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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스듬히 누워서 요시라의 말을 듣고있던 쯔시마도주의 애비 소 요시쯔네는 불에 덴듯이 놀라며 벌떡 일어나앉았다.
《아니? 그게 사실이냐?》
《예, 죄다 사실이옵니다. 소인도 이번에는 틀림없이 죽은 목숨이오니 제발 목숨만 살려주시오.》
돗도리에서 에도에 이르는 머나먼 길을 급히 대여오느라 먼지범벅이 된 요시라의 더러운 얼굴로 땀인지 눈물인지 분간할수 없는 때국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보통 호끼주지방에서 에도까지 오려면 륙로와 수로를 거쳐 보름남짓한 시일이 걸린다.
그런데 요시라는 필사적으로 달리고 노를 저어 열하루만에 와닿은것이였다.
《제발 목숨만 구원해주시오. 소인은 시키는대로 했을뿐이옵니다.…》
《그만 닥치지 못하겠느냐?》
늙은 요시쯔네의 독기오른 눈에는 벌겋게 피발이 섰다. 요시라의 목숨따위는 돌볼 겨를이 없었다. 감세장의 험악한 글이 막부에 전해지는 날이면 아들의 목숨을 구할수 없다는것을 깨달은것이였다. 사실 막부의 서계를 중도에서 가로챈것이나 차왜를 보내여 강도적인 교섭을 들이댄것이나 다 막부장군의 은근한 암시를 받고 한 일이기는 하지만 일이 이렇게 부르터진 때에 누가 그것을 알아줄것인가.
막부장군은 오히려 자기의 체면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쯔시마도주를 가만두지 않을것이다. 더우기 두 나라사이에 례절로 오고가는 물건에 함부로 손을 댄 죄행까지 드러나면 사태는 더욱 수습할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말것이다.
늙은 요시쯔네는 이발을 부득부득 갈며 살맞은 짐승처럼 다급히 방안에서 서성거리였다.
(큰일났구나.… 저 어리석은 녀석이 분별없이 날뛰다가 우리 가문을 끝내 망치고말겠구나!)
《도노사마, 제발 목숨만 구해주시오.》
요시라는 아직도 물러가지 않고 시끄럽게 발치에 엎드려 빌고있었다. 털끝만 한 주저도 없이 세상 포악한짓이란 짓은 다 해오던 요시라가 이토록 절망에 빠진것을 본 늙은 요시쯔네의 가슴에도 말할수 없는 공포와 절망이 몰려왔다. 그러나 떨어지는 날벼락을 앉아 기다리다가 맞을수는 없었다. 일본에는 넘어져도 그냥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속담이 있다. 하다못해 몽둥이나 돌 한개라도 쥐고 일어서서 필사의 발악을 해본다는 뜻이다.
《요시라! 그만 일어나서 내 말을 듣거라.》
요시쯔네의 눈에서 푸른 불빛이 번뜩이였다.
《네 목숨을 건지는 길은 너의 주인의 목숨을 건지는데 달려있다. 내 말을 명심해들으면 너도 살고 도주도 살길이 있다. 알겠는가?》
《알겠소이다. 어떤 분부든지 다 듣겠소이다.》
요시라는 지렁이같은 칼자리가 가로 건너간 더러운 얼굴을 쳐들고 일어나앉았다.
《어떤 일이 있어도 조선서 온 감세장의 글이 막부에 들어가지 못하게 해야 한다, 알겠느냐?》
《알겠소이다. 하지만 호끼주태수가 벌써 에도로 떠났소이다.》
《그러니 너는 이제부터 길목을 지키고있다가 호끼주태수의 행차가 들어서면 즉시 나에게 알려야 한다. 혀로 쓰다듬어서 안되면 죽여없애는 수를 써도 무방하다.》
《알겠소이다.》
눈치빠른 요시라는 요시쯔네의 뜻을 알아차리고 시퍼런 불이 이글거리는 눈을 번뜩이며 대문밖으로 급히 사라지였다. 사흘이 지난 어슬녘에 요시라가 다시 나타났다.
《호끼주태수가 나타났소이다.》
침상에 누워있던 요시쯔네는 주름이 얼기설기 건너간 늙은 얼굴이 해쓱해지며 벌떡 일어났다.
《어디로 가더냐?》
《저의 집으로 들어갔소이다.》
당시 일본의 각주 태수들은 수도인 에도에 저마끔 좋은 집을 하나씩 가지고있으면서 《참근》중에 있는 저의 일가족속들을 살게 하였는데 막부장군을 뵈러오거나 막부의 부름을 받고 에도에 와있는 기간에는 태수자신도 이 집에서 지내고있었던것이다.
《그럼 됐다. 어서 떠날 준비를 갖추어라.》
이리하여 잠시후 요시쯔네는 요시라에게 좋은 술과 몇가지 귀중품을 들려가지고 마쯔다이라를 찾아 떠났다. 충실한 개처럼 주인을 따라가는 요시라의 한쪽팔에는 붉은 옻칠을 한 쯔노다루라고 부르는 한되들이술통이 맵시있게 들려있고 다른쪽팔소매속에는 남몰래 감추어가지고가는 날이 시퍼런 비수가 들어있었다. 어느쪽 무기가 힘을 쓰게 되겠는지는 이제 두고보아야 알 일이였다.…
…꼬리 아홉을 가진 늙은 여우처럼 로회한 두 왜인은 밤이 깊도록 마주앉아있었다. 두런두런하는 말소리가 미닫이짬으로 새여나왔다.
퇴마루밑 컴컴한 그늘속에 몸을 숨기고 엎드린 요시라는 귀를 도사리고 안에서 흘러나오는 말을 들으려고 애를 썼다. 똑똑히 들리는 말은 몇마디 되지 않았다.
하지만 두사람사이로 술잔이 여러순배 오고가자 말소리가 점점 커졌다.
《내 칠십평생에 변변치 못한 자식때문에 이렇게 마음 써보기는 처음이라는것을 태수어른께서도 짐작하실줄 믿소이다.》
능갈친 목소리는 늙은 요시쯔네의것이였다.
《그야 그럴테지요. 그러기에 나도 로형께 먼저 말씀드리고 처결하려던차올소이다.》
호끼주태수 마쯔다이라의 목소리에서는 저으기 간드러진 맛이 풍기였다. 물론 마쯔다이라는 가문의 지체로 보나 세도로 보나 보잘것없는 작은 섬을 차지하고있는 요시쯔네를 발바닥처럼 여긴다 해도 조금도 실례될것이 없지만 술을 들고 제발로 찾아온 늙은이에 대한 나이대접으로 상대를 《로형》이라 부르며 간드러지게 대하는것이였다.
《허허… 고맙소이다.》
《천만에요…》
쪼르르 술 따르는 소리.…
한동안 먹고 마시는 소리만 들리였다. 사흘동안 밤낮으로 길목을 지키느라고 굶주릴대로 굶주린 요시라의 빈 배속에서도 쪼르르 소리가 련이어 일어났다.
《쿠소(똥같이)!》
요시라는 굶주린 개처럼 퇴마루밑에 엎드려 닭알침만 꿀꺽꿀꺽 삼키고있었다. 어서 호끼주태수의 입에서 《안되오.》소리가 나오고 요시쯔네가 술잔을 깨치는 소리가 쟁강! 하고 들렸으면 하고 기다렸다. 상전이 술잔을 깨여 신호를 보낼 때 미닫이를 부시고 들어가 호끼주태수의 목에다 칼을 쿡 박으면 만사는 끝나는것이다.
하지만 술잔깨는 소리는 아직도 들리지 않는다. 사람의 목에서 뿜겨져나오는 들쩍지근한 비린 피냄새를 맡아보고싶은 강한 욕망이 요시라의 온몸에서 꿈틀거리였다. 이때 요시쯔네의 불안에 젖은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태수어른께서 내 얼굴을 보아서라도 제발 그 글을 그대로 가지고 되돌아가서 울릉도감세장을 잘 타일러 말썽없이 해주신다면 그 은혜를 내 백골이 되여도 잊지 않겠소이다.》
《허허… 하시는 말씀의 뜻도 알만 하고 당하신 딱한 사정도 모른다 할수 없소이다만…》
호끼주태수의 말이 여기에 이르자 요시라는 바싹 긴장해지며 소매속에 감춘 칼자루를 더듬어쥐였다. 이제 다음말 한마디에 따라 술잔깨는 소리가 들리고 안 들리고가 결판날것이다.
그런데 그 다음말이 매우 묘하게 엮어지고있었다.
《로형도 아시는바이지만 그 감세장이라는자가 지략이 출중하고 의지가 강한 위인이여서 내가 만약 그 글을 전하지 않으면 또 다른 수를 쓸것이옵니다. 그렇게 되면 이번에는 내가 두 나라사이의 세페관계를 알면서도 고하지 않은 지정불고죄인이 되여 목숨을 바치게 되겠으니 이 일은 또 어찌하면 좋겠소이까?》
《사정은 그러하오만 우리 가문의 운명과 자식의 목숨이 경각에 이르렀는데 내 무엇을 아끼겠소. 재물을 있는대로 다 내놓을터이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감세장을 눌러놓을수가 없으시겠소?》
《년전에 별별수를 다 써보았소이다. 은덩이에다 진수성찬에다 계집까지 들이밀며 울릉도일을 묻어두려고 했지만 저 나라 백성들이란 원래 제 한목숨은 서슴없이 버려도 제 나라 땅을 남이 건드리는것은 허락치 않는 족속들인지라 아무 소용이 없었소이다.》
저으기 노기어린 요시쯔네의 기침소리가 어험! 하고 한번 들리였다.
《그러니 그것을 핑게삼아 청을 못 들어주시겠다는 말씀이시오? 어험!》
《아니, 핑게라니요?》
《나도 나이든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체면이 없는것도 아니지요. 이만큼 낮추 앉아 빌며 청하는데도 끝내…》
요시쯔네의 목소리에서는 은근한 살기가 느껴졌다.
(때가 왔구나!)
요시라는 칼자루를 쥔 손을 부르르 떨었다. 퇴마루밑에 엎드렸던 몸을 반쯤 일으키며 방안으로 뛰여들 태세를 갖추었다.
《로형, 자중하시오. 마른나무 꺾듯 해서 될 일도 아닌데 너무 성급하시구려. 로형이나 나도 무사하고 로형의 자제분도 무사해야 하지 않겠소이까? 그러자면…》
갑자기 호끼주태수의 목소리가 낮아지였다. 목소리를 죽여가며 수군거리는 소리만 들리였다. 한마디도 똑똑히 알아들을수 없었다. 다만 가끔 가다가 《그 조선계집을…》 하거나 《그렇게 하면 틀림없소이다》 하는따위의 말마디들이 토막토막 들려올뿐이였다.
요시라는 칼자루를 거머쥔 손을 맥없이 내리우며 퉤! 하고 건침을 내뱉았다. 끝내 칼을 써볼수 없게 된것이다.
끝없이 계속되던 밀담은 자정이 넘어서야 겨우 끝이 났다. 등초롱을 든 요시라를 앞세우고 집으로 돌아온 늙은 요시쯔네는 급히 아들에게 편지를 쓰느라 불을 밝히고 방안에 들어앉아있었다.
며칠째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하며 헤매고난 요시라는 어지러운 행랑칸에 쓰러진채 코를 골기 시작하였다.
푸름푸름 새날이 밝을무렵에 누군가 세차게 두드려깨우는 바람에 잠에서 깨여난 요시라는 급히 늙은 상전에게 불리워갔다.
그때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고있던 늙은 요시쯔네는 밀봉한 편지 한통을 주며 말하였다.
《이걸 가지고 지금 급히 쯔시마로 떠나거라. 한시각이라도 빠를수록 좋다. 돌아올 때는 몇해전에 잡아다 바친 박씨라는 계집을 데리고오되 곧장 호끼주로 가거라. 호끼주태수와는 이미 언약이 있었으니 념려할것이 없다. 나도 그리로 가서 기다리겠다. 알겠느냐?》
요시라는 밀봉한 편지를 품속에 밀어넣으면서 박씨처녀는 왜 데리고오라는것일가 하는 의문이 떠올랐으나 더 묻지 못하고말았다.
《너의 목숨을 구하고 못 구하는것이 이번길에 달렸으니 살고싶으면 한시각이라도 빨리 갔다오는것이 좋다.》
《알겠소이다.》
요시라는 군소리없이 엎드려 절을 하고 로자를 받은 다음 길을 떠났다. 포구까지 먼길을 단숨에 걸어나와 빠른 비선 한척을 얻어타고 힘껏 노를 저어 난바다로 나왔다. 에도에서 쯔시마까지의 길은 멀고도 험하였다. 배머리를 서남쪽으로 돌리고 세또나이바다를 가로질러나가다가 나가또주의 좁은 물목을 빠져나가면 겨우 이끼섬이 나지고 거기서 다시 배머리를 서북쪽으로 돌려 조류가 여울쳐흐르는 거친 물결을 건너가야 쯔시마가 나타나는것이다.
하루동안은 하늬바람이 불어주어서 돛을 펴고 곧추 달렸지만 그다음부터는 갑자기 서남풍이 불면서 비가 쏟아지였다. 역풍이라 할수없이 노를 잡고 바다와 힘겨운 싸움을 시작하였다.
헐어빠진 노라기(일할 때 입는 웃옷)는 순식간에 함뿍 젖었다. 쩝쩔한 비물이 지렁이같은 상처를 타고넘어 입귀로 흘러들었다.
(아, 내 목숨은 이제 어떻게 될가?)
울릉도에 불법침입한자들을 모조리 처형하되 요시라와 같은자들은 더욱 살려둘수 없다고 오금을 박던 안룡복의 가을서리같이 차거운 목소리가 귀전에 쟁쟁히 울려왔다. 그러자 그의 눈앞에는 소름끼치는 무서운 장면들이 펼쳐졌다.
백운산소굴로 주저없이 뛰여들어 도적무리들을 모조리 잡아 묶어버리던 눈빛 날카로운 젊은이. 무서움이라는것을 모르고 살아온 요시라도 그 담력과 서슬푸른 기상앞에서는 기가 질려 사지를 떨지 않을수 없었다. 오끼시마도주와 호끼주태수를 꼼짝 못하게 눌러놓고 막부의 서계까지 받아가지고가는 안룡복의 그 놀라운 기지와 외교술과 감히 당해낼수 없는 정신력앞에서 요시라는 얼마나 공포에 떨었던가.
돌이켜보면 이 바위같은 담력을 가진 사나이와 자기가 너무도 깊이 얽혀진것에 그자신도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박씨라는 그의 약혼녀를 잡아간것도 자기였고 그가 가지고가던 막부의 서계를 빼앗은것도 자기였으며 동래옥에 숨어들어가 그를 죽이려다가 실패한것도 자기였다.
안룡복이와는 너무도 자주 운명의 외나무다리에서 마주쳤다.
지금까지는 쯔시마도주가 뒤에서 부축해주었기때문에 하늘이 높은줄 모르고 날뛰였지만 이제는 도주자신이 안룡복의 손아귀에 목줄을 쥐워서 생사를 예측하기 어려운 지경에 빠지였으니 그 누구도 자기 목숨을 지켜줄 사람이 없었다. 요시라의 더러운 뺨으로 뜨겁고 쩝절한 눈물이 흘러내리고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을 장난삼아 죽이던 그자신이 자기에게로 다가오는 죽음을 명백히 예감한것이였다. 죽음이라는것이 이렇게 무섭고 끔찍한것인줄을 비로소 깨달은 요시라였다. 그의 입에서는 공포와 절망에 젖은 한숨이 새여나왔다. 이제는 짐승의 목숨이나 다를바없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상전의 도구가 되여 마지막까지 발버둥쳐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안룡복이가 감세장이라는 관직까지 가지고 나타났으니 과연 무슨 수로 그를 꺾어낼수 있겠는가. 안룡복이가 오끼시마로 쫓아와서 울릉도감세장이라고 할 때 요시라는 그것을 믿지 않았다. 그런데 호끼주태수와 당당히 맞서서 담판하는것을 엿들으면서 곰곰히 생각해보니 그것을 믿지 않을수 없었다. 울릉도에서 사람들을 능숙하게 지휘하던 일이며 그전날과는 달리 섬에 들어간 자기들을 두말 못하게 휘여잡던 일들을 돌이켜보아도 그가 관직을 맡고 섬에 들어온것이 틀림없었다.
안룡복이가 감세장이 틀림없다는것을 믿게 되자 자기에게 닥쳐올 죽음도 더 확실히 느껴지였다. 요시라는 절망에 몸부림쳤다. 파도와 비바람은 더욱 사납게 휘몰아쳐왔다. 요시라는 이를 악물고 필사의 힘을 다하여 여러날만에 겨우 살아서 쯔시마의 후사쯔포구에 기여올랐다.
…
이 시각, 신당에서 기도를 마치고 돌아온 쯔시마도주 소 요시미찌는 침상에 맥없이 쓰러져있었다. 병든 몸은 나날이 쇠약해져서 서리맞은 뱀처럼 몸을 가눌 힘마저 없어졌다. 그 병은 울릉도를 차지하려던 일이 점점 뒤틀려지고 신당의 귀신들도 자기를 종내 보살펴주지 않는다는것을 예감하면서부터 생기기 시작한것이였다. 이제는 몸져누워있을 때가 많아지고 밤만이 아니라 대낮에도 무서운 악몽에 시달리군 하였다.
눈만 감으면 청룡, 백호기를 펄펄 날리면서 쯔시마를 징벌하러 밀려오는 조선군사들의 모습이 얼른거리였다. 금빛갑옷을 떨쳐입고 붉은 상모가 펄펄 날리는 전립을 비껴쓴 눈빛 무서운 장수 한사람이 묵직한 목화를 신은 발로 땅을 구르며 우뢰같은 목소리로 호통쳤다.
《네 이놈! 천하에 생쥐같이 간사한 놈! 네놈들이 아직도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도적의 버릇을 못 버리고 해적질을 일삼다 못해 남의 나라 섬까지 차지해보려고 덤빈단 말이냐? 우리가 기해년에 네놈들의 소굴을 징벌할 때 너의 족속들을 아주 씨도 없이 도륙을 내였더라면 이런 후환이 없었을것을…》
그 장수의 눈에서 무서운 불길이 철철 흘러넘치였다. 짐작컨대 기해년(1419년) 6월에 1만 7천여명의 군사와 200여척의 병선을 이끌고 쯔시마를 징벌한 조선의 삼군도체찰사 리종무장군이 틀림없었다.
《이제 다시한번 우리가 군사를 일으키는 날이면 손바닥만 한 너의 소굴은 말할것 없고 본토까지 아주 평토가 되여 물속에 잠기고말줄 알아라!》
요시미찌는 고개를 틀어박고 벌벌 떨기만 했다.
조선의 해안에서 해적질을 일삼던 왜구를 보복할 목적으로 쯔시마에 상륙한 조선군사들에게서 120여척의 배와 근 2 000여호의 집이 불타 하루아침에 재로 날려간 그 끔찍한 《기해동정》과 같은 보복이 다시 없으리라고 누가 단언하겠는가?
(아, 천신님, 제발 구원하여주옵소서!)
악몽에서 깨여나자 온몸이 식은땀에 젖어 끈적거리였다. 몸부림을 치면서 이불을 차던지는 바람에 약그릇이 쏟아져서 노란 누비돗자리우에 피자국같은 검붉은 얼룩이가 생겼다.
쏟아진 약그릇과 그 피빛같은 얼룩이가 어쩐지 자기의 운명을 암시하는 그 무엇같아서 요시미찌는 넋을 잃은듯 오래도록 거기서 눈길을 떼지 못하고있었다.
이때 문밖에서 인기척이 나더니 집사가 종자녀석과 함께 황송한 몸가짐으로 들어섰다.
《도노사마, 에도에 가계시는 부친님께서 편지를 보내왔소이다.》
《편지를?》
요시미찌는 자리에서 일어서려다가 기력이 모자라 도로 누우며 손만 내밀었다.
《이리 보내라, 누가 가져왔더냐?》
《요시라가 가지고왔소이다.》
《요시라가? 울릉도에 보낸 요시라가 어떻게 에도에서 나타났느냐?》
《…》
벌써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힌 요시미찌의 눈에는 피발이 벌겋게 섰다.
《썩 나가서 알아보아라!》
집사가 말 한마디 못하고 나가고 쏟아진 약그릇을 거두고난 종자녀석도 사라지자 그는 아버지가 보낸 편지를 집어들었다.
불길한 예감때문에 잠시 망설이다가 밀봉을 뜯었다. 급히 휘갈겨쓴 어지러운 글씨가 나타나자 마음이 선뜩해졌다. 벼락맞은 짐승처럼 황급히 덤벼치며 편지를 쓴 늙은이의 몰골이 눈앞에 보이는듯 하였다.
…실로 생각도 못하였던 뜻밖의 일이 생겼으니 명심해 듣거라.…
편지는 이렇게 시작되였다.
…년전에 네가 잘못 건드려놓은 안룡복이라는 조선 배놈이 울릉, 우산 량도감세장이라 자칭하면서 다시 호끼주에 쫓아와서 너의 죄상을 낱낱이 막부에 상소하였으니 너의 목숨은 지금 경각에 이르렀다. 만약 안룡복에게서 빼앗은 막부의 서계를 돌려주고 울릉도에 들여보냈던자들을 모조리 잡아서 처형하지 않는다면 너는 죽음을 피할길이 따로 없을것이다. 그리고 너의 집에서 일하는 박씨라는 조선계집은 안씨의 약혼녀라 하므로 마지막으로 한번 요긴하게 써볼 계책을 세웠으니 요시라와 함께 보낼것이다. 어리석고 우둔한 너의 잘못으로 너와 나는 조상들앞에서 씻지 못할 허물을 남기게 되였으니 어찌 통탄스러운 일이 아니겠느냐. 피를 물고 날뛰여서라도 이 치욕을 씻을수만 있디면 서슴지 말아야 할것이로다. 그리고 안룡복이라는자가 감세장이라는것은 여러가지로 미루어보아 믿기 어려운바 없지 않으니 저 나라에 알아보기를 바라는바이다.…
읽기를 마친 요시미찌는 편지를 움켜쥔채 온몸을 화들화들 떨었다.
안룡복이라는자의 그 무서운 모습이 다시 눈앞에 얼른거리였다.
(아, 끝내 그놈때문에… 그놈을 죽여없애야 하는것을…)
허공을 노려보는 요시미찌의 눈에서는 시퍼런 불빛이 이글거리였다. 그는 정신없이 침상에서 어기적어기적 일어서서 후들후들 떨리는 손으로 벽에 걸린 왜검을 벗겨들려다가 저도모르게 흠칫 몸을 떨며 굳어졌다. 과연 안룡복이를 없애버릴수 있겠는가 하는 무서운 의혹이 머리속에서 번개쳤던것이다. 안룡복이가 감세장인가 아닌가 하는것은 문제도 아니였다. 관리가 아닐 때에도 그를 굴복시키지 못하지 않았던가. 관리라고 해도 그는 안룡복이고 아니라고 해도 그는 안룡복이였다.
그런 안룡복이가 저 나라 삼천리 넓은 천지에 수없이 널려있을것이다. 수천수만을 헤아리는 그 안룡복이들을 과연 없앨수 있단 말인가. 아니, 잠꼬대같은 소리였다. 한두사람의 생명은 빼앗을수 있을지 모르지만 수천년동안이나 저 나라를 면면히 지켜오고 가꾸어오는 그 넋을 없애버릴수는 없는것이였다.
임진년전쟁에서 도요도미 히데요시가 멸망한것도 바로 그 넋을 몰랐기때문이였다.
조선의 임금과 조정이 서울을 버리고 북쪽으로 쫓겨가는것만 보고 저 나라를 다 먹은줄 알았지만 끝내는 백성들이 곳곳에서 의병을 일으켜 싸우는 바람에 도요도미의 수십만대군이 녹아나고만것이였다. 그 꺾을수 없는 넋이 수천수만의 안룡복이를 만들어내고 저 나라의 수천년력사를 빛내이고있는것이니 그 넋이 살아있는 한 저 나라의 흙 한줌, 풀 한포기를 건드리지 못한다.
이것을 모르고 천신들과 조상신에게 희망을 걸고있는것이 어리석은짓이 아니였을가?
지금 피를 물고 날뛰는 아버지는 과연 이것을 보지 못한단 말인가?
어두운 가슴속에서 무엇인가 와르르 무너져내리는듯 한 느낌이 들었다. 수십년전부터 애써 쌓아온것이 밑뿌리채 뒤흔들리고있다는 무서운 생각이 가슴을 옥죄이였다. 그러자 생각은 저도모르게 도꾸가와막부의 화려한 처마밑으로 흘러갔다.
막부장군은 과연 이 무서운 힘을 모르고있단 말인가? 아니다, 물론 알고있다.
오래전부터 아는것이 틀림없었다. 그것을 알고있었기에 그는 안룡복이가 한갖 어부의 몸으로 호끼주에 왔을 때에도 서계까지 꾸며주며 적당히 어루만져 돌려보내려 한것이였다.
결국 함정에 빠진것은 쯔시마도주인 자기뿐이였다.
이제 와서는 도꾸가와막부장군도 자기를 처형하는것으로 조선에 속죄하려고 할것이다. 그때는 몰랐으나 아버지의 피맺힌 편지를 보고나니 이 모든것이 손금보듯이 명백해졌다.
결국 자기는 도꾸가와막부의 우둔한 하수인노릇을 해왔을뿐이고 막부의 체면을 유지하기 위한 위장물로 되여 죽어야 할뿐이였다.
《아!》
무서운 정신적공포와 허탈감에 허덕이던 요시미찌의 손에서 왜검이 맥없이 덜렁 떨어졌다.
(아버지, 쓸데없소이다. 아무리 피를 물고 날뛰여야 별수 없소이다. 안룡복이와 아무리 씨름을 하고 나중에는 죽이기까지 한다 해도 저 나라에 수천수백만의 안룡복이가 있고 그 넋이 살아날뛰고있으니 우리의 운명이 달리는 될수 없다는것을 왜 보지 못하옵니까?)
요시미찌는 침상우에 맥없이 쓰러졌다. 아무것도 하기 싫고 아무 희망도 없는 자포자기에 빠져버렸다. 절망에 젖은 눈길로 누비돗자리우에 떨어진 왜검을 바라보던 그는 문득 조선에 가있는 다찌바나 신죠가 생각났다. 괘씸하기 그지없는 놈이였다. 그자가 조금만 처신을 잘했어도 일은 이렇게까지 되지 않았으리라는 때늦은 후회가 마음을 괴롭혔다.
(그러니 나도 끝장이지만 너도 끝장이 났다.)
요시미찌는 떨어진 칼을 다시 거머쥐려고 팔을 뻗치였다.
(어서 돌아와 내앞에 목을 늘이고 나앉아라! 네 증조할아버지한테로 가거라!)
그는 정신없이 칼을 거머쥐고 일어나 앉으려다가 병들어 지친 몸을 더는 지탱하지 못한채 그 운명적인 검붉은 얼룩이가 뚜렷이 남아있는 누비돗자리우에 맥없이 쓰러졌다.
바로 이 시각에 부산진에서 쯔시마를 향해 돛배 한척이 무겁게 떠가고있었다. 차왜 다찌바나 신죠를 실은 왜선이였다.
다찌바나 신죠는 두해가까이 왜관에 머물러있으면서 례조의 복서에서 《울릉》이라는 두자를 삭제하여 받으려고 갖은 애를 다 쓰다가 끝내 그것을 이루지 못한채 귀로에 오르게 된것이였다.
그는 조선의 역관 박재홍이 죽도가 곧 울릉도라는 례조의 두번째 복서를 가지고 차왜의 소환을 요구하여 직접 쯔시마로 떠나갔다는것을 알자 더는 왜관에 머물러있을수 없게 되였던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되여 사태가 이렇게 수습할수없이 급변하였는지 알수가 없었다. 왜관에 드나드는 역관들에게 물어서 알아보니 그동안 옥에서 풀려난 안룡복이가 다시 일본 호끼주에 가서 쯔시마의 죄행을 낱낱이 막부에 상소하였기때문에 쯔시마도주는 언제 벌을 받을지 알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였다는것이였다.
모든 일이 절망으로 끝나게 된 원인을 그제야 깨달은 다찌바나는 땅을 치며 울부짖었다.
(아, 졌구나. 안룡복이한테 끝내 지고말았구나!)
그날 밤, 그는 살맞은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몸부림을 치다가 그만 침상에 쓰러진채 악몽에 시달렸다.
…사방은 쥐죽은듯 괴괴하였다.
희미한 빛이 허공에서 구름덩이처럼 엉켜돌아가더니 그속에서 일각모를 쓴 웬 낯선 늙은이가 나타났다.
《네가 다찌바나 신죠이더냐?》
험악하고 음흉하게 생긴 눈을 번쩍거리며 그 늙은이가 자기를 내려다보았다.
《그렇소이다.》
《내가 너의 증조부 다찌바나 야스히로로다.》
다찌바나는 100년전에 죽은 증조할아버지를 보는것이 무섭기도 하고 황공하기도 했다.
《내 말을 명심해듣거라. 우선 저기를 좀 보아라!》
야스히로가 한손을 들어 가리키는 곳을 보니 캄캄한 어둠속에서 시뻘건 불길이 하늘로 치솟아오르고있었다.
《저 불길은 해동청구의 나라(조선을 가리키는 말)에서 우리 일본을 향하여 치솟는 원혐의 불길이로다. 원래는 저렇게 세차지 않던것이 임진년 도요도미 히데요시가 저 나라를 침략한 때로부터 저렇게 무서운 불길로 화하였니라.
무릇 세상만물은 성쇠가 운명지어지기마련이여서 오늘은 성하다가 래일은 반드시 쇠하는 법이지만 저 불길만은 쇠진할줄 모르는것이다. 100년이 지나도 기세가 조금도 숙어지지 않는것은 저 불길의 가닥가닥이 다 저 나라 백성의 가슴속에 잇닿아있기때문이로다. 그 나라 백성이 천이면 천줄기요, 만이면 만줄기로 타오르니 그 나라 백성이 있는 한 저 불길도 타오르기를 그칠 날이 없을것이다. 내가 저 나라의 량반관리들이 무맥한것만 보고 망하리라 믿었던것은 저 불길이 어디서 치솟는것인지를 몰랐던탓이였다.
어쨌든 저 불길을 넘어서야 우리는 혼백이나마 건질수가 있느니라. 하늘이 에돌아갈 길을 내주지 않았으니 다른 길은 없구나. 자, 그만 나를 따라오너라!》
말을 마치자 야스히로는 문득 한마리의 부나비로 변하여 불길을 향해 펄펄 날아갔다. 불길속에 들어가자마자 부나비는 형체도 없이 타버리였다.
다찌바나는 그제야 자기 몸도 부나비로 변하여 불길을 향해 날아가는것을 보았다.
《앗! 나는 싫소!》
다급한 소리를 지르며 발버둥을 치다가 그만 무서운 악몽에서 깨여났다.
(부나비, 부나비!)
그는 악몽에서 깨여나서도 몇번이나 입속으로 중얼거려보았다.
결국 증조할아버지도 그렇고 자기도 그렇고 조선이라는 이 나라와 애국심 높은 백성들앞에서는 한갖 부나비에 지나지 않는 존재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뿐이 아니였다.
막부장군도 쯔시마도주도 그 애비도 다 같은 부나비였다. 하늘이 정해준 이 운명에서 피할 길은 없었다. 이리하여 다찌바나 신죠는 원통한 마음을 안은채 6월 10일, 드디여 사나운 물결을 헤치며 죽음이 기다리는 쯔시마를 향하여 돛을 올리게 된것이였다.
한여름의 해가 쨍쨍 내려쪼이는 무더운 날씨였다. 얄궂은 바람까지 순풍이여서 배는 살같이 쯔시마를 향해 달리고있었다.
다찌바나는 배 앞코숭이에 나가앉았다. 도주의 승냥이같은 얼굴이 눈앞에 얼른거리면서 그가 하던 말이 생각났다.
《네 증조할아버지의 일을 잊지 않았을테지?》
(흥, 잊지 않았다. 네놈의 할애비가 나의 할애비를 죽이고 일가를 멸족시킨것도 잊지 않았다. 네놈이 나까지 죽이리라는것도 잊지 않고있다.)
그는 이발을 부득부득 갈며 후들후들 떨리는 손으로 허리에 찬 칼자루를 으스러지게 거머쥐였다.
(네놈의 손에 내가 또 죽을것 같으냐?)
다찌바나는 칼자루를 쥔채 마지막으로 하늘을 쳐다보았다. 6월의 뜨거운 해가 지지는듯이 내려쪼이였다. 문득 안룡복이가 한 말이 그 하늘 한끝에서 우뢰소리처럼 메아리쳐오는듯 하였다.
《손바닥으로 해를 가리우지 못한다!》
그는 저도모르게 손바닥을 들어 해를 가리워보았다. 두눈망울도 겨우 가릴가말가한 희미한 그늘이 얼굴우에 드리울뿐이였다. 죄악에 젖은 한몸을 그 그늘에 숨길수는 도저히 없다는것을 깨달았다.
아, 이 밝고 넓은 천지에 내 한목숨을 용납해줄 어두운 곳은 아무데도 없구나! 요시미찌 이놈아, 나는 피를 물고 간다만 네놈에게도 다른 길은 없으리라!
다찌바나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칼을 뽑아들고 두눈을 감았다. 배에다 칼날을 깊이 박고 힘껏 옆으로 당기자 온몸의 생명이 주르르 다리아래로 흘러빠지는것을 감촉하였다.
그는 칼자루를 두손으로 움켜잡은채 썩은 통나무처럼 지저분한 갑판우에 철썩 넘어졌다.
순간 그의 앞에는 수많은 부나비들이 바람에 날려가는 쓰레기처럼 어지럽게 춤추며 날아가는것이 보이였다.
…
다찌바나 신죠가 돌아오던 도중에 배를 가르고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며칠후, 쯔시마도주 소 요시미찌도 오랜 기간 병마에 시달리던 몸을 더는 지탱하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시중들던 사람들도 다 곁을 뜬 한밤중에 혼자서 불속에 날아든 부나비처럼 소리 한마디 남기지 못한채 시체로 변해버리였다.
새벽에 그의 시체를 발견한 사람의 말에 의하면 도주는 아버지가 보낸 편지를 한손에 꽉 움켜쥐고 눈을 뜬채 숨이 졌다고 하였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그의 죽음의 진정한 원인에 대하여서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