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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온 뒤 활짝 개인 날씨다. 하늘은 푸를대로 푸르다. 원래 이 나라의 하늘은 백성들의 어진 마음을 닮아서 그런지 끝없이 맑고 푸르고 정답다.
그 맑고푸른 하늘 한끝에서 수리개 한마리가 높이 떠서 산이며 강이며 저멀리 해빛에 반짝이는 바다며 아름다운 신록으로 단장해가는 숲이며를 굽어보면서 천천히 떠돈다.
《육실할… 사람의 마음은 가랑잎 타듯 해도 산천경개는 말쑥하기만 하구나!》
팔베개를 하고 잔디밭에 번듯이 누워 하늘을 바라보던 어둔이가 허파에 가득찬 숨결과 함께 이런 푸념을 토하였다.
그옆에 비스듬히 누워있던 룡복은 아무 대꾸도 없이 일어나 앉아서 풀어진 행전을 고쳐매고있었다.
두사람은 오늘도 어순이를 찾아 떠난 길이였다.
룡복의 동정만 지켜보고있던 어둔이가 불쑥 입을 열었다.
《이봐, 내 간밤에 가만히 생각해보니 자네가 하는짓이 아무래도 이상해.》
《뭐가 이상하단말인가?》
《자네가 그 왜놈을 왜 살려두는지 알다가두 모르겠어. 육실할… 그놈들을 보기만 해두 눈에 불이 나는데…》
《…》
《왜 말을 못하나? 자네는 업고올 때 벌써 왜놈인줄 알았지?》
《…》
《내가 그때 알기만 해도 시궁창에 처박아버리는건데… 육실할… 그래, 그놈을 어떻게 했나?》
어둔이는 왜놈을 업어들인게 분하고 룡복이가 말이 없는것에 성이 나서 펄펄 뛰였다.
그러나 룡복은 아무말없이 다른쪽 행전을 고쳐매기만 하였다.
그의 머리속에서는 벌써 오래전부터 떠도는 무서운 의혹이 있었다.
어순이가 범에게 물려갔으리라는것을 그는 처음부터 의심하였고 얼마전부터는 거의 믿지 않게 되였다. 범이 한짓이라면 무슨 흔적이든 남아있을것인데 며칠이 지나도록 신발 한짝, 찢어진 옷가지 하나 찾아내지 못한것이였다. 그러니 사람이 한짓이 틀림없고 사람이 한짓이라면 그것은 두말할것없이 왜관왜놈들의 작간일것이였다.
물론 이것은 아직 의혹에 지나지 않았지만 참으로 생각하기조차 무서운 의혹이 아닐수 없었다. 룡복이자신도 그 의혹을 믿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쓰고있었다. 그러나 왜관왜놈들이 마을녀자 둘을 잡아다가 욕을 보인 몇해전의 일까지 생각키우면서 그 무서운 의혹은 점점 무겁게 가슴을 옥죄이고있었다.
어둔이에게도 그 말을 하기가 주저되였다.
그런데 우연히 업어들인 사람이 왜관왜인이라는것을 알게 된 순간 룡복은 그놈에게서 그 의혹을 풀 무슨 단서를 찾아낼수 있으리라는것을 깨닫게 되였던것이다.
《왜 말을 못하나? 그놈을 어떻게 했어?》
어둔이는 그냥 성이 나서 소리를 질렀다.
《움속에 숨겨두었네.》
《그따위놈을 뭘하자구 숨겼어? 무슨 리날 일이 있다구.…》
룡복은 낮으나 격분에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내 눈에서는 불이 안나는줄 아나?》
《불이 난다는게 왜 그따위 쓸개빠진짓인가? 육실할…》
《나한테두 생각이 있으니 그만 떠들게. 자넨 어순의 일이 범이 한짓이라고만 생각하나?》
《그럼 누가 한짓인가?》
룡복의 눈빛이 무섭게 번쩍거리였다. 아무말없이 행전을 고쳐매는 손끝이 화들화들 떠는것이 알렸다.
어둔이는 룡복의 아픈 가슴을 더는 허비여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한동안 눈길을 딴데로 돌리고 묵묵히 앉아있었다. 그러다가 짐짓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머리를 다른데로 돌리였다.
《이봐 룡복이, 내가 우리 어순이를 자네한테 맡긴게 죄될짓이였나보네.》
룡복은 어둔이를 흘깃 바라보았다.
《갑자기 그건 무슨 홍두깨같은 소리인가?》
《자네만 이렇게 마음고생시키니 말이지. 육실할…》
《내 걱정은 말게. 자네 마음은 뭐 편한가?》
가는 바람이 휘- 불어지나갔다. 머리맡에 서있는 단풍나무가지에서 화르르 참새떼가 날아가는듯 한 설레임소리가 일어났다.
지금 어순이를 찾아 산속을 헤매는것은 이들뿐이 아니였다. 룡복의 동무들이 두셋씩 패를 무어 다대포주변의 20~30리아근을 샅샅이 찾아다니고있었다. 벌써 나흘째가 되여오는 오늘부터는 모두가 멀고 가까운데를 따질것 없이 있음직한 곳은 그 어디든 다 가보기로 하고 떠난것이였다.
《육실할… 이제 찾기야 하겠지. 꼭 찾는다니까…》
어둔이는 안타까운듯 눈앞에서 한들거리는 풀모가지를 쑥 뽑아서 입에 물더니 깊은 생각에 잠긴채 혼자소리처럼 중얼거리였다.
《내 동생이래서가 아니라 어순이는 참말 착한 애야. 다대포로 떠날 때 보니 그애가 훌쩍훌쩍 울더란말일세. 집을 떠나는것보다 자네와 헤여지는게 더 섭섭했던가보네. 그래도 용케 제마음을 삭이고 떠난걸 보면 그애가 속도 깊구 또 착하기 그지없어.》
룡복은 어둔의 이야기를 들으며 저 멀리 남쪽으로 굽이쳐간 산발이며 아득히 펼쳐진 푸르디푸른 바다를 바라보고있었다.
어순이가 다대포로 떠나던 그날, 룡복은 뒤울안 배나무아래서 어순이를 만났었다.
무르녹는듯 한 배꽃의 향기가 두사람을 감싸며 소리없이 흐르고있었다.
《룡이 오빠, 난 래일새벽에 떠나요. 다대포루…》
어순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였다.
《그럼 어순이를 언제나 다시 보게 될가?》
말없이 저고리고름만 애타게 비틀고있는 어순의 하얀 손등에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룡이 오빠곁을 떠날 생각을 하면… 정말 걸음이 떨어지지 않아요. 그래두 내가 가지 않으면 어찌겠나요. 돌아올 때까지 부디 몸조심하세요.》
어순이는 별안간 얼굴을 손바닥에 묻으며 소리없이 흐느끼였다.
헤여지기 아쉬워하는 처녀의 다심스러운 마음을 헤아려보는 룡복의 가슴도 말할수 없는 감격으로 뜨거워졌다.
《어순이!》
룡복은 눈물에 젖은 어순의 두손을 꼭 끌어잡았다.
머리우에 가지를 드리운 배나무에서 하얀 배꽃이 소리없이 내려앉았다.
룡복의 마음속에서도 문득 그 배꽃처럼 희고 깨끗하고 향기로운 꽃이 하염없이 쏟아져내리는듯 하였다.
《걱정마우, 내 노를 저어서라두 자주 찾아갈테니…》
《아니, 오십리 그 먼길을 어떻게…》
《오백리라두 찾아가겠소.》
룡복은 처녀의 어깨우에 내려앉은 하얀 배꽃을 조심히 털어주었다.
어순의 눈빛은 기쁨에 넘쳐 반짝이였다.
《그럼 보름달이 뜰 때 포구에서 기다리겠어요.》
《그래, 보름달이 뜰 때면 꼭 가지.》
어순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며 활활 타오르는듯 하였다.
《그럼 룡바위우에서 기다릴래요, 보름달이 뜰 때마다…》
어순이는 겨우 이 말을 남기고는 정신없이 달음쳐가버렸다.
부끄럼을 잘 타도 마음은 불같이 뜨거운 처녀였다. 참말 어순이에 대한 아름다운 추억을 더듬자면 끝이 없었다.
울릉도에서 처음 만난 그때로부터 세월은 어느덧 10여년이나 흘렀다. 흘러가는 시내물처럼 끝없이 조잘거리기도 하고 때로는 엉석을 부리기도 하면서 어순이는 룡복이곁에서 철부지시절을 보내고 처녀시절을 맞이하였다. 그러니 그사이에 무슨 일인들 없었으랴!
열네댓살 날 때까지도 어순이는 룡복에게 배를 태워달라고 자주 조르군 하였다. 어른들도 그랬지만 어둔이까지도 계집애를 배에 태우면 신수가 사나와진다고 전혀 태워주지를 않았다. 그래서 룡복은 어른들 몰래 어순이를 매생이에 태우고 도래굽이를 돌면서 조개도 캐고 해삼도 뜯었다.
어순이는 그물망태를 벌려들고 배에 앉아 노래를 부르고 룡복은 물밑을 들여다보며 작시미질을 하고…
그러던 어느날인가 어순이는 느닷없이 이렇게 물었다.
《룡이 오빠, 나 배태우는게 싫지 않수?》
《싫긴? 네가 좋다는데…》
《내가 좋다면 뭐나 다 좋나?》
《좋지 않음 나쁠게 있니?》
어순이는 소리없이 방그레 웃으며 정어린 눈길로 못미덥다는듯이 룡복의 얼굴을 말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럼 날 태우구 저 나무섬을 열번 돌겠어?》
《나무섬을? 그건 어째서?》
《글쎄 그래주겠어?》
《그래주지. 네가 좋다면야 백번이라두…》
룡복은 노대를 거머쥐고 쏜살같이 배를 저어 나무섬을 돌기 시작하였다. 한바퀴를 돌고 두바퀴를 돌고 다섯바퀴를 돌자 웬일인지 어순이는 안절부절하며 룡복의 눈치를 살피였다.
룡복의 이마에서는 땀방울이 뚝뚝 흘러 떨어졌다.
어순이는 당황하여 얼굴을 붉히며 말하였다.
《내가 잘못했어, 이젠 그만큼 돌아도 돼.》
그러나 룡복은 노질을 멈추지 않았다.
《열바퀴를 돌자구 했으니 다 돌아야지. 그만두면 되니?》
《글쎄 아니라지 않아?》
《안돼. 다 돌아야지…》
《아이참, 난 몰라.》
어순이는 울상이 되였다.
이윽고 열바퀴를 다 돌고난 룡복은 이마에서 흐르는 땀을 훔치며 《자, 됐니?》 하고 물었다.
그러자 웬일인지 어순이는 얼굴을 붉히며 룡복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하는것이였다. 기여들어가는듯 한 목소리로 겨우 말하였다.
《난 내리겠어, 룡이 오빠, 난 내리겠어.》
어순이는 말없이 배에서 내려 룡복이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멀리멀리 달아나버리였다.
그다음부터 더는 배를 태워달라고 조르지 않았다. 만나기만 하면 부끄럼을 타며 몸을 숨기였다.
그렇게 갑작스레 철없던 계집아이가 숙성한 처녀로 변하고 가슴속에 남모르는 비밀을 품어 꽃피우는 시절을 맞이한것이였다.
그후부터 룡복은 어순이와 가까이 지낼수가 없었다. 불러도 달아났고 배를 태워주겠노라고 해도 마다하였다.
이렇게 두해가 지나갔다. 그사이 룡복은 어둔이와 함께 해마다 수군훈련에 나갔다. 어둔이는 쩍하면 남의 누이동생을 꼬여내는 엉큼한 녀석이라고 죄없는 룡복을 못살게 굴었다.
룡복이가 어쩌다 어순이와 가까이 있는것을 보기만 하면 싱글벙글 웃으며 이런 노래를 불러 놀려대군 하였다.
저 건너라 미나리강에
미나리 캐는 저 처녀야
너는 종종 미나리 캐고
나는 종종 꼴만 벤다
눈을 주니 늬 모르고
손을 치니 남이 알고
던진다고 던진 돌이
발등에라 툭 떨어져서
훌쩍훌쩍 우는 소리에
대장부 간장이 다 녹는다
이 노래를 부르기만 하면 어순이는 얼굴이 홍당무우가 되여 몇십리밖으로 달아나군 하였다.
그러다가 끝내 그 이듬해에 두 집사이에 혼사가 정해졌다.
약혼하던 날 룡복의 어머니 리씨는 시집 올 때 가지고 온 비취옥가락지 한쌍을 어순이에게 주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얘야, 룡복의 아버지의 뜻대로 되여서 나는 더없이 기쁘구나! 이것은 너희들이 복을 많이 받기를 바래서 주는것이니 잘 간수하거라.》
옥가락지를 받아 품속에 깊이깊이 간수하던 어순의 사랑스러운 모습이 지금도 생생히 기억되고있었다.
어순이가 다대포로 떠난 후 보름밤에 룡복은 약속대로 배를 저어 어순이를 찾아갔다. 륙로로 50리길이라지만 배로 가면 보리밥 한솥 짓기이면 가닿을수 있는 곳이였다.
검푸른 바다우에 쟁반같은 보름달이 둥실 떠올랐다.
룡바위우에서 가늘게 날리고있는 어순의 하얀 무명저고리가 멀리서부터 보이였다.
룡복은 배가 기슭에 올라앉기도전에 뛰여내렸다. 어순이가 룡바위우에서 모래불로 나는듯이 달려왔다.
《어순이!》
《룡이 오빠! 올줄 알았어요.》
어순이는 너무도 반가와 룡복의 팔에 와락 매달렸다가 《어마나!》하고 기겁을 하며 얼른 놓아버리였다.
《허허… 올줄 알긴 어떻게?》
《저것 보세요. 보름달이…》
보름달을 쳐다보는 처녀의 얼굴에서 하얀 이가 반짝하고 눈부시게 빛났다.
《나도 어순이가 기다릴줄 알았지.》
《어떻게요?》
《저 달을 보구…》
《호호호… 거짓말.》
《천리밖에 가도 저 달만 뜨면 내가 어순이를 생각한다는걸 잊지 마오.》
룡복은 뜨거운 눈길로 어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처녀의 얼굴은 기쁨으로 활활 불타는듯 하였다.
《어마나, 저 배…》
갑자기 어순이가 룡복의 어깨너머를 바라보며 소리를 질렀다.
노를 걸어둔채 내버린 매생이가 물결에 밀려 궁싯궁싯 깊은데로 떠가고있었다.
룡복은 나는듯이 물에 뛰여들어 매생이를 붙잡았다.
《우리 배 타볼가?》
《배 못 타봐서?》
어순이는 얼굴을 붉히였다.
《언제는 그렇게 태워달라구 조르더니…》
《그래두… 밤에 웬 배를…》
말은 이렇게 해도 어순이는 탈지말지 잠시 망설이는듯 하였다. 그러다가 짚신밖으로 드러난 하얀 발등을 내려다보며 혼자소리로 중얼거리였다.
《치마 적시겠네.》
《그럼, 내가 안아다 태워줄게.》
《아이, 망칙해.…》
창백한 달빛속에서도 처녀의 얼굴이 활활 불타는듯 붉어지는것이 보이였다.
《아이, 그런 말을… 난 몰라요.》
어순이는 룡복을 흘겨보더니 별안간 돌아서서 모래불 저쪽으로 달아나기 시작하였다.
《어순이!》
룡복은 급히 쫓아가서 처녀의 불같이 뜨거운 손목을 잡았다.…
두사람은 달빛이 쏟아져내리는 밤바다우에 떠있었다.
룡복은 고물쪽에 서서 스적스적 노질을 하고 어순이는 이물쪽 창막이널에 걸터앉아 물결우에서 은빛으로 부서지는 달빛을 바라보고…
거무스름한 바다 남쪽으로는 나무섬, 형제섬, 동쪽으로는 절영도가 점점 가까와오고있었다.
《어순이, 달빛도 좋은데 소리나 한마디 하우.》
어순이는 한손을 물에 잠그고 휘저으며 부끄러운듯 웃기만 하였다.
《그 울릉도 노래가 제일 좋아. 열백번 들어두…》
《그 노랜 어렸을 때 엄마가 날 무릎에 앉히고 머리댕기를 드려주며 배워준거예요.》
아득히 흘러간 그 시절을 그려보는듯 어순의 눈길은 먼 하늘가를 더듬고있었다.
《참, 좋은 엄마였어요. 봄나물철이면 우리 엄마가 제일 먼저 산나물을 뜯어왔지요. 꼬치미, 고사리, 전호나물… 엄마는 울릉도에서 나는 별의별 산나물을 다 알고있었어요. 달고 시원한 명이는 언제나 나를 주려구 따로 꺾어왔어요. 한번은 설을 앞두고 내가 난생 처음보는 노랑물 들인 무명저고리를 곱게 지어서 입혀주면서 크면 어떤 사람한테 시집가겠느냐고 묻지 않겠어요. 철없는 때여서 나는 부끄러운줄도 모르고 세상에서 제일 좋은 사람한테 시집가겠다고 대답했지요. 그랬더니 엄마가 어떤 사람이 제일 좋은 사람이냐고 또 물었지요.
그때도 나는 배를 많이 타보는게 제일 큰 소원이였어요. 그래서 나와 같은 계집애도 배에 잘 태워주는 사람이라고 대답했지요. 그러자 엄마가 허리를 꺾으며 막 웃지 않겠어요. 그래서 난 다시 대답했지요. 호호호… 뭐라구 대답했는지 어디 맞춰보세요.》
어순이는 부끄러움을 머금고 룡복을 정답게 바라보았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아우?》
《호호호… 그 대답을 들으면 룡이 오빠가 놀랄거예요.》
《그래 뭐라구 대답했소?》
《그건 말못해요. 철없을 때 한 대답인걸요.》
룡복은 빙그레 웃었다.
《그러니 부끄러울것도 없을텐데 어서 말하우.》
《아이, 못해요.》
《허허허… 내가 못맞출줄 알구? 나를 배에 태우구 섬을 열번 도는 사람한테 시집가겠다구 대답하지 않았소?》
《아이! 망칙해라. 그걸 어디서 들었어요?》
어순이는 얼굴이 빨갛게 되여 몸둘바를 몰라하였다.
룡복은 껄껄 웃었다.
《아무렴 그럴테지. 귀신은 속여두 나는 못속인다니까… 그래서 그때 나보구 나무섬을 열번 돌자구 했더랬군?》
《몰라요. 내가 언제…》
어순이는 꽈리처럼 붉어진 얼굴을 손바닥에 묻고 수집음을 타며 웃었다.
《하하하…》
룡복은 통쾌한 웃음을 터뜨리며 노를 저었다.
달아올랐던 얼굴이 얼마간 식자 어순이는 다시 말을 이었다.
《울릉도에선 해마다 여름철 좋은 날에 온 섬사람들이 배를 타고 노래를 부르며 섬을 한바퀴 도는 〈섬돌이〉라는 명절이 있어요. 그날 사람들은 노래잘하는 아이들을 선동이로 뽑아 선두배에 태우구 섬을 돌지요. 한번은 나두 선동이로 뽑혔는데 숱한 배들이 북을 울리고 기발을 날리며 우리 뒤를 따라오지 않겠어요. 어른이 다 된것 같은게 얼마나 좋은지 몰랐어요. 나는 어머니가 배워준 노래를 불렀어요. 룡이 오빠가 좋다는 바로 그 노래예요.》
《울릉도노래 말이우?》
《예.》
어순의 입에서 가느다란 노래소리가 새여나오기 시작하였다.
울릉도에서 흘러간 옛말같이 아름답고 신기롭던 그 시절을 그려보는듯 처음에는 물새의 우짖음인듯 가늘게 울리다가 점점 방울을 굴리는듯 맑은 소리로 변하여갔다.
바람따라 바다에선 물결만 출렁
잠결에도 꿈결에도 밤낮도 없이
이내나 가슴에선 너만 출렁 너만 출렁
아하이요 내 사랑 울릉섬아
노래소리는 잠시 끊기는듯 긴 여운을 남기며 너울거리더니 다시 이어졌다.
아하이요 아하이요 꿈엔들 잊을소냐
섬아섬아 울릉섬아 내 사랑 섬아
아낌없이 쏟아지는 파르스름한 달빛을 뚫고 노래소리는 가없는 바다우로 멀리멀리 퍼져갔다.
룡복은 그 노래소리가 비끼여가는 아득한 수평선너머에 있을 울릉도를 그려보았다.
아버지의 유골이 묻혀있고 어순이의 아이적꿈을 간직하고있는 잊을수 없는 섬, 아버지를 그 섬에 묻고 피눈물을 뿌리며 돌아오던 어린 시절의 그 절통한 순간이 아직도 가슴속에 그대로 머물러있는것만 같았다.
어순의 노래소리가 멎었다.
《뭘 생각하세요?》
룡복은 혼자소리처럼 조용히 대답하였다.
《10년이 지나도록 아버님의 원한도 풀어드리지 못하구 무덤가에 돋은 풀도 변변히 깎아드리지 못하였으니… 올가을 추석때에는 꼭 가보아야겠소.》
《그럼, 나도 함께 가요. 꾀쇠할머니가 하던 말이 생각안나요?》
어순이는 살그머니 귀밑을 붉히였다.
약혼날 찾아왔던 꾀쇠할머니가 머리를 얹으면 시아버님묘에 꼭 찾아가서 며느리절을 올려야 한다고 일러주었던것이다.
룡복은 선선히 대답하였다.
《그럼 함께 가서 부모님무덤이랑 아이적에 놀던 곳이랑 같이 찾아보자구…》
어순의 얼굴은 기쁨으로 활짝 밝아졌다.
《룡이 오빠! 울릉도에 가서 아주 살지 않겠어요? 참 좋은곳이예요. 어머니랑 룡이랑 다 데리구 가서 농사두 짓구 물고기도 잡구… 미역, 전복을 따 말리구…》
룡복은 어순이의 아름다운 얼굴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어순이에게 있어서 울릉도는 흙과 바위로 된 그저 섬이 아니였다. 희망이고 꿈이고 행복이였다. 그의 몸과 넋을 가꾸어주고 꽃피워준 생명과도 같은것이였다. 그러기에 어순이는 마음속에 간직한 앞날의 꿈까지도 그 섬우에 황홀하게 펼쳐보는것이였다.
울릉도에 가서 아주 살자고하는 말을 들은 순간 룡복은 어순이가 품어온 그 꿈이 얼마나 뿌리깊고 소중한것인가를 문뜩 깨달았다.
《어순이, 나도 그런 생각을 자주 하군 하오. 울릉도에 가서 초가삼간을 지어놓고 뒤뜰에는 복숭아, 앵두나무를 심고…》
《그래요. 정말 그러자요.》
어순의 눈빛이 꿈을 꾸는듯 반짝이였다.
《앞뜰에는 유자나무, 귤나무를 심고… 룡이 오빠가 한배가득 물고기를 잡아싣고 돌아올 때면 나는 어머니랑 함께 포구에 나와 기다리고… 여름이면 섬사람들과 어울려 섬돌이도 하고… 얼마나 좋아요? 꼭 그러자요. 약속해요?》
《약속하우.》
룡복은 진심으로 약속하였다. 어순이와 나눈 앞날에 대한 첫 약속이였다.
달빛은 더욱 밝아지고있었다.
밀물이 들어오기 시작하자 룡복은 포구로 배머리를 돌리였다.…
《빗쫑, 빗쫑, 쪽쪽!》
머리맡에 서있는 단풍나무가지에 웬 메새 한마리가 날아와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에 잠긴 룡복을 내려다보고있었다.
이윽고 룡복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어둔이도 따라 일어섰다.
멀리 바다가운데 우뚝우뚝 솟은 오륙도가 보이였다. 뾰족한 바위 여섯개가 보이는것을 보니 밀물때였다. 썰물때면 어느새 다섯개가 된다. 다섯도 되고 여섯도 되는 섬이라해서 이름도 오륙도, 그 북쪽으로 부처바위, 소바위… 크고작은 섬들이 바다를 지켜선 군사들처럼 줄지어 서서 움직일줄을 모른다.
두사람은 바다를 등지고 다시 어순이를 찾아 산길로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