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도이췰란드방식》에 대한 비판
도이췰란드통일정책과 대북대결정책의 비교검토
남쪽의 《흡수통일》론자들에게는 도이췰란드의 흡수통일경험이 마치 공자의 론어나 그리스도교의 성경과 같아보이는것 같다. 그래서 그들은 통일도이췰란드의 현 실태를 연구하겠다고 앞을 다투어 비행기에 오르는 바람에 베를린공항은 갑자기 《한국》인들로 붐비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그런 가운데 올해 봄 남쪽의 당국자는 흡수통일의 경험을 배우겠다고 베를린을 방문하였다.
당국자는 이번 도이췰란드방문과정에 도이췰란드통일에서 주역을 했다고 하는 이전 동서도이췰란드의 고위인물들과 현직인물들을 초청하거나 찾아다니면서 흡수통일경험에 대한 조언을 받았다.
이전 동도이췰란드의 마지막 총리 메지에르, 통일조약에 서명한 이전 서도이췰란드의 내무부 장관이였던 쇼이블레, 흡수통일을 설계한 수상 콜의 외교보좌관 텔칙, 군사통합을 주도한 륙군 동부지역사령관이였던 쉔봄, 현 베를린 시장 보베라이트 등이 남쪽당국자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조언을 준것으로 전해졌다.
이전 서도이췰란드가 할슈타인원칙(동도이췰란드를 주권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어떠한 접촉과 교류도 거부하였으며 외교관계에서 다른 나라들이 동도이췰란드에 접근하는것도 가로막았던 서도이췰란드의 정책)을 접고 동도이췰란드와 이전 동유럽사회주의국가들과 적극적으로 교류하고 협력하였던 빌리 브란트총리의 동방정책을 지속적으로 펴온것이 결국은 동도이췰란드를 통합하는 흡수통일을 가져올수 있게 하였다. 이로부터 그들은 통일하려면 무엇보다도 상대와 꾸준히 교류하고 협력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당연히 그래야 하는것이며 여기에는 경험이 될만 한 새삼스런것도 새로운 내용도 없다.
분렬된 민족이 하나로 재결합하여 통일하는데서 분단쌍방사이에 다면적합작과 교류를 실현하는것은 합법칙적이며 필수적인 공정이다.
우리의 경우 남쪽집권자들이 그처럼 입을 삐쭉거리며 비난하는 《잃어버린 10년》동안에 남과 북은 교류와 협력을 꾸준히 그리고 착실히 진행하여왔다. 그리하여 남북간에 끊어진 민족적뉴대를 회복하고 민족적공통성을 찾으며 민족적단결을 이룩하는데서 괄목할만 한 성과물들을 이루어냈다.
우리민족끼리리념아래 진행된 경제와 문화는 물론 정치와 군사분야에서의 남북공조의 과정은 우리의 통일을 눈앞에 보이는 현실로 다가오게 한 그 결과가 이에 대한 산증거라고 말할수 있을것이다.
동서도이췰란드통합의 주역들은 서도이췰란드가 이전 쏘련과 적극적으로 대화하고 협력하였듯이 남《한》도 북과 교류하고 협력해야 하며 미국과의 관계를 중시하면서 중국과도 통일문제를 놓고 꾸준히 접촉하고 협력할것을 권고하였다.
이 문제에서는 한두가지 해명이 있어야 할것 같다.
외세에 의해 분단된 《한》반도를 통일하는데서 분단의 장본인이고 현재도 분렬통치의 전략을 포기하지 않고있는 그러한 미국과의 관계를 중시한다는것은 말그대로 이률배반이 아닐수 없다.
그리고 《한》반도통일의 주체는 남과 북의 우리 민족자신이라는 근본문제를 뒤전에 밀어놓고 외세의 힘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정책을 우선시해서는 통일도 평화도 이루어낼수 없다는 그것이다.
현실적으로 남쪽의 현 당국이 대미의존일변도로 나가면서 미국의 《한》반도전쟁정책을 집행하고있기때문에 남북대화, 협력과 교류가 단절되는 사태가 조성된것이다.
도이췰란드사람들이 남쪽당국자에게 같은 민족이라는 생각을 가지는것이 중요하다고 조언한것은 가장 근원적인 문제를 지적한것이라고 하겠다.
그들은 어떠한 외부사정이나 대내외환경변화에도 불구하고 같은 민족이라는 강렬한 감정을 유지하는것이 통일의 가장 중요한 열쇠로 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고 한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동서도이췰란드에 사회주의적민족과 자본주의적민족이 존재한다는 《2민족리론》으로부터 《같은 민족》이라는 개념으로 접근하여 결국 통일을 이룩할수 있었다는것이다.
전해온 말에 따르면 도이췰란드사람들의 이러한 조언을 받을 때 남쪽방문단의 얼굴은 자신도 모르게 빨개졌다고 한다. 사회주의사회에서 살고있는 북의 동포들을 같은 민족이라는 범주에서 제외해버린 그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정문에 일침》 즉 자기 머리꼭대기에 침이 박히는것과 같은 뜨끔함을 느끼게 했을것이라고 짐작된다.
이밖에도 도이췰란드의 통일주역들은 통일국가창출에 대한 우방의 담보와 주변국들의 리해를 받으며 통일준비를 미리부터 하는것이 필요하다고 조언하였다.
그것은 이전 서도이췰란드의 경우 미국이라는 《든든한 우방》을 확보하고 그를 통해 안보를 담보받았기때문에 이전 쏘련과 마음놓고 도이췰란드에 대한 통일협상을 할수 있었다는 뜻이지 동서도이췰란드사이의 통일협상을 두고 한 말은 아니였다고 해석된다.
사실상 도이췰란드통일은 동서도이췰란드간의 민족적, 자률적합의에 의하여 이루어진것이라고 보기 어려운 점이 많은것이다. 더우기 이 문제에서 우리의 경우는 사정이 완전히 다르다는것을 류의해야 한다.
구구하게 말할것 없이 우리와 도이췰란드의 분단원인과 과정을 살펴보면 리해될것이다.
조언자들은 통일이 되여도 주변국들에 절대로 위협이 되지 않고 국제안보질서가 그대로 유지될수 있다는 확신을 주변국들에게 심어주어야 한다고 했는데 이것 역시 우리와는 거리가 먼 문제인것이다.
두차례의 세계대전을 일으켜 인류에게 참화를 들씌웠고 현재는 나토의 중추국가로서 유럽의 한복판에 웅크리고있는 도이췰란드가 통일이 되여 국가의 정치, 경제, 군사적힘이 더욱더 커질 때 유럽의 평화와 안정에 어떤 위험이 조성될것인가 하는 우려는 주변나라들의 공통된 심리였다.
그래서 서도이췰란드는 자기들의 통일이 주변국들에게 도움으로 된다는 인식을 주기 위한 분명한 목표를 책정하고 이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다자외교를 주도하면서 20~30년간 통일준비를 위한 외교활동을 끊임없이 해왔던것이다.
그러나 《한》반도의 통일로 창출되는 통일국가가 주변국가들에 그 어떤 침략위협으로 될수 없다는것은 자명한 일이다. 오히려 남북이 통일되면 동북아시아에서 전쟁의 위험한 발화점이 제거되고 동아시아에 공고한 평화와 안정이 깃들게 될것이 명백하다.
도이췰란드의 조언자들은 남쪽당국에게 통일준비를 미리부터 할것을 지적하였다.
서도이췰란드는 통일이 된 다음 4년간 1 200억DM의 통일비용이 들것이라는 판단에 기초하여 통일기금을 책정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매해 1 500억DM의 비용이 들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고 하면서 남쪽이 사전에 치밀하게 통일비용에 대비한다면 도이췰란드가 범한 시행착오를 피해갈수 있다고 조언하였다.
이와 같은 도이췰란드통일의 주역들이 넘겨준 《통일경험》들에는 합당한것도 있고 합당치 못한것도 적지 않았다고 보아진다.
그런데 여기에는 우리가 간과할수 없는 문제가 있다. 그것은 《한》반도의 통일이 남쪽의 주도하에 북에 대한 《흡수통일》로 성취된다는 전제하에 그 모든 조언들이 제기되였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언들은 력설적이게도 남쪽당국의 《흡수통일》정책이 실현될수 없는 하나의 망상에 불과하다는것을 반증하는 자료로 되고말았다.
이렇듯 소기의 성과를 이룩하지 못한 남쪽 《실용정부》대표단의 도이췰란드방문과정에서는 단막극과 같은 치졸한 놀음이 벌어졌다. 그들은 그토록 싫어하던 김대중《대통령》의 《베를린선언》을 모방하여 《베를린제안》이라는것을 내놓았다. 그들은 제안을 발표하면서 중요하게는 《북의 선 핵무기페기선언》을 운운함으로써 국제사회로부터 평화와 화해의 상징인 베를린의 이미지를 심각하게 훼손시켰다는 비판을 받았다.
핵은 북쪽이 쥐고있는 강위력한 전쟁억제력이며 그 어떤 경우에도 양보할수 없는 선군의 상징이라고 할수 있다. 따라서 그러한 제안이 애당초 실현될수 없는것임은 물론이고 그것이야말로 북쪽의 존엄을 모독하는 불순한 행태였다는것이 일반적인 관측이였다. 언론, 전문가들은 남쪽당국자가 새로운 립장변화는 아무것도 없이 기존의 《원칙》을 재천명하여 북의 핵포기를 압박하는데 치중하였다고 하였다.
2011년 5월 서울을 방문한 미국 대북정책특별대표 바즈워스는 《베를린제안》을 지지해달라는 남쪽당국의 요청에 대하여 확답을 피하는 모호한 립장을 취함으로써 제안의 정치적의의를 무산시키였다.
이것으로써 남쪽당국자의 도이췰란드행은 차원낮은 정치적안목과 무능력만을 스스로 로정시켰을뿐 아무런 소득도 없이 무위로 끝나고말았다. 그가 애용하는 표현을 빌려 말한다면 밑지는 장사만 한셈이였다.
그런데 여기에 그들이 본의아니게도 남쪽국민들에게 확신시켜준 하나의 교훈이 있었는바 그것은 도이췰란드통일과 《한》반도통일은 동류항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을 객관적으로 증명해주는것이 《남북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와 동서도이췰란드기본조약이며 두 문서를 비교검토해보면 량국통일의 차이점이 확연히 드러난다.
1991년 12월 13일 남북의 제5차 고위급회담에서 《남북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가 채택되자 《한》반도는 환호의 분위기로 들끓었다.
합의서채택이전까지만 해도 북의 《핵사찰》문제를 둘러싸고 전쟁의 위기감까지 감돌던 《한》반도정세였다. 그런 정세속에서 남북간에 민족대단결에 기초한 평화구축의 기본사항들이 합의된것이다.
합의서는 남북문제해결의 원칙을 재확인하고있는바 그것은 그 서문에 반영되여있다.
합의서 서문은 다음과 같다.
《남과 북은 분단된 조국의 평화적통일을 념원하는 온 겨레의 뜻에 따라 7. 4남북공동성명에서 천명된 조국통일3대원칙을 재확인하고 정치군사적대결상태를 해소하여 민족적화해를 이룩하고 무력에 의한 침략과 충돌을 막고 긴장완화와 평화를 보장하며 다각적인 교류, 협력을 실현하여 민족공동의 리익과 번영을 도모하며 쌍방사이의 관계가 나라와 나라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라는것을 인정하고 평화통일을 성취하기 위한 공동의 노력을 경주할것을 다짐하면서 다음과 같이 합의하였다.》
합의서 서문에서 《7. 4남북공동성명에서 천명된 조국통일3대원칙을 재확인하고》와 《쌍방사이의 관계가 나라와 나라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라는것을 인정하고》라고 지적한 대목에 류의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다름아닌 《자주, 평화통일, 민족대단결의 3대원칙》 및 《하나의 한국》이라는 두개의 원칙이 그대로 관철되고있음을 보여준다.
뿐만아니라 합의서에는 구체적합의사항을 실천하기 위한 보장장치까지 명시되여있다. 합의서내용의 실천을 위해 분과위원회를 구성하고 나아가 공동대책위원회를 만들어 실행해나가는 조항이 포함된것은 실천적측면에서 높이 평가되고 그 실행을 통해 기대되는바가 컸던 부분이다.
이보다 앞서 1989년에 도이췰란드에서는 서도이췰란드가 동도이췰란드를 흡수통일하는것이 기정사실화되여있었다. 그런데도 우리 땅에서 남과 북의 당국자들이 두 정부와 두 체제를 서로 인정했다는것은 어느쪽에서도 윁남과 같은 전쟁통일은 말할것 없고 도이췰란드와 같은 흡수통일도 하지 않겠다는 뜻을 표명한것이라 하겠다. 그때문에 평화공존협약이라고 할 남북합의서가 교환되였다고 할수 있다.
한편 도이췰란드쪽을 보면 량측이 정상회담을 가졌던것은 우리보다 30년이나 앞선 1970년이였다. 그해 3월 19일 오전 10시 기차편으로 국경도시 에어푸르트에 도착한 서도이췰란드의 빌리 브란트총리가 그 도시의 한 호텔 3층에서 빌리 스토프 동도이췰란드총리와 첫 정상회담을 가졌다. 4차례에 걸친 실무준비회담이 있었으나 의제합의조차 이루지 못한채였다. 이에 대해 《불특정 자유의제가 합의되였을뿐이다. 분단 23년만에 이루어진 첫 회담은 각자의 기존립장확인이 소득이였다.》고 기록되여있다.
브란트총리의 뇌리에 역시 도이췰란드통일문제는 동도이췰란드에 관한 한 《점령국》인 쏘련을 상대할수밖에 없겠다는 새로운 실증을 얻게 된것이 소득이였을것이다.
중요한것은 이것이다. 동서도이췰란드는 결과물없는 첫 정상회담이후 량국의 외무차관을 대표로 하는 실무급회담이 74회나 열려 결국 1972년 12월 21일 통일의 큰 문이 된 《동서도이췰란드 기본조약》이 체결되는 대사를 이루어냈다.
도이췰란드의 두 국가 인정, 현존 국경인정과 분쟁의 군사적해결 포기, 쌍방의 독립성과 평등성 인정, 량국 수도에 대표부 설치 등이 내용의 골격이다. 그리고 1973년에 동서도이췰란드는 유엔에 동시가입하게 되였다.
남북합의서와 동서도이췰란드기본조약을 비교해보면 1972년 12월 21일에 체결된 기본조약은 도이췰란드의 분단상태를 인정하면서 서로를 외교적으로 승인하고 유엔동시가입의 물고를 텄다.
기본조약에는 《통일》이라는 표현이 없는데 반해 남북합의서에는 《분단된 조국의 평화적통일을 성취하기 위하여》라고 합의서의 목적을 명문화하였다.
동서도이췰란드기본조약 전문은 《조약체결 쌍방은 …유럽의 긴장완화와 안전보장에 기여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민족문제를 포함한 여러가지 기본문제들에 대하여 견해의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력사적인 현실에 립각하여 량도이췰란드주민들의 복지향상을 목적으로…》라고 되여있다.
동서도이췰란드의 기본조약은 상호대등한 립장에서 동서도이췰란드가 유엔헌장의 정신아래 무력을 사용하거나 위협하는것을 금지하고 유럽의 평화 그리고 국제적군축노력에 동서 량도이췰란드가 참여한다는것을 선언하였고 다면적인 교류(경제, 려행, 공해문제, 통신, 문화, 청소년교류, 체육, 과학기술 등)를 실현시킬것을 약속하였다.
력사에는 우연의 일치가 있는것 같다. 서도이췰란드의 대기업 크루프의 최고경영자인 바이츠가 호네케르시절에 동서도이췰란드교역을 위해 힘쓴 공로로 동도이췰란드의 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면, 《한》반도에서는 소떼를 몰고 휴전선을 넘은 남쪽 현대재벌의 정주영명예회장이 남북간의 협력과 교류사업에 크게 기여한 공로로 평양으로부터 통일애국인사로 파격적인 우대를 받았다.
여기에서 우리가 중요하게 보아야 할 점은 이러한 동서도이췰란드사이의 상호신뢰구축과정이 유럽내의 군축이라는 배경에서 진행된것이지 결코 동서도이췰란드사이의 정치적, 군사적분야의 접촉만으로 이루어진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서도이췰란드의 도이췰란드통합문제에 대한 리해에서 얄따회담이후 형성된 유럽내의 정치적, 군사적긴장의 완화 특히 고르바쵸브 등장이후의 동서관계와 결합되여 오늘의 통일도이췰란드가 있게끔 된것이며 결코 그들이 우리보다 더 현명하고 지혜로왔던것이 아니였다는것을 《한》반도의 통일을 열어가는 우리들이 잊어서는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