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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후 며칠간은 별일이 없이 지나갔다. 사람들이 거접할 초막도 다되고 매생이도 두어척 무어서 송광사사공들은 전복따기, 미역따기를 시작하였고 룡복은 최서방, 문서방과 함께 대장간을 다시 꾸리고 활촉을 벼리는 한편 불화살도 더 만들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저녁녘이였다.
집에 불을 지르려던 왜놈을 잡겠다고 눈에 달이 돋아서 나다니던 쇠동이가 룡복이를 이끌고 으슥한 곳으로 가더니 귀속말로 속삭이였다.
《이상한 일이 생겼소. 그 늙은 중이 이상하우.》
《아니, 어느 중이?》
《배주인이라는 그 수염많은 중 말이우.》
뢰헌을 가리키는 말이였다.
《그 중이 어째서?》
《다른 사람들은 다 해삼, 전복을 뜯느라 분주한데 그 중은 늘 여기저기 싸다닌단 말이우. 이상해서 따라가보니 절간자리에 가서 섬돌밑도 파구 돌담밑도 파면서 하루종일 어슬렁거린단 말이우. 수상한놈이 틀림없소.》
《그게 사실이냐?》
《내 눈으로 보았소.》
《그래 무얼 파더냐?》
《그건 모르겠소. 며칠째 그러구있는걸 보면 아직 아무것도 찾지 못한것이 틀림없소.》
울산을 떠날 때에도 뢰헌은 무엇인가 말하기를 피했었다. 그에게는 남에게 말 못할 어떤 사연이 있는것이 틀림없었다. 겸허하고 묵직하고 대바른 성미, 장사일로 살아오면서도 속된 사람으로 변하지 않은 그 점은 그가 결백하고 강직한 사람임을 말해주는것이였다. 그런 사람은 무슨 일이 생기면 차라리 목숨을 바칠지언정 구구히 량심을 속이는 일에 몸을 잠그고 살려하지 않는것이다.
그러한 그가 사람들의 눈을 피하여 땅을 파고있다는것을 그저 스쳐지날수 없었다.
《쇠동아, 그럼 래일 나와 함께 가보자.》
《그렇게 하우. 그렇지 않으면 무슨 일이 생길지 누가 알겠소?》
이튿날 룡복은 쇠동이를 따라 절간자리로 가보았다. 고려 의종 11년(1157년)에 김유립이라는 사람이 울릉도를 조사하고 조정에 보고한데 의하면 그때 부락자리와 절간자리, 돌부처, 쇠종, 석탑들이 남아있었다고 하였다. 그러니 이곳에 있던 절간은 안룡복이가 찾아온 이때로부터 세여도 500여년전에 이미 허물어진것이였다. 500년이란 결코 짧은 세월이 아니다.
쇠나 돌이라 하더라도 비바람에 그슬려 깨여지고 부서져 자취를 감추기에 넉넉한 세월인것이다.
옛 절간의 주추돌들은 흙과 이끼에 덮이고 석탑은 반나마 허물어져있었다. 무성한 잡초와 여러해 묵은 덤불밑에 허연 돌비석 두개가 시체처럼 누워있고 그 언제 누군가가 살다가 간 초막자리, 불피웠던 자리들, 주추돌과 섬돌밑에 뿌리박고 자라오른 해묵은 잡관목들… 이 모든것들이 500여년의 기나긴 세월의 풍상을 잘 말해주고있었다.
룡복은 쇠동이를 따라 거멓게 이끼가 오른 석탑쪽으로 조심히 다가갔다. 어디선가 딸가닥! 하고 쇠붙이가 돌에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쉿!》
쇠동이가 급히 옷자락을 당기는 바람에 룡복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돌탑뒤에서 흰옷 입은 사람이 얼씬거리였다. 얼굴을 들고 땀을 훔칠 때 보니 뢰헌이 틀림없었다. 거치장스러운 장삼은 벗어버리고 동저고리바람인데 다리에는 행전을 치고 빈머리에는 베수건을 동이였다.
한동안 열심히 땅을 파던 뢰헌은 석탑대석우에 맥없이 걸터앉으며 실망에 젖은 긴 한숨을 내쉬였다. 룡복은 더는 보고만 있을수 없어서 인기척을 내며 석탑쪽으로 다가갔다. 뢰헌은 놀라서 벌떡 일어섰다가 룡복임을 알아보자 다시 안심하는듯 하였으나 그대신 매우 당황해하는 기색이였다.
《스님, 예서 뭘하십니까?》
《아, 어서 오우. 그저… 뭘 좀 찾아볼게 있어서 이러오만…》
《혹시 힘으로 할 일 같으면 우리가 도울가 하여 찾아왔는데…》
《아무래도 이젠 찾기 글렀으니 그럴것도 없소.》
뢰헌은 별로 말하고싶지 않은 모양이였다.
《찾는게 대체 뭔데요?》
《허―다 허망한 일이지.… 믿지 못할것을 믿구 여러 십년을…》
뢰헌은 어이없다는듯이 하늘을 쳐다보며 서글프게 껄껄 웃었다.
이때 나무숲을 헤치는 소리가 나더니 리생원이 나타났다. 룡복이와 쇠동이를 따라온것이였다. 남모르게 하던 일을 리생원까지 알게 되자 더는 감출 여지가 없다고 느꼈던지 뢰헌은 품속에서 기름종이에 여러벌 싼 헌 책 한권을 꺼내놓았다.
《소승이 이 책에 적혀있는 〈비결〉이란것을 믿고 이런 어리석은짓을 했으니 과히 탓하지들 마시오.》
뢰헌은 낡은 책을 리생원에게 펼쳐보이였다.
한동안 말없이 책만 들여다보던 리생원이 무릎을 치며 흥분해서 소리를 질렀다.
《천하에 다시 없을 희귀한 책이로구나! 룡복이 이 사람, 이 책에 울릉도의 옛적일이 다 적혀있네. 고려때 진허대사라는 중이 울릉도에 두번 다녀가서 남긴것인데 대불사 금부처를 얻으면 나라가 태평하구 한뉘 복을 누리리라는 〈비결〉이 여기 적혀있네. 뢰헌스님이 지금 그 금부처를 찾는 모양일세. 스님, 그렇지 않으시우?》
《글쎄올시다. 나라가 부강하고 백성이 잘사는 태평세월을 한갖 〈비결〉에서 찾아보려는것이 원래 어리석은짓인데…》
《허허.… 무슨 말씀을… 태평세월을 바라는 마음이야 누구에겐들 없겠습니까.》
룡복은 울적해서 앉아있는 뢰헌을 동정어린 눈길로 바라보았다.
《태평세월은 오지 않는다 해도 그 금부처는 오랜 옛적의 유물이고 선조들의 뜻이 담긴 물건인데 어째서 찾지 않을수 있겠습니까.》
《모두들 그렇게 말해주니 정말 고맙소이다. 하지만 벌써 며칠째 온 섬을 다 뒤졌지만 소득이 없소이다. 절간자리로 짐작되는곳이 세곳 나졌으나 불탑이 있는 곳은 여기뿐이고 또 저기 넘어진 비돌을 살펴보니 〈대불사지비〉라는 글자가 아직 뚜렷하니 분명 이곳이 대불사자리가 틀림없고 그러니 대불사금부처도 여기 어디에 묻혀있으리라 짐작하고 갖은 애를 다 썼으나 찾을수 없소이다.》
리생원은 부쩍 호기심이 나서 그 비석에 가보자고 하였다. 뢰헌을 따라 20~30보가량 산기슭으로 올라가자 거멓게 이끼에 덮인 돌비석이 풀숲에 넘어져있었다. 높이가 넉자남짓하고 너비가 한자반쯤 되여보이였다. 비몸만 남고 비머리에 얹었던 옥개돌은 어디로 굴러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비몸 웃부분에 《대불사지비》라고 쓴 큰 글자가 보이였다. 잔글자들은 거의 인멸되고 이끼에 덮여 알아볼수가 없었다.
리생원이 옷고름에 찼던 장도칼을 꺼내서 칼끝으로 이끼를 긁으며 한자한자 뜯어 읽어 글의 뜻을 대강 알수 있었다. 신라 문성왕 임신년(852년) 5월 원주 법흥사의 고승 함허대사가 건너와 절을 짓고 이름을 대불사라 하였으며 그 이듬해 대웅전앞에 8각5층탑을 세워 절의 위용을 더욱 떨치게 하였다는 내용이였다.
그옆에 넘어진 비석은 무른 돌을 썼던탓인지 글자획을 알아볼수 없을 정도로 인멸되여있었다. 대불사의 어느 중의 탑비였으나 자세한 내용은 알수 없고 다만 마지막에 《준풍2년》이라는 글자만 간신히 알릴뿐이였다.
《준풍》이란 년호는 고려 광종때 쓰던것으로써 그 건원년이 광종경신년이다. 그러니 중풍2년인 신유년(961년)에 이 탑비를 세운것이였다. 《대불사지비》보다 퍽 후에 세운 탑비가 이렇게 알아볼수 없게 된것이였다.
수백년전의 낡은 비석을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겨있던 룡복은 뢰헌에게 물었다.
《그런데 저 책에 금부처를 어디에 묻었다는것은 적혀있지 않다는데 그 까닭이 무엇일가요?》
《글쎄, 그걸 알도리가 없네. 이 책에는 금부처의 광배에 〈신라 우산국 대불사〉라는 글이 새겨져있어 울릉도가 태고적부터 우리 나라 땅임을 말해주고있으니 이를 명심하라는 글만 적혀있네.》
룡복은 머리를 기웃거리였다.
《내 생각에는 후에라도 금부처를 꼭 찾으려는 뜻으로 저 책을 써서 남긴것인데 부처를 숨긴 곳을 적지 않을수 없다고 여겨지는군요?》
《리치는 그렇네만 저 책에는 그런것이 없으니 참, 이상한 일일세.》
리생원도 머리를 기웃거리였다.
날이 저물자 모두 아무 소득도 없이 초막으로 내려오고말았다.
그날 밤 리생원은 등불밑에 앉아 《비결》이 적혀있는 책을 오래도록 뒤적거리고있었다. 송광사 주지들이 금부처를 찾으려고 수백년동안 울릉도에 숱한 사람들을 보내며 애쓴 사실을 적어놓은것을 읽어보던 리생원은 문뜩 감탄어린 목소리로 부르짖었다.
《참, 뜻이 깊네. 울릉도 금부처를 찾으면 태평한 세월이 오리라는 비결이야 물론 허황한것이라 할밖에 없겠지만 그 비결로 하여 수백년동안이나 사람들의 마음을 섬에서 떠나지 않게 하고 발길이 끊기지 않게 하였으니 그 뜻이 얼마나 깊은가. 내 나라 섬인 울릉도를 후세 영원히 잊지 말아달라는 선조의 절절한 부탁일세. 그러니 이것이야말로 보물중에서도 가장 귀한 보물이 아니고 무엇이겠나!》
룡복은 리생원의 감탄하는 소리를 들으며 깊은 생각에 잠겨있었다. 리생원의 말이 옳았다. 《비결》이라는 신비한 안개를 헤치고보면 결국 울릉도가 태고적부터 우리 나라 땅임을 후세에 길이 전하려는 선조들의 뜻을 력력히 읽을수 있는것이였다.
그러니 그것은 단순한 금부처가 아니였다. 울릉도가 이 나라 땅임을 말해주는 력사의 증거물이였으며 울릉도를 후세에 영원히 잊지 않게 하려는 선조들의 뜻이 어린 귀중한 유물이였다. 금부처를 찾는 일은 송광사의 일이거나 뢰헌이라는 한 중의 일이기전에 나라의 일이고 겨레의 일이였다.
밤은 깊었다. 초막밖에서는 섬기슭을 쉼없이 쓸어내리는 파도소리가 온밤 그침없이 들려왔다.
이튿날 룡복은 기어이 금부처를 찾을 생각으로 사람들과 함께 다시 대불사터로 올라갔다. 리생원은 비돌우에 걸터앉아서 《비결》이 적힌 책을 다시 깐깐히 들여다보고있었다.
부처를 묻은 곳이 꼭 그 책에 적혀있으리라던 룡복의 말이 그럼직하다는 생각이 든것이였다.
책장을 꼼꼼히 들여다보며 뒤적거리고있던 리생원은 맨 마지막장에 잘 보이지 않는 글자가 있어서 책을 해빛에 비쳐보다가 뜻밖에도 한줄로 내려쓴 희미한 글자들이 나타나는것을 알아보았다.
(아니, 이게 뭐냐?)
깜짝 놀라 다시 살펴보았으나 분명히 이제껏 보이지 않던 글줄이였다.
그런데 이상한것은 책을 땅에 놓고 보면 그 글줄이 보이지 않고 해빛에 비쳐보면 다시 나타나군 하는것이였다. 글자들이 모두 꺼꾸로 보이는것을 보면 분명 종이 뒤등에 쓴 글이라는 짐작이 갔다. 누군가가 마지막장을 겉장에 붙이면서 뒤등에 쓴 한줄의 글을 보지 못하고 그냥 붙여버린 모양이였다.
겉장을 물에 적시여 조심히 뜯어내자 내려쓴 한줄의 글자가 뚜렷이 나타났다.
《금부처는 대불사 8각5층석탑 서남쪽 8보되는 곳에 묻은 독안에 있으니 이를 명심하라!》
뢰헌은 너무도 희한하여 한동안 아무 말도 못하고 글줄만 들여다보고있었다.
《참, 누군가 풀을 한번 잘못 바른것때문에 숱한 사람들이 헛수고를 했으니 세상일이 이렇게 허무할 법이 어디 있단 말이요.》
어이없는 탄식이였다.
《원, 스님도 허무할것이 없지요.》
룡복은 의미깊게 웃으며 말하였다.
《송광사 주지들이 저 책을 몇백년동안 깊숙한 승방속에서 남몰래 보아왔으니 찾아낼수가 없었지요. 밝은 해빛아래 내놓으면 세상만사가 다 명백해지는 법입니다.》
《허허… 옳은 말이오.》
모두가 허물어진 석탑쪽으로 몰려가 서남쪽으로 여덟발자국을 잰 다음 땅을 파려고 살펴보니 누군가가 이미 마구 파헤쳐놓은 자리였다.
《아니, 이게 웬일이오? 누가 파갔소이다.》
뢰헌이 절망에 젖은 소리로 부르짖었다.
《파가다니? 그럴수가 있나. 두말말고 파보세.》
리생원은 책에 적힌 사실을 믿지 않을수 없다는듯 고집스럽게 말하였다. 그래서 모두가 기를 쓰고 파보았으나 아무것도 없었다. 사금파리 하나 보이지 않았다. 모두가 맥을 놓고 앉아있을 때 큰 눈을 껌벅껌벅하며 생각에 잠겨있던 쇠동이가 머뭇거리며 룡복의 앞으로 다가왔다.
《룡복형님, 며칠전에 우리 앞집 김서방이 하던 말이 지금 생각해보니 스쳐보낼 말이 아니였소. 어떤 사람 둘이 독을 파가지고 산속으로 들어가더라고 하는걸 난 그저 무심히 들었소.》
《뭐? 두사람? 또 두사람이냐?》
《그렇소.》
《독을 어디서 팠다더냐?》
《그건 물어보지 않았소. 내 지금 가서 김서방을 데리고 오겠소.》
쇠동이가 두주먹을 부르쥐고 달려간지 얼마되지 않아서 김서방이 땀을 뻘뻘 흘리며 쇠동이를 따라왔다.
《그날 괭이자루 몇감을 찍어가지고 오다가 저 산등 동백나무그늘에 앉아 땀을 들이는데 웬 사람 둘이 여기서 땅을 파지 않겠소. 틀림없소. 바루 이 자리가 틀림없소. 그 사람들이 여기서 시꺼먼 독 한개를 파가지구 저쪽 골짜기로 들어가더란 말이우. 울산서 온 사람들이면 포구로 내려갈텐데 어째 산속으로 들어갈가 하구 그때두 좀 이상하게는 여겼지만…》
《그게 언제 일이시우?》
룡복이가 다그쳐물었다.
《울산서 배가 온지 사나흘후였네.》
《독속에서 무얼 꺼내지는 않습디까?》
《아니… 그건 못 봤네. 독을 파내자 머리를 맞대구 한참 우물거리더니 급히 독을 메구 골짜기로 들어가더라니까…》
(한발 늦었구나!)
룡복은 주먹을 부르쥐고 한동안 말없이 앉아있었다.
숲속에서 동박새의 애절한 울음소리가 진―진ㅡ하고 가냘프게 들려왔다.
그러더니 뒤미처 그 소리를 짓누르며 쏴― 숲이 몸부림쳐 설레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룡복은 얼굴빛이 컴컴하게 죽어서 말없이 앉아있는 뢰헌을 바라보았다.
《뢰헌스님, 우리가 한발 늦었습니다. 수백년간 찾던것을 한순간이 늦어서 왜놈들에게 빼앗겼습니다.》
《왜놈이라니? 그놈들이 왜놈이란 말인가?》
《왜놈이 틀림없습니다. 박충량이네 배군들속에 끼여들어온 왜놈들입니다. 쇠동이네 집에 불을 놓으려던 놈도 바로 그놈들입니다. 그런데 그놈들이 금부처를 묻은 자리를 어떻게 알아냈는지 그게 이상합니다.》
순간 뢰헌의 머리속에서는 아득히 잊혀져가던 한가지 생각이 문뜩 떠올랐다. 자기 어머니를 비명에 죽게 만든 그 왜놈이 송광사 주지의 방에 자주 드나들면서 금부처의 비밀을 탐지해갔다고 하던 그때의 소문이 결코 뜬소문이 아니였다는것이 명백하였다. 그때 그자가 금부처의 비결을 탐지해가고 금부처를 묻은 장소가 적힌 책장을 풀로 붙여버렸으리라는것도 짐작되였다. 왜놈들이 그 금부처를 훔쳐간것은 저희 나라가 한뉘 태평하기를 바래서라기보다 울릉도가 조선의 섬이라는 증거물을 없애려고 한것인지도 모를 일이였다.
이제껏 송광사의 비밀로 남아있던 이 이야기를 뢰헌이가 들려주자 사람들은 모두가 너무도 아연하여 어찌할바를 모르고있을뿐이였다.
《천추만대를 두고 용서 못할 왜놈들!》
자리를 차고 벌떡 일어서는 룡복의 눈빛이 차겁게 번쩍거리였다.
《쇠동아, 이제 더는 참고있을수가 없다. 그놈들을 빨리 찾아내여 주리를 틀어야겠다.》
《옳소, 그놈들을 족쳐버려야 하우.》
모두가 격분에 몸을 떨며 허둥지둥 달려서 포구로 내려왔다. 그런데 초막마당에서 기다리고있던 일천이가 마주 달려나오며 성이 나서 소리를 질렀다.
《모두들 어디로 갔댔소? 이런 통분한 일이 어디 있소.》
《아니, 어찌된 일인가?》
룡복은 짐작되는바가 있어서 다우쳐 물었다.
아침에 자귀를 빌려쓸 일이 있어서 울산배군들의 초막으로 갔던 일천은 뜻밖에도 박충량의 집에서 놓쳐버린 그 왜도적 두놈이 도시락밥을 싸들고 나서는것과 맞다들렸다.
일천의 얼굴을 알아본 두 왜놈은 불맞은 노루처럼 산쪽으로 꽁무니를 빼기 시작하였다.
일천이가 급하게 소리를 지르며 뒤쫓아갔으나 두놈은 어느새 숲속에 자취를 감추고말았다.
도사공의 말에 의하면 그놈들은 약초를 구한다는 구실로 배를 타고 온 사람들인데 매일 밥을 싸들고 어디론가 나가면 저녁늦게야 돌아오군 한다고 하였다. 배사람들과는 별로 어울리지도 않고 가끔 송서방하고만 수군거릴뿐이라는것이였다.
(그 왜놈들을 놓쳤구나!)
사람들의 가슴속으로 일시에 무거운 실망의 물결이 흘러지나가고있었다. 누구보다도 뢰헌의 마음이 천만길나락으로 무너져내리는듯 하였다.
왜놈들이 금부처를 훔쳐간것이 확실해진 지금 자기의 한생이 너무도 허무하게 느껴졌다. 사나이 한평생을 적막한 절속에서 썩여버리는것이 아까와 무엇인가 후세에 길이 남을만 한 큰일을 해놓고싶던 뢰헌이였다.
그런데 그놈들은 그에게서 어머니만을 앗아간것이 아니였다. 나라와 백성들을 위해 사나이의 한생을 떳떳이 바쳐보려던 한가닥의 크지 않은 희망마저 앗아간것이였다. 왜놈들을 섬에 마음대로 드나들지 못하게 하였다면 이런 일도 없었을것이라는 가슴저린 후회가 밀려들었다. 금부처를 찾기 전에 섬을 지켜야 했던것이다.
허물어지는 집을 지킬 생각은 하지 않고 그 집안에 숨겨둔 물건이 성할것만 바라온 자신의 처사가 더없이 어리석다는 생각도 들었다.
(저 안룡복이라는 젊은이가 스스로 섬을 지켜나선것은 천백번 옳은 일이였구나. 나라를 지키기 전에는 내 생활, 내 운명을 지킬수 없다는것이 수수천년 흘러온 세상의 리치였던것을 아, 내가 왜 깨닫지 못했던가!)
뢰헌의 가슴속에서는 때아닌 봄우뢰가 온 넋을 뒤흔들며 세차게 울려지나가고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