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이틀전 은영이를 소개한것은 라윤천이였다. 부총장인 오학성이 그와 자리를 같이하고있었다.
모란봉지하극장의 곰팡이냄새가 밴 비좁은 사무실이였다. 불빛도 어두웠다.
탁상등을 마주하고앉은 오학성의 얼굴은 주독이 오른것처럼 벌거우리했다.
무엇때문인지 그는 은영이의 인사에도 대답없이 무덤굴에서 나온 사람처럼 해쓱한 낯색으로 까딱하지 않고있었다. 뒤쪽의 해여진 고급쏘파에 앉아있던 라윤천이 먼저 입을 열었다.
《오래간만이요, 은영동무. 그새 고생이 많았겠구만.》
《?…》
무어라고 대답할 말이 없었다. 불빛을 피하려는듯 어둑스레한 구석에 앉아있는 그의 강마른 모습에 벌써 께름한 불안감이 느껴졌다. 그때에야 오학성이 몸을 움쭉거리며 참고참던 불만을 터놓는듯 망가진 걸상소리부터 삐걱거렸다.
《우린 은영동무한테 몇가지 알아볼게 있어서 불렀소. 미리 말해두는데… 내가 묻는 말에 사실대로 다 말해주시오.》
이건 또 뭔가, 저 사람이 날 심문하려는게 아닌가?… 여전히 아무 말없이 은영은 탁상등을 마주하고앉아있는 그를 지켜보고있었다.
《첫째.》 오학성이 쟁쟁 울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은영동문 자기의 첫번째 남편을 누가 고발했는지 알고있소?》
《예? 첫번째 뭐라구요?》
《림호동지 말이요. 그를 경찰에 고발해서 체포되게 한 자가 누군지 알고있는가 말이요.》
《누구예요?》 은영은 바람소리처럼 가늘게 내뿜었다.
《그걸 알고있어요? 부총장동진 그걸 알고있으면서도 여태 저한테 말하지 않았어요?》
《아, 알고있소. 그렇지만… 그건 차차 말하기루 하구 둘째!… 동무와 고종우는 어떤 사이요? 혹시 둘이서 몰래 일생을 약속했다거나 하는 그런 일은 없었소? 저… 전쟁전 서울에 있을 때 아니면 후퇴하면서 그랬을수도 있지 않소.》
《?…》
너무도 뜻밖의 물음이였다. 더우기 한 남자로서 한 녀성의 마음속 구석까지 뒤지려드는 그의 무례하고도 몰강스러운 언사에는 숨이 막힐 지경이였다. 비렬한 자들만이 녀자들의 사생활을 파고들며 흠을 들추기를 즐겨하는것이다.
그런데 오학성이 그렇게 나오리라고야 어찌 생각인들 했으랴.
은영은 금시 매서운 말 한마디로 그의 모욕적인 언사에 앙갚음을 하고싶었으나 웬일인지 한마디도 떠오르지 않았다.
오학성이 계속했다.
《이건 심중한 문제요. 오죽했으면 내각참사동지까지 나오셨겠소!》
《너절해요.》 마침내 은영은 부르짖었다. 《첫번째 남편이요 고종우요 하면서!… 그런 모욕이나 주자구 편대공연을 하는 나를 불러왔어요?》
오학성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으나 곧 뒤쪽의 라윤천을 돌아보며 마지 못해 분노를 참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 세번째!… 동문 박수미와 왜 갈라졌소? 한땐 그 녀자를 두둔하지 못해 안달이더니 왜 갈라졌나 말이요?》
《?…》
그때에야 은영은 무엇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있다는것을 직감하였다. 하여 그는 혐오와 증오에 타는 눈빛으로 오학성을 쏘아보며 말했다.
《여기에 박수미는 또 무슨 상관이예요. 그가 어쨌단 말인가요?》
《바로 그 녀자가 방송에 대고 계속 불어대고있단 말이요! 그가 뭐라구 하는지 알기나 해?》
그가 가늘고 긴 팔을 내뻗치며 은영이를 창끝처럼 찌르려는 순간 라윤천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소리치지 마오. 부총장!》 그의 목소리는 잔잔했으나 권력을 배경으로 하는 틀진 위엄이 슴배여있었다.
《제기된 문제를 료해해보라구 했는데 마치 심문하듯이 하거든. 은영동무야 당에서 아끼고 사랑하는 가수인데 그러면 되겠소? 우선 믿고 담화를 해야지.》
그는 자리를 옮겨 은영이를 자세히 볼수 있도록 다가왔으나 여전히 탁상등불빛만은 피하는 자세였다.
《은영동무, 안됐소. 사실 박수미란 녀자가 대북방송에 나와 허튼 소리를 많이 하는데 은영동무나 고종우와 관련된 심중한 문제들도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소. 그래서 좀 료해해보려는거요. 헌데 부총장이 곤대짓부터 해댔으니 일도 참 별나게 됐구만.》
은영은 여전히 입술을 깨물며 그린듯이 서있었다. 라윤천이 뜨거운 입김을 내불며 친절한 어조로 계속하였다.
《오늘은 우선 좀 쉬시오. 제기된 문제가 심상치 않지만 우리가 있지 않소. 내가 돕겠소.》
《아니.》 은영은 머리를 저었다. 《난 알아야겠어요. 저의 남편을 고발한자가 누군지 지금 당장 알아야겠어요.》
라윤천은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러나 성냥을 켜주는 오학성을 손으로 막으며 듣기에도 오싹해지는 싸늘한 어조로 으름장을 놓았다.
《이제 다 알게 돼. 박수미라는 녀자가 한 소리를 들으면 아마 소름이 끼칠거요.》
《?…》
은영은 차겁게 번뜩이는 그의 눈빛에 그만 기가 질렸다. 분명 어데선가 저 매서운 눈빛을 보았다는 느낌에 다시금 굳어지면서 오한이 난것처럼 흐느끼였다. 그러나 라윤천은 어느새 소리없는 미소를 입가에 그리며 은영의 잔등을 다정히 두드렸다.
《걱정마오. 내가 도와준다니까. 우선 지금은 좀 쉬시오. 저녁 6시에 중요한 행사가 있으니 그리 알고 기다리시오. 내가 동무를 데리러 오겠소.》
그는 《중요한 행사》가 무엇인지는 밝히지 않고 이렇게 덧붙였다.
《곱게 단장하시오. 아, 무대분장은 필요없구… 그저 화장만 하구 기다리시오.》
×
은영은 분장실거울앞에 앉아있었다. 박수미가 오늘에 이르기까지 자기의 생활에 뛰여들어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리라고 누가 생각했던가. 그런데 《첫남편》을 누가 고발했고 또 고종우와는 어떤 사이인가 하는 물음의 리면엔 도대체 어떤 험구가 숨어있는것일가. 도대체 고종우는 여기에 무슨 상관이 있다는걸가?…
머리를 세게 흔들었다. 끈질긴 불안과 의혹심을 털어버리려고 깐깐히 화장을 하면서 이제 극장에서 공연하게 될 가극 《콩쥐팥쥐》의 노래형상을 연구하는것도 잊지 않았다. 그런데 나는 무엇때문에 화장을 하고있는가?… 어수선해지는 마음을 다잡으며 그에 대한 답도 애써 찾아보았다.
배우는 모든것이 아름다와야 한다. 매일 수백수천명의 관객앞에 나서는 배우에게 있어서 미는 선차적인 요구인것이다. 그러면 가수의 미는 어디에 있는것일가?… 물론 무대에 나서는 녀가수는 고운 목소리와 함께 얼굴과 몸매도 아름다울수록 좋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것은 음악이다. 일찌기 로맹 롤랑은 이러한 물음을 제기하였다.
(화성과 대위법중에서 어느것이 음악에 더 중요한가?…)
이러한 물음에 매 사람은 화성이다, 대위법이다 하고 대답하기마련이다. 그러나 그자신은 이렇게 말하였다.
《음악이 중요하다.》
그에게 녀가수의 미모와 목소리중에서 어느것이 더 중요한가고 묻는다면 역시 《음악이 중요하다.》라고 대답할것이다.
시간은 살같이 달렸다. 날이 어둡기 시작했을 때 뽀베다승용차가 은영을 태우러 왔다. 차에 타고 온 라윤천이 은영의 모습에 눈이 부신듯 황홀해하며 신음하듯이 말했다.
《아- 선녀같은게… 정말 기막히오.》
은영은 머리를 외로 돌리고 뒤구석에 자리잡았다. 그를 대할 때마다 언제든 웃지 않는 그 눈빛에 소름이 끼치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수도의 거리들은 복구건설로 들끓었다. 목고를 멘 청년들, 군인들이 뛰여다니고 자동차들이 부릉거리며 배기가스를 세차게 내뿜었다. 건설장 곳곳에서 외등들이 켜지기 시작했다. 승용차는 자주 멈춰서지 않으면 안되였다. 호각소리가 울리고 아름드리 인발관이 길을 막으며 끌려갔다. 신호기를 든 처녀가 멎어선 승용차에 미안하다는 의미로 머리숙여 인사했다. 그러자 질통을 진 사람들이 지나가다가 배를 그러안고 웃어댔다. 그 처녀가 승용차의 시창에 이마를 맞대고 내다보는 은영이를 보고 인사했다고 놀려대는것 같았다. 은영은 얼굴을 붉히며 좌석등받이로 몸을 젖히였다. 그 다음부터는 밖을 내다보는것도 조심해야 했다.
문득 머리속에 스쳐가는 뜨아한 생각을 붙잡았다. 나는 지금 어데로 가고있는가. 고급승용차로 혼자 불리워간적은 한번도 없지 않는가?…
그때 승용차는 가루개를 넘어 담장을 높이 둘러친 어느 벽돌집으로 들어서고있었다. 사슬에 매여있던 개가 컹컹 짖어댔다. 사냥개처럼 늘씬하고 털이 부르르한 놈이였는데 두귀가 척 늘어져있는것이 무척 음험해보였다.
라윤천이 휘파람을 불자 개는 공손해져서 꼬리를 흔들었다. 그가 이 집에 자주 드나들고있는것이 분명했다.
집안에서는 떠들썩한 웃음소리가운데 축음기소리도 울려나오고 있었다. 지난 20년대에 류행가처럼 가사를 바꾸어 《이래도 한세상 저래도 한세상》하고 불러온 《두나이강의 파도》의 애잔한 선률이였다.
라윤천이 제 집처럼 현관문을 열어젖히며 말했다.
《자, 들어갑시다.》
은영은 주춤거렸다. 무엇인가 어스러지고있는듯 한 생각이 그를 주저하게 하였다. 그때 복도쪽에서 메마른 목소리가 울렸다.
《누가 왔다구?… 아, 미인가수 김은영동무가!…》
라윤천이 재빨리 귀띔했다.
《인사하시오. 박창호부수상동지이시오.》
박창호는 흔히 얼마우재라고 하는 사람이였다. 중키에 다부진 몸매를 가진 중년의 사나이로서 시꺼먼 눈시울을 자주 흠칫거리는것이 세상만사를 마뜩지않게 보는것 같았다. 그가 은영을 응접실로 안내하며 로씨야식억양이 드러나는 말투로 점잖게 말했다.
《이렇게 와줘서 정말 반갑소. 오늘이 바로 내 생일인데… 은영동무까지 와주니 매우 기쁘오.》
《예?…》
《왜 놀라시오?》
《전 아무것도 모르구…》 은영은 가까스로 말을 이었다. 《이런 좌석에 제가 어떻게 감히?…》
《아, 은영동무야말로 초대받을만 하지. 명가수니까. 자, 어서!…》
응접실엔 낯익은 무용수와 피아니스트도 있었다. 누구인가 축하연의 참가자들을 단촐하게 그리고 의미있게 고른것 같았다. 은영은 죄스러운듯 한 미소를 띄우고 허리를 잔뜩 굽히며 방안에 들어서는 라윤천을 증오와 멸시에 찬 눈길로 쏘아보고있었다.
부수상의 서기가 매 사람에게 좌석을 눈짓했다.
《은영동문 여기 와 앉으십시오.》
은영은 못박힌듯 움직이지 못했다. 매운 연기를 삼킨것처럼 숨이 막혔다. 박창호가 부수상이라는 높은 직위에 있는 사람만 아니라면 당장 문을 차고 뛰쳐나가고싶었다.
서기가 직접 은영이를 손잡아 자리에 이끌며 아주 소탈하게, 무던히도 상냥하게 말했다.
《은영동무, 오늘이 부수상동지의 생일인데 일이 안될라니 어제 장인되시는분이 운명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모님이랑 급히 친정에 갔으니 대신 우리가 축하해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
그것은 아무런 구속없이 밤새껏 즐겨도 된다는 명백한 암시였다.
박부수상이 먼저 자리에 앉으며 여전히 움직이지 못하는 은영이에게 넌지시 말했다.
《나라형편이 어렵고 안사람도 없는 때여서 다른 사람들에겐 알리지 않았소. 부수상이라고 요란스럽게 생일을 쇠여서야 되겠소. 가족끼리 모인셈치고 별로 차린건 없지만 많이들 드시오.》
그의 말처럼 눈앞에 차려놓은 음식상은 저으기 간소한 편이였다. 로씨야제워드까와 둥근빵, 빠다, 칼파스와 닭알부침, 사과 그리고 남새료리가 전부였다.
다혈질인 박부수상이 오늘은 세상에 알려진 격한 성미와는 달리 아주 점잖게 처신하고있다는것을 인정하지 않을수 없었다. 이러한 인상이 은영이로 하여금 마지 못해 자리에 앉도록 하였다.
축하의 인사말들이 있었다. 라윤천이 말하고 서기도 일어섰다. 축하의 말끝마다 잔을 쪼아대는데 한시바삐 취기가 올라 분위기가 흥거로와지기를 재촉하는듯 싶었다.
언제부터였는지 은영이가 들어서면서 잠시 멎어있던 축음기가 다시 돌아가고있었다. 《푸른 초원》, 《눈처녀》, 《삼두역마차》… 챠이꼽스끼와 림스끼- 꼬르싸꼬브 등의 음악들이였다. 로씨야의 눈덮인 광야를 달리는 삼두마차의 채찍소리와 방울소리가 은은히 울려오는듯 했다. 그러나 음악은 그들의 주위분위기를 돋구기 위한 하나의 양념일뿐이였다. 음악에는 귀도 기울이지 않고 박부수상과 그의 두 충복은 열심히 마셔대기 시작했다.
《은영동문 왜 안드시오?》박창호가 물었다. 《이런 좌석에서야 뭐 허물할게 있소?》
《미안합니다. 전 술을 마실줄 모릅니다.》
《알아야 하오. 술이란게 왜 생겨났겠소. 고달픈 인생을 잊고 마음을 돋구기 위해서란 말이요. 그래서 노래와 춤도 있는거구 술도 있는거요. 그렇지 않소?》
기회를 놓치지 않고 여러 사람이 발라맞추었다.
《옳은 말씀입니다. 부수상동지.》
《술이란 인생을 고무합지요.》
《그래서 반잔술에 눈물나고 한잔술엔 웃음난다 하는가부죠?》
《정말 술이란 얼마나 좋아!》
몸매 날씬한 무용수와 피아니스트까지 껴드는것을 보며 은영은 속이 메슥메슥해지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어느새 박부수상은 취기가 올라 은영의 입에 억지로 술잔을 쏟는가 하면 부지중 로씨야와 우즈베끼스딴의 추억에 목이 메여 눈물을 머금기도 하였다. 그리고는 조국의 어려운 형편과 밤이 지나면 산더미같은 일감을 안고 동분서주해야만 하는 자기의 무거운 책임을 력설하기도 했다.
《그래서 날 위해주러 찾아온 님자네들과 아가씨들이 고맙기만 해. 자 또 들자구!》
잠시 분위기를 살피던 라윤천이 부수상에게 귀띔했다.
《부수상동지, 노래를 시작해도 되겠습니까?》
《노래? 라참사가 노래하겠다는건가?》
《아니지요, 부수상동지. 여기 김은영동무가 축하의 노래를 불러드리겠다는겁니다.》
《은영동문 손님으로 온거야.》 뜻밖에도 박창호는 라윤천에게 매서운 눈길을 던졌다. 《여기가 뭐 에스뜨라다인줄 아는가? 지금 온 나라가 허리띠를 졸라매고 전후복구건설에 떨쳐나섰는데 부수상이라는 사람이 자기 생일놀이에 명가수를 청해다 노래를 시키면서 떠들썩해봐. 그럼 우린 뭐가 되는가, 응?…》
《예, 예. 부수상동지, 제가 그만… 생각이 짧았습니다.》
《두라크(바보)!》
박창호는 주독이 오른듯 시뻘건 코를 손바닥으로 비벼대였고 라윤천은 황송스러운듯 머리를 수그렸다. 그러나 그 순간 차디찬 눈빛이 번뜩이는것을 은영은 알아보았다. 상급들의 비위를 맞추고있으나 속에서는 무서운 독기가 뱀의 혀바닥처럼 날름거리고있는것이 분명하였다.
박창호는 다시 서기에게로 돌아앉아 래일아침에 해야 할 일들에 대하여 말하기 시작했다.
은영은 남몰래 한숨을 내그었다. 어쨌든 가슴을 조이게 하던 불안이, 마음에 없는 노래를 불러야 하는 괴로운 일이 지나간것이다. 그러나 자리를 뜰 기회는 아직 오지 않은것 같았다. 박창호는 또 라윤천에게 뭐라고 실무적인 지시를 주고있었다. 부수상이라는 중책을 한순간도 잊지 않는 사람이였다. 교태를 부리던 무용수까지 샐쭉해질 지경이였다. 그때 피아노소리가 울렸다. 누가 시켰는가?… 피아니스트가 조용히 왈쯔곡을 타고있었다. 요한 슈트라우스의 《봄의 목소리》였다.
《그래, 그게 좋아!》 박창호가 술에 젖은 거쉰 소리로 말했다. 《그것두 챠이꼽스끼의 곡이지?》
《예, 옳습니다. 부수상동지!》
라윤천이 기다렸던듯 제꺽 대답하였다. 두사람의 엉너리재담에 은영은 처음으로 조용히, 쓰겁게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을 달리 리해한 박창호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은영의 팔을 잡아끌었다.
《사업얘기만 해서 미안하오. 자, 춤이나 춥시다.》
별안간 은영은 물속에라도 잠겨든듯 했다. 마비된듯 한 적막에 귀가 징징 울었다. 무서운 일이 벌어지리라는 예감에 가슴이 졸아들어 견딜수 없었다. 피아노소리가 커졌다. 요한 슈트라우스의 《봄의 목소리》가 그들을 유혹하며 가슴을 마구 휘젓고있는것이였다.
박창호는 든든한 팔로 은영의 허리를 휘감고 천천히 주단을 밟으며 돌아가기 시작했다. 한편에서는 라윤천이 무용수를 껴안고 무어라고 소곤거리고있었다. 그들은 이런 밤을 한두번만 보내지 않은것 같았다.
차츰 은영은 고개를 뒤로 젖히며 자꾸만 발을 헛디디였다. 목구멍에서는 금시 신음소리가 새여나오려 했다. 박부수상의 뜨거운 숨결이 얼굴에 퍼부어지는것이였다. 그 순간 눈앞이 새까매졌다. 먹물속같은 어둠속에서 유령들이 허우적거렸다.
《정전인가?》 거쉰 목소리.
《예, 부수상동지. 정전입니다.》라윤천의 대답.
피아노가 광란적으로 떨고 유령들도 《봄의 목소리》에 취한것처럼 시꺼먼 그림자를 어룽거렸다. 은영은 역한 술내를 피하려 머리를 젖히고 한손을 가슴앞에 벋치며 안깐힘을 쓰지 않으면 안되였다. 어마어마한 직무에 앉아있는 사람의 이름과 자존심에 그림자를 드리우지 않으려는 필사의 노력이였다.
《은영이.》박창호가 거쉰 소리를 짜냈다. 《우린 너무 늦게야 만났구만. 그래도 일없어. 봉창하면 되니까. 응?》
굵다란 팔로 꽉 껴안고 역한 술내를 입가로 뿜어대였다. 불에 달군것 같이 뜨거워진 손바닥은 자꾸만 꼬무작거리고 무엇인가를 찾아 더듬었다.
《아니, 아니?…》
아무리 뻗대여도 당할수 없는 사나이의 완력과 미친듯 한 충동에 은영은 헛되이 모지름을 썼다.
《가만 있어, 가만!…》
새까만 어둠속에서 봄의 목소리만이 속절없이 흐느끼였다. 그래도 유령같은 그림자들은 가쁘게 호흡하며 돌아가고있다. 그렇게 돌아가던 하나의 유령이 벽에 머리를 짓쪼으며 신음했다.
은영이 낮게 부르짖었다.
《불을 켜요!》
《무슨 일이요?》서기가 묻는 소리.
《왜 그래?》라윤천이 덩달아 소리쳤다.
《불을 켜지 못하겠어요?》
잠시후 피아노소리가 멎고 불이 켜졌다. 은영은 피아니스트를 밀어내고 그자리에 서있었다. 벽에 머리를 쪼은 박창호가 수치와 분노에 못이겨 이를 악물고있는것이 모두의 눈에 띄였다. 시꺼먼 눈섭이 이마우에서 푸들거리고있었다.
《아니, 부수상동지?!…》
그를 지켜보던 라윤천이 살인이라도 칠것처럼 이발을 사려물었다. 그의 이마우를 엇비듬히 가로 질러간 가느다란 주름살들이 경련적으로 흠칫거렸다.
모두가 은영이에게 찌르는듯 한 눈길을 던졌다.
《빌어먹을!》마침내 박창호가 이발을 사려물며 거쉰 소리를 짜냈다. 《어따대구 감히… 노래나 부르는 녀자가 그래 당에서 아껴준다구 해서 감히 부수상까지 멸시하는건가?》
《아뇨.》은영이 저고리를 여미며 숨찬 목소리로 말했다. 《전 저자신을 멸시합니다. 이런덴줄 모르구 끌려온 저를요…》
《뭐가 어쨌어?》
라윤천이 나섰다. 벌려진 입귀에서 싸늘한 미소가 독가스처럼 피여나고있었다.
《방자스럽기란!… 제가 도대체 뭐라구.》
은영은 그를 외면하고 분노에 질려 시꺼매진 박창호를 향하여 숨찬 소리로 말했다.
《미안합니다. 전 아직 사교춤을 배우지 못했구 또 바쁜 일도 있구 해서… 이만 실례하겠어요.》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라윤천은 높은 직급에 있는 상관에게 눈길을 돌렸고 서기는 너무도 심한 충격에 입이 얼어붙은것 같았다. 무용수와 피아니스트도 구석에 물러가 두손을 가슴에 얹고있을뿐… 분노와 멸시의 찬바람이 회오리처럼 방안을 휩쓸었다.
은영은 옷매무시를 바로 하고 천천히 문을 열고 나섰다. 그때까지 누구도 움직이지 못하고있었다.
뒤늦게야 현관밖으로 따라나온것은 라윤천이였다. 험악해진 기상으로 은영을 막아서며 그는 두볼을 푸들푸들 떨었다.
《네가 감히 부수상동질 모욕해? 이게 어따대구 삿대질이야?!…》
은영은 경멸에 찬 눈길로 잠시 그를 쏘아보았다. 권력의 문지기, 세력가의 방자, 웃사람들의 배꼽이나 긁어주는 치사한 노복!…
《비켜요!》 은영은 가늘게 부르짖었다. 《비키지 못하겠어요? 치사하고 너절한 사람!》
《뭐 뭐이라구?》
라윤천이 풀떡거리자 사슬에 매여있던 개도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차안에서 졸고있던 운전사가 급히 문짝을 열고 내다보았다.
《가만두지 않겠어!》 라윤천이 주먹을 부르쥐고 으시시 몸을 떨며 목갈린 소리를 질렀다.
《네가 아직 내 솜씨를 보지 못했구나. 그러니 잘망스럽게 놀수밖에!… 아까는 내가 다 말하지 않았지만 알아둬. 박수미란 녀자가 뭐라고 폭로했는지 알기나 해? 고종우가 림호를 경찰에 고발해서 죽게 하구 네년과 같이 북으로 달아났다는거야. 말하자면 둘이서 공모한거나 같다는 말인데 이게 뭐 간단한 일인가?!》
《뭐-예요?!…》
별안간 쇠몽둥이에 머리를 얻어맞은듯 했다. 눈앞에서 무수한 불찌들이 아물거렸다. 박수미가 뭐 어쨌다구. 고종우가 림호를 고발했다구?… 다음 순간 은영은 두손을 맞잡아 비틀며 입술을 악물었다. 미친년의 허튼 소리, 아니면 저것들이 누구를 구렁텅이에 몰아넣으려고 우정 꾸며낸 소리이다!…
《그래도 난》하고 라윤천이 악문 이새로 사납게 부르짖었다. 《너를 도와주려구 했어. 너를 아깝게 생각해서 돕자구 했는데 뭐가 어쨌어? 똑똑히 알아둬. 난 용서가 없는 사람이야. 네년이 맘편히 살도록 가만히 놔둘 내가 아니야!》
사슬에 매인 개도 왕왕 짖으며 달려들었다. 은영은 저도 모르게 또 뒤걸음치며 귀를 막았다. 목소리가 끊어질듯 사납게 달려 들며 울부짖는 그 소리에 머리칼이 곤두섰다.
《이제라도 들어가 용서를 빌어!》
라윤천이 부르짖을 때마다 사나운 개도 극성스레 짖어댔다. 겁에 질린 섬약한 녀자를 물어메치지 못하여 발광이 나있다.
《말해봐. 용서를 안빌테야?》
절컥거리는 사슬소리와 미친듯 한 개의 울부짖음소리. 언젠가 리채옥선생을 추격하며 울부짖던 왜놈의 개들도 그렇게 짖어대였었다. 그리고는 갈기갈기 물어뜯고 피를 뿌리며 날뛰였고…
《어서 들어가!》
라윤천이 은영의 팔을 거머쥐려고 했다.
순간 은영은 그를 세차게 뿌리쳤다.
《다치지 말아!》
《이년이?…》
은영은 홱 몸을 돌려 대문쪽으로 걸어나갔다. 개짖는 소리와 라윤천이 이발을 사려물고 미친듯 고아대는 웨침소리가 돌멩이처럼 날아왔어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두고보자, 이년! 이 쌍년, 두고보자!…》
대문밖에서는 건설의 교향곡이 계속되고있었다. 오고가는 차들이 밝은 전조등의 불빛으로 정신없이 걷고있는 은영이를 비쳐주고있었다. 째지는듯 한 호각소리와 노래소리, 웨침소리와 웃음소리, 《치기영- 어기영》의 가락맞는 목도군들의 소리… 그것은 시인 조기천이 싸우는 전선길에서 격조높이 읊던 시의 한구절이 아니던가?!
《치기영- 어기영- 치기영》
복구대는 일한다
시한탄을 끌어내친다
그러면 어둠속에서 호각소리 울리고
서리어린 화물차는 박는듯이 멎고
그렇다. 조선은 지금도 싸우고있는것이다.
은영은 바삐 걸었다. 주위세계는 온통 소리로 차있다. 살아 숨쉬는 모든것이 소리를 내고있다. 그 모든 소리가 들끓는 삶의 노래로, 건설의 교향곡으로 화음을 이루고있다. 여기서는 시시한 잡음이 끼일 자리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영은 어수선한 구석에 앉아 거품처럼 잦아드는 잡음에 귀를 기울이고있었고 라윤천의 허튼소리에 얻어맞은것처럼 비틀거리고있었다. 얼마나 어리석었는가, 그리고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인가!… 은영은 정신나간 녀자처럼 건설장 한복판을 꿰질러나갔다. 타는듯 한 아픔이 줄곧 가슴을 옥죄이고있었다. 그는 자기가 어데로 가고있는지도 알지 못했다.
《동무, 비키오!》
갑자기 성난 목소리가 돌멩이처럼 날아왔다. 따찌까를 밀며 바람같이 달려오던 청년이 소리친것이였다. 그러나 은영은 따찌까바퀴가 굴러오는 널판자우에서 내려설념도 못했다. 너무도 뜻밖의 일에 입을 벌리고 굳어져있었다. 충돌은 피할수 없게 되였다.
《아!-》
누가 먼저 부르짖었는지… 널판자우에서 미끄러진 청년이 따찌까와 함께 기우뚱하더니 한옆으로 나딩굴었다. 그 서슬에 장대기에 매달린 외등이 세차게 흔들거렸다. 흔들거릴 때마다 불빛도 사납게 껌벅거렸다.
《넨장!》 청년이 벌떡 뛰쳐 일어나면서 눈의 흰자위를 사납게 굴렸다. 《이건 뭐요. 눈이 멀었소?》
《미안해요. 제가 그만…》
청년은 은영의 말에 흥! 하고 씨근거리더니 색날은 군모를 벗어 온몸에 들씌워진 세멘트가루를 털었다. 그것도 잠간, 제대군인인듯한 그 청년은 어느새 바닥에 쏟아버린 세멘트를 두손으로 쓸어모으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은영은 그에게로 다가가 서슴없이 손으로 땅바닥의 세멘트를 모았다.
《비키오!》청년의 목소리는 여전히 몰풍스러웠다. 《어서 저 갈데루나 가보우. 분내만 풍기지 말구.》
《?!…》
은영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 어떤 욕설이라도 좋았다. 분내나 풍기는 녀자, 여기 건설장에서는 하등 쓸모가 없는 녀자였다. 차라리 그가 사정없이 욕질하고 매질이라도 했으면 속이 후련할것 같았다.
《동무!》제대군인청년이 은영이를 밀막았다. 《그만두- 그러다 옷이 험해지겠소.》
어느새 너누룩해진 그의 얼굴을 스쳐보며 은영은 머리를 저었다.
《괜찮아요. 저를 더 욕해주세요.》
《챠! 이런…》
한동안 그들은 아무말없이 널려진 세멘트를 따찌까에 담았다. 사뭇 껌벅이던 외등도 어느덧 분을 삭인듯 더이상 높뛰지 않고 따스한 빛을 뿌려주고있었다.
따찌까를 밀며 오고가던 사람들이 그들을 여겨보며 웃고 떠들군했다.
《저 친구 병수 아니야? 어데서 저런 멋쟁이 미인을 채왔어?》
《옳구만, 리병수 그 친구야. 챠! 저 얌전데기가 벌써?…》
《여, 병수. 거기서 이마를 맞대구 뭘 수군거리나?》
《아, 아, 떠들지 말라구. 모른척 하구있다가 국수나 먹읍세!》
리병수라고 불리운 그 제대군인청년은 동료들이 시까슬고있는 소리엔 아무 대꾸도 없이 허리를 펴고 일어서더니 목에 걸고있던 수건을 은영이에게 내밀었다.
《손을 닦으십시오. 괜히 나때문에…》
《아니, 제가 잘못했어요.》
은영은 수건을 받았다. 그의 진정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모욕으로 여겨질수도 있다.
《헌데.》하고 리병수가 물었다. 《여긴 왜 왔습니까. 누굴 만나려구요?》
《아뇨. 그저 제 생각에만 옴해있다가 길을 잘못 들었어요.》
리병수는 믿어지지 않는듯 머리를 기웃거렸다.
《그런 옷차림을 하구 이 험한델 들어오다니요. 어쨌든 제가 소리친건 량해하십시오.》
《아녜요. 전 오히려 동무가 소리친걸 고맙게 여기는걸요. 하마트면 허튼 길에 들어설번 한 저를 정신이 번쩍 들게 해주지 않았나요.》
제대군인청년이 은영의 그 말을 곧이 들을리는 만무였다.
《원 무슨 말씀을… 헌데 목소리도 참!… 은방울 굴리는 소리라더니 혹시 배우가 아닙니까? 어쩐지…》
《예, 옳아요, 성악배우.》
《아!》리병수가 탄성을 질렀다. 《그렇군요. 우리 건설장에 배우동무가 찾아왔군요. 그런것두 모르구… 배우동무, 고맙습니다. 이렇게 찾아와주어서 정말 고맙습니다!》
《아, 아니, 난…》
그러나 리병수는 어느새 사람들을 부르며 소리치기 시작했다. 색날은 군모를 벗어 흔들며 배우동무가 찾아왔다고 어서 빨리 모이라고 기쁨에 넘쳐 웨쳐대는것이였다.
일은 딱하게 되였다.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적동색얼굴에 땀이 번들거리는 사나이가 허리를 굽석하며 인사를 했고 몸이 갱핏한 어떤 젊은이는 군대식으로 멋지게 거수경례까지 했다.
《배우동지, 우리 건설자들의 이름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외등주위에 둘러 앉은 사람들앞에서 은영은 어찌할바를 몰랐다. 이럴 때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소편성의 악대는 고사하고 손풍금반주조차 없다. 그렇다고 구실을 대여 달아난다면 그것은 곧 이 수수한 사람들을 모욕하는것으로 될것이다.
《자, 자. 조용하시오.》누군가 팔을 내저으며 소리쳤다. 《입방아만 찧지 말구 모처럼 우릴 찾아온 배우동무를 축하해줘야 할게 아닌가!》
《옳수다. 반장동무, 축하해줍시다.》
《그런데 꽃다발이 없구만. 응?!》
《목마를 태웁시다, 목마를!》
에그머니! 녀배우인 자기를 목마에 태운다는 소리에 은영은 뒤걸음치기까지 했다. 다행히 누군가 《자, 박수!》하고 웨치자 웃고 떠들던 사람들이 손바닥이 터질 지경으로 박수를 쳤다. 그러는 가운데 몸매가 둥실한 녀인이 째지는 소리로 웨쳤다.
《아유, 예쁘기두 해라. 이름이나 좀 압시다레!》
많은 사람들이 목청을 합쳤다.
《옳소. 소개를 좀 해주시우.》
《이름부터 들어봅시다!》
웬일인지 눈굽이 쿡 쑤시는것을 느꼈다. 그들모두를 향해 머리숙여 인사하려니 두눈에서 눈물이 끓기 시작했다. 방금 지체높은 간부댁에서 모욕을 받고나온 은영이였다. 칼끝같은 독설과 위협을 받으며 발길 닿는대로 정처없이 헤매던 은영이였다.
은영은 머리를 들었다. 눈물을 감추려 하지 않았다.
《여러분, 저는 국립예술극장 성악배우 김은영입니다. 요즘 공연되는 민족가극 <견우직녀>에서 직녀역을 맡은…》
다음말을 이을수 없었다. 《야!-》하는 탄성과 수군대는 소리가 마른 잔디밭에 달린 불길처럼 번져가더니 또다시 요란한 박수가 터졌다.
《여러분, 미안합니다.》 은영은 진정 감사의 정에 겨워 눈시울을 떨며 계속하였다. 《아무런 준비없이 저 혼자 와서… 하지만 여러분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힘쓰겠습니다. 먼저 광복전에 부르던 노래 한곡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찬바람 부는 들길로 정처없이 헤매이던 한 처녀에 대한 노래입니다.…》
건설자들모두가 숨을 죽이고있었다. 은영은 그들중에서 류달리 목이 상큼한 처녀를 눈여겨보며 음정을 더듬었다. 아니 고향의 강기슭, 쌍바위기슭을 뛰여가던 어린 시절의 자기자신을 그려보았다. 모래불에 찍히던 작은 발자국, 그 발자국마다에 고이던 물… 그것은 그저 흐려진 강물이였던가?…
하늘을 지붕삼고 떠도는 신세
동서남북 바람결에 갈곳이 없어
찬이슬 잔디우에 쓰러져 울면
어머님의 옛 사랑이 다시 그립다
배우는 언제 어느때건 관객의 분위기를 읽을줄 알아야 한다. 특히 성악가수는 관객의 숨결을 타고 노래부를줄 알아야 한다. 멋진 소리만 뽑으려 해서는 그들의 심금을 울리지 못한다. 그들자신이 마음속으로 같이 노래를 부를수 있게 호흡을 같이 해야만 한다.
비오고 바람부는 하늘밑에서
팔베개로 꿈을 꾸는 집없는 천사
운다고 옛 사랑이 다시 올소냐
설음맺힌 가슴에도 희망은 있다
목이 상큼한 처녀의 눈에 눈물이 고이는것을 은영은 보았다. 그 처녀도 노래 《집없는 천사》의 애어린 녀주인공처럼 수난에 찬 시절을 보냈으리라. 하여 은영은 노래의 여운처럼 이렇게 나직이 말하였다.
《노래에도 있듯이 설음맺힌 처녀의 가슴에도 희망은 있었습니다. 그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왔어요. 그래서 끝내는 밝은 해님이 비쳐주는 새날을 맞고 행복한 고향의 밤을 노래불렀습니다.》
안개낀 모란봉에 둥근달 솟아올라
잔잔한 대동강에 저녁이 오니
금물결 은물결에 실버들 춤추네
사랑하는 내 고향이며 나의 요람이여
아름다운 고향의 밤이여
어디라 먼길 가도 잊을수 있으리오
정다운 그 모습 나의 고향이여
요란한 박수가 뒤따랐다. 재청, 또 재청!… 어느덧 은영은 라윤천이며 박부수상따위는 까맣게 잊고있었다. 어버이수령님께서 언제든 인민을 위해 노래하라고, 인민의 사상감정에 맞는 노래를 부르며 인민의 사랑받는 가수가 되라고하신 말씀의 참뜻을 비로소 깨닫는듯 싶었다.
몇곡이나 더 불렀는지 모른다. 나중엔 전체 건설자들과 함께 노래했다.
터전을 다진다 힘차게 다져라
원쑤들이 불사른 내 고향 페허에
용광로 굴뚝과 아담한 집 세워
부강한 우리의 조국을 건설하세
사람들은 끝없이 노래를 듣고싶어했지만 밤이 깊었으므로 녀가수가 무리해선 안된다고 념려하는것도 잊지 않았다. 합창이 끝나자 모두 일시에 밀려나와 은영이를 둘러쌌다. 다음번에 오면 제일 크고 화려한 꽃다발을 준비하겠노라고 약속했다. 건설지휘부의 일군인듯 한 사람은 은영의 두손을 꽉 잡아주며 말했다.
《오늘 배우동무가 얼마나 큰 일을 했는지 아시오? 사실 우리 건설자들은 극장에 다닐 짬도 내지 못하지요. 건설이 바쁘다고 맞교대로 일하는 사람들이니까요. 그래서 스피카에서 나오는 노래나 듣는게 고작이였는데 이렇게 배우동무가 와서 노래를 불러주니 얼마나 좋아들 합니까. 앞으로 종종 찾아주면 정말 고맙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부탁했다.
《또 오십시오. 배우동무, 아무때나 와서 노랠 불러주시오.》
《부탁합니다. 배우동무!》
은영은 웃으며 건설자들이 저저마끔 내미는 손을 잡아주군 하였다.
《약속해요, 정말이예요. 꼭 오겠어요. 자주 오겠어요!》
은영이를 노래부르게 한 리병수가 마지막까지 바래주는 역을 맡았다. 녀왕님을 모시듯이 걸음마다 조심하라고 일러주는가 하면 손을 잡아 흙무지우로 끌어올리기도 하면서 큰길에까지 나섰다. 그가 마지막으로 부탁한것도 꼭 와달라는것이였다.
《그럼 기다리겠습니다. 배우동지!》
그러나 은영은 그들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였다. 고종우가 특히 반대하였다. 당장 제5차 세계청년학생축전에 가야겠는데 그럴 새가 있는가. 그리고 늦은 밤이면 발성생리기관에 무리가 가는데 그러다 목이 상하면 그 후과를 누가 책임지는가 하는것이였다.
강상일을 찾아서 야간예술선동을 하는데 앞장서달라고 부탁했으나 그는 침울해진 눈빛으로 이렇게 말했다.
《은영동무, 난 사실 동무가 아주 좋은 생각을 했다고 보았으나 일이 좀 별나게 됐소. 부총장이 뭐라는지 아오?… 동무가 전날 건설장에 나가 류행가를 불렀다는거요. 사람들의 머리를 흐리게 했다면서 막 야단이란 말이요.》
《뭐 류행가를요?》은영은 손가락마디를 딱딱 꺾으며 숨찬 소리를 내뿜었다. 《내가 사람들의 머리를 흐리게 했다구요?》
《그날 무슨 노랠 불렀소?》
《아, 거야 처음 <집없는 천사> 그담 <고향의 밤> 그리구 새로 나온 노래들인…》
《그러니 <집없는 천사>가 문제로구만.》
《그 노래가 어째서요? 광복전에 우리가…》
강상일은 은영이가 더 말을 잇지 못하게 팔을 홱 내저었다.
《부총장은 동물 무대에 내세워 검토하겠다고 을러대는데… 어쨌든 마음의 준비를 해둬야겠소.》
은영은 숨도 쉬지 못하는듯 허덕이였다. 강상일이 우려하는것처럼 심각한 일이 아닐수 없다. 일부 사람들은 류행가는 물론 《류행가조》라는 말만 나와도 입에 게거품을 물고 달려드는것이였다. 광복전에 나온 계몽기가요들을 류행가라는 웅뎅이에 집어넣고 퇴페적이고 반동적인 음악으로 짓뭉개던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