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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 궁싯거리다가 겨우 쪽잠에 들었던 은영은 밖에서 울려온 이상한 소음에 놀라며 눈을 떴다. 투덕거리는 발자국소리들이 복도를 뛰여다니고있었다. 거친 말소리가 누군가를 욱박지르고 신음소리도 들려왔다.

은영이도 자리를 차고 미닫이문으로 다가서는데 가릉가릉 코를 골던 수미가 벌떡 뛰쳐일어났다.

《무슨 일이야?…》

《?…》

역시 수미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이불속에서 나오더니 은영이를 밀치며 미닫이문을 열었다. 밖을 내다보던 그 녀자가 소스라치는것이 알렸다.

《저런! 피를 토하구있어!》 수미가 속삭이듯 부르짖는 소리였다. 《누굴가… 어데서 봤을가?… 아니 어쩌믄!》

다음순간 수미는 문을 쭉 밀며 속치마바람으로 달려나갔다. 그 녀자로서는 능히 그럴수도 있었다. 아니면 무슨 큰 변이 났는지?… 속내의바람이여서 한쪽에 비켜서있던 은영은 활 열려진 미닫이문을 도로 닫으며 머리만 밖으로 조금 내밀었다.

순간 복도에 뿌려진 피자욱이 먼저 눈에 띄였다. 사람들이 하얀 와이샤쯔를 입은 한사람을 들쳐업고 복도 맨끝에 난 출입문으로 나가고있었다. 속치마바람의 수미가 벌써 팔을 늘어뜨린 그 사람을 부축하고있었다.

《마부! 마부가 어데 있어요?》

수미가 소리치고있다. 연송 소리치면서 피를 토한 사람과 한방에 들어있은것 같은 남자손님들과 함께 문밖으로 나가고있다. 일이 심상치 않았다. 은영은 재빨리 옷을 주어입고 그들을 뒤따라나갔다. 바삐 서두르면서도 수미의 부인용두루마기를 들고나가는것을 잊지 않았다. 속치마바람인 수미에게 그것을 걸쳐주어야 했다.

앙상하고 성깃성깃한 나무가지사이로 파르스름한 새벽안개가 흘러내리고있었다. 비는 멎은지 오랜듯 하다. 씻은듯이 맑게 개인 검푸른 하늘에서 뭇별들이 마지막으로 빛을 발하고있었다. 날이 밝고있는것이였다.

피를 토하던 사람은 마차우에 누워있었다. 괴롭게 숨을 몰아쉬는 그 사람의 제일 가까이에 서있는것은 수미였다. 하염없이 그 사람을 들여다보며 속치마의 하얀 끈만이 드리운 상처입은 가슴에 두손을 꼭 눌러대고있었다.

잠결에 불리워나온 마부가 투덜거리며 말을 끌어왔다. 누군가 환자의 옷을 가져왔는데 놀랍게도 누런 모직양복이였다. 보통사람이 아닌것 같다. 넥타이도 있고 번쩍거리는 고급가죽장화도 있었다. 얼핏 보기엔 일본인청년같았다.

종군기자이거나 대륙에 불려온 기술자일수도 있다. 그런데 수미는 무엇때문에 그렇듯 가슴을 움켜쥐고있는것인지?… 수미는 은영이가 내미는 검은색두루마기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재빨리 속삭이였다.

《어때, 미남자지?》

《?…》

아연해지지 않을수 없었다. 피를 토하는 사람을 앞에 놓고 이 무슨 망녕된 소리람!… 그러나 수미는 은영이의 놀라는 눈길에도 아랑곳 않고 줄곧 한가지 생각에만 옴해있는듯 했다.

《어제밤에》 하고 수미는 닭의 살이 돋아난 앞가슴을 어루쓸며 혼자소리처럼 중얼거렸다. 《이 미남자를 병원에서 봤어. 내가 치료 받으러갔을 때 말이지. 기차를 타고가다가 할수 없이 도중에 내렸다는데 온몸이 상처투성이야. 고문을 받은게 틀림없어. 왜놈들이 그랬을거야. 그 쪽발이놈들이!》

《그럼 일본사람이 아니구?》

은영의 놀란 소리에 수미는 머리를 세게 흔들었다.

《조선청년인데 뭐. 어제밤 우정 말해봤어.》

그들이 속삭이는 소리를 마차우에 번듯이 누워있던 그 젊은이가 들은것 같았다. 검푸른 눈을 가느스름히 뜨고 두 녀자를 바라보는데 송아지처럼 머룩머룩하고 상냥한 눈빛이였다. 순하고 착한 사람들의 호감을 사는 점잖은 청년이라는것이 알렸다. 체격도 그쯘했다. 그는 수미의 드러내놓은 앞가슴에 가닿던 눈길을 서둘러 은영이에게로 옮겼다. 무엇때문인지 은영이에게 입술을 찌긋하였다. 그가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는 알수 없으나 어쨌든 이국땅에서 만난 동포처녀들에게 따뜻한 미소를 보내려 한것임에는 틀림없었다.

《이보세요.》 수미가 그의 턱밑에 얼굴을 가져갔다. 《내가 생각나시죠? 어제 밤 병원에서 내가 인사하지 않았어요.》

청년은 머리를 끄덕이였다. 그러나 눈길은 여전히 은영이에게로 향했다. 아마도 거의나 벌거벗고있는듯 한 수미를 마주보기가 저어되였던 모양이다.

바로 이 젊은이가 박수미와 김은영 두 녀자의 한생에 지울수 없는 흔적을 남기게 될 운명을 지닌 사람이다. 그러나 그때 은영은 그것을 알지 못했다. 아니 알수도 없었다.…

리철사장을 비롯한 여러 순회대의 사람들이 무슨 일인가 해서 나왔을 때엔 벌써 마부가 채찍을 휘두르고있었다. 그들이 좀더 일찍 나왔어도 피를 토하던 그 젊은이의 이름은 즉시 밝혀졌으련만…

마차가 려관정문을 나서자 수미가 손을 들며 무엇인가 웨치려 했다. 그러나 그만 손을 든채 굳어져버렸다. 무엇을 웨칠수 있으랴. 은영은 파랗게 질려있는 수미의 얼굴을, 가늘게 떨리는 입술을 가만히 여겨보았다. 사랑을 찾는 녀자, 예술에서 성공을 꿈꾸었으나 희망을 잃고있는 녀자, 웬일인지 갑자기 수미가 한없이 불쌍하게 여겨졌다. 파랗게 불타던 그 녀자의 두눈에 고이고있는 한방울 눈물이 자기의 가슴에 얼음쪼각처럼 떨어져 내리는것을 느끼며 어깨를 떨었다.

《내가 찾던 사람이였어.》 하고 수미가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처음보는 순간에 벌써 알았지 뭐야. 바로 이 남자다, 내가 찾던 그 사람이다! 하고말이야. 의젓하고 대범한 미남자… 그런 사람을 여태 찾고찾았는데…》

비온 뒤끝이여서 새벽의 대기는 오싹하리만큼 신선한 기운에 차있었다. 사방에서 닭들이 홰를 치며 울어대였다.

리철사장이 희끗희끗한 머리를 손으로 빗으며 다가왔다.

《수미양, 누구 아는 사람이여?》

《예.》 수미는 머리도 돌리지 않고 무심히 뇌까렸다. 《오래전부터 아는 사람이죠. 이름은 모르지만…》

그 녀자의 무례한 대답에 은영은 거북했지만 흥행사로 산전수전 다 겪은 리철은 대수롭지 않게 코웃음치며 돌아섰다.

《옷이나 입소그려. 사람들이 보는데.》

수미는 부지중 소스라치듯 몸을 떨었다. 별안간 조롱받는 자기의 처지가 뼈저리게 느껴진것인지도 모른다. 은영은 그 녀자의 좁은 어깨에 두루마기를 걸쳐주었다.

어느덧 마차는 저멀리 언틀먼틀한 언덕을 굴러내리고있었다. 대도로쪽으로 가달진 그 언덕길을 내리면 이 일대에서 제일 큰 건물인 일본동양척식회사소속의 은행을 지나게 되고 그 다음은 병원이 있다. 수미는 마차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자리를 뜨지 않고있었다.…

 

《오케》순회대는 그날로 펑티엔(봉천)역에서 밤차를 타고 신의주를 향해 떠나게 되였다. 은영이 역두에 나가 그들을 바래주었다.

리철은 물론 작곡가 박시춘, 지휘자 김해송, 이름난 가수 남인수, 고복수, 리란영 그리고 리란영의 남동생이고 《락화류수》의 작곡가이며 연주가인 리봉룡 등이 눈물어린 작별의 인사말들을 남겼다. 그것은 가요계에서 차츰 조락해가는 전 세대의 류행가수들이 새롭게 등장하는 후대에 보내는 애수에 찬 희망과 기대이기도 하였다.

수미만이 지친듯 무심하였다.

《잘 있어.》 하고 그 녀자는 맥없이 말했다. 《그리구… 내가 한 말을 잊지 마.》

무엇을 잊지 말라고 하는것인지 그 녀자는 밝히지 않았다. 은영이는 쓸쓸해지는 마음을 누르며 애써 밝게 웃어보였다.

《잘 가, 부디 마음을 굳게 먹구…》

다음순간 은영은 수미가 자기의 말을 전혀 듣지 않고있다는것을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수미는 피발이 선 눈으로 먼 하늘가를 바라보고있었다. 바로 그 하늘에서는 시꺼먼 유리에 이슬이 돋는듯 별들이 껌벅이고있었다. 그것들은 수미의 두눈처럼 파리한 빛을 발하며 멀리 기약할수 없는 미지의 세계에로 자꾸만 눈짓하는것이였다.

은영은 수미의 공허한 눈길과 무심한 태도에 마음이 조여드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불행한 수미, 래일의 희망을 잃고있는 녀자, 그는 지금 무엇을 생각할가. 새벽에 보았던 그 젊은이를 그려보고있는것일가?…

아닐세라 수미는 갑자기 은영이의 두눈을 들여다보며 숨찬 목소리로 가늘게 속삭이였다.

《난 아까 병원에 가봤어. 피를 토하던 그 사람이 돌아오지 않길래 혹시나 해서… 그런데 벌써 끌어갔다질 않겠어, 헌병들이.… 왜 그랬을가, 어데로, 뭣때문에 그를 끌어갔을가?…》

《?!…》

은영이의 눈을 들여다보는 수미의 얼굴은 퍼릿한 빛이 돌 지경으로 창백하였다. 자기의 인생을 두손으로 부여잡고 목터지게 사랑을 웨치려 하나 목구멍이 칵 막혀 모지름쓰는듯 했다.

그때 발차를 알리는 긴 호각소리가 울렸다. 둥글모자를 쓴 중국인 남자역원이 뭐라고 소리쳤다. 누군가가 수미를 잡아끌었다. 수미는 그의 손을 뿌리치고 저절로 승강대에 올라섰다. 먼저 차에 올라선 사람들이 은영이에게 손을 들어 인사말을 급히 웨치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수미만은 암울해진 눈빛으로 시꺼먼 하늘끝만 바라보고있었다.

기적소리가 울리고 기차가 칙칙 거센 증기발을 내쏘았다. 찬바람이 텅빈 홈을 휩쓸었다. 때이른 가랑잎이며 휴지쪼각들이 어지러이 날렸다. 차바퀴들이 용을 쓰며 레루우를 굴러갔다. 후끈하고 텁텁한 증기발이 련속 은영의 얼굴에 들씌워졌다.

어느덧 기차는 뿌잇한 외등 저쪽으로, 끝없는 어둠속으로 멀어져갔다. 조만간 은영이도 가지 않으면 안될 그 길, 미지의 세계에로 아득히 뻗어간 두줄기 철길, 기차는 목메인 기적소리를 울리며 무덤굴처럼 시꺼멓고 으쓸한 그 어둠의 길로 숨가삐 달려가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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