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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나라의 곳곳에서는 대오에 숨어있는 반혁명분자들, 다시말하여 간첩, 파괴암해분자들, 자수하지 않고 정체를 숨긴 《치안대》가담자, 악질적인 반동분자들을 색출하기 위한 투쟁을 전군중적운동으로 벌렸다. 그리하여 가면을 쓰고있던자들의 정체가 드러나고 어둠속에 숨어있던 많은 반동분자들이 적발되였다. 그러나 이 투쟁과정에 일부 편협한 사람들과 불순분자들로 하여 무고한 사람들이 오명을 쓰거나 몰리해로 고통을 겪는 일도 없지 않았다.
문화예술부문의 지도사업은 내각참사인 라윤천이 맡아하였다.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모함에 걸려들었는데 그들중에는 고종우와 강상일, 은영이도 있었다. 그러나 라윤천은 서뿔리 은영이를 매장하려 하지 않았다. 나날이 명성을 떨치는 녀가수 김은영을 서서히, 소리없이 인기의 절정에서 끌어내리지 않으면 안되였다. 김은영은 비록 한 녀가수였지만 당에서 아끼고 사랑하는 명배우라는것을 잘 알고있는 그였으므로 조심하여야 했던것이다. 하여 출신과 경력에서 허물이 있는 고종우와 강상일 등을 먼저 조겨대여 죄상을 만들고 그러한 그물에 은영이도 걸려들게 하려고 했었다. 소문없이 목조르기를 하려는것이였다. 격한 성미인 강상일을 사소한 리유로 후려치는것 역시 주되는 목표인 김은영을 매장하기 위한 수단이였다. 라윤천이 얼마나 그를 증오하고 무섭게 이를 갈고있었는지 알았더라면 은영은 극도의 공포와 불안에 소스라쳤을것이다.
그러나 은영은 알지 못했다.
그날 은영은 중국인민지원군을 환송하는 축하공연에서 《신강호》를 비롯한 중국노래들을 불러 만장의 환호를 받았다. 이번에도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김은영동무가 멋들어진 춤가락을 배합하여 노래를 잘 불렀다고, 역시 자랑할만 한 명가수라고 과분한 치하를 주시였다.
인기의 절정은 곧 행복의 절정이였다. 터질것 같은 흥분에 겨워 은영은 한정애와 같이 수도의 밤거리를 걸어 새로 배정받은 집으로 돌아가고있었다. 여느때 같으면 뻐스를 타고 총총히 갔으련만 오늘은 은영이도 한정애도 가벼운 걸음으로 새로 일떠선 아빠트들을 지나갔다. 뻐스를 타면 그들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많아서 사방에서 쑥덕거리는 소리와 뭇사람들의 선망어린 눈길이 집중되여 거북스럽기도 하거니와 때로는 불길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훔쳐보다 못해 시까슬르는 사내들로 하여 고달프기도 한것이다.
《언니, 오늘은 걸어서 가자요.》
《그래.》
걷는것이 좋았다. 5. 1절행사때의 명예위병들처럼 곧추 줄지어 늘어선 가로등밑을 걸으며 수령님의 말씀을 되새겨보고 춤추듯 걷는것이 한없이 즐거웠다.
한무리의 청년들이 맥주집에서 쓸어나오며 왁작거렸다. 장대재의 공원에서는 처녀들이 노래를 부르고있었다. 은영이가 직녀, 고종우가 옥황상제역을 맡고있는 민족가극 《견우직녀》에 나오는 직녀의 아리아였다.
날개옷 어디 갔나 탐내여 가져갔나
오늘로 올라가야 래일부터 베를 짜지
바람에 불려갔나 백학이 물어갔나
이 일을 어이하랴 옥황님 난 못 가요
은영은 부지중 그들의 노래를 속으로 따라불렀다. 《옥황님 난 못 가요》하는 대목에서는 집에서 기다릴 현순이를 생각하며 《옥황님 나는 늦어요.》하고 웃으며 속삭이였다.
《옥황님?》 한정애가 무엇때문인지 놀란 눈빛으로 그를 여겨보았다. 《언닌 방금 누군가 생각했지요?》
《누구라니?》
《이자 그러지 않았어요. <옥황님, 나는 늦어요>라구…》
은영은 놀라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랬었다. 집에서 기다리는 현순이를 옥황님이라 불렀으니… 가극의 옥황님이야 고종우가 아닌가?…
한정애도 걸음을 멈추었다. 무엇인가 입을 열려다 말고 말끄러미 지켜보기만 했다. 한동안 은영은 후두둑 뛰는 심장의 박동에 허덕이고있었다. 고종우를 생각하자 또다시 가슴노리를 에이는듯 한 아픔에 견디기 어려웠던것이다.
《언니.》한정애가 속삭이였다. 《정말 모르겠어요. 언닌 왜 그를 그리도 몰라주어요? 오랜 세월 언니만을 생각해온 그 사람을…》
《?!…》
《그도 외롭구 언니도 그렇구… 오늘은 말 좀 해야겠어요. 언니, 언닌 다 모르지만 난… 오래전부터 알고있었어요. 무던하고 성실한 그 고종우아저씨가 언니만을 생각해왔다는걸 말예요. 서울에서부터… 그런데도 언닌 노상 그를 괴롭히기만 하니…》
《?…》
《생각해보세요. 현순이는 또 그를 얼마나 따르나요. 그도 역시 친아버지처럼 현순이를 사랑하구. 그런데도 언닌 계속 눈을 감고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사람처럼… 어쩌면 그럴수 있어요, 예?!》
《그만해.》
《아니, 안예요!》 한정애는 거의나 울상이 되였다. 《언닌 자기 나이도 생각해봐야 했어요. 아픈 소리이긴 하지만 인젠 현순이도 10살이 썩 넘었어요!》
은영은 부지중 어깨를 옴츠렸다. 현순이는 11살, 자기도 어언 30고개의 막바지에 이르렀다는것을 생각했던것이다. 어야나! 어느새 벌써?… 세월의 무정함이 이렇듯 사무치게 느껴지기도 처음이였다.
어인 일인가 내 마음 내 몰라라
그 병사 가리치는 활 붙잡으면 부끄러워라
이것도 역시 은영이 주인공역을, 고종우가 지하공작원역을 맡고있는 민족가극 《금란의 달》에 나오는 달미의 아리아이다. 거의 매일이다싶이 이 노래를 부르면서도 이렇듯 가슴이 저려난 일은 아직 없었다.
내 손길 어이 떨리는고
내 마음 어이 설레는고
지심도 울리는 우뢰가 운들
고요한 내 마음 흔들리지 않은것을
비바람 사나웁게 불어세여도
잔잔한 내 마음 설레이지 않은것을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마음이 쓸쓸했으므로 주위세계가 온통 어둠에 잠긴것처럼 여겨졌다. 한정애가 그를 붙들었다.
《언니, 내가 언니의 마음을 아프게 했나부죠? 사실 그러자구 한 말은 아니였어요. 난 그저…》
《알아. 나도 다 알아.》하고 은영은 가냘픈 미소를 떠올리며 힘겹게 속삭이였다. 《내가 정애를 잘 아는것처럼 정애만큼 날 잘 아는 사람도 아마 없을거야. 고종우동무에 대해서도 그렇구.… 그러니 나도 좀 생각해보겠어.》
《정말이예요?》
《응.》
《언니!…》
불현듯 한정애의 눈가에 맺히는 한방울 눈물을 보자 은영은 웬일인지 마음이 떨리는것을 느꼈다.
《그럼 난 탁아소에 들렸다 가겠어요.》한정애가 울음섞인 목소리로 급히 말했다. 《가면서 잘 생각해보세요.》
은영은 그가 달려가는 모습을 점도록 지켜보고있었다. 어느덧 자식을 가진 어머니로 된 정애, 그런줄도 모르고있었다. 아니 알려고도 하지 않았던것 같다.
그러는 가운데 얼마나 많은 세월이 흘러갔던가!…
꽃신 한짝 남기고 사라진 그대
가신 곳이 어데뇨 은별방인가
한 어린애가 엄마손을 잡고 가며 노래하고있었다. 민족가극 《콩쥐팥쥐》에서 나오는 노래였다.
홍모란이 붉게 타는 반월궁에서
그대 모습 사라지니 해가 저문듯
아직 문을 닫지 않은 상점들에서 내비치는 갖가지 현란한 불빛에 그 애의 얼굴은 홍모란마냥 붉었다. 저 어린것이 과연 노래의 뜻을 알기나 하고 부르는것일가?… 애어머니도 낮은 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밝게 웃고있다. 오늘따라 모든 사람이 은영이에게 사랑의 노래를 불러주는것만 같다.
은별은별 그대는 나의 희망 그대는 나의 행복
이 몸 혼자 남기고
어데로 어데로 사라졌나 은별이여
바로 그때 상점에서 나오던 애젊은 녀인이 은영이를 소리쳐 불렀다.
《선생님!》
낯익은 녀자였다. 은영이와 이름도 비슷한 리연영, 전쟁전 서울에서 살 때부터 은영이의 열렬한 숭배자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와 처음 만난것은 모스크바에서였다. 볼쇼이극장에서 은영이의 노래를 듣고 너무도 감동되여 스스로 통역을 맡아하고 공연일정을 빠짐없이 따라다니던 처녀. 그때엔 처녀였었는데 그새 머리모양이 달라져있다.
《선생님, 정말 오래간만이군요. 건강하셨어요?》
《아, 리연영! 언제 귀국했어요?》
《예, 지난해에요.》
모스크바국립아까데미야 의학과학원의 연구생인 연영이는 무용수처럼 날씬한 몸매에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서 누구나 예술인으로 보기 쉽다. 발랄한 성격을 지닌 연영이는 잰 말씨로 숨쉴틈도 없이 천리마운동이 고조에 이른 조국의 눈부신 변모와 은영의 공연을 본 감상에 대하여 노래처럼 시내물처럼 읊조리기 시작했다.
《그새 <견우직녀>와 <금란의 달>을 두번씩이나 봤어요. 아, 얼마나 기쁘던지… 글쎄 관중들이 뭐라 하는지 아세요? 김선생이 출연하는 날만 골라서 구경을 간다질 않겠어요. 내 동생도 김선생의 노래를 듣기 위해 벌써 몇번씩이나 구경을 갔다나요. 학과토론회도 뚜꺼먹으면서 말이죠. 제2역을 맡은 배우가 들으면 섭섭해하겠지만 어쩌겠어요. 누구나 맘에 드는 노래를 듣기마련인걸요. 맘에 들지 않는 노래를 억지로 들을수야 없지 않나요. 그렇게 되면야 벌써 예술이 아니라 처세술이라 해야죠. 아이참, 제가 뭘 안다구 명가수앞에서… 미안해요. 선생님, 정말 이렇게 만나리라군 생각 못했네요. 한번 집구경이라도 오세요. 우리 집은요… 저기 새로 지은 아빠트 5현관 3층인데요…》
《결혼했나부지?》
《예, 벌써 두달째 됐는데요뭐.》
《그래?…》
《꼭 들리세요. 예?!》
《그러지.》
연영이와 헤여진후엔 걸음을 빨리하였다. 지나온 장대재의 공원에서 처녀들이 부르는 노래소리도 차츰 멀어져갔다.
×
다음날 아침 극장으로 출근하던 은영은 급히 마주오는 고종우를 보았다. 무엇때문인지 은영이를 기다리다 못해 서둘러 마주오는것 같았다. 은영이만을 보면서 발을 걸채여 비틀거리기도 했다.
은영은 걸음을 멈추고 《웬 일이세요?》하고 물으려 했다. 그런데 무엇인가 이상한데가 있었다. 어깨를 스치지 않으면 어길수 없을 지경으로 비좁은 골목길임에도 고종우는 은영이와 정면으로 마주치면서도 그를 알아보지 못하는것이였다. 어느덧 놀라서 굳어져버린 은영이를 지나 여전히 터벌터벌 걸어가고있었다.
《이보세요!》
가늘게 불러보았다. 그래도 아무 반응이 없다. 은영은 급히 달려가 그를 멈춰세웠다.
《어찌된 일이예요. 지금 어데 가세요?》
《아, 은영동무요?》 그의 얼굴은 창백하고 어수선했다. 《지금 또 오라고 하는구만. 라무언지하는 그 사람말이요.》
《아침부터? 뭣때문에요?》
《글쎄… 뭐 또 같은 소리겠지. 왜놈들을 위해 남방전선에까지 나가 노래불렀다는게 사실인가, 누굴 고발했는가, 반동단체에 가담한 일은 없는가? 하면서…》
《도대체 뭣때문에 그렇게 말한단 말이예요. 예?》
《어쨌든 거기서 하는 소린데… 그들은 오늘 강상일동무를 어느 촌구석에 추방하겠다고 내놓고 떠들어댔소.》
《아니 뭐 <강투사>까지?… 그가 어떤 동무이게 감히 그런단 말이예요. 우리 수령님께서 그가 감기를 앓는다고 자신의 외투목도리까지 풀어 목에 감아주신 동무가 아닌가요?!…》
《라가라는 작자가 왜 그렇게 악착한지 모르겠소.》
《그것도 라윤천이예요?》
《그렇소.》
고종우의 두볼이 실룩거렸다.
《그렇지만 너무 걱정하지 마오. 아무리 그래봐야 안될걸!… 어쨌든 미안하오. 나때문에 은영동무가…》
《나때문에? 또 그 소리예요?》은영이 부르짖었다. 《그게 어째 동무때문이겠어요?》
《미안하오.》
《?…》
숨막히는 불안이 가슴을 우벼냈지만 은영은 머리를 저었다. 언젠가 허정숙이 하던 말을 생각했다. 누가 뭐라든 수령님만을 믿고 살라고 하던 그 고무적인 말을…
《일없어요.》 은영은 수면부족으로 충혈진 그의 두눈을 보며 머리를 가로저었다. 《누구도 우릴 모함하지 못해요. 우리 수령님께서 믿어주시지 않나요. 그거면 그만이죠. 그렇죠?》
《그래, 아 알겠소.》
그는 돌아섰다. 그러나 가지 못하고 바재이고있었다. 그는 마치 천근만근 무거워진 발을 떼지 못해 몸부림치는듯 하였다. 가로수의 우듬지에서 까치가 깍깍거리며 가느다란 가지를 꺾어 떨어뜨렸다. 그러자 그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왜 그러세요?》은영이 물었다.
그 한마디 물음이 그에게 용기를 되살려주었다. 몸을 홱 돌리더니 은영이를 쳐다보며 빙긋이 웃었다. 여느때처럼 말끔히 면도를 한 얼굴에 떠올린 웃음이였지만 웬일인지 애처롭게 보였다.
《은영동무, 난 오래 생각한 끝에》 그는 목에 가시가 걸린듯 미간을 찡기며 이상한 소리를 짜냈다. 《드디여 결심했소. 이제 더는 은영동무에게 마음의 부담을 주지 않자고 말이요.》
《아니 그건?…》
《가만, 내 말을 마저 들어주시오. 사실 오래전부터… 아니, 지난해부터 어느 양복점 재단사를 하는 녀자집에서 혼사말을 내군 했는데… 두루 생각하다가 동의해버렸소.》
《그러니 결혼을?…》
은영은 그가 대답하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급기야 머리속으로 쓸어드는 공허에 귀가 멍해진듯 했다.
《난 사실…》하고 고종우가 눈길을 돌리며 힘들게 말을 잇고있었다. 《더이상 기다릴수도 없었고…》
《아, 그거야 잘된 일이죠.》은영은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다급히 말라드는 혀를 추기며 계속했다. 《축하해요. 벌써 그랬어야죠. 그럼요. 계속 외롭게 홀로 살수야 없지 않나요.》
고종우는 침통한 표정이였다.
《고맙소.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소. 사실 은영동무에게도 루가 미치지 않게 하자니… 달리는 할수 없었소.》
《?…》
은영은 비로소 그가 하는 말뜻을 깨달았다. 뭐 나를 위해서? 내게 루가 미치지 않게 하려고?… 목구멍에서 금시 고함소리가 터져나올것 같았다. 거칠게 숨결을 내뿜으며 눈앞의 애어린 가로수가지를 끄당겨 정신없이 잎사귀를 뜯기 시작했다.
《그렇게 말하진 마세요.》숨이 차올라 말을 잇기가 힘들었다. 《난… 그런걸 바란적이 없어요. 그래요. 아직 한번도…》
《알고있소. 하지만 난…》
《그럼 됐어요. 부디 행복하기를 바라요.》
《은영동무!》
《한마디만 더하자요. 고종우동무, 사랑이란 주고받는 선물이 아니죠. 보상도 아니구요. 사랑이란 필경 두 심장이 함께 울리는 2중창이라 할가요. 그러니 진심으로 그를, 언약을 나눈 그 녀자를 아무런 사심없이 아껴주고 위해주세요. 부탁해요!》
《…》
머리우에서 까치가 다시금 깍깍거렸다. 그것이 아침부터 부산을 떨어온것은 바로 이 뜻하지 않던 소식을 알리기 위함이였던가?…
차도를 달리는 뻐스도 경적소리를 울렸다. 그러자 고종우가 또 뭐라고 했다.
은영은 줌안에 들어찬 나무잎사귀를 떨구며 머리를 흔들었다.
《그럼 가보세요. 그네들이 야단치기전에!》
고종우는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눈길을 떨구고 지친듯이 한숨을 내긋더니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공연에 늦지 않도록 빨리 돌아오세요.》
《…》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돌아보지도 않았다. 머리를 짓숙인채 허둥거리며 걷고있는 그의 모습이 오래도록 은영의 눈길을 아프게 끌었다.
그날 그는 극장에 돌아오지 못했다.…
은영은 밤새 궁싯거리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다음날 강상일과 한정애가 은영이를 잡아끌었다.
《고종우한테 무슨 일이 생긴게 아니요?》
《가서 무슨 일인지 알아봐야 하지 않겠어요?》
《갑시다. 우리 다같이 가서 그를 보증합시다!》
은영은 머리를 숙이고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고있었다. 고종우를 보증할수 있는것은 자기밖에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를 도와야 했다. 고종우가 오랜 세월 자기를 위해 모든것을 다 바쳐왔던것만큼 한몸바쳐 그를 지켜주어야 했다. 더우기 그는 이제 곧 결혼할 사람이다.
《아니, 나 혼자 가겠어요.》
동무들이 반대했지만 억지로 그들을 떼여놓고 정류소로 달려갔다.
라윤천은 문예총건물의 어느 한 방을 차지하고있었다. 누군가 들어가 오래 지체하는것이 심각한 담화가 있는것 같았다. 한시간이 지나서야 문이 열렸다.
라윤천은 은영이가 들어서자 무척 놀라는 표정이였다.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서며 《은영동무가?!》하더니 문득 생각이 난듯 창가로 다가갔다. 조심스럽게 창밖을 내다보고는 창가림을 당겨 빛을 막았다. 그것이 이상하였으나 은영은 그런 일에까지 머리를 쓸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정말 오래간만이구만.》 드디여 자기 자리로 돌아온 라윤천이 천연스레 말했다. 《그래 어떻게 오셨소? 아, 알만해, 고종우때문이겠지?》
《예, 그래요.》
《그런 일에 은영동무가 나서다니. 그래선 안되겠는데… 하지만 고종우동문 극장에서 공연에 지장이 있다고 자꾸 우는소릴 해서 아까 보냈소.》
그러니 길이 어긋난 모양이였다. 한숨 나갔으나 내친 김에 은영은 한숨을 내그으며 조용히 물었다.
《무슨 일로 여태 그 사람을 붙들어놓고있었어요?》
《허-》 라윤천이 사무럽게 눈알을 굴렸다. 《도적이 매를 든다더니 제쪽에서 오히려 큰소리군.》
《도적이라니요?》 은영은 차츰 자기의 목소리가 높아지지 않도록 애써 자제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말해보세요. 고종우동무가 뭐 죄인인가요?》
은영이 따지고 들자 라윤천은 가까스로 분노를 참는듯 했다.
《동무가 뭐길래 감히 따지고 드는거요. 응?…》
《난 그를 보증하러 왔어요.》
《그건 우리가 알아서 할 일이요. 상관하지 마시오. 그건 그렇구 고종우는 뭘 좀 쓰느라구 늦어졌소.》
그는 아직 자리를 권하지 않고있었다. 은영이 먼저 자리에 앉았다.
《참사동지, 다시 말하지만 고종우동문 내가 잘 압니다. 무슨 일이든 내가 보증할수 있어요.》
《그건 안돼!》 그가 낮고도 매섭게 쏘아붙였다. 《우리 사업엔 엄격한 제도와 질서가 있단 말이요. 동무가 간참할 일이 아니야!》
《그래 죄상이 뭐예요?》 은영은 한걸음도 물러서지 않을 잡도리였다. 《고종우동무가 무슨 죄목으로 심문받고있는지 난 알아야겠어요. 그거야 말해줄수 있겠지요?》
《이 동무가?》
어느덧 라윤천의 얼굴근육이 움씰거리기 시작했다. 흥분을 이기지 못하여 급히 주머니를 뒤져 담배와 성냥을 꺼내는데 그 손이 후들후들 떨리고있는것이 알렸다.
《매우 도전적이구만, 김은영동지.》 그의 목소리는 철판을 긁는듯 아츠러웠다. 《당에서 아껴준다구 해서 오만해졌거든. 동무! 알아두시오. 우린 사람들을 해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건지기 위해서 일하고있소. 고종우동무도 명가수인데 어지러운 과거를 깨끗이 씻어주어야 할게 아닌가!… 그가 하루밤을 설쳤다구 야단인데 우린 열흘밤, 스무밤을 새우며 일한단 말이요!》
《어지러운 과거란 어떤거예요? 그래서 참사동진 박수미란 녀자를 자꾸 꺼들어들이는가요?… 알아두세요. 우리들의 경력은 수령님께서도 다 알고계신다는걸 말예요.》
라윤천이 벌떡 자리를 차고 일어섰다. 퍼르데데한 그의 얼굴이 사납게 이즈러졌다.
《수령님의 함자는 함부로 입에 올리는게 아니야! 내 지금껏 묻어두고있었는데 동무도 한때 미국놈들을 위해 노래한적이 있었지? 정신을 차리는게 좋아!》
《뭐예요?》
은영이도 일어섰다. 마주보는 눈길이 불꽃방전을 일으켰다. 매서운 눈빛과 증오와 멸시로 번뜩이는 눈빛… 책상우에 담배재들이 떨어져내렸다. 라윤천이 손에 들고있는 담배대를 연신 털어대고 있는것이다. 두번째 손가락으로 담배대를 재빨리 두드려대는 그 류다른 손놀림 그리고 또 있다. 은영은 별안간 목구멍을 졸라매는것 같았다. 라윤천의 그 손끝이 모지라진것을 띄여보았던것이다. 예리한 칼날로 손톱눈가장자리까지 뭉청 잘라버린것 같은 그 모지라진 손끝… 번개불처럼 머리속에 펀뜩이는 하나의 기억에 은영은 신음소리를 내질렀다.
《아!-》
봉천에서 떠난 기차에서 림호와 만나 서로 꼬집고 야유하던 한경세형사, 림호에게 《다시 만나지 않는게 좋아!》하고 으름장을 놓던 바로 그자였다. 중국동북에서 왜놈들을 도와 조선사람들의 피로 두손을 물들인 악질형사가 지금까지 정체를 숨기고있었던것이다.
《한경세?!…》
부지불식간에 새여나온 속삭임이였다. 모기소리보다도 약한 그 목소리에 라윤천은 몸서리쳤다.
《뭐?!》
서리발치는 도끼눈이 은영의 코앞으로 다가들었다. 은영은 금시 눈알을 빼간듯 허우적거렸다. 어떻게 걸상을 자빠뜨리며 어떻게 비틀거렸는지 알지 못했다. 라윤천이 다가들며 아귀센 손으로 틀어잡았을 때에는 버둥거리지도 못하였다. 그자가 손으로 목을 눌러 죽인대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무서운 일격에 모든 감각이 마비된듯 하였다. 풀자루처럼 늘어지며 허우적거린다. 반항은 커녕 신음소리조차 내지 못하였다.
그때 무슨 소리인가 났다. 어찌된 일인가?… 라윤천이 그를 일으켜 친절하게 걸상에 앉혀주고있었다.
《들어오시오.》
문두드리는 소리가 났던것 같다. 잠시후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섰다.
《아, 은영동무!》 오학성부총장의 목소리였다. 《공연준비는 하지 않고 여기 와서 뭘하고있…》
별안간 그는 말끝도 맺지 못하고 은영이 앉은 걸상에로 달려들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요, 엉?…》
《아, 너무 흥분한 탓이요.》 어느새 본래의 랭혹한 침착성을 되찾은 라윤천, 아니 한경세가 하는 말이였다. 《제기된 문제가 심각하니만큼 사전에 흥분하지 말라고 일렀는데도… 참, 예술인들이란 그저 신경만 곤두서 가지구…》
은영은 오학성의 부축을 받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일없겠소?》 오학성이 숨소리도 거칠게 물었다. 《아, 뭣때메 이런 일에 끼여들면서… 동무도 참!》
라윤천이 다가와 그를 밀치며 은영의 두눈을 근심스러운듯이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가늘게 좁혀뜬 그자의 두눈에서 랭혹한 서리발이 펀뜩이고있는것을 은영은 알아보았다. 또다시 으시시하게 몸을 떨지 않을수 없었다.
《안되겠소.》 그자가 어성을 높였다. 《병원에 전화를 걸테니 가서 치료를 받아야겠소. 당장!》
《아니, 일없어…》은영은 몸의 균형을 잡기 위해 안깐힘을 쓰면서 혼자소리처럼 중얼거렸다. 《가야 해. 극장에…》
아무것도 모르는 오학성이 반갑게 소리쳤다.
《그럼 됐소. 갑시다. 공연시간이 다 됐는데…》
그는 라윤천에게 량해를 구하는것도 잊지 않았다.
《참사동지, 그럼 우린 가보겠습니다. 예, 다신 이런 일이 없도록 단단히 조처하겠습니다.》
더이상 막을 구실이 없게 된 라윤천은 오학성이 모르게 악문 이새로 씨걸거렸다.
《은영동무, 한가지만은 명심하시오. 내 이미 말했지만 우린 고종우동무랑 잘 돕자는거요. 허물이 가지 않게… 이자 동문 무슨 옛친구이름을 불러대는것 같던데 옛 친구는 도와주지 못해도 우린 끝까지 도울수 있소. 끝까지 말이요. 무슨 말인지 알겠지?… 그리 알고 가보시오.》
절친하게 부축해주는 그자의 손길이 옆구리에 닿자 은영은 면도날로 어이는듯 소스라쳤다. 한걸음 한걸음을 마치 구름우로 걷는듯 했다. 어떻게 방을 나섰고 계단을 밟고 내렸는지도 알지 못했다. 머리속에서는 13년전의 표독스럽던 한경세형사의 얼굴만이 언듯거릴뿐이였다. 비로소 그는 알아내였다. 그자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줄곧 기억을 짜냈지만 알수 없었던 모든것이 확연해졌다. 무엇때문에 은영이를 두려워하고 오물을 씌우지 못해 하였는지 이제야 알게 되였다. 이전 박창호부수상의 생일연회때 그자가 노린것도 바로 그것이였다. 오물을 들씌워 공손하게 입을 다물고있게 하던가 아니면 소리없이 처치해버리려고 변함없이 기회를 노려왔을것이다.
밖에서는 삼복철의 따가운 해빛이 대기를 달구고있었다. 오학성이 타고온 차에 오르자 이번엔 또 한증칸에 몸을 잠근듯 입안이 말라들고 가슴이 타들어 견디기 어려웠다. 사무친 증오와 고통이 그를 사정없이 짓누르고있었다. 오학성이 뭐라고 화를 내며 끝없이 푸념을 했지만 한마디도 귀에 들려오지 않았다.
그날밤 은영은 해당부문에 신고를 하러 가던중 건설장을 지나다가 별안간 달려든 한 사나이와 맞다들었다. 전지불이 얼굴에 비쳐지고 《네가 김은영이지?》하는 소리와 함께 눈앞에서 번개불이 번쩍하였다. 무서운 타격에 비명소리도 지를새 없이 나딩굴자 사나이는 창끝같은 철골들이 삐죽삐죽 내밀린 기초구뎅이에 그를 처넣고 사라져버렸다.…
날개옷이 없구서야 하늘로 어이 가리
날 두고 가는 선녀 말이나 전해주
날개옷 잃은 이 몸 외로이 지낸다구
은하수 그리워 울면서 지낸다구
아
기중기의 불빛이 기초구뎅이우에서 언듯거리군 했다. 잠시 불빛이 한자리에 멎어서면 호각소리가 울리고 공중에서 흔들리던 기중기바가지에서 몰탈이 구뎅이에 쏟아져내렸다. 다시 불빛이 언듯거리며 지나가고 그 다음은 운전공처녀가 부르는 노래소리만이 어둠을 파헤치며 날아왔다.
다감하고 목소리도 챙챙한 처녀였다. 밑에서 신호기를 흔들고있는 제대군인총각에게 무엇인가 속삭이듯 끝없이 노래를 이어가고있었다.
이 일을 어이하랴 옥황님 난 못 가요
호각소리가 째지게 울렸다. 신호기를 든 제대군인총각이 은영이 쓰러져있는 구뎅이우에 서있었다. 그런데 그는 구뎅이를 등지고 기중기만을 올려다보고있었다. 그 역시 유쾌하고 담찬 총각이였다. 싸움판에서 돌격구령을 웨칠 때처럼 목소리도 쩡쩡했다.
《왼쪽으로 좀 더, 좀 더!… 옥실동무, 잘 쏟아야 해!》
좌우로 언듯거리던 불빛이 허공에서 멎으며 흔들거렸다. 그리하여 피치 못할 그 순간이 왔다. 구뎅이속에 의식잃고 쓰러져있는 녀가수 김은영을 콩크리트속에 영영 묻어버릴 그 순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