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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12월 23일, 그날은 조선전쟁사에 많은 비화들을 기록한 의미깊은 날이였다. 미국 워싱톤에서는 크리스마스를 앞둔 연회가 도처에서 벌어지고있었다. 미합동참모본부에서 조선전쟁을 주관하고있던 참모차장 릿치웨이중장도 그러한 연회중의 하나에 참가하고있었다. 연회가 한창 고조에 이르고있을 때 요란한 전화종소리가 울렸다. 콜린즈참모총장이 릿지웨이를 찾는것이였다.
《죠니, 조선전선에서 죽은 8군사령관 워커중장의 후임으로 당신이 임명되였소. 빨리 차비하고 떠나시오.》
연회장에 있던 부인들이 별안간 해쓱해진 릿지웨이의 모습에 놀라며 무슨 일인가고 물었다. 릿지웨이의 대답을 들은 녀인 하나가 웃음보를 터뜨렸다.
《난 또 3차대전이라도 일어났는가 했군요.》
릿지웨이가 급히 려장을 꾸리고 비행기에 오르던 그 시각 도꾜의 하네다비행장에는 인민군적후전선부대들의 습격으로 황천객이 된 워커중장의 시체가 비행기에서 부리워지고있었다. 바로 그 시각 맥아더는 도꾜 다이이찌빌딩의 자기 사무실에서 태평양전쟁때부터 쓰고있던 낡은 군모를 쓰고앉아 미제10군단이 흥남에서 겨우 철수했다는 보고서를 읽고있었다. 그는 불필요한 방해를 없애려고 자기 방에 전화를 놓지 않았으므로 늘 구두 혹은 서면보고를 받군 하였는데 그 보고서야말로 미군이 결정적으로 패배했다는것을 고발하는것이였다. 하여 그는 《이것은 미국력사상 최대의 참패이다!》라고 부르짖었다.
그 시각 일본내각 관방장관의 방에서는 일본주재 남조선공사가 가져온 제의를 두고 심각한 론쟁을 벌리고있었다. 남조선당국은 그 공사를 통해 일본의 북부 규슈지방에 남조선인 100만명을 수용할수 있는 땅을 빌려달라고 청했었다. 남조선당국은 인민군대의 재진격이 너무도 속도빨리 진행되여 더는 막아낼 방도가 없다고 판단했던것이다.
한편 그 시각 서울에서는 리승만이 서울을 내주고 피난할데 대한 성명을 발표하고있었다.
《미국의 벗들은 나에게 모든 비전투원들과 징병년령에 이르지 못한 남자들을 서울에서 철수하도록 권고하였다. 우리는 이 권고를 받아들여야 한다. 지금 공산군은 파죽지세로 남하하고있다. 운명이 우리를 배신하고있다.…》
…
은영이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것은 물론 오랜 세월이 흐른 뒤 력사기록을 통해서였다. 그러나 한가지만은 명백히 알고있었으니 그것은 인민군대가 벌써 림진강남쪽으로 맹렬히 진격하고있고 최후승리의 그날도 머지않았다는 바로 그것이였다.
그날은 은영이에게 있어서도 한평생 잊지 못할 특기할 사변이 있은 날이였다. 력사적인 조선로동당 제3차전원회의가 자강도 장강군 향하리에서 진행되였던 그날 12월 23일 은영은 처음으로 위대한 인민의 수령, 민족의 태양이신 김일성장군님을 뵙게 되였던것이다.
갱도에 꾸려진 회의장이였다. 물기에 젖어 번들거리던 갱도벽, 나무로 만든 긴걸상들이 빼곡이 들어차있던 회의장, 당과 군대, 국가의 지도간부들이 먼저 들어와 자리잡고앉았다. 허정숙이 다가와서 이제 곧 장군님께서 나오시면 공연을 시작하라고, 그러되 너무 흥분하지 말고 공연을 잘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하였다. 누구도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있는것 같지 않았다. 모든 사람들이 강렬한 조명등의 불빛에 눈을 쪼프리며 이제나저제나 하고 가슴을 조이고있었다.
드디여 위대한 장군님께서 나오시였다. 은영은 객석의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박수를 치는 순간 저도 모르게 흑- 흐느끼고 두손을 높이 쳐들었다. 뒤미처 터져나온 만세의 환호!… 별안간 갱도안에 눈부신 빛살이 비쳐든듯 하였다.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무엇인가 벅찬 느낌에 목이 꽉 메였다. 얼굴에 경련이 일고 입술은 사뭇 떨렸다. 언제 어떻게 만세의 환호성이 멎었는지도 미처 알지 못하였다. 소개자가 앞으로 나설 때에야 저 혼자 박수를 치고있다는것을 깨닫고 눈시울을 떨었다.
공연은 《김일성장군의 노래》로 시작되였다. 은영은 합창대가운데에 서서 장군님께서 계신쪽에만 눈길을 주고있었다. 위대한 장군님을 모시고 불멸의 송가를 부르게 된것이 꿈만 같았다. 《오 나의 태양》을 눈물로 찾으며 곡절많은 길을 걸어온 은영이가 오늘은 태양의 품에 안겨 태양의 노래를 목메여 부르고있는것이다.
격앙된 감정이 장내를 휩쓸었다. 공연종목이 바뀔 때마다 열광적인 박수가 터져나오군 하였다. 드디여 은영이 독창을 할 차례가 되였다. 첫 곡으로는 《어뢰정의 노래》… 두눈을 때리는 조명등불빛으로 하여 장군님의 모습은 잘 알리지 않았다. 후광에 싸인 좌석에서 웃고계시는듯, 아니면 싸우는 전사들의 모습을 그려보시는듯… 남먼저 박수를 쳐주시는것만은 확연하였다. 요란한 박수갈채, 갱도벽이 통채로 울리는듯 했다. 간주음악이 울릴 때까지도 박수는 그치지 않았다. 두번째 곡은 《바다의 노래》였다.
장군님께서 뒤를 돌아보시며 무어라 말씀하시는듯 했다. 허정숙이 장군님계신 곳으로 다가가 귀속말로 말씀드리고있었다. 무대를 향하여, 은영이를 손짓하며 무어라고 했는데 장군님께서 머리를 끄덕이시였다.
후에야 알게 되였지만 그때 장군님께서는 허정숙에게 처음 보는 가수인데 노래를 잘 부른다고, 목소리가 특이하고 아름답다고, 참 인상적인 가수라시며 어데서 온 동무인가고 물으시였다. 허정숙이 남반부에서 가수로 있다가 전선지구경비사령부협주단에 입대하여 활동하던중 후퇴를 맞아 죽을 고생을 다하며 들어온 김은영동무라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장군님께서는 그런가, 아주 재능있는 인기가수가 왔다고, 저런 배우는 금을 주고도 찾기 힘들거라고 하시며 은영동무를 비롯하여 남반부에서 들어온 동무들을 잘 돌봐주라고, 자신께서도 한번 꼭 만나보겠다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허정숙이 직접 은영이를 불러 말해주었다. 전날처럼 난로를 들여놓은 개인주택의 사랑채 두번째 방에 두명의 문화선전성 간부들과 시인 조기천, 은영이를 데리고 온 백영준이 자리잡고있었다.
《은영동무.》 허정숙이 친자매처럼 은영이를 다정히 껴안으며 하는 말이였다. 《정말 노래를 잘 불렀어요. 장군님께서 얼마나 만족해하시던지 난 막 무대로 나가 동물 안아주고싶은걸 겨우 참았다니까! 정말이예요. 사실말이지 근래에 장군님께선 전선을 지휘하실래 회의준비를 하실래 언제 한번 눈도 붙여보지 못하셨는데 글쎄 그렇게 기뻐하시는것을 보니… 은영동무가 얼마나 사랑스럽구 대견하던지!…》
여러 사람들이 은영이를 축하해주었다. 그러나 은영은 아직 자기가 노래를 제대로 불렀다고 생각되지 않았다. 벅찬 흥분으로 하여 발성생리기관이 오무라들면서 울대위치를 바로 정하지 못하고 목에서 소리를 짜낸것만 같았다. 그리하여 밝고 선명하고 후련한 소리를 내지 못했다고 자책에 잠겨있었던것이다.
장군님께서 치하하신것은 처음 보시는 그리고 남반부에서 들어온 가수이므로 앞으로 잘하라고 고무하여주신것으로 보는것이 옳을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은영이 이렇게 말하자 허정숙은 새삼스럽게 그를 눈여겨보았다.
《은영동무, 그렇다니 정말 맘에 들어요. 장군님께서 더 기뻐하시게 앞으로 잘해보자요.》
그날 은영은 국립예술극장 상급가수로 임명되였다.
허정숙은 간소한 점심식사가 준비될 때까지 은영이를 놓아주지 않았다. 떠나올 때엔 자동차까지 내주려 했다. 그러는것을 은영이 사양하였다. 충격이 너무 커서 그저 걷고싶다고, 걸어가며 생각해보고싶다고 했다.
그러자 시인 조기천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제가 바래주겠습니다. 허락하시는지요?》
허정숙이 물었다.
《누구의 허락을 받고싶으세요?》
《아, 그거야 물론 상동지의 허락이지요.》
《아니예요, 조기천선생. 여기에 상동지는 아무 상관 없어요. 상동지는 승인하거나 비준할뿐이예요.》
《그럼 비준해주십시오.》
《아, 시인선생이 아무것도 모르시는군요.》 허정숙이 웃으며 말했다. 《비준이란건 문건에나 하는거죠. 그러지 말고 본인인 은영동무의 허락을 받으세요.》
조기천도 소리내여 웃었다.
《좋습니다. 그럼 은영동무, 제가 바래주는걸 허락하시지요?》
유쾌한 웃음속에 은영은 얼굴을 붉히며 저도 모르게 애들처럼 이발로 손톱여물을 썰고있었다.
눈이 부시도록 맑고 맵짠 날씨였다. 눈이 덮인 골안에서 하모니카소리가 울려나왔다. 새 솜옷을 입은 군인들이 분주히 돌아치며 점심을 준비하는듯 했다.
재진격의 길에 오른 군인들이 너무도 많아 부락의 집들도 그들을 다 들일수 없었던것이다. 솔가리타는 냄새가 부락에 서리고 어느 집 지붕에서는 정신빠진 수닭이 목청을 돋구어 때아닌 기상구령을 웨치고있었다. 압록강에서는 얼음장터지는 소리가 대포소리마냥 요란했다.
이윽토록 말없이 걸었다. 발밑에서 눈밟히는 소리만이 쉴새없이 빠그극거렸다. 앞서가는 조기천의 장화발이 더 소란스러웠다. 거침없이 얼어붙은 눈을 짓밟고 나무가지를 부러뜨리는가 하면 아무 의미도 없이 발을 탕탕 굴러보기도 했다. 숲변두리로 뻗은 오솔길에 들어섰을 때에야 그가 뒤쪽을 돌아보았다.
안경알이 해빛을 반사하며 번득이였다.
《무슨 생각을 합니까?》
《저…》 은영은 서리찬 공기를 들이마시며 조용히 말했다. 《처음으로 뵈운 우리 장군님을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처음 뵙게 돼서 그런지…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던 일을…》
《…》
시인은 아무말없이 계속하기를 기다리는듯 했다.
《선생님, 왜 그랬을가요. 장군님께선 초상화에서 뵈우던 그런 모습과는 어쩐지 좀… 다르게 생각되는것이 아니겠어요.》
《그럴겁니다.》 조기천이 말했다. 《우리 장군님의 모습은 그 어떤 화가도 다 담아내지 못합니다. 사진사는 말할것도 없구요. 겉모습은 담아낼지 모르지만 웅심깊은 내면이야!… 시인도 같습니다. 태양을 제대로 그려낼수 없듯이… 그때문에 나도 늘 고민하고있는걸요.》
《고민?!…》
은영은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인천에서 만나본 보병중대장이 수첩에 써넣고 다니던 서사시 《백두산》의 구절들이 떠올랐다. 그처럼 사람들의 심장을 틀어잡고있는 시인을 부러워하던 은영이였다. 그런데 그에게도 고민이 있다고 한다.
시인은 또 무엇인가 생각에 잠긴듯 했다. 무엇때문에 고민하고있는지 대답해야 한다는것을 잊고있는듯 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생각에 잠긴 시인의 얼굴을 훔쳐보며 은영은 화선의 병사들이 읊던 시구절을, 자기의 마음속 격정도 그대로 옮긴것 같은 그의 서사시 《백두산》의 한구절을 상기하였다. 그리하여 저도 모르게 그 시구절을 나직이 외워보았다.
너 백두야! 조선의 산아 말하라-
어떻게 떨어졌던 태양이
이 나라에 솟았느냐?
떨어졌던 태양이 다시 솟는 그때
네 누구를 맞이했느냐?
조기천이 안경을 추슬러올리며 그를 지켜보았다. 남조선에서 갓 들어온 녀가수가 그 시를 읊고있는것이 놀랍게 생각된듯 하였다.
은영은 계속하였다.
내 그때
이 나라 백성이 그렇게 그리던
나의 참된 아들-
나의 량심이고 나의 의지인
나의 신념이고 나의 희망인
나의 빨찌산
김대장을 맞이했다
조기천이 참다못해 어떻게 그 시를 외우고있는가고 물었다. 하여 은영은 인천에서 한 보병중대장이 그 시를 읊던 일이며 소편대에 닥쳐온 위험을 한몸으로 막아나섰던 그가 희생된 후 그의 품에서 피에 젖은 수첩을 꺼내던 일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그 수첩을 여태 제가 건사하고있습니다. 보시겠어요?》
《봅시다. 어데 있습니까?》
은영은 외투안주머니에 넣고있던 수첩을 꺼내였다. 시인이 그것을 빼앗다싶이 하고 흥분하여 한장한장 번지는것을 그윽한 감동속에 지켜보았다. 시인의 낯빛이 달라졌다. 장난삼아 그림을 그릴 때의 그는 간곳 없고 전혀 딴사람이 눈앞에 있었다. 피묻은 수첩을 번지고있는 그의 눈시울이 사뭇 실룩거리고 목에 경련이 이는듯 했다. 더부룩한 검은 눈섭이 미간으로 찌프려지고 숨소리마저 거칠어졌다. 희생된 중대장의 피로 얼룩진 자기의 서사시를 읽고있는것이였다.
《부탁합니다. 이걸 내게 주시오. 그렇게 하지요?》
그는 성급하게, 거칠게, 속삭이듯 말했지만 내심의 벅찬 흥분이 불길처럼 뿜어나오고있었다. 시로 노래하는 가수, 그는 한 인민군전사의 피로 물젖은 자기의 시를 눈으로 삼킬듯이 읽고있었다. 그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은영은 크나큰 격동에 흉곽이 뻐근해지는것을 느꼈다. 다음 순간엔 어인 일인지 눈앞이 뿌옇게 흐려지면서 눈물이 솟구쳤다.
《내게 주시오.》 그가 눈길을 들며 빌다싶이 말했다. 《한생 내가 간수하게 해주시오. 예?!…》
은영은 말없이 머리를 끄덕이는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그는 수첩을 다시금 몇장 번져보고나서 품속에 고이 간수했다. 그다음부터 그들은 저마끔 생각에 잠겨 말없이 걸었다.
침묵은 오래 계속되였다.
이윽고 시인의 격동이 가라앉자 은영은 물었다.
《선생님! 그처럼 만사람의 가슴을 울려주는 시를 쓰신분이니 잘 아시겠는데… 전 어쨌으면 좋을가요? 이제 장군님을 모시고 또 공연을 하게 된다면 말이예요. 선생님, 좀 말씀해주세요. 어떻게 노래해야 할가요?》
《그걸 내게 묻습니까?》 조기천이 놀라와했다. 《나도 밤낮 그걸 생각하고있는데요. 예, 정말입니다. 그래서 고민하는거지요. 절세위인을 노래하는데… 완성이란 없습니다. 고민해야지요. 계속 고민하고 채찍질하면서 완성의 경지로 올라야지요!》
좋은 말이다. 시인다운 말이다. 그가 결코 남을 가르치려 하지 않는것도 마음에 들었다. 그랬더라면 엄엄한 도사나 교수처럼 보일수는 있으되 다정한 인간적매력은 느끼지 못했으리라.
그들은 숲속으로 뻗은 작은 길을 따라 걷고있었다. 압록강의 얼음장들이 해빛에 번쩍이군 하였다. 하늘은 유리같이 투명한데 거기에 그려진 기묘한 무늬처럼 엷은 구름장들이 조화롭게, 솜털처럼 하얗게 떠서 까딱 움직이지 않고있었다.
별안간 조기천이 걸음을 멈추고 이상한 소리를 질렀다.
《아, 사슴!》 그가 숲속을 가리켰다. 《봤습니까. 방금 사슴이 저쪽으로 사라지는걸!》
《예.》 은영은 웃었다. 《그런데 그건 사슴이 아니라 노루였어요.》
시인의 두눈이 커졌다.
《노루라구요? 천만에!… 사슴입니다. 내가 옴스크에서 사슴사냥을 한두번만 해봤다구요.》
《노루입니다. 선생님!》
《사슴이라니까.》
시인은 괴퍅스러운 사내애처럼 우겨댔다.
《그것도 암사슴!… 글쎄 그놈이 나와 딱 눈을 맞추기까지 한걸요!》
《나도 봤는데 분명 노루였어요.》
《사슴이라니까!》
《노루였어요!》
시인은 두눈을 슴벅거렸다. 그들은 롱이 아니라 승벽을 부리는 애들마냥 다투고있었던것이다.
《아, 그럼 저기 그놈이 있던데로 가봅시다.》
시인은 《그놈》이 서있던 곳까지 은영이를 끌어갔다.
《자, 이것 보시오. 이 발자국!… 사슴의 발자국이 맞지요?》
《노루입니다.》
은영이도 고집을 꺾지 않았다. 발자국같은것은 애당초 보려고도 안했다. 보았댔자 알수 없기때문이였다. 그러자 시인은 놀라서 은영이를 여겨보더니 안경을 벗어 입김을 후후 불며 닦기 시작했다.
《은영동무가 그렇게 고집이 센줄은 정말 몰랐군요.》
《그래서 노여우세요?》
《아-니.》
《선생님도 고집이 여간 아니신데요.》
은영이 웃기 시작하자 그 역시 안경을 끼더니 진정 유쾌하게, 소탈하게 웃어대기 시작했다.
《아니, 은영동무, 고집스러운게 더 좋습니다. 사실 무턱대고 남들의 기분이나 맞춰주는건 속되고 천한 일이지요. 특히 녀성들의 경우엔!…》
그는 은영의 팔굽을 잡고 눈구뎅이에서 나오도록 도와주었다. 길에 나서자 그들은 서로 경쟁이나 하듯이 발을 탕탕 구르며 신발에 묻은 눈을 털었다. 한순간에 그들은 지꿎은 장난꾸러기 소년, 소녀시절로 되돌아간듯 한 기분이였다. 숲속에서 외투며 목도리에 묻혀가지고 나온 솔잎이나 검불을 서로 털어주기까지 하였다.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어린시절로, 동심으로 돌아간다는것은!… 발을 털고 외투자락에서 무엇인가 또 뜯어내고나서 다시 마주보며 웃어댔다.
《은영동문 고향이 어뎁니까?》
시인이 물었다. 은영은 웃으며 노래처럼 대꾸했다.
《회령이예요.》
《뭐?》
《왜 그러세요?》
《정말입니까. 회령이 고향이라구요?… 나도 고향이 회령인데…》
이번엔 은영이 놀라서 한손을 입가에 가져갔다. 마치 기쁨의 탄성이 터져나오는것을 막으려 한듯 했다.
《회령! 그러니 우린 한고향내기군요.》
《정말 그렇군요. 그래서 둘 다 고집이 이만저만 아니였던것 같습니다.》
다시 유쾌하게 웃어댔다. 비록 두사람 다 어린시절에 고향을 떠났지만 고향을 그리는 마음은 꼭 같았다. 가슴저릿한 향수에 잠겨 그들은 고향에 대한 추억을 더듬었다.
《예로부터》하고 시인이 말했다. 《회령은 함북명승으로 널리 알려져있습니다. 특히 <회령3미>즉 세가지 아름다움이 유명한데 그런말 들어봤습니까?》
《예, 물론!》
《그럼 말해보십시오.》
《회령에서 유명한 3미는 녀미, 행미, 토미…》
조기천은 어린애들모양으로 좋아하며 손벽을 쳤다.
《아! 알고있군요. 덕과 지성을 갖춘데다가 용모가 특별히 아름답다는 녀미!》
《꿀맛에 향기가 독특하고 약효가 높은 백살구! 다시 말해서 살구행자를 쓰는 행미!》
《토질병도 침습 못한다는 회령백토, 옛날 왕궁에서도 그 백토로 만든 회령오지그릇을 써왔다는 유명한 토미!》
다시금 소리내여 웃지 않을수 없었다. 실로 자랑많은 회령이였다. 조기천은 시를 읊듯이 흥분하여 청을 돋구었다.
《예로부터 <송도3절>이 유명타했지요. 화담 서경덕과 녀류시인 황진이, 박연폭포를 자랑하여 그렇게 불러왔어도 우리 고향 회령에야 뉘라서 감히 견주랴!》
은영이도 웃으며 노래의 후렴처럼 받았다.
《유명한 시인 조기천선생과 조선영화예술의 개척자 라운규선생도 회령이 배출했다오.》
《아니, 아니!》 별안간 조기천은 웃음을 거두고 은영을 여겨보았다. 《은영동문 아직 모르고있습니까? 내가 말하는건 그게 아니라 <회령3미>도 그렇거니와 뭐니뭐니해도 제일 큰 자랑이 또 있습니다.》
《뭡니까, 선생님?!》
《그러니 아직 모르고있었군요. 그럼 은영동무, 들어보십시오. 우리 고향 회령은 바로 유명한 항일의 녀장군이신 김정숙동지께서 나서 자라신 고향이란 말입니다.》
《예?!…》
은영은 저도 모르게 두손을 가슴앞섶에 모두어쥐며 불같이 속삭이였다.
《항일의 녀장군 김정숙동지께서?!…》 쿵쿵 뛰는 심장의 고동이 두손을 진동하는듯 했다. 벅찬 격동에 숨조차 쉬지 않는듯 했다. 《어쩌나, 여적 그런줄도 모르구…》
조기천이 말을 이었다.
《나도 처음 그분을 만나뵙고 고향이 회령이라고 하실 때 어쨌는줄 압니까. 이렇게 꼼짝하지 않고 서서 울고 웃었습니다. 기쁨에 울고 행복에 웃으면서!…》
얼마후에야 그들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이윽토록 한마디 말도 없이 천천히 걸었다. 고향에 대한 자랑과 기쁨이 가슴뿌듯하게 넘치여나고 너무도 일찌기 세상을 뜨신 김정숙동지에 대한 애절한 마음이 눈굽을 저릿하게 했다. 시간의 흐름도 맵짠 추위도 잊고있었다. 빠드득빠드득 발밑에서 눈밟히는 소리만을 듣고있었다.
갑자기 은영이 먼저 걸음을 멈추고 사위를 둘러보았다. 얼마나 시간이 갔는가. 그리고 지금 어데까지 왔는가?… 알고보니 어느새 국립예술극장배우들이 자리잡고있는 리민주선전실이 멀지 않았다.
헤여져야 했다. 시인은 주밋거리다가 조용히 말했다.
《나는 이제 곧 전선에 나갑니다.》
은영이 놀라는것을 보고 그가 물었다.
《왜 그럽니까?》
《저… 선생님도 꼭 전선에 나가셔야 합니까?》
《아 그것때문에?…》 시인은 소리내여 웃었다. 《싸우는 전사들속에 있어야 그들의 심장의 목소리를 들을수 있지 않습니까. 지금 우리 인민군대는 38°선을 넘어 적들을 족치고있습니다. 림진강이남에서 서울을 다시 탈환하기 위해 격전을 벌린다는데 빨리 가봐야겠습니다. 자칫하면 기차를 놓친 손님격이 되고말거든요.》
《저…》 은영이 숨가삐 말했다. 《몸조심하세요. 선생님은…》
그다음 말은 이을수가 없었다. 선생님은 우리 장군님께서 아끼시고 인민이 사랑하는 유명한 시인인데 더우기 몸을 조심해야 한다고 말하고싶었으나 그것이 시인을 추어올리는, 따라서 속이 들여다보이는 아첨하는 말로 들릴수도 있다고 생각되였기때문이였다.
마침 시인이 재빨리 말을 이었다.
《국립예술극장도 전선위문공연을 곧 떠난다는데 은영동무도 부디 몸조심하기 바랍니다.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선생님.》
《그럼… 또 만납시다.》
손을 잡고 꼭 쥐였다놓고나서 시인은 오던 길로 돌따서 갔다. 한번도 돌아보지 않고 곧추 걸어가고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