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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27일 새벽이였다. 은영은 한정애와 같이 한달동안이나 전남지역의 여러곳을 돌면서 선전공작과 노래보급을 하고 서울로 돌아가고있었다.

전쟁이 일어난지 이틀째였으나 기차안의 사람들은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있었다. 어데서 구해들인 낡은 《경향신문》호외를 돌려가며 벅적 떠들어댈뿐이였다. 26일자로 된 그 신문호외에는 《국군정예부대들 북상, 총반공격전 전개》라는 륙군본부 정훈국장의 담화가 실렸는데 그는 담화에서 《북<한>공산군의 침공을 격퇴하고 맹렬히 추격전을》벌리는데 《래일 아침이면 해주가 떨어질것》이라고 기세등등하여 호언하고있었다.

기차는 한강을 사이에 두고 룡산역의 맞은편 어느 대피선에 틀어박히고말았다. 서울에서 남으로 출발하는 렬차들부터 뽑는다고 했다. 서울쪽에서는 벌써 수많은 사람들이 보따리를 둘러메고 남으로 피난을 가고있었다. 그런데도 대피선의 고성기에서는 방송원이 열띤 목소리로 《륙군본부의 발표》라면서 《옹진반도를 방어하고있던 제17련대는 반공격을 단행한지 하루만에 해주에 돌입하였습니다.》라고 불어대고있었다.

은영은 무엇인지 비상한 사변이 벌어지고있다는것을 깨달았다. 38도선에서의 무장충돌에 대한 보도가 매일같이 있었지만 이처럼 대규모로 싸움이 벌어지기는 처음이였다. 무엇보다먼저 어머니에게 맡기고 떠난 두살잡이 어린 딸이 걱정되였다. 거의 한달동안이나 그 젖먹이를 품에서 떼여놓고 멀리 광주지역을 돌았으니… 은영은 심장 한끝을 콕콕 찌르는 아픔에 겨워 곁에 앉은 한정애를 돌아보았다. 그에게라도 마음속에 깃든 무서운 생각을 터놓지 않으면 견딜수 없을것 같았다. 그런데 한정애는 고개를 푹 숙이고있었다. 렬차방송에서 떠들어대는 소리도 처녀에게는 들려오지 않는듯 했다.

《정애.》 은영이 나직이 불렀다. 《무슨 생각을 하지?》

처녀는 머리를 들고 은영이를 물끄러미 지켜보고는 조용히, 멋없이 웃었다.

피기까지 가셔진 얼굴은 어두웠고 가리마를 탄 머리도 조금 흐트러져있었다.

바싹 마른 입술을 추기며 처녀가 되물었다.

《예, 뭐라구요?》

정애의 두눈을, 고뇌에 시달리는 처녀의 두눈을 보면서 은영은 입안이 말라들고 머리속까지 저려드는것을 느꼈다.

《차한이를 생각해?》

처녀는 말없이 머리만 끄덕이였다.

《걱정하지 말아요.》 은영이 속삭이였다. 《그 앤 꼭 살아있어. 어데선가 정애를 생각하며 싸우고있을거야.》

《…》

역시 처녀의 표정은 희망에 눈뜨는것도 아니고 절망적으로 부정하는것도 아니였다. 눈섭우에 그려진 가는 실주름이며 가무스레한 얼굴에 거밋하게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는 처녀가 지금 밑창없는 공허에 잠겨 망연히 앉아있음을 말해주고있었다.

처녀의 얼굴은 흐릿하고 어수선했다. 그에게서 자기의 불안에 찬 마음을 위로받고싶었던 은영이였지만 오히려 처녀의 마음을 달래야했다.

《우리 차한인 죽지 않아.》 하고 은영은 또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얼마나 날쌔구 역바르다구.》

그것이 정애에게 아무런 반응도 일으키지 않는것을 보고서야 시진하게 한숨을 내긋고말았다.

그새 그들은 할수 있는껏 차한이를 찾아보려고 무진 애를 썼었다. 이번 걸음에 기어이 차한이를 만나고싶고 하다못해 살아있다는 소식이라도 듣고싶었던 은영이와 한정애였다. 은영이에겐 그가 동생이였고 정애에게는 첫사랑이였다. 그러나 한달동안이나 애썼지만 헛물을 켜고말았다.

한달, 광주지구 지하청년조직의 선전공작을 도와준 한달, 주로 공화국북반부에서 널리 불리우고있는 노래들인 《민주청년행진곡》, 《밭갈이노래》, 《봄노래》와 《구국투쟁가》 등을 보급하면서 전남각지를 돌았었다. 공공장소에서는 가극의 아리아나 민요들을 부르며 모연공작을 위해 내려온것처럼 위장하였고 청년학생들의 모임에서는 선전공작에 앞서 노래보급을 하였다.

노래와 함께 그 견인력을 새롭게 느낀 나날이였다. 광주지구 청년조직책임자 조동무는 그들이 내려와있는 한달기간에 수천명의 청년학생들이 새로 조직에 들었다며 대단히 만족해하였다. 그리고 그 노래들이 지리산빨찌산의 전투원들속에서까지 널리 불리워진다고 은밀히 귀띔하였다.

지리산빨찌산, 바로 거기엔 차한이도 있을것이다. 한정애가 떼를 쓰다싶이 하면서 은영이를 따라나선것도 바로 그 리유에서였다. 그러나 차한의 소식은 끝내 알지 못했다.

5개군에 걸쳐 펼쳐진 웅장한 지리산과 그 일대에는 도와 군의 지휘를 받는 여러개의 유격대들이 활동하고있었는데 놈들의 집중적인 《토벌》이 바야흐로 절정에 달하고있었다. 수많은 군경들이 5개의 군을 둘러싸고 일체 외부와의 련계를 차단하였다. 오솔길마저 차단되였고 유격대가족들이 살고있는 수많은 마을들이 불타버렸다. 지구당과 청년조직들에서도 은영이와 한정애가 지리산가까이 가는것을 한사코 반대하는 형편이였다.

한번은 목포의 바다가마을들에서 선전사업을 한 일이 있었다. 날이 밝을 무렵이였다. 은영은 변함없는 일과로 정한 발성련습을 위해 한정애와 같이 바다가로 나갔었다. 어린 시절 고향의 강기슭에서처럼 심호흡을 하고 준비운동을 한끝에 기슭으로 밀려드는 파도를 맞받아 소리를 뽑기 시작했다. 그런데 한정애는 어펑바위우에서 멀리 수평선 한끝을 묵묵히 바라보기만 했다.

《정애!》하고 은영이 조용히 말했다. 《성대를 보존하기 위해 함수를 하고 찬바람을 막는것도 중요하지만 진짜 성악가가 되려면 소음속에서 자기의 목소리를 들으며 훈련할줄도 알아야 해.》

그날 은영은 자기의 제자이기도 한 정애에게 선배로서, 강사로서 많은 교훈적인 말을 해주고싶었었다.

《난 어릴 때부터 강가에서 소리내는것을 제일 좋아했어. 정애도 한번 해봐. 물결치는 소리를 누르며 다음 옥타브까지 차츰 음역을 넓히느라면 물결소리가 관현악반주처럼 들리는 법이야. 저 파도소릴 들어봐. 결코 한가지 소리로만 울려오는게 아니거든. 바위를 치는 세찬 소리는 전체 현들과 드람의 트레몰소리와 같구 물방울들이 부서지는 소리는 플류트의 울림소리이구 갈매기의 울음소린 또 트럼베트와 오보에소리나 같지. 그속에서 자기의 목소리가 어떻게 울리나 한번 들어보라는거야.》

그러나 정애는 아무 기척도 없었다. 은영이 먼저 소리를 뽑았어도 까딱하지 않고있다가 별안간 입술을 깨물며 흐느끼는것이였다.

《언니, 언닌 정말!…》하고 처녀는 급기야 설분을 터뜨리며 부르짖는것이였다. 《어쩌믄 그럴수 있어요. 여기 와서까지, 지리산이 멀지 않은 여기와서까지 동생의 생사는 알려구도 않구… 정말 그렇게 매정한 언니였단 말이예요. 예?… 친동생인데두 그가 그립지도 않으세요?》

《뭐?》

다음순간 은영은 자기를 쏘아보는 처녀의 눈물어린 두눈에서 차디찬 적의를 느끼고 몸서리쳤다. 찬물을 들쓴듯 어깨를 옹크리고 얼이 나간것처럼 멍하니 굳어져있었다.

《난 가겠어요.》 정애가 또 부르짖었다. 《지리산으로 가서 차한씨를 꼭 찾구야 말겠어요!》

그 다음 처녀가 무슨 말을 또 했는지 은영은 듣지 못했다. 거센 파도소리가 모든것을 삼켜버리였다. 정애가 선바위쪽으로 울며 달려가는것을 보면서 천천히 무릎을 꿇고 무너져내리고 말았다.

물론 처녀는 지리산으로 갈수 없었다. 수많은 군경들이 지리산으로 통하는 모든 도로들을 차단하고 불법통행자들을 가차없이 총살하고있었던것이다. 곡성군의 한 청년조직책임자는 섬진강기슭에서 도처에 널린 참혹한 시체들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었다.

《거기서 지리산으로 가겠닥 했담서야?… 워매! 정신이 쑥 빠진게 아님사 거길 워찌 간다구 해여?!》

그때 은영은 처음으로 한마디했다.

《나도 가고싶어. 밤마다 차한이가 꿈에 보이구… 그렇지만 우린 노래로 싸우는 사람들이야. 우리 차한이가 정애에게서 바란것도 바로 그거구.》

《?!…》

그때에는 정애도 아무말없이 눈시울만 떨고있었다.…

며칠전에 있은 일이였다.

사실 그때 지리산빨찌산의 《괴멸》은 시간문제로 되고있었다. 그것은 은영이의 친동생이며 정애의 첫사랑인 차한이도 이름없는 어느 골짜기에서 피흘리며 쓰러져버리고 만다는것을 의미하는것이였다. 그때문에 지금도 한정애는 자기의 마음속에 시꺼먼 발톱을 박고있는 절망과 오뇌에 잠겨 허덕이였고 은영은 또 그대로 속절없이 가슴을 허비고있었다.

하지만 지리산빨찌산의 치렬한 싸움이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는것을, 이제 전쟁과 더불어 새롭게, 보다 큰 규모로 전개되여 전쟁이 끝날 때까지 여러해동안이나 준엄한 피의 력사를 새기게 되리라는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지금 은영이와 한정애가 주고받는 이야기도 달리 되였으리라.

그들은 더 말을 이을수 없었다. 그들과는 반대로 렬차안의 많은 사람들은 방송에 귀를 기울이며 공포로 떨고있었다. 한강을 사이에 두고 기차까지 멎어버려 어찌할바를 몰라 아우성이였다.

저녁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가 한밤중이 되면서 억수로 퍼부어지기 시작하였다. 역구내는 멎어선 차와 서울에서 남행렬차를 타지 못하고 다리를 건너온 사람들로 가득찼다. 모두가 전쟁, 전쟁에 대한 말뿐이였다.

사람들이 어떤 역원을 붙들고 고아대고있었다.

《우리 차는 언제 떠나게 되나요. 예?!》

《도대체 서울을 눈앞에 두고 여기서 뭣하자는거야!》

《우린 빨리 서울로 들어가야겠는데 대피선에 밀어넣으니 어쩌라는거요?》

둥글모자를 쓴 역원이 씩씩거리며 소리쳤다.

《강건너 룡산역에서 특별렬차가 떠났다는거예요. 리대통령이 탄 특별렬차라구 해요. 그러니 조금만 참아요. 조금만!》

《리대통령이?》

《전쟁이 일어났다는데 대통령이 어데로 간단말이야?》

사람들이 극성스레 떠들었으나 어느새 역원은 그 속을 빠져나가고 보이지 않았다. 고성기에서는 방금 해주로 돌입했다고 떠들던 방송원이 무슨 창동방어선에 대하여 말하고있었다.

《채참모총장이 직접 창동방어선에 나가 공산군의 남하를 저지시키고있다 합니다. 그러니 시민들은 안심하고 진정해야 하겠습니다.》

누가 패주하고 누가 진격하고있다는것인지 도무지 가늠할수 없는 보도였다.

은영은 정애를 잡아끌며 차에서 내린 사람들을 따라 한강인도교로 향했다.

죽더라도 서울에 들어가지 않고는 안될 사람들이 허둥거리며 그리로 몰려가고있었다.

온몸이 비에 흠뻑 젖어버렸다. 앞을 가려볼수 없는 어둠과 비줄기속을 뚫고 진창을 저벅거리며 달려갔다. 번개가 번쩍일 때마다 사람들의 어깨에서 물보라를 일으키는 비줄기가 시퍼런 불광에 펀뜻거렸다. 서울시 룡산역을 마주한 북한강파출소에 이르렀을 때였다. 돌연 앞쪽에서 《비켜, 비켜!》하는 웨침소리가 울렸다. 누군가 두팔을 쩍 벌리고 인도교로 밀려가는 사람들을 막고있었다.

미군찦차가 굴러와 밀려드는 사람들을 막았다. 그 찦차의 발판에 올라선 헌병이 대령의 계급장을 달고있는 사나이에게 소리쳐 보고했다.

《대령님, 미국군사고문단일행이 통과했습니다!》

대령이 보고를 듣고 손을 홱 내저었다.

《륙군참모총장의 차는 아직 안보여?…》

그 다음 말은 듣지 못했다. 승용차를 따라 저쪽 서울시내에서 넘어오는 사람들이 보짐을 이고지고 서로 아귀다툼을 하며 한강인도교를 가득 메우고있었다. 그처럼 많은 사람들의 물결을 맞받아 다리를 건는다는것은 상상할수도 없었다. 도중에 인파에 밀려 란간너머로 떨어지든가 아니면 발길에 채우며 깔려죽고 말것이였다. 대줄기같이 퍼붓는 비발속에 비명과 욕지거리소리, 승용차의 경적소리며 째지는듯 한 호각소리가 한데 어울려 무시무시한 소음으로 덮치듯 밀려왔다.

은영은 멎어섰다. 다리입구쪽에 서있던 대령이 무어라고 소리치고 헌병들과 병졸들이 어둠속으로 뛰여가는것이 얼핏 눈에 띄였다. 승용차의 전조등불빛이 눈을 때리고 헌병들의 웨침소리가 돌맹이처럼 날아다녔다.

《부대통령 리시영각하 통과!》

《대령님, 륙군참모총장 채병덕각하가 통과하고있습니다.》

창동방어선에 나가있다던 채참모총장이 한강다리를 건너 남으로 내빼고있는것이다. 미군찦차의 발판을 딛고 서서 피난민들사이로 차를 밀고나온 헌병이 그렇게 웨친것이다. 채병덕이 탄 차의 뒤로 10여대의 승용차가 따르고있었다. 보고를 받은 대령이 《알았다.》 하더니 뒤쪽의 경찰파출소를 향해 벽력같이 소리질렀다.

《점화!》

그다음 대령은 어느새 어둠속으로 몸을 날렸다.

점화라니, 그건 또 무슨 소리인가?… 은영은 앞에서 허우적거리며 다리쪽으로 밀고나가려 애쓰던 사람의 쩍 벌어진 입과 그속으로 쓸어드는 비물을 놀라서 쳐다보았다. 바로 그 순간 발밑의 땅이 부르르 떨리며 굉음이 터졌다.

처음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누구도 알지 못했다. 사람들과 차들이 한데 어울려 밀물처럼 흘러오던 인도교가 번쩍! 하는 섬광에 허궁 들리는것 같더니 삽시에 산산쪼각이 나서 날아올랐다. 그와 동시에 철교쪽에서 또 요란한 폭음이 터졌다. 화산과 같은 폭발에 퍼붓던 비줄기마저 시퍼런 창끝처럼 어둠속에 찍혔다. 귀뿌리를 스치는 파편들의 휘파람소리, 황갈색의 화염과 초연이 어둠을 휩쓰는 가운데 하늘과 땅이 진동하고 찢어진 차와 사람들이 재개비처럼 뿌리워 강물우에 떨어져내렸다. 다리복판에서부터 파출소에 이르는 구간에 늘어서있던 수십대의 자동차들도 물속에 곤두박히여 강물이 부글부글 끓어번졌다. (후날 력사기록은 50여대의 차량과 천여명의 사람들이 물속에 수장되였다고 밝혔지만 그것이 극히 축소된 수자라는것을 목격자들은 잘 알고있었다.)

폭발의 굉음이 가라앉은 후에도 강의 량쪽에서는 땅울림과도 같은 소음이 한동안 계속되였다. 물속에서도 간혹 비명과 신음소리가 울려왔지만 그것은 극히 짧은 한순간에 불과했다.

무고한 사람들에 대한 대살륙의 참상이였다. 은영은 억이 막혀 굳어진채로 서있었다. 온몸을 뒤흔드는 땅울림이 령혼들의 울부짖음소리같이 가슴을 찢어놓았다. 누가 이런 참경을 빚어냈는가, 누가?!… 무시무시한 폭발과 함께 벌어졌던 소란이 가라앉고 한강기슭은 죽은듯 한 고요에 묻히였다. 줄기차게 퍼붓는 비소리만이 점점 더 크게 들려왔다. 그때에야 이쪽에서 멍하니 서서 굳어져버렸던 사람들이 진창을 짓이기며 고함을 질렀다.

《이게 웬일이예요. 아- 이런 변이 어데 있단 말이예요?!-》

《어느 놈이야. 누가 다리를 폭파시켰어?》

《그놈을 잡아내라!-》

《살인자를 때려죽여라!》

그 소리에 기겁한듯 파출소뒤쪽에 멎어있던 승용차들이 부릉거리며 어둠속으로 달려갔다. 이미 다리를 건너 폭파를 지켜보고있던 미군사고문단과 부대통령, 채병덕륙군참모총장의 승용차들이였다.

은영은 가슴이 터질 지경이여서 몸을 가누기도 힘들었다. 얼굴에 줄지어 흐르는 비줄기를 손으로 훔치며 멀리 사라져가는 승용차의 불빛들에서 눈길을 떼지 못하고있었다. 비물은 하염없이 눈으로, 입으로 쓸어들었다. 무서운 오한에 흐느끼고 몸을 떨며 허덕이였다. 이처럼 잔인무도한 놈들이 서울시내에서 무슨 짓을 벌리고있을지 모를 일이였다. 두고온 어린것도 방금 쪼각쪼각 찢겨날리던 그 몸뚱이들처럼 무참히 도륙을 당하지 않으리라고 어찌 장담할수 있겠는가?…

정신없이 어둠속을 내달렸다. 강기슭에 이르자 무작정 사품치는 물속에 뛰여들었다.

《언니!-》 한정애가 부르짖으며 매달렸다. 《어쩌자구… 죽자구 그래요. 예?!》

때마침 웬 사나이가 달려들어 태를 쳐서야 정신을 차렸다. 기슭에 밀려나온 시체들과 형체를 알수 없는 잔해들을 바라보며 비로소 맥없이 울기 시작했다. 무엇때문에 울었는지 모른다. 그저 울수밖에 없는 미련한 존재에 대한 가슴저미는 아픔과 설음때문이였는지… 소리없이 울다가 벌떡 일어섰다. 어떤 일이 있어도 서울시내로 들어가야만 했다. 마침 한정애가 그를 붙안으며 부르짖었다.

《저기 쪽배들이 떠오고있어요. 보세요. 저-길요!》

강건너 서울쪽에서 쪽배들이 떠오고있었다. 그토록 끔찍한 참변이 있었건만 미처 피난을 못한 사람들이 결사적으로 강을 건느는것이였다. 은영은 정애가 이끄는대로 쪽배들을 마주 달려갔다. 기차에서 내린 손님들, 시내로 들어가려던 사람들모두가 그리로 몰려갔다. 거기서 서울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버리고 간 쪽배에 서로 다투며 기여올랐다. 은영이와 정애도 가까스로 그들속에 끼여들었다.

마침내 시내에 들어섰다. 정애와 갈라져 집으로 달리던 은영은 째지는듯 한 웨침소리에 주춤 멎어섰다. 그칠줄 모르는 비속에서 차를 달리며 부르짖고있는 웬 녀자의 목소리였다.

《국군장병들이여, 사랑하는 서울시민들이여!》

마이크가 달린 찦차우에서 비에 젖은 녀자가 웨치고있었다. 그 모습이 낯익게 느껴졌다. 자세히 보니 모윤숙이였다. 우익계에서도 가장 반동적이던 녀류시인 모윤숙이 륙군본부 정훈국의 찦차를 타고다니며 목터지게 부르짖고있는것이였다.

《시민여러분, 겁내지 마십시오. 이제 곧 미군이 옵니다. 우리의 우방 미국군대가 우리를 도와주러 옵니다. 절대 서울은 내주지 않습니다!…

그리고 용감한 국군장병들이여! 공산군을 막아 결사적으로 싸워주십시오! 사랑하는 서울시민들이 그대들을 지켜보고있습니다!…》

퍼붓는 비줄기속을 헤치며 찦차는 멀어져갔지만 은영은 이윽토록 그쪽을 노리며 이를 사려물고있었다. 모윤숙, 미국놈들에게 넋마저 팔아버린 벌거벗은 시녀! 미군사고문단이 도망치면서 한강다리를 폭파해버린줄 알기나 하느냐?… 수천명의 무고한 사람들을 통채로 물속에 처넣고 도망친줄 알기나 하는가 말이야?!…

새벽녘에야 비가 멎기 시작했다. 어데선가 땅크발동기들이 부릉거리고 요란한 총성이 대기를 찢었다. 새벽 5시였다. 인민군대의 서울해방 총공격이 시작된것이였다. 바로 그 시각 집에 들어선 은영은 어린 젖먹이를 가슴에 안고 정신없이 들여다보며 흐느끼고있었다. 두살잡이 어린 애기는 세상이 어떻게 뒤바뀌고있는지도 모르고 쌔근쌔근 자고있었다. 불안은 가셔졌다. 급기야 터진 전쟁이 방금 눈앞을 지나간것만 같았다. 그러나 전쟁은 이제 시작에 불과하며 은영이 여적 겪어본 일이 없는 무수한 시련이 폭풍치듯 밀려들고있다는것을 그는 상상조차 하지 못하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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