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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의 정치정세가 극저온상태에 이르던 시절이였다. 중국대륙에서 내전이 폭발하고 1947년 3월 12일 미국대통령 트루맨이 미국회에서 《트루맨독트린》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진 유명한 대쏘봉쇄정책을 선언한 그때부터 랭전의 빙하가 세계를 휩쓸고 조선반도의 정치정세도 급격히 얼어붙었다. 피비린 암투와 암살, 여러 정당, 사회단체들에 대한 가혹한 탄압, 저항하는 인민들에 대한 대중적학살만행, 드디여 남반부의 전 지역에서 미군철수와 리승만의 매국행위를 반대하는 대중적투쟁이 벌어졌다. 따라서 애국과 매국간의 싸움도 절정에 이르렀다. 적들의 류혈적인 학살만행이 거듭될수록 인민의 분노도 화산같이 터져올라 제주도 4. 3봉기, 려수군인폭동, 대구인민항쟁이 련이어 폭발하고 지리산, 태백산인민유격대들이 산발을 넘나들며 치렬한 싸움을 벌렸다. 이러한 투쟁의 불길속에 은영의 아버지와 두 남동생도 뛰여들어 싸웠던것이다.

체포된 아버지와 동생 그리고 림호는 어디에 끌려갔는지 종적조차 알수 없었다. 오히려 경찰은 은영이를 호출하여 둘째 동생 차한이가 어데로 도망쳤는지 대라고 닥달질이였다. 체포를 면한 차한이가 어데론가 사라져버린것이였다.

은영이조차 알지 못하는것을 대라고 강박을 하던 경찰들은 마지막으로 아버지와 뜻을 달리한다는 개인성명을 내라고, 그러지 않으면 감옥신세를 면치 못할것이라고 을러메였다. 좌익계의 음악가동맹일군들과 예술인들, 은영이를 사랑한 많은 사람들이 항의하고 신문에서 떠들어서야 마지못해 경찰서의 철문을 열어주었다.

은영이를 하숙집에까지 데려다준것은 고종우였다. 전차를 타고 갈 때부터 덕수궁의 울담을 따라 걸을 때까지 노상 부축해주었다. 그의 얼굴은 얻어맞은것처럼 퍼리끄레했다. 은영이가 몇번이고 혼자 갈수 있으니 걱정말고 돌아가보라 했지만 끝까지 함께 걸었다. 함께 걸으며 은영이 겪은 일의 전말을 귀담아들었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그가 우들우들 몸을 떨며 하는 말이였다. 《참, 기막힌 일두… 아버지와 동생, 약혼자까지 끌어가고도 모자라 은영씨까지 고문하면서 개인성명을 내라고 강요했으니… 왜놈들과 다른게 무업니까. 정말 해방이 된 오늘에도 이런 무서운 일이 벌어지다니… 생각만 해도 무서운 일입니다.》

《무서운 일…》 은영은 허덕이였다. 《그놈들이 이제 아버지랑 어떻게 할지… 생각만 해도…》

《너무 걱정마십시오. 일본놈들의 법에도 살인이 아니면 사형이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왜놈들보다 더한 놈들이예요. 그걸 이제야, 이처럼 뒤늦게야 알게 된게… 분하기 그지없군요.》

고종우는 은영의 약혼자가 누군지, 어떤 사람인지 끝까지 묻지 않았다. 그처럼 진실하고 사심없는 사람이여서 은영은 하숙집뜨락에 이르기까지 그의 부축을 받았다.

그런데 하숙집에서는 또 다른 굴욕이 은영이를 기다리고있었다. 전라도출신 과부댁이 은영이와 고종우를 사무럽게 흘겨보더니 한바탕 야살을 쏘아댄것이였다.

《아이고메! 저것 좀 보겨. 싹수머리없이 외간남잘 또 끌어들이믄서 저 지랄이여, 지랄이!… 내 저 더러운 꼴 워찌 보구만 있을랑가? 칵 문드러지여!… 그리 잘방지게 놀다간 염병헌다, 이 가시내!》

쓰린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격이였다. 은영은 억이 막혀 그 자리에 주저앉을번 했다. 고종우가 제때에 부축하여 대문밖으로 끌어내였다.

《내가 잘못했습니다. 이리 될줄 모르구 그만… 우리 집으로 갑시다. 우리 어머닌 좋은분입니다.》

《아니, 그래선 안되죠.》 은영이 휘청거리며 중얼거렸다. 《날 극장까지만… 데려다주세요.》

다시 전차를 타고 우미관까지 가야만 했다. 은영은 더 이상 걸을 힘도 말할 기운도 없었다.

《어쩌문 좋아요. 난?… 정말이지 막 죽고싶어.》

고종우가 거의 껴안다싶이 했다.

《용기를 내시오. 마음까지 꺼지면 안됩니다.》

《필요없어요. 다!…》

살고싶지 않았다. 모든것이 귀찮고 허무하게만 여겨졌다. 고종우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도중에 쓰러져버리고말았을것이다.

극장에서는 은영이의 불행에 대하여 알고있었으므로 군말없이 그 녀자가 쓰던 분장실을 열어주었다.

《인젠 됐어요. 종우씨, 고마워요.》

힘들게 말하고나서 은영은 쓰러졌다. 고종우가 극장수위에게 물을 가져오라고 소리치는 소리도 겨우 가려들었다. 물속에 잠겨드는듯 했다. 극심한 정신육체적타격에 노그라져버리고 말았다. 다시 고종우가 은영이를 걸상에까지 끌어다주었다.

《빨리 물을 좀!》

고종우가 뒤쪽에 대고 소리쳤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는 은영이를 안은채 그만 굳어져버렸다.

《흥, 이럴줄 알았어, 알았다니까!》

가늘고도 새된 소리였다. 누가 누구를 두고 쏘아붙이는 소리인지 은영은 알지 못했다. 그때 은영은 자기의 머리가 걸상뒤쪽으로 번져지는것만을 가까스로 의식했을뿐이였다.

《둘이서 이따위짓을 하자구 날 빼돌렸군요?》

《수미! 비렬하게 그러지 마오. 알지도 못하면서…》

고종우의 목소리가 먼산의 메아리처럼 울려왔다.

《내가 모른다구? 이렇게 펀히 눈을 뜨고 보는데도 모른다구요?》

《수미!》

《그럼 알아두세요. 난… 이런 녀자예요. 보세요!》

째는듯 한 목소리가 《보세요!》하고 소리친것과 동시에 차디찬 얼음물이 은영의 얼굴에 들부어졌다.

《여기 물을 가져왔어요. 은영씨, 어디 실컷 마셔봐요. 자, 물은 얼마든지 있으니 또 받아요!》

두번째 물벼락에 흐려지던 의식이 되살아났다.

《이건 무슨 추태요, 응?》 고종우의 분노에 찬 목소리.

《난 은영씨와 인연이 깊어요.》

되바라진 녀자의 목소리.

《은영씨가 바라는건 다 해줄테야!》

비로소 은영은 몽롱해진 의식속에서도 그것이 수미의 가시돋친 목소리라는것을 알았다.

수미가 야멸차게 계속했다.

《은영씰 정신들게 할테야, 정신이 들게!》

《미치지 않았소?》

《그래요. 난 미쳤어요. 미친 녀자!》

《나가오. 썩 나가지 못하겠소?》

《아니. 정신들게 할테야. 남의 약혼자를 홀려내는 나의 다정한 벗 은영씨를!… 정신이 번쩍 들게 하구야 말겠어요!》

고종우가 악을 쓰는 수미를 끌어내는것 같았다.

《너절하오. 너절하고 비렬하고…》

《너절한건 누군데 날더러 소리치는거예요. 제 약혼녀를 버리고 여기서 무슨짓을 했는지 어디 말해봐요.》

《나가라. 어서 나가!》

《못나간다. 이걸 놓지 못하겠어?!》

고종우, 박수미… 그들이 약혼을 했다고?!… 은영은 혼미해진 머리속에 기억을 더듬었다. 언젠가 고종우가 자기에게 수미씨가 무슨 주사를 맞는지 모르는가, 무슨 병이 있는가, 은영씨야 누구보다 잘 알지 않는가고 묻던 일을… 그때 은영은 모른다고 딱 잡아떼였다. 아무것도 모른다고!… 사실은 근래에 와서 수미가 다량의 수면제를 사용한다는 말을 들었으나 무턱대고 모른다고만 했었다. 만약 그때 그들이 약혼하리라는것을 알았어도 그렇게 말했을가?…

그랬을것이다. 한 녀자로서 가까운 녀동무의 비밀을 들추어내는것처럼 비렬하고 추한 일은 없기때문이다. 마음의 가책에도 불구하고 달리는 할수 없는 그런 일들이 생활에는 가끔 있는것이다. 그런데… 은영은 뒤로 젖혀진 머리를 들고 눈앞에서 언듯거리는 수미를 스쳐보며 힘들게 속삭이였다.

《종우씨.》

약한 목소리였지만 서로 힘내기를 하던 두사람, 고종우와 수미가 동시에 머리를 돌렸다.

《종우씨, 난 수미씨를… 알아요. 다는 모르지만… 알아요. 그를 리해해주셔요.》

《아!-》 수미가 울부짖는 소리였다. 《이 더러운 위선자, 남의 약혼자를 가로채고도 그런 고운 목소리를 내다니… 아- 정녕 나를 미치게 할 작정이구나!-》

고종우가 사납게 달려들어 힘내기로 그 녀자를 끌어내갔다. 물을 떠가지고 왔던 극장수위가 어쩔바를 몰라 부스대다가 황황히 뒤따라나갔다. 은영은 이 모든것이 악몽과 같이 여겨졌다. 밖에서 고종우가 성급하게 말하는 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아버지와 동생이 끌려가구 약혼자까지… 체포됐단 말이요. 그런데 당신은… 무슨 녀자가 그리도 모질구 악한가 말이요. 그래두 은영씬 당신에 대해서 늘 좋게만 말해왔는데 그게 뭐요. 수치요. 수치!… 난 정말 수미씨가 이런 녀자인줄 몰랐소!…》

《거짓말, 누가 끌려갔다구요. 체포됐다구?… 그런 얼림수로 날 속여보려 하지만 그렇게는 안될걸!… 난 증오해요. 당신이나 저 은영이도 다 죽여버릴테야!》

《추태를 부리지 마오!》

《다치지 말아요. 난 은영이와 할 말이 있어요. 둘이서 따로 계산할게 있단 말예요!》

《안돼!》

《비키지 못하겠어요?》

또다시 밀고닥치는것이 알렸다. 아, 수미! 수미가 원한을 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은영이였다. 련이어지는 무서운 정신적타격에 비틀거리는 몸으로 한 남자, 종우씨에게서 도움을 받았을뿐인데 그것도 죄로 되여야 한단 말인가?…

은영은 가까스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쪽으로 걸어가려 했으나 두어걸음만에 비틀거리며 무너지듯 주저앉고말았다. 문을 걸고싶었는데… 귀아프고 역겨운 그들의 비천한 언쟁에 진저리가 났다. 그러나 몸을 일으킬 힘이 더는 남아있지 않았다. 하여 방바닥에 두팔을 벌리고 엎드린채 주단을 허비며 몸부림쳤다. 수미를 저주하기에는 이미 입은 마음의 상처가 너무도 크고 쓰라린것이였다. 모든것이 시작도 되기전에 사라져버렸다. 밤낮없이 꿈꾸던 풍부한 미래, 푸른 바다가 저 멀리 아득한 공간으로 사라져버렸다. 남은것은 공허와 오뇌뿐…

극장수위가 다시 들어왔다. 방바닥에 엎드려있는 그 녀자를 건드리며 나직이 물었다.

《은영씨, 의사선생을 불러드릴가요?》

은영은 손을 내뻗치며 가까스로 중얼거렸다.

《아니, 일없어요. 대신… 저 문이나 걸어주셔요.》

혼자 있고싶었다. 누구도 건드리지 않기만을 바랐다. 밖에서 문이 걸리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여전히 엎드려있었다. 낡은 주단에서 곰팡이냄새와 세월을 두고 잠겨든 먼지냄새가 매캐했다. 비로소 모진 추위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어둠과 추위, 병약한 아버지는 이 추위속에 어떻게 하고계실가.… 그들도 이 밤을 견디기 어려우리라.…

문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수미가 문을 열어달라고 소리치고있다. 다행이 악을 쓰며 야로를 부리는 소리는 아니다.

《은영씨, 잠간만! 내가 모르고 그랬던거야. 제발 문을 열어줘. 응?!… 나 꼭 할 말이 있어.》

하지만 은영은 귀를 틀어막고말았다. 야로를 부리건 잘못을 빌건 그러한 추태에는 넌덜머리가 난다. 지금은 그따위 푸념이나 들어줄 한쪼각 마음의 여유도 없다. 그렇게 죽은듯 쓰러져 고통속에 늘어져버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별안간 은영은 이상한 아픔이 온몸과 넋을 옥죄이는것을 느꼈다. 수미가 들부어준 찬물이 온몸을 얼음덩이로 굳어지게 한것일가?… 목구멍이 조여들다 못해 얼음쪼각처럼 부서져버리고마는것만 같다.

캄캄한 어둠과 추위, 은영은 리해할수가 없었다. 어찌하여 우리는 이런 고통을 겪어야만 하는가? 어찌하여 소박하고 진실하고 깨끗한 량심을 지닌 사람들이 학대받고 고통을 받아야만 하는가?… 그에 대하여 몸부림치며 소리쳐 묻고싶었다. 그러나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두손을 앞으로 내뻗치며 허우적거리다가 다시 모로 쓰러져버렸다.

은영이 다시 의식을 차린것은 누군가 소리쳐부르며 자꾸만 흔들어대기때문이였다. 그런데 눈을 떠보니 아무도 없었다. 은영은 극장 분장실바닥에 홀로 쓰러져있었다. 누가 나를 건드린것일가. 누가 꼬집는것 같았는데?… 한밤중이 였다. 혹시 샐녘이였는지도 모른다. 일어나고싶지 않았다. 그대로 영영 잠들어버리고싶었다. 그런데 갑자기 무엇인가 또 은밀하게 깨우는것을 느꼈다. 조용히, 다정하게 그리고 살틀하게 꼬무작거리며 무엇인가를 속삭이고 있었다. 부드럽고도 야릇하게 은영이를 건드리고 긁어대는 감촉… 그것은 새 생명이 몸안에서 어머니를 부르는것이였다. 그렇다. 이 세상 가장 정겹고 살틀한 부름이 그 미묘한 움직임으로, 나긋한 꼬드김으로 전해져오는것이였다.

은영은 놀랐다. 전류와도 같은 감각이 가슴을 스쳐갔다. 배속에서 태동하는 삶의 호흡에 숨길을 딱 멈추었다. 태아가 생명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으며 귀를 강구었다. 잠시 동안을 두었다가 다시 꼼지락거리는 감각에 크나큰 기대와 함께 야릇한 불안을 느끼지 않을수 없었다. 그것은 단순한 기대와 불안만도 아니였다. 별안간 온몸을 짜릿하게 하는 환희의 선률, 따스한 봄과 눈보라 사나운 겨울 그리고 공포… 모든것이 뒤죽박죽이였다. 죽은듯 가만히 누워 꼼짝하지 않았다. 새 생명이 자기를 일으키며 안타깝게 부르는것이라고 믿어의심치 않았다. 삶이 그를 부르고 사랑이 그를 부르고있었다. 삶이란 곧 사랑이다. 하거늘 사랑이, 큰 사랑이 느즈러진 은영이를 잡아 일으켜주는것이다.

예술가는 무엇보다먼저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 사랑을 환희와 기쁨속에 노래하고 지키기 위해 몸과 마음 다 불태우는 사람이다. 누가 그렇게 귀띔했던가. 아버지가? 림호씨가?… 드디여 은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버지도 이것을 바라고있을것이다. 림호씨도 일한이와 차한이도 은영이가 절망에 빠져 다시 일어서지 못한다면 모진 아픔에, 슬픔에 견디지 못할것이다.

은영은 천천히 옷매무시를 바로하고나서 거울앞에 마주섰다. 어둠속이여서 거울에는 시꺼먼 형체가 어렴풋했다. 하지만 자기의 두눈을 들여다보려고 애쓴다. 자기의 두눈에서 빛이 꺼지지 않았는지 망연히 들여다본다. 차츰 거울속의 은영이가 눈뜨는것이 알린다. 아! 이것이 바로 나 은영이다. 죽지 않은 은영이다. 이제 날이 밝으면, 새날, 새 아침의 태양이 솟아오르면 절망의 나락에서 다시 일떠설 은영이의 모습이다. 그러면 눈부신 해빛을 마주하고 변함없이, 더 힘차게 삶의 노래를 부를것이다. 슬픔과 고통에 무너지지 않고 새롭게 태여나 다가올 벅찬 생활과 사랑의 노래를 목메여 부르게 될것이다!…

그는 거울앞에서 오래도록 움직이지 않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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