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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로서의 명성은 얻기 시작했으나 꿈은 희미해지고있었다. 박수갈채와 꽃다발, 끊임없이 번쩍이는 사진기의 섬광만이 꿈을 이루는것은 아니였다. 꿈이란 곧 래일이였고 사랑이였다. 그런데 요란한 박수갈채와 화려한 꽃다발이 찬사와 감격의 인사일수는 있으되 사랑, 그것을 의미하는것은 아님을 오늘 은영은 처음으로 깨닫고있는듯 했다. 진정한 사랑은 우뢰소리로 웨치거나 칠색무지개처럼 아롱다롱 채색되는것이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마음속에 고요히 간직되여 쇠물처럼 끓고있으므로 소리쳐 알릴 필요도 없거니와 화려하게 채색할 필요도 없는것이다.
은영은 강기슭의 모래불에 몸을 뉘이고 머리를 뒤로 젖힌채 저멀리 하늘가를 점도록 바라보고있었다. 불그레한 저녁노을이 소리없이 밀려드는 구름장들을 물들이고있었다. 밤에는 비가 올것 같았다. 멀리 마포나루를 떠난 나루배도 구름이 비낀 물결을 휘젓고있었다.
오늘은 극장에서의 공연도 물려있지 않아 은영은 한성중학교의 수영선수들이 훈련하는 여기 한강기슭에 끌려나왔다. 력사교원 한광수가 이제 있게 될 전국중학생들의 수영경기에 나갈 학생들을 훈련주고있는데 은영이도 함께 가자고 잡아끌었었다. 공연도 없는데 강가에 나가 푹 쉬는게 어떤가, 은영선생은 요즘 너무 무리한것 같은데 심신을 좀 쉬여야겠다고, 그런데 마음의 휴식에는 자연이상 더 좋은것이 없다면서 원하신다면 조개구이도 조직하겠노라고 꼬드겼던것이다.
그의 제의가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이였는지 모른다. 바로 은영은 오늘 여기 마포나루근방에서 대구에서 돌아오는 림호를 만나 서울시내를 거쳐 인천으로 빠져나가게 도와야 했던것이다.
여의도를 마주하고있는 마포나루는 서울시내에서 제일 한적한 강기슭이다.
그런데 림호씨는 왜 여기로 오게 되였을가. 대구에서 떠났으면 기차를 타고 올텐데?… 은영은 머리를 쥐여짰지만 도저히 그 까닭을 알수 없었다. 사실 이곳은 강폭이 좁고 물이 깊어 수영선수들의 훈련에나 안성맞춤인 곳이다. 배놀이하는 련인들에게도 그저그만이겠지만 림호는 수영이나 배놀이때문에 여기로 달려올 사람이 아닌것이다.
그때 물속에 들어가있던 력사교원 한광수가 청을 돋구어 웨쳐대였다.
《은영선생도 들어오십시오. 헤염칠줄 모르면 우리가 도와드릴테니!》
익살군인 한광수는 한시도 롱질을 하지 못하면 견디지 못하는것 같다.
《뭘 부끄러워 그러시오. 수건으로 앞을 대충 가리고 들어오시라구요!》
학생들도 덩달이 소리쳤다.
《선생님, 들어오십시오!》
《물이 깊지 않습니다. 정말입니다!》
《선생님! 물에 빠지면 우리가 건져드리겠습니다!》
《걱정말구 어서 들어오십시오!》
한성중학교는 남자중학교여서 녀학생들은 물론 녀교원들도 없다. 음악교원인 은영이만이 유일한 녀성이다. 수염난 중학생들도 있는 학교여서 은영이는 공주처럼 떠받들리우고있으나 불편한 점도 한두가지가 아니다.
은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한강철교가 있는 상류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헤염을 치라면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는것을 보여줄수 있다. 두만강류역에서 나서자란 은영이였다.
《아, 은영선생!》 한광수가 또 소리쳤다. 《어데로 도망치려구 그러시오? 예?!》
은영은 그를 돌아보며 소리내여 웃었다.
《잠간 기다리세요. 내가 이제 수영솜씨를 보여드리죠.》
강가의 모래불에 작은 풀숲이 있었다. 애어린 버드나무가지들이 암팡지게 모여앉아 함지박모양의 숲을 이룬 그곳을 등지고 은영은 옷을 벗었다. 어느덧 구름장틈새로 퍼져내린 시뻘건 저녁노을이 수영복만을 입고있는 처녀의 윤기나는 몸에서 아롱아롱 반사광을 뿌렸다. 따스한 모래불이 발밑에서 부서지고 흐트러지며 기분좋게 샤르륵거렸다. 옥같이 희고 갈걍갈걍한 처녀의 몸을 간지르며 흘러내리는 강물은 또 얼마나 따스하고 부드럽고 유정한것이랴!… 은영은 맵시나게 헤염쳐나갔다. 물결우에 튕겨오른 물방울들이 해질녘의 노을빛에 금빛은빛의 구슬마냥 부서져나가고있다.
은영이를 지켜보고있던 한광수와 학생들이 왁자하니 탄성을 질렀다. 그러건말건 은영은 계속 헤염쳐나갔다. 비록 마포나루의 강폭이 다른데보다 비교적 좁은편이긴 하지만 능란한 수영선수가 아니고서는 누구도 단숨에 헤여건널 엄두를 내지 못한다. 그러나 은영이에게는 어린시절 회령천과 두만강에서 헤염치던 경험이 있었다.
차츰 겁에 질린 목소리들이 조약돌처럼 날아오기 시작했다.
《은영선생, 이젠 돌아서요!…》
《선생님, 위험합니다.》
《거긴 물살이 셉니다. 선생님, 제발!…》
은영은 그들쪽으로 팔을 내저으며 뒤집힌 소리로 웨쳤다.
《걱정마세요!…》
사실 가수들은 아무리 급한 대목에서도 성대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소리를 뒤집어내는것을 잊지 않는것이다.
《걱정말구 약속한 조개구이나 준비하세요!》
바로 그때 얼핏 은영의 눈에 비쳐드는것이 있었다. 자기가 옷을 벗어놓은 그 버들숲가에 웬 사람의 모습이 언뜻거린것이다. 그것도 도적처럼 몰래 기여나오는듯 했다.
한강기슭을 따라 뻗어간 철길우에서 저 멀리 서빙고역으로 달리는 기차가 기적소리를 꽥 질렀다. 그 소리까지도 처녀가 벗어놓은 옷을 훔쳐가는 놈이 있다고 청을 돋구어 경고해주는듯 싶었다.
은영은 재빨리 몸을 돌렸다. 춤추듯 조자맞게 헤염치던 경쾌한 률동이 급한 박절로 바뀌였다. 머리우에서 물보라가 사방으로 휘뿌려졌다. 어떤 되지 못한 놈팽이가 옷을 걷어가는 날에는 야단이 아닐수 없다. 도둑이야!- 하고 소리치고싶지만 목이 잠기고 호흡이 딸려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어느새 여기까지 헤염쳐 왔는가. 이렇게 멀리?… 멀리서 지켜보던 한광수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는지 소리쳤다.
《은영선생, 왜 그러시오. 발에 쥐가 일지 않았어요?》
그러나 대답할수가 없다. 그럴새가 없기도 했다. 마침내 발밑에 땅이 닫는 감촉이 왔다. 그래도 계속 헤염쳐나간다. 차츰 이상한 느낌이 들어 숨을 헐떡이며 속도를 늦추었다. 강가에 벗어놓은 옷이 그대로 있는것이 보였다. 어찌된 일일가, 분명 버들숲에서 벌벌 기여나오던 사람의 모습을 본것 같은데?… 그래도 마음은 불안했다. 모래불에 오르자마자 옷을 개여놓은 곳으로 달려갔다.
모든것이 제대로였다. 은영은 옷가지들을 손에 들고 버들숲속으로 눈길을 옮겼다. 바로 그때 누군가 그속에서 낮게 부르짖었다. 《돌아보지 마십시오, 은영씨.》
귀에 익은 목소리, 분명 그것은 림호의 목소리였다. 그가 작은 버들숲속에 옹크리고있는것도 비로소 발견했다.
《지금 경찰들이》 하고 그가 계속했다. 《철길주변을 뒤지고있습니다. 이제 여기로 올겁니다. 내가… 그만 피치 못할 일때문에 뒤따르는 형사놈을 까구 달리는 기차에서 뛰여내렸는데…》
그는 더 말을 잇지 못했다. 인기척이 났던것이다. 그제서야 은영은 가까이 오는 력사교원 한광수를 발견하고 손에 들고있던 옷가지들을 림호가 숨은 버들가지우에 던지다싶이 했다.
한광수가 급히 물었다.
《은영선생, 무슨 일이 있었어요?》
《아, 아니…》
《조심하세요. 저기 경찰들이 오는데…》
《?!…》
그는 무엇때문에 조심하라고 한것인가. 혹시 버들숲에 숨은 림호를 본것이나 아닐가?… 그러나 그보다도 둔덕을 따라 내려서는 경찰들이 먼저 은영을 얼어붙게 하였다. 미국제 스리코다가 강뚝을 따라 달리며 경찰들을 부리우고있었던것이다. 은영은 서둘러 자기의 옷가지들을 버들숲우에 펴려고 했다. 그러자 림호가 낮게 부르짖었다.
《그러지 마시오. 오히려 눈에 띌수 있습니다.》
뒤쪽에서는 한광수가 소리쳤다.
《은영선생, 경찰들이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니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어떻게?… 심장이 방망이질을 하고 그 어떤 껄끄럼한것이 목구멍을 꽉 메웠다. 당황망조해하는 그의 표정을 보고 한광수가 낮게 부르짖었다.
《은영선생, 빨리 나를 쫓아버리세요. 이 망나니를 말이죠.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어요?》
비로소 머리속에 번쩍이는 생각이 있었다. 아 아, 고마운 한선생!… 은영은 손에 들고있던 옷가지들을 비자루처럼 휘두르며 벌써 뒤걸음치기 시작한 그에게로 달려들었다.
《물러가요. 썩 물러가지 못하겠어요? 이 망나니같은게!…》
한광수가 달아나기 시작했다. 자기를 마주오는 경찰과 거의 맞부딪칠듯 하면서 무어라고 게두덜거리는것이 알렸다.
은영이 역시 빽-빽 소리치며 그를 쫓아갔다.
경찰 한사람이 한광수의 덜미를 움켜잡았다.
《무슨 일이야?》
《아, 난 사실… 뭐 어쩌지 않았습니다. 정말입니다.》
《거짓말, 거짓말이예요!》 은영이 부르짖었다. 《덜돼먹은 사람, 이 사람을 혼내주셔요. 혼맹이 쑥 나가게!》
한광수의 덜미를 잡은 경찰이 은영이의 벌거벗다싶이 한 몸에서 눈길을 떼지 못하며 가까스로 신음소리를 삼켰다.
《아- 아가씨, 그러니까 이 자식이 아가씨한테 달려들어 어째보려구 하드란 말이지요?》
《예, 그래요. 바로 그랬어요.》
부끄러운 생각도 없었다. 그저 경찰의 눈을 피할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마다하지 않을것 같았다.
어느새 다른 두명의 경찰도 히물거리며 다가왔다. 그들의 음란한 눈길이 자기의 몸에 불살같이 박히는것을 느끼며 은영은 옷가지들로 드러난데를 황급히 감싸보았다. 그러나 이쪽을 가리면 아래가 드러나고 거기를 감싸면 또 웃쪽이 드러나군 했다.
《어머- 내가 어쩜 이런 꼴루!…》
눈길을 허둥거리고 달아오른 얼굴을 외로 돌리며 천천히 뒤걸음쳐갔다. 다음순간엔 급기야 몸을 돌려 림호가 숨은 작은 버들숲가로 황황히 달려갔다. 감질이 난 사나이들의 흐뭇한 너털웃음소리가 뒤따랐다.
뒤늦게야 경찰들은 한광수를 달구기 시작했다. 물속에 들어가있던 학생들도 모조리 끌어내여 따져묻는것이 보였다. 경찰들은 웃쪽의 물가에서 시간을 끌며 지싯지싯 몸을 씻고 옷을 입는 은영이를 자꾸 곁눈질하긴 했지만 누구도 가까이 올념은 못했다.
어느덧 노을빛마저 스러져가고 수면우에는 밤의 장막이 내려덮이기 시작하였다. 강건너 여의도기슭에 키높이 자란 뽀뿌라나무들도 철탑처럼 뾰족하게 대공을 찌르고있는것이 어슴푸레해졌다.
경찰들이 사라지자 림호가 덤불속에서 나왔다.
《은영씨, 고맙습니다.》
《림호씨, 정말 오래간만…》 은영은 입을 벌리며 호흡이 절박해진듯 다급히 공기를 빨아들였다. 《어마나! 피가… 어찌다 이렇게?》
그의 바지무릎이 찢겨지고 피가 말라붙은것이 보였다. 아마 달리는 렬차에서 뛰여내릴 때 심하게 다친것 같았다.
《괜찮습니다.》 림호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런데 은영씬 나를 마중하기 위해 나왔지요? 말해주십시오. 혹시 우연히 여기 나와 있은건 아니겠지요?》
은영은 머리를 끄덕이였다.
《빨리 여기를 떠나야겠어요.》
둔덕아래에서 한광수가 학생들을 먼저 떠나보내는것이 보였다. 그는 가지 않았다. 두사람이 서있는 곳으로 급히 달려오는데 그의 손엔 대두병이 쥐여있었다. 경찰들에게 쥐여박히며 모욕을 받던 그였지만 벙글써 웃고있었다.
《은영선생, 조개구이를 하자고 나와서는 이 어진 총각을 개망나니로 몰아대다니요. 너무하군요. 에- 그런들 어찌겠어요. 조개구이대신 이 술병이라도 건사해주어요. 쓸데가 있겠는데…》
그는 애써 림호쪽을 외면하며 다시금 소리없이 웃고나서 날렵한 동작으로 둔덕우로 뛰여올라갔다. 지꿎은 익살군으로만 알았던 한광수, 그는 어떤 사람인가. 무엇때문에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을 위해 그처럼 헌신적으로 나와주는것일가?… 이제 반세기이상이나 지난 뒤 그가 불굴의 통일애국투사 비전향장기수로 조국의 품에 안기게 되리라는것을, 그리하여 목메인 감격의 상봉을 하게 되리라는것을 그때 은영은 알지 못했고 또 알수도 없었다.
은영은 그가 넘겨준 술병을 기울여 으깨여진 림호의 무릎상처를 정히 씻어주었다.
《남은것은 마시세요.》
림호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였다.
《난 술을…》
《마시세요.》 은영은 고집했다. 《오늘은 내가 시키는대로 하세요. 그래야만 해요.》
바람이 불었다. 비구름이 어느새 하늘 전폭을 뒤덮고 땅을 짓눌렀다. 은영은 다리를 저는 림호를 부축하였다. 《일없어요. 날 안으세요. 그리고 누가 보거든 술취한 사람처럼 행세해야 해요. 그렇게 할수 있겠지요?》
《무섭지 않습니까?》
《아- 니요. 전혀!》
비방울이 처지기 시작했다. 서둘러야 했다. 전차를 탈가, 아니면 역으로 가야 할가?… 아직은 결심이 서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것까지 림호에게 묻고싶지는 않았다. 이제부터는 모든것이 자기에게 달려있다는것을 너무도 잘 알고있기때문이였다.
《지리산유격대에》하고 림호가 한다리를 질질 끌며 힘들게 말했다. 《은영씨같이 곱게 생긴 녀성대장이 있습니다.》
《지리산유격대?》
《예, 지리산을 비롯한 여러곳들에서 유격대들이 조직되여 미국놈들을 반대하는 싸움을 시작했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두고 보십시오. 대구를 비롯한 경향각지에서도 이제 대중적인 항쟁이 시작됩니다. 조만간에!… 미국놈들이 이 땅을 강점하고 나라의 분렬을 꾀하는데 가만히 앉아있을수가 있겠습니까!
아니, 그럴수 없습니다. 싸워야 합니다. 오랜 세월 일본놈들때문에 나라를 뺏기고 수모만을 받아온 우리 민족이 또 미국놈들때문에 고통받으며 살아야 하다니… 안되지요. 절대로!》
그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목구멍에서 금시 고함소리가 터져나올듯 흥분에 들뜬것이 알렸다.
《참 말이 빗나갔군요.》 그가 계속했다. 《지리산의 그 녀성유격대장 말입니다. 노래 또한 명창이여서 그녀를 볼 때마다 난 은영씨를 생각했군요.》
《어떤 나를요?》
《노래부르는 은영씨를.》
《어데서요?… 물론 부민관이나 우미관은 아닐테죠?》
《장소가 문제로 되는건 아니지요.》
《나도 알아요. 림호씨가 바라는건 그 녀성유격대장처럼 사람들을 불러일으키는 그런 노랠 부르는 은영이겠죠.》
림호는 놀라는듯 했다. 신음소리같이 흐느끼며 은영의 얼굴을 눈밝혀 들여다보았다.
《그새 은영씨도 무척 달라졌군요.》
《그게 나쁘세요?》
《아니, 기쁩니다. 이런 은영씨를 보게 되리라고 믿었습니다.》
《!…》
그들은 단층집들이 빼곡이 들어찬 골목길을 걷고있었다. 여기서 마포역은 멀지 않다. 역에서도 단속이 심하겠지만 번화가에서보다는 나을것이다. 점차 비방울이 굵어지기 시작했다. 그들의 이상한 거동을 보고 개들이 극성스럽게 짖어댔지만 개의치 않고 서로 껴안다싶이 하고 갔다. 비에 젖어도 좋았다. 어떤 즐거움이, 이름할수 없는 따사로움이 은영의 온몸을 덥혀주고있었다.
역에서는 마침 저녁통근차를 탈 사람들이 개찰구로 나가고있었다. 얼마전 일한이와 같이 타고가던 그 통근차였다. 은영은 서둘러 차표 두장을 사들고 개찰구쪽을 살폈다. 아닐세라 수염난 남자역원뒤에 경찰이 지켜서서 눈앞을 지나는 남자들모두를 멈춰세우고 도끼눈으로 살피는것이 보였다. 그 경찰이 렬차에서 형사를 까고 뛰여내린 림호를 찾고있다는것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아마 그자의 손엔 림호에 대한 용모파기를 적은 종이장이 쥐여져있을런지도 모른다.
은영은 잠시 입술을 깨물며 망설이다가 결연히 경찰에게로 다가갔다.
《이보세요. 절 좀 도와주시겠어요?》
경찰은 비에 젖은 은영의 얼굴을 무심히 보다가 태도를 달리했다.
《무슨 일입니까. 아가씨?》
《저기 고주망태가 된 우리 주인을 좀… 더는 끌고가지 못하겠어요. 죽은 사람처럼 축 늘어졌지 뭐예요.》
《아가씨, 미안하지만 난 공무집행중이 돼나서…》
《아이, 뭘 그러세요. 인젠 손님들도 다 지나갔는데.》 은영은 경찰의 손을 잡고 널바자쪽으로 끌었다. 《보세요. 이 지경이 됐지 뭐예요.》
그래도 경찰은 전지불로 림호의 얼굴을 살피는것을 잊지 않았다. 게슴츠레해진 림호가 한손으로 눈을 가리며 술병을 내밀었다.
《왜 그-래? 여기 수-술이 있잖아!》
《짜식!》 경찰이 역한 술내를 손으로 저으며 두덜거렸다. 《미인아가씨한테 이따위 사내라니…》
《정말 미워죽겠어.》 은영이 재빨리 받았다. 《차라리 경찰서에나 끌고갔을걸.》
《아 아, 이런것들은 시끄러워요!》
경찰은 은영이를 도와 림호를 질질 끌며 개찰구로 나갔다. 벌써 통근차가 들어서고 사람들이 벅적대며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정말 고마왔어요. 하마트면 차를 놓칠번 했네요.》
경찰은 은영이 깍듯이 머리숙여 인사하자 대수롭지 않게 손을 내젓다가 불현듯 두눈을 좁혔다.
《아, 이제야 생각나는군. 틀림없이 어데선가 봤다 했더니…》
은영은 혀가 굳어져버렸다. 고주망태역을 하던 림호도 움쭉하며 굳어지는것이 알렸다. 경찰이 젖은 손을 바지가랭이에 비비적거리는것까지 숨죽여 지켜보지 않을수 없었다. 포승줄이라도 꺼내는줄 알았던것이다.
《아가씨, 광고에 났지요?… 광고에요!》 경찰이 떠들었다. 《참 그게 무슨 광고이던지?…》
비로소 새파랗게 질리던 은영의 입술이 가느다란 미소로 떨렸다.
《생각나세요? 그럼 됐어요. 한번 꼭 찾아오세요.》
《그럼 안녕히!》
그들은 경찰의 인사를 받으며 차에 올랐다. 비로소 숨이 나갔다. 잠시후 은영은 경찰에게 손을 흔들며 상긋 웃어보이기까지 하였다.
×
인천에 내렸을 때엔 비바람이 세찼다. 어느새 그들은 흠뻑 젖어버렸다. 행인들도 눈에 띄지 않았다. 부두쪽에서 음산하게 철썩이는 파도소리만이 소란스러웠다. 온통 어둠이 뒤덮고있는 한산한 골목길을 두사람은 걷고있었다.
은영은 아버지와 동생들이 있는 곳으로 가고싶었지만 림호는 머리를 저었다.
그는 어느 점포의 문을 두드렸다. 문두드리는 소리가 규칙적이라는 느낌을 주었다. 소리없이 문이 열리고 주인이 머리를 내미는것이 보였다. 림호가 뭐라고 나직이 말하자 다시 문이 닫겼다. 은영은 실망하지 않을수 없었다. 안면있는 점포주인에게 잠시나마 쉬고 가자고 부탁하는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닌것 같다. 림호는 여전히 아무말없이 힘겹게 다리를 끌며 은영에게로 돌아섰다.
《조금만 더 갑시다.》
발밑에서는 진창이 저벅거렸다.
《지금 어데로 가고있어요. 우린요?》
은영의 물음에 림호는 가까스로 신음소리를 삼켰다.
《힘들지요? 마치 지옥으로 가는것 같지 않습니까?》
《지옥?…》 은영은 한숨을 내그었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멀고도 멀다던데요.》
《아니, 다 왔습니다.》
제발 빨리 끝났으면!… 더는 비내리는 진창길을 걷고싶지 않았다. 옷을 말리고 한잠 자고싶은 생각밖에 없었다. 림호를 끌다싶이 부축하다보니 인제는 걸음걸이도 비틀거릴 지경이였다. 밤새껏 걸은것만 같다.
림호는 골목길이 끝나는 어귀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여기 2층입니다.》
어둠속에서도 낡은 목조건물이라는것이 알렸다.
림호의 묻는듯 한 시선에 은영은 《좋아요.》하고 시진하게 말했다. 림호를 부축하여 2층계단을 밟고 올라갔다. 려관인가, 아니면 림호가 말하던 지옥의 호텔인가?… 그 어데건 상관할바가 아니다. 널마루가 삐걱거렸다. 림호가 열쇠로 문을 열 때에야 피끗 머리속을 스쳐가는 생각이 있었다. 이전에 림호가 거처하던 집에 온것이다. 에그머니! 어쩌문 우린 늘 이렇게 깊은 밤에만 만나야 하는걸가. 우리의 상봉은 늘 이렇게 비밀로 되여야만 하는것일가?… 비좁고 곰팡이내가 코를 찌르는 방이였다. 거기에 석유냄새까지 섞여 이마살을 찡그리지 않을수 없었다.
림호가 방등밑의 성냥을 그어 불을 켰다. 생각보다는 깨끗했다. 구석쪽에 낡은 군용모포가 개여져있고 앉은뱅이책상이 방가운데 있을뿐 반반했다. 앉은뱅이책상우에 두툼한 책들이 되는대로 놓여있어 그가 밤마다 여기서 글을 쓰고 공부했다는것을 알수 있었다. 아마도 이 방은 림호의 아지트인듯 했다. 구석쪽에 세면기가 하나 있을뿐 독신자의 어수선한 생활에 붙어다녀야 할 그릇따위도 눈에 띄지 않았다.
림호가 젖은 상의를 벗어 벽에 박아놓은 못에 걸었다. 거기에는 림호의 낡은 옷가지들이 걸려있었다.
《은영씨도 벗으십시오.》 하고 말하던 림호가 그만 굳어졌다.
《참 이걸 어쩐다?!》
은영의 치마자락에서도 물이 뚝뚝 떨어지고있었다. 난감한 일이 아닐수 없다. 처녀가 갈아입을 옷이 없는것이다.
림호가 벽에 걸린 옷가지들을 벗겼다. 그리고는 무엇을 생각하는지 이것저것 살피며 망설이고있었다. 은영은 눈길을 돌렸다. 그가 무엇을 생각하고있는지 뻔하였다. 은영이에게 갈아입을 옷을 주려 하나 적당한것이 없어 그럴것이다.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참을수 없이 오한이 나고있다. 그런데도 림호는 계속 망설이고만 있다. 바보! 아무려면 뭐라나. 몸이 떨려서 죽을 지경인데!…
마침내 림호가 움켜쥐고있던 옷과 구석쪽의 세면기를 은영의 발앞에 놓았다.
《변변치 않지만 갈아입으십시오.》
림호는 상한 다리를 힘겹게 움직이며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등불이 너울거렸다. 은영은 까딱 움직이지 않고있었다. 힘들게 계단을 밟고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어데로 가는가. 멀찍이 달아나려는것인가?… 삐걱거리는 널마루의 신음소리, 마지못해 움직이는듯 한 발자국소리, 드디여 한숨 돌리느라고 멎어서는것 같았다. 그다음은 알수 없다. 옷을 짜는것인지…
비로소 은영은 웃옷을 벗어 림호의것과 나란히 못에 걸었다. 속옷은 눅눅했어도 갈아입지 않았다. 치마자락을 손으로 훑으며 허리를 굽히다가 그만 놀라운것을 발견했다. 앉은뱅이책상우에 책들과 함께 신문에서 오려낸 사진들이 끼워있었던것이다. 동그랗게 오려낸것이 있는가 하면 큰것도 있고 작은것도 있다. 모두가 은영이를 찍은 사진들이였다. 은영은 그것들을 하나하나 여겨보았다. 이 사진들을 들여다보면서 그는 무엇을 생각하였을가?… 림호의 눈으로 자기의 모습을 보려고 애써보았다. 여기서 제일 마음에 든 사진은 어느것일가?… 모두가 노래를 부르는 은영의 모습들이다. 멀리서 찍은것도 있고 가까이에서 코구멍이 들여다보이게 밑에서 우로 올려찍은것도 있다. 이것일가. 이 사진이 제일 우에 있었으니 이게 제일 마음에 들었을가?…
그때 문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저… 성냥을 두고 나와서…》
림호의 떨리는 목소리였다. 성냥을 가지고 나가 전번처럼 밖에서 담배와 함께 밤을 새우려는것인가?… 은영은 말없이 문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가만히 숨을 죽였다.
정적… 림호의 숨소리까지 가려들을수 있었다. 그런데 그는 무엇이 무서워 들어오지 못하는걸가?… 문은 걸려있지 않다. 림호는 저절로 문을 열고 나갔지만 은영의 허락없이는 들어오지 못한다.
《들어오세요.》 은영은 조용히 웃었다. 아니 웃으려 했다. 《난 모르겠어요. 어데다 두었는지…》
그래도 쭈밋거린다. 은영이 문을 활 열었다. 순간 밤바람이 획 쓸어들며 등불을 꺼버렸다.
《어마나!…》 은영이의 가벼운 부르짖음, 림호가 눈먼 사람처럼 사방을 더듬으며 들어와 어둠속에서 꾸무적거린다.
《익크!》 이번엔 림호의 억눌린 목소리, 등잔을 엎지른것 같다. 석유냄새가 코를 찌른다. 《제길, 이게 어디 숨어있는지…》
림호의 목소리같지 않다. 늙은이의 목소리이다. 사람의 목소리가 한순간에 그처럼 변할수도 있는가?… 마침내 성냥을 찾아쥔 그가 불을 켜려고 했다. 은영이 또 가늘게 부르짖었다.
《가만, 켜지 마세요! 그러다 불이 당기면 어쩔려구.》
림호는 굳어졌다. 끈끈한 어둠이 그들을 휘감았다.
기괴한 정적… 둘 다 까딱 움직이지 않고 서있었다. 순간이 1년맞잡이로 길어보였다. 참다 못해 림호가 또 움직이였다. 자칫하면 사방에 기름칠을 할수 있다.
《조심하세요.》 은영이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쪽으로… 내 손을 잡고 이리 오세요.》
림호가 등잔을 엎지른 곳을 피해 넘어왔다. 조심하세요. 조심!… 그러나 비좁은 방에서 어떻게 하는것이 조심하는것으로 된단 말인가?… 인제는 더 물러날데도 없다. 두사람은 손을 맞잡은채로 마주 서있었다. 림호가 그 손을 놓아주지 않고있다. 꼭 잡아쥐고 장승처럼 버티고있다. 풀무처럼 씩씩거리는 숨소리가 폭풍쳐왔다. 은영은 누군가 목을 조여대는것처럼 허덕이였다. 무엇인가 상상할수 없이 무서운것이 오고있었다. 크고 격하고 엄청난것이 급작스레, 소리없이 들이닥치고있었다. 당장 문을 박차고 뛰쳐나가지 않으면 여기서 죽을것만 같았다. 그러나 몸은 이미 얼어붙어있었다. 높아가는 숨결만이 살아있다는 증거이다.
사랑에도 용기는 필요하다.
《은영씨.》림호가 갈린 소리를 짜냈다. 《난…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은영씨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은영은 허덕이다 못해 그냥 노그라지고 꺼져버리는것을 느꼈다.
《아! 림호씨, 난…》 불같은 속삭임에 목이 메였다. 《난 정말 뭐라구 해야 할지…》
《말해주십시오. 나를 사랑한다고.》
《아니, 난…》 은영은 숨이 막혀 죽을것만 같았다. 《난 정말…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 난…》
《자 어서, 은영씨!》
림호가 그의 어깨를 그러쥐며 속삭이더니 별안간 경련이 이는듯 손바닥을 오그리였다.
《아니 이거?… 아직도 젖은 옷을 입고있군요. 그러다 감기에라도 걸리면 어쩔려구…》
은영은 사시나무떨듯 하고있었다.
《어쩌믄 조- 좋을가요?…》
은영은 자기의 목소리조차 가려듣지 못했다. 그것은 그저 입으로가 아니라 마음속으로 터친 가는 속삭임이였는지도 모른다.
《뭘 말입니까?》 림호의 물음.
《이 옷을…》
무서운 흐느낌소리… 림호도 떨고있었다. 말도 못하고 온몸을 부르르 떨기만 했다. 정녕 사랑을 나누는 속삭임이야말로 얼마나 단순한것일가. 이들이 나눈 말마디들을 그대로 글로 옮기면 그야말로 어리석고 유치한 말들로 여겨질것이다. 하지만 뜨겁게 달아오른 련인들이 말로써 다 하지 못하는것을 불같은 입김이 전해주고있지 않는가!… 하여 먼저 림호가 속삭이였다.
《안되겠습니다. 이대로는…》
인두같이 달아오른 림호의 손이 더듬더듬 움직이고있다. 은영의 어깨에, 목에, 가슴에 와닿는 그 손은 활활 타는 불덩어리 그대로였다. 누가 먼저 신음했는지 알지 못했다. 림호가 그랬는지 은영이 그랬는지… 신음하고 흐느끼며 은영은 몸부림쳤다. 그를 떠밀치고 뿌리치는가 하면 더욱더 힘껏 매달리고 끄당기며 모지름썼다. 모든것이 활활 불타고있었다.
부두쪽에서 긴 배고동소리가 울려왔다. 어느 먼바다에로의 항행을 알리는 소리일가. 웅글고 깊고 후더운 소리, 이제 한척의 배가 파도를 헤가르며 대양을 넘어갈것이다. 은영이 타고있는 한척의 배도 사랑의 바다에 출발을 고하였다. 멀고먼 항로를 가야만 하는 배… 어데까지 가야 하는지는 알수가 없다. 그러나 가고 또 갈것이다. 그 길에서 사나운 파도가 길길이 날뛰며 배전을 들부신다 해도 언제든 바다를 탓하진 않으리라. 바다는 한시도 잠들줄 모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