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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그들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앉았다. 고진아라고 자기를 소개한 그 녀인은 처음부터 림현순의 옆에 앉은 조인규를 자꾸 의심스럽게 곁눈질하군 했다.

《일없어요.》하고 현순이 말했다. 《우리 <봉선화>에 출연하는 배우예요. 억쇠!》

《참 옳군요.》 고진아가 재빨리 머리를 끄덕이였다. 《그럼 공연을 본 소감을 먼저 말씀드릴가요?… 정말 감동적이였어요. 가슴아픈 눈물의 사랑… 무희들도 하나같이 예쁘구요. 참, 그 이야긴 이북의 김정일령도자님께서 들려주신거라지요?》

《예.》 이렇게 먼저 대답한것은 조인규였다. 《우리의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1958년 문학의 밤에 들려주신 이야기를 각색했다구요.》

《봤어요. 정말 좋은 작품이예요. <에스메랄드>나 <백조의 호수>같은 바레트만 부러워했던 저로서는 정말 놀라지 않을수 없더군요. 어쩌문 조선춤가락으로 그처럼 가슴아픈 사랑의 얘길 극적으로 형상해낼수 있었는지… 훌륭했어요. 정말 쉽지 않은 일이죠.》

현순은 유럽가극의 화려한 서곡과 같은 서두의 인사말을 숨가쁘게 늘어놓고있는 고진아를 아무말없이 지켜보기만 했다. 그것은 이제 터놓을 보다 심각한 화제를 위한 준비호흡과도 같은것이였다.

이제 겨우 40대에 들어선듯싶은 녀인, 희맑은 살결과 부드럽고 애교있는 목소리는 젊고 생신해보이게 했어도 숨길수 없는 눈가의 잔주름은 녀인의 나이를 가늠할수 없게 하였다. 그런데 놀라운것은 그 녀자가 미소를 지을 때에도 치째진듯 한 두눈만은 웃지 않는것이였다. 어쩐지 이 고진아라는 녀인이 살가운 매력과 더불어 헐치 않은 인생을 살아왔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하고 고진아가 계속했다. 《림현순선생은 무대에 출연하지 않더군요. 아무리 눈밝혀 봤어도 말이죠.》

이번에도 조인규가 현순을 대신했다.

《우리 피바다가극단의 무용강사가 아닙니까. 전문배우들의 형상지도를 맡고있지요.》

《강사?》

《예, 체육부문에서 말하는 감독과 같은거지요.》

《아 감독!… 그렇군요, 그러리라고 짐작은 했지만…》

《우리 강사동지도 이전엔 이름난 배우였답니다. 한때엔 유명한 무용 <고난의 행군>에서 신호나팔수역을 했구요. 그담 <사과풍년>, <돈돌라리>, <쟁강춤>의 주인공을 하면서 20대에 벌써 공훈배우칭호를 받았지요.》

《예-》

현순은 면구스럽기 그지없었다. 낯선 동포녀성에게 자기소개나 시키려고 그를 끌고온것은 아니였다. 슬그머니 그의 옷소매를 끄당기며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럼 말해보세요. 절 만나자는 용건이 무엇인지?》

고진아는 머리를 끄덕이였다. 그러나 한동안 말없이 두손을 깍지끼고 주무럭거렸다. 마침내 머리를 들었을 때 그 녀자의 두눈에는 어느새 물기가 어려있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제 이름은 고진아, 나이는 쉰셋이예요. 미국에서 오래 살았죠. 그러다가 어머니의 유언도 있구 해서 동포들을 위한 가무단을 하나 무었는데 생각과는 달리 말이 아니예요. 왜냐면요 다들 부르스나 록큰롤풍에 맞추는데 우린 뒤떨어진 옛 곡조에 맞추고있으니… 망해버릴밖에요. 그래서 여기 온거죠. 중국에 사는 동포들속에서나마 호흡을 맞출가 해서요. 한때 우리 어머니도 중국 동북지방에까지 순방하며 공연했다질 않아요. 오래전, 반세기나 흘러간 먼 옛적에 말이죠. 참, 이야기가 빗나가네요. 내가 말하자는건 그게 아니구… 정말 미안해요. 잠간만!…》

고진아는 서두르며 손가방에서 봉투를 꺼내였다.

《여기 있는 사진들을 봐주세요.》

봉투속에는 누렇게 퇴색한 사진 두장이 들어있었다. 한장은 교회당 비슷한 건물앞에서 여럿이 찍은것이고 다른 한장은 젊은 녀자의 독사진이였다.

《우리 어머니사진이예요.》 고진아가 먼저 독사진을 내놓으며 하는 말이였다. 《배우였죠. 성악, 화술, 무용도 했다나봐요. 나중엔 영화에 많이 출연했구요. 박수미라고… 그런 이름 들어본적 있어요?… 아 모를수도 있어요. 사실 이남에선 한때 너무나 소문이 짱짱했던 어머니였어요. 악평도 있었지만… 그리고 너무도 일찌기 세상을 뜨셨구요. 오래전에 남편도 빼앗겼다고 할가… 가엾게도 홀로 살다가 그만 눈을 감았어요. 정말 불쌍한, 비참한 한생이였어요. 나중엔 하나밖에 없는 자식인 이 딸에게서까지 버림을 받았는데… 그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막 저려나군 해요.》

쓰라린 회상이 고진아로 하여금 눈물을 머금게 한것 같았다. 손수건끝을 깨물고있는 그 녀자의 수그린 머리에 한두오리의 흰 머리칼이 섞여있는것이 눈에 띄였다.

《어머닌.》하고 그 녀자는 계속했다. 《눈을 감으면서 제게 보낼 편지를 쓰셨어요. 유언처럼 말이죠. 거기서 어머닌 이 딸에게 꼭 아버지를 찾아보라고 하시지 않았겠어요. 어머니를 버린 아버지를!… 왜 그랬을가요. 그때까지만 해도 난 리해할수 없었어요. 하지만 오늘은… 늦게나마 알게 되는것 같아요. 림종을 앞두고 무엇이 제일 그리운지…》

현순이는 물론 조인규도 까딱하지 않고 앉아있었다. 무용을 전문해온 그들이 남의 인생사에 즐겨파고드는 작가나 기자들처럼 뜻밖에도 한 인간의 불행에 대한 이야기를 퍼내게 된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모든것이 분명치 않다. 현순은 말없이 녀인의 이야기가 계속되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녀인은 목구멍 가득히 끓어오르던 오열을 소리없이 삼켰다.

《사실 우리 어머니의 불행은 아버지탓만이 아니였어요. 보다는 한 녀자때문이라고 할가… 그래요. 아주 무서운, 아니, 뭐라 할가… 아주 지독한 그런 녀자때문이였어요.》

그 녀자의 목소리는 떨리고있었다.

두 사람은 사진속의 녀인을 들여다보며 잠자코 기다리고있었다. 잠시후 고진아가 두번째사진을 내밀었다.

《여기 있어요. 그네들 말이죠. 우리 어머니를 비명에 횡사하게 한 그 사람들, 그 무서운 녀자도 여기 있어요. 보세요. 이 사진을 보시면 혹시 알만 한 사람을 찾을수 있을거예요.》

알만 한 사람이 있을수 없었다. 현순은 그것을 믿지 않았으므로 무심히 사진을 스쳐보았다. 퇴색한 사진속엔 10여명의 남녀배우들이 찍혀있었다. 전이 넓은 모자를 쓴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단장을 짚고있는 사나이, 검은색두루마기를 입고있는 녀자, 꼬리치마를 입고있는 젊은 녀배우도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교회당의 첨탑을 배경으로 비좁게 붙어섰는데 마치도 영리별을 앞두고 한시나마 꼭 붙어있으려 한듯싶었다. 그 사람들속에서 유표하게 눈에 띄는 두 녀자- 양장을 한 녀자와 꼬리치마를 입고있는 녀배우가 갑자기 림현순의 눈길을 끌었다. 두 녀자가 다 자기가 입고있는 옷처럼 서로 다른 특이한 매력을 가진 배우들이였다. 양장을 한 녀자는 지금 그들의 눈앞에 앉아있는 고진아의 어머니였고 꼬리치마의 주인은… 에그머니! 별안간 현순은 학질을 만난듯 으시시 몸을 떨었다. 낯익은 그 모습, 이 세상 가장 가깝고 귀중한 사람의 모습이 아닌가!… 때를 기다리고있은것처럼 고진아가 뜨거운 숨결을 그의 귀전에 퍼부었다.

《그 녀자예요. 내가 말한 그 무서운 녀자, 지독한 녀자!》

《?…》

믿어지지 않는 일이였다. 어쩌면 이런 일이 있을수 있는가. 무엇때문에 이 녀자는 멀리 흘러간 옛시절의 묵은 흔적을 파헤치며 저주를 퍼붓고있는것인가?…

《그런데.》 하고 현순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이 사진들에서 누구를 찾아달라는 요구이세요?》

《예.》 고진아는 여전히 현순의 얼굴에서 눈길을 떼지 않고있었다. 《림선생, 사진을 다시 자세히 봐주셔요. 알만 한분이 또 있을거예요. 어서 보세요!》

현순의 눈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마음속은 어수선했고 사진을 더듬는 손끝마저 경련이 이는듯싶었다. 그러자 그의 표정을 눈밝혀 읽고있던 고진아가 사진속의 한 남배우를 찍으며 계속했다.

《바로 이분은 저의 아버지입니다. 제일 뒤쪽에 서계신 이분… 보신적 없으세요? 어머, 못 보셨어요?… 한번 더 자세히 보시죠?》

이번에도 현순은 머리를 저었다. 사진속의 그 남배우도 실은 그가 잘 아는, 너무도 인연깊은 사람이였지만 지금은 아무 말도 하고싶지 않았다. 고진아가 바라는것이 무엇인지 알지 않고서는 대답할수가 없었다.

《유감이군요.》 고진아의 목소리는 불에 그슬린듯 했다. 《그럼 마저 얘기하죠. 우리 아버진 바리톤가수였어요. 전쟁때 어머니를 버리고 이북에 들어갔는데 그 다음은 전혀 모르고있는거예요. 어머니가 남긴 유언에 꼭 아버지를 찾아보라구 해서… 이렇게 늦게나마 림선생의 도움을 받고자 한거예요. 아버지소식이라도 알아볼가 해서… 아직 살아계시기나 한지…》

다시 괴로운 침묵이 흘렀다. 때마침 조인규가 현순의 고통스러워하는 표정을 스쳐보며 언짢아하는 투로 말했다.

《그런 문제라면 우리 대사관을 찾아갈걸 그랬습니다.》

《대사관?》 고진아가 그에게 눈길을 돌렸다. 《이북대사관말이죠?》

《그러문요. 여기서 멀지도 않은데요.》

《그러니 당국을 찾아가라.… 다시말해서 공권력을 찾아가라 그 말씀이시네요. 아 아니, 그건 부질없는 일, 거기선 진실을 말해주지 않아요.》

그러자 조인규는 흥분하여 공화국의 동포애적정책에 대하여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림현순은 그 녀자가 그런 말엔 귀도 기울이지 않고있는것을 보았다. 이윽고 다시 현순에게로 돌려진 그 녀자의 눈빛이 이상해졌다. 한순간 현순은 등골이 오싹해나는것을 느꼈다. 그 녀자의 가느다란 눈섭이 우로 들리고 깊고 차디찬 눈속에서 얄궂은 불신의 빛이 펀뜩이고있었던것이다. 무엇인가 결심한듯 그 녀자는 낮고도 빠르게 속삭이였다.

《세상엔 모색이 같은 사람들도 많은 법이죠. 그렇지만 전 첫눈에 선생님을 알아봤어요. 어릴 때부터 사진에서 눈에 익혔던 그 모습을 그대로 빼물었으니까요. 신통히도 어머니의 모색 그대로군요. 그리구 난 림현순이라는 이름도 어릴적부터 잘 알고있어요. 우리 어머닐 통해서 옛시절의 기막힌 사연을 죄다 들었으니까요. 그러니 숨김없이 말해주셔요.》

고진아는 사진속의 꼬리치마를 입은 녀배우를 손끝으로 짚었는데 마치 범죄자라도 고발하는듯 했다.

《림선생 어머니지요? 이름은 김은영.》

《?!…》

현순은 몸을 옹송그렸다. 한생 자랑으로 삼아온 어머니의 이름이 처음 이렇게 그를 놀라게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어머니의 과거를 파헤치는 그 녀자의 속심이 두려웠다. 무엇인가 알고싶지 않은 어머니의 비밀을, 비밀의 과거를 듣게 될가봐 무서워졌다.

숨막히는 침묵…

어데선가 남녀들의 웃음소리며 자지러진 음악이 고조에 이르고있었다. 그것은 림현순이나 조인규가 알지 못하는 세계, 그들과는 아무런 인연도 없는 세계에서 울려오는 소리, 다시말하여 엄청난 정열과 부를 탕진하는 소리였다.

 

《어떠세요, 왜 말을 못하세요?》 고진아는 사정이 없었다. 《거기선 나의 아버지도 잘 알거예요. 바리톤가수 고종우!… 머리를 젓지 마세요. 절대 모를수 없어요. 같이 살았겠는데.》

《뭐라구요?》

비로소 현순은 그 녀자에게 경멸의 눈빛을 던졌다. 이제야 모든것이 명백해졌다. 그 녀자가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명백해졌다.

가슴이 후둑후둑 뛰였다. 불현듯 야살스러운 그 녀자의 뺨을 후려갈기고싶은 격렬한 충동을 누르기 힘들었다.

《다시 말해보세요. 이자 뭐라구 했지요?》

현순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자 그 녀자도 발딱 일어섰다.

《난 사실.》 하고 그 녀자는 가늘게 부르짖었다. 《조용히 아버지소식이나 묻자구 했는데 거기선 너무하군요. 죄다 도리질을 하구 진실을 가무리구… 그렇다고 당신 어머니의 더러운 과거가 감춰질것 같애요? 천만에!… 난 평생 당신 어머니를 증오했어요. 우리 어머니한테선 남편을 앗아가고 나에게선 아버지를 빼앗아간 녀자, 난 그 녀자가 제 명을 다 못살고 고통속에서 몸부림치다가 죽었으면 해서 밤낮 기도했어요. 그래요. 백번천번 저주했어요. 백번천번을요!》

명치끝이 뜨끔해났다. 목구멍에선 금시 고함소리가 터져나올것 같았다. 뺏아가다니, 남의 남편을, 남의 아버지를 뺏아갔다구?… 누가 그것을 알겠는가. 누가 그것을 증명하겠는가?!… 반세기전에 찍은 이 낡은 사진 한장을 가지고?…

조인규도 자리에서 일어나있었다. 녀인들끼리 주고받은 대화의 미묘한 감정을 제나름대로 해석한것 같았다. 낯선 녀인이 자기네 림현순강사를 터무니없이 모욕한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는 녀인에게 눈총을 쏘며 거칠게 쏘아붙였다.

《부인은 뭘 말하자는겁니까. 그 무슨 복수를 말하자는건 아니겠지요?》

《?…》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젊은 총각의 성난 표정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고진아가 드디여 눈길을 떨구었다. 어느새 바르르 입술이 떨리고있다. 이윽고 전혀 뜻밖의 일로 퍼릿해진 그 입술우에 한방울 눈물이 떨어져내리는것을 현순을 보았다. 그것을 지켜보느라니 분노로 끓어번지던 마음이 서서히 갈앉는것을 느꼈다.

《내가 지나쳤나봐요.》 고진아가 눈물로 속삭이는 말이였다. 《용서하셔요.》

이 세상 모든 녀성들이 눈물에는 약해진다. 그리고 이 세상 모든 녀성들이 저도 모르게 그것을 무기로 삼기도 한다. 눈물은 그들의 마음속 슬픔과 고통을 씻어주는가 하면 사랑과 동정을 불러일으키며 가혹한 벌과 치욕으로부터 보호하고 용서를 받게 해준다.

현순은 눈시울을 떨며 생각하였다. 고진아, 불행한 녀자, 물론 곡해도 있을수 있다. 아직은 다 알수 없지만 우리 아버지, 어머니들의 세대가 걸어온 지난날의 곡절많은 인생행로엔 무슨 일인들 없었겠는가!…

《좋아요.》 현순이 말했다. 《아직은 대답하기 어렵지만 꼭 알려주겠어요. 약속해요.》

《고마와요. 정말!…》

고진아는 눈물을 씻었다. 그리고 손가방에서 집주소와 전화번호까지 찍힌 명함장을 꺼내였다.

《이렇게 나올줄 알았어요. 같은 동포로서, 같은 녀성으로서 꼭 도와주리라고 믿었어요. 그럼 이 주소로 편지해주셔요. 전화로 알려도 좋구요.》

《그렇게 하죠.》

그들은 서로 마주보며 잠시 머뭇거리다가 손을 잡았다.

《안녕히!》

《다시 만나요.》

먼저 현순이 조인규와 같이 자리를 떴다. 아무말없이 깊은 생각에 잠겨 승강기에 오르고 이어 복도를 지나 자기 방으로 각기 들어갔다. 호실에서 기다리고있던 신정미가 《이제 오세요?》하고 반겨맞으며 묻는듯 한 시선을 주었지만 현순은 화장거울앞의 걸상에 앉으며 여전히 입을 다물고있었다.

뒤쪽의 유흥장에서는 광란하는 전자악기의 흐느낌소리가 소란했다. 외국의 관광객들이 미친듯 울고웃으며 떠들어대고있는것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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