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그날 수미는 명가수들의 독창무대에 은영이를 초청하는 일을 자기가 맡고 찾아왔었다. 혼자서 오고싶었으나 제주도에서 방금 돌아온 고종우(해방후에는 제주극장에서 간청하여 눌러있었다고 한다.)가 은영씨의 출연을 꼭 보고싶다 하여 함께 왔는데 그런 일이 벌어졌던것이다. 그 녀자의 경우에는 가극무대에 고종우와 은영이가 함께 출연하는것이 결코 바람직한 일은 아니였으리라. 아마도 처음부터 수미가 예감하고있던 무서운 일이 시작된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은영은 그 녀자가 무대에 나선 두사람을 얼마나 고통스러운 마음을 안고 바라보고있었는지 알지 못했다. 그런것은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러한 은영이기에 김해송부부의 초청에도 선뜻 응했다. 김해송의 KPK악단이 전문 미군만 상대하여 공연하고있었다는것도 생각지 않았다. 바야흐로 인기의 절정에 오르는 은영이였다. 아버지와 림호의 부탁도 까맣게 잊고있었다. 그리하여 자기가 헤여날길 없는 미궁속으로 한걸음 발을 내짚고있다는것도 알수 없었다.

서울 광화문거리의 부민관에서 열린 명가수들의 독창무대는 대성황리에 진행되였다. 《동아일보》를 비롯한 많은 신문들이 이에 대하여 대서특필하였는데 그중의 한 신문은 이렇게 썼다.

 

《…20년대부터 우리 가요계를 풍미해온 인기가수 리란영은 코소리의 매력과 간드러지는듯 애련한 창법을 바탕으로 일면 섹스리하게 노래를 불러 파란많던 지나간 세월의 추억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역시 관중을 기쁘게 한것은 신인가수 김은영양의 출연이였다. 미스 김이 부른 노래들 <봉선화>와 <꾀꼴새>에서 그녀는 특이한 음색과 창법으로 새로운 음악세계를 열어보였다고 말할수 있다. 은영양은 목소리로만 노래하는것이 아니다. 조화로운 률동과 웃음을 담은 두눈으로도 노래하고있다. 그 녀가 6청을 받고나서 관중에게 감사의 정을 담아 인사하고 들어갈 때 우리는 일약 가요계의 스타(별)로 부상한 어엿한 모습을 엿볼수 있었다.…》

 

신문은 소개를 맡은 박수미에 대해서도 언급하는것을 잊지 않았다. 기사의 마감은 의미심장하게 이렇게 끝맺었다.

 

《공연을 조직한 김플레이보이(김해송)는 오늘까지 미국식 뮤직스타일(음악형식)을 기본으로 한 레파토리로 미군만 전문상대해 그들로부터 대환영을 받아왔었다. 그러나 그때문에 민중의 랭대도 없지 않았으므로 이번 무대를 빌어 그는 대중의 량해도 얻을 겸 미군과의 교제도 이어갈 타산이였음을 고백하였다. 9월의 이 무대가 바로 미군상륙일을 기념하여 진행된것이라며 그는 대만족을 표시하였다.…》

 

김해송만이 아니라 은영이도 만족해했다. 명가수들만 선발된 무대에서 역시 인기의 절정에 올랐던것이다. 문돌쩌귀에서 불이 일지경이였다. 신문기자들이 쉴새없이 드나들고 사진기의 섬광도 쉴새없이 번쩍이였다. 대학생들, 관리들, 상인들과 문예인들, 무직청년들까지 찾아들었다. 꽃송이는 물론 쪽지편지도 있었다. 모든 사람이 은영이를 선망의 눈길로 바라보고있는듯 싶었다. 그러나 신문을 읽고 격노한 사람들도 있다는것을 그는 알지 못했다.

그날은 비가 내리고있었다. 찌는듯 하던 무더위가 계속되더니 돌연 서쪽으로부터 비구름이 몰려오며 우뢰질을 하기 시작했다. 장마비가 시작된것이였다.

그날은 비가 종일 그치지 않고 구질구질 내렸다. 공연을 마치고 분장실에서 나와 하숙집으로 돌아가려는데 고종우가 앞을 막으며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바래드릴가요?… 비가 옵니다.》

은영은 대수롭지 않게 잘라 말했다.

《괜찮아요. 학생들이 기다리는걸요.》

《학생들은 없습니다.》 고종우가 어줍어하며 계속했다. 《학생들대신에 웬사람이 아까부터 기다리고있습니다. 어쩐지 그가 미타해서…》

은영은 그의 점잖은 태도며 세련된 옷차림을 재빨리 여겨보았다. 그는 지금도 제르몬역을 맡고있다. 언제 보나 단정하고 례절바른, 흠잡을데가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늦은 밤에 길동무가 되여주겠다고 하는 말에는 동의하기가 저어되였다. 그 누군가의 눈길이 자기의 동요하는 표정을, 혼란된 마음을 빤히 들여다보는것만 같았다.

《고맙지만…》하고 은영은 머리를 숙이며 기여들어가는 목소리로 속삭이듯 하였다. 《전 오늘 어데 들릴데가 있어요.》

다시금 깍듯이 목례를 하고 은영은 재빨리 그의 앞을 지나갔다.

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학생들도, 기다린다던 사람도 없었다. 비소리만 소연했다. 음산한 날씨였다. 은영은 우산을 펴들고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어쩐지 마음이 쓸쓸해졌다. 이렇게 쓸쓸해보기는 처음인것 같다. 누가 기다렸을가. 혹시 전날처럼 림호가 찾아온것은 아닐가? 그런데 그는 지금 어데서 무엇을 하고있을가?…

극장뒤쪽의 어둑스레한 곳에서 나서는데 먼곳의 외등이 키가 늘씬한 젊은이를 비쳐주었다. 그 젊은이는 웬 녀자와 마주서서 이야기를 하고있는데 쌍태머리로 미루어 처녀같았다. 저들이 나를 기다리고있었단 말인가?… 가슴에 파고드는 아쉬운 마음을 누르며 그들을 향해 천천히 마주갔다. 그러자 젊은이가 머리를 홱 돌려보는것이 알렸다.

《일한이!》 뜨거운 속삭임에 목이 메였다. 《일한이로구나!…》

일한이가 마주 달려왔다. 은영이도 달려갔다. 달려가서는 우뚝 멎어섰다. 어쩌문!… 그새 이렇게도 의젓해지다니. 한창나이 젊은이들은 여름철의 백양나무처럼 날을 따라 쑥쑥 자라며 자기의 모습을 달리하는것만 같았다.

《누님, 오래간만에 보는구만요.》

몇달새 목소리도 더 굵어졌다.

《같이 온건 누구지?》

은영이는 뒤쪽에서 발끝으로 땅바닥을 끄적거리고있는 처녀를 눈짓했다.

일한이가 고개를 돌리며 처녀를 불렀다.

《정애씨, 어서 와 인사를 해야지. 우리 누님이요.》

은영은 가까이 다가와 나부시 인사하는 처녀를 눈여겨 살폈다. 어둠속에서도 처녀가 귀염상스럽게 생겼다는것을 알아볼수 있었다.

《정애라구?》

《예, 한정애.》

《그런데》하고 은영은 웃으며 일한이를 돌아보았다. 《이렇게 같이 왔을적엔 무슨 사연이 있겠지?》

《저…》 일한이가 히죽이 웃으며 말했다. 《차한이가 하도 조르길래 같이 왔어요.》

《차한이가?》

《정애씬 차한이와 친한 동무인데…》

《?!…》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형님인 일한이를 뛰여넘어 동생이 벌써 녀동무를 가지고있는것이다.

《사실 정애씬》 하고 일한이 계속했다. 《목소리가 고와서 서울방송공사에서도 쓰겠다구 했는데 본인은 꼭 누님처럼 가수가 되겠다고 한다지 않아요. 그러니 누님이 좀 도와줘요.》

목소리만 고와서 가수가 되는것은 아니다. 훌륭한 가수가 되기 위해서는 청음을 비롯한 예민한 감각과 호흡 그리고 자기의 느낌과 감정을 소리로 내뿜는 표현력과 성량, 창법도 가져야만 한다. 은영은 다시금 처녀의 모습을 재빨리 훑었다. 처녀는, 한정애라고 부르는 이 처녀는 소박하고도 애련한 모습이다.

저고리밑에 확연히 부풀어오르고있는 봉긋한 가슴에도 불구하고 아직 18살은 넘기지 않았을것 같다. 그런데 일한이는 올해 23살, 그의 동생 차한이는 21살… 어야나, 벌써!… 은영은 새삼스럽게 자기의 나이도 상기하지 않을수 없었다. 자기가 25살이 되였다는것, 어느덧 과년한 처녀로 불리우게 되였음을 깨닫고 어마지두 놀라는 마음이였다. 여적 한번도 결혼이요, 가정이요 하는 생각을 해보지 않던 은영이였다.

《그래서》 은영이 혼자소리처럼 말했다. 《동생의 부탁을 가지고 왔다는거지? 언제한번 꿈쩍도 하지 않던 일한이가…》

《아니, 정애씨 일은 겸사겸사해서 같이 온거구 누님, 아버지가 누님을 부르셔요.》

《아버지가?… 아니 지금 어데 계시게?》

《나랑 같이 가면 알게 되여요.》 웬일인지 일한이는 늙은이처럼 한숨을 내그었다. 《아버지가 오시겠다는걸 내가 대신 왔지 뭐. 아버진 몹시 앓구계셔요.》

《?…》

일한이는 비물이 줄줄 흐르는 머리를 손으로 쓸어넘겼다. 은영이 우산을 씌우려 하자 그는 그것을 빼앗다싶이 하고 높이 들었다.

《누님, 가면서 얘기해요.》

은영은 우산밑에 들어섰으나 정애는 한사코 뒤에 떨어졌다.

《얘기하셔요. 전 천천히…》

일한이도 처녀가 뒤따르는것이 당연하다는 태도였다.

《내버려둬요.》

일한이 그처럼 무심히, 대수롭지 않게 뇌까린것은 어린 처녀를 무시해서가 아니였다. 보다 중요한 화제가 있다는것을 암시하는듯 킁킁 코김을 불며 서둘러 아버지병세에 대한 말부터 꺼냈다.

은영은 허전한 생각이 시꺼먼 그림자처럼 가슴에 드리우는것을 느꼈다. 동생들이 이렇게 자라도록 자기는 명가수의 꿈속에만 머물러있었다는것을 자인하지 않을수 없었다. 노래만을 생각했고 음악만을 사랑했다. 어릴 때부터 진정 마음속으로 사랑하고있었다면 아버지와 그리고…

별안간 아버지가 사무치게 그리웠다. 아버지는 나를 어떻게 맞아줄가?… 어릴 때부터 아버지로부터 애틋한 사랑을 목마르게 갈구해온 은영이였다. 하지만 언제든 아버지는 딸의 응석을 받아주지 않았고 매질도 서슴지 않았으니 그것이 어린 마음에도 한없이 서글프고 괴로와 눈물을 머금군 했다.

지금 그 아버지병세가 심하다 하니 생각만 해도 가슴이 조여들고 숨이 차올랐다. 혹시나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딸을 만나보려 부른것은 아닐가 하는 생각에 무엇인가 심장에 사무쳐오는것이 있었다. 하여 은영은 혀가 잘 돌아가지 않는듯 떠듬거리며 아버지가 왜 급히 찾는가고 물었다.

《아버진 누님을 꼭 만나야 한다구 했어요.》 일한이가 목이 잠긴듯 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가보면 알게 될거예요.》

은영은 동생의 말이 올곧잖게 들리였으나 입을 다물고 말았다.

늦은 길손들이 바삐 서둘며 정류소로, 골목길로 가고있었다. 그러나 그들만은 작은 녀자우산밑에서 서로 언짢아지는 마음을 숨기며 천천히 걸음을 옮기고있었다. 여름밤의 시뿌득한 하늘은 끊임없이 비를 뿌렸다. 하건만 불밝은 호텔창문에서는 축음기소리가 야지러지게 흘러나왔다. 미군고위장교전용의 고급호텔이였다. 껌벅거리는 불빛에 어울려 간드러진 웃음소리도 새여나왔다.

비바람에 떨어지는 나무잎사귀들이 그 불빛과 웃음에 쫓기듯 포석우로 굴다가 물에 젖어들군 하였다.

갑자기 일한이 머리를 홱 돌렸다. 뒤쪽에서 미군트럭들이 물보라를 일구며 달려왔던것이다. 풍을 친 차들이 련속 꼬리를 물었다. 스리코다에 탄 미군병정들이 뭐라고 꽥꽥 소리지르고 하모니카를 불어대였다. 마치 적의 아성을 돌파하고 미친듯이 기뻐날뛰는것과 같았다.

일한의 눈길이 그쪽에서 떨어질줄 몰랐다. 마지막트럭이 멀어져가자 은영을 쳐다보며 침울하게 물었다.

《누님은 미국을 어떻게 생각해요?》

《나?》 뜻하지 않던 물음에 은영은 혼란되였다. 《그런 문젠 아직… 깊이 생각해보지 않아서…》

《알아야 해.》 별안간 일한의 눈빛이 감때사납게 번뜩이였다. 깍듯이 굴던 말투도 몰풍스러워졌다. 《지금 어떤 사람들은 미국을 해방자요, 벗이요 하는데 이 땅을 강점한 침략자들이라는걸 알아야 해!》

은영은 잠시 무엇인가 상기하고 조용히, 시진하게 웃었다.

《림호씨도 그러더니…》

일한이가 힐난하는 어조로 재빨리 받았다.

《그런데 누님은 림호형의 말을 귀등으로 들었지.》

《?…》

일한이 왜 성이 났는지 알수 없었다. 름름하게 자란 동생의 격해진 마음을 풀어주어야 했다. 그런데 은영은 아직 그에게 해야 할 적당한 말을 찾을수 없었다. 하여 은영은 갑자기 생각난듯 화제를 돌렸다.

《참 내가 이자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아? 저 처녀말이지… 한정애! 내 오레미가 되지 않을가 하는 생각을 했어.》

《오레미?》

《그런데 일한인 아직 사귀고있는 처녀가 없는게지?》

일한은 뜻밖인듯 흥흥 코김을 불고나서 몇걸음 사이를 두고 뒤따라오는 처녀를 피끗 돌아보았다.

《저런 처녀말예요?》

《때가 되지 않았을가?》

《그럴수도 있지요. 그렇지만 난 누님일이 더 걱정이군요.》

《넌 어른이 다 됐구나.》

《그런줄 여태 몰랐어요?》

《몰랐다. 모르고있었어.》

잠시 침묵이 흘렀다. 걸음이 떠지고있었다. 그러나 둘 다 그것을 느끼지 못했다. 갑자기 은영이 깜짝 놀라며 사방을 휘둘러보았다.

《어쩌나! 그만 반대쪽으로 왔구나.》

《아니, 바로 왔어요.》

《뭐?》

《우린 역으로 가야 해요. 누님한테 미리 말해준다는게 그만… 이제 마지막 통근차가 있어요.》

일한이가 걸음을 빨리하였다. 그러면서 자기가 동생 차한이와 같이 인천항에서 하역작업을 하는것도 아버지의 공작상 필요에 의해 시작된 일임을 암시하고나서 이렇게 계속했다.

《아버진 인천지구지하조직을 책임지구있어요.》

《그게 어떤 조직인데?》

《이제 다 알게 돼요.》 일한이는 우정 걸음을 늦추며 말머리를 돌렸다. 《누님은 아까 내가 묻는 말에 대답을 안했지요? 미국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는 물음에… 솔직히 누님은 지금 너무 천진하다구 할가… 이렇게 말한다구 성내지 말아요. 그렇지만 누님은 미국놈들이 왜 이 땅을 타고 앉아 주인행세를 하는지 알아야 해요. 놈들은 며칠전 인천에서만도 저들의 무기, 탄약을 부리는 작업을 거부했다고 해서 경찰을 내몰아 부두로동자 6명을 총으로 쏘아죽였어요. 그런데 바로 그때 누님은 미군이 이 땅을 강점한 날을 기념하여 노래를 불렀지요. 부민관에서.》

《뭐라구? 이자 미군… 뭐라구?》

은영이로서는 드물게 보는 날카로운 반응이였다.

《여기에 다 있는데 뭐.》 일한이 주머니에서 마구 구겨진 신문을 꺼내들었다. 《이 신문에 난걸 누님은 보지 못했어요?》

《아니야!》 은영은 부르짖었다. 《우린 명가수들의 무대에 초청받고 출연했던거야. 거기엔 미국사람들이 없었다. 난 하나도 보지 못했어, 전연!》

그러자 일한이 그를 붙들고 낮고도 준절하게 속삭이였다.

《그러기에 알아야 한다는거예요. 눈을 똑바로 뜨고 봐야 해요. 지금 누님은 롱락되고있어요.》

《롱락?》

《그래요. 이 신문을 보고 아버지가 얼마나 괴로워했는지 알기나 해요? 앓고계시는 아버지가!… 오죽했으면 당장 누나한테 달려오려고 했겠어요!》

《?…》

화끈 달아올랐던 은영이의 얼굴을 비바람이 후려쳤다. 휘청거리며 바닥에 떨어진 우산을 들려다 말고 우두커니 서버렸다. 무섭게 성난 아버지의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세찬 비줄기가 곱게 빗은 머리에, 창백해진 볼과 목에 줄곧 휘뿌려졌다. 일한이 우산을 들어주었으나 그것을 뿌리치며 얼굴을 싸쥐고 말았다. 미군강점 한돐기념이라는 말이 앙칼진 채찍소리처럼 귀전에 메아리쳤다. 어쩌면 이런 일이?… 입으로 쓸어드는 비물을 씹어삼키며 그는 몸부림쳤다. 그런줄도 모르고 얼마나 만족해했던가. 인기의 절정?!… 그 절정이 이렇듯 아찔한 낭떠러지였단 말인가?!…

대합실에 들어가서야 비로소 신문의 글줄을 자자구구 더듬어보았다. 눈이 바로 서지 않았다. 격노한 아버지의 얼굴만이 희뿌예진 망막속에 나타나군 하였다.

언젠가 아버지를 공포에 질려 바라보던 일도 떠올랐다. 그것은 15살의 은영이가 함흥영생녀중을 중도에서 그만두었을 때였다. 사실은 제때에 학비를 대지 못하는것때문에 수업을 포기하고 집에 돌아가고말았었다. 어머니를 도와 농사일이나 돕자고 했던것이다. 채옥선생을 구원하고 일본인 광업주식회사 사장의 별장에 불을 지른 아버지가 두만강 건너 어데론가 사라졌을 때의 일이였다.

한밤중에 어머니가 은영이를 깨워 두만강기슭으로 끌고갔다. 영문을 알수 없었던 은영이는 물결소리만 어수선하게 울리는 밤의 강물을 공포에 질려 바라보았다.

《엄마, 왜 그래요. 우린 지금 어데루 가나요?》

《나두 모르겠다. 무슨 도깨비감투끈인지.》 어머니는 딸의 손목을 꼭 잡고 허우적거렸다. 《계집애가 무슨 큰일을 치겠다구 그리두 노발대발하는지, 원!》

《누가요, 누가 노발대발하나요?》

《가보문 알게 아니냐. 지절대긴…》

남정들처럼 담찬데다가 일손이 걸싸고 입심도 센 어머니였다. 그런데 그날만은 웬일인지 자꾸만 발을 걸채이며 허둥거리는것이 놀라왔다.

어머니는 딸을 칼벼랑으로 끌고갔다. 바로 거기서 집을 나간 아버지가 딸을 기다리고있었던것이다.

비린내 섞인 바람이 옷자락을 날리며 윙윙거렸다. 별빛하나 없는 하늘로부터 밤의 서늘한 기운이 흘러왔다. 희끗희끗 갈기를 날리는 물결우에서는 이따금 시퍼런 린광이 펀뜻거리며 은영이의 마음을 옥죄이였다. 그러나 더더욱 무서웠던것은 아버지의 모습이였다. 머리에 수건을 질끈 동이고 어깨에는 망태기를 지였는데 어데론가 먼길을 가던 걸음인듯 싶었다. 오래간만에 만나는 딸을 보고도 말 한마디 없었다.

《애를 데려왔수다.》 어머니가 말했다. 《귀밑에 피도 안마른걸 어쩔랴구 그러시우?》

아버지는 아무말없이 은영이를 벼랑끝으로 잡아끌었다. 겁에 질린 은영이가 혀를 깨물고 뒤따르던 어머니는 목쉰 소리로 부르짖었다.

《어이구! 이게 무슨 망녕이요?》

아버지는 먼저 매몰스럽게 번뜩이는 눈빛으로 어머니의 울부짖음소리를 눌러버렸다.

《잠자쿠 있소. 떠들지 말구!》

은영은 벅찬 공포로 하여 숨조차 쉬는것 같지 않았다. 발밑에서는 거센 물결이 바위벽을 치며 철썩이였다. 멀리 밤하늘에서 소리도 없는 시퍼런 번개가 꿈틀거린것은 그 순간이였다.

《얘야.》 드디여 아버지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꽉새가 제 새끼들에게 어떻게 나는 법을 배워주는지 내 이미 말했지?… 바로 이런 벼랑우에서 새끼들을 떨구어버린다. 하나하나 밀쳐서 떨구며 자, 하늘을 향해 날아라! 하고 웨친단 말이다. 그 새끼들이 날개를 퍼득거리며 하늘을 날면 꽉새가 되는거구 날개를 펴지 못하면 떨어져 죽고마는거야.》

아버지는 무시무시하게 끓고있는 벼랑밑의 물결속으로 딸을 밀쳐 떨어뜨릴듯 한 기상이였다. 가슴이 졸아들다 못해 마비되여버린 은영이는 그저 밑창없는 낭떠러지밑으로 굴러내릴 죽음의 순간을 기다릴뿐이였다.

그런데 별안간 실로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그렇듯 무섭게 굴던 아버지가 오돌오돌 떨고있는 딸을 꽉 껴안았던것이다.

《은영아, 얘야.》 아버지의 목소리도 달라진듯 하였다. 《내가 너한테 해줄말은 이것밖에 없구나. 날아야 한다. 하늘높이 날아야 한다. 집안가산을 다 팔아서라도 너 하나만은 내세우고싶었는데 학비가 없다구 다 집어팽개치구 돌아오다니 그게 될 말이냐. 어떻게 해서든 공불 해야 한다. 네 재간을 그저 두엄더미속에 처박아버릴순 없어. 이제 꼭 좋은 세상이 온다. 네가 좋아하는 노래에서처럼 하늘의 밝은 태양이 비칠 그날은 꼭 온다. 이걸 잊지 말아라.》

돌이켜보면 아버지는 아마 그 무렵에 림호가 말하던 조국광복회회원과 연줄이 맺어져있은것 같다. 그러나 어린 딸에게 그 이상은 말해주지 않았다. 가슴에 꽉 껴안고 이상한 목소리로 노래의 한구절을 속삭일뿐이였다.

 

오 밝은 태양 너 참 아름답다

폭풍이 지난 후 너 더욱 찬란해

 

실로 사연깊은 노래였다. 은영이는 아버지의 구두솔같이 껄껄한 수염이 자기의 여린 볼따구니살을 찌르는 감촉을 느끼며 소리없이 울고있었다.

《얘야, 너도 불러라.》 아버지가 속삭이였다. 《밝은 해님 어서 뜨라고 소리쳐 불러봐!》

밤의 두만강은 소연하고 무시무시했지만 어린 은영의 마음은 후더웠다. 아버지의 품에 안겨 아버지와 함께 시원한 바람을 마시고 있는것이 꿈만 같았다.

어느덧 두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였다. 그리하여 저 멀리 이어진 강물우에서 불끈 불덩어리가 솟아오르는 모양을 생생히 그려보면서 아버지와 같이 노래를 불렀다.

 

시원한 바람 솔솔 불어오고

하늘의 밝은 해는 비친다

 

뒤쪽에서는 어느새 바위턱에 퍼더버리고 주저앉은 어머니가 탄식조로 넉두리를 하고있었다.

《짧은 밤에 만경타령이라더니 원, 이 에미 간이 뒤집히게 해놓구선 생뚱같이 타령은 무슨 타령이요?》

그날의 일이 문득 떠오른것은 무엇때문일가. 그때부터 은영은 거의나 아버지와 떨어져있었다. 지금은 어떤 모습으로 나를 맞아줄가? 오늘은 이 딸을 어떻게 벌하려 하실가?… 분노한 아버지, 무섭게 변모된 아버지의 얼굴만 생각해도 등골이 서늘해진다.

통근차를 타고 갈 사람들이, 공무원들과 철도로동자들, 학생들이 은영이를 두고 저들끼리 뭐라고 수군거렸지만 줄곧 한가지 생각에만 묻혀있었다. 기차에 올라 자리잡고 앉은 후에도 어두운 창밖만을 응시하며 까딱 움직이지 않고있었다.…

 

×

 

아버지는 부두로동자들이 들어있는 함바집에서 여러 사람과 마주앉아 무엇인가 토론하고있었다. 남포등의 불빛에 비쳐진 아버지는 그새 퍼그나 늙고 병약해진 모습이였다. 볕에 그을고 고된 로동과 병고로 검누른 얼굴에 뼈만 앙상하였다. 방금 희생된 사람들의 가족들을 돌봐주는 문제를 토의하던중이였다. 담배연기가 꽉 차있어 숨이 막혔다.

《아버지.》 은영이가 조용히 불렀다. 《제가, 은영이가 왔어요.》

그때에야 아버지는 문앞에 서있는 딸을 알아보았다. 누덕누덕해진 마다라스우에서 엉거주춤 일어서더니 일시에 머리를 돌리는 로동자들에게 말했다.

《이제야 왔구만. 내 딸일세.》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수인사를 했는데 다들 별나라에서 온 선녀라도 맞는듯 했다. 눈이 부신듯 가늘게 좁혀뜨고 바라보는가 하면 침을 꿀꺽 삼키는 사람도 있었다. 저마끔 한마디씩 한것은 다음순간의 일이였다.

《김아배 따님이라구요?》

《아이고매, 이런 희한한 일두 있수?》

《극장에서 노랠 부른다던 그 딸이지로?!》

《참 선녀같고마!》

아버지는 한바탕 기침소리만 터쳤다. 금시 숨이 넘어가는듯 괴롭게 이어지는 기침이였다.

은영은 아버지앞으로 다가갔다. 심한 기침때문에 이지러진 아버지의 컴컴한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무릎을 꿇었다.

《아버지, 병세는 좀 어떠세요. 예?…》

아버지가 손을 내저었다. 아직 기침이 멎지 않았던것이다. 사람들이 자리를 뜨려 하자 그것도 손을 저으며 막았다. 은영이에게는 어지러운 마다라스 한구석을 가리켰다. 앉으라는 손짓이였다.

이제 곧 노성이 터질것이다. 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이지만 가림없이 무섭게 다불러댈것이다. 은영은 아버지의 무릎에 어푸러지듯 했다.

《아버지, 죄송합니다. 이 딸이 구실도 못하구…》

《무슨 소리냐!》 아버지가 바람새는 소리를 질렀다. 《고작 한다는 소리가 그게 다냐?!》

드디여 아버지의 기침이 멎었다.

천둥이 터질 때가 왔다.

은영은 눈을 감았다. 그런데 돌연 아버지의 메마르고 딱딱한 손이 은영의 머리에 얹어졌다.

《은영아, 보구싶었다.》 아버지의 목소리였다. 다름아닌 아버지가 딸의 머리를 손으로 쓸어주고있었다. 《그래서 널 오라구 했다. 한번 보구싶어서…》

믿어지지 않는 일이였다. 아버지의 껄껄한 손이 볼에 닿는 순간 은영은 불현듯 눈물이 왈칵 솟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아버지, 제가 그만… 앓고계신 아버지한테 한번 와보지두 못하구…》

《됐다. 그런 소린 말아. 아버진 오히려 네게 미안하구나. 숱한 식솔이 네게 얹혀있으니 말이다.》

아버지의 거치른 손이 은영의 눈물을 닦아주고있었다.

《내 걱정은 말아. 여기엔 좋은 사람들이 많다.

네 동생들도 곁에 있구… 일한이 그새 얼마나 의젓해졌는지 너도 봤지? 지금 밤일을 나간 차한이도 얼마나 컸는지 모른다. 키만 큰게 아니라 마음도 커졌지. 그 애들이 지금 이 아버지를 대신해서 위험한 일도 다 맡아하고있다. 이제 시간을 내서 네가 공연하는것두 꼭 보게 하겠다. 이 사람들이랑 다! 이분들은 아직 네가 노래하는걸 한번도 보지 못했구나.》

곁에서 지켜보고있던 사람들이 한마디씩 비쳤다. 정말 그랬으면 얼마나 좋겠는가고, 그날엔 꼭 꽃다발을 안고 구경을 가겠다고 했다.

《이런분들을 위해 노랠 해야 한다.》 아버지가 계속했다. 《난 늘 네가 만사람의 사랑을 받는 가수가 되였으면 했구나. 그건 지금도 같다. 그래서 걱정도 크구… 잊지 말아라. 돈이나 침발린 소리에 눈이 어두워지면 안돼. 눈이 어두워지면 아무것도 가려보지 못하는 법이지. 그러면 이 사람들한테서도 버림을 받는다. 사람들이 네게 침을 뱉게 돼. 난 네가 그렇게 될가봐 걱정이다. 정말 생각만 해도 무서운 일이다. 네 동생들까지 저 이북에서처럼 모두가 평등하게 살게 될 새날을 위해 싸우는데 집안의 자랑이던 맏딸이 눈이 어두워있다는게 말이 안되지. 응?!… 오랜 세월 집을 떠나 살아온 너를 내가 잘 돌보지 못했구나. 늦었지만 이제부터라도 좋은 사람을 붙여 널 돕자구 하는데… 명심해듣거라. 이제부턴 새 노래를 불러야 한다. 민중이 따라부르며 힘을 얻는 그런 노래를 말이다. 이걸 말해주고싶었다. 한번 보고싶기도 하구. 그래서 부른거야.》

아버지는 신문에 난 기사를 꼬집지 않았다. 그러나 그 나직한 말속에 모든것이 다 들어있었다.

《예. 아버지, 알겠어요.》 하고 은영은 눈물로 속삭이였다. 《아버지 바라시는대로 꼭 하겠어요.》

《난 사실》 하고 아버지가 계속했다. 《널 북에 보낼가 하고도 생각해보았다. 김일성장군님께서 계시는 평양에 말이다.》

《예?!》

은영은 누렇게 뜬 아버지의 얼굴이 실룩거리는것을 바라보며 숨을 죽였다.

김일성장군님께서 계시는 평양에?!… 벅찬 격정에 목구멍에서 금시 신음소리가 새여나올것 같았다. 그러자 아버지는 엇비듬히 이마를 펴고 지나간 주름살을 좁히며 조용히 계속하였다.

《그렇지만 우리모두 김일성장군님을 모시고 행복하게 살 날은 꼭 온다. 그날을 위해 우리가 미국놈들을 반대해서 목숨걸고 싸우는게 아니겠니. 너도 그날을 위해서 싸워야 한다. 그래야만 앞으로 장군님을 떳떳하게 만나뵈올수 있는거야.》

떡살이 배긴 아버지의 두툼한 손이 은영이의 잔등을 다독이였다. 그처럼 바라고 바라던 아버지의 애무에 은영은 불시로 눈시울을 떨며 허덕이기 시작했다. 가슴을 메우고 목구멍으로 거침없이 괴여오르는 뜨거운 오열을 씹어삼키며 한마디말도 잇지 못했다.

《그럼 오늘은 이만 돌아가거라.》

아버지의 그 말에 은영은 세게 머리를 저었다.

《안예요, 아버지. 오늘은 아버지랑 같이 여기서 자겠어요.》

《아니, 여긴 네가 있을만 한데가 못된다. 언제 놈들이 들이닥칠지도 모르고…》

아버지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은영이를 바래주려는것이였다. 딸의 손을 꼭 잡고 비에 젖은 우산까지 들어주었다. 하는수없이 여러 사람들에게 인사하고 밖에 나섰을 때였다.

《얘 은영아, 넌 림호군을 어떻게 생각하니?》 아버지가 물었다.

《예?》

뜻밖의 물음에 놀라는 딸의 얼굴을 스쳐보며 아버지는 소리없이 조용히 웃음을 지었다.

《좋은 젊은이다. 담차구 인정깊구. 난 너희들이…》 잠시 아버지는 적당한 표현을 고르는듯 했다. 《서로 뜻이 통했으면 한다. 내가 제일 믿구 아끼는 사람이다.》

《?!…》

은영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저려드는 손끝으로 옷자락만 허벼대고있을뿐이였다. 아버지에게서 이런 말이 나오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었다. 그리고… 자기가 림호와의 어떤 인연에 대해서도 상상해본 일이 없다는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아버지는 딸이 숨소리도 죽이며 바재이고있는것을 스쳐보고 나서 가볍게 머리를 저었다. 구질거리며 내리는 비소리에 귀를 기울이더니 다시금 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이틀후에 림호군이 서울로 돌아온다. 네가 마중하거라. 네 도움이 없이는 나다닐수 없게 되였다. 사방에 사진이 나붙어있더구나. 만날 장소와 시간은 이제 일한이가 알려줄게다.》

아버지는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뒤따라 나와있던 일한이에게 머리를 돌리며 말했다.

《누나를 바래주거라.》

하고싶은 말이 많았으련만 아버지는 기다리고있는 사람들을 잊지 않고있는것 같았다. 그리하여 은영은 눈물이 핑 어린 눈으로 아버지를 바라보던 끝에 허리를 깊숙이 꺾으며 절을 하였다.

《아버지, 부디 몸을 잘 돌보셔요.》

쓰리게 가슴을 파고드는 허전함, 무엇인가 정겹고 오래 새겨질 뜨거운 인사말을 남기고싶었는데 이처럼 례사로운 말이 되고말았다. 지금 아버지의 마음은 어떠실가. 속담에도 자식을 떼고 돌아서는 부모의 마음 발자국마다 피가 고인다고 하지 않았는가!…

 

아늑한 산골짝 작은 집에

아련히 등잔불 흐를 때

 

돌아오는 길에서 은영은 계속 이 노래의 가연한 선률을 마음속으로 곱씹고있었다. 너무도 오랜 세월 집을 떠나 홀로 살아온 은영이였다. 바로 그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련히 등잔불어리는 집에서 단 하루밤이라도 부모님들과 무릎을 마주하고 정겹게 이야기를 나누고싶은 마음, 그처럼 그리운 고향집에서라면 인생에 대해서, 그 머나먼 인생길의 반려로 될 미더운 사람에 대해서도 조용히 속삭일것만 같은 마음…

 

그 산골짝에 황혼질 때

밤마다 그리는 나의 집

희미한 그 불빛 정다웁게

외로운 내 발길 비치네

 

이 밤따라 그 노래만을 계속하고싶은 마음이였다. 어인 일일가?… 아릿하고 어수선해지는 처녀의 마음이 애잔한 이 노래의 선률을 고요히 불러온것은 아닌지?…

 

 이전페지  차례  다음페지 
되돌이 목록
감 상 글 쓰 기

홈페지봉사에 관한 문의를 하려면 여기를 눌러주십시오
Copyright © 2003 - 2022 《조선륙일오편집사》 All Rights Reserved
辽ICP备15008236号-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