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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밖에서는 눈이 내리고있었다. 솜털같이 흰 눈송이들이 하늘을 가득 메우며 내렸다.

은영은 급히 교재들을 챙기고 무엇인가 열심히 쓰고있는 교무주임에게로 다가갔다. 교무주임이 머리를 들고 안경을 벗으며 놀란듯 말했다.

《아 은영선생, 아직 떠나지 않았습니까?》

《저… 지금 가려구 합니다.》

《어서 가보시오, 어서!》

한성중학교에서 단 하나뿐인 녀교원이고 유명짜한 배우여서 교직원들모두가 은영이를 자랑으로 삼았다. 무엇이든 도우려 애썼고 수업이 끝나기 바쁘게 극장으로, 초대받은 모임장소로 등을 떠밀어보내는것이였다. 하여 교무주임은 은영이가 어데로 가려 하는가고 묻지도 않았다.

은영이 복도로 나서는데 마주오던 력사교원 한광수가 우습강스럽게 입을 딱 벌리며 멎어섰다.

《아 춘향아씨,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뭘 말예요?》

《아 글쎄 오늘은 더 예뻐졌으니 말입니다. 혹시 리도령역을 하는 사람과 진짜 백년가약을 맺으러 가는건 아닌가요?》

유쾌한 익살군 한광수는 한시도 롱을 하지 않고는 못견디는것 같다. 은영은 웃으며 가만히 속삭이듯 말했다.

《혼자만 알고 계셔요.》

《아니 그럼 난 어쩌라는겁니까? 이 늙은 총각 한광수는?》

《걱정마세요, 이제 향단이를 붙여줄테니.》

《아 향단이야 방자 그 녀석이 벌써 눈독을 들이고있지 않습니까!…》

《괜찮아요. 내가 혼맹이 나게 떼여버린다니까요.》

은영은 이미 현관문으로 걸어가고있었다. 얼마전 자기와 림호를 말없이 도와준 그를 남달리 생각하고 고맙게 그리고 매우 놀랍게 여겼지만 오늘은 그의 재담도 들어줄새가 없다. 그가 입을 벌린채로 굳어져버린것을 뻔히 알면서도 소리없이 웃으며 곧추 걷기만 했다.

현관문을 열고 나서자 무수한 눈송이들이 새까만 외투를 입고 하얀 목도리를 두른 처녀의 머리우에 쏟아져내렸다. 가지마다 함뿍 눈을 들쓰고있는 비슬나무우듬지에서 까치가 깍깍거렸다. 푸시시 흩어져내리는 눈가루, 벌써 발목까지 눈에 잠긴다. 머리우에, 어깨우에 내려앉으며 끊임없이 소곤거리는 눈송이들, 발밑의 폭신한 느낌… 좋은 날이다. 며칠째 지독한 추위가 살을 에이더니 별안간 날이 풀리고 눈이 내리는것이다. 대자연이 오늘 기쁜 날을 맞는 은영이를 위해 미리 준비하였던 선물을 아낌없이 쏟아붓고있는것은 아닌지?…

한달전 동생들인 일한이와 차한이가 인천부두로동자들 여러사람들과 같이 은영의 노래를 들으러 왔었다. 아버지가 약속대로 그들을 보낸것이다. 낯익은 사람도 있었다. 은영이를 보고 혀를 차며 《선녀같고마!》하고 부르짖던 그 사람이였다. 공연이 끝나자 그들은 은영이의 목소리가 꾀꼴새같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은영은 그들이 무엇인가 아쉬워한다는것을 알아차렸다.

그 까닭을 뒤에 남았던 일한이가 암시해주었다.

《누님, 내가 좋은 노래악보를 가져왔어요. 때가 되면 우리 로동자들한테 불러줘요. 우리 로동자들은 이런 노래를 제일 좋아하거든.》

그것은 《산업건국의 노래》, 《산으로 바다로 가자》, 《밭갈이노래》, 《봄노래》 등의 악보들이였다. 북반부에서 불리우는 노래라고 했다. 하여 은영은 그 악보들을 정신없이 들여다보았다. 모두가 밝고 씩씩하고 아름답고 유순한 랑만에 넘친 노래들이였다.

노래는 그 시대의 사상감정을, 인민의 감정과 지향을 담는다. 하기에 시대와 인민의 처지에 따라 노래가 달라지군 한다. 은영은 그 몇편의 노래만 보아도 북반부의 밝은 현실이 눈앞에 생생히 그려지는것이였다. 작곡가들의 이름도 낯익고 정다왔다. 리면상선생, 은영은 그를 직접 만나본 일이 없지만 해방전 《빅타》, 《콜럼비아》, 《프리톨》레코드사에서 취입한 그의 노래들을 통하여 그를 잘 알고있었다. 한때엔 서글픈 색조가 진하던 그의 노래들이 지금은 이렇듯 희열과 랑만에 넘쳐있는것이다.

누이의 얼굴을 엿보던 일한이가 조용히 공화국북반부의 토지개혁, 산업국유화, 남녀평등권에 대하여 말해주었다. 희망의 등대를 김일성장군님께서 정치를 펴시는 북반부사회라고 하는데 어느새 일한은 림호와 같이 틀지고 의미깊게 말하는 젊은이로 숙성해있었다. 어깨가 넓어지고 울대뼈가 툭 불거졌는데 적동색의 얼굴에 진지한 표정이 떠오를 때면 옛 시절의 아버지 그대로였다.

목소리는 바리톤가수 고종우와 비슷하였다. 웅글고 부드러운 그 목소리, 진정 동생들도 천성적으로 훌륭한 성대를 가지고 나왔다. 그러나 일한이도 차한이도 부두에서 짐군노릇을 한다. 아버지와 같이 밤낮 비지땀을 흘리면서도 성악가수같은것은 꿈도 꾸지 않는다. 그 모든 꿈을 누이가 다 떠안고 성공하기를 바라고있을뿐이다. 그날 은영은 마지막 통근차가 떠날 때까지 동생들과 같이 있었다. 마지막까지 일한이는 자꾸만 북의 사회제도에 대하여, 그에 대조되는 남쪽의 정치풍토로 화제를 끌었다. 려운형선생에 대한 우익반동들의 암살사건과 유엔에 조선문제가 상정된 이후의 복잡한 정세… 이남 전지역에서 타오르고있는 항쟁의 불길… 동생의 말을 들으며 은영은 야릇한 불안에 가슴이 조여들었다. 림호를 만날 때마다 느끼군 하던 불안과 공포를 다시금 느끼는것이였다.

《쉬- 누가 들을라.》하고 은영은 주위를 살피며 말했다. 《일한아, 난 너희들 일이 겁나는구나. 그러다가 혹시…》

일한이는 어른스럽게 빙그레 웃었고 동생 차한이는 누나의 기분을 눙쳐주려고 우스개소리를 하였다.

《누나, 나 빨리 장가들구파.》

《뭐, 벌써?》

《흥, 지금 내가 몇살인지 알아?》

《아니, 너 형도 있는데 벌써부터…》

《그러니 야단아니가!》 차한이가 야살스럽게 소리쳤다. 《누나두 안가 형두 안가 그럼 난 언제 간다는거야?》

그리하여 은영은 일한이와 함께 소리내여 웃고말았다.

《알만 해. 한정애가 자꾸 꼬드기는 모양이구나.》

차한이가 황급히 중얼거렸다.

《난 요새 정애씨를 만나본적이 없는데 뭐. 누나한테 맡기지 않았어?》

《나한테 맡겼다구?》

《됐어요.》 차한이는 히물거렸다. 《그건 그렇구… 어제 아버지가 뭐랬는지 알아? 당장 누나의 머릴 얹어주겠대. 아는 사람들한텐 정식 부부라고 선포했어두 결혼식이야 못했지? 아버진 그게 내려가지 않아서 그래.》

은영은 말없이 머리를 수그렸다. 림호가 변성명하고 지하공작을 하는 형편에서 결혼식은 미국놈들을 내쫓은 다음에 해도 된다고 우기고있지만 아버지의 생각은 다른것 같다.

《그냥 그대론 지날수 없다는거야.》하고 차한은 계속했다. 《림호형한테 말하는걸 들었어. 세상에 내놓구 요란스럽게 식을 하진 못하지만 우리들끼리 간단히 모여앉자구 말이야. 어때 누나, 누나한텐 제일 반가운 소식이지?》

《아이, 이 애가 참?!…》

발차를 알리는 기적소리가 울렸다. 동생들이 급히 차에 올랐다.

《누님, 잘 있어요!》 일한이가 소리쳤다.

《누나, 좋은 꿈만 꿔!》 차한이도 웃으며 손을 저었다.

그리하여 그날이 왔다. 아버지가 《간단히 모여앉자.》고 은영이를 부른것이다. 전날 은영이 비를 맞으며 들렸던 림호의 그 2층방에서 소박한 식이 있게 된다고, 가족들도 다 참가하지 못하는 비밀의식을 섭섭해하지 말라고 림호는 말했다. 이제 곧 좋은 날이 온다고, 그날을 위해 몸바쳐 싸우는 우리들이니 리해하라고 했다. 그런데 여기에 무엇을 리해하고 말것이 있단 말인가. 또 무엇을 더 바랄게 있단 말인가! 멀고먼 사랑의 바다길에 오른 한척의 배가 목적한 항로를 끝까지 가기만 한다면야!…

눈발이 굵어졌다. 하염없이 퍼붓고있다. 모든것이 사르륵거리는 눈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건물도 사람들도 달리는 차들도 눈의 세계, 꿈의 세계로 잠겨드는듯 했다. 그 미지의 세계에서 은영은 노래부를것이다. 림호와 같이 둘이서 약속해둔 노래, 남반부사람들은 아직 모르는 그 노래를 부를것이다.

 

저기 바다로 가자 저기 바다로 가자

저기 바다로 가자

 

이 노래를 고르며 림호는 말했다.

《나는 파도, 은영씨 당신은 파도우에 나는 갈매기!…》

 

흰 물새 훨훨 파도우에 넘나들고

아득한 수평선엔 흰 돛이 아름다운

저기 저 바다로 우리 가자

 

아득한 수평선은 바로 희망의 기슭이라고 림호는 말했다. 희망의 기슭, 흰 돛이 아름다운 바다!… 그들은 이렇게 소박한, 진실한, 영원한 사랑을 노래할것이다.

어느덧 외투자락이 길우에 쌓인 눈우를 스친다. 그래도 눈발은 그치지 않는다. 따스한 눈, 축복의 눈, 은영은 걸음을 빨리하였다. 역쪽에서 새된 기적소리가 처녀를 소리쳐부르고있었다.

인천역에 내렸을 때엔 어스름이 깃들고있었다. 은영은 사방을 둘러보았다.

마중나온 사람이 있을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살펴보아야 눈에 띄는 사람이 없다. 세찬 눈발때문에 바다도 보이지 않는다.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개찰구를 빠져나온 사람들이 다 사라졌다. 2층집에서 기다리고있을지도 모른다. 은영은 그들, 아버지와 림호가 경찰들의 감시속에 있는 역에까지 나오기 힘들것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그리고 은영이야 그렇게 멀리서 오는 신부도 아니지 않는가!…

다시 걷기 시작했다. 부두에로 가는 길을 애써 기억에서 더듬으며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바로 그때 멀리서 정신없이 달려오는 사람을 보았다. 차한이였다.

금시 앞으로, 눈속에 구겨박힐것처럼 어푸러지듯 달려오고있다.

《누나!-》

은영이 기뻐서 마주 달려갔다.

《차한아!》

《누나!-》

별안간 은영은 멎어섰다. 숨이 턱에 닿아 달려온 차한의 얼굴이 온통 눈물에 젖어있는것을 본것이다. 무엇인가 불꼬치처럼 심장을 뜨끔하니 찌르는것이있었다.

《차한아.》 대번에 목이 꽉 메였다. 은영은 가까스로 숨을 돌렸다. 《왜 그러니, 무슨 일이 있었니?》

《누나, 아버지랑 형이랑… 림호형두…》

《뭐라구, 아버지랑 다 어쨌다구?》

《놈들이 끌어갔어요.》

《뭐?…》

사위가 흐릿해졌다. 아니, 이 애가 무슨 소릴?… 놈들이 왜 그들을 끌어간단 말인가?… 동생을 붙안고 눈물에 젖은 두눈을 멍하니 들여다보았다.

《다시 말해봐. 이자 뭐라구 했지?》

《누나, 이 일을 어쩌문 좋아요, 응?!》

차한이가 몸부림치는것을 보면서도 믿어지지 않았다. 끌어간다?… 왜놈들도 끌어가더니… 순간 모든것이 갑자기 리해되는듯 싶었다. 거리의 담벽과 전주대마다에 나붙었던 미군정의 포고와 림호, 일한이가 줄곧 강조하던 미국놈들에 대한 말이 떠올랐다. 차한이를 흔들어대며 몇번이고 숨차게 물었다. 그제서야 경찰놈들이 갑자기 달려들어 몽둥이로 후려치고 수갑을 채운 다음 차에 실어갔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누군가 갑자기 은영의 머리를 호되게 후려친듯 했다. 눈앞이 아찔해졌다. 퍼붓는 눈발이 뱅글거리며 곤두박질을 했다.

딛고 선 땅이 거꾸로 돌렸다.

《누나-》 차한이가 붙들며 소리쳐 울었다. 《누나!- 이 일을 어쩌문 좋아요, 예?!》

다음순간 은영은 차한이 오던 길로 달려갔다. 무엇때문에 어데로 가는지도 알지 못했다. 미친 녀자처럼 소리도 안나는 웨침에 목을 비틀고 팔을 내저으며 무릎까지 빠지는 눈속에 어푸러지기도 하면서 줄곧 허우적거렸다. 일한아, 아버지, 림호씨!… 이게 정말이란 말예요? 예?!… 차한이도 뒤따르며 《누나, 누나!-》하고 목터지게 부르짖었다.

드디여 잊을수 없는 그 2층집에 이르렀다. 낡은 목조건물이였다. 사람들이 모여서 웅성거렸다. 그들속을 헤집고 계단의 널마루를 쾅쾅 밟고 올랐다. 전날의 그 방이였다. 문은 열리진채로 있고 방안엔 낡은 옷가지들과 책들이 널려져있었다. 군화발자국들이 책뚜껑에, 낡은 신문들에도 어지럽게 찍혀져있다.

그중엔 가위로 정히 오려낸 은영의 사진도 있었다.

은영은 눈과 흙으로 짓이겨진 그 사진을 들어 팔소매로 닦았다. 림호가 날마다 마음속 이야기를 나누었을 은영이의 사진… 그리고 이것은 일한이 쓰고 다니던 허름한 모자, 저것은 아버지의 물주리, 상을 차리던 사기그릇과 병들이 깨여져 딩굴고 벽지까지도 찢어져있다.

비로소 두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두팔을 벌려 방바닥에 널린것들을 끌어안으며 몸부림쳐 울기 시작했다. 바다가 통채로 들리는듯 했다. 거센 파도가 배전을 들부시며 아우성친다. 저기 저 바다, 아득한 수평선 흰 돛이 아름다운 바다는 어데로 갔는가?!

계단의 널마루가 삐걱거렸다. 2층으로 올라온 사람들이 방안을 들여다보며 수군거렸다. 로동자들이, 아버지와 함께 일하던 로동자들이 울고있는 차한이를 붙안고 은영이를 내려다보고있었다. 그러나 은영은 그것을 알지 못했다. 누군가 말없이 잡아일으킬 때까지 그냥 방바닥만 허비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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