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동래에서 울산으로 가는 길은 두 길이 있다.

금정산골짜기로 들어가다가 령을 넘은 다음 량산을 지나 곧장 울산으로 향하는 길이 하나있고 기장, 서생포를 지나 오른손쪽에 내내 바다를 끼고 가는 또 다른 한 길이 있다.

룡복이와 어둔이는 이 두 길을 다 버려두고 사천(오늘의 수영강)을 따라 북쪽으로 곧장 뻗은 지름길에 들어섰다. 이 길을 따라가면 량산에는 들리지 않게 되고 가월역참을 좀 지나서 산 하나를 넘으면 울산으로 향하는 큰길에 들어서게 된다.

이른봄철의 아침녘이라 산속의 공기는 맑고 향기로웠다.

잠을 깬 산새들도 수다스럽게 우짖으며 분주히 날아다니였다.

그러나 두사람은 별로 말이 없었다. 제 각기 제 생각에 잠겨 부지런히 걷기만 하였다.

길 량쪽에는 진달래와 산철죽이 콱 우거졌는데 산이 온통 불타는듯 하였다.

우거진 꽃나무들사이로 희디흰 비단필을 늘여놓은듯 산천의 맑은 물이 유유히 흘러가는것이 보이였다.

한낮때까지 걸으니 강줄기는 점점 좁아져서 산골개울로 변하고 산세도 험해졌다. 가월역참을 좀 지나 길가의 파란 잔디밭에 앉아 보리밥덩이로 점심요기를 한 후 내처 걸어서 울산으로 향한 큰 길목에 접어들었다.

해를 보니 날이 어둡기전에 도적이 난다는 소문이 있는 백운산수림을 넉넉히 지날수가 있었다. 그런데 아까부터 웬 사나이 하나가 뒤에서 따라오고있는것이 께림직하였다. 곧은 외통길에서는 보이다가 산굽이를 꺾어들면 다시 보이지 않군 하였다. 하지만 끈에 맨듯이 사나이는 사이를 줄이지도 늘이지도 않고 끈덕지게 따라오고있었다.

도적이라 해도 짚신 한컬레밖에 든것이 없는 괴나리보짐뿐이니 별로 걱정될것은 없었지만 그래도 뒤따르는 사나이에게 은근히 마음이 씌여졌다. 그런데 나라에서 봄가을로 제사를 지내는 원적산 《우불신당》을 금방 지나 백운산기슭에 이르렀을 때 외통길목 앞쪽에서 웬 사나이가 불쑥 나타났다.

《게 섰거라!》

흰 중치막을 입고 질끈 동인 허리에 긴 칼을 찬 그 사나이가 눈알을 부라리며 소리를 질렀다. 룡복은 뒤를 흘낏 돌아보았다. 뒤에도 같은 차림의 사나이가 길을 막아서고있었다.

(도적이구나!)하고 생각하면서 룡복은 그 자리에 섰다. 등뒤에서 어둔의 다급한 숨소리가 들렸다.

《정신 차려라. 두놈뿐이다!》

룡복은 다급히 속삭이였다.

앞길을 막아서던 도적이 룡복이와 어둔의 보짐을 탐욕스럽게 쏘아보며 다가섰다.

《가진 물건이나 다 내놓아라.》

빈보자기나 다름없는 보짐이지만 도적의 눈에는 그속에 은덩이같은것이 얼마든지 들어있을수 있다고 보는 모양이였다. 하기는 곳곳에 은점이 생기던 때라 개천을 치다가 금덩이를 줏는 격으로 뜻밖의 횡재를 노리는자들일는지도 몰랐다.

《가진게 없소.》

《없기는 무엇이나 없소?》

다가서던자가 칼을 쑥 뽑아들고 룡복의 보짐을 툭툭 건드리였다.

《이것말이요?》

룡복은 괴나리보짐을 천천히 벗으며 도적의 모양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말씨가 이상스러운데다가 겉에 걸친 흰 중치막밑으로 시꺼먼 왜옷자락이 약간씩 드러난것이라든지 때묻은 머리수건으로 동인 상투꽁지가 매우 삐죽한것으로 보아(왜인들의 상투는 조선상투보다 매우 길고 크다) 변장을 한 왜놈들이 틀림없었다.

(왜놈들이로구나!)

룡복의 눈빛이 사납게 번뜩이였다.

룡복은 벗은 보짐을 발치에다 휙 내던졌다. 도적이 칼을 쥔채 쭈그리고 앉아 정신없이 보자기를 헤치고있을 때 룡복은 그자의 칼쥔 손을 내리밟으며 턱밑을 힘껏 걷어찼다.

《악!》 비명을 지르며 도적이 칼을 떨구고 자빠지자 뒤따르던 어둔이가 그 칼을 집어들려고 허리를 굽혔다. 이때 뒤에서 길을 막아서던자가 어느새 칼을 빼들고 어둔의 등뒤로 달려들었다.

어둔의 정수리에 칼날이 떨어지려는 위기일발의 순간이였다.

《앗, 어둔아!》

룡복이가 다급히 소리를 질렀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어둔이가 고개를 휙 돌렸을 때 벌써 그의 머리우에서 시퍼런 칼날이 번뜩이고있었다.

룡복은 눈앞이 캄캄해지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악!》 무서운 비명이 들렸다.

룡복이가 눈을 비비고 보니 피투성이가 되여 쓰러진줄 알았던 어둔이는 그냥 서있고 어둔이에게 달려들던자가 칼을 쥐고 길바닥에 나딩굴며 몸을 뒤틀고있었다. 그자의 잔등에 단검 한자루가 깊숙이 박혀있었다.

《괘씸한 놈들!》

웬 낯선 총각이 길옆 나무숲에서 천천히 걸어나오며 통쾌하게 부르짖었다.

《오늘에야 걸렸구나!》

총각의 손에는 아직도 도적의 잔등에 박힌것과 같은 단검이 두어개 들려있었다. 스무살을 갓 넘겼을듯싶은 총각의 다부진 몸매며 시꺼먼 눈섭밑에서 이글거리는 매서운 눈매며가 만만치 않아보이였다.

《이보우, 총각, 때마침 손을 써주어 정말 고맙소.》

룡복은 총각앞으로 다가가며 말을 건네였다.

《뭘 고마울게 있소. 나두 오래동안 별러오던 원쑤를 오늘에야 갚았소.》

총각은 숨이 넘어간 도적을 쏘아보며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두달전에 이놈들이 우리 형님을 죽였소. 글쎄 물건만 빼앗아두 억울한데 생사람을 파리잡듯 한단 말이우. 천하에 악독한 놈들같으니…》

《아까부터 우리들 뒤를 따른게 총각인가?》

《내가 따랐지요. 량산 갈 때는 우정 혼자서 갔지만 이놈들이 나타나질 않더란 말이우. 그까짓놈 대여섯을 혼자서라두 무서울게 없는판인데 정작 혼뜨검을 내주자니까 꼬리를 사린단 말이우. 그래서 돌아올 때는 기어이 이놈들과 맞다들려야겠다 맘먹구 나섰는데 마침 앞서가는 길손들이 있길래 슬금슬금 따라오던 참이였소.》

총각은 싱긋 웃으며 룡복을 쳐다보았다.

《거기서도 칼든 놈을 꺼꾸러뜨리는 솜씨를 보니 담보가 보통이 아닌것 같소.》

《허허… 그럼 그저 잡혀죽겠나?》

룡복은 어쩐지 이 소박하고 배짱 드센 총각이 마음에 들었다.

《우리는 동래 사는 사람들인데 지금 울산으로 가는길이네. 그래, 총각은 어디서 사나?》

《난 녕해사람인데 량산에 있는 삼촌집에 다녀오는 길이우.》

이름은 류일천이고 하는 일은 배군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칼 던지는 솜씨는 어디서 배웠나?》

류일천이가 다시 싱긋 웃었다.

《솜씨랄게 있소? 아이적부터 장난으로 배워둔거지. 뭐 이까짓 칼은 없어도 이따위놈 대여섯은 맨주먹으로라두…》

《허허… 그런가? 이거 오늘 힘장사총각을 만났군그래.》

이때 룡복의 발길에 채워 쓰러졌던 도적이 움지락거리며 머리를 쳐들었다. 룡복은 그자의 때묻은 머리수건을 와락 잡아벗겼다. 수펌의 똥자루같이 길다랗고 푸시시한 왜상투가 드러났다.

《아니? 저게 왜놈이 아니우? 글쎄 이상하다했더니…》

일천이와 어둔이가 놀라운 소리를 질렀다. 룡복은 벗겨낸 머리수건을 꼬아서 그놈의 두손을 등뒤에 졸라맸다. 검붉은 선지피가 게질게질 흘러내리는 그놈의 헤벌어진 입에서 울음섞인 왜말이 새여나왔다.

《제발… 목숨만 살려주시오.…》

《살겠거든 묻는 말에 대답해라!》

이자들은 몇해전 깊은 밤중에 밀선을 타고 서생포에 내린 쯔시마왜놈들이였다. 서생포아근에서 해적질을 하다가 조선관군의 습격을 받아 배를 잃게 되자 산속으로 도망쳐들어가 산적으로 변한것이였다.

이자들은 백운산에 둥지를 틀고 울산, 량산, 동래 아근으로 나돌며 길가는 사람의 물건이건 서울로 가는 봉물짐이건 닥치는대로 빼앗고있었다.

《이놈아, 강도질을 하겠으면 제굴에서나 할것이지 남의 나라에 와서 죄없는 사람들을 못살게 굴건 뭐냐? 육실할 놈들 같으니라구…》

어둔이가 망짝같이 큰 주먹을 내흔들자 왜도적은 정신없이 애걸하였다.

《제발 목숨만 살려주시오.》

룡복은 엎드려 고개를 조아리는 왜도적의 덜미를 힘껏 잡아서 일으켜세웠다.

얼마나 가증스러운놈들인가. 장사를 구실로 남의 나라에 기여들어 도적질과 강도질을 하다못해 나중에는 사람까지 잡아가는 이 짐승같은 왜놈들, 이놈들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고있는가. 아버지를 숨지게 하고 어순이까지 빼앗아간 이 원쑤를 천백배로 갚지 않고서는 물러서지 못할 심정이였다.

룡복은 덜미를 잡힌 왜놈을 쏘아보며 부르짖었다.

《네놈들의 소굴로 가자, 오늘 네놈들의 뿌리를 아주 드러내고야 말겠다.》

룡복은 류일천이를 바라보며 물었다.

《여보게, 총각은 어떻게 하겠나? 우리는 아무래도 내친김에 이놈들의 소굴까지 쳐야겠네. 갈길이 바쁘면 그냥 가도 좋고 우리와 함께 가도 좋으니 그건 임자 료량대루 하게.》

《형님의 원쑤를 갚자구 우정 나섰는데 바쁘달게 있소. 왜도적의 소굴을 안다음에야 어떻게 그냥 두겠소. 함께 갑시다.》

류일천이가 선선히 따라나서자 룡복은 살려달라고 애걸하는 왜도적을 앞세우고 길을 떠났다.

아직 해가 지려면 멀었다. 부지런히 가면 해지기 전에 백운산에 가닿을수 있을듯 하였다.

동래, 기장, 량산, 울산 네 고을의 가운데 위치하고있는 백운산은 그 산줄기가 사방으로 뻗어내려 각 고을로 단숨에 통할수 있고 겉은 험하고 안은 넓어 그 주위가 무려 20여리나 되는 천연요새지였다. 지세가 가파롭고 높아서 부산포가 한눈에 내려다보일뿐아니라 쯔시마쪽으로 오가는 배도 세일수 있을만큼 똑똑히 보이는곳이여서 동래부사가 몇년전부터 임금에게 이곳에 산성을 쌓고 남쪽변방을 지키는 보루로 삼자고 제기한바 있었다. 그래서 비변사의 지시로 경상감사가 와서 지세를 살피고 도본까지 그려간적이 있는곳이였다. 그런만큼 왜도적들에게도 깊이 숨고 빨리 도망치는데 유리하였고 근방고을과 길가로 나가 토색질하기도 편리한곳이였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지자 산속은 더욱 우중충해졌다. 이름모를 산새들이 벌써 잠자리를 찾아 분주히 날아가고있었다.

어떤 으슥진 골짜기에 들어서자 산벼랑에 의지해 선 집채만 한 큰 바위뒤에서 연기가 새여나오는것이 보이였다.

(여기로구나!)

룡복은 걸음을 멈추었다. 앞서걷던 왜놈도 걸음을 멈추고 우들우들 떨며 부지런히 룡복의 눈치를 살폈다.

《저 바위뒤에 소굴이 있는가?》

왜놈은 간신히 고개를 끄덕이였다.

류일천이가 팔을 걷어붙이며 나섰다.

《이놈을 여기서 지키구있소. 내가 들어가서 아주 도륙을 낼테니.…》

《가만있게. 그렇게 해서는 안되네.》

룡복은 침착한 눈길로 일천이를 바라보았다. 저 소굴에 꼭 세놈만 있는지도 확실하지 않는데 혼자서 들어가는것은 위험하였다. 길잡이를 하던 왜놈도 무슨 일이 생기면 도망칠수도 있고 저희패를 도와나설수 있으므로 우선 칡을 꼬아서 늙은 밤나무밑둥에 단단히 묶어놓았다.

《이제부터 내가 먼저 들어가 왜놈들에게 말을 시킬터이니 류총각은 나를 따르구 어둔이는 이놈을 지켜섰다가 도망쳐나오는 놈이 있으면 요정을 내라구.》

룡복은 류일천이와 함께 벼랑쪽으로 다가갔다. 벼랑에 의지하여 든든하게 지은 큼직한 초막, 거적을 친 문, 구새먹은 통나무굴뚝에서 피여오르는 연기…

발자국소리가 들리였던지 별안간 거적문이 훌쩍 들리면서 시꺼먼 털투성이왜놈이 불쑥 나왔다.

그놈은 낯선 사람들을 보자 덴겁을 하여 소리를 질렀다.

《다레까?(누구야)》

《하지메마시떼.(처음뵙습니다.)》

룡복은 왜말을 하며 넌지시 웃었다.

《당신네 사람이 다 죽게 된걸 업구왔소.》

《뭣이? 어디 있는가?》

《저기 있소.》

룡복은 큰 밤나무밑을 가리켰다. 묶이운 왜놈의 머리만 먼발치로 보이였다.

그것을 본 털부숭이는 두사람을 수상하게 훑어보더니 두목에게 알릴 모양인지 거적문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룡복은 꺼리낌없이 따라들어가면서 류일천에게 문을 지켜서라고 눈짓을 했다.

초막안은 굴속처럼 어두웠다. 매캐한 광솔연기가 코를 찔렀다. 나무기둥에 매단 광솔이 시꺼먼 연기를 토하며 타고있었다.

얼핏 둘러보니 사람 셋이 보이는데 두목인듯 한 놈은 펴놓은 노루가죽우에 누워서 부채질을 하다가 놀라서 일어나앉는판이고 한놈은 광솔불밑에 앉아서 무엇인가 하다가 문쪽을 바라보고있었다. 그리고 어두운 구석쪽에 희끄무레한 웬 사람의 모습이 보이였다.

《뭐야?》

노루가죽우에 누웠던자가 눈알을 굴리며 벌떡 일어나앉았다.

《당신네 사람을 업고왔소.》

안룡복이가 류창한 왜말로 공손하게 말하자 두목놈은 좀 어정쩡해하는 눈치였다.

《우리 사람을? 어떤 우리 사람인가?》

그놈이 못미덥다는듯이 매섭게 훑어보고있는 사이에 룡복은 왜검 세자루가 걸려있는 벽쪽으로 재빨리 다가갔다.

이때 별안간 밖에서 《사람 살리우-》하는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밤나무에 묶이운자가 위험신호를 보내는 꼴이였다.

그 소리를 듣자 왜놈들이 불에 덴듯 와르르 일어서며 칼이 걸려있는 벽쪽으로 다가섰다.

안룡복이가 어느새 칼 세자루를 벗겨쥐고 《꼼짝 말아!》 하고 벼락같은 소리를 질렀다.

그제야 일이 잘못된것을 짐작한 두목놈이 시뻘건 광솔불을 룡복에게 확 집어던지면서 단검을 빼들었다.

광솔불이 꺼진 컴컴한 어둠속에서 치고 받는 소리가 일어났다. 룡복의 손에서 칼이 번뜩거리고 왜놈들의 손에서 단검이 번쩍거리였다. 유령처럼 구석쪽에 박혀있던 사람은 웬일인지 땅바닥에 죽은듯이 엎드려있고 한놈은 문밖으로 빠지려다가 류일천의 칼에 맞아 꺼꾸러졌다. 류일천은 칼을 빼든채 거적문안으로 나는 범처럼 달려들어갔다.

잠시후 초막안에 있던 놈들을 모두 묶어 문밖으로 밀어냈다.

초막이 불타기 시작하였다. 두목놈이 집어던진 광솔불에서 불이 번진것이였다. 불타는 초막안에서 도적질해들인 물건을 얼마간 꺼내왔다. 쌀도 몇섬, 상목도 몇필… 여러동 잘되는 나머지 상목은 그대로 불타고있었다. 그리고 가죽을 입힌 나무함에 담긴 은덩이도 얼마간 찾아냈다.

불타는 초막주변은 대낮처럼 밝았다. 묶이운 놈들가운데서 흰옷을 걸친자가 자꾸 몸을 궁싯거리며 소리를 질렀다.

《여보시우. 좀 풀어주시우.》

분명한 조선말이였다. 아까부터 그렇게 소리를 질렀겠으나 물건을 꺼내느라고 누구도 관심을 돌리지 못하였다.

《여보시우. 이걸 좀 풀어주시우-》

룡복은 불빛을 등지고 앉은 그 사람에게로 다가갔다.

흰옷을 입은 맨 상투바람의 늙은이였다.

《대체 뉘시우?》

《조선사람이니 날 풀어주시우.》

늙은이의 얼굴을 들여다보니 얻어맞아서 성한 자리가 별로 없었다.

《조선사람이라니? 어떻게 된 일이요?》

룡복이가 마주 묻자 그 늙은이도 개개 풀어진 눈으로 룡복의 얼굴을 살펴보다가 흠칫 놀라며 《이게 룡복이가 아닌가? 아니, 룡복이 임자가 어떻게…》 하고 소리를 지른다.

《아니, 생원님!》

룡복은 칼끝으로 리생원을 묶은 바줄을 급히 끊어버렸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울산에 갔다 오던길에 이 도적같은 놈들에게 잡혀서 졸경을 치르게 되였네.》

리생원은 다리를 후들거리며 일어서지도 못하였다. 룡복은 리생원을 부축하여 마른 섶검불우에 편히 눕혀주었다.

리생원이 길가에서 왜놈들에게 붙잡힌것은 사흘전이였다.

삿갓을 숙여쓰고 대지팽이만 손에 들면 남북삼천리를 제집마당처럼 마음놓고 나다니던 리생원이여서 산이 깊다고 저어하거나 도적이나 비바람을 꺼리는 일이란 없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길가에 나타난 사나이들이 글읽을줄 아느냐고 묻더니 다짜고짜로 나무단 묶듯이 묶어서 둘러업고 이 백운산소굴로 들어와버린것이였다.

왜놈들은 어디서 훔쳐온것이 아니면 빼앗아온것이 분명한 글쓴 종이 몇장을 내놓으며 읽으라고 강박하였다. 서울 어느 세도대감집으로 보내는 뢰물단자(목록)와 같은 사사로운 문서도 있고 동래부사가 경상감사에게 올리는 무슨 공식문건도 있었다.

이 글을 가지고 가던 죄없는 량반집 종이나 역졸들은 물론 죽여 없앴겠지만 뢰물짐이 가는 날자를 알아야 하겠기에 글아는 사람을 잡아온 모양이였다.

읽어주면 도적을 도와주는것이요 아니 읽어주면 죽일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목숨을 부지하려고 왜놈들에게 그것을 읽어줄수 없었다. 그래서 련일 졸경을 치르며 칼끝으로 위협을 당하였다.

《헌데 저놈들이 저희네 도주한테로 보내는 글을 쓰라고 하면서 지껄이는 수작을 들어보니 대마도왜놈들이 분명하네. 그리구 울릉도를 렴탐하라는 도주의 분부는 아직 거행하지 못하였으나 조선의 관가에서 방비가 전혀 없는것이 분명하다거니 기회를 보아 울릉도형편을 기어이 탐지하고 금부처도 찾아내겠다거니 하는것을 보면 이놈들이 그저 길가는 사람들의 보짐이나 털어내는 좀 도적따위가 아닐세. 무슨 큰 꿍꿍이가 있는 놈들이 분명하네.》

룡복은 놀라운 눈길로 리생원을 바라보았다.

《울릉도 형편을 탐지한다구요? 그리고 금부처라는것은 또 무엇인가요?》

《글쎄, 왜말을 모르니 깊은 내막은 알길이 없었네만 여하튼 그저 도적이 아닐세.》

리생원이 이마살을 찌프리며 괴롭게 기침을 깇었다.

룡복은 두팔을 묶이운채 무릎을 꿇고앉은 왜도적들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아까 초막안에서 노루가죽우에 누워있던 두목인듯 한자의 겁에 질린 얼굴에서는 지렁이같은 징그러운 허물이 살아움직이는것처럼 푸들푸들 떨리고있었다.

재물을 략탈하고 사람을 죽이다못해 남의 나라 섬까지 렴탐하려고 날뛰는 왜놈들이 끝없이 가증스러웠다. 무엇보다도 분한것은 왜놈들이 마치 빈집에 기여든것처럼 꺼리낌없이 날뛰는것이였다.

(괘씸한 놈들… 이 나라에는 주인도 없고 조선사람은 다 잠을 자는줄 아느냐?)

룡복은 천천히 두목놈앞으로 다가갔다.

두팔을 묶이운 두목놈은 죽은듯이 엎드려 룡복의 눈치만 살피고있었다.

《네가 두목인가?》

룡복은 왜말로 물었다.

두목놈의 희번뜩거리는 눈에서는 불타는 초막쪽에서 비쳐온 시뻘건 불그림자가 얼른거리였다.

《대답을 안하겠는가?》

룡복은 왜놈들에게서 빼앗은 칼자루를 힘껏 거머쥐고 다가섰다.

《그럼 별수없다. 목을 늘이고 나앉아라!》

사납게 번뜩이던 두목놈의 눈동자에 한순간 공포의 빛이 스쳐지나갔다.

《목을 늘이고 나앉아라!》

차거운 호령소리가 다시 떨어지자 그자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잠간만…》

두목놈은 무릎걸음으로 기여와 룡복의 발치에 엎드리였다.

《살고싶으면 묻는 말에 대답해라!》

《하이. 목숨만 살려주시오.》

이놈은 졸개들과 함께 몇해전부터 산속에 숨어 강도질과 도적질로 금품을 모으는 한편 동래부와 대구감영의 동태며 좌수영수군의 나라방비상태며 경상도 일판의 물건시세같은것을 렴탐하여 쯔시마도주에게 연통해주고있었다.

주로 서울과 대구, 대구와 동래 사이로 오가는 길목을 지키다가 역마와 봉물짐을 싣고가는 량반집 심부름군들과 장사군들을 닥치는대로 잡아서 물건과 함께 여러가지 공문서와 사사로운 편지까지 모조리 빼앗은것은 다 이때문이였다.

《울릉도형편은 무엇때문에 렴탐하는가?》

《하, 그런 일은 없습니다.》

《아직도 속여볼 생각인가? 저 길가는 선비를 붙잡아서 도주에게 그런 글을 쓰라고 강박하지 않았는가?》

《하, 그것은…》

두목놈은 더는 숨길수 없다는것을 깨달았는지 한가지씩 털어놓기 시작하였다.

쯔시마도주는 이놈들을 들여보내면서 울릉도의 방비상태며 사람들이 얼마나 살고있는가 하는것들을 잘 렴탐하여 알리라고 분부하였다는것이였다. 그래서 오래동안 기회를 엿보다가 얼마전에야 겨우 배 한척을 얻어서 저의 졸개들을 울릉도에 보내였다고 실토하였다.

《금부처를 찾는다는것은 무엇인가?》

《하, 도주가 울릉도에 신령스러운 금부처가 있으니 꼭 찾아오라고 했습니다.》

《신령스러운 금부처?》

《하, 우리는 도주가 시키는대로 했을뿐이니… 제발 목숨만 살려주시오.》

《그래 찾았는가?》

《못찾았습니다.》

어느덧 동녘이 푸름푸름 밝아오고있었다. 잠을 깬 산새들이 제각기 목청을 뽐내며 소란스럽게 우짖었다.

쯔시마왜놈들이 울릉도에 대해 심상치 않은 일을 꾸미고있는것이 분명하였다. 그리고 이놈들이 혹시 어순이를 잡아간 놈들이 아닐가 하는 의심도 들었다.

그래서 황산강나루에서 웬 처녀를 배에 실어가지 않았는가, 네놈들 가운데 요시라라는놈이 있지 않는가를 따져 물었으나 왜놈들은 겁에 질려 떨면서 그저 모른다고만 하였다.

룡복은 두목놈의 얼굴에서 푸들푸들 떨고있는 지렁이같은 흉허물을 지그시 쏘아보다가 눈길을 돌려버렸다. 무엇인가 숨겨보려고 하는 왜놈들이지만 이제 관가에 끌고가면 모든것을 토설하지 않고서는 못견딜것이다. 시간을 지체하지 말고 어서 울산으로 떠나가야 했다. 이 산속에서 왜도적과 말씨름을 하는 동안에도 어순이의 운명은 어디로 굴러갈지 알수 없는것이였다.

룡복의 얼굴에는 깊은 그늘이 어리여있었다.

어순이는 과연 어떻게 되였을가?

웬일인지 불길한 생각들만 밀물처럼 가슴속으로 밀려들고있었다.

《접동, 접동!》

컴컴한 숲속에서 그 누군가를 애타게 찾는듯 한 접동새의 구슬픈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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