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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꺼먼 밤하늘에서 비가 처지기 시작했다. 쇠테를 두른 마차바퀴가 찌국거리며 포석을 울렸다. 순회대가 려관에 이르렀을 때엔 대줄기같은 비가 줄기차게 내리고있었다.
리철사장과 순회대의 전체 배우들이 은영이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다. 리철사장이 직접 나서서 은영이를 리란영이 들어있는 방에서 하루밤 묵게 하였다. 그런데 방에 들어서는데 한 남자가수가 따라왔다. 리철사장이 그를 가리키며 소개했다.
《서로 알고 지내오. 여기 이분은 고복수, <타향살이>노래로 유명한 가수이구 그담…》
리란영에 대해서는 더더욱 자랑을 담아 소개했다. 그리고 그들 리란영과 고복수에게는 은영양이 어릴 때 벌써 전국녀중생들의 성악콩클에서 1등을 했다는것, 그때 벌써 자기가 은영양을 점찍어놓고있었다는 말도 덧붙였다.
알고보니 고복수는 리란영이 가요계에 나타나기전에 벌써 《타향살이》로 일약 명성을 떨친 가수였으나 지금은 란영이를 아무런 사심도 없이 앞자리에 내세우고있었다.
피기까지 가셔진 새하얀 얼굴에 병색이 짙은 리란영은 너무도 끔찍한 일을 겪고난 후여서 녹초가 되여버린듯 했다. 12살 어린 나이에 막간가수로 무대에 나섰던 리란영, 16살때엔 리철사장을 만나 그의 소개로 작곡가 손목인이 그녀에게 맞는 노래를 작곡한 《목포의 눈물》로 일약 명성을 떨치였다. 그리하여 옥례라는 본명대신 란영이라는 예명으로 세상에 알려지면서 어느덧 10년 세월이 흘렀다고 한다. 그새 명성은 얻었지만 많은 류행가수들처럼 생활의 세파에 부대끼며 지쳐버리고 노그라지고있는것이 력연하였다.
고복수가 리란영의 방에 찾아온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였다. 그는 새로운 창법으로, 특이한 소리색갈과 풍만한 음역으로 노래하는 쏘프라노가수인 은영이를 만나고싶었던것이다. 흥행악단의 류행가수들과는 다른 음악세대의 출현에 커다란 관심을 돌리고있었던것이다.
그들 고복수와 리란영은 은영이 어떤 운명의 연줄로 여기 펑티엔(봉천)에까지 왔는지 무척 알고싶어했다. 그러나 막상 이야기가 시작되던 찰나 문이 벌컥 열렸다. 병원에 치료받으러 갔던 수미가 문앞에 버티고있었다.
《아, 란영언니, 미안해요. 이 아씬 내가 데리구가겠어요.》
리란영은 말없이 고복수에게 묻는듯 한 시선을 던졌다. 그러나 고복수도 수미의 파리한 눈길앞에서 허둥거렸다.
수미가 방으로 들어서며 은영이앞에 무릎꿇고앉았다. 그 녀자한테서 소독수냄새가 확 풍겼다.
《나랑 같이 가, 여기 옆방이야.》
은영이도 수미와 같이 하루밤을 보내고싶었다. 지나온 10년세월 어떤 운명의 길을 걸었는지 무척 알고싶었다.
《언니.》 수미가 또 말했다. 《그래두 되지요, 반대없겠죠?》
리란영이 머리를 끄덕이였다.
《수미가 바라는 일을 누가 막는다던! 그렇지만 은영이 생각은 어떨지…》
《가겠어요.》
은영이가 말했다.
《사실 난 수미씨와 오래전에 만났댔는데… 같이 있고싶어요.》
수미가 웃으며 그를 잡아끌었다.
《어서 가요. 은영이, 란영언니나 고선생은 좀 갑갑해.》
수미는 거의나 어거지로 은영을 복도로 끌어내며 그들이 듣는것도 꺼림없이 주절거렸다.
《란영언닌 자기의 잘난 님한테서 버림받을가봐 늘 우는 소리뿐이구 고복수오빤 보살펴줄 녀인이 없어 밤낮 속을 앓구있지. 정말 따분하기란!…》
그는 여기서 제멋대로 살아가는것 같았다. 난삽한 성미그대로 자기 방의 미닫이문도 와락 밀어제꼈다. 마치 오라를 지워 끌어온 죄인처럼 은영이를 방에 밀어넣으며 또 중얼거렸다.
《우리 쇼단지휘자이구 작곡가인 김해송이 알지? 아, 거 백년설이 불러서 유명해진 <고향설>노래의 작곡가. 그가 바로 란영언니 남편되는 사람이지뭐. 헌데 그 량반 녀자편력에서도 유명한 엎어말이야. 내게두 지분거리더니 요샌 김은희란 새로 온 녀자를 엎어말이하구있어.》
어느새 수미는 10년전 그날처럼 다정해지고 삽삽해져서 꺼리낌없이 너나들이로 넘어가고있었다.
남포등이 가물거렸다. 밖에서는 여전히 비소리가 소연했다. 수미가 술과 안주를 내놓았다. 은영이 머리를 흔들자 가만히 눈여겨보는데 그 눈빛이 쓸쓸했다.
《두고봐. 꼭 나처럼 될거야.》
은영은 그가 권하는 방석우에 앉으며 추운듯 몸을 옹송그렸다. 무엇인가 다정한 이야기를 나누고싶었지만 그럴 기회가 차례지지 않는것이였다.
술은 녀자들에게 먼저 눈물을 가져다준다. 수미는 서너잔 술에 벌써 눈물을 짜며 설분을 토하기 시작했다.
《난 말이지. 영화배우를 꿈꿨드랬어. 은영이가 고향에 내려간 후 난 일본에 건너가 도꾜와 오사까, 고베를 돌아다니며 단역에도 출연해봤던거야. <이즈의 무희>라는 일본영화를 본적이 있어? 못 봤을거야. 거기선 꽤 괜찮은 역을 했더랬지.… 그런데 영화감독이란 녀석이 날 기어이 스토립퍼(라체배우)로 쓰겠다는거야. 내 눈매랑 몸매가 스토립댄서 <라체무용수>를 찜쪄먹는다나. 그래 난 생각해봤어. 벗으라문 뭐 못 벗을게 뭐야. 하지만 열번, 스무번 홀딱 벗은들 뭘해? 그저 그뿐인걸. 주역하나 받지 못하구 몸매자랑이나 하구 침대에서 딩굴기나 하는 그게 무슨 배우야?… 관중이 지루해할사 하문 한장면 끼여넣는 노리개이지. 세상에 날려보자구 했는데 고작 스토립퍼야?… 리철사장을 만나지 않았더라문 그렇게 살아왔을지도 몰라. 밤낮 벗었다, 입었다 하면서… 그런데 오늘은 또 이게 무슨 꼴이람. 이것봐. 이걸, 이걸!…》
갑자기 수미는 가슴앞섶을 헤치며 새되게 부르짖었다.
《이렇게 만들어놨어. 그 쪽발이장교놈이. 원숭이같은 왜놈의 새끼가 이 꼴루 만들어놨어!》
젖가슴을 스쳐간 칼자리에는 아직도 피가 말라붙어있었다. 엿물같이 누런 약까지 발라놓아 보기에도 으쓸하였다.
은영이 그의 옷섶을 여미여주었다. 무어라고 할 말도 없었다. 수미가 이를 갈며 왜놈들을 저주하는 소리를 끝까지 듣고만 있었다. 자기의 흥분과 충동을 결코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은영이였다. 소리치며 저주하느니 칼을 들고 나서는것이 그에겐 더 어울리는것이였다. 하기에 은영은 분노와 치욕에 떨고있는 수미를 달래지도 않았고 제지하지도 않았다. 그저 숯불처럼 타오른 격정이 가라앉기만 기다리고있었다.
오래지 않아 수미는 이글거리는 가슴속 불을 껐다. 그러나 이윽토록 수미의 치째진 눈에는 슬픔과 오욕이 가물거리고있었다.
《난 팔자가 사나와. 남보다 일찍 무대에 섰지 뭐야. 은영이와 만났을 그땐 어린 막간가수, 저 란영언니처럼 말이지. 헌데 몇해사이에 무대에 서는 법이랑 관객의 분위기를 읽는 법이랑 배우고나니까 성대가 변하기 시작했어. 마침 <삼천리가극단>이라는데서 연극을 하라겠지. 아니, 그 얘긴 그만두자구. 이놈의 세상에선 아무것두 안돼. 녀자들이 갈길은 하나뿐이야.…》
남포등불빛에 비쳐진 수미의 얼굴은 시뿌득하고 어쩐지 퍼런빛이 돌 지경으로 창백하였다.
《그런데 은영인 어찌 된거지? 그 고운 얼굴에 그 고운 목소리를 가지구 여기서 왜놈계집들한테 <사께와 나미다까>(일본류행가 <술은 눈물인가>)나 불러줘?》
《난 세계명곡만 배워줘.》
《같구 같은거야!》
밖에서는 비가 그칠줄을 몰랐다. 처마끝에서 떨어지는 물소리가 은영의 마음속에도 주룩주룩 떨어지며 차디찬 물보라를 날리는듯싶었다. 복도에서 웬 술 취한 손님이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꽥꽥 목청을 돋구며 소리를 뽑아대는것이 들렸다.
서산에 해가 저물도다
헤이리이 산노-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있노라니 은영은 숨이 탁탁 막히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끊임없는 비소리와 수미의 푸념에 넌덜머리가 났다. 예쁘고 요염한가 하면 암상스러워보이기도 하는 이 수미가 과연 전날 나비같던 처녀애가 옳은가 하는 의혹심에 마음이 어수선해졌다.
수미가 또 술잔을 기울이고나서 한숨을 내쉬였다.
《내 말만 지껄였구나. 미안해. 이젠 은영이 얘길 해봐. 그새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리구 그때 은영이를 데리고왔던 그 녀선생에 대해서랑. 참 그 녀선생이름이 뭐랬더라?》
《리채옥.》
《오- 참 좋은 선생이였어, 그렇지?》
《…》
은영은 갑자기 혀가 말라드는것을 느꼈다.
《왜 그래? 그 선생이 지금 어데 계시지?》
《모르겠어.》
《뭐?》
《그런 일이 있었어.》
은영은 잠시 입을 다물고 흐느꼈다. 아름다운 추억으로만 새겨진 고향이 아니였다. 두만강류역의 고향 회령땅. 그 어디에 씨앗을 묻어도 알알이 열매로 맺힌다는 옥토, 인심도 후하고 미인들이 많아서 예로부터 《회령새애기》라 하면 살림살이를 빼여나게 잘하고 마음씨 후덕하며 결곡한것으로도 유명했다고 한다. 리채옥선생도 교양이 있고 미모도 갖춘 녀성이여서 불우한 운명의 바오래기를 목에 걸지 않을수 없었다.
언제든 잊을수 없는 그날의 끔찍한 사연이 떠올랐다. 세마리의 사나운 세퍼트들이 달려들던 팔을천너머의 서의봉기슭, 야밤의 그 둔덕길에서 채옥선생에게 달려든 개들은 이발을 드러내고 사납게 으르렁거리며 녀선생의 두루마기와 치마자락을 찢어발기고 손등과 목덜미를 물어뜯었었다.
《우리 고향인 회령에 언제부터인지 왜놈별장이 하나 생겼어.》 하고 은영은 으시시 몸을 떨며 이야기했다. 《무슨 광업주식회사 사장이란 놈이 경치좋고 토질과 물이 좋은 우리 고장에 벽돌양옥을 세웠던거야. 으리으리한 집이였어, 피아노도 있구. 왜놈주인이 채옥선생의 피아노솜씨에 반해서 자주 청하군 했지. 나도 따라다녔구. 그런데 하루는 그놈이 무슨 구실을 붙여 나를 먼저 보내는게 아니겠어. 그렇지만 난 멀리 가지 않구 선생을 기다렸는데… 갑자기 채옥선생이 막 울면서 뛰쳐나오는거야. 옷이 찢겨지구 말이 아니였어. 그런데… 글쎄 그 왜놈이… 개들까지 풀어서…》
숨이 차올라 더 말을 이을수 없었다. 그처럼 무시무시하던 그 밤의 일을 생각만 해도 오싹 소름이 끼치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그 왜놈이.》 하고 수미가 다우쳐물었다. 《채옥선생을 더럽히려고 했단 말이지, 응?》
《그랬던거야. 채옥선생이 뿌리치고나오니 개들까지 풀었구.》
《죽일 놈의 왜놈새끼들!》
수미가 이발을 사려물고 부르짖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
《마침 우리 아버지가 장대기를 휘둘러서 개들을 쫓았어. 아버진 우리가 늦어진다고 걱정해서 따라왔던거야.》
《…》
잠시 침묵이 흘렀다. 달아올랐던 흥분의 물결이 갈앉기를 기다려 은영은 이야기를 계속했다.
《채옥선생이 아니였더면 난 그냥 묻혀버렸을거야. 그 선생이 아버지한테 날 유명한 가수로 키우자고 말하군 했지. 아버지도 그 선생을 전적으로 믿었구… 그러던 선생이 개한테 뜯기워 병신이 될줄이야… 일본에서도 한다하는 피아노연주가였다던데 무슨 일로 고향에 내려왔댔는지는 나도 잘 몰라. 개한테 뜯기워 손병신이 되여 다신 피아노를 탈수 없이 됐어. 얼마후엔 두만강건너 중국 룽징(룡정)인가 하는데로 가버렸구. 외삼촌이 선생을 오라구 불렀다던지…》
은영은 그후 왜놈별장이 불에 타버린 일에 대해서는 더 말하지 않았다. 거기에 불을 지른 사람은 바로 아버지였던것이다.
《더러운 세상이야.》 수미가 씹어뱉듯 말하였다. 《죄다 망치구 말아. 이놈의 세상에선… 흥행단이란건 또 뭐야. 여기서두 같구 같은거야. 아무데서나 배우들이란 그저 구경거리나 노리개지!》
다다미장밑에서 빈대들이 욱실거렸다. 구질구질 내리는 비소리와 우수수 나무가지를 흔드는 바람소리가 소연해지고 파리똥이 가득 점찍혀있는 남포등까지 거물거물해졌다.
수미는 또 잔을 기울였다.
《그래 은영인 선생도 없이 어떻게 공불했어?》
《함흥영생녀중을 다녔지. 그건 채옥선생이 도운거구. 그담 리화녀전을 다니다가…》
《리화녀전? 그러니 서울에서?》
《응, 학비를 댈수 없어 여기까지 왔구.》
《그-래?!…》
더이상 말을 이을 필요가 없었다. 수미가 비스듬히 모로 쓰러졌다. 버들잎같은 몸에 술이 지나쳤던것 같다.
비소리가 세차졌다. 고달픈 순회대의 잠자리를 적셔주는 비소리, 처음으로 은영은 자기의 꿈도 이처럼 짓이겨지지 않을가 하는 불안과 공포에 몸이 떨리는것을 느꼈다. 수미와 《오케》레코드사의 일이 남의 일같지 않았다. 은영이 자기가 걸어가야 할 수난의 길이 바로 오늘 여기서 명백하게 암시되지 않았던가!… 그러나 리화녀전을 마저 수료하고나면, 그 누구도 견줄수 없는 가수로 등장하기만 하면 달리되지 않을가. 그때엔 모든것이 달라지지 않을가?…
아버지가 바로 그것을 바랐고 그것을 위해 모든것을 바쳤다. 아버지 김학송은 청진부두와 정어리공장에서 일하다가 두만강건너 룽징에서 중학을 나온 후 회령지구 미국선교사들에게 조선말을 가르쳤는가 하면 교회당합창단의 지휘자, 신흥학교의 국어와 영어를 가르치는 교원, 품팔이군, 소작농… 못해본 일이 없었다.
강직한가 하면 산만하고 다채롭기도 했던 아버지, 남달리 굵고 부드러운 목소리와 천부적인 음악적재능도 가진 아버지였지만 알수 없는 일에 몰두하며 자주 두만강을 건너다녔고 광부와 탄부, 배몰이군, 철도로동자, 린근의 작인들, 행상군, 목사, 청부업자, 지어 순사들과도 꺼리낌없이 사귀고 밀려다녔다. 어찌보면 소란스러운 아버지였지만 은영이만은 엄하게 키웠다. 사실말이지 그 아버지가 채옥선생에 앞서 은영이에게 음악의 넋을 키워주었다. 철부지 어린것을 채찍으로 후려치며 악보를 익히게 했고 일본에서 류학하고 온 보통학교의 녀교원 리채옥에게 부탁하여 피아노기초와 성악창법을 가르치게 했다. 온 식구가 입에 풀칠도 하기 어려운 형편이였지만 서울에서 열리는 전국녀중생들의 성악콩클에 보내려고 가산을 팔아 려비까지 장만해준 아버지였다. 그때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었다.
《꽉새가 새끼들에게 어떻게 나는 재간을 배워주는지 아느냐? 벼랑턱에 끌어다놓고 밑으로 떨궈버린단다. 자 날아라! 하고 말이지. 날개를 펴고 날면 꽉새가 되는거고 그냥 떨어지면 죽고마는거야.》
아버지는 바로 그렇게 딸을 키웠다. 하여 은영이도 이상하게 자랐다. 채찍을 맞으면서도 어린 은영은 입을 꼭 다물고 한마디 신음소리도 없이 아픔과 설음을 씹어삼키군 했다.
《지독한 년이야.》 하고 언젠가 아버지는 말했다. 《한번 우는걸 못 보겠거든.》
그 말에 어머니는 혀를 찼다.
《우는 꿩이 먼저 채운다 했수다. 차라리 그게 낫지비. 계집애 입싼것 어따 쓰겠수.》
《그래두 울 때 가선 울어야지!》
아마도 독한 마음이 은영이에게도 있은것 같다. 그래서 전국경연에도 입을 잔뜩 오무리고 말한마디 없이 올라갔을것이다.
그 시절 아버지의 머리속엔 딸의 장래가 손금처럼 명백히 그려져있었던것 같다. 또한 은영이 가야 할 앞길에 미리 하나하나의 리정표들을 세워보고있은것인지도 모른다. 집살림엔 낯도 돌리지 않던 아버지, 때로는 술에 빠지고 때로는 도박에 미쳐돌아가는가 하면 알수 없는 사람들과 수군거리며 밤낮 떠돌아다니던 아버지였다. 언제 한번 딸의 머리를 쓸어주는 일도 없이 엄한 눈길로 지켜보기만 하던 아버지, 그러던 아버지가 돌연 자취를 감추었다. 왜놈별장에 불을 지른것도 벼랑굽이바위에서 순사놈을 때려눕힌것도 아버지라고 한다. 그때부터 순사들이 뻔질나게 집에 뛰여들어 장독을 부시고 김치움까지 뒤지군 했다. 그것은 은영이가 자기의 성악적재능을 밑천으로 리화녀전 음악과에 입학했을 때의 일이였다.
지금 아버지는 어디에 계실가. 은영이 중국 동북의 펑티엔에 와있는것을 아시면 뭐라고 하실가. 깜짝 놀라실가, 노하실가, 아니면 어처구니없어하거나 치하하실가?… 은영은 그때 집에 편지로만 알리고 어머니의 허락도 없이 국경을 넘어왔던것이다.…
잠들수 없었다. 귀뚜라미가 씨륵거리고 천정우에서는 쥐새끼들이 신명이 나서 술래잡이를 벌리고있는것 같았다. 날카로운 발톱들이 천정의 도배지를 찌르며 찍찍거리는가 하면 부리나케 달아나고 또 투다닥닥 맞붙어돌아가는것이 알렸다. 비소리는 또 왜 그처럼 끝없이, 음산하게 구질거리는지…
잠든줄 알았던 수미가 가릉거리며 일어나앉았다.
《안되겠어. 못 참겠어.》
《왜, 어디 아파서 그래?》
《취하여라. 이놈의 세상에선 취해야만 해.》 수미가 신음소리처럼 부르짖었다. 《살아도 한세상, 죽어도 한세상… 취하여라!》
수미는 또 술병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것을 보자 은영은 속이 메슥메슥해나는것을 참을수 없었다. 그리고… 찌르는듯 한 아픔이 등골을 타고 스쳐가는것을 느끼며 다시 눈을 감고 말았다.
무서운 밤이였다. 낮에 있었던 일만 생각해도 심장이 찢어지는데 그처럼 사랑스럽던 수미가 이런 꼴이 된것이 슬프고 무서웠다. 두 눈이 약간 치째진 이 녀자, 남다른 매력도 가진 수미가 어떻게 되여 이런 지경에 이르렀단 말인가?… 수미는 어느덧 마음까지 치째져있는것이 분명하였다. 어째서 애젊은 나이에, 세상에 날려보려던 그가 파멸의 독을 마시기 시작한것일가?…
《한 남자가 배워주었어.》 수미가 하는 말이였다. 《내가 사랑했던 한 남자… 나를 배반했지. 그러면서 이걸 배워주겠지. 살기 편하라구, 자기를 잊으라구…》
《?…》
《빌어먹을!》 수미가 또 부르짖었다. 《난 사랑하구싶어. 사랑과 예술, 이게 내 인생의 목적이였어. 그런데 이게 뭐야. 응? 모두가 나를 배반하구있어. 예술이 배반하구 사랑이 날 배반하구… 그럼 난 어쩌라는거야, 어쩌라는거야?!》
수미는 방바닥의 다다미장을 허비며 몸부림쳐 울기 시작했다. 은영은 그저 놀라서 굳어져있을뿐이였다. 은영이에겐 아직 사랑하는 남자도 없을뿐아니라 배반이라는 말도 알지 못하고있는것이였다.
진저리나는 시간이 얼마간 흘렀다. 수미가 머리를 들었다. 은영이를 쳐다보는 수미의 치째진 눈은 풀어져있었다. 그러나 말소리만은 또렷했다.
《난 배우야.》 하고 수미는 낮고도 빠르게 말했다. 《유명한 배우, 세상에 날리는 배우가 되고싶었어. 어디 말해봐. 그럼 안되는가? 응?!》
《아니, 그거야 좋은 일이지. 나도 가수를… 이름난 가수가 될 꿈을 꾸고있는걸.》
은영의 대답에 수미는 갑작스레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철부지! 바보!…》
《왜?》
《어떻게 이름난 가수가 된다는거지? 고작 란영언니처럼 눈물이나 짜는 류행가수 아니면 나처럼 되구말아. 술주정뱅이 나처럼!》
《?!》
은영은 몸서리치며 그에게서 조금 물러나려고 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수미는 은영이를 놓아주지 않았다. 은영의 두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수미는 속삭이기 시작했다.
《내가 미친년으로 보일테지. 안그래?… 두고보라니까. 가인박명이라구 은영이도 꼭 이렇게 돼.》
《아니, 안돼. 그래선 안돼.》 은영이 그를 붙안고 마구 흔들었다. 《제발 술을 끊어. 수민 재능있는 배우가 아냐? 이제 바라던대로 세상에 날릴거야. 정말이야.》
《허튼소리, 나는 물론 은영이도 안돼. 절대로 안돼!》
가르릉거리는 그 가는 목소리에는 유리장을 긁는듯 한 소음이 들어있었다. 은영은 그를 붙안고 막 울고싶었다. 어떻게 해야 이 수미를 도울수 있단 말인가?… 그럴 힘이 은영이에게는 없었다. 나른해지는 수미를 흔들어댈뿐 다른 방도는 없었다. 그것이 더더욱 그를 슬프게 하고 몸부림치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