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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행이 양주군 천마산기슭의 한 자그마한 부락에 도착했을 때에는 날이 밝고있었다. 전선지구경비사령부에서 협주단의 소개지로 정해준 곳이였다. 그곳에서 며칠간 대렬을 정비하고 새로운 임무를 기다려야 했다. 이제 얼마후이면 서울로 다시 돌아갈것이라고 믿어마지 않았다. 락동강전선에서 인민군부대들이 싸우고있을 때 불의에 적들이 인천으로 상륙한것은 우연적이고 일시적인것으로 평가되고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서울이 함락됐다는 소식과 더불어 인민군대의 전략적인 일시적 후퇴에 대한 명령이 전해졌다.

전류와도 같은 감각이 모든 사람들의 가슴을 스쳐갔다. 벌써 후퇴를 시작한 인민군부대들이 산발을 타고있었다. 그들을 만날 때마다 두번세번 물어보았다. 그러면 인민군전사들은 하나같이 대답하군 하였다.

《말그대로 전략적인 일시적 후퇴입니다. 이제 곧 우리의 경애하는 최고사령관동지께서 재진격명령을 내리십니다. 우린 꼭 다시 옵니다. 믿으십시오.》

어찌 믿지 않을수 있으랴. 누구도 그것을 의심치 않았다.

백영준은 박진단장과 토론하고 미군과 괴뢰군이 서울-개성간도로를 따라 물밀듯이 밀려올라가는 조건에서 북쪽의 중요도로교차점인 의정부는 피하고 가평-춘천-화천을 거쳐 38°을 넘은 다음 다시 서북방향으로 꺾어 평양에 이를 결심을 내렸다. 그 결심이 옳았다는것이 곧 증명되였으니 서울에서 후퇴하는 인민군부대들이 그리로 로정을 정했고 또 전쟁전에는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월북했었다는것이다.

간고한 행군이 시작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이 지쳐 쓰러지기 시작했다. 은영이 책임진 녀성성악조만 하여도 23명이던것이 17명으로 줄어들었다. 부상을 당했거나 병에 걸린 녀배우들을 가까운 민가에 맡기지 않을수 없었다.

끝없이 걷고 또 걸어야 했다. 밤이면 굶주림과 추위에 잠을 이룰수 없었다.

날을 따라 북풍이 몰아치고 황이 든 잎사귀들이 우수수 흩어져내렸다. 홑옷을 입고있는 사람들이여서 바람이 차질수록 다가오는 겨울에 대한 불안으로 몸을 떨었다. 아니, 그것만이 아니였다. 고향이 멀어져갈수록 천근만근 무거워지는 발을 힘들게 옮기군 하였다.

한강을 두번째로 건늘 때였다. 그때 대오의 맨 앞에는 부대와 떨어진 인민군병사들 여섯명이 있었다. 공병들이였는데 분대장이 자기 대원들은 물론 전선지구경비사령부협주단 대오까지 이끌어갔다. 주걱턱에 얼굴이 거밋하고 침울해보이는 사람이였다. 그자신이 직접 강안을 정찰한 다음 협주단성원들을 향해 성이 난듯 말하였다.

《멀지 않은 곳에서 적들이 숙영하고있습니다. 놈들의 경계가 이만저만 아닌데 모두 이런 차림들이니… 이거 야단이 아닙니까. 그러다간 당장 발각되고 맙니다. 그러니 몽땅 옷을 벗고 강을 건너야겠습니다. 무슨 말인지 알만 합니까?》

녀배우들속에서 휘파람소리같은 흐느낌이 파도쳐나왔다.

《옷을 벗어요? 녀자들까지?》 누군가 바람새는 소리로 물었다. 《꼭 벗어야만 하나요?》

《싫으면 관두십시오. 그렇지만 옷을 벗지 않은 사람은 절대 강물에 들어서지 못합니다. 놈들이 기관총으로 싹 쓸어버리라구요?》

기관총으로 쓸어버린다는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사람은 없다. 모두가 입을 다물고 서로 곁눈질만 했다. 때를 기다리고 있은듯 공병분대장이 말했다.

《녀자들은 뒤에 서십시오. 이제부턴 절대 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여 남자들의 뒤에 따라나서지 않을수 없었다. 화끈 달아오른 얼굴을 외로 돌리며 옷들을 벗었다. 그런데 공병분대장은 물러가지 않고 지켜서있었다. 녀배우들이 기겁한 소리를 질렀다.

《보지 마세요!》

《무슨 군대가 저럴가. 저 동무, 지금 제 정신이가?》

《돌아서세요. 당장!》

그러자 공병분대장은 몰풍스럽게 말했다.

《보지 않으니 걱정마시오. 적들이 달려들기전에!》

그는 상대가 녀자들인것만큼 좀 더 설명할 필요가 있다고 본것 같았다.

《명령대로 해야 합니다. 강물우에선 알몸이 눈에 잘 띄우지 않습니다. 괜히 알락달락한 옷때문에 모두 몰살당하면 되겠습니까!》

바로 그의 말을 증명하기라도 하듯이 멀지 않은 곳에서 기관총이 뚜루룩거리고 수류탄이 폭발했다. 자지러진 총소리가 한바탕 건너편의 강기슭을 두들겨패더니 시작되던것처럼 뚝 그쳤다. 조용해졌다. 잘망스레 놀던 녀배우들도 입을 다물고 얌전해졌다.

강물우에서는 푸릿한 달빛이 아슴푸레 했다. 차디찬 물속에 들어서자 온몸이 과다들었다. 물결이 가슴노리를 적실 때에는 이발이 떡떡 마주쳤다. 그러나 한마디 신음소리도 흐느낌소리도 저어해야 했다. 돌연 가운데에서 한정애가 발을 헛디디여 첨벙! 물속에 빠졌다. 억눌린 아부재기!… 모두가 걸음을 멈추고 숨길을 딱 멈추었다. 멀리에서 기관총이 급작스레 울부짖었다. 눈먼 총질이였으나 여기저기 소경 막대기 짚듯 강물을 때리는데 세찬 물방울들이 머리에 뿌려질 때마다 가슴이 조여들다 못해 머리칼까지 아파날 지경이였다. 물속에서 헤덤비는 한정애를 누군가 잡아끌며 속삭이였다.

《제발 소리내지 말구… 자, 꼭 잡소.》

수미가 무엇때문인지 투덜대는것을 공병분대장이 억눌린 소리로 으름장을 놓았다. 그렇게 얼마간 시간이 흘렀다. 다행히 적들은 사격을 멈추고 잠잠해졌다. 일행은 다시 구령도 없이 물결을 가르며 앞으로 전진해갔다.

강을 건너 풀숲에 들어섰을 때 공병분대장이 우정 사과하려 녀배우들을 찾아왔다.

《미안합니다. 배우동지들. 아까는 제가 너무했던것 같습니다. 용서하십시오.》

금시 따스한 옷을 갈아입고 몸이 더워진 녀배우들이 그에게 달려들어 사정없이 꼬집어주었다.

《분대장동무, 우정 그런건 아니겠지요?》

《아깐 정말 미웠어.》

《막 때려주고싶더라니까!》

《어쨌든 좋은 사람이야. 이 분대장동문!》

《총각이겠지요? 분대장동무, 이름이 뭐예요?》

분대장이 급해맞아 도망치려는것을 은영이 붙들었다.

《분대장동무, 얄미운 사람! 우리랑 계속 같이 가겠죠?》

《아- 아닙니다. 우린 부대를 찾아가야 합니다.》

《예? 그럼 헤여진단 말예요?》

《우린 꼭 다시 만납니다. 자, 그럼 다시 만날 때까지 안녕히!》

공병분대장은 멋지게 거수경례를 하고 자기를 기다리고있는 대원들에게로 뛰여갔다.

공병들과 헤여진 일행은 평양을 목표로 행군을 계속했다. 그러나 평양으로 들어갈수 없게 되였다. 드디여 수미의 운명에서 극적인 전환을 가져온 그날은 오고야 말았다.

10월 20일인가, 21일인가 일행이 순천에 이르던 날이였다. 지칠대로 지친 일행은 어느 한 야산기슭에서 잠시 휴식하고있었다. 미처 가을하지 못한 뙈기논에서 거두어들인 벼이삭을 물통에 넣고 나무막대기로 쑤셔 벼깍지를 털어냈다. 오랜 시간을 신고하였어도 줌안에 드는것은 아직도 누긋누긋한 뉘가 섞인 벼알들이였다. 그것이나마 우적우적 씹느라면 허기진 배를 얼마간 달랠수 있다.

어느덧 낮 2시가 지났다. 다시 행군을 계속해야겠으나 몸을 일으킬 기력도 없었다. 백영준이 돌아다니며 중대장(조장)들을 달구고 중대장들은 가능한껏 죽은듯 쓰러진 대원들을 일으켜세우고 있었다. 참변은 바로 그때에 일어났다.

갑자기 하늘에서 우릉우릉 하는 거센 동음이 파도쳐왔다. 수많은 적기들이 달려드는것이였다. 그러나 매일같이 머리우를 날아가는 적기들에 습관되여있었으므로 어떤 사람들은 머리도 들지 않았다. 그들은 위장을 잘 하고있었던것이다. 한 녀배우는 손으로 귀구멍을 틀어막기만 하였다. 그런데 무엇인가 이상하였다. 대기를 써는 앙칼진 쇠소리가 하늘에서 쏟아져내렸다. 비행기의 동음은 아니였다. 누군가 째지는 소리로 부르짖었다. 사람의 소리라고는 믿을수 없는 기괴한 웨침이였다.

《포-폭탄이다.- 아!-》

모두 일시에 머리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았다. 시꺼먼 항아리들이 공중에서 떨어져내리고있었다. 그러나 누구도 움직이지 못했다. 목이 칵 메이고 볼따구의 살이 푸들푸들 떨리는것을 느꼈을뿐이였다.

요란한 폭음이 터진것은 다음순간의 일이였다. 지진과 같은 진동이 그들을 태질해버렸다. 뒤따라 무서운 굉음이 련속 터지기 시작했다. 주변의 산과 들이 온통 움씰거리며 몸부림쳤다. 뒤따라 로케트탄이 퍼부어지고 기총탄이 우박치듯 했다.

그들은 비록 직탄을 맞진 않았지만 사방이 온통 파헤쳐지고 뒤집히였다. 어데로 달아날데도 없었다. 번쩍거리는 섬광이 련속 눈을 때리고 화염이 치솟는 가운데 무수한 파편이 나무가지를 중둥무이로 잘라버리며 아우성쳤다. 잠시후엔 불달린 소나무숲이 우-우 괴이한 비명소리와 함께 세찬 불길을 회오리처럼 말아올렸다. 숨막히는 초연속에서 덮치듯 밀려오는 불의습격엔 몸서리치지 않을수 없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누가 구령을 친것도 아닌데 악! 소리를 지르며 산밑으로 뛰여내렸다. 악- 악 웨치고 헤덤비며 지옥의 란무장에서 벗어나려고 필사적으로 내달렸다. 누가 누구를 생각할 새도 없었다. 동서남북을 가림없이 산지사방으로 흩어지며 뒤쪽에서 누군가 거센 불길에 휘말려 처참하게 울부짖는 소리도 듣지 못했다.

은영이도 그렇게 뛰였다. 어느 한 논머리에 이르렀을 때에는 이미 거의나 죽은듯이 쓰러져버렸다. 가슴속이 끄물끄물 타고있는듯 했다. 직탄에 맞더라도 불에 타죽는것보다는 낫지 않을가?… 형체없이 날아가버리면 그만인것을!

… 그러나 죽어도 불에 타서 처참한 몰골로 죽고싶진 않았다. 이렇게 은영은 더 이상 죽음을 피할수 없다는것을 깨닫고 절망적으로 생각을 굴리고있었다.

녀성의 본능이, 녀배우의 특이한 감각이 불에 타는것을 더 무서워하게 하였던것이다. 그리하여 논두렁에 머리를 틀어박고 아무것도 보고듣지 않으려고 애썼다.

화염의 질풍은 계속 머리우를 휩쓸고있었다. 급기야 한밤중처럼 어두워졌다.

불길과 초연이 하늘과 땅을 꽉 채워버린것이였다. 한시간 두시간 계속 폭탄을 쏟아붓는것 같다. 땅이 흔들리며 태질을 했다. 머리우에서는 죽음의 휘파람소리가 그칠새 없었다. 그래도 살아있다. 살아야 한다!… 하여 그는 머리를 들었다.

이미 맹렬한 폭격이 끝나고있었다. 그런데 이번엔 더 놀라운 일이 시꺼멓게 불타는 하늘가에서 벌어지고있었다. 수백수천을 헤아리는 흰 목화송이들과 거기에 매여달린 시꺼먼 형체들이 하늘에서 떨어져내리는것이였다. 폭탄이다! … 저도 모르게 또 머리를 틀어박으려 했다. 너무도 폭탄에 혼쭐이 빠진 나머지 하늘에서 눈이 내려도 폭탄으로 보일 지경이였다.

눈이 바로 서지 않았다. 모든것이 악몽처럼 느껴졌다. 그것이 적들의 항공륙전대투하라는것을 깨닫기까지 또 얼마간 시간이 흘렀다. 소리도 없이 하늘을 메우며 내리던 락하산병들이 급기야 지상에 대고 급사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산에서 뛰여내렸던 많은 사람들이 이번엔 다시 산으로 올리뛰여야 했다. 은영이도 그렇게 정신없이 내달렸다. 적들의 목표로 될수 있다는것도 생각지 못하였다. 그때에야 앞에서 달려가는 사람들이 눈에 띄였다. 그들은 은영이처럼 어느 논두렁 혹은 개울창에 박혀있었을것이다.

눈앞에서 한사람이 픽 쓰러졌다. 수수밭고랑에 얼굴을 틀어박고 움직이지 않았다. 그를 붙안고 뒤집어보던 은영은 소스라치며 벌떡 뛰쳐일어났다. 그의 가슴팍을 총탄이 뚫고 나갔는데 금시 거기에서 살을 지지는것처럼 피가 뿜어나오고있었다. 그는 즉사하였다. 성악조의 최저음가수 김수길이였다. 《산울림》이라고 자기의 바스음역을 자랑하던 그가 어느새 숨이 져있다. 그는 죽어서도 웅글은 목소리를 짜내는듯 입을 벌리고있었다.

누군가 얼이 나간듯 서있는 은영을 향해 꽥 소리질렀다.

《뭘하구있소. 빨리 뛰오! 놈들이…》

그도 역시 말끝을 맺지 못하고 허공을 그러쥐며 나딩굴었다. 벌써 땅에 내려 락하산을 거두고있던 놈들이 이쪽으로 몰사격을 퍼부었던것이다. 은영이를 돌아보며 소리치다가 쓰러진 그 사람은 화술조의 채성호였다.…

수십년 세월이 흐른 뒤에도 은영은 그때 있은 일들을 그 어느 세부 하나 빼놓지 않고 기억에 떠올리군 하였다. 그들은 전선에서 위훈떨친 영웅전사들이 아니였다. 그저 평범한 예술인들이였다. 그러나 그들이 죽을 고생을 다하며 동요없이, 끝까지 어버이장군님을 찾아 멀고 먼 길을 헤쳐오다가 쓰러진것으로 하여 은영은 더욱더 못 잊어했다.

날이 어두울 때까지 하늘에서는 계속 무엇인가 떨어져내렸다. 은영은 먼 후날에 가서야 력사기록을 통하여 보다 자세한것을 알게 되였는데 그날 적들은 순천과 숙천에 미제187항공륙전대를 투하하여 전선서부에서 후퇴하는 인민군주력부대를 포위섬멸하고 렬차로 수송한다고 알려진 미군포로들을 구출하려고 했었다. 맥아더의 명령으로 이 항공륙전대작전에 약 4,000명의 장병과 39대의 찦차, 수십문의 105미리박격포와 90미리고사포, 600여톤의 탄약, 중형견인차와 화물자동차 42대를 투하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주력부대의 후퇴를 보장하여 영유(평원)방면에 진을 치고있던 인민군대의 한 구분대가 수차례의 야간돌격을 벌려 놈들의 기도를 물거품으로 만들어버렸다. 맥아더가 비행기를 타고 공중에서 직접 지휘한 항공륙전대작전은 완전히 참패를 당하였다.

그대신 놈들은 대규모공습으로 주변의 농가들을 불태우고 공교롭게도 그날 현장에서 휴식하던 전선지구경비사령부협주단에 적지 않은 피해를 주었다.

알수 없는 원인으로 심한 타박상을 입은 은영은 불타버린 과수원에 쓰러져있었다. 땅거미질무렵이였다. 진종일 폭음과 불길에 휩싸였던 해가 서산너머로 기울고 락조도 스러져갔다. 별안간 흐리마리한 의식속에 귀에 익은 목소리들이 가까이에서 울려왔다. 은영은 다급히 허리를 펴며 그들을 소리쳐부르려했다. 그러나 몸을 일으킬수도 소리를 지를수도 없었다. 쑤시는듯 한 아픔에 겨워 신음소리를 내질렀을뿐이였다.

남자와 녀자의 목소리가 계속되였다. 그들은 은영이의 신음소리도 듣지 못할 정도로 흥분되여있는듯 했다. 잠시 숨을 돌리고 귀를 강구어서야 그것이 바로 고종우와 수미라는것을, 그들이 은영이가 쓰러져있는 뒤쪽의 허리부러진 사과나무에 서있다는것을 알았다. 수미가 고종우를 잡아끄는것 같았다.

《가자요, 고종우씨. 나랑 같이 가자요!》

땅바닥에 밑둥이 잘리워 가지를 활 펴고 쓰러진 사과나무가 은영이와 그들을 가로막고있었다. 그들은 은영이를 볼수 없었다.

《고종우씨, 제발…》

《난 그 무슨 씨가 아니요. 동무! 동무라고 하오!》

고종우의 목소리는 평소의 그답지 않게 어지간히 거칠었다.

《싫어요. 고종우씨.》 수미가 부르짖었다. 《당신도 보셨죠? 이 세상에 미국을 당할 나라는 없어요. 그렇게 기승을 부리던 일본도 미국에 망했지 뭐예요. 그런데 당신은 어데루 가는거예요. 예?!… 당신이야 기업가의 아들이 아니예요? 돈이 있구 재능이 있는데야 무얼 겁나하세요. 가자요. 당장 서울로 돌아가자요. 예? 내 이제 당신을…》

《듣기 싫소. 그따위 소린 집어치우오!》

《이게 마지막기회예요. 저 하늘에서 얼마나 많은것이 떨어져내렸나요. 당신도 다 보셨죠? 미국은 이 땅을 백번이라도 더 뒤집어 엎을수 있다는걸 정말 모르겠어요?… 어쩌문 당신이 그걸 모르다니? 빨리 결심하셔요!》

고종우의 씨근거리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은영은 그가 이제 수미의 손목이라도 비틀어놓을것처럼 생각되였다. 그러나 역시 고종우는 칼물고 뜀질할 그런 격한 성격이 아니였다.

《난 이미 제가 갈 길을 선택한 사람이요.》 고종우는 가극 《춘향전》에서 사또역을 할 때처럼 굵고 거친 음성으로 말하였다. 《난 무엇이 정의이고 무엇이 불의인지 알고도 남음이 있소. 날 꼬드길 생각을랑 마오. 절대로 그렇게 안돼!》

《정의? 무엇이 정의란 말예요. 당신 아버지가 뭐랬어요. 이 세상을 살아가자면 돈이 아니면…》

《듣기 싫소!》 고종우가 거칠게 그 녀자의 말을 잘랐다. 《난 아버지와 이미 갈라졌소. 돈밖에 모르는 그런 아버지가 이젠 나한테 없단 말이요!》

《당신은 딴 생각이 있어서 고집하는거지요? 어디 말해보세요. 누가 꼬드겼는지?…》

《꼬드긴다구? 난 내가 갈 길을 알고있는 사람이요. 일본에서 공부할 때부터 갖은 수모를 다 받아온 나였소. 왜놈들이 우리 조선사람들을 어떻게 학살했는지는 수미도 봤지? 그런데 미국놈들은 더 교활하구 잔인하다는걸 난 처음부터 알았소. 미국놈들이 우리 아버지 공장의 어린 처녀를 륜간하구 각을 떠서 하수도에 처넣었소. 그 사실을 안 로동자들이 들고일어나자 경찰을 내몰아 방망이로 치구 총검으로 찌르구… 저들은 뒤에서 너털웃음을 치면서 말이요.

그걸 내 눈으로 봤단 말이요. 그 일을 모른척 하라구 강박하기때문에 아버지와 대판 싸움까지 했구… 어디 그뿐인줄 아오? 김구, 려운형암살의 주범도 미국놈들이라는거야 이미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 아니요. 에익! 그런 소릴 다 해선 뭣하겠소. 그런데도 뭐 미국놈들 편으로 넘어가자구? 안될 소리!… 난 정의를 위해 싸우는 사람들 편에 가겠소. 그들은 꼭 이겨. 우리가 만나본 인민군전사들을 생각해보오. 그들이 쉽사리 꺾일것 같소?… 아니, 절대로 그렇게 되진 않아. 난 그걸 믿는단 말이요!》

《믿는다구요. 믿는다?…》 수미의 목소리는 가늘어졌지만 새되고 싸늘하게 울리고있었다. 《나도 그들이 좋은 사람들이란걸 알아요. 그렇지만 그들도 미국을 이길순 없단 말예요. 알겠어요?》

《에익!》 고종우가 신음하듯 했다. 《그럴줄 알았소. 수미란 녀자야 원래 저 하나밖에 모르는 녀자였으니 이편저편 가림없이 가붙는다구 해서 놀라울것도 없지. 안그렇소?》

《뭐예요? 당신이나 똑바로 말해보세요. 나도 다 알아요. 당신이 뭣때메 그러는지 안단 말예요. 당신은 첨부터 은영이만을 넘겨다 봤죠. 그래서 그년이 가자는데로 따라가는거죠?》

그 말을 듣자 은영은 또 신음하지 않을수 없었다. 불에 그슬린 가랑잎처럼 혀바닥이 배배 꼬이는듯 싶었다. 마침 고종우가 은영이를 대신하여 부르짖고있었다.

《은영동문 결백한 녀자요. 예술을 하려면 그 녀자처럼 깨끗하구 성실해야 하는거요. 그래서 난 언제나 그를 존경하오. 그 동무에게서 배우고있단 말이요!》

《그것 보세요. 존경이요 뭐요 하지만…》

《닥치오. 그래도 은영동문 늘 수미라는 녀자를 좋게 말해줬소. 좋은 점만 찾아보면서… 또 그렇게 되기를 바라구있었구. 그런데 뭐요. 당신은?… 그 동무가 수미에 대해 좋게 말해주어서 나도 한때 그 말을 믿구 당신과 약혼까지 했는데… 그새 당신은 얼마나 추하게 놀았소. 이 남자, 저 남자 만나는 사람마다 유혹하구… 몸을 망치면서!… 내가 모르고있는줄 알았소? 그래 말해보우. 그걸 다 까밝혀야 하겠는가말이요!》

《고종우씨!》 수미의 목소리는 거의나 애원에 가까왔다. 《난 그저 심심풀이루 그랬어요. 당신이 멀어져갈 때마다 속이 상하구 괘씸한 생각이 들면서 보복을 하구싶어서… 그저 그뿐이예요. 정말이예요. 난 언제나… 내 마음은 언제나 당신한테만!… 그런데두 당신은…》

《제발 우는 소린 그만두- 듣기 싫소. 더럽소!》

《뭐, 뭐라구요?》

유리창을 긁어대는듯 한 수미의 목소리에 은영은 가슴이 졸아드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수미가 앙칼지게 쏘아붙였다.

《이제 망하지 않나 두구봐요! 다 망한 다음 날 찾아오지 않나 두구보란 말예요. 그년과 같이… 그렇지만 안될걸. 누구도 용서치 않을거예요. 더우기 미국사람들은!… 개처럼 목매달거란 말예요. 공화국편에 붙었던 사람들을 가만둘것 같애요?!》

《썩 사라져! 보기도 싫소. 어서 저 갈데루나 가오!》

은영은 더 이상 듣고만 있을수 없었다. 뼈마디가 쑤시고 명치끝이 얼얼해났다. 힘겹게 몸을 일으키자 이쪽의 인기척에 놀란 두사람이 피끗 머리를 돌려보는것이 알렸다.

《안돼요.》 은영은 부르짖었다. 《그래선 안돼요! 어데루 간다구 그러는거예요. 수미, 난 동물 보낼수 없어요!》

《옳지, 네년두 여기 있었구나!》 수미가 랭소하였다. 새파란 불이 이는 그 녀자의 약간 치째진 두눈이 바투 다가왔다. 《이 복새판에서두 종우씨를 놓치지 않으려구?…》

《수미! 무슨 말을?…》

《내가 그 심뽈 모를줄 알구!… 그렇지만 인젠 마지막이야. 은영인 내 마지막부탁을 들어줘야 해. 알겠지? 은영이, 저 고종우씨를 나한테 돌려줘요. 나와 같이 서울로 돌아갈수 있게 말이지. 이건 은영이한테 달려있는거야!》

《아니, 그래선 안돼, 수민 지금…》

《대답해. 그리구 종우씨한테 말해줘!》

《그건 파멸의 길이야. 참된 삶을 버리구 가다니… 난 절대 수밀 놓아주지 않을테야.》

《참된 삶이 어데 있어. 어데?…》 수미가 발광하기 시작했다. 《나두 끝까지 믿어보려구 했어. 이북사회가 좋다는건 나두 알아. 허지만 미국은 못 당해. 다 망해뿌린 판에 무얼 믿구 어데루 간다는거야. 난 가겠어. 그렇지만 저 미욱한 량반은 데리구 가고파!》

《?!…》

은영은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를 손으로 쓸어만졌다. 가슴속에서 끓어번진것은 사무친 증오가 아니였다. 분노와 증오를 쏟아붓기엔 그 녀자가 너무도 미욱한것처럼 느껴졌다. 쓰라린 련민의 정과 함께 막무가내로 울어대는 어린애를 보는것처럼 안타깝고 분한 마음이 화약가스처럼 가슴에 서리서리 엉켜들뿐이였다. 그 녀자를 리해시킬수 없는것이 안타까왔다. 자기가 그렇듯 무력하다는 느낌이 그를 더없이 아프게 했다. 하여 은영은 천천히, 마디마디를 찍어가며 말하였다.

《고종우동문 수미하구 달라. 한번 믿으면 끝까지 믿는 고정한 사람. 수미는 그걸 리해하지 못할거야.》

《네년이 그렇게 만들어놨어. 난 다 알구있어. 처음부터 바로 네년한테 반해서 그렇게 돼버렸던거야!》

드디여 고종우가 씨근벌떡거리며 앞으로 나서는것을 은영이 매달렸다.

《그러지 마세요, 제발!》

그러자 찢기는듯 한 수미의 목소리가 그들을 향해 비수같이 날아왔다.

《두구 보자. 칵 썩어 문드러지지 않나! 후회하지 말아. 드러운것들!…》

그리고는 몸을 홱 돌려 아래쪽으로 걸어갔다. 발치에 나딩구는 사과나무가지를 걷어차며 힝하니 사라져갔다.

《수미!-》

은영이 마지막으로 맥없이 부르짖었다.

《내깔려 두시오.》 고종우가 고통스럽게 억눌린 목소리로 말했다. 《가야 할데를 갔으니…》

눈을 쓰리게 하는 매운 연기가 바람에 실려왔다. 수미가 사라진 큰길쪽에서는 미군락하산병들이 총성으로 신호를 하며 어데론가 밀려가고있었고 뒤쪽에서는 살아남은 사람들이 소리를 죽여가며 서로 찾고 부르고있었다. 그러나 두사람은 현악기의 금선처럼 떨며 가슴을 긁는 짜릿한 아픔에 겨워 한자리에 굳어진채 수미가 사라진 어둠속만을 바라보고있었다.

은영은 벅찬 경련으로 하여 오무라진 입을 한껏 벌리고 매운 연기를, 차디찬 마파람을 들여마셨다. 그래도 속은 열리지 않는다. 무엇인가 끈적끈적한것이 목안에서 구토감을 일으키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은영동무!-》

《중대장동무-》

그를 찾고있다. 여러 사람들이 멀리서 소리쳐 부르고있다. 녀성성악조의 조련이도 찾고있다. 그 다음 화술조의 배용덕, 기악조에서 이름대신에 불리우는 《드람》과 《오보에》, 무용조의 김영실, 황영희, 고종우를 찾는 목소리도 있다. 잃어진 사람들이 적지 않은것 같다. 박수미도 찾고있다. 수미를!… 그러나 그 녀자는 지금 운명의 갈림길에서 그들과 영영 갈라져 가버렸다. 자기와 제일 가까왔을 두사람의 가슴에 아픈 상처를 남기고 어둠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사랑과 행복을 갈구하였고 그것을 찾을수도 있었던, 아니 사랑과 행복의 고삐를 손에 쥐고있었으나 그것을 저절로 집어던진 녀자가 한 순간에 판다른 운명의 길로 가버린것이다. 이제 그 녀자의 운명은 어떻게 될것인가? 그리고 남은 사람들의 운명은?…

《나때문에.》 하고 고종우가 침울하게 중얼거렸다. 《정말 일이 별나게 되였습니다. 언제든 이런 일이 있으리라구 짐작은 하구있었지만… 어쨌든 미안합니다.》

은영은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아- 아니, 지금은 아무 말도 마세요. 제발!…》

그들을 찾는 목소리가 멀어져가고있다.

《은영동무- 중대장동무!- 어데 있소?-》

《고종우동무!-》

은영은 어깨를 옹송그리며 머리를 돌렸다.

《가자요. 우릴 찾구있어요.》

그리하여 그들은 수미가 간 방향과는 정 반대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였다. 불타다 남은 가랑잎들이 발밑에서 와삭거렸다. 걸음마다 재티가 일며 바람에 흩날렸다. 달빛도 별빛도 없다. 아직은 모든것이 초연속에, 캄캄한 어둠속에 묻혀있을뿐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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