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 장
보이지 않는 그림자
1
음악무용대학을 졸업한 새 무용수들이 극장에 왔다. 무용강사인 림현순은 훈련장에서 새로 온 처녀들의 기초훈련을 지도하고있었다. 보통걷기로부터 꼬아걷기, 스쳐서걷기와 미끄러져걷기, 앞뒤로 잦은발걷기를 살피며 매 처녀들의 얼굴형은 물론 자세가 바른가, 호흡을 받쳐 걷는가, 손과 발의 크기에 이르기까지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흔히 손과 발이 크면 키도 크며 골반이 벌려져있으면 깊이앉기와 앞뒤차기도 자유자재로 할수 있다는것이 무용일반의 상식이다.
《자, 이번엔 조선춤가락을 보자요. 굿거리장단에 맞추어 아래로 감기와 우로 메기부터!…》 장고를 두드리며 한사람씩 지적한다.
《앞줄 세번째, 동문 미영이라구 했지?… 자 보세요, 팔은 유연하게… 좋아요, 다시!… 호흡으로 춤추어야 한다는걸 잊지 마세요.… 우로 돌면서 굴신!…
수옥인 발목과 무릎마디들이 잘 풀리지 않아요. 다시 좌로 돌면서… 조선춤가락은 일체 곡선이라는걸 잊지 말아요.》
현순은 아까부터 머리에 백발을 얹은 한 녀인이 뒤구석 의자에 앉아 그윽한 눈길로 지켜보고있는것도 알지 못했다. 매 처녀들의 률동과 예술적감각을 료해하느라고 1시간 이상이나 정신을 집중하고있었다.
《윤희, 축을 세우고 호흡을 받쳐서 다시!… 아니, 아니야, 장단을 타면서 내심의 감정을 가락으로 표현해야 해요. 가만!》 참다못해 앞으로 나가 시범동작을 해보였다. 《동무들, 명심하세요. 처음부터 얼굴이 곱고 몸매가 날씬한 무용수를 바라고 노력하는것과 인간의 감정을 춤가락으로 표현하는 무용수를 지향하는것과는 큰 차이가 있어요. 하나의 동작도 기계적으로가 아니라 감정의 표현으로 생각하면서 다시!…》
현순은 제자리에 돌아올 때에야 반가운 미소를 떠올리고있는 한정애와 눈길이 마주쳤다.
《아이, 언제 오셨어요?》
《좀전에 왔어. 어서 계속해요.》
《그럼 조금만 더 앉아계셔요.》
시계를 보니 몸풀기기초훈련시간이 퍼그나 지났었다. 현순은 서둘러 훈련을 끝내고 백발의 녀인을 자기 방으로 이끌었다.
《현순인 꼭 어머니 그대로야.》한정애가 웃으며 말했다. 《정열가구 요구성이 높구… 현순이가 훈련주는것을 보면서 난 처음 현순이 어머니한테서 발성훈련을 받던 일이 떠오르는게 아니겠어. 호흡이 기본이다, 배에서 소리가 나와야 한다, 허리에 힘을 주고 아래배는 집어넣고… 목이나 볼에서 소리가 나와선 안돼, 배에 굴뚝같은 소리통을 세우고 자기의 인생을 노래한다고 생각해봐, 저 높은 곳으로 연기를 뿜어올리듯이 자기의 감정을 소리로 뽑으라는데! … 하면서 얼마나 요구성을 높였는지 몰라.》
그는 웃었다. 비록 70을 퍼그나 넘겼지만 아직도 옛시절처럼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고있는것이였다.
《참!》 현순은 그를 보며 혀를 찼다. 《하나도 변하지 않으셨군요. 웃으시는것까지!》
그러자 한정애는 손을 내저었다.
《무슨 소릴! 김선생에 비하면야 난 다 늙은이지. 현순이 어머니를 볼 때마다 정말 얼마나 부러워하는지 몰라. 80고령인데두 아직 해맑은 모습에 목소리까지 챙챙하니 선녀로 태여나지 않은 이상 어디 그런 일이 있을수 있을가?…》
현순이도 웃지 않을수 없었다.
《우리 어머니야 늘 그런걸요. 아직도 아침마다 발성련습을 하고 화장을 곱게 하고… 꼭 무대에 나서는것처럼 몸과 마음을 가꾸신다니까요.》
《그게 얼마나 좋은가. 예술가는 몸도 마음도 정신도 다 아름다와야 한다고 늘 말하군 했지. 그런데 김선생한테서 배운 나는 그렇지 못해.》
《그렇지만 우리 어머닌》하고 현순은 쓸쓸한 미소를 머금으며 나직이 말하였다. 《그러다 말았죠.》
《그건 무슨 소린가?》 한정애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난 인민배우로까지 되였는데 어머닌 아무런 명예칭호도 없다는 그 말인가?》
《아니 그저…》
현순은 보온병을 기울이다 말고 눈길을 떨구었다. 화제가 이렇게 번져지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었다. 언제든 어머니의 화려한 성공과 쟁쟁하던 명성에 뒤따른 어두운 그림자를 상기할 때마다 가슴속에 스며드는 날카로운 아픔을 견딜수 없었다. 하여 현순은 구깃구깃 구겨지는 마음을 다잡으며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참 이렇게 극장에까지 오실줄은 몰랐어요. 우정 나한테 찾아오신건 아니겠죠?》
《극장에 왔던 길에 들려보았지. 현순이도 만나보구싶구.》
《저… 무슨 일루…》
《듣자니 현순이가 베이징에 가서 박수미의 딸을 만났다면서?… 현순이 어머니가 전화로 알려주더구만.》
《우리 어머니가요?… 아니 그게 무슨 큰일이라구…》
《글쎄 현순이한테야 무슨 큰일이겠냐만 우리한텐 그렇지 않아. 김선생은 물론이구 고종우나 강상일같은분들도 그 녀자때문에 마음고생을 크게 했더랬지. 정말 무서운 녀자였어.》
《?…》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한정애는 현순이 따라주는 차잔을 손에 든채 이윽토록 그것을 들여다보기만 했다. 마치 발가우리한 그 물우에 박수미의 환영이 비쳐지고있는듯 했다.
그때 한 처녀가 문을 열고 얼굴을 빠끔히 들이밀었다.
《강사동지, 우린 뭘 해야 합니까?》
《내 인츰 나가요.》
한정애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쁜 시간에 안됐구만. 어서 가보라구. 저녁에 어머니랑 만나려 집에 가겠어. 김선생이 초청하더구만.》
《그래요?》
《응, 옛일도 추억할겸 한번 마주앉자는거야. 현순이도 꼭 알아야 할 일들이 있구.》
《?…》
현순은 말없이 로가수의 웃고있는 모습을 의아하여 지켜보았다. 내가 모르고있는것이 무엇이며 꼭 알아야 할 일이란 또 무엇일가. 어머니가 여태 딸에게까지 숨겨온 비밀의 과거사라도 있단 말인가?… 아니, 그런 일은 있을수 없다. 현순은 머리속에 스쳐간 의혹을 털어버리듯 머리를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저녁에 기다리겠어요. 꼭 오셔야 해요.》
《그러지.》
현순이 집에 들어섰을 때엔 벌써 로가수들인 어머니와 한정애가 피아노를 마주하고 앉아있었다. 둘이서 피아노를 련탄하면서 옛시절의 추억깊은 노래를 부르고있었다. 피아노의 베달을 밟고 소리를 죽여가며 노래하는데 마치 꿈속에서 만나 조용히 속삭이고있는듯 했다.
초소의 깊은 밤 별들은 반짝이고
대지의 모든것 깊은 잠에 들어도
아 초병아
아름다운 아침의 고향을 간직하여라
초소를 지켜선 네 모습 장하여라
네 모습 장하여라
사람마다 사랑하는 노래가 있다. 늙은이들의 경우엔 자기의 흘러간 한생을 돌이켜보며 눈물짓게 하는 노래가 있는가 하면 사랑과 행복을 추억케 하는 노래도 있다. 그러나 전후에 나온 노래 《초병》은 저 로가수들에게 어떤 추억을 불러일으키는것일가. 저 노래가 한때 한정애가 애창하던 독창곡이여서 그 나날을 추억하고있는지도 모른다.
현순은 노래가 끝날 때까지 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있었다.
《참 선생님.》 한정애가 말했다. 《전선위문공연때처럼 노래불러보는게 어때요? 씩씩하고 발랄하게!》
《좋아요, 헌데 무슨 노랠 부른다?》
《<간호원의 노래>! 좋지요?》
《좋아!》
피아노의 건반이 경쾌한 노래의 전주를 울렸다.
어느덧 로인들은 처녀시절로 되돌아간듯 률동적으로 몸을 흔들며 노래를 시작했다.
별들이 반짝이는 깊은 밤에도
정성다해 간호한 보람이 있어
완쾌한 전사동무 총을 메고서
또다시 싸움터로 떠나간다네
아 우리의 가슴 설레인다오
간호원의 자랑은 끝이 없다오
노래가 끝나자 먼저 한정애가 웃음을 터뜨렸다.
《생각나세요? 거 월비산에서 한 통신병이 김선생한테 달려나와 막 울면서 하던 말 말예요.》
《뭐라고 했더라?》
《아, 신통히 자기를 살려준 간호원처녀를 보는듯 하다면서 그 처녀를 찾아달라고 부탁하지 않았어요?》
《참, 그랬지. 처녀의 생사를 모른다구 안타까와하더니 어떻게 됐는지?… 후에라도 만났으면 좋으련만.》
《만났겠지요.》
《글쎄… 그랬으면!…》
로가수들은 잠시 침묵했다. 부지중 웃음은 사라지고 무엇인가 가슴을 치는 생각에 마음이 아릿해진것 같았다.
돌연 어머니가 먼저 이상한 기미를 느꼈는지 머리를 돌렸다.
《오, 네가 왔니?》
《예, 어머니.》 현순이 밝게 웃으며 미끄러지듯 다가갔다. 《한선생도 오신다기에 일찌감치 들어온다는게 그만 늦어졌군요.》
한정애도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니, 내가 너무 서둘러 온 탓이지. 김선생이 만나자니 한시바삐 오고싶더라니까.》
현순은 서둘렀다.
《잠간만 기다리세요. 내 이제 제꺽…》
《아니 그럴게 없다.》 어머니가 말했다. 《저녁은 다 준비해놨다. 오래간만에 우리 둘이서 동자질을 좀 했지.》
《그러세요?…》
현순은 어머니의 서투른 음식솜씨를 너무도 잘 알고있으므로 고개를 기웃거리며 부엌으로 들어갔다. 식탁우에 차려놓은것들을 재빨리 살펴보는데 한정애가 따라들어왔다.
《내 이미 말했지? 오늘은 추억의 밤이라구… 현순인 그저 어릴 때처럼 우리가 만든걸 맛이나 봐요.》
식탁우엔 화려한 상표를 나비넥타이마냥 목에 감은 인삼술병도 놓여있었다.
《어마나, 술까지 다!… 우리 어머닌 한방울도 못하시는데…》
현순이가 놀라와하자 한정애가 실눈을 지으며 말했다.
《내가 먹지. 혁철 아버진 출장을 갔다니 현순이가 동무해줘야겠어. 현순이야 원래 어릴 때부터 솜씨가 있잖아!》
《아이참, 또 그 얘길!…》
현순이도 웃지 않을수 없었다. 소리내여 웃으며 흘러간 먼 시절의 한가닥 추억을 떠올렸다. 전후복구건설이 한창이던 1954년의 어느날 철모르는 현순이에게 술을 먹이고 춤판에 끌어내려고 어거지를 쓰던 기악조의 트롬본수 주인걸아저씨, 그날 단번에 8쌍의 결혼식이 벌어지던 모란봉지하극장의 어둑스레하던 무대, 춤과 노래, 웃음과 눈물, 기쁨과 설음이 뒤엉켜있던 잊을수 없는 그 밤의 추억이였다.
진정 오늘도 모든것이 《추억의 밤》으로 준비되여있은것 같다. 어머니도 미소를 그리며 식탁으로 다가왔다.
《어떠냐, 잘 차렸지?》
《예, 보기만 해도 군침이 막 돌아요.》
《그럼 됐군요.》 한정애가 나서며 걸상을 당겨놓았다. 그리고는 옛시절의 안내양들모양 무릎을 살짝 굽히며 식탁을 가리켰다. 《숙녀여러분, 어서 앉으세요.》
떠들썩 웃으며 자리잡고 앉았다. 현순이 로가수들과 자기의 잔에 술을 부었다.
《자 무엇을 위해 들가요?》
현순이는 물론 한정애도 어머니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어머니는 가늘게 입귀를 떨고있을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잔을 쥐고있는 손마저 알릴듯말듯 떨리고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한정애도 자기의 첫 스승을 지켜보고있을뿐 입을 꼭 다물고있었다.
현순은 기다렸다. 서두르지 말자. 추억이란 굼니는 안개발마냥 고요히 심중에 흘러드는 야릇한 애수라고도 할수 있다. 하거늘 그 누가 서뿌른 한마디말로 따사롭고 유정하게 또 저릿저릿하게 가슴에 파고드는 그 추억의 안개발을 함부로 휘저어놓을수 있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