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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왔다. 고난의 행군, 강행군도 끝나가던 그해의 봄은 류달리 따스했다. 그날 현순의 남편 로한식은 인민대학습당에서 열린 초청강의에 출연하고 늦게야 집으로 들어왔다. 그는 집에 아무도 없는것을 보고 기분이 언짢았던것 같다.
이방저방 문을 벌컥벌컥 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그때까지 현순은 남편이 들어선것을 알지 못하고있었다.
흔히 남자들은 언제든 집에서 안해가 반겨맞기를 바란다. 때맞춰 준비해놓은 고뿌와 안주까지 있으면 더욱 좋아한다. 하루일의 피곤이 바로 안해의 반겨맞는 미소와 간소하나 정성을 들인 접대로 말끔히 풀린다고 믿고있는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종일 직장일과 가정다반사로 들볶이는 안해의 수고같은것은 돌아보지도 않는다. 반대로 어떤 남자들이 집에 들어가 늦어지는 안해를 대신하여 제 속옷을 빨고 저녁까지 준비한다고 하면 멸시에 찬 눈길로 그를 바라보는것이다. 그렇게 버릇을 굳히면 가장의 권위는 어떻게 되는가? 하고 그들은 놀라와한다.
물론 로한식은 그렇게 속통이 비좁고 마음 가난한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어릴 때부터 고아로 자라 어머니의 다심한 보살핌을 모르고 살아왔으므로 어머니나 누이들이 못다 준 사랑을 대신하는, 모성애라고도 여겨지는 안해의 정찬 미소와 살틀한 보살핌을 언제나 몸가까이 느끼기를 바랐다. 단 하루만 안해가 늦어져도 은근히 트집을 걸며 화를 내군 하였다. 비록 학계에서는 권위있는 박사 로한식이였지만 가정에 들어와서는 다 큰 아들들과 더불어 《큰애기》에 불과했던것이다.
이방저방 문이 여닫기고있을 때 현순은 가물거리는 초불아래서 어머니의 낡은 사진첩을 펴놓고있었다. 남편이 집에 들어선것도 모르고 연신 손수건을 눈가에 가져다대고있었다.
남편이 담벽의 스위치를 눌렀다. 불이 켜졌다.
《당신 여기서 뭣하오?》
《예?》 현순은 후닥닥 자리에서 일어서며 눈굽을 훔쳤다. 《아이, 오셨군요?!》
《오셨군요?… 그건 뭐 남편이 왔다는 소리요, 아니면 전기가 오셨다는 소리요?…》
《아이참, 성미두!…》
《초불이나 끄오.》
《참, 난 아직도 정전인가 했군요.》 현순은 초불을 불어 끄며 괜히 기분이 상해진 남편을 돌아보았다. 《이것 보세요. 당신은 아시죠, 이 사람이 누군지?…》
현순은 사진첩에서 한장의 사진을 가리켰다. 로한식은 사진첩을 피끗 보고(실은 보는척 했을뿐이다.) 퉁명스럽게 말했다.
《내가 알게 뭐요.》
《아이참.》 현순은 웃었다. 《잘 보세요. 어머니가 5차축전때 찍은 사진들인데 이건 축전에서 1등을 한 독창장면의 사진, 이건 고종우아저씨와 같이 로씨니의 가극 <쎄빌랴의 리발사>에 나오는 혼성2중창…》
그러나 로한식은 여전히 시뿌둥한 낯빛이였다.
《빨리 저녁이나 차리오!》
《예, 잠간이면 돼요.》
현순이 부엌으로 나갈 때에야 남편은 조금 누그러진 소리로 물었다.
《어머니는 어데 가셨소?》
《예, 야간전투에요!》
남편은 안해가 보던 사진첩을 들고 자기 방으로 가고있었다.
《늙으신 어머니가 야간전투는 또 뭐요?》
《로병예술선전대죠. 김종태전기기관차공장에서 중요생산전투를 벌린다나봐요.》
《그렇다고 해도 80고령에 다리까지 잘 못쓰는 어머니가 원!… 당신이 좀 말리구려!》
현순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에 대답할 말도 없었다.
사실 어머니는 예술을, 노래를 떠나서는 살지 못한다. 어머니더러 노래를 그만두라고 한다는것은 곧 생명의 문을 닫으라고 하는것과 같다는것을 너무도 잘 알고있는 현순이다. 예술은 인생을 깨끗이 정화시킨다고 어머니는 말하군 했다. 그가 누구든 일상생활에서 노래와 함께 사는 사람은 마음도 아름다와진다고 했다. 그럴 때마다 현순은 인기의 절정에서 소리없이, 자취없이 묻혀버린 어머니의 한생을 돌이켜보지 않을수 없었다. 그런 까닭에 방금 남편이 들어온것도 모르고 어머니의 낡은 사진첩을 뒤적거리고있었다. 고진아라는 녀자가 나타난 때로부터 거의 매일 그 사진첩을 펴들고 어머니의 곡절많은 과거사를 더듬군 하였다.
식사를 차리자 로한식은 사진첩을 들고 나타났다.
《당신 어느 사진을 보면서 울었다구?》
뜻밖의 물음이였다.
《울다니요. 내가 언제?…》
《그러지 마오. 내가 모를줄 알구? 당신이 보고있은게 이 사진이지?》
남편은 민족가극 《금란의 달》의 한 장면을 찍은 사진을 손끝으로 눌렀다. 그 사진에서 울고있는 어머니의 모습을 가리키고있었다. 가극에서 지하공작원역을 맡아한 고종우가 바로 어머니곁에서 뭐라고 노래하고있다.
《아니요.》 현순은 머리를 저었다. 《난 그저 어머니의 한생을 생각했어요. 불쌍한 어머니의 한생을…》
《또 그 소리요?》
《됐어요. 어서 식사나 하세요.》
로한식은 아무말없이 사진첩을 덮고 식사를 시작했다. 가끔 어처구니없이 트집도 잡고 큰소리도 치군 하지만 제때에 안해의 기분에 맞추어 입을 다물줄도 아는 현명한 남편이였다.
현순은 그의 옆에 앉아 손으로 턱을 고이고있었다. 식사가 끝날 때까지 귀밑머리가 희슥해지는 남편의 얼굴을 물끄러미 지켜보고있었다. 어느덧 남편도 로년기에 들어서고있다. 처음 만나 사랑의 서정시를 엮을 때만 하여도 늘씬한 키에 피아니스트처럼 손가락이 긴 애젊은 총각이였었다. 김일성종합대학 력사학부 학생으로서 글뒤주로 보일 정도로 늘 책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사람, 가늘고 긴 손가락으로 머리를 쓸어넘기며 처녀들처럼 숫저워하던 그가 음악무용대학의 유명한 독설쟁이였던 림현순을 따라다닌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였다.
많은 동급생처녀들이 그만 나타나면 입을 모아 떠들군 했다.
《저것봐. 저 학자님이 또 왔구나!》
《어쩌자구 저러니? 따벌같은 우리 현순동무한테서 아직도 침을 덜맞은것 같구나, 얘!》
《현순동무, 당장 나가서 따끔하게 쏴줘. 덴겁을 하게!》
《아니야. 그럴 필요없어. 의젓한 미남잔데 뭐.》
현순은 처녀들의 떠들썩한 응원소리에 떠밀리듯 정문으로 나가군 했다. 그러나 창가에 가득 붙어 내다보는 처녀들의 예상과는 달리 따벌처럼 쏘지도 않았고 교만의 미소를 그리지도 않았다. 그저 조용히 이런 식으로 묻군 했다.
《동문 나에게서 무얼 바라요?》
《저…》 로한식은 손끝으로 귀밑을 긁군 하였다. 《뭐 바란다기보다… 그저 가까이 알고 지내고싶어서…》
《그담은요?》
《그담?… 뭐 어떻게 되겠지요.》
《그럼 또 하나 묻자요. 동문 날 어떻게 알았어요?》
《아 거야 동무도 잘 알지 않습니까. 5. 1절 경축야회때 같이 춤을 추고서두…》
《그게 다예요?》
《아니, 또 있습니다. 난 동무가 거의 매일 국립도서관에 다니는걸 보았습니다.》
《그래서요?》
《그게 마음에 들었습니다. 무용을 전문하는 동무가 많은 책들을 읽고있는 그것이…》
이런 청년을 따벌처럼 쏘며 모욕을 줄 리유는 없었다. 현순이도 그가 마음에 들었다. 단정하고 소박한 품성, 진지하고 학구적인 태도, 겉으로는 녀자처럼 부끄럼을 타지만 속에서는 숯불같은 정의감이 이글거리는 청년, 그러한 로한식이였기에 어머니가 불행에 처했을 때 그 누구보다 더 가슴아파하였고 물불을 가리지 않고 도와나섰던것이다.
현순은 남편이 수저를 놓을 때에야 생각에서 깨여났다.
《애들은 왜 늦어지오?》
로한식이 묻는 말이였다.
《늘쌍 그런걸요. 오늘도 학습당에서 참고서를 뒤지고있겠지요.》
《음…》 로한식은 현순이 자리에서 일어서려는것을 손으로 막았다. 《베이징에서 만났던 고진아란 녀인한테 편지를 보냈소?》
《그만두기로 했어요.》
《그건 왜? 그처럼 간절히 부탁하더라면서…》
《…》
현순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버지를 찾는 그 녀자, 흘러간 세월의 만단사연을 알고싶어하는 그 녀자에게 간단하고도 명백하게 대답을 줄 방도가 없었으므로 마음이 걸려있었다.
《편지를 쓰오. 죄다 사실대로 말이요.》
《참 당신두… 인젠 어머니보다 더 극성이군요. 밤낮 박수미, 고진아 하면서 말예요.》
그러자 로한식은 머리를 기웃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해외동포영접국에 말해서 그가 조국을 방문하도록 초청하면 어떨가?》
《누구말예요?》
《고진아말이요.》
그야말로 가장다운 생각이다. 그보다 더 좋은 방도는 없을것 같다. 하지만 현순은 증을 내는척 했다.
《또 고진아소리예요? 난 그럴새가 없어요. 집안일이야 당신이 다 주관하는데 그 일도 맡아하시죠.》
《음-》 로한식은 사진첩을 들고 서재쪽으로 발길을 옮기면서 혼자소리처럼 중얼거렸다. 《어쨌든 어머니와 토론해보구…》
현순은 문이 닫길 때까지 그 자리에 서서 남편의 뒤모습을 보고있었다. 언제든 자기의 마음을 알아주는 남편이 더없이 고마왔다. 그리고 80고령에 이른 오늘까지 애틋한 사랑을 모르고 살아온 불쌍한 어머니를 끝까지 위해주는 남편이 고마와 눈굽이 저려드는 마음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