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그날 밤, 룡복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있었다. 문밖에서는 미친듯 한 바람이 불어치고있었다. 꽃샘을 하는 바람치고는 너무도 세차게 태질을 치고있었다.

바람에 흩날려 떨어지는 찬 비방울이 후두둑후두둑 종이를 바른 장지문을 두드리며 지나갔다.

부엌채쪽에서 무엇이 와르르 무너지며 자끈우지끈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에이, 미친놈의 바람, 장독대이영을 훌떡 벗겨갔구나.…》

송서방이 쉴새없이 두덜거리며 이리저리 뛰여다니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딘지 알수 없는곳에서 덜커덩거리고 삐걱거리는 소리가 그칠새없이 들려오고 대문과 허청간 문들이 누가 와서 당기는것처럼 덜컹거리였다.

등디우에서 가물거리는 등불까지 위태롭게 흔들거리며 진정하지 못하고있었다.

술까지 곁들인 풍성한 저녁상을 물리고난 뒤에 바깥사랑으로 나와서 몇마디 말을 주고받던 박충량이가 들어간지도 이윽하였다. 큰 호리병주전자에 가득한 술을 혼자서 랭수마시듯 해버린 어둔이는 그만 업어가도 모를 지경으로 곯아떨어지고 류일천이는 기어이 고모네 집에 나가 자겠다고 하면서 가버리였다.

희미한 등불아래 룡복이와 리생원 두사람만 말없이 앉아있었다.

장지문밖에서 들려오는 바람소리때문인지 너렁청한 사랑방은 더욱 썰렁해보이였다.

룡복은 벽에 기대앉아 천정에서 불안하게 그물거리는 불그림자를 쳐다보고있었다. 무엇이라 말할수 없는 불안한 생각들이 두서없이 밀려들었다.

드문 일이기는 하지만 왜놈들이 가끔 부녀자들을 끌어다가 욕을 보이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면 죽이거나 저의 나라로 아주 끌어가버리는수도 없지 않았다. 그러니 어찌 어순이만 무사하기를 바랄수 있겠는가!

쯔시마로 가는 장사짐과 함께 배에 실었다는것을 보면 왜놈들이 어순이를 그곳으로 끌어가려 하는것이 틀림없었다.

쯔시마, 쯔시마… 그곳은 무서운 왜도적의 소굴이였다. 그곳으로 끌려가면 어순이를 영영 잃고말지도 모른다.

룡복은 불길한 생각을 털어버리려는듯 세차게 머리를 가로저었다. 영영 잃다니?

어순이를 잃고서는 살수 없는 자기였다. 이 세상 그 무엇도 어순이를 자기의 품에서 앗아갈수는 없었다. 목숨을 걸고서라도 울릉도로 쫓아가야 한다. 섬을 렴탐하려고 떠난 놈들이니 그곳에 오래 머무르지는 않겠지만 며칠간은 지체할것이다. 그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하였다.

그런데 그때까지 과연 어순이가 무사하겠는지… 그처럼 소중히 품속에 간수하던 옥가락지까지 잃은것을 보면 무사하기를 바랄만 한 아무런 담보도 없었다.

짐승같은 왜놈들이 그 더러운 손으로 품속에 간직하고있던 옥가락지를 움켜잡고 빼앗아내는것 같은 끔찍한 환영이 눈앞에서 얼른거리였다. 옥가락지를 잃고 어순이는 또 얼마나 무서운 절망과 고통을 당했을것인가!

《아!》

룡복은 저도 모르게 가위눌린듯 한 신음소리를 지르며 머리를 벽에 짓찧었다.

말없이 룡복을 지켜보고있던 리생원은 시름겹게 한숨을 내쉬였다.

《마음을 눅잦히게. 왜놈들에게 잡혀가기는 했지만 이제는 찾아야 할 사람의 행처가 분명해졌고 또 살아있다는것도 확실하지 않나? 욕속부달이라구 너무 조급히 굴면 뜻을 이루지 못하네.》

리생원은 측은한 눈길로 룡복을 바라보다가 그의 생각을 다른데로 돌려볼 심산인지 화제를 바꾸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왜놈들이 울릉도를 렴탐하는것이 심상치를 않네. 내 울릉도에 가보지는 못했지만 옛책들을 보니 참말 신선이 사는곳인듯이 적어놓았더란 말일세.》

리생원은 잠시 생각을 더듬고나서 말을 이었다.

《〈습유기〉라는 옛책에는 방당산 동쪽에 울수라는곳이 있는데 거기서는 천길이 넘는 련뿌리가 난다고 씌여있었네. 그 울수라는곳이 바로 울릉도일세. 그리구 〈산해경〉이라는 책에는 백길이 넘는 큰 파도가 일어서 신선이 아니고서는 거기로 건너갈수 없다고 했네. 옛책에 씌여진것이라 믿기 어려운 점도 없지 않지만 어쨌든 먼 옛날부터 사람들이 울릉도를 매우 신기한 고장으로 여기였다는것이 짐작되네. 우리 나라 책들을 보면 울릉도에는 큰 전복과 미역이 많고 새와 짐승으로는 까막까치와 산고양이와 쥐가 있을뿐이고 특이한것은 가지어라는 이상한 물고기가 있다고 했는데 오랜 사공들의 말을 들으니 가지어는 항간에서 물개라 부르는 바다짐승이라고 하네. 짧은 발과 꼬리가 있고 땅에서는 빠르지 못하지만 물속에서는 살같이 빠르며 소리는 어린아이 우는 소리같다네. 기름은 등불을 켜는데 쓰지만 가죽은 물에 잘 누그러들지 않아서 쓰지 못한다네.》

밖에서는 여전히 바람소리가 소란하게 들려왔다. 한동안 말을 끊었던 리생원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더욱 신기한것은 그 섬에 있는 세 봉우리가 천하에 제일가는 〈단사〉의 산지라는 말이 있네. 〈단사〉중에서도 가장 신기한 〈비사〉라는것이 거기 있다고들 하네.

〈비사〉란 신령이 되는 약이라고 하는데 그렇게 신묘한 물건이기에 좀처럼 얻기가 힘들고 비록 얻었다 해도 날아서 도망가므로 사람이 손에 쥐기가 어렵다고 하네.

그래서 혹시 〈비사〉를 얻게 되면 흰 사기병에 넣어 개흙으로 마개를 단단히 한 다음 다시 목이 긴 큰 병에 넣고 바다물을 가득 채운후에 밀봉을 해두면 그것이 도망가는것을 막을수 있다고 하네. 그 말이 정말인지는 나도 알수 없네. 하지만 울릉도가 그만큼 물산이 특이한 곳이라는것은 짐작할수 있지 않나? 땅이 비옥하여 대가 기대처럼 크게 자라고 복숭아는 씨가 한되들이만큼 크다는 기록도 있었네.》

리생원은 문득 하던 말을 끊고 룡복이쪽을 건너다보았다. 빨간 불티만 남아서 가물거리던 등불은 거의 꺼지다싶이 사그라져서 벽에 기대앉은 룡복의 거무스레한 그림자만 보이였다.

《임자, 내 말을 듣나?》

룡복은 그제야 괴로운 생각에서 소스라치듯 깨여나 자기의 아픈 마음을 위로해주려고 애쓰는 리생원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던지 자리를 고쳐앉았다.

《내 말인즉 다른게 아니구 울릉도가 그토록 물산이 특이하고 기름진곳인데 조정에서는 사람들을 살지 못하게 하니 자연히 왜놈들이 욕심을 내서 간사한짓을 꾸미려들지 않을수가 있겠는가 하는 말일세. 통탄할 일이 아닌가!》

리생원의 무거운 한숨소리가 들리자 룡복은 드디여 입을 열었다.

《왜놈들이 아무리 욕심을 내도 섬에는 우리 사람들이 예나 다름없이 살고있으니 그리 쉽게 놈들의 차지로 되지는 않을것입니다.》

《아니? 사람이 살다니? 그게 웬말인가?》

벽에 기대앉았던 리생원이 허리를 펴고 바로앉았다.

《여러해전 일이지만 생원님과 바둑이랑 두던 그 문서방이 생각나지 않으십니까?》

《그래 임자네 이웃에 살던 그 사람이 생각나네.》

《그 문서방이 원래 조상대대로 울릉도에서 살던 사람인데 6~7년전에 섬으로 갔지요. 아무도 몰래.》

《허- 그럼, 숨어살겠네그려.》

《그러겠지요. 말을 들으니 그렇게 사는 집이 몇집 잘되는 모양입디다.》

《허- 그렇겠지. 섬살이가 고생스러워도 제 살던 고장이요 선조의 백골이 묻힌 땅이니 떠나기가 어려울걸세. 그런데 제 나라 제 고장에서 숨어살아야 하다니…》

리생원이 탄식을 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쳐다보았다.

룡복은 문득 문서방네 외아들인 쇠동이가 생각났다.

쇠동이가 열살이고 룡복이가 열아홉에 났던 때였다. 어느날 쇠동이가 룡복을 보고 말하였다.

《형님, 우리 울메 간대.》

《울메가 어디냐? 울릉도말이냐?》

《몰라. 좋은 곳이래. 복숭아가 수박만하대. 같이 가서 따먹을가?》

그러더니 그후 쇠동이는 아버지를 따라 아무도 몰래 그 울메라는 곳으로 가버리였던것이다.

《그래 임자는 이제 어떻게 할 셈인가? 아무래도 약혼녀를 찾아와야 할게 아닌가?》

리생원이 근심스럽게 물었다.

룡복은 이미 마음다진대로 대답하였다.

《울릉도로 쫓아가겠습니다.》

《그래야겠지. 헌데 혼자서 갈텐가?》

《아마 친구들이 나서줄것입니다.》

리생원은 잠시 말이 없었다.

《내 생각에는 우선 관가에 알리는것이 좋을것 같네. 자네의 약혼녀가 끌려간 일에 대해서는 등한히 여길지 모르나 왜놈들이 울릉도를 렴탐한다는것을 알면 관가에서 가만있지를 않을걸세. 군사를 파하든지 여하간에 무슨 조처가 있을게 아닌가. 그런 기회를 타면 임자가 약혼녀를 구원하기도 훨씬 헐할걸세.》

룡복은 리생원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렇게 하겠노라고 대답하였다.

《관가에 알리는것은 동래부에 알리나 좌수영에 알리나 큰 차이가 없겠지만 해안방비를 맡은 수군을 통솔하는것은 좌수영이 하는 일이고 또 임자도 좌수영에 속한 수군의 한 사람인데 아무래도 좌수영에 알리는게 마땅할것 같네.》

리생원은 마치 철모르는 아이에게 길을 가리켜주듯이 자상히 일깨워주었다.

《명심하고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

룡복은 고마운 마음으로 대답하였다.

《생원님, 그만 눈을 좀 붙이십시오. 래일은 동래까지 먼길을 가야 할텐데…》

《허허… 걱정말게. 내 삼천리를 메주밟듯 하며 편답으로 20여년을 산 사람일세.》

리생원은 불안스러운 바람소리에 잠시 귀를 기울이다가 목침을 찾아 베고 누웠다. 누워서도 오래도록 잠들지 못하고 궁싯거리였다. 그러더니 문득 생각이 난듯이 말을 이었다.

《나는 그때 임자가 왜인을 숨겨둔것을 매우 미심쩍게 여겼네. 헌데 지금 와보니 공연한 걱정을 했나보네.》

룡복은 사과하듯이 나직이 대답하였다.

《사실 그때 저는 어순이가 왜놈들한테 잡혀갔으리라는 짐작이 이미 들었습니다. 그래서 무슨 단서라도 잡아보려고 생원님이 못마땅해하는줄 알면서도 그 왜인을 숨겨두었소이다.》

《허허… 그랬던가? 그런줄 모르고 나는 매우 마음 언짢았어.》

《죄송합니다.》

《아닐세. 지금 와보니 임자의 선견지명이랄가, 그 남다른 궁냥에 탄복할뿐이네.》

《잃어진 사람을 기어이 찾으려니 그렇게 된것이지 그게 무슨 선견지명이겠소이까. 그런데 후에 알고보니 그 왜인은 정말 불쌍한 사람이였소이다.》

룡복은 우마무라의 억울한 일을 다 이야기하였다.

《이제 어지간히 몸이 추서면 대마도로 돌려보낼 생각입니다.》

리생원은 한동안 룡복의 넓은 도량과 사람됨됨을 헤아려보는듯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흔연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물론 불쌍한 사람이라니 그래주어야 하겠지. …하지만 왜인의 일인만큼 실수없이 하게.》

《명심하겠소이다.》

가물거리던 등잔불은 두사람이 말을 마치기전에 벌써 스러져버리였다.

방안은 칠흑같이 캄캄하였다.

룡복은 목침을 베고 비스듬히 누웠다. 그러나 잠이 오지 않았다. 세찬 바람소리와 문풍지 우는 소리를 듣고있노라니 다시금 가슴을 짓누르는듯 한 불안과 함께 더없이 고통스러운 생각이 갈마들었다.

어순이는 이 비바람치는 무서운 밤을 어디서 어떻게 지내고있을가? 두팔을 꽁꽁 묶이운채 울릉도에서? 아니면…

대중할수 없는 생각들이 머리속에서 엉켜돌아갔다.

시간은 얼마나 흘렀는지…

갑자기 문밖에서 어지러운 발자국소리가 나더니 《도적이야!》 하는 다급한 소리가 들려왔다.

룡복은 벌떡 일어나앉았다.

《도적이야! 왜도적이 달아났소.》

송서방이 문밖에 와서 소리를 질렀다.

룡복은 문을 차고 뛰여나갔다. 찬비를 휘줄근히 맞은 송서방이 희미한 등초롱을 들고 후들후들 떨면서 퇴마루아래 서있었다.

《이거 큰일났네. 왜도적들이 허청간벽을 마스구 도망쳤네.》

룡복은 급히 송서방을 따라 허청간쪽으로 달려갔다.

허청간벽에 시꺼멓게 구멍이 뚫리고 왜도적 세놈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언제 이 모양이 됐소?》

룡복은 격분으로 온몸을 떨며 소리를 질렀다.

《글쎄… 하두 바람소리가 소란스러워 밖에 나와보니 이꼴이 아니겠나. 초저녁에는 아무 일도 없었네.》

룡복은 불이 펄펄 이는듯 한 눈길로 허청간벽에 시꺼멓게 뚫린 구멍을 쏘아보았다. 대가지로 산자를 엮고 안팎에 흙매질을 한 벽은 손바닥처럼 얇아서 발로 차도 구멍이 날 정도로 어설피였다.

어느틈에 뛰여나왔는지 어둔이가 왜도적이 도망친 구멍을 살펴보고나서 송서방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육실할… 이게 무슨짓이요? 이따위 닭우리만도 못한데다 그 이리같은 놈들을 가두다니? 이거야 어서 도망치라고 한 노릇이 아니고 무엇이우?》

《아니? 그게 무슨 소린가? 자네들이 보는데서 가두었구 열쇠까지 맡겼는데 왜 나한테 지청군가, 흥!》

송서방이 코방귀를 뀌며 연방 퉤퉤 침을 내뱉더니 절뚝거리며 행랑채쪽으로 사라져버렸다.

박충량이가 던진 그물에 걸린것이 아닌가 하는 무서운 의혹이 룡복의 머리속에서 번개쳤다. 모든 일로 미루어보아 박충량이가 왜도적을 어디론가 빼돌렸을수 있으리라는 어렴풋한 짐작이 지꿎게 갈마드는것이였다.

《육실할… 이 열쇠를 맡긴것두 다 우리를 속이는짓이였어. 그래 이놈들을 가만두겠나?》

어둔이는 허청간쇠를 땅바닥에 내던지며 펄펄 뛰였다. 룡복의 눈빛도 저으기 무섭게 번뜩이고있었다.

마당으로 따라나왔던 리생원은 두 젊은이가 다 격분을 참지 못하여 당장 박충량의 목덜미라도 끌어낼듯이 덤비는것을 보자 급히 만류하였다.

《그만 진정들을 하게. 그렇게 할 일이 아닐세. 분한 생각같아서야 무슨 일인들 못하겠나. 하지만 왜도적이 도망을 쳤으니 이제는 이 집주인이 닭을 잡아먹고 오리발을 내놓아도 임자네들은 할 말이 없게 되였네.》

《그래도 이 집 울타리안에서 벌어진 일인데 말 한마디 따져묻지 못하겠습니까?》

룡복이가 격분을 참지 못하고 부르짖었다.

《아닐세. 경우는 아무리 옳다 하더라도 관가를 끼고있는자이니 당해내지를 못하네. 관가에서 이 집주인의 말을 듣지 임자네 말을 들을상싶은가? 공연히 승산없는 말씨름을 하다가 시각을 놓치면 도리여 큰일을 그르칠수가 있으니 임자들은 아직 잠자코있게.》

룡복이와 어둔이는 황소숨을 내쉬며 분을 삭이느라고 씨근거리였다.

어둑어둑하던 하늘이 환히 밝자 박충량이가 도차지와 함께 바깥사랑으로 유유히 걸어나왔다.

《거, 듣자니 간밤에 왜도적이 벽을 허물구 도망쳤다는데 이런 불상사가 어디 있겠나. 임자네들을 굳이 붙잡아둔 내 처지가 참 난처하게 되였네그려.》

박충량은 참으로 딱하다는듯이 입맛을 쩝쩝 다시며 룡복이와 어둔의 낯빛을 은근히 살피였다.

룡복은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난처하다니? 왜도적을 그 닭우리같은 허청간에 가두라고 한것이 누구의 처사인데 이제와서 난처하단 말씀이요?》

《아니? 그게 날보구 하는 소린가?》

《허- 여러 말을 할것이 없네.》

리생원이 급히 막아나섰다.

《보아하니 미상불 주인의 처지도 미안하지 않을수 없게 되였고 또 모처럼 잡은 왜도적을 놓친 젊은이들의 분한 심정이야 더 말해서 무엇하겠나. 그러니 내 생각에는 주부가 재력으로 보나 도량으로 보나 년장자의 도리를 생각해서도 그렇구 딱한 일을 당한 젊은이들을 성의껏 도와나서는것이 마땅한 일이 아닐가 생각되는구려.》

《지당한 말씀입니다.》

눈치빠른 박충량은 얼른 이렇게 대답하였다. 비록 차림새는 어수룩해도 지체가 량반이고 또 말하는것이나 사리를 분별하는 품으로 보아 그저 눈아래로 볼 늙은이가 아니라는것을 대뜸 알아차렸던것이다.

《그래서 대마도주에게 처녀를 돌려보내달라는것을 부탁하는 편지라도 써주려 했는데 젊은이들쪽에서 도리여 마다하니 나야 그렇게 할수가 없었지요.》

《그렇다면 그걸 지금 써주게. 제 집 울타리안에서 벌어진 일을 주인으로서 아주 모른다고 하면 그게 사람의 경우에 닿는 일이 아니지.》

일이 더 부르터지지 말기만을 바라고있던 박충량은 두말없이 도차지를 시켜 이미 써놓았던 편지를 가져오라고 하였다. 도차지가 들고나온 편지를 읽어보고난 리생원은 그것을 룡복의 앞에 내밀었다.

《자, 요긴하게 쓰일지도 모르니 받아두게.》

그러나 룡복은 박충량의 유들유들한 얼굴을 쏘아볼뿐 편지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받을 생각이 없소이다. 그런것 없이도 어순이는 찾습니다.》

고집스럽다할만치 한번 먹은 마음을 변할줄 모르는 룡복이였다. 룡복은 그냥 박충량을 쏘아보며 부르짖었다.

《그런 서푼짜리 글을 써주며 선심을 쓴다고 우리가 왜도적을 놓친 일을 잊을줄 아시우? 똑똑히 말해두지만 배를 빌려주어 울릉도를 렴탐하러 가는 왜도적을 도와준것은 누구이고 지난밤 왜도적이 감쪽같이 도망친것은 대체 어찌된 일이요? 갈길이 급하여 더 따질 생각은 없소만 등치고 간을 빼먹는 그따위짓을 계속하다가는 무사치 못하리라는것을 분명히 말해두니 그리 아시오.》

말을 마치자 룡복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문간으로 나가버리였다.

《아니?》

박충량은 얼굴이 벌겋게 되여 어이없다는듯이 옆에 서있는 리생원과 어둔이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세상에… 술은 나무리여도 인정은 나무릴수 없다는데… 이거야 말로 떡주고 뺨맞는격이 아닌가.》

《과히 허물치 말게. 약혼녀를 잃은데다가 왜도적까지 놓치였으니 젊은 사람의 마음이 오죽할텐가.》

리생원은 손에 쥐고있는 편지를 어떻게 할지 몰라 잠시 망설이는데 옆에 서있던 어둔이가 그것을 말없이 받아 품속에 밀어넣었다. 그것을 본 박충량의 얼굴에 의미깊은 웃음이 스쳐지나갔다.

《아무렴, 그렇겠지. 성난다고 쪽박을 깰것이야 있나? 그 편지를 가지고 가면 대마도주도 그렇고 왜도적들도 그리 박대하지는 못할걸세. 빚진 종이라구 도주가 내 말을 가볍게 여기지를 못해. 허허허…》

박충량은 아무 일도 없었던듯 천연스럽게 너털웃음을 터뜨리였다.

그러나 안룡복의 일행이 모두 대문밖으로 사라지자 그의 마음속에서는 웬일인지 다시 불안의 안개가 짙게 서려돌았다. 비수같이 날카로운 말을 던지고 가버린 안룡복이라는 젊은이의 그 록록치 않은 모습이 마음에 걸렸던것이다.

이날 아침, 해뜰녘에 안룡복은 박어둔이, 리생원과 함께 배에 올라 울산 주진포를 떠나 동래로 향하였다. 힘장사총각 류일천이는 그들과 헤여져 녕해에 있는 집으로 떠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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