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며칠후 민족가극 《콩쥐팥쥐》의 공연이 끝난 뒤였다. 가극의 녀주인공인 콩쥐역은 은영이와 류선정이 1역과 2역을 맡고 교대로 공연하였다.

은영은 공연이 끝나기 바쁘게 분장을 지우고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거울속에 나타나는 한 사나이의 모습에 소스라치듯 놀랐다. 녀배우들의 분장실에 허락도 없이 뛰여든 그의 얼굴은 금시 살인이라도 치고난 사람같았다.

강상일이였다. 본래 창백하던 그의 얼굴이 재빛으로 꺼멓게 죽었고 돌덩이같이 부르쥔 주먹은 경련이 일듯 후들거렸다.

《은영동무, 나 좀 봅시다.》

거침없이 이 한마디 말을 내던지고 그는 힝하니 밖으로 나갔다. 은영은 불길한 예감에 가슴이 서늘해졌다. 급히 옷차림을 하고 따라나갔다. 강상일은 새로 축조한 돌계단우에 서있었다. 7월이여서 아직도 서쪽하늘에 비낀 락조의 잔광이 극장앞의 느티나무밑에 서있는 그를 불그레하게 비쳐주고있었다.

《얘길 들었소?》 그가 성급히 묻는 말이였다. 《동무와 고종우가 후퇴때 수미라는 녀자를 서울로 빼돌렸다는거요. 무슨 목적으로 그랬는가고 캐묻고있소.》

성급하고 격한 강상일이였다. 악문 이새로 거친 숨소리가 새여나왔다. 은영은 너무도 급작스러운 말에 잠시 어리둥절해있다가 나직이 물었다.

《누가 그래요?》

《라윤천이란 내각참사. 내 그 사람한테 단단히 오금을 박았소. 우릴 어떻게 알고 그러는가, 함부로 걸고들었다간 가만있지 않겠다! 하고 말이요. 그런데 그 라가가 벌써 고종우동무를 두번씩이나 만나 담화했다누만. 은영동문 아직 그것두 모르고있었소?》

은영은 머리를 저었다. 라윤천이라는 이름이 불리우자 별안간 날카로운 이발이 가슴을 뜨끔하니 물어뜯는것 같았다.

《고종우동무는요. 그는 뭐라구 했어요?》

《그 영국신사같은게!》 하고 강상일은 소리쳤다. 《왜 한바탕 해보지 못하는지 넨장!… 저 혼자 끙끙 앓기만 하면서…》

《?…》

은영은 으시시하게 몸을 떨었다. 라윤천이 그들을 모함하려는것이 틀림없다는 생각에 얼음물을 들쓴것 같았다.

강상일이 계속했다.

《요즘도 박수미가 방송에 대고 우리 사람들을 자꾸 꺼드는 모양이요. 그런데 그 새앙쥐같은게 고동무와 은영동무가 오래전부터 무슨 치정관계를 가지구 있었다느니 또 누구를 고발해서 죽게 했다느니 뭐니 하면서 싸작거린다는게 아니겠소. 더러운것!》

《그게 다예요?》 은영은 가까스로 물었다. 《그따위 허튼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도 있어요?》

《그러니 문제가 아니요? 라윤천인지 하는 사람이 놈들이 불어대는 소리나 가지고 우릴 따지고들다니, 넨장!》

《아니, 그 사람은 나를 모함하자구 하는거예요.》

은영의 말에 강상일은 성급히 머리를 저었다.

《아니, 그럴수 없소. 은영동무를 모함하다니! 은영동무야 미국놈들에게 아버지와 동생을 잃구 또…》

《아, 됐어요. 그 얘긴 후에 하자요.》

영문을 모르는 강상일에게 라윤천에 대하여, 그 비렬한 사람과 결부된 일들을 일일이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은영은 숨을 돌리고나서 조용히 지금 고종우가 어데 있는가고 물었다. 그러자 강상일은 소문난 《강투사》답게 분노에 질려 씨근거리며 지금 고종우가 벌레씹은상이 되여 산밑에서 어슬렁거린다고, 그 알량한 《영국신사》때문에 은영이까지 허물을 쓸것 같다고 고아대였다.

은영은 아무말없이 자리를 떴다. 강상일이 어데로 가는가고 소리쳤으나 대답하지 않았다. 점잖고 례절바른 고종우, 그가 어떻게 대답했는지 알고싶었고 또 그가 걱정되였다. 걱정하지 않을수 없다. 고종우라면 그 누구보다 잘 아는 은영이였다. 인생은 오래전에 벌써 그들의 운명을 하나의 동아줄로 얽어매놓았다. 지난날도 그러했거니와 지금도 역시 그는 평소에나 무대에서나 은영이와 떼여놓을수 없는 상대역이였다. 오늘도 그는 《콩쥐팥쥐》에서 왕역을 맡아 했다. 무대에서는 엄엄한 왕이지만 분장을 지우고 의상을 벗기면 절제있고 단정한 사나이로 돌아오는 사람, 그를 걱정하지 않을수 없는 은영이였다.

흔히 사람들은 목소리에 따라 그의 성격을 알수 있다고 한다. 얼굴에 드러나는 인상보다 목소리가 더 많은것을 말해준다고도 한다. 고종우가 바로 그러했다. 두성공명을 바탕으로 한 바리톤가수인 그는 웅글고 부드러운 그 목소리처럼 인정이 후덥고 깊이도 있으나 생활에서는 그것이 때로 어리무던하고 유약한 성격으로 보이기도 한다. 선량한 사나이로 치하받기는 하나 너무도 덜퉁한탓에 먹물을 들써도 어쩌지 못한다.

고종우는 어디에도 없었다. 어느새 대동강물결우에는 어둠의 장막이 내려앉았다. 검은 구름장들이 남쪽으로부터 랭기를 뿜으며 하늘 전폭을 뒤덮고있는것이였다. 앞머리가 산악같이 우중충한 비구름이 어둠을 몰며 덮치듯 밀려오고있었다.

은영은 서둘렀다. 어느덧 사위가 어둠속에 잠겨버렸다. 그래도 다시 한바퀴 청류벽가까이까지 돌았다. 축전참가자로 선발된 고종우가 벌써 독신자들의 합숙으로 갔으리라고 믿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마음이 어수선해진 그가 오늘 밤의 련습을 포기하고 합숙으로 갔다면… 합숙? 별안간 머리를 스치는 뜨아한 생각에 은영은 걸음을 멈추었다. 어찌된 일일가. 그는 지금도 독신으로 있다.

많은 처녀들이 눈총을 쏘며 자기의 속내를 알아주지 않는 의젓한 미남자 고종우때문에 속을 썩이고 입술을 옥물고있건만 그는 그 어떤 녀자도 돌아보지 않는다. 무엇때문일가?…

드디여 하늘에서 비방울이 후둑후둑 떨어져내리기 시작했다. 잎새 무성한 나무숲이 소란스럽게 한숨을 내질렀다. 거센 바람이 불어치고 비줄기가 굵어지고있었다. 은영은 가까이 있는 나루터로, 배사공의 초막을 향해 달려갔다.

멀리 대동교로 돌아다니기 불편해하는 동평양사람들이 매일 이곳 나루배를 타고 오가는것이다. 기슭의 모래불에 나루배가 매여있는것으로 미루어 사공도 일찌기 집에 돌아간것 같다. 은영은 세찬 비바람에 떠밀려 거적문도 없는 초막안으로 뛰여들었다.

다음순간 기절할듯이 놀라며 《악!》하고 부르짖었다. 초막안에 곰같이 웅크리고있던 사람을 지르밟았던것이다. 그 사람도 깜짝 놀라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누구요?》

《?…》

숨이 막히고 가슴이 뻐근해져서 아무 말도 할수 없었다.

《은영동무가?…》

고종우였다. 은영은 불시로 무너지듯 했다. 비좁은 초막이여서 고종우의 무르팍에 부딪치면서 소란스럽게 한숨을 내그었다.

《여기 있었군요.…》

고종우가 흠칠하며 몸을 옹송그렸다. 은영이로서는 어쩐지 생소하고 부자연스러운 거동이였다.

《예서 뭘하세요?》

《나 말이요? 저…》

그다음 말은 들을수 없었다. 눈부신 섬광이 파랗게 어둠을 불사르며 사위를 확 밝혔다. 이어 시꺼먼 어둠과 소란스러운 비소리가 덮쳐들었다. 무시무시한 천둥소리가 터진것은 다음순간이였다. 꽈르릉!- 하늘과 땅을 갈가리 찢어발기는것 같은 굉음에 은영은 몸서리쳤다.

《벼락을 치는군.…》

고종우가 하는 말이였다. 마음속 괴로움을 산산이 부셔버리는 그 굉음에 기뻐하는듯 했다. 그제서야 은영은 머리를 돌려 밖을 내다보다가 갑자기 흠칫하며 그의 무릎에서 조금 물러나 앉았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은영은 세찬 비소리를 들으며 그가 무엇이든 먼저 말하기를 기다렸다. 예서 뭘하고있느냐고 물을 필요는 없었다. 시꺼먼 고뇌에 잠긴 고종우의 얼굴이 모든것을 다 말해주고 있었던것이다.

고통스러운 침묵속에서 비줄기는 밑창없이 쏟아져내리고 마음속에서는 애달픈 추억과 오뇌가 줄지어 흘렀다.

《얘길 다 들은 모양인데.》하고 고종우가 마침내 먼저 입을 열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이건 다 나때문에 벌어진 일이 아니요. 그래서 난 결심하였소. 어떤 일이 있어도 은영동무에게만은 루를 끼치지 않게 하자고 말이요.》

마치 자살을 결심한 사람처럼 그는 말하고있었다. 은영은 급히 숨을 몰아쉬였다.

《내게 루를 끼친다구요? 우리가 뭐 죄를 짓기라도 했단 말이예요?》

《그래서 하는 말이 아니요. 사실 난… 수미란 녀자가 무엇때문에 있지도 않은 일을 꾸며내는지 잘 알고있지만 그따위 말이나 듣고 제 사람을 잡지 못해 하는 라가란 사람을 도대체 리해할수가 없소. 그래서 난 생각하기를 나를 미끼로 그 사람이 노리고있는게 은영동무가 아닌가 하는 생각에… 그게 더 무섭단 말이요.》

《무서울게 없어요. 누가 뭐라든 우린 예술로써 인민을 위해 복무하면 되는거죠. 그렇지 않아요?》

《그렇지만… 그는 다르오. 무서운 흑심을 품고있는게 분명하오.》

《걱정마세요. 일없다니까요!》

고종우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비바람이 더욱더 기승을 부렸다. 대줄기같이 쏟아져내리는 비방울이 모래불을 세차게 두들겨댔다. 물결우에서도 비방울들이 물보라를 일으키며 소란을 피웠다.

웬일인지 소연한 그 비소리에 은영은 마음이 쓸쓸해지는것을 느꼈다. 라가의 모함같은것은 무섭지 않았으나 그때문에 어혈이 든것 같은 고종우를 보는것이 더 가슴아팠다. 지금 고종우는 분장도 채 지우지 않고있다. 언제보나 단정하던 그가 지금은 왕으로 분장했던 시꺼먼 눈섭을 그대로 붙인채 어둑서니처럼 웅크리고 있다.

《고종우동무.》은영은 비물에 젖은 치마자락으로 무릎을 감싸며 힘들게 입을 열었다. 《우린 벌써 10년이나 사귀여온 벗이지요? 동문 나를 잘 알고 나 역시 동물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사실 동문 내게 있어서 친오빠나 다름없었죠. 아니, 친오빠인들 그보다 더하겠어요? 언제 어느때든 사심없이, 변함이 없이…》

고종우가 신음소리를 내였다.

《아니, 갑자기 그런 얘긴 왜 꺼내는거요?》

《그건… 그건 사실…》 은영은 등뒤로 쓸어드는 물보라도 느끼지 못하고있었다. 《내가 너무 무심했어요. 사실 동문 외로운 사람… 그래요. 외로운 사람이죠. 부정하지 마세요. 그렇지만 알고싶어요. 동문 왜 아직 가정을 이루지 않고있어요. 수미때문이나요?》

고종우가 움씰했다.

《그가 나하구 무슨 상관이요?》

그렇다. 아무 상관도 없다는것을 은영은 알고있다. 그와 병적인 수미간에 있은 불미스러운 과거는 은영이의 탓도 없지 않다. 그리고 지금 온갖 희망을 잃고 미래가 없는 수미는 고종우와 은영이에게까지 오물을 들씌우려 하고있다.

한때 수미는 고종우와 은영이의 곁을 떠나면서 벌써 독살스럽게 후회할 때가 있을거라고 침을 놓고 달아났던것이다.

《그럼》하고 은영이 또 입을 열었다. 《무엇때문이세요. 아직까지 홀로 외롭게 지내는 까닭은요?》

고종우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금시 하늘을 쫙 찢으며 번쩍인 번개불에 푸들거리는 그의 두볼이 드러났다. 아직 그처럼 흥분한 고종우를 은영은 본적이 없었다. 그는 말보다 앞서 이마언저리로 굵게 그려진 《왕》의 눈섭을 손바닥으로 문질러댔다. 때를 기다리고있은듯 천둥소리가 땅!- 하고 터졌다. 이마빡에 시꺼먼 도랑(분장용기름분)을 문질러놓아 험악해진 고종우가 눈살을 찌프리며 말했다.

《그러니 은영동무도 나를 불쌍하게 여긴단 말이군요.》

그 침통한 어조가 은영이로 하여금 눈길을 돌리게 했다. 아니, 은영은 그를 아프게 하려는것이 아니였다. 값싼 동정으로 그의 인격에 먹칠을 하려는것도 아니였다.

《용서하세요.》하고 은영은 낮게 속삭이였다. 《제가 말하자는건…》

《아, 알고있소. 안다니까!》

그는 다시금 손바닥으로 눈가를 힘주어 문질렀다. 그다음 앞으로 바싹 다가앉더니 갑자기 은영의 어깨를 그러잡았다. 크고 두툼한 손바닥이 은영이를 바스라뜨릴것처럼 움켜쥐고는 불같은 입김을 내뿜었다.

《말합시다. 다 말하겠소. 사실 난…》

은영은 질겁을 했다.

《난 기다렸소.》고종우가 계속했다. 《은영동무가 혼례를 치르고 가정을 이루기를 기다려왔소. 왜 그랬던지.… 어쨌든 기다리고 또 기다려왔소. 헌데 어찌된 판인지 뜻하지 않던 불행이 계속 동무를 따라다니는것을 볼 때 난…

가슴이 아파서 견딜수 없었소. 정말이요. 동무가 행복하기를 기다려왔고 진심으로 그걸 바랐건만 매번 일은 반대로만 되였으니…》

그는 움켜잡았던 손을 맥없이 놓았다. 그 손으로 다시 얼굴을 힘껏 문지르고 나서 오한이 나는듯 몸을 떨었다.

《아니, 더 할 말이 없소. 난 다 말했소. 이날 이때까지 동무의 행복을 기다려왔다는… 그저 그것뿐이요.》

《왜요?》은영은 숨찬 목소리로 부르짖었다. 《저의 행복을 뭣때문에 기다렸어요. 예?!》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은영이를 주시하는 그의 눈에서 한점 불빛이 흔들리였다. 말없이 보고 또 보다가 그만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는 은영이 미처 어쩔새도 없이 억수로 퍼붓는 비속으로 힝하니 나가버렸다.

비바람이 태질했다. 어느 먼곳에서 소리도 없는 번개불이 펑끗거렸다. 순간 무엇인가 은영의 가슴을 파고드는 예리한 느낌이 있었다. 비로소 모든것이 석연해졌다. 그는, 의젓하고 착한 미남자 고종우는 처음부터 은영이를 사랑해왔던것이다. 변함없이 진정을 다해 사랑해왔다. 하여 자기를 다 바쳐 은영이를 아껴주고 지켜주려고 했다. 단지 그것을 숨겨왔을뿐이였다. 왜, 무엇때문에?…

바치는 마음이 크고 뜨거울수록 요구는 작아진다. 진실한 사랑만이 온갖 희생을 무릅쓰는 법이다.

눈물이 쏟아졌다. 저도 모르게 초막밖으로 달려나갔다. 눈이 먼 사람처럼 어둠속을 허우적거렸다. 하마트면 나루배를 비끄러맨 바줄에 걸려 모래불에 나딩굴번 하였다. 후더운 비줄기가 삽시에 온몸을 적시며 목덜미로 흘러내렸다.

숲이 설레이며 쏴- 아- 울부짖었다. 비에 젖고 눈물에 젖은 그의 얼굴을 세찬 비줄기가 거침없이 후려갈겼다. 그토록 진실한 사람을 아프게 허빈것이 뼈저린 아픔으로 심신을 옥죄이고있었다. 종우동무, 용서하세요. 제가 그만 동무를 아프게 허볐군요. 용서하세요!…

고종우는 보이지 않았다. 어데로 갔는지 알수가 없다. 은영은 물에 젖은 팔소매를 손바닥으로 훑으며 망연히 서있었다. 고종우가 쏟아놓은 심중의 고백의 그의 마음을 짓이겨놓았다. 얼마나 오랜 세월을, 얼마나 먼길을 우리는 같이 걸어왔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영은 그의 마음속에서 끓어번진 진실한 사랑과 말없는 헌신을 전혀 알아주지 못했었다. 언제, 어느때건 항상 가까이 있으면서 친절을 다해준 그를 알아주지 못하였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아니, 그것을 응당한것으로 여겨왔는지도 모른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한 사나이의 가슴속에 고이 간직되여있던 진정을 10년세월이 흘러간 오늘에야 알게 되였으니?!…

다시 걸음을 옮기자 신발속에서 비물이 쿨쩍거렸다. 목덜미로, 등뒤로 흘러내린 비물이 그리로 내물처럼 쓸어들고있었다.

별안간 또 걸음을 멈춘다. 모란봉극장앞의 외등밑에 서있는 고종우가 눈에 띄였던것이다. 그런데 그는 혼자가 아니다. 허리를 굽히더니 누군가를 꼭 끌어안았다.

《현순아, 이 밤중에 왜 나왔니. 응?》

《나 집에 혼자 있기 싫어.》

《그래도 비를 맞으며 나오다니. 좀더 기다리면 될걸 가지구… 이것 봐, 몽땅 젖었구나.》

《아저씨, 나 배고파. 우리 엄만 어데 갔나요?》

《저기 있다. 곧 여기로 온다.》

은영이 다가서자 크고작은 두사람이 동시에 머리를 돌렸다. 비에 젖어 까시시해진 그들 두사람의 모습은 처량하였다. 따뜻한 인정과 보살핌을 모르고 사는 크고작은 두사람, 은영은 허둥지둥 달려가 물참봉이 된 어린 딸애를 힘껏 다그어 안았다.

《현순아, 네가 이 엄마때문에… 고생이 많구나. 가자. 배고프다지?… 어디 가까운 식당으로 가자.》

《그럼 아저씬?》 현순이 물었다. 《아저씨도 같이 가요. 예?》

고종우는 대답을 못했다. 불현듯 어린것의 정찬 목소리에 목이 꽉 멘것 같았다. 입으로 쓸어드는 비물을 삼키며 그는 머리를 세게 흔들었다. 관자노리에까지 도랑을 매닥질해놓은 그의 얼굴은 사뭇 고통스러운듯 이지러지고있었다.

《아저씨!》현순이가 매달렸다. 《아저씨도 배고프지요? 나랑 엄마랑 같이 가자요. 예?》

《아니, 난…》

고종우는 은영의 얼굴을 피끗 쳐다보고나서 더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때 은영이 딸애의 말대로 하자고 한마디만 했어도 이후의 일은 모두 달리 되였을런지 모른다. 그러나 은영은 비에 젖은 몸을 부르르 떨고있을뿐 입을 열수가 없었다. 어린것의 청대로 그가 움직여주기를 바라면서도 그것을 한사코 거부하기도 했다. 자기의 내심에서 끓고있는것이 무엇인지 아직은 종잡을수 없었고 또 알고싶지도 않았다.

고종우가 몸을 돌렸다. 그의 어깨와 잔등에 세찬 비줄기가 뿌려지고 물보라가 뽀얗게 이는것이 외등빛에 드러났다. 그는 한걸음 한걸음을 천근만근 무거운듯이 옮겨갔다.

《아저씨!》

현순이가 어머니품에서 빠져나가 그한테로 달려갔다. 재빨리 그의 팔소매를 잡아당기며 가냘픈 목소리로 울먹거렸다.

《아저씨, 우리랑 같이 가자요. 예?!… 난 아저씨랑 같이 있는게 제일 좋아요.》

어린이들은 가식을 모른다. 어린이들의 속삭임이야말로 자연의 언어처럼 가장 순수하고 진실하다.

고종우는 비물에 흠씬 젖은 그 애의 머리를 손으로 쓸어주고있었다. 그는 울고있는듯 했다. 사나이가 울고있는 모습을 아직 은영은 본적이 없다. 그것이 험한 상처에 소금물을 치는듯 그토록 마음을 쓰리게 할줄은 몰랐다. 두볼에서 번들거리는것은 비물인가, 눈물인가, 고종우의 눈가에서 초물처럼 진하게 흐르는것을 바라보며 은영은 불시로 치밀어오르는 격정에 마비된듯이 꼼짝하지 못하고있었다.

 이전페지  차례  다음페지 
되돌이 목록
감 상 글 쓰 기

홈페지봉사에 관한 문의를 하려면 여기를 눌러주십시오
Copyright © 2003 - 2022 《조선륙일오편집사》 All Rights Reserved
辽ICP备15008236号-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