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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박지운 왜놈 셋을 앞세운 사나이들이 울산읍성앞길에 나타난것은 그날 한낮때가 다되여서였다. 왜도적들의 사람같지 않은 몰골을 보고 대낮에도 마을 개들이 놀라서 컹컹 짖어댔다. 귀밑머리를 따늘인 조무래기들은 큰 구경거리나 만난듯이 떠들썩거리며 따라왔다.

《야, 저 털부숭이 좀봐!》

《아저씨, 강도나요?》

어린것들이 저마끔 물어댔다.

《오냐, 저 백운산에서 잡아오는 왜도적이다. 육실할 놈의…》

어둔이가 이렇게 대답을 해주자 아이들은 더욱 성수가 나서 떠들었다.

 

왜도적 왜도적

꼬리빠진 왜도적

임진년 건너왔다

혼쭐빠진 왜도적

 

아이들이 깨꾸막질로 따라오며 합창을 불러댔다. 너무도 떠들썩하는 바람에 길가 주막에서 탁배기를 마시던 농군들이 목을 빼들고 내다보았다.

《거 시원한노릇을 했군. 백운산에 도적이 난다는 소리가 있은지도 오랬는데 이젠 아주 뿌리가 빠졌겠군.》

귀얄수염달린 늙은이 하나가 팔을 내저으며 소리를 질렀다.

《여보게, 젊은이들, 이리 좀 오소. 큰일을 했는데 탁배기나 한사발씩 들고 가소.》

룡복은 왜도적을 길가에 꿇어앉혀놓고 어둔이와 일천이를 데리고 주막으로 다가갔다. 리생원은 너무도 지쳐서 나무그늘에 다리를 펴고 앉은채 땀을 들이고있었다. 코끝에 새빨갛게 술독이 오른 웬 상투쟁이 하나가 껄껄 건트림을 하며 주막에서 걸어나왔다. 한쪽다리를 절룩거리며 길가에 꿇어앉은 왜도적들곁에 다가선 그 사나이는 《아니?!》 하고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아는 놈들인가요?》

짚신에 묻은 먼지를 털다가 그 모양을 본 룡복은 이렇게 물었다.

《아, 아닐세… 그저… 상판대기를 보니… 꼭… 강도질만 해먹게 생겼군그려… 에험.》

절름발이 상투쟁이는 이렇게 어물거리더니 사람들의 눈을 피하여 성문안으로 다급히 사라져버리였다.

《흥, 절름발이 송서방이 또 술값이나 하게 됐구나!》

누군가 이렇게 코방귀를 불자 주막안사람들이 모두 껄껄 웃어댔다.

룡복은 술사발을 받으며 사람들에게 물었다.

《저 사람이 누군가요?》

《그게 박주부네 차지노릇을 하는자인데 무엇이든 주인에게 고해바치고 술값이나 받는 재미로 사는 미물이지요.》

《눈도 귀도 박주부를 위해 상판에 붙이구 다닌답니다.》

다시한번 웃음이 터졌다.

(박주부라구?)

룡복은 시원한 탁배기 한사발을 천천히 다 마시고나서 물었다.

《헌데 박주부라는 사람은 대체 어떤 량반이시우?》

《흥, 량반은 무슨놈의 량반, 저 대구감영 아전배의 자손인데 여러해전에 사섬시 주부벼슬을 박은 공명첩을 사들여서 박충량이라는 장사치가 하루아침에 박주부로 둔갑을 하여 량반행세를 할뿐이지요.》

《허지만 돈만 있으면 개도 멍첨지가 되는 세상이라 박주부의 세도가 하늘에 닿았는데 그런 말들을 마소. 괜히 큰변이 나리다.》

말이 풍길가보아 쉬쉬하는 바람에 박주부를 욕하던 사람들도 입을 다물었다.

룡복은 박주부에 대해서 좀더 알아보아야 하겠기에 류일천의 늙은 고모가 살고있다는 성밖 미나리골로 향하였다. 울산 남문밖에서 두어마장 되나마나한 곳에 있는 자그마한 마을이였다.

마을어구에 섶나무울바자를 두른 삼간초가 한채가 나타났다. 젊어서 과부가 된 늙은이 혼자서 사는 집이였다. 늙은 안주인은 손금보는 솜씨도 있고 점괘를 맞추는데도 그리 서툴지 않아서 려염집 아낙네들과 량반집 동자아치나 침모들이 쌀홉이나 무명끝을 치마밑에 감추어가지고 그칠사이없이 찾아왔다.

그래서 수완좋고 말주변좋은 이 집 안늙은이는 울산바닥에서 벌어진 일이라면 량반집 안방소동 같은것은 물론이지만 뉘집 가마에서 죽이 끓고 밥이 끓는것까지도 제눈으로 본듯이 알고 지내였다.

룡복이에게서 박주부를 찾아온 경위를 대강 듣고난 늙은이는 혀를 끌끌 차며 고개를 끄덕이였다.

《그렇거니. 박주부가 왜도적을 끼구 장사를 한지가 벌써 오랬지. 그 집 사랑출입을 하는 밤손님이란게 다 상판을 내놓기 겁나하는것들이지. 그걸 모두 짐작은 하지만 세도가 하두 크니… 임자들두 조심을 하게. 성난다고 바위를 차겠나?》

사실 박충량은 동래, 울산아근에서는 말할것도 없고 경상도안에서는 첫손을 꼽아야 할 부자였다.

동래 왜관밀무역은 그가 거의 독차지하다싶이 하고있었다.

신미년(1691년)에 호조에서는 서울과 각 고을의 부유한 상인 30명에게 호조의 지정된 표신(증명서)을 주어 왜관에 자유로이 드나들면서 무역할수 있는 특권을 주었는데 이때 호조의 문서에는 서울상인 리응상이 다음으로 박충량의 이름 석자가 박혀있었다. 그때부터 박충량은 왜관에 마음대로 드나들면서 장사손을 넓게 펴기 시작하였다.

쯔시마도주와 손을 잡고 화약제조에 쓸 류황 4만근과 긴칼 200자루를 밀수입해다가 훈련도감에 넘기고 돈낟가리우에 올라앉은것은 왜관밀수입에 손을 댄 첫 시기의 일이였다.

그때 일본에서 류황 100근에 은 5~6냥씩 했는데 그것을 10냥금새로 훈련도감에 팔아넘기였던것이다.

박충량은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벌어지는 중강개시와 회령, 경원 등지에서 열리는 북관개시를 통하여 청나라에까지 장사손을 뻗치였다. 청나라상인들에게서 흰 비단실 100근에 60금의 시세로 사서 왜관상인들에게 160금의 금새로 팔았다. 흰 비단실 매 100근당 100금의 리익이 박충량의 주머니로 굴러들어왔다.

돈주머니가 불룩해지자 박충량은 그때 한창 류행병처럼 8도에 퍼져서 성황을 이루고있던 은점개발에 손을 뻗치였다.

조정에서 지금까지 통제해오던 은점, 동점 개발을 허가해주고 그대신 일정한 세금을 받아들이는 이른바 《설점수세제》를 실시하게 되자 곳곳에 은점이 생기고 땅없는 농민들과 일거리가 없어 길가에 나돌던 사람들이 은점으로 물밀듯이 모여들었다.

그때 단천은점, 청주 덕평은점, 전라도 강진은점 같은것들은 여러 십년전부터 유명한 은점으로 소문이 났으니 더 말할것도 없지만 경상도에만 하여도 영덕, 청송, 안동, 녕해, 울산, 장기, 경주, 언양 등 이르는곳마다 은점이 생겨났다.

돈냄새 잘 맡는 박충량이가 이 많은 은점에 손을 대지 않을리 없었다.

울산은점을 차지한 박충량은 은점을 감독하고 세금을 받기 위해 호조에서 파견한 채은감관과 감영에서 나온 별장따위들을 손아귀에 쥐고 무른떡 주무르듯 하면서 돈을 긁어모았다.

울산에다 작은댁살림까지 버젓이 펴고 들어앉은 박충량은 울산포구를 통해 밤낮 정체모를 장사배를 띄우거니받거니 하였다. 울산포구로 드나드는 장사배가 열이면 그중 일곱은 박충량의것이였고 일곱중에서 다섯은 쯔시마 도주와 직접 거래하는 장사배였다.

이렇게 되니 자연히 동래, 울산 일판의 장사거래는 다 박충량의 독차지가 되여버렸다. 해마다 서울 대궐과 대구감영으로 올라가는 진상짐이 륙로로 수십바리요 수로로 십여척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박충량이 하면 동래부사, 울산부사가 은근히 자리를 고쳐 앉는판이고 경상감사, 호조판서가 모르는체하지 못하는것은 물론 버변사 당상관들과 3정승까지도 그 이름을 그리 귀에 설어하지 않게쯤 되였다.

이러한 거물이였기에 세상물정에 밝은 이 집 안늙은이가 성난다고 바위를 차겠는가고 한것이였다.

룡복은 이러한 박충량이에 대해서 그저 소문난 부자쯤으로 알았을뿐이였다.

그런데 말을 듣고보니 장사손을 나라 지경밖에까지 뻗치고있는 큰 장사치였고 돈과 재산을 휘둘러 세상에 못하는짓이 없는자였다.

이러한자가 어순의 일에 관계되여있다는것이 몹시 꺼림직하였다.

리생원이 이 집 안늙은이가 내주는 청심환 한알을 술에 풀어마시고 땀을 내느라 웃칸에 누워있고 룡복이네가 금방 점심을 먹고있을 때였다. 삽짝문이 열리며 박충량이네 차지인 절름발이 송서방이 마당에 들어섰다.

송서방은 허청간 기둥에 비끄러매놓은 왜도적을 흘끔흘끔 살펴보며 퇴마루에 올라섰다.

《마침 힘장사총각들이 다 있네그려. 박주부어른께서 임자들을 부르시니 왜도적을 끌고 어서 가세.》

이발을 쑤시고있던 어둔이가 송서방을 곱지 않은 눈으로 흘겨보았다.

《박주부가 무슨 일루 우리를 찾는단말이우?》

《허- 이사람 말하는걸 보지… 그거야 가봐야 알지 여기서 아는 수가 있나? 왜도적을 모두 끌구오라시니 낯짝구경이라두 하시려는거야.》

《구경하겠으면 와서 보라시오, 육실할…》

청 비뚤어진 어둔의 말소리를 들으며 룡복은 밖으로 나섰다.

박충량이가 사람까지 보내온것을 보면 왜도적이 잡힌 일로 하여 그쪽에서 발이 저려하는것이 분명하였다. 내막은 알수 없으나 쯔시마왜놈들과 장사거래를 한다는자이니 십분 그럴만도 하였다.

《박주부댁에서 오셨소?》

룡복은 섬돌아래로 내려섰다.

《그렇네. 내가 주부댁 차지소임을 맡은 사람일세.》

《아, 그러시우?》

왜도적쪽을 흘끔흘끔 살펴보고있던 송서방이 룡복의 턱밑으로 기여들듯 하며 간청하였다.

《내 걸음수고를 생각해서라두 두말말구 가주게.》

룡복은 송서방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렇지 않아도 박주부를 만나려고 먼길을 왔는데 그쪽에서 먼저 만나기를 청하는것을 마다할것은 없었다.

《그럼, 이제 간다구 이르시우.》

《알겠네. 주부어른이 기다리니 얼른 뒤따라오게.》

송서방은 왜도적들에게 남몰래 눈을 끔쩍거려보이면서 삽짝문을 빠져나갔다.

백운산에서 왜도적들이 잡혔다는 소식을 들은 박충량은 지금 마음을 진정하지 못하고있었다. 남문밖에 와 머무르고있다는 젊은것들이 왜도적들을 관가에 바치기만 하면 아무래도 일은 시끄럽게 번져질것이였다. 얼굴에 칼에 찍힌 징그러운 흉터가 있는 요시라라는 왜놈이 쯔시마도주의 친서를 가지고 야밤중에 박충량을 찾아온것은 벌써 두해전 일이였다.

류황을 밀무역해들이던 그때부터 쯔시마도주와 손을 잡고 훈련도감을 속여 나라의 군자금을 남몰래 가무려먹은 박충량은 그자의 부탁이나 요구가 아무리 황당한것이라 해도 거절할수가 없는 처지였다. 그래서 그때도 왜도적들이 백운산에 들어가 둥지를 틀도록 남모르게 뒤배를 보아주었던것이다.

그런데 잡혀온 왜도적들이 관가에 끌려가 주둥이를 잘못 벌리면 우선 박충량이 자기 덜미에 불꾸레미가 떨어질것은 물론이고 쯔시마도주와의 장사거래도 끊어지고말것이였다.

어떻게 해서라도 왜도적을 잡은 젊은 녀석들을 잘 주물러서 말썽없이 하는것이 상책이였다.

아니, 젊은것들의 손아귀에서 왜도적을 아주 빼내여 쯔시마도주와의 장사흥정에 써먹어야겠다는 욕심이 부쩍 생기였다.

박충량은 참깨기름을 먹여서 거울알처럼 반들거리는 사랑널마루우에서 눈덩이같이 흰 열두새백목버선을 신은채로 서성거리며 생각을 굴리였다.

열어놓은 쌍미닫이안으로 방안에 휘둘러친 열두폭 일월병풍과 비단보료우에 벌려놓은 사방침이며 호랑이가죽을 씌운 안석, 금빛으로 번쩍거리는 재털이, 타구따위들이 들여다보인다. 진주자개를 박은 연상(앉은책상)은 마침물건이고 그우에 놓인 거부기연적(먹을 가는데 쓰는 물을 담는 통)은 옥돌을 다스려 만든것이였다.

이윽고 대문간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일어나더니 송서방이 배허벅에 두손을 모아붙이고 설설 기여들어왔다.

《젊은것들이 왔소이다.》

《그런가? 어서 들여보내게.》

박충량은 얼른 방안으로 들어가 비단보료에 틀지게 앉아 어험! 하고 큰 기침을 한번 톺았다.

이윽고 젊은이 셋이 마당으로 성큼성큼 걸어들어왔다.

몸매가 다부지고 둥실한 얼굴에 눈빛이 당돌하게 번쩍거리는 젊은이가 앞서서 들어오고 그뒤로 몸집이 덜썩하게 크고 성급해보이는 젊은이와 황소처럼 목이 굵고 힘깨나 씀직해보이는 나어린 총각이 함께 들어왔다.

《어, 왜도적을 잡은 힘장사들인가? 어서 마루로 올라들오게.》

세 젊은이는 말없이 섬돌우에 짚신을 벗어놓고 마루에 올라와앉았다.

《그래, 임자들은 어디 사는 누구들인가?》

《동래 사는 사람들입니다.》

눈빛 당돌한 젊은이가 침착하게 대답하였다. 몸집이 덜썩하게 큰 청년의 이름은 박어둔이라고 했고 황소처럼 목이 굵고 눈섭이 시꺼먼 총각은 류일천이라고 하였다.

《저는 안룡복이라 부릅니다.》

《흠, 그런가? 장하이. 그래 왜도적은 어떻게들 잡았나?》

박충량은 송서방이 미닫이밖에서 불까지 붙여주는 길기가 한발이나 되게 긴 담배대를 뻐끔뻐끔 빨며 빙그레 웃었다.

《그것은 이제 말씀드리겠습니다만 우선 주부어른께 한가지 물을 말이 있습니다.》

《내게?》 박충량은 입에 물었던 긴 장죽을 뽑아들며 어지간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서 말하게.》

안룡복의 눈빛이 더욱 당돌하게 번쩍거리였다.

《왜도적들이 일전에 다대포에서 처녀 하나를 붙잡아 주부어른네 배에 실어왔다고 하는데 그 처녀의 행처를 알아야겠소.》

박충량은 흠칫 놀라며 세사람의 기색을 급히 살피였다. 젊은이들의 입에서 이런 말이 튀여나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한 그였다. 그 처녀를 쯔시마도주에게 실어보낸것은 벌써 지난달 그믐께의 일이였다.

백운산 왜도적두목인 요시라의 졸개 세놈이 한밤중에 찾아와서 음식조리를 잘하고 바느질솜씨가 있는 계집을 하나 잡아보내라는 도주의 분부를 받은지 여러달이 지났지만 량반집 동자아치나 침모따위는 전혀 밖으로 나돌지 않는 까닭에 잡지 못하고 다대포뒤산에서 산나물을 캐던 계집애를 하나 잡아왔으니 가는 장사배편으로 급히 보내달라는것이였다.

그때 박충량은 마음속으로 쓰거운 웃음을 웃었다. 음식을 잘 만들고 바느질을 잘하는 세도가문의 닦이운 계집을 구해보내라고 하였는데 시골내 풍기는 촌계집애를 대신 잡아보내온 이런 졸개들을 믿고있는 도주라는자가 우습기 그지없었던것이다.

하여간 닭을 보내든 꿩을 보내든 배를 내여 실어다주기만 하면 고맙게 여기기는 마찬가지일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왜도적들에게 배 한척을 내주어 처녀를 쯔시마로 실어가도록 한것이였다. 그런데 감쪽같이 한 그 일이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렇게 부르터질줄은 생각도 못하였다. 요시라의 졸개들이 벌써 젊은것들앞에서 주둥이를 벌린것이 아닌지 알수 없었다. 그러니 아주 모르쇠를 할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제 덜미가 잡히게 내버려둘만큼 우둔한 박충량이도 아니였다.

박충량은 짐짓 성난 기색으로 젊은이들을 쏘아보았다.

《처녀를 내 집 배에 실어보내다니? 그게 무슨 당치않은 소린가? 그런 일은 알지도 못하거니와 그 일을 내게 와서 묻는것이 괴이하지 않나?》

《여보시우. 괴이하구 뭐구 대답이나 바루 하우. 내가 그 처녀의 오래빈데 이렇게 눈이 시퍼렇게 살아있으니 무사하지 못할줄 아시오. 육실할…》

어둔이가 떡메같은 주먹으로 널마루를 쾅 두드렸다.

《아니?!》 박충량은 축 처진 볼따귀를 푸들푸들 떨며 한걸음 물러앉았다. 《이 무슨 고현짓들인가? 엉?》

박충량의 숨소리가 무섭게 거칠어지고있었다.

이때 어디론가 나갔던 송서방이 급히 뛰여들어와 박충량의 귀에 대고 뭐라고 한동안 수군거리였다. 그러자 박충량은 험하게 이그러졌던 얼굴을 슬며시 풀며 다시 바로앉았다.

《어험, 피차에 사정을 깊이 모르다보니 목소리가 높아진듯하네. 어험! 알고보니 그 처녀와 약혼한 사이기도 하구 오랍누이사이기도 하다니 나도 임자들의 급한 마음이 짐작되네. 하지만 그 처녀를 실어갔는지 어쨌는지 그건 내가 참견한 일이 아니여서 알수가 없네.》

《여보시우. 여러말 할게 없소.》 안룡복이가 다우쳐 물었다. 《지난 그믐날 황산강나루에서 온 배가 어디로 갔소? 그걸 알 생각이 아니면 우리가 왜도적을 끌구 관가로 갔지 여기로 왜 왔겠소?》

관가로 가리라는 소리가 신경을 건드렸던지 박충량은 얼른 한손을 접고 반죽을 늦추며 곰살궂게 대답하였다.

《허허… 아무리 급한 일이기로서니 그렇게 생나무 꺾듯 할것이야 있나? 인정에 살구 인정에 죽는게 사람인데… 이제 사람을 불러서라도 알아보세.》

박충량은 송서방쪽으로 천연스러운 눈길을 돌리였다.

《여보게, 얼른 가서 최서방을 불러오게. 멀리 가지 않았을걸세. 안채에 들어가보게.》

송서방이 절룩거리며 안채쪽으로 사라지자 박충량은 다시 동정어린 눈길로 룡복이와 어둔이를 바라보았다.

《최서방은 내 집에서 안팎일을 돌보는 도차지일세. 물건이 나가고 들어가는것이며 배에 싣고 부리는 일을 다 그 사람이 주관하고있으니 내가 모르는 일도 그 사람이 더러 아는수가 있네.》

잠시후 안채쪽에서 눈같이 흰 진솔무명중치막에 검정갓을 쓴 풍채좋은 사나이가 송서방과 함께 나타났다. 박충량이같은 큰 부자집도차지라 차림새부터가 기름이 번지르르 흐르는것이 시골량반같은것은 발치에도 가기 어려울상싶었다. 최서방은 벌써 사연을 다 알고온듯 마루우에 앉은 낯선 젊은이들을 흘끔 쳐다보고나서 배허벅에 두손을 공손히 마주 잡으며 허리를 깊이 숙이였다.

《분부대로 대령했소이다.》

《그래, 오늘은 별일 없었나?》

《예 아직 별일은 없소이다. 방금 황산강 불암나루에서 떠난 배가 들이대였는데 김해에서 무명 백여든다섯동과 벼 백일흔섬을 싣고 왔소이다. 그리구 은점에서…》

《됐네. 그건 그렇구. 이제부터 내가 묻는 말에 대답하게. 지난달 그믐께 황산강나루에서 온 배를 언제 떠나보냈나? 내 짐작에는 사나흘전에 떠난듯 한데?》

최서방은 초이튿날 떠난줄을 뻔히 알면서 사나흘전에 떠나지 않았느냐고 묻는 주인의 얼굴을 흘끔 살펴보고나서 천연스럽게 대답하였다.

《예. 그 배가 떠난게 바루 사흘전이옵니다.》

《흠, 아마 그럴걸세. 그런데 왜인들이 그 배에다 처녀 하나를 실었다는데 그게 적실한가?》

《예? 저…그거야 주부어른께서…》

약삭바른 최서방도 이번에는 어떻게 대답했으면 좋을지 몰라서 낯선 젊은이들과 박충량의 얼굴을 번갈아 살피면서 주인이 어떤 대답을 바라는가를 짐작 하려고 노란 눈알을 재빨리 굴리였다.

《아, 저어할것 없네. 처녀를 실으나 안실으나 그거야 왜인들이 한짓인데 자네나 나한테 아무 상관두 없네. 어서 본대루 말을 하게.》

《예, 짐을 다 실은 다음에 어떤 처녀를 분명히 옮겨 실었소이다.》

하얗게 질려있던 룡복의 얼굴이 컴컴하게 변해갔다. 룡복의 낯빛을 살펴보고있던 어둔이가 후둘후둘 떨리는 주먹을 내흔들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보우, 그게 사실이우? 정말 실어갔소?》

깜짝 놀란 최서방이 어둔이를 흘겨보았다.

《소리는 왜 지르우? 실어갔으니 갔다는것인데…》

상놈의 주제에 어디다 대고 큰소린가 하는투였다.

《육실할… 그래, 그걸 보면서 가만있었단말이우?》

《가만있지 않으면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인가?》

《뭐라구?》

어둔의 눈에서 흰자위가 번뜩하였다.

《당신은 조선사람이 아니우? 조선처녀를 왜놈들이 끌어가는데 상관이 없다니 그래, 죽으면 뼈다귀를 왜땅에 묻을테요? 육실할…》

《아하, 이러지들 말라구.》

박충량이가 펄펄 뛰는 어둔의 어깨를 눌러앉히는 한편 최서방에게 다시 물었다.

《그 배가 대마도로 곧장 간다던가?》

《아니, 울릉도에 들렸다 간다구 했소이다.》

《흠- 그럼 됐네. 자네는 그만 나가보게.》

박충량은 최서방에게 어서 자리를 피하라는듯이 눈짓을 하였다.

최서방이 안채쪽으로 사라지자 박충량은 헛기침을 두어번하며 자리에 앉았다.

《임자네들이 이러면 내 체면이 뭐가 되겠나? 다 그 간사한 왜놈들이 한짓인데 우리 집 사람들에게 원혐을 품을것두 없구… 내가 힘자라는껏 도와줄터이니 마음을 놓게. 독틈에도 용수가 있고 찧는 절구에도 손들어갈 틈이 있다질 않나.…》

박충량은 룡복의 얼굴을 물끄러미 건너다보며 담배연기를 천천히 내뿜었다. 그의 유들유들한 얼굴에는 의미를 짐작하기 어려운 웃음이 떠돌았다.

《아직 손써볼 틈은 있으니 락심하지는 말게. 급히 뒤쫓아가면 울릉도에서 왜인들을 만날수가 있을것 같으니 임자들만 그럴 생각이라면 처녀는 찾을수가 있네.》

룡복이와 어둔이는 박충량의 얼굴을 말없이 바라보기만 하였다.

《허허… 내 말이 못미더운가? 내 장사를 하다보니 왜인들과도 더러 상종을 하는데 잡힌 왜도적을 인질로 삼아 처녀를 꼭 찾도록 일을 꾸며볼 생각인데 길게 말할것 없이 저놈들만 나한테 맡겨주게. 그러면 처녀는 꼭 찾네.》

룡복은 잠시 눈길을 들어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하는 처마끝을 바라보았다.

저녁해가 방금 졌으나 하늘에 검은구름이 콱 뒤덮인탓인지 때이른 어스름이 처마밑으로 스며들고있었다. 결국 박충량의 속심인즉 왜도적 셋을 자기에게 맡겨주면 어순이를 찾아주겠다는것이였다. 물론 박충량이가 쯔시마도주와도 장사거래가 있는만큼 그렇게 할 힘이 없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숱한 조선사람을 죽이고 로략질을 일삼던 저 간악한 왜도적을 놓아주면 또 누군가가 어순이와 같은 처지에 빠지고 말것이 아닌가.

룡복은 어지간히 초조해하는듯 한 박충량의 얼굴을 마주보며 침착하게 대답하였다.

《주부어른의 호의는 고마우나 잡은 왜도적을 관가에 바치지 않으면 내가 법을 어기는것으로 되니 어찌 그렇게 하겠소. 더구나 저놈들은 울릉도를 해칠 큰 흉계를 꾸미는놈들이 분명한데 놓아주면 울릉도는 물론이고 무고한 사람들이 피해를 입겠는데 그런 죄될 일을 어떻게 하겠소.》

《허허… 그렇던가?》

박충량의 얼굴에는 쓰거운 웃음이 어려있었다.

《그렇다면 나는 달리 도울길이 없네.》

불꺼진 장죽을 놋재털이옆에 던지며 어두워오는 처마밖을 흘끔 내다보는 박충량의 두눈에서 서리발같이 차거운 빛이 얼른 스쳐지나갔다.

《그러면 그 흥정은 없었던셈으로 치세. 나는 어떻게 하나 임자네들을 도와볼가 하는 생각으로 그랬던것이지 내 리속을 보자구 생각한것은 아닐세. 그러니 조금도 달리 생각치 말구 오늘밤은 내 집에서 묵어가게. 내가 손님으로 불러온 이상 그냥 보낼수야 없지 않겠나?》

룡복은 웬일인지 이 집에서 밤을 나기가 꺼림직한 생각이 들었다. 아직 딱히 박충량이가 어순이를 잡아간 왜도적을 도와주었다고 단정할수는 없었다. 큰 장사치이니만치 쯔시마도주와의 장사거래때문에 왜인들에게 배를 빌려주는 일은 십분 있음직한 일인데다가 어순이를 그 배에 싣고간것은 주인도 몰래 왜도적들끼리 한짓이라니 굳이 박충량이를 의심할것도 없는것이였다.

그리고 왜도적을 자기에게 맡겨달라고 한것도 그의 말대로 제 리속을 위해서가 아니라 어순이를 찾아주려고 그렇게 한것이라면야 박충량이를 나쁘게 여길것이 없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웬일인지 마음은 여전히 꺼림직하였다.

어순이가 울릉도로 실려갔다는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된때문인지 마음은 잠시도 가라앉지 않았다.

룡복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러자 박충량은 급히 룡복의 팔소매를 붙잡았다.

《임자네들이 이렇게 그냥 가버리면 내가 섭섭하지 않겠나? 이 박충량이가 그런 사람이 아닐세. 내 집에 왔던 사람을 그저 보내는 법이 없네. 항차 왜도적 셋씩이나 거느린 임자네들이 홀로 사는 과부의 손바닥만한 외통집에 가서 다리를 펴게 놓아둘텐가. 그리구 관가에서도 다 문을 닫고 퇴사를 한 뒤여서 왜도적을 당장 바치지도 못할터인데 여러말 말고 너렁청한 내 집에서 하루밤을 편히 지내고 가게.》

박충량은 룡복이네의 의향을 구태여 물을것 없다는듯이 송서방을 부르더니 바깥사랑에 불을 켜고 젊은이들을 모시며 안채에 알려서 손님들의 저녁대접을 소홀히 하지 않게 하라고 분부하였다.

아닌게아니라 박충량의 말대로 관가는 이미 문을 닫고 관원들은 다 퇴사를 한 뒤여서 왜도적을 당장 처치하기 어렵게 된것은 사실이였다. 그렇다고 외통집에서 홀로 사는 과부로파에게 왜도적 셋씩이나 끌고가서 밤을 묵는다는것도 피차에 면구스러운 일이 아닐수 없었다.

부득이 박충량이네 바깥사랑에서 밤을 나는수밖에 없었다.

룡복은 섬돌에 벗어놓은 신을 신고 사랑뜰로 내려서며 말하였다.

《정 그렇다면 이 집에서 밤을 묵더라도 성밖에 함께 온 늙은이가 있으니 잠시 다녀와야겠소.》

《허, 그러면 그 늙은이를 이리로 데려오세. 송서방, 얼른 젊은이들을 사랑에 모시구 자네가 성밖에 나가서 그 늙은이를 데려오게.》

《분부 듣자왔소이다.》

송서방이 노란 눈알을 굴리며 주인의 얼굴을 흘끔 쳐다보았다.

《헌데… 저 왜도적들은 어찌하올지…》

《흠, 대문간곁에 빈 허청간이 한간 있을것이니 거기다 림시 가두고 문을 단단히 잠그게.》

《알겠소이다.》

잠시후 앞뒤사랑방에 초불이 환히 켜지고 중대문너머 안채에서도 불빛이 흘러나왔다. 시꺼멓게 흐린 하늘에서 찬 비방울이 몇점 흩날려 떨어졌다. 꽃샘을 하려는지 어수선한 바람까지 뜰안을 휩쓸며 지나갔다.

성밖에서 데려온 리생원을 젊은이들과 함께 바깥사랑에 들여앉히고난 송서방은 왜도적 셋을 허청간에 가두고 사랑채로 다시 들어와 아직도 어둑어둑한 마루우에서 서성거리고있는 박충량에게 열쇠를 바치였다.

《젊은것들이 보는 앞에서 쇠를 잠그었으니 의심치 않을줄 압니다.》

《그런데 쇠는 왜 내게 가져왔나? 그것들한테 맡기지 않구?》

《그것들이라니요?》

송서방이 얼떠름해서 얇은 눈까풀만 깜박거리였다.

《원, 이렇게 답답할노릇이 있나. 자네는 왜도적을 정말 가두자는건가?》

《글쎄, 그러니 쇠는 주부어른께서 맡으셔야…》

《에끼, 임자궁냥이란 그저 까투리 알세기일세. 두말말구 도루 갖다주게.》

《예? 예…》

송서방이 연신 머리를 기웃거리며 물러가려고 하자 박충량은 다시 불러세웠다.

《아무도 몰래 오늘밤 태화강나루에 배 하나 마련해놓으라구 도차지에게 이르게. 알겠나? 그리구 저녁후에 도차지와 함께 내게루 오게.》

《듣자왔소이다.》

박충량은 송서방이 절룩거리며 사라진 어둠속을 이윽히 노려보며 서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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