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쯔시마의 후사쯔포구에서 호끼주를 향해 자그마한 돛배 한척이 떠가고있었다. 배에는 세사람이 타고있었다.

자그마한 베보퉁이를 가슴에 끌어안고 돛대에 기대앉은 외태머리 따늘인 처녀는 어순이였고 이물쪽과 고물쪽에 서로 등을 돌려대고 갈라앉은 두 사나이는 요시라와 우마무라였다. 우마무라는 어순이를 호끼주까지 급히 실어다주고 오라는 분부를 받고 떠난길이였다. 그의 마음은 지금 말할것없이 불안하고 뒤숭숭하였다.

요시라의 말에 의하면 안룡복이가 어순이를 데리러 와있다고 하는데 동래옥에 갇혀있다던 사람이 일본으로 다시 건너왔단 말인가? 울릉도일을 성사시키려고 다시 왔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어순이를 찾으러 자신이 오지 않고 왜 요시라를 보냈을가?

웬일인지 불길한 일이 생길것만 같아서 마음은 활시위처럼 팽팽해졌다.

요시라가 나타난것때문에 그 불안은 더 커졌다. 한평생을 강도질과 도적질, 협잡으로 살아온자였다.

산나물을 캐던 죄없는 어순이를 쯔시마로 붙잡아온것도 바로 저자가 아니였던가. 그러한자가 지금은 어순이를 안룡복이에게 데려다준다고 하는것이 어쩐지 미덥지 않았다. 그럴뿐아니라 그렇게 살기등등하던자가 서리맞은 뱀처럼 된것이라든지 자기의 얼굴을 모를리 없겠는데 짐짓 모르는체 하고있는것들이 다 수상하게만 느껴졌다.

어쨌든 좋은 일이 있을것 같지 않은 생각뿐이였다.

까마귀가 하루에 열두번 울어도 다 불길한 소리뿐이듯이 저자가 참견하는 일은 어느 하나도 좋은것이 없었던것이다. 보퉁이를 가슴에 껴앉고 파랗게 개인 하늘우로 떠가는 흰 구름송이들을 바라보며 끝없는 기쁨에 넘쳐있는 어순의 모습을 보자 우마무라의 마음은 더욱 무거워졌다.

고향으로 돌아가게 될 날을 얼마나 기다려온 어순이였으랴 그런데 이 길이 과연 어순이에게 기쁨을 안겨주는 길로 되겠는지.…

집을 떠날 때 하나에는 이렇게 당부하였었다.

《여보, 무슨 일이 있어도 어순이를 안상한테 무사히 데려다주고 오세요. 생명을 구해준 은인이라고 해서 하는 말이 아니예요. 어순이나 안상같은 사람들을 몰라주면 우리가 무슨 사람이겠어요.》

정말 의리를 모르고 옳고그름도 가릴줄 모른다면 사람이라고 할수 없는것이다.

우마무라는 수염많은 얼굴을 쳐들고 먼 북쪽하늘 한끝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중얼거리였다.

(안상, 부디 믿어주오. 쯔시마나 일본땅이라고 어찌 8도 66주 넓은 천지에 사람다운 사람이 없겠소.)

배는 기세좋게 달리였다.

벌써 쯔시마는 아득히 먼 수평선너머에서 아물거리고있었다.

어순이는 시야에서 점점 사라져가는 그 섬을 오래도록 바라보고있었다. 고달프고 눈물겨운 3년간의 생활이 흘러간 섬이였다.

(인정깊은 하나에아주머니, 잘 계세요.)

어순이는 마음속으로 조용히 속삭이였다.

(아주머니가 아니였다면 내가 어떻게 그 험한 곳에서 세해나 견디여냈겠나요. 외로움과 절망으로 무너져내리는 내 마음을 붙잡아준것도 아주머니였구 무시로 덤벼드는 위험을 막아준것도 아주머니였지요. 정말 고마워요.)

어순이는 하나에의 수더분한 얼굴을 눈앞에 그려보며 방그레 웃었다.

(집으로 돌아가면 잊지 않고 칠석님께 빌겠어요. 대나무가지에다 마음씨 좋은 아주머니네 내외분에게 부디 복을 내려달라구 써붙여서 강물에 띄워보내겠어요. 그러면 그 소원이 꼭 이루어질거예요.)

어순이의 입가에는 그윽히 미소가 떠올랐다.

떠날 때 포구까지 따라나온 하나에도 물들인 까만이를 반짝이며 그 비슷한 말을 했던것이다.

(어순이, 잘 가오. 고향에 가서 안상과 잔치하고 아들딸 많이 낳고 부디 잘 사오. 오는 칠석날 내 칠석님께 정성다해 빌겠어. 어순이와 안상에게 부디 복을 내려달라구.)

어순이의 얼굴에는 방그레 부끄럼 섞인 웃음이 떠돌았다.

(고마워요. 빌어주세요.)

저도 모르게 마음속으로 이렇게 속삭이고난 어순이는 불타는듯 화끈거리는 두볼을 가슴에 껴안은 보퉁이에 파묻어버리였다. 미풍이 불어왔다. 귀밑거리가 살랑살랑 흩날리며 볼을 간지럽히였다. 숨가삐 오르내리는 가슴노리에 찬 옥가락지 한쌍이 소리없이 몸부림치는것이 느껴졌다.

(아, 룡이 오빠!)

방싯 열린 어순의 입술사이로 뜨거운 숨결과 함께 불타는듯 한 속삭임이 터져나왔다.

쯔시마도주가 보낸 자객에게 룡이 오빠가 잘못되지는 않을가 밤잠도 잊고 가슴태우던 그 괴로운 나날들… 집사녀석의 징글맞은 눈초리, 외로움과 설음, 누비돗자리우에서 고달프게 흘러간 수백번의 구슬픈 낮과 밤들…

그 모든 일들이 지금은 아득히 흘러간 옛일처럼만 생각되였다.

(끝내 나를 찾아 머나먼 이 왜땅으로 다시 왔구나! 룡이 오빠가 와서 기다리고있다는 호끼주라는데는 얼마나 먼곳일가? 배는 왜 이다지도 느리게만 달릴가?…)

어순이는 보통이에 묻었던 얼굴을 쳐들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끝없이 열린 푸른 하늘…

흰구름 몇송이가 배를 앞질러 북쪽하늘가로 훨훨 날아가는것이 보이였다.

저 구름처럼 훨훨 날아가지는 못할가? 저 바람결처럼 소리없이 자취도 없이 훨훨 날아가지는 못할가? 어순이는 마음속으로 조용히 속삭이였다.

룡이 오빠! 이제는 어순이도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였군요. 고향에 돌아가면… 그리운 마을사람들을 다 만나보고 룡이 오빠네 집 뒤울안에서 해마다 꽃피는 그 배나무도 보고 울릉도에 가서 초가삼간 지어놓고…

행복에 겨운 맑은 눈물이 어순이의 눈기슭에서 반짝이였다.

울릉도에 계신 아버지, 어머니, 오빠! 혼백이라도 있으면 이 어순이 잔치하는 날 부디 와주세요. 어머니는 세상에서 제일 향기로운 울릉도 동백기름일랑 잊지 말고 가져다가 이 어순이 머리를 결태내여 빗겨주세요, 아버지와 오빠는 세상에서 제일 좋은 울릉도 해삼, 전복을 한아름씩 따다가 어순의 잔치상을 높이높이 고여주세요, 왜놈들이 더는 기여들지 않는 살기 좋은 울릉섬에서 섬년이랑, 쇠동이랑, 룡이 오빠랑 우리모두 마음놓고 화목하게 사는걸 꼭 보아주세요.…

순풍이여서 배는 다음날 이른저녁녘에 호끼주에 이르렀다. 웬일인지 포구에서 맞아주려니 했던 룡이 오빠는 보이지 않고 낯선 왜인 두사람이 다가와서 요시라와 수군수군하더니 길을 떠나자고 재촉하였다.

어순이는 낯선 왜인들을 따라 돗도리섬까지 걸어갔다. 땅거미가 거밋거밋 내려앉을 때 태수의 관사에 들어서게 되였는데 거기에서도 룡이 오빠는 보이지 않았다.

(웬일일가?)

어순이는 불안한 마음으로 데리러 온 왜인을 따라 후원에 외따로 떨어진 어떤 집으로 갔다. 방으로 들어가자 데리고 온 왜인은 아무데도 나가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어디론가 가버리였다. 초대우에서 초불 한자루가 빨갛게 타오르고있는 빈방이였다. 창밖은 벌써 캄캄하여 아무것도 분간할수가 없었다. 멀리 관사 본채인듯 한 큰 집과 그 곁채들에서 비쳐나오는 대낮같이 밝은 불빛만 보일뿐이였다.

룡이 오빠는 어디 있을가? 정말 왔을가? 우마무라는 왜 보이지 않을가?

어순이는 불안한 마음으로 회를 바른 싸늘한 벽이며 거미줄이 드리운 천정이며 바닥에 깐 헌 누비돗자리바닥을 바라보았다.

퍼그나 시간이 지난 뒤에 문이 열리더니 웬 왜인아낙네가 저녁밥을 들여다놓고 말없이 나갔다. 그뒤로는 다시 오는 사람이 없었다.

밤이 깊어지자 심지가 다 타버렸는지 초불마저 깜박 꺼지고말았다.

어순이는 먹물같은 어둠속에 앉아있기가 싫어서 밖으로 나왔다. 캄캄한 밤하늘에는 별들이 총총하였다. 멀리 관사쪽에서 차 끓이는 냄새가 진하게 풍겨왔다.

이때 어둠속에서 다급한 발자국소리가 들리더니 우마무라가 불쑥 나타났다.

《포구에 배를 맡겨두고 오느라고 그만 늦었소. 어순이를 찾느라고 별데를 다 가보았는데 부엌칸에서 알려주더군…》

우마무라는 이마에 질펀하게 내밴 땀을 씻고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기다린다는 룡이 오빠는 어디 갔을가요?》

《나도 이제껏 그걸 알아보았소. 안심하우. 안상이 여러 사람들과 함께 울릉도감세장이 되여 이곳에 왔다고 하우. 그런데 며칠전에 에도에서 쯔시마도주의 애비라는 늙은이가 왔댔는데 아무래도 눈치가 좀 이상하우.》

어둠속에서 우마무라의 눈빛이 불안하게 번쩍이였다.

《그래두 내가 곁에 있으니 어순이는 조금도 걱정마우. 혼자서는 아무데도 나가지 말구…》

《알겠어요. 그런데 룡이 오빠는 어디 있을가요?》

《아직 나도 만나보지 못했소. 들리는 말이 지금 쯔시마도주의 애비라는 늙은이와 무슨 담판을 한다우. 그러니 날 밝을 때까지 눈을 좀 붙이오. 새벽에 다시 오겠소.》

우마무라가 어둠속으로 사라진지도 이윽하건만 어순이는 불빛이 비쳐나오는 관사쪽만 바라보며 처마밑에 그린듯이 서있었다.

룡이 오빠가 지금 저 관사 어느 방에 쯔시마도주의 애비라는 늙은 왜인과 마주앉아있으려니 하는 생각이 들자 마음은 걷잡을수 없이 그곳으로만 달려가고있었다.

어순이는 저도 모르게 발볌발볌 불빛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하였다.

관사 뒤뜰이여서 사방은 그 어디나 쥐죽은듯 조용하였다. 아직 불빛이 남아있는 창문은 두개뿐인데 첫 창문안에서는 아무 기척도 없고 다음창문앞으로 다가가자 두런두런 왜말소리가 들리였다. 두세사람의 말소리가 번갈아 들리는데 말뜻은 조금도 분간할수가 없었다.

어순이는 마루우로 조심히 올라가 창밑그늘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러자 말소리가 똑똑히 들려왔다.

《요시라, 쯔시마에서는 아직 무슨 소식이 없느냐?》

석쉼한 늙은이의 목소리였다.

《없소이다.》

《이상하다. 소식이 빨리 와야 저놈이 감세장이 확실한지를 알게 아니냐?》

《소인의 생각에는 확실한줄로 압니다.》

《아니다. 두고봐야 한다. 그러니 시간을 끌며 더 기다려보았으면 좋겠지만… 이제는 그럴수도 없다. 너도 금방 그 감세장이라는자가 하는 수작을 다 들었을터이지만 저희들의 요구를 끝내 다 들어주어야 돌아가겠다고 하는데 잘못하다가는 우리가 큰 봉변을 당하고말 형편이다.》

말소리가 그치더니 한동안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잠시후 말소리가 다시 들리였다.

《내 말을 명심해듣거라. 이것이 마지막 계책이다. 네가 죽고사는것도 다 여기에 달렸다.》

《명심하겠소이다.》

《그놈을 꺾어누르자면 별수없이 그놈의 약혼녀를 눈앞에 끌어내다가 죽이겠다고 하는 수밖에 없다.》

《그 계집을 그래서 끌고오라고 했소이까?》

《그렇다. 아무리 무쇠덩이같은 놈이라도 제 눈앞에서 약혼녀가 죽는것을 보면서도 울릉도가 제 나라 섬이라고 하지는 못할것이다. 그러니 너는 래일 그 계집을 마을사람들앞에 끌어낸 다음 끝내 굴복하지 않으면 계집의 목을 쳐라! 아까울것이 없다. 내 아들도 저놈들때문에 죽었으니 내가 피를 보아야 직성이 풀리겠다. 알겠느냐?》

《분부대로 하겠소이다.》

더는 아무 말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잠시후 창문에서 불빛이 훅 꺼지였다.

(아, 이게 무슨 일인가?)

어순이는 주먹을 깨물며 터져나오는 신음소리를 간신히 삼키였다.

왜놈들이 룡이 오빠가 울릉도일에서 손을 떼게 하려고 자기를 끌어온것이였다. 자기를 미끼로 삼아 룡이 오빠에게 올가미를 씌우려고 하는것이였다.

(아, 이 일을 어찌하면 좋을가.)

어순이는 허둥지둥 엎어지고 쓰러지면서 별채로 돌아왔다. 그 캄캄하고 을씨년스러운 빈방으로 어떻게 들어갔는지 알수 없었다. 헌 다다미우에 맥없이 쓰러져 울음을 터뜨리였다.

룡이 오빠가 혹시 숱한 고생을 겪으며 성사시켜오던 일을 나때문에 순간에 망쳐버린다면… 그렇게 되면 이 세상에 나처럼 무서운 죄를 짓는 사람은 없을것이다. 아, 내가 룡이 오빠에게 이렇게 무거운 짐으로 될줄이야 누가 알았을가.…

어순이는 더욱 서럽게 흐느끼였다.

아, 이게 무슨 운명일가. 내가 룡이 오빠의 짐이 될줄이야, 하늘도 무심하구나! 왜놈들이 내 목숨을 칼날로 위협하면 룡이 오빠는 더욱 어쩔수없는 처지에 빠지고말것이다.…

어순이는 엎드린채 몸부림을 쳤다. 이런 함정이 기다리는줄도 모르고 기쁨에 떠서 달려온것이 후회되였다. 이곳으로 오지만 않았어도 룡이 오빠를 이렇게 헤여날길 없는 함정에 몰아넣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토록 그립던 룡이 오빠의 몸가까이로 달려온것이 이렇게 죄스럽고 괴로운 일로 될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어순이는 자기 한몸을 그 어디엔가 감추어버리고싶었다. 영영 숨어버리고싶었다.

그러면 왜놈들이 더는 룡이 오빠를 괴롭히지 못할것이 아닌가.

하지만 이 죄스러운 몸을 어디다 숨기랴. 어디에다…

밤은 한량없이 깊어가고있었다. 사방 어디나 조용하였다. 아니, 진저리가 쳐지도록 괴괴하고 숨막히는듯 한 정적이 모든것을 내려누르고있었다. 밑창을 모를 그 정적은 어순이를 어디론가 외롭고 고독한 곳에로 점점 이끌어가고있었다.

영원한 정적이 소용돌이치는 캄캄한 세상이 눈앞에 우렷이 떠올랐다.

어순이는 눈앞에 얼른거리는 영원히 캄캄한 그 세계를 들여다보며 정신없이 중얼거리였다.

다른 길은 없어, 다른 길은… 서슴거릴것두 없구 무서워할것두 없어. 떳떳한 길이야.

울릉도를 위하구 룡이 오빠를 위하는 일인데 무엇을 주저하구 무엇을 서슴거릴가. 그것이 떳떳해. 세상앞에서두 사람들앞에서두… 룡이 오빠도 사람들도 나를 리해해줄거야.…

모진 마음을 먹고나니 가슴은 평온해졌다. 숨쉬기도 한결 헐해졌다. 그대신 온몸이 물에 젖은 솜처럼 나른해지고 한번도 체험한적 없는 무서운 허탈감에 사로잡히였다.

사방은 여전히 괴괴하였다.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득히 먼 그 어디에선가 조용히 설레이는 파도소리가 들려오는듯 하였다.

쏴― 철썩―철썩―

너무도 부드럽고 고르로운 소리였다. 그것은 꿈결에도 못 잊는 울릉도의 파도소리였다.

마치도 기슭을 정답게 쓰다듬으며 섬을 잠재우려는 자장가소리처럼 고요하고 정다운 파도소리였다. 그 정다운 파도소리를 먼 꿈결에서처럼 어렴풋이 들으며 어순이는 저고리앞섶을 헤치고 손을 조심히 밀어넣었다. 저고리안고름에 차고있던 장도칼이 손끝에 선듯 만져졌다. 그러자 가슴이 후두두 뛰기 시작하였다. 온몸이 걷잡을수 없이 떨리였다.

갑자기 무서워졌다.

아직은 너무도 푸르고 싱싱한 삶이 가슴속에서 숨가삐 몸부림치고있었다. 그 삶을 즐기고싶었다. 꿈에도 잊은적 없는 울릉도의 그 정다운 모습을 다시 보고싶었다. 어순이는 두눈을 꼭 감았다. 다시 손을 더듬거리자 무엇인가 부드럽고 따스한것이 잡히였다. 실에 꿰여 목에 걸고다니던 한쌍의 옥가락지였다.

아, 옥가락지!

번개불같은것이 가슴 한복판을 뜨겁게 꿰지르고 지나가는듯 하였다. 말 못할 설음이 밀물처럼 북받쳐올랐다.

《아, 룡이 오빠!》

어순이는 옥가락지를 두손으로 꼭 감싸쥔채 애타게 몸부림치며 흐느끼였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눈을 떠보니 어느덧 창문이 환히 밝아오고있었다.

아, 내가 왜 이러고있을가, 아무래도 달리는 될수 없는 일인것을…

어순이는 가까스로 일어나앉았다. 장도칼을 꼭 틀어잡고 푸름푸름 밝아오는 창문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천천히 머리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이대로는… 이대로는 안돼, 룡이 오빠를 보고싶구나. 꼭 한번만이라도.

이때 우마무라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어순이는 얼른 장도칼을 감추고 눈물을 훔치며 돌아앉았다.

우마무라는 퉁퉁 부어오른 어순의 눈이며 뚜껑도 열지 않은채 식어버린 밥그릇들을 살펴보고나서 부드럽게 말하였다.

《어순이, 너무 걱정마우. 지난밤 태수네 집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니 안상이 얼마나 위풍이 당당한지 모두 감세장이야기만 하더란 말이우. 일이 잘될것이니 마음을 놓소.》

어순이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룡이 오빠는 지금 어디 계신대요?》

《귀한 손님들을 모시는 사관에 들어있다는데 외인을 엄중히 단속하기에 아직 만나보지 못했소. 조금만 기다리면 안상이 데리러 올것이니 안심하우.》

우마무라가 돌아간 다음 한동안이 지난 뒤에 뜻밖에도 요시라가 나타났다.

온다던 룡이 오빠는 끝내 오지 못하는구나, 무슨 일이 생겼을가?

요시라는 너의 약혼자가 있는 곳으로 가자고 하면서 어순이를 데리고 관사앞뜰로 향하였다. 어순이의 머리속에서는 벌써 불길한 생각이 확 밀려들었다. 가슴이 사정없이 떨리였다. 컴컴한 흐린 여름하늘이 멀리 담장너머로 낮게 드리워있었다.

한소나기 퍼부으려는지 어수선한 바람이 불었다. 붉은 칠을 한 자그마한 일각대문을 열고 들어서자 관사앞뜰이 나지였다. 낮고 널직한 관사마루우에 자리잡고 앉은 여러 사람들이 멀리로 보이였다.

그 사람들속에서 푸른 철릭에 검정갓을 쓰고 이글이글 타는듯 한 눈길로 이쪽을 살펴보는 룡이 오빠의 얼굴을 알아보는 순간 어순이는 숨이 콱 막히는듯 하여 저도 모르게 입속으로 부르짖었다.

《룡이 오빠!》

룡이 오빠는 이쪽을 돌아보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어순이!)

뜨거운 그 목소리를 어순이는 분명히 듣고있었다. 깊은 사연이 담긴 수백수천마디의 뜨거운 말들이 이 순간 번개치듯 두사람사이로 오고갔다.

(어순이, 이게 얼마만이요?)

(룡이 오빠, 그동안 얼마나 가슴태웠나요? 한생을 다 바쳐 룡이 오빠를 돕자고 했건만… 이게 무슨 운명일가요? 무슨 운명이 이럴가요?)

두눈에 눈물이 가득 고여올라 더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까마귀 한마리가 관사앞뜰을 기웃기웃 살펴보면서 먼 지붕우로 불길하게 날아지나가는것이 어렴풋이 보일뿐이였다.

《자, 약혼녀가 앞에 와 섰으니 감세장대인께서 어서 마음을 정해주시기를 바라오.》

관사마루쪽에서 늙은 요시쯔네의 석쉼한 목소리가 울리였다.

《만일 울릉도의 일을 잊어주시겠다면 저 처녀는 데리고 가시오만 그럴 생각이 없다면 저 처녀는 이자리에서 목숨을 바치고말것이니 그리 알고 어서 대답을 해주오. 내 부하들은 다 성미가 급해서 오래 참고 견디지를 못합니다.》

더는 지체하지 못할 순간이 닥쳐오고야말았다는것을 어순이는 깨달았다.

어순이는 두눈을 꼭 감았다. 이제부터 자기의 목숨은 왜놈들의 미끼로 리용되는 목숨이였다. 한시각이라도 더 지체할수록 나는 룡이 오빠를 더 괴롭힐것이고 왜놈들을 도와주게 될것이였다. 요시라가 칼을 빼들고 살기어린 눈을 번뜩이며 천천히 어순의 곁으로 다가오고있었다.

《아, 룡이 오빠!》

어순이는 저고리안고름에 매단 장도칼을 급히 더듬어쥐였다.

(아, 이 길밖에 없어요. 용서하세요, 울릉도를 위하구 룡이 오빠를 위한 길은 이 길밖에…)

《룡이 오빠―》

피타는듯 한 마지막부르짖음이 채 끝나기도 전에 어순이는 칼날을 입에 물고 얼굴을 땅에 박으며 앞으로 푹 꼬꾸라졌다. 칼날은 사정없이 그의 목을 꿰뚫었다.

그야말로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끔찍한 일이 순식간에 벌어졌다.

룡복이와 류일천이가 마루우에서 뛰여내려 관사뜰로 급히 달려왔다.

《어순이, 어찌된 일이요?》

룡복은 쓰러진 어순이를 안아일으켰다. 아직 따스한 체온이 그대로 느껴졌으나 그것은 벌써 산사람의 몸이 아니였다. 입속에 깊이 박힌 칼자루를 조심히 뽑아내자 입술사이로 선홍색의 더운 피가 가는 이랑을 지으며 천천히 흘러내렸다. 가슴우에 놓인 손에는 비취빛이 그윽한 옥가락지 한쌍이 꼭 쥐여있었다. 아, 옥가락지, 사연깊은 옥가락지!

룡복은 끓어오르는 오열을 참을길 없어서 그 옥가락지와 함께 싸늘하게 식어가는 어순의 두손을 와락 부여잡았다. 룡복의 볼을 타고 뜨거운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리였다.

(아, 어순이, 그렇게 모진 마음을 먹다니… 왜 조금만 더 기다려주지 못했소.

나를 두고 혼자서 이렇게 간단 말이요? 어서 정신을 차리고 말 한마디라도 해주오.)

감지 못한 처녀의 두눈에서는 아직도 채 마르지 않은 맑은 눈물이 반짝이고있었다.

끝없는 아쉬움과 애절함이 서린 그 눈길은 마치 살아있는듯 룡복의 얼굴만 하염없이 바라보고있었다.

이때 대문칸에 서있던 우마무라가 급히 달려들어왔다.

《이게 웬일이요?》

그는 땅바닥에 풀썩 주저앉으며 가슴이 무너져내리는듯 한 신음소리를 질렀다. 그의 손에는 땅에서 집어든 장도칼이 쥐여져있었다.

어순이를 지켜주려고 만들어준 그 칼이 처녀의 목숨을 끊는 도구로 될줄이야… 아, 이게 무슨 일인가? 저 죄없는 처녀를 잡아다가 끝내 이 낯선땅에 쓸어뜨린 놈이 누구냐?

우마무라는 칼을 거머쥔채 성난 범처럼 관사쪽으로 달려가며 미친듯이 부르짖었다.

《이놈들아, 이 짐승보다도 못한 놈들아!》

그는 앞을 막으며 달려드는 요시라의 가슴에 힘껏 칼을 박았다. 그리고는 땅에 꺼꾸러져 몸부림치는 그자의 더러운 몸뚱이우에 침을 뱉고 또 뱉었다. 이미 침을 뱉고 돌아선 그 치욕스러운 모든것과 다시한번 피로써 결별을 고하는것이였다.

섬돌아래 서있던 칼찬 왜인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우마무라의 팔을 비틀어 묶었다.

우마무라는 대문밖으로 끌려가면서 거세게 몸부림쳤다.

《안상! 나를 욕해주오. 어순이를 지켜주지 못한 이 의리없는 놈을…》

대문밖에 끌려나간 후에도 그의 거센 목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안상, 부디 잘 가우.》

그것이 그가 남기는 마지막 말이 될려는지도 몰랐다.

룡복은 어순의 시체를 부둥켜안고 천천히 일어섰다. 관사마루우에 서있던 왜놈들은 겁에 질려 모두 어디론가 사라져버리였다. 시꺼멓게 흐린 하늘에서 먼 천둥소리가 은은하게 울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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