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 장 먼 수평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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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포구는 사철 붐비지 않는 때가 없었다. 크고작은 고기배와 짐배들이 쉴사이없이 드나들고 태화강과 어련천어구까지 배들이 빼곡이 들어서서 물건을 싣고 부리웠다.
더구나 령남일대를 휩쓸던 기근이 절정을 이룬 춘궁기여서 굶주린 사람들이 저마다 포구에 쓸어나와 먹을것을 구하는 까닭에 사람과 배로 포구는 터질듯이 복작거렸다. 달구지를 끌고온 소들과 부담짝을 지고온 말과 하늘소들이 울어대는 소리… 무엇이라고 딱히 찍어 말할수 없는 소음이 포구안팎에 꽉 차있었다.
누가 누군지 분간하기 어려울 지경으로 사람들이 복작거리며 밀려다니는데 짐을 이고 진 아낙네들과 아이들까지 사람들사이를 누비며 바삐 오가고있었다. 이러한 혼잡속에서 울릉도로 갈 배를 물색해낸다는것이 조련치 않은 일이였다.
룡복은 어슬녘까지 두루 돌아다니며 살펴보았으나 그럼직한 배가 눈에 걸리지 않았다. 할수없이 계유년 봄에 잠시 들렸던적이 있는 류일천의 고모라는 점치는 로파를 찾아 울산성밖 미나리골로 가보았다. 거기서 뜻밖에도 힘장사총각 류일천이를 만났다. 녕해에서 장사배를 타고 소금 실으러 울산으로 온지 보름가까이 된다고 하였다.
그런데 울산아근에 소금가마가 세곳이나 있기는 하지만 기근때문에 소금조차 변변히 구워내지 못하여 실어갈 소금이 언제 마련될지 알수 없는 형편이라고 하기에 사공들은 다 헤쳐져가게 되였다고 하였다.
류일천이도 배에서 내려 할일없이 며칠째 빈둥거리고있는중이였다.
《그럼, 자네 나와 함께 울릉도로 가세.》
《아니, 울릉도로?》
일천이가 시꺼먼 눈섭을 쭝깃거리며 룡복을 바라보았다.
《그게 정말이우?》
《정말아니면…》
《울릉도에 갔다가 그렇게 큰 고생을 겪었다면서 또 간단 말이우?》
그날밤 룡복은 목침을 베고 일천이와 나란히 누워서 울릉도에 갔던 일과 왜땅에서 겪은 일들 그리고 동래에 와서 겪은 일들을 차근차근 이야기하였다.
《아니? 저런, 죽일 놈의 왜놈들을 그냥둘수가 있소? 울릉도가 저희네 땅이라구? 더구나 내 손에 붙잡혔던 도적 두목놈이 다시 나타나 싸다닌다니 이거야 분통이 터져서 견디겠소?》
누워있던 일천이가 벌떡 일어나앉아서 시꺼먼 눈섭을 푸들푸들 떨며 주먹을 내흔들었다.
《그렇다면 울릉도가 아니라 왜땅까지도 쫓아가서 그놈들의 목대를 아주 비틀어놓아야 내 마음이 편하겠소.》
《잘 생각했네. 년전에 울릉도에 갔을 때에도 많은 사람들이 활과 창을 장만해놓고 맞서니 왜놈들이 섬에 발도 붙여보지 못하구 도망쳤네. 제힘이 제일이네. 누구를 쳐다볼것두 없어. 섬에는 아직도 창과 활이 그대로 있을것이니 그걸 좀더 장만해놓고 섬을 지키다가 왜놈들의 배가 오면 그놈들을 붙잡아가지고 왜땅까지라도 가서 울릉도일을 아퀴지울 생각일세.》
《그런데 왜 울산으루 오셨소?》
《년전에는 좌수영배를 빌려가지고 갔었는데 지금은 수영에서 배를 빌려주려고 하지 않네. 또 울릉도로 갈가보아 겁을 내는 꼴일세. 그러니 여기서 장사배라두 하나 물색해볼 생각이네.》
《좋소. 그럼 래일부터 나두 함께 다녀보겠소.》
《고맙네.》
이튿날 아침 일천의 늙은 고모가 아침상을 차려주면서 룡복에게 말을 걸었다.
《임자가 아직 상투를 못 얹은걸 보니 찾던 처녀를 못 찾았나보네.》
《허허… 세상일이 어디 뜻대로만 된답니까. 그러니 안로인님이 점괘나 좀 봐주시우. 그 처녀가 여직 무사한지… 이번에는 구해낼수 있겠는지…》
《호호… 임자가 늙은 총각이라 내숭스럽기는… 내 그렇지 않아도 우리 일천의 말을 듣고 그동안 점괘를 여러번 뽑아보았네. 임자가 마음먹은 일이 잘되면 처녀두 별일없고 모든 일이 다 잘될거네.》
《허허허… 그러십니까? 정말 고맙습니다.》
말로나마 위로해주려는 늙은이의 마음이 정말 고마왔다.
이날부터 룡복이와 일천이는 함께 포구에 나가서 울릉도에 갈만 한 배를 만났으면 좋을듯 했다. 장사치들은 대개 장사리속만 보이면 아무리 험한 곳이라도 마다하지 않고 나서는 배짱 두꺼운 사람들이기때문이였다.
그러나 장사배는 많아도 다 갈 곳이 정해졌거나 장사짐까지 실은것들이여서 낯도 코도 모르는 안룡복의 말 몇마디를 쫓아서 멀고 험한 길에 선뜻 나서려 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이였다.
지금쯤 전라도 송광사에 가서 뢰헌이라는 중에게 누이동생 진향이를 찾았다는 소식을 전해주려니 했던 리생원이 뜻밖에도 울산포구에 나타났다. 주글주글 구겨진 무명도포에 누런 대삿갓을 쓰고 기다란 대지팽이를 짚은 리생원은 길목에 서서 오고가는 사람들을 살펴보고있었다.
《생원님,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룡복은 일천이와 함께 리생원의 곁으로 다가갔다.
《아니, 룡복이, 임잔가? 그리구 이건 힘장사총각일세그려, 반갑네.》
리생원은 뿌옇게 먼지오른 짚신을 대지팽이끝으로 툭툭 털고나서 저혼자 껄껄 웃었다.
《허허허… 경향편답 20년에 이번같은 걸음은 처음일세. 전라도땅도 흉년이라 송광사에서는 토지 130결에서 북데기만 거두게 된데다가 시주받는 중들이 아무리 싸다녀도 동냥 한줌 못 받는 형편이여서 온 절이 당장 기근을 겪게 되였다질 않겠나.》
《그래, 뢰헌이라는 스님은 만났습니까?》
《배를 끌구 장사를 떠났다는데 어디 가서 만나겠나? 어디로 갔느냐구 주지에게 물으니 아마 울산으로 갔을것이라 하기에 에라, 찾아나섰던김에 울산까지 쫓아가서 만나리라 하구 그길로 돌아서서 왔네만 여기와서두 못 만나면 왕복 천리길이 너무도 허무할세. 허허허…》
리생원이 다녀온 길은 정말 천리길이였다. 동래서 김해가 60리요 김해서 창원, 진해까지가 120리, 진해서 사천, 하동, 광양을 거쳐 순천까지가 240리요, 순천에서 송광사까지가 또 80리길인데 그것을 되짚어오고보면 꼭 천리길이 되는것이였다.
《울산으로 왔다면 여기 있을터이니 찾아봅시다.》
룡복은 진향의 오래비라는 그 장사중이 배를 끌고 장사를 떠났다는것에 부쩍 구미가 당기였다.
잘만 되면 그 배로 울릉도에 갈수 있음직 했다.
세사람은 울산포구안에 들여다맨 배들을 살펴보면서 찾기 시작하였다. 중의 차림을 한 사람들을 찾으면 되겠기에 찾기가 한결 헐하였다.
어떤 배우에서 장삼을 걸친 중이 보이기에 룡복은 급히 다가갔다.
《여보시우, 말씀 좀 물읍시다.》
배우에서 서성거리던 중이 룡복을 내려다보았다.
《그 배가 순천 송광사 배가 아니우?》
《아니, 영주 은하사 배웨다. 송광사배는 왜 찾으시우?》
《찾을 사람이 있어서 그러우.》
《누구신데?》
《뢰헌스님을 찾소.》
《아, 그러시우?》
은하사중은 알만하다는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얼굴에 웃음을 띄웠다. 뢰헌을 찾는걸 보니 장사마련이 톡톡한줄로 짐작하는 웃음이였다.
《저쪽 강어구에 가보시우. 어제까지는 거기 있었소.》
《고맙소.》
강어구에 가보니 과연 배 서너척이 매여있고 강옆 모래불에 중의 차림을 한 사람 서넛이 모여앉아 무슨 의논을 하고있었다. 그중에서 몸집이 제일 큰 사람이 바로 뢰헌이였다.
《뢰헌스님!》
리생원이 큰소리로 부르며 다가갔다.
두사람이 손을 맞잡고 껄껄 웃으며 반갑게 인사수작을 하는것을 모두가 희한한 구경거리처럼 바라보고있었다. 유가의 사람이라면 사대부나 선비나 할것없이 불가의 승려들을 다 《중놈》이라 부르며 천시하는것이 당시의 세속이였다. 그런데 도포를 입은 선비가 먹베장삼을 걸친 중과 막역지우처럼 팔을 부여잡고 껄껄거리며 회포를 나누는것은 과연 이채를 띠는 한폭의 파격적인 풍경이라 아니할수 없었다.
긴 인사를 주고받고난 다음 리생원이 어릴적에 헤여졌다던 누이동생 진향이가 살아있다는것을 알려주자 뢰헌은 깜짝 놀라며 소리를 질렀다.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오니까? 세번이나 그애를 찾으러 가서 기안까지 다 뒤져봐도 없었는데…》
《허허… 교방아전놈들이 그애의 이름을 제멋대로 진향이라 고쳐서 기안에 적어놓았을터이니 그럴밖에 있소? 그러니 오라버니죄도 아니구 동생의 죄도 아니우.》
그리운 동생을 근 20년만에 다시 찾은 기쁨때문인지 비명에 한을 품고 숨진 부모들을 생각한탓인지 뢰헌의 사나이다운 얼굴로 한줄기 더운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리였다.
《고맙소이다. 잃었던 그애를 찾아준것은 전수이 생원님덕분이웨다.》
《아니, 그런게 아니라 사실은 이 젊은이의 덕분이우.》
리생원은 룡복을 뢰헌에게 인사시킨 다음 진향이를 찾게 된 경위를 이야기하였다.
《왜놈들과 다투고 동래읍에 갇힌것은 룡복이 이 사람의 공이겠지만 이 사람의 일을 장하게 여기고 마음속으로 은근히 동정하여 도와준것은 진향이의 올곧고 어진 마음때문이니… 다 나라를 위하구 왜놈을 미워하는 마음이 한곬으로 흘렀던탓에 서로 만난 인연이라구 해야 하겠지. 그렇지 않으시우?》
《참말 그렇소이다. 허허허…》
뢰헌도 거뭇거뭇한 구레나룻을 쳐들고 틀지게 웃으며 룡복에게 고마운 눈길을 보내였다.
비록 머리를 깎고 장삼을 걸치였으나 마음 큰 대장부의 미더운 체취가 풍기는 사람이였다.
《스님, 사실 그 누이동생으로 말하면 나의 생명의 은인이나 다름없습니다. 옥에서 풀려나온 후 길가에서 잠간 만났으나 고맙다는 인사조차 변변히 하지 못했으니 참말 죄송하게 되였소이다.》
《원 그런 말 마시우. 젊은이의 장한 소행이 그애 마음을 그렇게 인도한것인데 은인이구 도움이구 할것이 있소. 그저 고마울뿐이요.》
뢰헌의 시원스러운 대답을 듣자 룡복은 저으기 마음이 가벼워졌다. 말하기도 한결 헐하였다.
《그런데 스님, 장사를 떠난 길이라는데 대체 어디로 가볼 작정이십니까?》
《무명 몇동과 쌀 몇십석을 실었는데 해산물을 바꾸어가지고 충청도나 강원도 오지로 들어가 다시 팔면 줄잡아두 세곱의 리를 볼수 있지요. 그래서 진도나 그 아근 섬으로 나가볼가 하우.》
뢰헌의 일행인 중 다섯사람과 룡복의 일행 세사람은 모두 모래불에 주런이 늘어앉았다. 3월초순이여서 태화강물은 시시각각으로 색이 변하며 반짝거리고 강건너 주진포와 제내포에서 분주히 드나드는 고기배와 장사배들도 아지랑이속에서 끝없이 아물거리고있었다.
《스님, 그 무명과 쌀이 없이도 그만한 리를 볼수 있는데 어떠십니까?》
《아니, 장사야 밑천을 들여야 리도 나는것이지 밑천없이야 장사랄게 있소?》
《그런것만도 아니지요. 귀한 쌀과 무명대신에 약간의 수고와 시간을 밑천으로 들이면 되는 그런 장사도 있지요.》
《허허허… 그것 참, 처음 듣는 소리구려.》
뢰헌은 룡복의 남다른 기질을 가늠한듯 은근한 기대를 가지고 다음말을 기다렸다.
《울릉도에는 더러 가본 일이 있으십니까?》
《울릉도에?》
뢰헌은 전혀 뜻밖이라는듯 매우 놀라는 표정이였다.
《거긴 아직 가보지 못했지.…》
《그럼 울릉도에 한번 가보시지요. 아주 큰 리를 보실것은 내가 분명히 다짐을 두겠습니다.》
뢰헌은 마음속으로 무슨 생각인지 더듬으면서 놀라운 눈길로 룡복을 바라보기만 하였다.
《울릉도에는 어물도 많고 해초와 희귀한 목재도 많지만 특히 해삼, 전복같은 특산품이 많이 나는 고장인데 한번 다녀오면 밑천은 들이지 않고 큰 리익을 볼수 있지요. 만일 가보겠다면 배길은 내가 잘 아니 안내를 맡아나서겠습니다.》
뢰헌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였다. 믿을만 한 젊은이를 만났을 때 울릉도 금부처의 《비결》을 한번 시험해보고싶은 생각이 불쑥 떠올랐던것이다. 물론 울릉도에 가서 희귀한 해산물을 한배 실어오면 리익도 몇곱절로 날것이다. 그리고 울릉도 금부처까지 찾아오면 송광사의 수백년래의 숙제를 푸는것은 더 말할것도 없고 자신으로서도 한번 마음먹었던 큰 일을 해보는것이니 리익같은것은 아주 없다고 해도 별일없다고 생각하였다.
뢰헌은 동료중들에게 의논조로 물었다.
《어떻소? 이 젊은이의 말이 그럴듯 한데 한번 가보는것이 어떠우?》
《밑천 안 드는 장사라는데 그게 좋겠소이다.》
룡복의 말을 듣고 부쩍 호기심이 난 다른 중들도 이구동성으로 찬동하였다.
《그럼 이 젊은이를 따라가기로 하세.》
뢰헌이 룡복의 손을 덥석 잡고 흔들었다.
《잘 생각하시였습니다.》
룡복이도 기쁨에 넘쳐 손을 마주잡았다.
옆에서 보고있던 리생원의 낯빛도 환해졌다. 갑자기 젊음이 되살아난듯 했다.
《이 사람, 룡복이! 사회복연이라구 식은 재가 다시 탄다는 말이 있지 않나? 내 비록 늙은 몸이지만 함께 가고싶네. 먼바다가운데 있는 땅일망정 제 나라 땅인데 이런 때를 놓치면 언제 가보겠나? 뢰헌스님도 내가 가는걸 마다하지 않을듯 한데 의향이 어떠시우?》
《허허허… 소승은 정말 반갑소이다. 그 풍류기개가 부러울뿐입니다.》
이렇게 되여 일행은 송광사중 다섯에 사공 네사람, 룡복이와 일천이, 리생원까지 모두 열둘이나 되였다. 그런데다가 이미 동래에서 약속이 있은 룡복의 친구들 넷이 더 와서 일행은 열여섯으로 불어났다.
이튿날 뢰헌은 룡복에게 떠날 준비를 맡기고 누이동생을 만나기 위하여 동래로 떠나갔다가 사흘만에 돌아왔다. 성미 과묵한 뢰헌이였지만 진향이를 만나고 오더니 오래도록 룡복이와 마주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애가 어찌나 붙들고 우는지 나두 가슴이 다 녹아내리는것 같았소그려.》
《나를 야속하다 하지 않던가요?》
《총각이야기도 많이 하데. 몇해전 총각이 동래부사에게 울릉도를 지켜야 한다고 청하는것을 본 그때부터 그애가 생각이 깊었던가보네. 그러다가 총각이 죄없이 옥에 갇힌것을 보자 마음 달랠길이 없어서 당돌한짓을 한 모양인데…》
뢰헌은 잠시 생각깊은 눈길로 배전에서 철썩거리는 물결만 바라보고있었다.
《그애 이야기를 듣고보니 나두 총각이 울릉도로 가려는 마음이 대강 짐작되네. 젊은이의 일을 도와달라는 그애의 간절한 부탁을 무심히 들을수가 없었네.》
《고맙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스님께 말씀드리려 했는데 이미 알고오셨으니 구구히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제가 울릉도일때문에 왜땅에 가서 태수들도 만나보고 왜놈들의 온갖 간사한짓을 다 겪으면서 뼈저리게 느낀것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마음을 굳게 먹고 힘을 합쳐 나서지 않으면 조상대대로 물려오던 제 나라 섬을 영영 잃고맙니다. 수천년력사를 가진 우리 나라가 섬오랑캐들에게 령토를 앗기운다면 이런 수치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저는 아는것도 없고 힘도 없지만 이 땅에 태를 묻은 사람으로서 이 사태를 그저 보고만 있을수 없습니다. 목숨을 바치는 한이 있어도 이번에는 왜놈들의 흉계를 기어이 꺾고야말겠습니다. 스님께서 많이 도와주리라 믿습니다.》
《젊은이의 마음은 알만 하네. 나도 어차피 주지님의 부탁을 받은바있기에 한번은 꼭 나서려던 길이니 함께 가보세. 천한 장사에 몸을 잠근 사람이라 크게 도울 힘은 없네만 배는 아주 맡길터이니 마음대로 쓰게.》
시원스러운 대답에 비해서는 뢰헌의 낯빛이 그리 밝지 못하였다.
룡복은 무엇인가 이상한것을 느끼며 물었다.
《그런데 주지님의 부탁이란 어떤것인가요?》
그러자 뢰헌의 얼굴에 당황해지는 빛이 떠올랐다.
《그건 차차루 이야기하세.》
뢰헌은 더 이야기하기를 피하면서 가지고온 큼직한 보퉁이 하나를 룡복에게 내밀었다.
《이건 그애가 보내는 물건인데 성의로 알고 받게.》
보퉁이를 받아든 룡복의 눈앞에는 진향이라는 기생의 얼굴이 어슴푸레 떠올랐다. 저도모르게 버릇된 그 애절한 웃음이 비낀 희맑고 아름다운 얼굴, 상세히 다 기억할수는 없었으나 눈앞에 떠오르는 그 모습은 어쩐지 쓸쓸하고 애절한 모습이였다. 사나운 폭풍우에 시달려 꽃잎은 찢기고 흩날려도 아름다운 향기만은 앗기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며 흐느끼는 외롭고 애처로운 한떨기의 꽃송이였다.
진향이의 그 향기로운 마음이 담긴 저 보퉁이!
룡복이가 차마 보퉁이를 풀지 못하고있는데 일천이가 다가와서 말없이 벙싯 웃더니 보퉁이를 풀었다. 보퉁이안에는 갓, 망건으로부터 갖신과 버선에 이르기까지 빠짐없이 갖추어진 의관일습이 들어있었다. 두벌이였다. 의복감도 호사하는 량반들이나 입을만 한 진솔무명이고 갓은 포립이 아니라 진사립이였다.
《아니, 이게 뭐요? 관복이 아니우?》
룡복이도 저으기 놀랐다. 하지만 길가에서 만났던 날 하던 말을 생각해보니 진향이가 배군인 자기에게 관리의 의관일습을 보낸 뜻을 어렴풋이 짐작할수가 있었다.
《그것 참 희한하우. 룡복형님이 이걸 입으면 뭐가 되겠소? 허허허… 상투도 없는데 망건은 무엇이구 갓은 다 무엇이우?》
일천이가 몸집을 들썽거리며 웃어대는 바람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야, 그것참, 알뜰히도 지었구나!》
《헌데 배눔이 저걸 입구 노를 젓다니… 거적문에 쇠배목일세.》
《아마 그런것도 아닌것 같네. 뜻이 깊은 물건이네. 저 옷을 입을 진짜관리는 당신이요 하는 뜻일세. 썩은 량반들에게 저 옷을 입히기는 아깝다는 뜻일세.》
《듣고보니 그게 비슷하네…》
모두가 중구난방으로 떠들며 껄껄거리였다. 룡복은 보퉁이를 도로 싸서 일천에게 주면서 빙그레 웃었다.
《어쨌든 쓸데가 있을테니 잘 건사해두게. 저 옷을 입으면 자네두 량반이 되는걸세.》
《내가 량반이 되다니? 그런 변날 소릴 하지 마우.》
《허허… 어째 그렇게 놀라나? 량반과 상놈의 차이가 하늘땅같아두 사실은 옷 한거죽차이밖에 안된다네. 녀인네도 아는 세상사를 자네가 왜 모르나?》
《아니 그건 또 무슨 소리우?》
《허허허…》
룡복은 껄껄 웃으며 떠날 준비를 갖추고있는 사공들쪽으로 걸어갔다.
그날 한낮때까지 떠날 준비는 다 갖추어졌기에 이튿날 새벽에 돛을 올리기로 하였다.
험하고 먼바다로 나가느니만치 기어이 기풍제를 올려 순풍을 빌어야 한다고 하기에 그렇게 하기로 하였다.…
룡왕제를 마치고나자 벌써 동녘이 희붐히 밝아왔다. 하늘이 건듯 들리고 마파람이 가늘게 불었다. 때맞추 불어주는 바람이였다.
돛을 올린 배가 처용암을 옆에 끼고 난바다로 나서기 시작할 때 날은 아주 희뜩 밝았다. 개운포 가리산봉수대에서 가늘게 피여오르는 연기는 점점 뒤로 멀어지고 천내산봉수대의 연기가 왼편으로 가까와지다가 그도 오래지 않아 멀리 뒤로 흘러가버리였다.
룡복은 새벽을 맞아 잠을 깨며 일어서는듯 한 끝없이 맑고 깨끗한 조국산천을 바라보며 오래도록 배우에 서있었다. 새움이 터올라 푸름푸름 봄빛을 띠여가는 산줄기들… 바다가벼랑에 떨기떨기 피여 불타는 진달래… 얼마나 아름다운 산천인가!
낯설은 왜땅에 머물러있던 그때, 그토록 못 견디게 그리워진것은 무엇때문이였을가.
룡복은 멀어져가는 푸른 산발들을 바라보면서 울릉도의 수려한 산과 바다와 시내물들을 마음속으로 그려보았다.
저 푸르디푸른 파도를 넘고 또 넘어가느라면 바다우에 아름다운 울릉도가 두팔을 벌리고 반겨오리라. 이제는 다시 볼수 없는 그리운 아버님과 어순의 부모님들이 누워계시는 거기― 무성한 참대숲, 동백나무숲이 사철 푸르러 설레이는 그 섬, 거기서 흐르고 출렁이는 시내물과 바다물은 그 방울방울이 다 내 몸을 씻어주며 내 넋을 키워준것이고 거기서 지저귀는 새소리는 그 마디마디가 다 노래소리마냥 내 가슴에 깊이 새겨진것들이다.
나지막한 언덕우에 조용히 싹터난 한포기의 풀에도 바다가에 무심히 나뒹구는 한알의 조약돌에도 어순이와 나눈 아름답고 령롱한 앞날의 꿈이 서려있다.
그것은 잊을래야 잊을수 없고 순간도 떨어져서는 살수 없고 천만금을 준대도 바꿀수 없는 생명이상의 그 무엇이였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풍랑사나운 이 길을 얼마이고 기꺼이 걸으리라. 룡복의 옷자락이 거세게 퍼덕이였다.