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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진아의 일이 한시도 림현순의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베이징에서 상하이(상해), 칭다오(청도), 장춘과 단둥(단동)에 이르는 공연 전 기간은 물론 조국으로 돌아오는 렬차에서도 극장에 갖가지 대소도구들과 의상짐을 부리우고 집으로 갈 때에도 어머니의 지난 세월의 그림자가 줄곧 그의 마음을 보이지 않는 그물처럼 칭칭 얽어매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집에 들어서니 마침 사회과학원에서 고고학을 전공하는 남편이 반겨맞아주었다. 인정깊고 다심한 남편 로한식, 고고학계의 권위있는 박사이면서 문학과 예술에도 조예가 깊은 사람이다. 흔히 남자들은 가정세말사에 파묻히면 큰일을 못한다고 하지만 그를 보면 그런것만 같지도 않다. 생활의 진미를 모르는 사람이 큰일을 하면 얼마나 하겠는가!…
그는 안해가 귀국하는 날자를 알고 미리 집에 들어와 준비를 하고있은것 같았다. 작은 앞치마를 입고있는 그의 모습을 보고는 웃지 않을수 없었다.
외국출장에서 돌아올 때마다 의례 있군 하는 인사말들이 먼저 있었다. 그새 앓지는 않았는가, 갔던 일은 잘됐는가, 집에서는 어떻게 지냈는가, 어머니의 건강과 대학을 졸업하는 맏이며 속도전청년돌격대에 나간 둘째에 대한 례사로운 질문과 대답…
어느덧 80고령에 이르고있는 어머니는 오늘도 로병예술선전활동을 나갔는데 좀 늦어질것 같다고 한다. 로한식은 옷도 갈아입을 념을 않고 부엌으로 나가려는 안해를 붙들었다.
《오늘은 내가 차린 음식이나 맛보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이요. 안색이 좋지 않구만.》
《아이참, 그저 피곤해보이겠죠.》
《그런가? 어쨌든 가서 손이나 씻소.》
현순은 벽면의 절반이나 채우고있는 거울앞에 나섰다. 내 안색이 어떻다는걸가?… 여전히 고진아며 고종우, 박수미가 머리에서 떠나지 않고있을뿐… 하여 현순은 남편에게 물었다.
《당신 박수미라는 녀자를 아세요?》
아무런 사전설명도 없는 물음이였다.
《박수미?》 로한식은 대수롭지 않게 받았다. 《음악무용대학에 있는 당신 동무말이요?》
손을 내저으며 현순이 말했다.
《아 아니, 남조선에서 한때 우리 어머니랑 같이 뭘했다는 배우말이예요. 그런 이름 들어본 일이 있어요?》
비로소 로한식은 희끄무레해진 눈빛으로 안해를 여겨보았다.
《갑자기 그런건 왜 묻소?》
《글쎄 들어본적이 있나 말이예요.》
《있소. 어머니한테서… 아마 사진도 있을거요.》
《그래요?!…》
웬일인지 심장이 아플 정도로 뛰노는것을 느꼈다. 지금까지 현순은 어머니의 옛 사진들을 한번도 흥미를 가지고 들여다본 일이 없다. 그리고 어머니는 자기의 친딸에게 지난날의 이야기를 거의나 하지 않았다. 딸이 그것을 싫어하기때문이였다. 어릴 때부터 어머니의 외로운 생활과 무서운 고독을 낱낱이 살피며 자라온 현순이여서 옛 시절의 회상이 어머니에게는 고통밖에 남기지 않는다고 생각해왔었다. 그런데 어머니는 언제 그런 이야기까지 저이에게 했을가. 친딸에게도 저어한 이야기를 사위한테 들려준 까닭은 무엇일가?…
열려진 부엌문앞에서 남편이 물었다.
《그런데 박수미라는 배우에 대해선 왜 갑자기 관심하는거요. 중국에 가서 그 녀자를 만나보기라도 했소?》
《만나봤어요.》
남편은 마치 어두운 거울속을 들여다보듯 그를 지켜보았다. 드디여 소리없는 미소가 그의 둥실한 얼굴에 번져져갔다.
《참 당신두… 그 박수미라는 녀배우는 오래전에 죽었다고 하오. 아주 비참하게 말이요.》
현순은 굳어져버렸다. 그것은 고진아가 하던 말과 같았다. 그런데 저이는 그것을 어떻게 알았을가. 이 세상 그 어떤 녀인도 자기의 인생사에 대해서는 다 밝히지 않는다고 하지 않는가!… 웬일인지 고진아를 만났을 때처럼 께름직하고 뜨아한 생각에 마음이 어수선해졌다.
《박수미의 딸을 만났어요.》 하고 현순은 몸을 떨며 말했다. 《고진아라구 하더군요.》
《뭐? 그게 정말이요?》
《…》
현순은 대답하지 않았다. 남편의 이마에 엇비듬하게 지나간 굵은 주름살이 경련적으로 꿈지락거리는것을 지켜볼뿐이였다.
그들은 어머니가 방에 들어선것도 알지 못하고있었다. 어머니는 전실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조용히 그린듯 서있었다. 남편이 《어머니 오셨소.》 라고 귀뜀했어야 현순은 머리를 홱 돌렸다.
어머니는, 80살을 눈앞에 둔 고령의 어머니는 아직도 해말쑥하고 정갈하였다. 금시 무대에 나서려는 배우처럼 전실벽에 드리운 휘장을 잡고 호흡을 받쳐 듣고있다가 조용히 묻는것이였다.
《누굴 만났다구?…》
그리도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였지만 현순은 흠칫하였다. 그리고는 손끝으로 눈시울을 어루쓸며 구원을 청하듯 남편을 돌아보았다.
사실 그는 오랜 세월 어머니가 숨겨온 비밀의 과거사를 당장 파고들려 하진 않았었다. 천천히 기회를 보아가며 어머니로 하여금 흘러간 세월의 발자취를 더듬게 하려 했을뿐…
현순은 자기에게로 향해진 어머니의 눈빛을 마주 볼수가 없었다. 갑자기 들이닥친 적막에 귀안에서 벌떼 우는 소리만 붕붕거릴뿐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