 맡아달라고 부탁했던것이다. 김규식이 충칭(중경)에 있는 림시정부요인이여서 그의 녀동생인 김제식은 늘 경찰의 감시속에 들어있었다. 그때문에 안주인에게 은영의 도움이 더 절실했는지도 모른다.

그 집에서 서대문동의 리화녀전은 언덕 하나를 넘으면 된다. 은영은 단 한번도 전차를 타는 일이 없이 언덕을 넘어 걸어다니군 하였다. 전차를 타고 다니는것이 돈 한푼도 아껴쓰는 그에겐 어울리지 않는 사치였던것이다. 하여 그날도 수업을 마치자 집으로 걸어서 돌아오고있었다.

봄이였다. 1945년의 봄, 이제 얼마후이면 세계가 피로써 찾은 평화의 도래에 목메여 울게 될것이다. 그날이 멀지 않았다. 사람들은 왜놈들이 망할 날이 눈앞에 오고있다는것을 무고한 사람들을 닥치는대로 학살하는 광포해진 놈들의 피비린 만행에서, 신문마다 일본군장병들의 전몰에 대한 소식이 날을 따라 늘어나는데서, 고성기의 목쉰 군가에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렬차수송과 《기름 한방울이 피 한방울!》이라고 써붙인 구호에서, 피마주기름과 송탄유를 짜내며 집집의 쌀독까지 긁어가는 가혹한 수탈에서 그리고 거리를 행진해가는 일본군의 대렬속에 끼여있는 나어린 소년병들의 처량한 모습에서 매일같이 실감하고있었다.

봄, 은영의 마음속에도 화창한 봄이 오고있었다. 아직 다는 알수 없었지만 봄이 오는것을 느끼고있었다. 그리하여 처녀는 마음속의 선률과 리듬에 맞추어 률동적으로 걸음을 옮기고있었다. 언덕길을 오르며 고르롭게 호흡하였다. 따스한 볕을, 대기를, 해묵은 풀냄새를 마셨다. 가슴가득히 봄을 마시고있었다.

그런데 돌연 누군가 처녀의 선률과 리듬을 헝클어놓았다. 마주오던 웬 사람이 걸음을 멈추고 찬찬히 살펴보는것이였다.

은영은 어느때든 거리에서 사람들을 여겨보는 법이 없다. 자기가 목적한것외에는 모든것을 무심히 대하였다. 하여 그날도 은영은 그까짓 누가 살피건 말건 아랑곳 않고 가볍게 걸음만 다그쳤다. 가수는 무대를 타는 사람이다. 걸음새에도 음악이 있다. 걸음새의 선률과 리듬이 곧 처녀의 몸과 마음의 률동이다.

그러나 등뒤에 박히는 따가운 시선을 그저 외면할수가 없었다. 아니, 무엇인가 처녀의 기억을 파헤치는 느낌이 있었다.

걸음을 멈추고 홱 돌아섰다. 웬 낯모를 사람이 버긋이 웃고있었다. 후리후리한 키에 국방색모직양복을 입고 가죽장화를 신고있는 사람이다. 은영이를 향해 가볍게 머리를 숙이는데 어느새 얼굴이 붉어져있다. 원, 실없는 사람, 어처구니도 없지… 다시 돌따서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무엇인가가 처녀의 걸음을 또 멈추게 한다. 누구더라, 어데서 봤더라?… 천천히 머리를 돌린다.

아, 그 사람!… 그 사람이 분명했다.

반갑게 마주갔다. 그 사람도 급히 다가왔다.

《기억나십니까?》 그가 먼저 묻는 말이였다. 《그때 펑티엔(봉천)서… 그게 무슨 려관이던지…》

《예, 기억나구 말구요.》 은영은 무랍없이 섬약하고 하얀 손을 그에게 내밀었다. 《참, 그때 거기선… 피를 토하구… 그리구나선 병원에 실려갔더랬죠. 그렇지요?》

피를 토하고 병원에 실려간게 그리도 유쾌한 일이였던가!… 그들은 서로 마주보며 웃었다. 역시 그 사람은 녀자들이 얼핏 스쳐보기만 해도 반할 미남자였다. 어글어글한 눈에 부끄럼타는 웃음이 반디불처럼 아물거리는데 그것도 그의 온화하고 의젓한 풍격에 없어서는 안될 남다른 색채였다. 그들은 등판에서 뻗은 작은 길을 내려갔다. 사실 은영은 등판을 넘어가야 했으나 저도 모르게 그의 걸음을 따라섰던것이다. 언덕너머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해묵은 나무잎들과 흙토에서 풍기는 알싸한 냄새를 실어왔다. 로송들이 넓게 가지를 편 등판우에서는 새들이 소생하는 계절답게 열심히 재재거렸다. 길섶의 풀숲에서 제일 먼저 망울을 터친 할미꽃이 연보라빛의 꽃잎을 갸웃이 숙이고 수집게 미소하고있었다. 야들야들한 그 꽃잎을 가벼운 바람이 어루쓸었다. 다가오는 봄이 따뜻한 볕을 안고 숨쉬는것이였다.

《제 이름은 고종우입니다.》 그가 하는 말이였다. 《죽다가 살아난 몸이지요.》

그는 일본 동양음악대학출신으로서 지난해 일본청년성악콩클에서 1등을 한 바리톤가수였다. 대학을 졸업하자 종군예술인으로서 남방전선에 끌려가던중 병을 만나 쓰러졌었다고 한다. 조선사람인것으로 하여 엄살을 부린다고 무섭게 매질을 당하기도 했는데 피를 토하기 시작해서야 고향에 돌아가 치료받을수 있게 허가를 받았다. 은영이 펑티엔의 이름없는 려관에서 그를 우연히 본것은 바로 고향인 서울로 돌아가던 도중 병이 악화되여 렬차에서 내렸을 때의 일이였다.

그새 고종우는 병색이 가셔지고 몸이 좋아졌다. 그의 청에 못이겨 은영은 어느 한 음식점에 들리기로 했다.

언덕밑의 길거리에는 술집, 료리집과 각종 잡화상, 리발소며 가게방에 양복점, 양화점들이 좌우편으로 추녀를 맞대고 들어앉았는데 어느 2층벽돌양옥의 지붕우에 매단 확성기에서는 일본인 녀가수 세끼 다네꼬의 목쉰 노래소리가 봄날의 대기를 휘젓고있었다.

 

가도가도 끝없는 진창길을

허기진 배를 안고 행군하는데

철갑모엔 비방울만 내리치누나

 

《종군가수의 노래지요.》 고종우가 침울하게 하는 말이였다. 《은영씬 저 노래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뭐 별로… 후지아라 요시에가 늘 부르던 노래군요. 그자신이 작곡했다는 말도 있던데요.》

고종우는 놀랍다는듯 쳐다보고는 곧 눈길을 내려깔았다. 무엇때문인지 인상적인 짙은 눈섭이 흠칫거렸다.

《옳습니다. 남자가수가 부르던 노래를 지금은 녀가수가 받아물었군요. 은영씨도 아는지 모르겠지만 난 저 녀가수를 잘 압니다. 와다나베 하마꼬와 같이 일본가요계에선 유명한 인물이지요. 둘다 데이고 꾸레코드사에서 애상적인 노래를 취입한것으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는데 지금은 남방전선의 일본군장병들에게 필사항전을 웨치느라고 목이 다 쉬였습니다. 망해가는 제국의 신음소리같은게… 무서운 일이지요.》

그는 마지막 《무서운 일이지요.》 라는 말을 바리톤가수답게 목을 누르고 웅글게 발음했다.

사각모를 쓴 대학생 둘이 하늘색치마를 땅에 끄는 술취한 녀인을 껴안다싶이 하고 료리집에서 비틀거리며 나왔다. 나어린 일본인 기생이 문앞에까지 나와 바래주다가 고종우를 보고 허리가 부러질 지경으로 인사했다. 안으로 청하는것이였다. 은영이 묻는듯 한 눈빛을 던지자 고종우는 미간을 찡그렸다.

《다른데로 갑시다. 난 저안에서 울리는 일본노래만 들어도 구역질이 납니다.》

한동안 말없이 걸었다. 더 할 이야기가 없어진듯 했다. 벌써 은영은 자기가 그를 어떻게 따라나서게 됐는지 의아쩍게 여겨졌다. 반갑게 인사하고 헤여졌더라면 아릿한 마음의 여지라도 남겼을것을… 그처럼 온화하고 점잖은 미남자와 같이 걷는데도 무엇인가 불편해지는것은 무엇때문일가? 침묵이 너무 길게 느껴졌다. 무슨 말이든 해야만 했다.

《무슨 생각을 하세요?》 은영이 물었다.

《이제 소환장이 오면 어떻게 할가 생각을 했습니다.》

《소환장?》

《예, 남방전선이 아니면 관동군으로 끌어갈수도 있습니다. 병이 나은줄 알기만 하면… 그래서…》

《그래서요?》

《망설이고있습니다.》

은영은 자근자근 입술을 깨물었다. 의젓하나 결단은 없는것 같다. 이런 사람을 아버지라면 어떻게 했을가. 채찍질을 하며 홍달구었으리라. 그를 도와야만 했다, 끌어간다는데!…

끌어간다.… 은영은 많은 녀자들이 끌어간다는 소리를 제일 무서워한다는것을 생각하였다. 녀자들에게 있어서 끌어간다는것은 곧 정신대(위안부)를 의미했던것이다.

《달아나세요.》 은영이 가만히 속삭이였다. 《놈들이 끌어가기전에 말이죠!》

《어데로 말입니까?》

《아무데건, 멀리 외딴 섬에라도 가야죠.》

《?!…》

은영이를 바라보는 그의 두눈에 경탄의 빛이 어렸다. 처음 보는듯 새삼스럽게, 그것도 대번에 심장을 틀어잡는 매혹적인 녀성을 발견하고 감동에 겨워 진심으로 찬미하는 그런 눈빛으로 보고있었다.

《왜 그렇게 보세요?》

《이상하군요, 그렇게 수월히 말하는것이.》

《무서우세요?》

《아-니, 그저 너무도 단순하고 또 뭐랄가…》 그는 웃었다. 《고맙습니다, 은영씨.》

《뭣때문에요?》

《갈길을 대주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결심했단 말이죠?》

고종우는 말없이 머리를 끄덕이였다. 남방전선으로 끌려간다는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으므로 은영이 암시해준 그 길밖에 없었던것이다.

《이제보니》 하고 고종우는 은근한 목소리로 여전히 은영을 여겨보며 말했다. 《은영씬 참 놀라운데가 있군요. 수미씨는 그렇게 말하지 않던데…》

《수미? 그를 만났어요?》

《예. 그녀야 무대에 나서고있지 않습니까. 늘 자기를 소개하고있지요. 무대에서랑 신문에서랑.》

그들이 자주 만나고있다는것을 어렵지 않게 알수 있었다. 그런데 그 수미는 은영이를 알은체도 하지 않았었다.

은영은 언젠가 멋쟁이청년의 팔을 끼고 가던 수미가 눈앞에 마주친 자기를 못본체 하고 오연해서 걸어가던 일을 생각했다. 사랑의 욕구로 하여 미칠지경이던 그 녀자가 드디여 녀자들을 홀치는데서 유명했다는 배비장이라도 만난줄 알았는데!… 그 멋쟁이를 버리고 인제는 고종우 이 사람을 찾아낸 모양이다.

찾아냈으나 은영에게는 알리지 않았다. 은영은 소리없이 웃어버렸다.

그들은 마침 《송도신선로》라는 간판이 눈길을 잡아끄는 료리집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고종우가 활기를 띠고 은영에게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언제 졸업하는가, 부모님은 계신가, 아버님은 무슨 일을 보시는가 하는것들이였다. 아버지가 품팔이군이라는 말에 그는 깜짝 놀라는것 같았다. 명성이 자자한 리화녀전, 그것도 이제 곧 대학으로 인가를 받는다는 말도 있는 녀자들의 최고학당에서 품팔이군의 딸이 공부한다는것은 상상할수 없는 일이기때문이였다. 그리하여 자연히 화제는 은영의 일신상에로 옮겨지게 되였다. 김제식선생과 그의 6살난 외동딸, 지어는 그 집앞에 홍란파선생댁이 있어 자주 은영을 찾는다는것으로부터 많은 식솔을 거느린 아버지가 은영이를 김제식선생의 양딸처럼 맡겨버렸다는것에 이르기까지 끝없이 번져져갔다.

사실 고종우는 양주업과 메리야스전문의 기업을 하는 아버지의 덕에 일본동양음악대학까지 나올수 있었다. 그러나 한때 청년성악콩클에서 1등을 한 그였으나 조선사람이라는것으로 하여 죽음의 전선에 내던져지고있다. 하여 그는 은영의 미모와 성악적재능도 무참히 짓밟히지 않을가 하고 근심했다. 드물게 보는 미남자였지만 속되지 않았다. 오히려 소박하고 진실한, 가식이 없는 사람이였다. 헤여질 때 그는 은영의 손을 잡고 잠시 머뭇거렸다. 뜻하지 않던 그 순간의 지체로 하여 대뜸 얼굴이 붉어지는것 같았다. 고종우는 차마 처녀의 얼굴을 마주볼념을 못하고 팔소매에 묻은 실밥을 뜯는척 했다. 그 모양을 보고 은영은 웃었다.

《건강하세요. 종우씨.》

《다시 만나길… 바랍니다.》

며칠후 은영은 그가 보내준 편지를 받았다.

 

《은영씨, 고맙습니다. 은영씨가 나에게 용기를 주었습니다. 깊이 생각한 끝에 은영씨가 암시해준 곳으로 갑니다. 다시 만날 때까지 부디 안녕히!

                                                     고종우》

 

다시 며칠후엔 수미가 찾아왔다. 수업이 끝날 때까지 밖에서 오래 기다린것 같았다.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그래도 옷차림만은 선명하고 경쾌했다. 아니, 육감적이였다. 때이른감은 있지만 젖가슴에까지 패워들어간 새까만 도레스를 속에 입고 그우에는 역시 검은색 부인용코트를 대충 걸치고있는것이 누구든 청하기만 하면 아무때건 그것을 벗어던질 준비가 되여있다는것을 암시하는듯 했다. 그 녀자는 바로 고종우를 만났던 그 언덕길밑에 서있었다.

《수미!》

은영은 반가와 부르짖었다. 그러나 웬일인지 수미는 두눈을 가늘게 좁혀뜨고 바라볼뿐이였다.

《난 은영씨를 기다렸어.》 수미가 처음 한 말이였다. 《며칠전 여기서 고종우씨를 만났지?》

《?…》

은영은 파랗게 질려있는 그 녀자의 어수선하고 서먹서먹해진 얼굴을 경계하듯 지켜보았다. 무엇때문일가. 표정도 감정도 말투도 달라졌다. 어째서 수미는 이렇게 되여가는걸가?… 확실히 수미의 생활에서는 무엇인가 종잡기 어려운 변화가 또 있는것만 같았다. 그러니 어찌 놀라지 않을수 있으랴. 배우들이 매번 갈아입는 무대의상처럼 새로 나타날 때마다 수미는 전혀 알수 없는 인상으로 낯선 사람처럼 변모되군 하는것이다.

메마른 날씨였다. 한달째나 비는 내리지 않고 바람이 불어쳤다. 볕에 그슬린 햇풀들이 누렇게 시들고있었다.

수미가 또 물었다.

《은영씬 알고있을테지. 그가 어디에 숨었는지?…》

《?…》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그 녀자가 따지고드는듯 말끄러미 쳐다보는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깔깔한 경련이 은영의 목구멍으로 치밀어올랐다. 가만히 가로 치찢어진 수미의 두눈을 면바로 마주보기만 했다. 그러자 수미는 풀이 죽은것처럼 중얼거렸다.

《난 알아. 은영씬 조용하고 부드러워 보이지만 칼날같은데도 있다는걸. 그렇지만 나한테까지 숨길 필요야 있겠어? 그러지 말고 제발 말해줘. 그가 어데 있어요?》

그 녀자가 마지막으로 《어데 있어요?》라고 한 그 한마디엔 은영이에 대한 불신은 물론 사랑을 찾아 헤매는 한 녀성으로서의 필사적인 애원도 들어있었다.

《수미, 내 이제 다 말해줄게.》

비로소 은영은 그의 팔을 끼였다. 수미가 고종우를 두고 자기를 의심한다는것이 놀랍고 쓰거웠지만 그럴수도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수 없었다.

은영은 바싹 마른 잔디풀우로 그 녀자를 끌어다 앉혔다. 이윽고 고종우를 만나던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하나의 세부도 빼놓지 않고 마지막까지 죄다 말해주었다.

수미의 두눈에 핑 눈물이 어리였다. 은영의 담담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에서 울리는 따뜻한 정이 그 녀자를 감동시킨것 같았다. 입술을 깨물며 울음을 참더니 갑자기 두손을 맞잡고 마구 비벼대기 시작했다.

《경찰서에서 나를 찾겠지.》하고 그 녀자는 입을 삐죽거리며 말하는것이였다. 《고종우씨가 어데 갔는가구 따지고 드는거야. 하지만 내가 어떻게 알아?… 모른다니까 <네년이 왜 몰라. 늘 붙어다니지 않았는가!>하면서 <제국의 몽둥이맛을 봐야 정신이 들겠는가!> 하질 않겠어. 그래서 난 이 속옷을 막 헤치면서 젖가슴에 난 칼자리를 보여주었지. <봐라. 이걸 봐! 일본군헌병장교가 벌써 제국의 칼맛을 보여주었다!…> 했더니 그것들은 무슨 소린지 몰라 어리뻥해있다가 <이 쌍년같은기… 돼먹지 않게 여기가 어딘줄 알구 막 벗구 지랄이여? 썩 사라져!> 하면서 쫓아내질 않겠어. 쪽발이 왜놈의 개종자들! 어서 콱 망해뿌리지 않구.》

한바탕 욕지거리를 뱉고나서 수미는 또 두눈에 눈물을 가득 담았다.

《난 아무것도 바라는게 없어. 예술과 사랑, 그저 그것뿐!… 그런데 왜 다들 날 버릴가. 고종우씨도 그래. 왜 나한테 한마디 말도 없이 갔을가?… 내가 그렇게 미덥지 못한 녀자일가. 어디 말해봐요. 은영씨, 어째서 다들 날 버릴가, 응?!》

《누구도 수미씰 버리지 않아.》

은영이의 말에 그 녀자는 팔을 홱 내저었다.

《모르는 소리! 모두가 날 버리고있어. 정말이야. 난 그걸 참을수 없어. 견딜수 없어!》

그 녀자는 은영이가 만류하기도 전에 벌떡 일어섰다.

《나를 불쌍하게 보지 마. 그렇게 보고있는줄 알아. 난 그게 싫어. 정녕 싫어!》

《성내지 마. 그저 동무로서, 친구로서 근심할뿐이야. 난 정말 수미씨가 잘되기만…》

은영은 더 말을 잇지 못했다.

《이제 두고봐. 은영씬 나보담 더 비참하게 될거야.》

《뭐?》 은영이 물었다. 《정말 내가 그렇게 비참해졌으면 좋겠어?》

눈물이 끓고있던 수미의 눈이 싸늘하게 식었다.

《내가 이미 말했지?… 예인들의 운명이란 다 비참하다구. 그 길밖에 없는걸 어쩌겠어.》하고나서 수미는 낮게 속삭이였다. 《난 가끔 은영씨가 밉살스러워, 뭔가 믿고있는… 래일을 믿고있는 은영이가!》

수미는 또 한번 맞잡은 손을 비틀어대더니 휭 하니 돌따서 가버렸다.

은영은 그가 멀리 사라지도록 한자리에 굳어진채 움직이지 않고있었다. 무엇이 수미로 하여금 나를 질시하게 한것일가.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가? 혹시 고종우씨때문에?… 한데 그는 또 무엇때문에 수미에겐 한마디도 없이 사라져버린것일가?… 은영은 표표해서 가버린 수미의 일로 하여 마음이 어수선했지만 그 까닭을 아무리 해도 알수 없었다.

수미는 이후 오래도록 나타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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