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 장

오 나의 태양

1

《은영동무, 나와 같이 갑시다.》 이렇게 말한것은 백영준이였다. 《날씨가 찬데 든든히 차비하시오.》

12월의 맵짠 추위가 살을 에이고있었다. 북변의 압록강기슭 만포에서 국립예술극장 배우로 재진격하는 인민군부대들에 대한 위문공연을 준비하고있던 때였다. 은영은 밖에 나서자 강상일, 조련, 고종우 등이 먼저 나와 기다리고있는것을 보았다. 백영준이 무슨 일인지 몰라 어리둥절해 하는 사람들을 둘러보며 소리내여 웃었다.

《문화선전상동지가 동무들을 만나보겠다고 하오. 자, 갑시다.》

문화선전상은 멀리 있지 않았다. 동기와를 얹은 외통형의 주택사랑채에 난로를 들여놓고 여러 사람들과 담화하고있다가 배우들이 도착했다는 말에 급히 마주 나왔다.

《반갑습니다. 문화선전상 허정숙입니다.》

몸매가 조화롭고 탄력이 있는 녀성이 군대식으로 걸어나오며 밝게 웃고있었다. 경쾌하고 활달한 걸음새였다. 그들은 차례로 머리를 숙이며 자기 소개를 했다. 맨 나중에 은영의 차례가 되자 허정숙은 례사롭게 손을 내밀었으나 웬일인지 입을 벌리며 애들처럼 탄성을 질렀다.

《아니, 이런!…》

은영은 영문을 몰라 다시금 머리를 숙였다.

《김은영이라고 합니다.》

곁에 서있던 백영준이 덧붙였다.

《예, 일전에 말씀드린 그 독창가수입니다.》

허정숙은 머리를 끄덕이였다.

《아, 김은영!… 동무였군요.》

허정숙은 포옹을 하듯이 은영의 어깨를 다정히 그러안았다.

《얘길 들었어요. 서울교향악단 독창가수였지요?》

《예, 한때…》 은영이 대답했다. 《그렇지만 상동지, 그건 전쟁전의 일이였습니다.》

《옳아요. 그담은 전선지구경비사령부협주단에서 노랠 불렀구… 정말 반가와요. 그런데… 참 놀랍군요!》

《예?》

《이렇게 예쁠줄은!… 가수치고는 너무 곱지 않아요?》

은영이 얼굴을 붉히자 그는 재미난듯 소리내여 웃었다.

《일없어요. 질투해서 하는 말은 아니니까. 나도 녀자지만 질투라는걸 몰라요. 그런건 이미 전쟁판에서 다 피와 땀으로 씻어버린걸요!》

은영은 그 역시 매력있는 녀성이라는것을 알아보았다. 광활한 중국의 광야를 말을 타고 달리며 항일전의 녀걸로 소문을 냈다는 허정숙, 우리 나라의 첫 녀성상인 그에게서는 청신한 기운과 함께 탄력있는 몸전체에서 현악기의 금선처럼 튕기면 챙챙 울릴것 같은 류다른 음향이 깃들어있었다. 하여 은영은 허물없이 한마디했다.

《상동지도 매력있습니다. 부러울 정도로 말이죠.》

《아- 그래요? 그러니 엎음갚음이군요!》

이번엔 모든 사람이 소리내여 웃었다. 그 웃음으로 그들은 대뜸 오랜 지기들처럼 친숙해졌다.

허정숙은 그들을 난로불가까이 자리잡고 앉도록 일일이 걸상을 권했다.

《동무들과 알게 되여 정말 반갑습니다.》 그가 여전히 미소를 그리며 하는 말이였다. 《전선지구경비사령부협주단에서 잘 싸운 얘기를 들었어요. 단련도 부족한 동무들이 거의 2천리나 되는 길을 후퇴해왔으니… 정말 고생이 많았겠어요. 그렇지만… 끝까지 우리 장군님만을 믿고 찾아왔으니 얼마나 장한 일이예요. 그래서 더 반갑구 친근하게 생각되는군요.》

허정숙은 다심하기도 했다.

《참 조련동무, 왜 그렇게 떨어져 앉았어요? 몸이 언것 같은데 불곁에 다가앉으세요. 일없어요. 남동무들 걱정은 마세요. 녀성상이 녀자들만 돌본다고 의견을 가진대도 할수 없어요.》

그가 눈웃음치며 좌중을 둘러보자 백영준이 먼저 서둘러 일어났고 다른 사람들도 덩달아 웃고 떠들며 녀자들을 불가까이 밀어주었다. 이미 방안에 들어와있던 사람들(간부들 같았다.)은 성에 불린 창문곁으로 멀찍이 물러났으나 그들도 웃고있었다.

한순간 은영은 그 사람들속에 끼워 열심히 눈웃음을 보내는 한사람을 띄여보았다. 불시로 마음이 어수선해졌다. 오학성… 서울에서 좌익계 음악가동맹 부위원장을 하던 그가 사소한 의견상이때문에 결연히 문을 차고 나간 이래 소식이 없다 했더니 월북하여 국립예술극장에서 부총장사업을 한다는것을 여기 와서야 비로소 알게 되였다. 바로 그가 얼마전 남조선에서 들어온 배우들을 한사람한사람 만나 담화했었다. 강상일이나 은영이와는 간단히 만났지만 날카로운 대화들이 오고갔었다. 그가 감때사나운 성미인 강상일을 눈에 든 가시처럼 여기는 리유는 명백했지만 은영이에게 반감을 품을 까닭은 없었다. 담화를 하면서 그가 은영이에게 물은것은 단 두마디였다.

《고종우는 은영동무가 끌고 왔소?》

《아니요, 제발로 왔어요.》

《그럼 은영동무가 한사코 감싸주던 수미는 왜 도중에 떨어졌소? 은영동무가 떼여버린건 아니요?》

《아니요, 그도 역시 제발로 가버렸어요.》

《모를 소리!》 그는 실눈을 하고 묘하게 웃었다. 《여기엔 무슨 쪼간이 있는것 같소.》

《예?》

《동무가 말하지 않아도 난 다 짐작한단 말이요.》

그는 웃었고 은영은 혀끝을 깨물었다.

《그건 무슨 의미인가요?》

《차차 알게 될거요.》

소리도 없는 그의 미묘한 웃음이 은영이를 불안케 했다. 그 미소뒤에 숨은 의미까지는 다 알수 없었지만 그가 여전히 고종우며 수미에 대하여 적의를 품고있다는것만은 명백했다. 그때문에 그들과 가깝다고 생각되는 은영이까지 경멸했을것이다.

그러던 그가 지금은 옆에 앉은 안경낀 사람에게 무어라고 속삭이며 자꾸 은영이를 눈짓하고있다. 자기가 잘 아는 녀가수라고 자랑하는것 같다. 안경을 낀 사람은 무엇인가 열심히 쓰고있다가 비로소 은영이를 눈여겨 보았다. 단정한 양복차림에 넥타이까지 꼭 매였는데 어깨우엔 새까만 외투를 걸치고있었다.

도수높은 안경알속에서 내다보는 주의깊은 눈빛, 대번에 사람의 마음속까지 들여다보듯 찬찬히 여겨보는데 정찬 미소가 그 눈빛에서 사물거리는듯 했다.

별안간 은영은 혀가 말라드는것을 느꼈다. 마치 전류에라도 감전된듯 무엇인가 가슴을 뜨끔하니 스쳐가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황황히 그의 눈길을 피하려 했으나 웬일인지 뜻대로 되지 않았다. 마침 그 사람이 눈길을 옮겨 새로 온 가수들을 여겨보더니 머리를 수그리고 또 무엇인가를 쓰기 시작했다.

숨이 나갔다.

허정숙은 여전히 새로 온 사람들의 고향과 전직, 나이 등을 알아보며 수첩에 적고있었다. 은영이에게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차례가 되자 미소를 담은 눈빛을 보내고 다른 사람을 불렀다.

《강상일동무, 테놀가수라고 했지요?… 이렇게 만나서 정말 반가워요. 부민관에서 있은 일로 소문이 자자했지요. 적들이 던진 수류탄을 맞받아 뿌린 그 일 말이예요. 그 다음날인가 우리 <로동신문>에서도 기사를 냈어요. 정말 쉽지 않은 일이죠.》

강상일은 게면쩍은 표정을 하고서 그가 묻는 말들에 겨우 혀아래소리로 대답하였다.

이어 고종우의 이름도 그렇게 문화선전상의 수첩에 적히였다. 바리톤가수, 나이며 학력, 고향… 허정숙은 이렇게 담화를 이끌어가면서도 뒤쪽에 앉은 안경을 낀 사람이 무엇인가 열심히 쓰고있는 종이장에 가끔 눈길을 주군 하였다.

슬쩍 스쳐보고는 소리없이 웃군 하기에 은영이도 곁눈질로 그가 무엇을 쓰고있을가 하고 여겨보았다. 그 안경낀 사람을 서기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자세히 살펴보니 종이장에 무슨 그림을 그리고있었다. 새로 온 사람들의 특징을 잡아 그리고있는것 같았다. 문화선전상이 간부들만 아니라 화가도 부른것이라고 은영은 생각하였다.

《이제부터.》 하고 허정숙이 머리를 들며 말하였다. 《특별공연준비를 해야 겠어요. 이제 며칠후 국립예술극장동무들이 중요한 공연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동무들을 불렀어요. 오늘 모인 동무들은 다 남반부에서 들어온 가수들인데 공연에서 자기의 재능을 다 발휘하도록 힘써주세요.》

그가 눈길을 돌리자 기다리고있었던듯 백영준이 손에 들고있던 종이장을 넘겨주었다. 공연종목이였다. 허정숙이 그것을 재빨리 훑어보았다.

《좋아요. <김일성장군의 노래>합창으로 시작하여… 세번째 종목은 첨 보는것 같군요. 아, <병사의 노래>!… 김은영동무가 부를 노래지요?… 본인의 의향도 들어보세요. 그담… 무용 <나는 정찰병>, 중창 <조국보위의 노래>, 기악중주… 그런데 이건 뭐예요? 시와 합창 <끝까지 싸우리라>는요?… 여기에 들어가는 시는 백영준동무가 쓴거겠지요?》

백영준이 대답했다.

《아닙니다. 조기천선생이 쓴 시입니다. 그 시에 새로 곡을 붙였는데 상동지도 한번 들어보십시오. 노래가 힘차구 기백이 넘치는데…》

허정숙은 그림을 그리는데만 정신을 팔고있는 그 안경낀 사람에게 미소어린 눈빛을 던졌다.

《조기천선생도 들어보셨어요?》

《?!…》

그는, 찌르는듯 한 눈빛을 가진 그 사람은 자기를 부르는 목소리에 머리를 들었으나 무슨 영문인지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는것 같았다. 갑자기 덩둘한 표정을 하고있는 그의 모습에 허정숙은 물론 여러 사람들이 가벼운 웃음을 떠올리였다. 허나 그때 은영은 별안간 목이 꽉 메이는것을 느꼈다. 조기천선생!…

병사들이, 인민들이 사랑하는 열혈의 시인!… 화산의 분출과 같은 그의 시들을 병사들이 얼마나 격조높이, 자랑차게 읊군 하였던가! 바로 그야말로 열정의 가수라고 부러워했던 은영이였다. 그런데 그를 여기서 만나게 되다니, 그처럼 소박하고 천진하기까지 한 모습이라고는 상상조차 못했었다. 그가 다부진 몸을 일으키며 어줍게 웃는것을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그가 뭐라고 하자 웃음판이 터졌다. 사람들이 웃어대는 모습을 은영은 놀라서 멀거니 쳐다보고있었다. 무슨 말을 어떻게 했기에?… 그에게도 사람들을 웃기는 유모아가 있었던것일가. 그의 시들은 모두가 서리찬 장검같고 번뜩이는 섬광 아니면 거세찬 폭발과 같았는데?!…

허정숙이 또 말하고있다.

《공연종목은 후에 또 토론합시다. 무용은 무대조건을 고려하여 독무를 위주로 하는게 좋을것 같은데… 부총장동무생각엔 어떠세요?》

오학성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재빨리 대답했다.

《예, 그렇게 준비하겠습니다.》

그러자 허정숙은 머리를 끄덕이고나서 다시 은영이에게로 미소어린 눈길을 주었다.

《은영동무랑 강상일, 고종우동무들과도 토론하세요. 최후승리에 대한 사상을 강조하면서도 예술공연이라는것을 잊지 말아야죠. 가수들에겐 다 자기의 창법에 맞는 곡이 있는 법이예요.》

이어서 그는 공연장소를 꾸리는 문제를 두고 어떤 간부와 또 오학성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은영은 여전히 시인 조기천에게서 눈길을 떼지 못하고있었다. 그가 들고있는 종이장에는 어느새 남에서 온 배우들의 모상이 갖가지 형상으로 그려져있었다. 은영이며 조련이도 그려넣은것 같다. 그때문에 은영이를 자세히 살펴보았다는것을 비로소 깨달았다. 애들같이 그림을 그리는데만 열중하고있는 그를 유명짜한 시인 조기천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서사시 《백두산》의 저자가 그처럼 수수하고 평범하다는것을 어찌 믿을수 있으랴.…

허정숙은 다시 은영이며 강상일, 조련, 고종우 등에게 공연준비를 잘해달라고 부탁하고있었다. 이윽고 조용히, 의미심장한 어조로 이렇게 끝을 맺었다.

《그럼 동무들, 다시 만나요. 그날엔 동무들이 한생 바라고 바라던 영광과 행복을 누리게 될거예요.》

한순간 은영은 숨을 죽이고 그를 지켜보았다. 그가 한 말의 의미를 다는 알수 없었지만 무엇인가 가슴을 치는 벅찬 느낌에 숨을 죽이고있었다.…

 이전페지  차례  다음페지 
되돌이 목록
감 상 글 쓰 기

홈페지봉사에 관한 문의를 하려면 여기를 눌러주십시오
Copyright © 2003 - 2022 《조선륙일오편집사》 All Rights Reserved
辽ICP备15008236号-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