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 장

전선지구경비사령부협주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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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김종태전기기관차공장에 나가 로병예술선전대활동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김은영은 간소한 저녁식사가 끝난 후에야 다시 딸과 마주앉았다. 정전이 잦았으므로 석유등불을 켜놓고 현순이가 베이징에서 가져온 사진을 들여다보기 시작하였다.

밖에서는 진눈까비가 구질거렸다.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면서 도처에서 난방시설이 얼어터지고있었다. 방은 싸늘했지만 그런데는 습관된지 오래였다.

어깨우에 솜옷이며 외투를 걸치고 앉은 두 녀인, 백발의 로가수 김은영과 그의 딸 림현순은 자주 어깨를 오그리면서도 흘러간 옛시절의 자취를 더듬기에 여념이 없었다.

《어제 어데까지 얘기했더라?…》

어머니가 기억을 더듬고있는 사이 현순은 잠자코 기다리고있었다. 사실 현순이는 그저 딸인것이 아니라 은영이의 가장 가까운 벗이기도 하였다. 현순이에게는 아무것도 숨길 리유가 없었다. 다만 흘러간 세월의 사말사들이 무용가인 현순이에게 아무 의미도 없는것이라고 보았으므로 마음속에 묻어두었을뿐이다.

《너도 알겠지만…》 은영이 계속했다. 《사랑을 떠난 생활이란 없는거야. 마음속에 사랑만 있으면 그 어떤 고통도 다 이겨낼수가 있지. 그것을 잃으면 인생의 등불은 꺼진거구…》

어머니가 소리없이 웃었다. 어머니의 그 웃는 모습을 현순이는 눈 한번 깜박이지 않고 지켜보고있었다. 새까만 눈동자속에서 경탄의 빛이 사물거리고있었다. 80고령에 이른 자기 어머니의 정갈한 자태와 미소를 짓는 아련한 모습엔 매혹되지 않을수 없는듯 했다.

《어머니, 그래서요?》

《그래서》 하고 은영은 여전히 미소를 떠올린채 조용히 계속했다. 《난 언제나 수미를 불쌍하게 생각했지. 정말 불행한 녀자였어. 사랑을 주지도 못하고 받지도 못하는것처럼 불행한 일이 어데 있겠니. 아니, 불행하다기보다 비참하다고 해야 하지 않을가?… 참 전쟁직전의 일인데… 내가 한정애와 같이 광주쪽에 갔던 일이 있었단다. 둘째 동생 차한이가 종적없이 사라진 후에 말이지. 전라도지하조직에서 혁명적인 노래들을 보급해줄 사람을 보내달라고 요청해와서 내가 나섰는데 뜻밖에도 한정애가 저도 같이 가겠다고 떼를 쓰는거야. 나한테만 가만히 말하는데 차한씨가 가있는데로 저도 가보고 싶다는게 아니겠니. 차한이가 있는데라구? 그게 무슨 소리냐 하고 물었더니 글쎄 차한이가 지리산유격대로 갔다는거야. 알고보니 아버지와 형이 체포되고 저도 죽는가, 사는가 하는판에 한정애만은 만났더구나. 그때 그런 말이 있었다는거야.

제 누이한테도 말하지 않은것을 어느새 처녀한테만은 대주었으니… 사랑이란 정말 얼마나 놀라운걸가?… 순결한 정과 절대적인 믿음이라 할가… 그 말을 들었을 때 난 노엽게 생각지 않았어. 오히려 우리 차한이와 정을 나누는 그 어린 처녀가 더 사랑스럽게 여겨졌을뿐…

그런데 수미는… 정말 그 녀자야말로 목마르게 사랑을 바라면서 몸부림치고있었지만 생활은 그 반대로 되였으니 그건 무엇때문일가?… 물론 수미도 차츰 달라져갔던건 사실이지. 전쟁이 일어나던 그때였어. 수미도 참사랑에 눈뜨기 시작했는지 딴사람처럼 달라지기 시작하더구나. 지금도 기억에 생생해.…》

김은영은 반쯤 눈을 감고있었다. 사람들이 자주 과거를 되살리는 리유는 아마도 거기에서 인생의 교훈을 찾기 위함이 아닐가?… 과거는 사라지지 않는다. 지워버릴수도 없다. 그래도 한사코 과거를 묻어버리지 못해 애쓰는자가 있다면 그것은 죄악에 찬 과거를 가지고있는자일뿐이리라.

은영은 이렇게 생각하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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