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 장
저기 바다로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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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말하기를 녀자들은 첫사랑의 추억을 한생의 보물처럼 간직하며 무덤에까지 가지고간다고들 한다. 그러나 은영은 그 말을 의아쩍게 여기며 반신반의하군 했다. 누가 그렇게 말했을가. 첫사랑의 추억을 안고 무덤에 가본 녀자의 말일가. 아니면 세상만사에 도통한듯이 으시대며 인생철학을 풀기 좋아하는 어느 작가의 말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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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여 일제가 패망했다. 기쁨의 눈물과 목메인 환호속에 날과 달들이 흘러갔다. 그러나 기쁨과 환희도 한순간 어느덧 해방후의 서울은 정치적혼란의 파도속에 휘말려들어갔다.
먼저 패망한 일본총독으로부터 정권이양교섭문제로 국내의 지도자들속에서 론난이 분분하다고 하더니 송진우가 암살되였다. 려운형이 조직한 《건국준비위원회》(건준)가 전국적범위에서 활동을 개시하였으나 미군의 상륙과 더불어 군정이 선포되고 정치세력들간에 좌와 우가 명백히 갈라지는가 하면 리승만에 이어 중경의 림시정부요인들이 돌아오면서 정치운동이 불길처럼 타올랐다. 미군정의 정치적탄압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들이 정당에 들고 강령을 부르짖고 반탁과 찬탁을 목터지게 웨치고 시위를 벌리고 돌멩이를 날리다 못해 총을 란사하였다. 우익청년에 의한 송진우의 암살로부터 시작된 정치테로의 어수선한 총소리가 밤과 낮을 가림없이 골목길에서, 강기슭에서, 송림속의 언덕에서 때없이 벌어지고있었다. 뜻을 가진 사람은 누구나 정치투쟁의 열풍속에 몸을 내던지고 정신없이 돌아치던 때였다. 정치적혼란과 무질서가 회오리바람처럼 해방후의 서울의 거리를 휩쓸며 날과 달들이 흘러갔다. 그무렵 리화녀대를 졸업한 은영은 서울교향악단 독창가수겸 한성중학교 음악교원으로 있으면서 아무런 정치적편중이 없이 좌익과 우익예술단체들에서 주최하여 공연하는 여러 가극의 녀주인공역들도 맡고있었다.
숱한 식솔이 이제는 은영의 어깨에 얹혀있었다. 갑자기 아버지가 종적을 감추고 어른으로 자란 남동생 일한은 인천항에 나가 밤낮으로 하역작업을 한다고 했다. 그러나 자기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 형편이여서 결국 앓고있는 어머니와 어린 동생들, 할머니까지 모두 은영의 손을 쳐다보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리하여 은영은 그 어떤 일감이든 가림없이 떠안아야만 했다. 은영은 좌익이요 우익이요 하는것들과 전혀 무관하였다. 수업을 끝내는 즉시 자기를 불러주는 곳이면 그 어데건 달려갔다.
그러한 속에서도 은영은 바야흐로 인기의 절정에 오르고있었다. 처녀가 꿈꾸던 인생의 새 활무대가 열리는듯 싶었다. 요란한 박수갈채와 꽃다발, 찬탄의 목소리들이 은영을 구름처럼 싸고 돌았다. 출발이 너무도 성공적이여서 신문기자들도 기대되는 명가수의 탄생을 알리기에 저저마끔 경쟁적으로 펜을 달리고있었다.
《오늘 우리는 국도극장무대에서 가극 <카르멘>의 주인공역을 수행한 미인가수 김은영양의 매혹적인 노래에 아낌없는 박수갈채를 보내는 관중의 환호소리를 들었다. 교향악단의 독창가수이면서도 어제는 뮤지컬화(음악극형식으로 한) <춘향전>의 주인공역과 가극 <파우스트>중의 마르가리따역, <리고레또>중의 질다의 역을 맡아 우리 가요계를 풍미하기 시작한이래 은영양은 누구도 따를수 없는 특이한 소리색갈과 새로운 노래형상으로 우리를 완전히 틀어잡았다. 한때 <목포의 눈물>로 고복수를 뛰여넘어 지금까지 최고의 히트 님버로 꼽히던 리란영을 훨씬 릉가하는 빅 히트였다. 이제 미스 김은 명실상부한 <노래의 녀왕>으로 군림하게 될것이다. 그것은 틀림없다.…》
영어의 자투리말들이 범람하던 때였다. 신문과 간판, 일상용어에서도 한두마디쯤 끼워넣지 못하면 무식한것으로 인정될 지경이였다. 그러한 때여서 기자들도 히트 님버, 빅 히트 (야구용어에서 따온 말로서 성공한 사람, 크게 성공했다는 뜻을 의미함.)요 하는 말들이 찬사의 도수를 높여준다고 여겼던것이다.
그러건 말건 은영은 거의나 신문을 읽지 않았다. 그럴새도 없었다. 폭풍같은 박수갈채만으로도 충분했으므로 자신에 대한 찬사는 다른 사람들이 읽게 내버려두는것이 더 좋았다.
공연이 끝나면 한성중학교의 힘꼴이나 쓰는 남학생들이 은영을 공주님처럼 누구도 건드리지 못하게 호위하여 가군 했다. 수염이 난 중학생들도 있던 때여서 그들 자발적인 호위대원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있었는지는 알수 없다. 혹시 그들이 자기네 녀선생이며 이름떨치는 녀가수를 마음속으로 사모하고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날도 은영은 공연이 끝난 후 열성적인 중학생호위대에 에워싸여 새로 정한 태평로쪽의 하숙집으로 돌아오고있었다. 덕수궁의 울담과 잇대여진 고물상들의 크고작은 집들가운데 하숙집이 있다. 밤이 깊어 행인들도 별로 눈에 띄지 않았고 저 멀리 서울부청앞 광장에서 왼쪽 세종로에로 이어진 길에서 끊임없이 울리던 전차들의 종소리도 뜨음해졌다. 바로 그때 검은 그림자가 그들의 앞을 막아나섰다.
《은영씨죠?》
《예?…》
은영은 소스라치며 얼어붙고 말았다. 학생들이 제때에 은영이의 앞으로 나서며 바자를 쳤다. 그들중 누군가 으름장을 놓았다.
《비켜서시오. 골통을 박살내기 전에…》
앞을 막아선것은 코트를 입고 중절모를 푹 눌러쓴 사나이였는데 그쯤한 위협엔 끄떡도 하지 않았다.
《난 은영씨를 좀 만나야겠소.》
《지금은 안되오.》
《지금 만나야 해!》
그가 돌연히 반말로 나오자 학생들은 분격하였다. 모가 난 말들이 오고가고 드디여 불끈 부르쥔 주먹이 날아들려고 했다.
은영은 두손을 가슴에 모아쥐고 꼼짝도 하지 않고있었다. 금시 주먹질이 시작된다 해도 그것은 그 녀자가 상관할 일이 아니였다. 한밤중에 처녀의 앞길을 가로막는 사람이라면 응당 봉변을 당해도 무방하였다. 그런데 그 사나이는 어느새 제일 큰 학생의 팔목을 비틀어놓고 두번째로 날아든 주먹을 가볍게 막았다.
《소란을 피워선 안돼.》 억눌린 소리로 그가 말했다. 《저기서 경찰이 지켜보고있어. 경찰들이 오면 내게 불리해. 무슨 말인지 알겠어?》
어데선가 꼭 들어본 일이 있는 목소리였다. 낮고도 저력있는 그 목소리에 학생들이 주춤하였다. 그러나 벌써 뚜걱거리는 미국제 군화발소리가 가까와오고있었다. 사나이가 재빨리 말했다.
《은영씨, 그렇게도 알아보지 못하겠습니까?》
《예? 누구신데…》
사나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경찰이 다가왔던것이다. 그자의 손에 들린 전지불이 사람들의 얼굴을 재빨리 더듬었다.
《뭣들이야. 왜 쌈질이야?》
다음순간 전지불은 은영의 얼굴에 찍혔다.
《우린 론쟁을 했어요.》 은영이 숨을 돌리며 힘들게 말했다. 《질다의 형상문제를 놓고 말이예요.》
《질다가 뭐야?》
《어머! 가극의 주인공 모르세요? 요즘 공연하는 <리고레또>를 보시지 못한가부죠?》
《음- 요새 소문이 자자한 그 가극말인가요?》
《예, 제가 그 주인공역을 맡고있어요.》
《그러니 아씨가 김 뭐라든가…》
《예, 김은영이예요.》
《아!…》
경찰의 전지불은 은영의 얼굴에서 상큼한 목으로, 다시 불룩한 젖가슴으로 내리며 손더듬하듯 떨더니 저도 무안한듯 돌연 다른 사람들에게로 휘딱 번져졌다. 학생들을 하나씩 찍어가던 전지불이 드디여 중절모 쓴 사나이에게서 멎었다. 그야말로 일행에 끼운 색다른 사람이라고 여긴것 같았다.
《넌 뭐야, 증명서!》
모든 사람이 일시에 숨을 죽였다. 그에게 주먹찜질을 하려 했던 학생들까지 일시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객기를 부려보려다가 경찰의 눈을 피하는 사람을 고발한셈이였던것이다. 그 순간 은영은 전지불에 비쳐진 낯익은 모습에 다시금 몸을 떨었다. 이런 일도 있담. 어쩌면 이렇게 만나다니!…
《증명서!》 경찰이 사나이의 눈에 불빛을 쏘며 다시 소리쳤다.
《뭘 꾸물거리는거야?》
《예. 여기 있습니다.》
사나이가 코트 안주머니에 천천히 손을 넣는것과 동시에 은영은 급히 경찰의 전지불을 막아나섰다.
《이분은 나의 약혼자예요. 매일 공연이 끝나면 나를 데려다주죠.》 하면서 은영은 수집은듯 할끗 눈짓했다. 《래일 국도극장으로 오세요. 제가 좋은 좌석을 따로 마련해드리겠어요.》
옥양목저고리를 팽팽히 조여입은 은영의 봉긋하니 부풀은 앞가슴이 경찰의 눈앞에서 가쁘게 오르내렸다. 거기에 견주어진 전지불도 흐느끼듯 파르르 떨기 시작했다.
《아가씨, 구경을 갔으면 좋겠지만…》 경찰은 더듬거렸다. 《정말 시간이 어-없습니다. 요즘 빨갱이들이 얼마나 날치는지…》
《그래도 시간을 내서 꼭 오세요. 아무때건… 절 찾으면 됩니다.》
《고맙습니다. 아가씨, 아- 안녕히 가십시오.》
경찰은 최경례를 붙이며 그 자리에 못박힌듯 서있었다. 아직도 새하얀 저고리에 오연하게 솟아올라있던 미인가수의 둥실한 젖가슴이 따갑게 눈을 지지고있는 모양이였다.
은영이 사나이의 팔을 끼며 학생들에게 말했다.
《수고했어요. 학생들, 고마와요.》
웬일인지 학생들은 입이 얼어붙은듯 했다. 자기네 녀선생에게 약혼자가 있었다는것을 처음 알게 되였던것이다. 두사람이 어둠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그들은 한자리에서 눈을 슴벅거리며 서있었다.
《림호씨, 정말 오래간만이군요.》 은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어떻게 절 찾아오셨어요?》
《아버지가 보내서 왔습니다.》
《어머! 또 아버지 심부름을요?》
《예.》
《그런데 아버진 왜 한번도 오시지 않을가?…》
《아버진 시간이 없습니다. 은영씨도 잘 아시면서…》
《몰라요. 전연!》 하고 은영은 팔을 끼고있던 그를 조금 밀어내며 재빨리 말했다. 《아버진 무슨 비밀사업을 하시지요?》
《비밀사업이라… 그렇게 말할수도 있지요. 그래서 아버님은 밖에 나다닐수 없습니다.》
《그러니 숨어계셔요?》
《원 은영씨두, 마치 애들처럼 말하는군요.》
처음으로 림호는 소리내여 웃었다. 쇠소리가 약간 섞인 그 웃음에서는 사내다운 용기와 의지가 느껴지는것은 물론 누구나 따라 웃지 않을수 없는 솔직하고 천진스러운 그 무엇이 들어있었다.
그들은 덕수궁의 울담을 따라 걷고있었다. 밤을 지키는 외등이 잠에 취해 뿌예진 빛으로 나란히 붙어서 가는 그들의 모습을 비쳐주었다. 고물상들이 사는 주택지구여서 토방우에 웅크리고있던 개들이 두귀를 쫑긋 세우고 허리를 펴며 금시라도 달려들 태세로 괜히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어서 말해주셔요.》 은영이 독촉했다. 《아버진 왜 해방된 오늘에도 숨어계셔야 하는지?》
림호의 말에 의하면 아버지 김학송은 지금 조직의 지시에 따라 변성명하고 지하투쟁을 한다고 한다. 오래전 동북에서 벌써 김일성장군님유격대의 지하공작원과 연줄이 맺어져 조국광복회 회원으로 활동하다가 공작상필요에 의하여 서울에 옮겨온이후 지금은 또 미국놈들과 그 졸개들의 민족분렬의 음모를 파탄시키는 투쟁에 한몸 바치고있다는것이였다.
《김일성장군님?!》 하고 은영은 숨이 막힌듯 속삭이였다. 《그러니 우리 아버지도… 우리 아버지도 그분을 만나보셨어요?》
《예?… 아니, 내말을 잘 들어주십시오.》
림호는 아버지가 해방전에 장군님유격대의 지하공작원과 연줄을 맺었다는것을 다시 설명하였다. 그리고 조국광복회에 대해서도 은영이가 알아듣도록 자세히 설명하였다. 아직은 이 모든것이 비밀로 되여야 한다는것을, 그 누구에게도 말해선 안된다는것을 몇번이고 강조하면서 그 이상은 더 묻지 말라고 하였다.
《참 전에도 그렇게 말하더니…》 은영은 섭섭해했다. 《오늘도 그 이상은 묻지 말라!》
《그래야 합니다. 이건 아버지를 위해서도 은영씨를 위해서도 필요한것입니다. 사실 은영씨 아버님은 얼마전까지 저와 같이 대구에 가있었지요.》 림호가 사위를 둘러보며 나직이 말을 이었다.
《난 기자로, 아버님은 행상군으로 활동했는데 지금은 다른 중요한 일을 맡고있습니다. 여전히 변성명을 하고 말이지요. 참, 동생들인 일한이와 차한이가 인천부두에서 하역로동자로 일하고있다는건 알고있지요? 아주 믿음직한 청년들로 자랐습니다. 로동자들과 청년들속에서도 인기가 대단하구요. 그런데…》
림호는 잠시 입을 다물고 은영의 표정을 곁눈질했다.
《아버님은 늘 은영씨때문에 걱정을 하는데… 그래서 나에게 은영씨를 잘 돌봐달라고 부탁하더군요.》
은영은 걸음을 멈추었다.
《림호씨한테 나를 부탁했다구요?》
《뭐 달리 생각할건 없습니다. 이제는 은영씨도 세상형편에 눈을 떠야 한다고 아버님이 말씀하시더군요. 지금까진 오직 공부만 시켜왔지만 일단 무대에 나선 이상 아버지의 뜻을 따라야지요.》
은영은 입술을 자근자근 깨물며 다시 걸음을 떼였다. 사실 지금껏 은영은 회오리같이 휩쓰는 정치열풍에도 무관하였다. 오직 예술, 자기의 예술만을 생각했고 성공을 갈망했다.
《그래서 뭘 해야 하나요?》
은영의 물음에 림호는 다시 소리내여 웃었다.
《원 성미두… 은영씨야 물론 노래를 불러야지요. 노래를!》
《그럼 내가 뭐 노랠 부르지 않구 무당처럼 굿을 하는줄 아셨어요? 우리 어머니가 늘 그렇게 말하더니…》
은영은 그가 또 새삼스럽게 자기를 눈여겨보고있는것을 알았다. 그의 눈에 비친 나는 어떤 처녀일가? 굳센 아래턱과 감때사나운 눈빛을 가진 림호의 눈에 비쳐진 이 처녀는?…
《이제부터》 하고 림호가 나직이 말했다. 《우리 일을 좀 도와야겠습니다. 무대를 통해서 할수도 있고 믿음직한 학생들을 골라서 할수도 있습니다.》
그는 계속하여 지금 서울에서 벌어지고있는 좌우익간의 대립과 미국놈들의 음모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이어 려운형, 허헌, 김원봉, 백남운 등이 《민전》(《북조선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의 략칭)을 중심으로 뭉쳐 모스크바결정을 지지하는 대중투쟁을 벌리게 된다는것, 여기서 예술인들이 한몫해야 한다고 했다.
이 투쟁에서 림호는 선전사업을 맡았으므로 은영이 무대를 통해서나 학교를 통하여 도와주기를 바랐다. 선전물을 뿌리거나 연설을 하는 등의 위험한 일에는 절대 나서지 말라, 사람들을 깨우쳐주고 노래 한곡을 불러도 사람들에게 미국놈들을 반대하여 싸우도록 애국심을 불러일으키는 노래를 부르기 바랄뿐이라고 그는 강조하였다.
《그런데 지금》 하고 그는 계속하였다. 《우익에 속해있는 예인들중 어떤 사람들은 나라와 민족을 반역하는짓을 하고있습니다.… 가만, 마저 들어주십시오. 지금 김해송과 리란영을 비롯하여 남인수, 장세정, 홍청자, 김은희같은 예인들이 <KPK악극단>이라는걸 만들어놓고 매일 미군만 전문 상대하는 환영공연을 벌리고있는데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그뿐만아니라 기회가 있을 때마다 미국놈들을 <해방자>라고 선전하면서 사람들의 눈을 흐리게 하고있습니다. 가능한 이들도 돌려세워야 합니다.》
은영은 잠자코 듣고있었다. 그가 하는 말의 의미를 새겨보려고 무진 애를 썼으나 웬일인지 많은것이 생소하고 석연치 않았다. 자꾸만 그를 처음 만나던 때의 일들이 눈앞에 얼른거리군 했다. 그때엔 무시무시한 느낌을 주던 사람이였다. 매골같이 여위고 우묵한 눈확에서는 사람들을 선뜩하게 하는 빛이 내뿜고있었고… 그런데 지금은 얼마나 달라졌는가. 사람이 몇해사이에 이처럼 달라질수도 있단 말인가?…
《예, 그래야지요. 알겠어요.》
은영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자기가 무엇을 알겠다고 하는지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드디여 헤여질 때가 되였다. 은영의 하숙집이 바로 코앞이였다.
《이젠 다 왔어요.》
《난 이제 곧 떠납니다.》 림호가 말했다. 《공작상임무로 대구, 광주쪽에 가끔 다니게 됩니다. 자주 만나지 못할수도 있는데 그렇지만 내가 한 말은 절대 잊지 마십시오.》
《떠난다구요?》
《예, 그럼… 다시 만납시다.》
그는 따뜻하고 정깊은 인사말을 기다리지 않는것 같았다. 곧장 돌따서서 가버리려고 했다.
그때였다. 돌연히 밤의 고요를 깨치는 호각소리와 어지러운 군화발소리가 소란스럽게 울려왔다. 웬 사나이가 시꺼먼 골목길에 뛰여들어 그들쪽으로 마주 달려오고 멀리서 경찰들이 뒤따르고있는것이 보였다. 순간 은영은 림호를 집모퉁이로 무작정 잡아끌었다.
《안되겠어요. 자, 빨리!》
개들이 사납게 짖어대기 시작했다. 경찰들이 무어라고 소리치며 골목길을 앞뒤로 조여들고있었다. 은영이 다급해하며 불같이 속삭이였다.
《들어가자요. 이 집이 내가 들어있는 하숙집이예요.》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고마운 안주인이 대문을 걸지 않았다. 안에서 빗장을 지르자 한결 안도의 숨이 나갔다.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대며 토방우에 올라서자 먼저 림호의 신발을 벗겨 널마루밑에 밀어넣었다. 웃방의 문을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히, 버긋이 열고 그를 잡아끌었다. 이후에 벌어질 일은 생각지도 않았다.
미닫이문을 사이에 둔 아래방에서 주인댁이 부시럭거리며 잠내나는 목소리로 이제 오느냐고 물었다.
《예, 저녁은 먹고 왔어요. 어서 쉬세요.》
그 다음 두사람은 어둠속에서 마주선채 까딱하지 못하였다. 림호의 키가 천정에 닿았다. 허리를 굽히며 그는 아직 밖에서 벌어지는 소동에 귀를 기울이고있었다. 은영은 너무도 뜻밖의 엄청난 일을 당하여 몸을 떨고있을뿐이였다.
마침내 은영이 먼저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목구멍이 타들고 가슴이 조여들다못해 뻐근한 아픔에 숨도 제대로 쉴수 없었다. 림호는 방안을 휘둘러보고있었다. 고리짝들이 한구석에 놓여있는 작고 알뜰한 방이였으나 한 녀가수의 안온한 보금자리로서는 너무도 빈약하고 조촐하게 느껴질것이다. 은영은 어둠속에서도 그의 날카로운 눈빛이 모든것을 샅샅이 살피는것을 보았다.
《조용해지면 난 가겠습니다.》
그가 하는 말이였다. 에그머니! 주인댁에서 듣고있는데 조심도 않고!… 아닐세라 아래방에서 또 물었다.
《아씨, 손님이 온게 아닌디?》
《아니예요. 학교에서… 학생들이…》
《그럼 불이라도 켜야제, 원.》
《아, 아니 일없어요. 그냥 자겠어요.》
그리고는 혀를 깨물지 않을수 없었다. 그냥 자겠다고?… 얼결에 한 그 말을 도로 삼킬수만 있다면!… 그러나 때는 늦었다. 전라도태생인 성칼사나운 주인집 과부댁이 무어라고 게두덜거리기 시작했다. 혀아래 소리였으나 행실이 바르지 못한 녀자인줄 몰랐다고 욕하는것이 알렸다.
이렇게 된바엔!… 더는 숨길것이 없게 되자 오히려 은영은 차츰 진정되고있는 자신을 느꼈다.
《앉으세요.》
《아니, 난… 가겠습니다.》
《너무 늦었어요. 지금 나갔다간 위험해요. 그거야 림호씨가 더 잘 아실텐데요.》
《?!…》
밖의 소동이 멀어져갔다. 그러나 여기서 나가는것이 얼마나 위험한가 함은 은영이도 잘 아는것이다. 하는수 없이 인제는 둘이서 밤을 밝히는 길밖에 없다. 아마도 두사람이 꼭같은 생각을 했을것이다. 림호가 자리에 앉으며 나직이 물었다.
《나를 믿습니까?》
《믿어야죠.》 은영은 자기의 목소리가 옳은가고 의심했다. 《믿을수밖에요.》
잠시 어둠속에서 그들은 눈길을 내려깔고있었다. 기나긴 이 밤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가. 어찌하여 이런 막다른 지경에 끌려들었는가?… 은영은 자기의 한채밖에 없는 엷은 이불과 담요를 내렸다.
《쉬세요.》
《아니 난… 일없습니다. 난 습관이…》
《쉬세요. 어서!》
싱갱이질이 시작되자 주인댁의 푸념이 또 시작되였다. 딸 하나를 두고 혼자사는 과부여서 처음 하숙을 정할 때 벌써 남자들을 끌어들이면 내쫓는다고 오금을 박았던것이다.
《오지랖 넓게 돌아친다 했는디… 새빠지게 남정네들이 드나들문 동네사람들 뭐라 하겠나 말이여. 과부댁네가 군서방질을 한닥하는 뒤소릴 워찌 막는당겨?》
두사람은 입을 다물었다. 잠시후엔 마치 약속이나 한듯이 잠자리를 가운데 놓고 서로 돌아앉고말았다. 귀전에서 모기가 폭격기소리처럼 앙칼지게 울며 돌아갔지만 까딱하지 않았다. 차라리 모기한테 뜯기는 편이 진저리나는 주인댁의 푸념보다는 나을것이다.
귀뚜라미가 씨르륵거리며 깊어가는 밤과 아늑한 잠자리의 꿈을 끊임없이 꼬드기고있었다.
고요… 숨소리도 저어하는 밤의 고요, 세살문창호지에 푸릿한 달빛이 스며들고있었다. 베토벤의 피아노쏘나타 《월광》의 선률이 그 달빛에 실려 흘러들고있다. 귀족가문의 처녀를 사랑했으나 비천한 신분때문에 실련의 고통을 겪어야 했던 베토벤, 그러나 그의 《월광》은 밝고 강렬한 내심의 격정을 안고있지만 저 달빛은 아려하고 처량하다. 어인 일인가. 오늘 나는 무슨 일을 저지르고있는것인가?… 은영이 처녀로 숙성할 때부터 아버지는 남자들과의 쓸데없는 교제를 삼가하라고 엄하게 훈계하군 했다. 그러면 쓸데없는 교제는 어떤것이고 필요한 교제는 또 어떤것이란 말인가?!… 이 밤에 미치지 않으면 졸도해버리든 무슨 일이 있을것만 같았다. 뒤쪽의 사내는 죽은 사람처럼 기척도 없이 웅크리고있으니 누가 이런 고통을 강요했단 말인가. 누가?!…
웬일인지 가슴이 저려나기 시작했다. 은영은 자기의 숨소리에조차 겁을 먹으며 흐느끼듯 허덕이며 치마자락만 잡아뜯고있었다. 지금까지 알지 못하던 모든것-야릇한 욕망과 따사로운 꿈, 무서운 기대가 한순간에 덮치듯 밀려드는것만 같았다. 이를 어쩐담, 어쩐담?!…
마침내 눈을 꼭 감고 두팔로 무릎을 감싸안았다. 자기의 겁에 질린 마음을 부둥켜안은것인지도 모른다. 귀뚜라미가 승이 나서 씨룩거린다. 무엇인가 줄곧 하소하고 귀띔하며 속살거린다. 일없어, 걱정마! 일없어, 걱정마!…
마침내 림호가 아스라하게 높은 하늘가에서 울려오는 소리처럼 낮고도 웅글게 속삭이였다.
《편히 쉬십시오. 은영씨, 래일 또 수업을 하고 공연도 해야겠는데…》
《…》
그린듯 앉아 듣고만 있다. 무슨 말이든 좋다. 말도 없이 등을 돌려대고있을바엔 물에 빠져버리는것이 나을것이다.
《난 일없습니다.》 그가 계속하는 말이였다. 《감옥에서 숱한 낮과 밤을 지내보았으니까요. 이렇게 앉아 열흘밤이라도 잘수 있습니다.》
감옥! 감옥이란 곧 어둠과 고통을 의미한다. 모진 고통을 이겨온 사나이, 그는 억센 사람이다. 그것만은 틀림없다. 그러한 사람이기에 그리도 가까이 손을 내밀면 잡힐수 있는 거리를 두고도 은근히 녀자의 마음을 흔들어보려 하지 않고 사소한 감정의 표현도 삼가하는것이 아니겠는가!… 이러한 생각이 은영이로 하여금 마음을 다잡게 하였다. 드디여 가슴속에 꽉 들어찼던 숨을 천천히 내뿜었다. 될대로 되라지, 그를 믿을수밖에… 믿는다는것은 좋은 일이다.
믿음이 가는 사람이란 흔치도 않다.
《좋아요.》 하고 은영은 남의 소리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자릴 펴드리겠어요. 잠간!…》
엷은 이불은 자기쪽으로 끌어오고 사내에겐 담요를 밀어주었다.
《편히 쉬세요.》
《고맙습니다.》
달빛이 스러져가기 시작했다. 귀뚜라미들도 더이상 꼬드길 멋이 없어져 마지막으로 힘없이 씨륵거렸다. 대신 아래방에서 코고는 소리가 고르로운 리듬처럼 조자맞게 울려오기 시작했다. 그 코고는 소리는 다른 의미로 딴 생각말고 잠이나 자라고 꼬드기고있었다. 모든것이 망각의 세계로, 꿈의 나락으로 불러주고있는것이다.
차츰 따사로운 물결이 흘러들었다. 마음속에 흘러들며 쉼없이 철썩이고있는 부드러운 물결… 회령천의 모래불과 오산덕기슭의 백살구꽃… 백살구꽃은 처녀처럼 피여나고 그 열매는 도련님처럼 달린다고 했었다. 그것들이 눈앞에 삼삼하다. 그리고 백살구씨를 엿에 졸여서 만든 행인당, 쌀과 함께 갈아서 쑨 행인죽… 어디 그뿐이랴. 철쭉꽃, 도라지꽃, 찔레꽃과 할미꽃… 그 섬약하고 아련한 꽃에 왜 할미라는 이름을 붙여놓은것인지?… 등뒤에서는 림호가 코소리를 높이기 시작한다. 정말 잠들었을가?… 의지가 굳센 사람, 죽을 고생을 다 겪어본 사람이 어느새 굳잠에 곯아떨어진것 같다. 어떻게 자나 보고싶었다. 그러나 돌아볼수가 없다. 외간남자가 자는 모양을 몰래 살펴보는 처녀가 있다면 그건 벌써… 에그머니! 코고는 소리가 점점 더 크게, 드렁드렁 울리고있다.
저러다 주인댁이 잠을 깨면 또 뭐라겠는가?…
그러나 아래방에서는 아무 기척도 없다. 밤은 밑창없이 깊어만 가고… 그리하여 은영의 가슴도 차차 그 울림에 맞추어 고요히, 고르롭게 숨쉬기 시작했다. 겁먹을 필요가 없는것이다. 그가 은영이를 믿고 편안히 코를 골며 자고있는 이상 은영이 역시 그를 전적으로 믿어야만 했다.
…
언제 어떻게 잠들었는지 알수 없다. 새벽의 파르스름한 미광이 문창호지에 스며들무렵 은영은 흠칫 놀라며 눈을 떴다. 처음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가늠할수 없었다. 누가 무엇때문에 그를 깨웠는지도 알지 못했다. 그러나 곧 모든것이 상기되였다. 그를 깨운것은 비상한 일이 벌어졌던 간밤의 아릿한 기억이였다.
잠자리를 더듬으니 지난밤 은영이 밀어주었던 담요는 그 자리에 개여놓은채로 있었다.
림호는 한장의 쪽지를 남기고 갔다.
《은영씨, 믿어주어 고맙습니다. 언제든 그 믿음을 저버리지 않겠습니다. 부디 안녕히!… 림호.》
은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한동안 우두커니 서있었다. 문창호지로 스며들고있는 창백한 대기가 처녀의 가슴에도 산뜻하게 흘러들었다.
문을 열었다. 토방우에 널려있는 담배꽁초들이 먼저 눈에 띄였다. 발로 비벼끈것들이였다. 그러니 그는 밤새 한잠도 자지 않았던것이다. 가슴이 저려들었다. 알수 없는 서글픔, 그것은 아쉬움이였을가?… 무엇인가 영영 사라져버린듯 한 아쉬움… 찬양하고싶은 사내였다. 진정 고마운 사람, 별안간 혈육처럼 가까와진 친근한 벗이였다!…
가슴가득 맑은 공기를 호흡하며 림호가 갔을 골목길에서 점도록 눈을 떼지 않고있었다. 덧문을 댄 어느 집 홰대에서 수닭이 목을 빼들고 울어대였다. 새날이 밝고있는것이였다. 새날, 은영이 처음으로 애잔한 꿈속에서 밤을 보내고 맞는 새날 새 아침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