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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쁜 나날이 흘렀다.

은영은 황금정에 있는 우미관으로 가고있었다. 오늘도 거기서는 《조선프랑스협회》가 주최한 베르디의 가극 《동백꽃아가씨》공연이 있게 된다. 주인공 비올레따의 역은 물론 은영이 맡고있다.

처녀는 천천히 걷고있었다. 자기가 부를 아리아를 곱씹어보기에 여념이 없었다. 도로를 질주하는 미군찦차에서 휘파람을 불어대건말건 한손으로는 길바닥에 끌리는 꼬리치마를 잡고 다른 손에는 악보가 적힌 종이를 들고 곁눈 한번 팔지 않았다. 지어 뒤에서 그림자처럼 따르던 젊은이들중 누군가 곁에 바싹 다가선것도 모르고 딱딱한 포장길을 찍어가는 구두발소리를 노래의 장단삼아 걷고있었다. 속으로 부르던 노래가 차츰 입밖으로 흘러나오는것도 알지 못했다.

 

아 사랑하고 사랑을 받는 이 기쁨을

내 이제껏 알지 못했으매

 

지금 은영은 모든것을 잊고있었다. 아니, 잊으려 하고있다. 삯빨래로 허리를 펼새 없는 어머니와 운신을 못하는 할머니, 어린 동생들이 그가 한푼이라도 가져다주기를 기다리고있다는것을… 돈을 벌어야 했고 그를 위해서는 노래를 불러야 했다. 사랑의 노래를…

 

내 심장속에 고동치는 사랑은

괴롭고 즐거운 눈물과 웃음

 

찌는듯 하던 여름날의 더위도 한물 진 초가을이였다. 해가 기울면서 시서늘한 바람이 귀밑머리를 간지르기 시작했다. 갑자기 은영은 소스라치며 머리를 돌렸다. 우뢰같은 함성이, 아니 벼락치는듯 한 고함소리가 터졌던것이다.

《재청이요. 재청!-》

뒤따르던 젊은 패들이 일시에 고아대고있다. 길을 오가던 사람들이 웃음을 머금고 바라보고있다. 어쩌나! 속으로 련습한다는것이 그만 소리내여 부른것 같다.

《재청이요. 한번만 더 불러주-》

《질다아가씨, 딱 한번만 더!》

이런 때엔 웃음이상 더 좋은 처방은 없다. 은영은 그들모두에게 나긋한 미소를 선물했다.

《미안해요. 공연시간이…》

《그럼 우리도 같이 갑시다.》

《그게 좋겠구만. 응?!》

《가자구. 동백꽃아가씨를 따라서!》

한무리나 되는 젊은이들이 은영이를 둘러싸고 인도를 메워갔다. 인제는 은영이를 대신하여 젊은이들이 꽥꽥 노래를 뽑아본다.

 

내 온몸에 맥박치는

괴롭고도 즐거운 사랑이여

 

비올레따의 아리아를 어느새 많은 젊은이들이 외웠던것이다. 은영은 웃고있었다. 행복의 의미가 새삼스럽게 느껴진다. 사람이 불행만을 의식한다면 어떻게 삶을 영위해갈수 있으랴. 배곯는 동생들때문에 눈물짓다가도 이럴 때엔 마음이 거뿐해진다. 어머니의 병구완을 하지 못하는것때문에 가슴이 쓰리다가도 이럴 때엔 이름할수 없는 자긍심에 눈굽이 젖어든다.

예술이란 단순히 아름다운것만이 아니다. 예술은 열렬한것이다. 다시말하여 사랑을 심어주고 싹틔워주고 키워주는것이 예술이다. 그래서 더더욱 아름다운것이 아니겠는가!… 이러한 생각이 은영이로 하여금 보름째 밀리고있는 임금지불과 하숙집에서 기다리고있는 생트집, 일가식솔의 눈물겨운 곤궁을 잊게 하는것이였다.

우미관이 가까와졌다. 대도로 오른쪽의 교동국민학교와 왼쪽의 청년그리스도회관건물가운데를 지나간다. 그런데 여기서도 좌우익간의 치렬한 싸움은 계속되고있다. 길좌우의 전주대며 건물의 바람벽마다 수많은 광고들이 엇가로 마구 붙여져있는것이다. 비에 젖고 바람에 찢겨져 너덜거리고있는 종이장우에 새로운 선전물들이 또 나타나있다. 덧붙이고 또 덧붙이다보니 제대로 읽을수 없는것들도 많다.

공산당타도를 웨치는 구호와 《림정요인환국을 열렬 환영!》이라고 대문짝만 하게 쓴 선전화는 이미 퇴색된지 오랜것들이다. 새로 좌우합작을 부르짖는 김규식박사의 호소문, 려운형이 《인민당》으로부터 새로운 《사회로동당》을 결성했다는 광고, 미군정에서 낸 《38도선의 무허가 월경금지》포고, 《조선일보》를 비롯한 좌익계 6개 신문의 정간에 대한 포고도 있다. 그런데 저건 또 무어람?…

《한국부녀동맹은 건국사업에 동참할 녀성들을 부른다!》

저 구호는 우익계의 부녀동맹이 써붙인것이다.

《모든 녀성들은 민주녀성동맹에 뭉치자!》

저것은 또 좌익녀성동맹의 구호이고…

지금은 좌우익이 목이 쉬도록 연설하던 끝에 글로써 웨치고 글로써 싸우는것만 같다. 《전라북도 정읍에서 리승만박사 <단독정부>수립을 제창》, 하지중장의 명령 제00호 《반미활동을 하는자들을 적발, 처형할데 대하여》 등 모두가 붉은색, 검은색이 되여 웨치고있다. 모든것이 좌 아니면 우가 되여 피투성이싸움에 나서는 세월이였다. 그러나 노래에는 좌와 우가 없다. 노래에는 색도 없다. 은영이는 이렇게 믿고있었다. 하여 처녀는 지금 좌와 우, 붉은색과 검은색이 암투를 벌리는 격전장의 한복판을 꿰질러가며 노래를 부르고있다. 흥분에 달뜬 젊은이들이 그 녀자를 에워싸고 시위행진이라도 하듯 비올레따의 애절한 사랑을 갈린 목청으로 웨치고있다.

 

오늘도 날은 밝고 지지만

언제나 즐거우면 무엇을 또 바라랴

 

돌연 걸음을 멈추었다. 수많은 구경군들이 둘러선 가운데 우미관앞에서 사람들이 패싸움을 벌리고있는것이였다. 그저 무심히 스쳐볼 싸움이 아니였다.

피가 랑자한 사람들이 닥치는대로 손에 들고 두들겨패는가 하면 서로 쥐여박고 물어뜯으며 목터지게 웨치고있다.

《깡패들은 물러가라!》

《좌익무리를 타도하자!-》

《이 리승만의 앞잽이들아! 너희들은 지금 인민을 배반하고있다!》

《개수작말아. 우린 진정한 조선독립을 위해 싸운다.》

《<민전>의 주위에 뭉쳐야 해. 미국은 <해방자>가 아니야!》

《빨갱이들 정치선전은 금지됐다.》

《빨갱이들을 쳐죽이자!-》

경찰은 다 어데로 사라졌는가? 그림자조차 찾을 길이 없다. 은영이 사람들속에 뛰여들려 하자 그를 에워싸고있던 젊은이들이 한사코 막아나섰다. 지금 좌익단체에서 우미관에 오는 관객들을 대상으로 정치선전을 하던 중 우익깡패들의 습격을 받았다는것이다. 비올레따가 참견할 일은 못되니 멀찍이 물러나라고 잡아끌었다.

바로 그때 몸이 강마르고 키가 훤칠한 사람이 정문계단우에 나서며 손에 들고있던 단장을 쳐들어 허공을 찔렀다.

《여러분, 조용하시오. 내 말을 들으시오!》

그는 목소리가 높지 않았지만 사람들의 머리우에 높이 쳐든 단장은 장검마냥 위엄이 있었다. 중늙은이였다. 두루마기를 입고 양말대님까지 한 전형적인 조선옷차림이였는데 희슥해진 머리와 근엄한 눈빛으로 미루어 학식있고 강직한분이라는것이 알렸다.

《여러분, 왜 싸웁니까.》 그가 단장을 내려 바닥의 포석을 두드리며 말하였다. 《정국이 좌우로 갈라져 쟁투를 벌리고있고 미쏘공위가 파탄되면서 나라가 분렬될 위기에 닥친 이때 행동통일을 도모하며 국운을 바로잡아야 할 젊은이들이 이게 뭡니까. 일제통치하에서 흘린 피와 눈물이 마르기도 전에 동포형제들끼리 또 피를 흘리며 싸우다니, 지난해에 있은 송진우선생에 대한 테로를 상기해보시오. 대관절 무엇때문입니까. 그게 누구한테 필요한것인지 알기나 합니까?… 말해보시오. 여러분은 무슨 원한이 사무쳐서 이 격투를 벌리고있습니까. 무엇때문에, 누굴 위해서?!》

은영의 뒤에 서있던 젊은이가 옆사람에게 묻는 말소리가 들렸다.

《저분은 누군가?》

《리극로선생 아닌가! 왜정때 총독부가 법적 끓던 <조선어학회사건>을 몰라?》

《오!-》

《리극로선생?!…》 은영은 그에게서 눈길을 떼지 않으면서 이렇게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도 언젠가 허헌이라는분과 함께 은영이 출연한 가극 《리고레또》를 구경한적이 있다. 은영은 이것만은 똑똑히 기억하고있었다. 공연이 끝났을 때 마지막까지 남아서 박수를 치던분…

《왜 말이 없습니까?》 리극로가 눈빛을 번뜩이였다. 《그러니 아무런 뜻도 주장도 없이 싸운단 말입니까?》

《선생님!》 한 젊은이가 소리쳐 물었다. 《선생님은 공산당을 지지합니까, 아니면 려운형선생이나 리승만박사를 지지합니까?》

《난 국민의 의사를 지지하오.》

《국민의 의사란 무업니까?》

《바로 임자같은 사람들이 바라는거요.》

리극로가 단장으로 바닥을 딱딱 소리내여 찍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마치 자기가 하는 말마디들을 사람들의 가슴에 쪼아박는듯 싶었다.

《젊은이들도 진정한 독립을 바라겠지?…》 그가 계속하는 말이였다. 《그럼 독립이란 무엇인가. 제멋대로 뿔뿔이 사는것인가 아니면 힘센자를 등에 업고 눈치를 보며 사는것인가?… 여러분도 그런건 바라지 않을것입니다. 외세가 없는 나라, 민주의 나라를 바랄것이요. 그러니 누가 진정 국민을 위하고자 하는지 잘 가려보시오. 무턱대고 싸우는건 미욱한 짓입니다. 그러면 정치간상배들의 리용물이 된다는것을 잊지 마시오!…》

피를 뿌리며 싸우던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그들속에서 누군가 또 탁한 목청을 돋구어 물었다.

《빨갱이들이 북의 지령을 받고 기승을 부리는데 그래 가만 보고만 있어야 옳습니까?》

리극로가 짚고있는 단장이 후들거렸다.

《북의 지령이라니? 북이란게 뭡니까. 사람이름은 아닐거고… 방향을 의미하는 말이겠는데?》

사람들이 웃었다. 그러나 리극로의 표정은 근엄하였다.

《북의 지령이 아니라 이북민중의 뜻이겠지요.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여러분도 그렇게 알고있을것입니다. 북의 민중을 지도하고계시는분이 영명하신 김일성장군님이시라는것을 말입니다. 그럼 내가 한가지 물어봅시다. 이남의 지도자들중에 총을 들고 왜놈들과 싸운 사람이 몇이나 있습니까. 진실로 민중의 자유, 해방을 위해 싸운 사람이 누군가 말입니다. 그런데도 모두들 애국자라고 떠들어대고있습니다. 저저마끔 자기만을 믿으라고 소리치고있습니다. 그렇지만 난 누가 저를 믿어달라구 아무리 소리친대도 믿지 않습니다. 절대 아무나 믿지 않습니다. 조국의 광복과 민중의 해방을 위하여 오랜 세월 피흘리며 싸워오신 우리의 영명하신 김장군님밖에는!… 그래서 그분께서 하자고 하시는 일은 다 옳은것이라고 믿고있는것입니다. 그래 어떻습니까, 여러분?!… 그래서 여러분도 지난해 김일성장군님환영대회를 열고 매일같이 역에 달려나가군 하지 않았습니까!》

전체 군중이 일시에 화답하였다.

《옳습니다!》

《보름씩이나 나갔습니다!》

《온 서울장안이 다 떨쳐나섰습지요.》

《그것보시오. 그래도 북의 지령이 어떻소 하겠습니까? 북과 남의 민중이 한마음, 한뜻이 되면 좋은것이지 나쁠게 뭐가 있습니까!》

떠들썩한 군중속에서 누군가 《빨갱이선전이다!》 하고 소리쳤다. 그러자 수많은 사람들이 분개하여 머리를 돌려 소리친자를 찾는데 리극로는 반대로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날더러 빨갱이라!… 그러니 절간의 주지도 <빨갱이>라 해야겠군! 붉은 가사를 입으니까.》

다시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리극로가 단장을 휘둘러 주의를 환기시켰다.

《여러분, 지금까지 말한건 나 혼자만의 생각이 결코 아닙니다. 여러분들도 지난번 공설운동장에서 려운형선생이 나라와 민중을 령도하실분은 오직 김일성장군님밖에 없다고 연설하신 일을 기억하실것입니다. 온 나라 민중이 그분께 의탁하고있습니다. 그런데도 날더러 빨갱이선전이라고? 나쁜놈들의 선전에 귀기울이지 마십시오. 눈을 똑바로 뜨고 옳고 그름을 가려보아야 합니다.》

이윽고 리극로는 지금 김규식선생과 려운형선생이 좌우합작을 위해 로심초사하고있는데 자기는 그에 동참할것이라면서 청년들이 대세에 어긋나게 분렬되여 싸우는것은 나라와 민족의 장래에 어두운 그림자를 던지는것이라고, 결국은 독립이 아니라 외세에 먹히우고마는것이라고 력설하였다.

《뼈저린 력사의 교훈을 잊지 마십시오. 뭉쳐야 합니다. 우리 조선사람들끼리 새 나라를 세우자면 남들이 틈을 노릴새없이 땅땅 뭉쳐야 합니다!…》

리극로가 떠나갈무렵엔 극장앞이 사람들로 꽉 차있었다. 좌우로 갈라져 싸우던 청년들과 가던 길을 멈춘 사람들외에도 시간을 맞추어온 관람객들이 련이어 밀려들었던것이다.

강파롭게 생긴 한 젊은이가 리극로선생을 모시고 가는것을 보면서 부지중 은영은 림호를 생각하였다. 그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있을가, 그는 왜 한번도 구경을 오지 않을가, 아직 한번도 그는 나의 노래를 들어본적이 없지 않는가!…

림호는 끝내 보이지 않았지만 리극로선생이 떠나자 때를 기다리고있은듯 불현듯 낯익은 모습이 달려들었다.

《미스 김!》

이렇게 부르며 달려든것은 바로 수미였다. 드물게 나타나지만 나타나면 무슨 일이 생기군 한다는것을 생각하지 않을수 없었다. 오늘은 《미스 김》으로 부르고있으니 달라진 정치풍토에 맞게 일상적으로 쓰는 말도 새로 바꾸고있는셈이다.

《마침 만났어. 아주 때마침!》

그 녀자가 이렇게 반가와하는데엔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전날의 애수에 차있던 수미는 또 어데로 갔는가?…

《미스 김, 좋은 소식이 있어.》 수미의 두눈이 찌긋해졌다. 《어디 맞혀봐요.》

《글쎄…》

은영이의 표정을 스쳐보며 수미는 깔깔 웃어댔다.

《래일 부민관에서 명가수들의 독창무대가 있는데 거기에 동백꽃아가씨를 초청한다나, 바로 은영씰 말이지. 어머! 왜 그렇게 봐?》

《초청? 명가수무대에?》

《암, 그렇구말구. 이제야 미스 김을 빼놓고 명가수무대가 이루어질수 없지 않아!》

수미는 진정 기쁨에 넘친것 같았다. 이어 그는 초청자가 《KPK악단》의 설립자 김해송과 리란영부부라고 했다.

《이름난 가수들만 초청한거지 뭐.》 수미가 의미있게 눈웃음치며 계속하는 말이였다. 《은영씨는 물론이구 김천애, 김혜란, 다 고전음악을 하는 쏘프라노가수들이지?… 테놀가수론 김우군이 있구… 여기에 류행가수들인 남인수와 리란영… 당대의 명가수들은 다 뽑은거지 뭐야. 게다가 한회분 공연에 3백원을 지불한다니… 아유! 나도 성악을 전공했더면!…》

아직 극장앞엔 사람들이 붐비고있었다. 리극로선생이 틀어쥐였던 군중이 이번엔 은영이와 수미에게 쏠리기 시작했다. 은영은 그를 끌고 무대뒤쪽으로 갔다. 그러나 독창무대초청에 대해 더 론할새가 없었다. 마침 은영을 찾고있던 연출가가 그들을 보고 한달음에 달려왔던것이다. 당황망조한 기색이였다.

《은영씨, 이걸 어쩌문 좋소. 제르몬이 병원에 실려갔구려.》

제르몬이란 동백꽃아가씨 비올레따의 애인 알프레드의 아버지를 말한다. 창부인 비올레따를 사랑하는 아들에게 지독한 압력을 가하는 제르몬, 가극에서는 제3의 주역이다. 바로 그 제르몬역을 맡은 배우가 실려갔다고 한다. 알고보니 방금전에 있은 우익깡패들의 습격때 그속에 끼워있다가 심한 부상을 당했던것이다.

은영은 온몸의 기운이 바람처럼 새여버리는것을 느꼈다. 구경표는 다 팔렸는데 공연이 파탄되면 엄청난 손해배상을 물어야 한다. 그것은 곧 은영이와 일가식솔에 엄중한 타격이 아닐수 없다. 앓고계신 어머니의 병구완도 더는 바랄수 없게 된다.

알프레드의 역을 맡은 테놀가수 강상일이까지 후주른해서 나왔다. 그들은 은영이에게서 그 어떤 기적을 바라는듯 한 표정이였다. 은영은 그만 두눈을 감고 말았다. 아무것도 보고싶지 않았다. 막 소리쳐 울고싶기만 했다. 그런줄도 모르고 은영은 젊은 패들에게 에워싸여 노래하며 왔었다. 사랑의 노래를 부르며!… 정말 미칠 지경이였다.

바로 그때였다. 누군가 조용히 《은영씨!》하고 불렀다.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은영은 눈을 뜨고 머리를 돌렸다. 다음순간 《고종우씨가?》하고 가늘게 부르짖었다.

《은영씨.》 고종우가 어줍어하며 말했다. 《제가 그 역을 맡으면 안될가요?》

《예?!》 숨이 막히는듯 했다. 《그게 정말이세요?》

《예, 일본에서 한때 그 역을 맡아했습니다.》

기적이 일어난것이다. 바리톤가수 고종우, 은영은 어느새 그한테 와락 매달렸다. 고종우가 면구스러워하는것도 수미가 창백해진 얼굴로 고종우를 향해 뭐라고 낮고도 빠르게 말하는것도 알지 못했다.

《어마나, 고종우씨!》 은영은 흐느끼듯 했다. 《그새 어디 가 숨어계셨어요?》

《예, 제주도에… 저야 고씨가 아닙니까. 고씨조상이 나온 삼성혈에 숨어있은셈이지요.》

길게 말할새가 없었다. 연출가가 은영이를 떼여놓으며 흥분에 갈린 목소리로 수선을 떨었다.

《갑시다. 종우씨, 정말 반갑습니다. 이렇게 나타나다니… 종우씨노래를 나도 들은적이 있습지요. 일본에 순회공연을 갔을 때… 아, 내가 <빅타> 레코드사 문예부장을 할 때 말이죠.》

고종우는 순진한 그 성미답게 우쭐하지 않았다.

《그런데 제대로 해내겠는지…》

《아, 바리톤가수가 아닙니까!》 연출가가 떠들었다. 《일본에서라구 제르몬을 쏠로몬으로 바꾸진 않았을거구… 빨리 갑시다. 시간이 없습니다.》

연출가와 강상일이 은영이도 잡아끌었다. 뜻하지 않던 일로 파랗게 질린 수미가 발을 구르는것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시간이 급했던것이다. 반가운 상봉극은 뒤로 미룰수 있어도 사랑의 비극은 분초를 다투고있었다.…

고종우는 멋들어진 바리톤가수였다. 단 한번의 관통훈련도 없이 출연했지만 병원에 실려간 가수보다도 더 훌륭하게 제르몬역을 수행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거의 모든 종목들에서 은영이와 함께 출연하게 되였다. 그리하여 신문들에서도 고종우를 그 누구와도 바꿀수 없는 은영이의 상대역이라는 의미에서 《은영양의 콘비 고종우》라고 쓰는것이 례사로운 일로 되였다. 그들의 이 관계는 이때로부터 수십년세월을 두고 계속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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